1. 여행경로를 짜고나서 본격적인 여행준비에 들어갔다. 처음 여권을 받아들던 날은 주민등록증을 처음 받았던 날처럼 흥분되던 날이었다. 성인임이 즐거웠기 때문이라기보단 공식적으로 무언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흥분케 했듯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 나를 흥분케 했다. 잠시나마 나 자신의 상황을 잊을 정도로. 그날 실감했다. 자신의 존재를 잊을 정도의 흥분, 이것이 여행을 떠나는 묘미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고.
2. 중국과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는 모두 비자를 필요로 하는 나라. 여행사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직접 해보고 싶어 중국과 몽골은 대사관으로 직접 찾아갔다. 중국- 몽골간의 왕복을 염두에 두고 3달짜리 복수비자를 발급받았다. 중국대사관: 765-9553 3만원. 몽골- 한달짜리 단수 비자. 한남동에 있는 대사관은 찾기가 어려워 물어물어 찾아가서 발급받았다. 몽골: 794-1951,1350 3만8천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는 비자를 받기 위해선 초청장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할 수 없이 여행사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본토에 거주하는 인물과 친인척 간이거나 관계를 증명해야하는 복잡한 서류를 만들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행사는 세명투어: 732-2070 로 나는 각각 1달간의 비자발급을 신청했다. 초청장 비용포함하여 카자흐스탄 9만원 러시아 15만원.
비용이 추측했던 것보다 많이 나와 무비자인 다른 곳으로 갈까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연하게 결정한 목적지였음에도 가야할 곳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곳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괴롭힌 건 비용뿐이 아니었다. 여행에 미숙한 고로 여행 한달전에 비자발급을 받으면 충분하겠지 짐작했는데 비자발급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었다. 러시아는 2주, 카자흐스탄은 1주, 몽골, 중국은 3일씩 여권은 하나인데, 비자발급은 1달도 빠듯했다. 각 나라마다 다른 working day 계산법에 전승기념일, 축제일 등 공휴일은 왜그리 많아서 날 괴롭히던지. 비자를 쫓아다니다가 한달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3. 네 나라들이 모두 입국과 출국 날짜를 엄격하게 써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비자발급을 받으면서 여행경로도 점차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춰갔다. 중국은 몽골을 포함해서 5월부터 약 한달남짓하여 베이징을 거치는 실크로드 루트로, 카자흐스탄 역시 한달을 중국에서 기차로 넘어가서 남부부터 종단으로 통과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기차로 뻬쩨르부르그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 시베리아 횡단이 될 터였다. 역시 한달간.
4.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비자발급을 대행하는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초청장말고도 '바우처'가 필요하단다. 바우처는 여행자가 머무를 도시의 목록을 기재하는 것으로 일명 '거주지등록'이라고 한다. 여행자가 갈 수 있는 도시는 한정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어디를 원하는지 적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예상치못하게 여행일정을 미리 짜는 셈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구소련 국가들에 안가는 이유가 이런거 때문이었나, 한숨이 나왔다. 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책자와 인터넷을 뒤지면서 되도록이면 많은 도시 이름을 마구마구 적어넣었다. 바우처에 적힌 곳에 모두 가야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선택지를 만들면 되지, 나는 오기부리듯 괜찮아, 좋아, 를 연신 중얼거렸다.
5. 잔뜩 적힌 도시명을 들고 여행사에 들러 바우처신청지에 옮겨적었다. 여행사 직원은 날 보자마자 물었다. "왜 카자흐스탄이랑 러시아에 가려고 하는거죠?" 나는 설명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말을 잇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환상을 갖으면 안되요. 가지 마세요."
여행사직원이 여행가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잠시 할말을 잃은 채 그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경찰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때리고 돈을 뺏어요. 인종주의자들이 한국유학생을 괴롭히는 것도 너무 유명해요. 러시아어를 못하면 하루도 지내는게 힘들껄요. 할줄 아세요? 러시아어, 나라도 가난해서 모든게 열악하죠. 기차를 타고 있으면 뛰어내리고 싶어져요.-..."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어지는 말 속에서 생각했다. 어짜피 표류하러 가는 건데, 철저한 이방인이 낫지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는 마음을 정한 이상 바꾸는 것이 싫었다. "괜찮아요. 가보려구요."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기다려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도 더이상 말리지 않았던 것은 분명 내가 기어이 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SARS.
