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분리독립운동사
▶ 시작하면서
위구르의 분리,독립 운동은 타 자치구의 분리?독립 운동에 비해 대단히 폭력적이다. 이는 폭력이 국내에서 강압적인 민족 통제가 있는 경우, 조직 적으로 존재가치를 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 이다. 위구르의 경우 티벳과 비교했을 때 티벳과 달리 독립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같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분리?독립 문제를 강력하게 어필(appeal)하게 된 것이다.
▶ 차례 -- 개관 -- 위그루의 환경 -- 우리와의 관계 -- 중국 소수 민족의 정책 -- 분쟁사 -- 다수의 전략과 소수의 대응 -- 위구르의 분리, 독립운동 -- 전망 -- 마치면서
▶ 위구르족의 개관
★ 위구르족의 기원
: 위구르인은 중국내 투르크계 민족으로 처음에 몽골고원을 차지했다가 중앙아시아로 옮겨 활약했던 민족이다. 언어는 알타이어족으로 투르크계 위구르어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유오이(維吾爾)라고 하며, 이슬람교도(muslim)이기 때문에, 고차(高車), 위흘(韋紇), 회흘(回紇), 회골(回골) 외오아(畏吾兒)라 불렀다.(1)
위구르인은 몽골에서 남시베리아에 널리 산재해 있던 고대 투르크계 유목민의 하나로, 돌궐을 이어 744년에서 840년 까지 몽고에 유목국가를 세웠다. 초대 쿠틀루크 빌게쿄르가 우추켄 산록을 근거지로 삼은 시기부터 그들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2대째인 갈근가오(葛勤可 ) 때에 안사(安史)의 난(775~763) 진압에 협력하여 파병하면서 당나라에 대해 한때 우위에 섰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영내에 바이발리크(富貴城), 오르도발리크 등의 도성을 건설하여 지배층은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제 8대 보의가오(保義可 )의 기공비(紀功碑)인 《카라발 가순 비문》이 주목된다. 이것은 돌궐문자로 된 튀르크어 외에 한문. 소그드 문자로 된 소그드어로도 새겨졌는데, 이런일은 유목 위구르 사회속에 국제적인 상인인 소그드인의 문화가 깊이 침투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 3대 이후 종래의 샤머니즘과는 달리 소그드인의 마니교가 신봉된 것도 그 일례이다. 제 8대 오까지 약 40년간 동투르키스탄에서 진출해온 토볼 및 예니세이강 유역의 키르키즈와 싸웠으나 내분으로 840년 멸망하였다.
남하한 일부는 당나라의 북변에 들어갔는데, 원나라의 옹구드에서 그 후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서하(西河)지역으로 들어간 위구르는 간저우(甘州)를 중심으로 전개하여 1028년 서하에 의해 합병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다른 일부는 서부 텐산 산맥 일대의 카를 루크족의 땅으로 들어간 뒤의 카라한 왕조의 건설에 관계했다고 생각된다. 다른 주력부분은 동부 텐산산맥의 북정(北庭), 언기(焉耆), 고창(高昌)일대를 장악하였으며, 그곳을 거점으로 위구르 왕국을 건설해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했다. 이 텐산북록(天山北麓)초원과 투르판 농경지를 중심으로 하는 <텐산 위구르 왕국(서위구르 왕국)>의 내부에서 언어와 주민의 구성에서 튀르크 문화가 진전되어 종래의 한문화(漢文化)가 아리아계 문화와 혼합된 정착 위구르 문화가 형성 되었다.(2)
12세기 카라키타이에 종속을 거쳐 1209년 칭기스탄의 몽골제국에 솔선해서 신종(臣從)하여 반독립적 지위를 보존한 이 왕국도 13세기 말에는 붕괴되었다.