내가 여행을 준비한 시기는 2003년 봄이었다.
그 해는 나만이 아니라 여행을 가려고 했던 누구든지, 아니 여행을 가지 않은 누구라도 기억할 만한 이슈가 있었다. 동남아에서 시작한 급성호흡기 증후군이 봄날씨를 타고 하루가 다르게 북상하고 있을 때였다.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에 '그 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왠지 굉장히 빛바랜 무언가를 들추는 느낌이 들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여행은 그 때, 그 해, 그 시절 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어울린다. 2년이든 10년이든 20년이든, 내가 느끼는 일상의 흐름과 분리되어 던져진 시간이니까, 여행하는 그 순간의 시간은 어느 때와도 다른 결로 흘러간다.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반짝이는 순간이 된다. 물론 그것은 지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만. 여하튼, 당시의 SARS는 반짝이는 순간을 선사하기 보단 기어이 꼬이고 마는구나, 첫여행의 불안함을 현실화시켜주는 날벼락처럼 여겨졌다고 하는게 더 적절할 거다.
중국으로 가는 배삯을 알아보면서 싼값에 같이 표를 끊기로 한 모든 이들이 거절을 통보해왔다. 상하이, 베이징을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이미 학교는 휴교령이 내린 뒤였다. 나는 매일 신문과 인터넷을 뒤적이며 동정을 살피고 중국민박 커뮤니티에 하루에도 몇번씩 들어가 여행자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직접적인 제재가 없는 이상, 가고 싶었다.
5월 첫주, 중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일주일 전. 마지막 남았던 동행이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보건소에서 근무를 마치고 이제 막 긴 아시아 여행길을 떠나려던 이였는데, SARS로 여행경로를 바꾸기로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SARS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면서 나 역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메일을 받고서는 꼬박 며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현지에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버틸지라도 한국에선 상황이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결정타는 어머니였다. 내가 먼 타지에 가는 것까지는 양보하더라도 당신이 걱정이 되어 전염병이 돈다는 그곳으론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막아서셨다. 언제나 날더러 잘한다, 잘한다 하시는 어머니가 막으시니 내가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결국, 여행은 중국- 몽골을 포함해서-에서의 한달을 버린 채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해야했다. 중국, 몽골, 너희를 돌아보지 못하고야 마는구나. 억울하고 아쉬웠다.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나를 끌고온 에너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5월 내내 허송세월을 보내며 빈둥대다가 6월에 여행길에 올랐다.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배도, 기차도 탈 수 없었기에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 air Kazakstan 항공. 편도(학생할인) 44만원.
여행준비3 - 카작과 러시아 여행을 위한 팁.
1. 초청장/바우처/비자 - 2003년 당시 초청장과 바우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하는 것 이외에는 불가능했다. - 구소련권 국가들의 영사업무는 몹시 느리므로 충분히 여유를 두어야(약 3주 정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 여행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 바우처에 자신이 가고싶은 곳 + 경유할 때 묵을 곳을 넉넉히 적어두어야 한다. 현지경찰이 여행자를 마주치면 자주 불심검문을 하는데, 그때 바우처에 등록되지 않은 도시에 있다면 벌금을 물거나 심하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 비자날짜 역시 정확하게 기재해야 한다. 두 나라 모두 땅이 넓어서 이동하는 시간이 매우 긴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 기차여행 같은 경우, 국경을 넘는 날짜가 비자의 한도기간 이후가 되면 역시 벌금을 물거나 억류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2. 환전 - 한국에서 카자흐스탄 화로 환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러시아는 환전 가능하더라도 아무도 환전하지 않는다. 보통 us달러화로 환전하여 현지에서 그때그때 현지에서 바꾸어 쓴다. 현지인들도 역시 달러를 환전하여 생활하는데 익숙하며 환전상이 거리에 넘쳐난다. 2003년에는 달러약세와 유로화 강세로 현지인들은 대부분 유로화로 돈을 보관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었다.
3. 여행용품 - 카자흐스탄 6-7월의 카자흐스탄은 건조, 스텝기후라 한다. (겨울은 -40도를 넘나든다.) 실제 30-40도를 넘나들지만 그늘은 매우 시원하고 건조하다. 짧은 여름옷/해떨어진 후에 벌레가 몹시 많아 얇은 긴팔 점퍼와 바지가 좋다. - 러시아 7-8월은 한창 더운 여름이었다. 뻬쩨르부그르, 모스크바등의 서러시아는 3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 역시 그늘은 시원하다. 동쪽으로 향할수록 서늘해져서 일교차가 큰 봄날씨와 비슷하다. 옷을 겹쳐입을 수 있는 긴팔 라운드티 하나정도 있으면 유용하게 써먹는다. - 생리대, 건전지는 사가야한다. 매우 비싸기도 하고, 디카를 견딜 정도로 제대로된 건전지가 아니라 대부분 가짜다. 잘못하면 디카를 고장낼 수도 있다. 참고로 나는 samsong이라고 쓴 건전지를 신기해서 택했다가 디카가 한동안 작동하지 않아서 마음을 잔뜩 졸였다. - 몇군데의 대도시를 제외하고 카작, 러시아 모두 공산품의 종류가 적고 질도 나쁜 편이다. 게다가 대도시의 공산품은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게 좋다. - 여행하면서 유용하게 써먹은 것 : 다용도 칼 - 빵, 소세지, 치즈 등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먹을때 편하다. 특히 기차여행시 준비해간 여러종류의 차 티백들 - 어디서나 차이를 먹는 경우가 많다. 역시 기차에서 유용 여러크기의 비닐봉지 - 기차여행시 음식을 보관할때, 물건보관할 때, 유용하게 썼다.
4. 숙박. - 카작과 러시아는 배낭여행자들이 숙박하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여행자가 여행지에 도착하면 2일 내로 '거주등록'을 해야하는데, 이것은 외부인으로서 자신이 거주할 곳을 알리는 것이며 거주비용을 내야한다. 거주등록을 해주는 곳은 보통 비싼 호텔이나 대행여행사 등이며 도시마다 다르다. 자신이 등록한 곳에서 묵지않으면 벌금, 구류조치가 취해진다고 한다. 실제 대부분의 경찰들이 여행자를 불시검문해서 거주등록증과 바우처, 여권을 확인, 세가지가 갖춰있지 않으면 돈을 뜯어내거나 심하면 위협, 구타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 배낭여행자가 묵을 수 있는 곳은 민박이 대부분이다. 민박에 묵으면 거주등록을 본인이 해야하므로 잊지말고 주의해야한다. 민박집은 주로 다음카페의 도시명으로 확인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 나는 실제 민박은 거의 하지 않고 현지에서 살고있는 한국인, 현지인들의 집에서 묵었다. 러시아 정보를 구하면서 알게 된 러시아 유학생들의 아파트에서 묵기도 하고, 누군가가 남긴 여행기에서 알게 된 현지의 고려인 집에서 묵는 등 좀더 현지인들과 가까운 생활을 보고 느낄 수 있으서 좋았다. 물론 더 싸기도 했고.
5. 여행자료 *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는 여행정보가 유럽과 같은 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러시아어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지라 더욱 자료를 찾는 것이 어려워 헤매기도 많이 헤맸다. (구소련 국가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를 쓴다.) 나는 여행사 직원에게 부탁하여 알게 된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메일주소로 가기전에 궁금한 것과 필요한 것들을 묻고, 러시아의 한인커뮤니티 사이트, 유학생 사이트를 주로 참고하였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과 유학생이 갖고 있는 정보가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하므로. 다시 둘러보니 2003년 당시에 비해 현재는 여행책자나 정보가 훨씬 풍부해진 것같다.