그 동안에 위구르인은 소그드인 대신에 내륙통상 루트를 제압하고, 원나라 통치에도 인적?물적으로 깊이 관여했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위구르족은 차카타이 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철저히 이슬람화를 심화(深化)시켰으며, 민족적으로도 이슬람적으로 변모 (變貌) 하였다. -------------------------------------------------------------------------- (1) 위구르는 북위시대에는 고차, 수대는 위흘, 당대는 회흘?회골, 송?원대에는 외오아라 불렸다. 투르크는 언어학적으로 '연맹?군집(uy+gur)'의 의미로 해석된다. (2)투르키스탄의 성립 --------------------------------------------------------------------------
▶ 위구르의 환경
★ 자연 환경
: 위구르 족이 사는 신강 위구르 자치 지구는 중국에 속해 있지만 예전부터 이 지역은 유목민(遊牧民)과 한족(漢族)의 패권 다툼이 심했던 곳이다. 흉노족, 돌궐족, 위구르족등이 이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흉노족은 자취를 안 남기고 사라졌으며, 돌궐족은 터키로 갔고, 위구르족이 이 곳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면적 164만 7천㎢로 중국 면적의 1/6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넓은 행정 단위이며 주도(主都)는 우루무치 (烏魯木齊)이다. 신강 내부를 지형에 따라 나눠 보면 북부 고원, 준가얼, 텐산 산맥, 타림 분지 등 5 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북부 고원은 몽골 과의 국경을 따라 반원형으로 뻗어 있다. 준가얼 분지는 북동 쪽?남쪽 ?북서쪽 산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트여있다. 자치구의 거의 1/4을 차지하는 텐산 산맥은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는 긴 빙하가 수없이 많으며 만년설로 덮혀있다. 타림 분지는 3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부의 사막과 고립된 오아시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막은 넓이가 7000㎢에 달하는 완전한 불모지대(不毛地代)이다. 해발 7300m에 이르는 쿤룬 산맥은 자치구 중앙에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장벽을 형성하고 있다. 이 자치구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높은산맥에 의해 폐쇄되어 있다. 기후는 건조한 대륙성 기후이며 강수량도 북부 150~350㎜, 남부 100㎜ 이하로 아주 적다.
국경선 밖을 살펴보면 북동쪽은 몽골, 북서쪽은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남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남동쪽은 서장(西藏) 자치구, 동쪽은 청해성, 감숙성과 접하고 있다.
★ 인문 환경
1) 신강성의 성립
: 신강 지역은 한 무제(B.C 59년)때 서역과 교역로를 트기 위해 이 지역을 장악하여 흉노를 제압한 후, 서역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신강 남부를 지배하게 되어 처음으로 중국의 영토에 들어가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칭기즈칸에 의해 정복 당했으나, 1884년 청의 건륭제에 의해 신강으로 명명(命名)이 되고 다시 중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현지의 반군벌에 의해서 지배가 되어 오다가 1949년 중국 인민 해방군이 주도(主都)인 우루무치에 진주를 하면서 실질적인 중국령으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7년후인 1955년 10월 1일에 자치구로 성립이 되었다.
2) 인구 구성
: 1996년 통계에 의하면 신강성의 인구는 1,605만 명이고 49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위구르족은 748만 명(46%)을 차지하고 있고, 한족 616만(38.4%), 카자크족 118만(7.4%), 회족 72만(4.5%), 몽고족 14만, 석백족 3.6만, 타지크족 3.5만, 민족 1.8 만, 우즈벡족 1.2만, 러시아족 0.48만, 키르키즈족 0.57만, 타타르족 0.41만, 기타 36개의 소수민족이 7.2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
3) 경제
: 신강 지역은 잠재된 자원의 영향으로. 중국 내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신강의 초원 면적이 21억 평으로 중국 초원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어, 면양, 염소, 말, 소, 낙타 등의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양잠 사업 또한 전국 생산량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텐산과 알타이 등의 고산 지대가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산림 자원이 산재되어 있고, '과일구 고장'이라 불릴 만큼 옥수수, 땅콩, 메론, 포도, 사과, 배 , 홉 등의 농산물 이 풍부하다.