- 구체적 여행정보 얻은 책 : 세계를 간다 해외여행 가이드, 러시아와 구소련편. - 94년판이라 구체적 정보는 무리. lonely planet , 시베리아횡단열차편. - 순간순간 필요한 정보가 모두. 가치를 실감했다. 론리만 들고 갔다. - 여행준비하며 읽은 책 중 추천할 만한 것들: 최성민 자연주의 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편. 최성민. 우리는 지금 시베리아로 간다. 김산환. 중국기행(러시아에서 시베리아열차로 출발). 폴 써로우.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 이야기 러시아편. 유시민 역 바이칼. 김종록. 러시아 소설 및 시들. 참고로 러시아 작곡가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등-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라 mp3로 가져가서 풍광을 보면서, 기차에서 자기전에, 듣는 맛이 참 좋았다. - 러시아어 회화책 : 러시아 여행회화. 쉽고 빠른 러시아어 회화. - 인터넷 정보 : 1) 배낭여행의 전체적 정보 쁘리띠님의 떠나볼까. www.prettynim.com. 여행초보자를 위한 정보부터 여행감각을 위한 팁까지. 모두 풍부. 세명투어 www.russiago.com.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에 대한 기본적 여행정보. 2) 카자흐스탄 대사관, 항공사, 여행사 사이트 등. 구체적 여행정보 거의 없다. 3) 러시아 daum 러정마(러시아정보마당)카페- 가입자 최다. 정보풍부. 업데이트 빠름.
daum 러시아간다 카페- 정보풍부. 업데이트가 빠름. 유니러시아 www.unirussia.com - 러시아정보 포탈사이트 2003년에는 현지인 위주였지만 2005년 현재 여행정보풍부. 여행책자까지 발간 러시아한인 커뮤니티 koru.org. - 현지거주 한인 모임으로 질문에 답변 빠름. 영어사이트. www.hostel.ru. - 모스크바, 뻬쩨르, 이르쿠츠크 숙박예약가능. www.interknowledge.com/russia - 러시아 여행정보. www.russia-travel.com - 상세한 러시아 도시 지도 /지하철 지도 제공.
출발.
아침에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났지만 진작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내 몸이 분명 느끼고 있다. 나는 긴장했다. 며칠 새 몸무게가 2kg이나 빠졌다는 걸 뭘 뜻하겠는가. 긴장한 내 자신에게 새삼스레 나도 놀란다.
* * *
출발하기 20분 전. 지금은 비행기 안이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 정말 기묘한 느낌.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약간의 멀미를 할 것 같은 안좋은 예감. 좁고 답답한 느낌의 기내에 의자마저 답답하다. 이게 소위 노린내라는 걸까? 기내의 3분의 2밖에 없는 인원임에도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랜시간 묵혀둔 땀냄새처럼 퀴퀴하고 기분나쁜 냄새.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기분최고다. 기내는 조금 소란스럽고 나는 혼자 앉아 창가를 보고 있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새로운 긴장상태, 새로운 흥분상태로 몰아넣는가보다.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의 그 신나는 기분. 첫 MT, 첫 여행의 그 느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귈 때 느끼던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던 그 느낌. 그 기분을 지금 다시 맛보게 되다니. 잊고 있었던 이 기분. 좋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 문득 깨달은 이 느낌을 음미하고 싶다.
출발 5분 전. 긴장해서일까? 속이 안 좋다. 이륙을 알리는 방송을 하고 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고 있다. 활주로가 이렇게 넓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륙을 위해 속력을 내는 중. 4시 37분. 이륙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이 들떠서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일상이. 나의 고민이. 심지어 너조차.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비행기가. 점점 속도가 높아간다. 굉음…. 떠오른다! 날아올랐다!

구름 위로! 구름이 만들어놓은 지평선 위로, 그 구름의 대지 위로 날아올랐다. 구름의 대지 위에, 펼쳐진 하늘. 너무나 아름답고 밝다. 밝은 빛!

내 눈 앞에서 구름들이 이동한다. 구름의 대지. 구름 속의 대기. 구름 속의 하늘. 하늘. 정말로 푸르다. 하늘빛. 하늘 빛. 하늘…빛. 빛 속을, 구름의 대지를, 그의 하늘 속을 달려가고 있다. 아니, 빛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6시 되기 5분전. 아래로 땅이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중국인 듯 하다. 기하학적 선들로 가득 차서 크기가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토색 대지. 그리고 길게 뻗은, 교차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줄기. 아직도 나는 빛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여기 이 중국땅은 이제야 오후일 것이다. 저 수없이 많은 직사각형들은 모두 밭일까? 아니면 논? 아니면 공장? 무엇이든 간에 사람의 손이 닿은 것만은 분명하다. 저 거대한 넓이. 가공할 만한 땅덩어리임을 실감한다. 여기서 보니 구름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우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땅에서는 날씨가 흐리다고 말하겠지. 기묘하다. 이 위치에서 갖게 되는 새로운 시각이 말이다. 몇 십분 동안 게속되는 평지이후에야 산 하나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비행기로 30분이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겠지. 그리고 그 70%가 산지. 중국의 크기를 실감한다. 분명 무슨 산맥인 듯한 곳을 지나가고 있다. 경이롭다. 저 산의 흐름을, 윤곽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계속되는 산맥… 다시 구름과 빛 속으로…. 하늘은 한없이 짙어진다. 푸르다. 코발트빛에 가까운 푸른 빛.