또한 이 지역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광산 자원이다. 광물의 매장량은 중국 전체 매장량의 38%를 차지하고 있어, 신강의 철 생산량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많고 베릴륨, 맥운모, 칠레 초석, 고령토, 질석 등의 생산량은 전국 최고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매장량도 중국 전체 매장량의 25%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이 가진 잠재적(潛在的)인 석유 자원에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 (耳目)이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위구르를 중국이 쉽게 독립시키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로, 이 잠재적인 자원을 이용하여 중국이라는 넓은 땅덩어리를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나라와의 관계
: 한반도에 위구르인이 들어온 것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流入)되는 시기인 여말선초(麗末鮮初)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 관리와 함께 원제국의 행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무슬림들은 주로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 주(主)를 이루는데, 몽골이 위구르문을 공식어로 사용하고, 당시 재정(財政)과 교역 행정 업무를 대부분 위구르인이 관장한 결과였다.
흔히 오늘날 덕수장씨(德壽張氏)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회회인 삼가(三哥)는 바로 인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권과 우리 나라의 문화가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1274년 고려 충렬 왕비가 된 원나라 제국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얻어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우리 나라에 동화된 무슬림이었다. 종래 그는 아랍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계 위구르 무슬림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후에 조선조에 사역원(司譯院)의 외국어 시험과목에 위구르어가 포함되었고 공식외국어로 위구르어가 교습되었던 사실이 있고, 세종 이 회회역법(回回曆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역법을 완비한 순태음력적인 칠정산외편이 있다. 이후에도 무슬림과의 접촉이 있었으나 중국내 위구르족과의 왕래는 아직까지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
★ 시기별 민족 정책
1) 제 1 기 (1922~1949)
: 중국 공산당의 시기로부터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에는 소수 민족을 한족의 지배 체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독립 을 명분으로 한 한족의 고립화와 소수 민족의 공산당 가담을 획책(劃策)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민족 정책은 민족의 자치, 민족 자치 권의 보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제 2 기 (1949~1959)
: 중국 공산권을 장악한 이후로부터 티벳에서 반공 폭동이 일어 나기까지의 기간으로 민족 자치 정책을 강조하던 시기이다. 적극 적으로 통일 국가 내의 민족 자치의 형식을 빌어 그들을 포용(包容)하려고 한 시기이다. 1949년 최초로 명문화된 것은 중국의 인민 정치 협상 회의에서 채택된 공동 강령(綱領)이다. (50조, 51조)(3).
3) 제 3 기 (1959~1966)
: 전 대륙의 통일을 꾀한 이 시기는 티벳의 반공 폭동에서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시기로 민족과 민족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통일 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또한 반한(反漢) 민족 집단에 대해 무력 진압을 수행하는 한편, 행정 단위를 개별 민족 지역으로 확대, 정리하여 원활한 민족 관계의 조정을 위해 힘쓴 시기이다. 이와 같이 전 민족 집단에 대한 사회주의 교육의 확대를 통하여 민족 통합과 단결을 빙자(憑 藉)한 통일화를 도모(圖謀)하려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4) 제 4 기 (1966~1976)
: 민족 자치제의 폐지로 요약되는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의 시작 에서부터 4인방의 실각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으로 중국 체제 성립 후, 줄곧 유지해 오던 민족 정책의 형식이었던 민족 자치제가 전면적 (全面的)으로 부정된 시기이다. '지방 민족주의 청산(淸算)'이라는 명분(名分)으로 민족 문화 습관, 민족 언어와 문자, 민족 학원을 폐지하고, 모든 소수 민족 지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표준화시키고 동질화 (同質化)시키면서, 민족차이를 부정하고 강압적인 민족 동화(同化)를 추진하던 시기이다.
5) 제 5 기 (1976~)
: 민족 자치제의 해방기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기의 민족 정책 목표가 민족간의 평등, 단결, 상호 협조에 있음을 내세우고, 모든 민족 정책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위하여 공헌(貢獻)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민족 정책의 형식을 민족 구역 자치의확대와 발전에 맞추고 있다.