저녁식사가 나온다. fish와 beef. 나는 fish를 선택한다. 소스에 볶은 면과 생선튀김. 빵 한조각. 감자샐러드. 쇼트케익과 커피 한잔. 소스의 맛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맛이 없어 한숨이 나온다. 현재 7시 5분전. 5분의 2정도를 날아온 셈이다. 만리장성을 보는 행운은 없는 걸까? 하고 다시 창 밖 풍경에 골몰한다.
사막인가? 창밖에 누른 빛의 대지뿐이다. 비행이 두시간 반째로 접어들었다. 31500feet. -50℉. 중국대륙 중간지점 통과 중. 스크린에 뜬 글자들을 받아 적었다. 숫자들이 피부로 와닿진 않지만 나는 나름대로 상상해보려 애쓴다. 창에는 얼음이 얼었다. 여행정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다. 비행은 5시간이 아니라 6시간 25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휴, 이런. 3시간을 왔으니 세시간 반이 남은 게다.
끝간데없이 펼쳐진 대지위에 할퀸 듯한 흔적이 물결친다. 그 연약해보이는 줄기들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길’이다. 아까 보았던 것보다 더 거대한 산맥의 바다를 건넌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번 기묘한 느낌이 든다. 나의 하루하루, 내 세계를 복잡다단하게 심판하는 인간의 세계라는 것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무렇지도 않게, ‘참 보잘 것 없군.’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그 세계에 짓눌릴 것 같아 허덕이던 순간들이 거짓말 같다.
이국과의 첫대면.
창밖에 골몰하다가, 앞 의자에 달린 작은 간이 테이블을 열어 글을 쓰다가, 그것도 더 이상 못하겠어 머리위로 매달린 모니터 속의 영화를 들여다보았지만 곤란하게도 러시아어다. 분명 할리우드 영화인데, 러시아어를 하고있는 화면속 인물들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 나는 그냥 그들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상황일까 상상력을 한껏 높이는 수밖에 없군,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카작항공 승무원들이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준다. 러시아어로만 표기된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 출입국신고서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갑자기 당혹감이 밀려온다. 나는 몇가지 인사말과 숫자 읽는 법을 알고 있는게 고작이다.
그때의 난 예상치못한 상황에 직면해서 당황했을 뿐 이후로도 언어가 날 그렇게 완벽히 가두어둘 줄은 몰랐다. 나는 그것을 시작으로 그토록 원하던 고립감을 철저히 맛볼 수 있었다. 그것도 여행 내내. 고립을 위한 여행의 목적지로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도가 지나쳐 급기야 돌아와서도 혼자 있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로.
입국신고서를 쓴다. 음. 머리를 짜내고 나서 한다는 것이 고작 숫자를 쓰는 것. 옆 사람들에게 영어로 물어봐도 묵묵부답, 간혹 있는 한국인들도 나와 별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여기 왜 왔을까, 뜬금없이 의문이 솟는다. 나처럼 고립되기 위해? 하지만 무리가 모여있는 걸. 그렇다면 왜? 언어소통도 잘 안되면서 여기까지 찾아온걸까? 계속 생각하는 와중에 승무원이 지나쳐간다. 그가 설명해줘서 간신히 그제서야 해결을 한다.
한국시간으로 밤 열시. 하지만 아직도 날이 밝다. 그래서일까 눈이 아프다. 10시 5분. 아마도 천산산맥-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을 이루는-일까? 눈덮인 산이 웅장하게 느껴지기보단 장난감같은 건 비행기 탓일게다. 여태껏 지나온 황토빛 굴곡과 달리 녹색으로 뒤덮여 마치 융단같다. 산정상의 눈 때문에 더욱 싱싱해보이는 녹색융단. 손을 놀리느라 많은 창밖풍경을 놓쳐버렸다. 이런. 비행기가 착륙준비를 하고 있다. 방향을 돌리고, 해가 내 얼굴로 쏟아져들어온다. 이곳은, 태양이 지고있는 시간인 것이다. 뜨겁다.
Almaty알마티. 푸른 초원사이를 가로질러 놓인 활주로가 인상적이다. 목초지에 온 듯 지는 석양이 깔리는 초원 한 복판에 덩그러니 내려 서 있으니 미니버스가 우리를 데리러 천천히 미끄러져온다.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음과 초원. 이국과의 첫대면이 마음에 든다.
직사각형의 낡은 건물 하나가 서있는 곳에 미니버스가 도달했다.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입국신고서를 내고 가방과 짐을 찾는다. 출구쪽으로 줄을 선 사람들 뒤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보니, 나가기 전에 세관신고를 하고 있었다.
세관신고원은 내 여권과 비자를 훑어보더니 세관신고서를 흔들어댄다. 내 영어를 알아듣는데, 그가 말하는 영어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는 화를내며 소리치고 나는 다시 묻고 그는 다시 으르렁대고를 반복한다. 언어의 고립감이 불안감이 되고 다시 둘러싼 이들의 눈초리가 두렵게 다가와 몸이 굳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섭다. 돈을 보여달라고 한다는 걸 알고 뭔가 의심스러워 10달러짜리 열장을 보여주니 냉큼 10달러 지폐한장을 빼앗아들고는 흔들어대더니 나가라고 손짓한다. 내 돈을 달라는 말에도 그는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묘한 웃음을 흘린다.
뒷사람들과 그 세관원에게 등떠빌려 나오면서도 나는 몸이 굳어 화도 내지 못한다. 당하고 있다는 느낌. 이 불쾌함.

그 순간 또 한번 무리가 나를 둘러싼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눈. 일제히 뻗은 손들이 내 팔을, 내 옷을 잡아당긴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들이 자기 차를 타라고 호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어 모두 뿌리치고 한모퉁이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혼자 던져진 기분. 불안한 마음과 해방감. 외롭고도 기쁜, 복잡한 느낌.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쉰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그제야 눈에 주위가 들어왔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대학선배 H. 그가 나오는 사람들을 살피며 서 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게다.
TV에서 흘려보았던 70년대 풍의 거리. 차 역시 70년대 구형이다. 아주 오랜시간 서 있었을 나무와 건물들, 유럽에 가보지 않았지만 동양보다는 유럽쪽에 가까운 거리를 스쳐지난다. 그리고 사람은 2003년을 살아간다, 고 문득 생각하며 차창의 바람을 맞는다. 나는 KOICA 단원인 H선배와 그의 동료의 집에서 임시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들 말로는 여행자들은 흔히 세관원에게 돈을 뜯기고, 10달러면 적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한 관행에 당한 게 못내 찜찜하다.
잠시 레스토랑에 들러 요기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현지에 익숙해진 선배와 그 동료는 별 감흥이 없어보였지만 나는 이국에 왔음을 실감했다. 음식이며 분위기이며 모든 것이 다른 문화를 접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 누워서 오늘을 돌아본다. 이렇게 까만 어둠은 오랜만이다. 들어올 수 없는 세계 속에 몰래 살짝 들어와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에 어둠 속에서 혼자 슬며시 미소지어본다.
알마티(1)
다음날 아침.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거주등록. 여행자는 ovir에 2일내에 거주등록을 해야한다. 시내에 있는 골든투어(3272-736-337)에 가서 거주등록을 부탁하고 길을 나섰다.
어떤 정보도 없이 새로운 도시에 서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우선 서점에 들러 도시지도를 찾아보고, 환전을 해서 돌아다닐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아침나절은 알마티에서 가장 큰 빤삘로바 공원과 바자르(시장)를 찾았다.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이 보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거리를 걷고 두리번거리며 사람들과 뒤섞였다.
서점에 잠시 들러 지도를 보면서 지리를 익혀보고 싶었지만 택도 없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큼직한 도로와 건물, 사이사이의 녹지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벅찼다. 내려꽂히는 태양에 나무그늘 사이를 찾아 걷다보니 좁은 골목에 오목조목 모여있는 건물들 사이를 걷던 어제가 생각나 낯설다. 바로 어제였는데,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괜히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려본다.
도시를 구획하는 큰 거리들이 있고, 그 거리들의 코너에는 거의 예외없이 공원이 있다. 광장의 문화로군, 생각을 하며 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의 널찍한 공터엔 사람들이 제각기 모여 웅성이는 풍경. 판필로바 공원은 러시아정교회당과 민속음악박물관까지 있는 거대한 공원이다. 한가로운 사람들, 여유가 느껴지는 와중에 나는 쓸데없는 것이 궁금했다. 왜 일할 시간에 나와있는 사람이 이리도 많을까? 실업률이 높은 것일까? 여유가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하다보니 난 우리나라에서 일할 시간에 공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본 적도 없다. 혼자 실소를 하며 공원을 거닌다. 어쨌거나 우리는 한 공간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즐기는 것에 충실하면 될 뿐이다.
그리스정교회당과 러시아정교회당은 분명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언제나 미술사 수업시간에 슬라이드가 아니면 사진을 통해서 본 것에 불과하지만 그리스 정교회당의 외관은 언제나 심플한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었다. 러시아정교회당은 뭐랄까, 외관이든 내관이든 민속적 색채가 몹시 강하다. 형형색색의 독특한 문양과 장식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두 정교회당은 카톨릭성당이 갖지 못한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아닌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과 여인네들이 향초를 피우는 의식을 행한다. 성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겨 가까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일상을 침범하는 느낌이 들어 나는 그냥 물끄러미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멀찌감치 떨어져 괜히 교회내부를 찍어본다.

공원을 나와 근처에 있는 바자르로 갔다. 어딜 가나 재래시장은 비슷한가 보다. 남대문 시장처럼 꼬불꼬불 좁은 사잇길을 두고 빽빽이 모여있는 작은 가게들이 끝도없이 펼쳐져있고 사람들도 넘쳐난다. 어디서나 물건흥정하는 소리, 행여나 자기 가게 들릴까 싶어 손짓하는 얼굴들이 낯익다. 사람들에 물건들에 눈앞이 팽팽돌아 정신없건만 활기차고 생기있는 모습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나는 그 속에서 손에 쥐고 다닐만한 작은 지갑을 샀다. “스꼴까(얼마)?”, 그리고 숫자 몇마디로 현지인과의 첫 흥정에 성공해서 산 지갑은 삐뚤빼뚤한 바느질에 어설픈 싸구려임에도 예쁘게만 보였다.
바자르에서 산 쌈싸와 딸기를 들고 공원에서 점심으로 먹었다. 후식은 공원에서 돌아다니며 파는 아이스크림. 쌈싸는 속에 야채나 고기를 다져서 넣고 밀가루반죽을 입혀 튀겨낸 것으로 삼각형으로 생겼다. 빵가루를 빼고 튀긴 고로케라고나 할까. 거리를 걷다보면 꼭 보이는 것이 쌈싸와 빵을 파는 작은 구멍가게인걸로 보아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인가보다. 간단한 빵이나 쌈싸, 과일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싸게 팔고 왠만한 먹거리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싼 걸 보니 우리나라에 비해 물가가 싸다는 걸 실감한다. 갑자기 여기서 살고 싶어지는군….
오후에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을 비롯한 번화가를 걷고 남산 케이블카처럼 알마티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꼭주베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흔들흔들한 게 안전점검은 해본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높은 곳에서 아래 내려다보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다 덜커덩거리는 심히 빈약해보이는 박스 속에 갖혀 왕복하며 흡사 고문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알마티 시내를 내려다보니 탁 트인 시야에 한눈에 들어오는 시내며 어스름하게 보이는 천산산맥이며 올라오길 잘했다를 연발하게 된다.



정상에는 카페가 곳곳에 있고 사람들이 조용히 둘셋씩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하루종일 시내를 쏘다니며 어딜봐도 내 눈에는 여유롭게 걷거나 여유롭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만 들어온다. 내가 너무 여유가 없는 곳에서 온 것일까. 여유로운 그 모습들은 여행지 첫날의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의 모습은 어딜가나 비슷하다는 것.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것은 역시 어디서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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