★ 문화 정책
: 중국은 민족 집단의 문화 교육 수준의 행상이 서화(西化)추진의 주요한 기초이며, 또 민족 단결과 민족간의 사실상 불평등 해소는 물론, 궁극적으로 중화 민족(中華 民族)의 자질을 전반적으로 고양시키는 중요한 관건(關鍵)으로 파악하고, 이같은 민족문화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1) 소수 민족의 교육 사업 확대를 위해 각종 민족 학교를 정비하고 확대한다.
: 초급 교육기관을 전반적으로 확대시켜 기본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이러한 기반 위에 각 지역의 실정에 맞게 다양한 형식의 다양한 학제(學制)를 개설하여 전문학교의 기회를 넓혀 간다. 특수한 여건을 가진 지역에서는 기숙사를 마련하여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도록 하며, 각종 민족 학교(4).를 확대 개발하며, 또 고등교육 기관에 특별히 민족반과 예과반 등을 설치?운영하여 수학(受學)상의 편의를 도모한다.
2) 지역의 특성을 살린 과학 연구 사업을 발전시킨다.
: 소수 민족 지구는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심적인 사업이므로 농업, 임업, 목축업, 어업 등 농수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 발전에 특히 힘을 기울인다.
3) 소수 민족문화를 발전 시킬 수 있는 민족 교육을 강화한다.
: 소수 민족은 전통적으로 예체능계에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전통적이고 독특한 민족 음악, 무도(舞蹈), 체육, 미술 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다.
4)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제반(諸般) 교육의 사회주의적 내용을 견지(堅持)한다.
: 모든 민족 정책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문화 교육정책의 궁극적인 목적도 사회주의 민족 형성과 이의 공고화를 위한 과도기(過渡期)적 조치이다. 따라서 이 정책의 시행 과정에 언제나 사회주의적 내용이 결여(缺如)되어선 안된다.
★ 언어 및 문자 정책
1) 언어와 문자에 대한 평등 정책
: 민족 언어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적이기 때문에 민족이 존재하는 동안 어떠한 계급투쟁 와중(渦中)에서도 그대로 존속하나, 사회 형태의 변화, 즉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渡來)하면 기존 민족의 소멸과 동시에 개별적인 민족 언어 또한 소멸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문자의 경우 언어가 없어진 경우에도 기록을 통해 보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지닌다고 본다.
2) 민족 언어와 문자 사용의 자유이다.
: 민족 언어와 문자에 대한 사용과 발전의 자유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을 뿐아니라 국가의 보조와 협조를 받는다.
3) 사회주의 민족 관계의 공고화와 이의 발전을 위한 전제(前提)이다.
: 민족 언어와 문자의 인정과 장려는 사회주의 과도기에 요구되는 민족 단결을 원활히 하기 위한 형식적인 민족 정책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문화 융합이라는 공산주의 의 성립을 위한 전제로서만 가능하다는 입장 이다.
4) 민족문화의 정비
: 민족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민족에 대해서는 문자를 새로 만들거나 또는 현존하는 문자 중에 자기들의 민족 문자를 선택하게 하며, 문자가 충실히 정비되지 못한 민족에 대해서는 그들 문자의 정비를 도와준다.
★ 종교 정책
: 중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규에 명문화시켜 이를 보장하고 있다.(5) 그러나 사회주의적 성격, 즉 정치성이 허용하는 울타리 안에서의 제한된 자유이며, 이는또 궁극적으로 는 종교의 소멸을 준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6)
타지방의 이슬람 교 집단에서는 정(政)-교(敎) 합일(合一)의 예속 제도를 갖고 있으며, 또 이들 이슬람교도들은 부락 단위로 '청진사(淸眞寺)'라는 절을 지어 여기에 교장을 초빙(招聘)해 종교 사무를 보게 하며신도 들 에게 각종 명목의 종교세를 징수하고 있다.
★ 소수 민족과 자치 정책
: 중국의 변경 문제는 구 소련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하는 공산 제도적 측면만이 아니라, '민족 구역 자치제도'의 실시로 변경 소수 민족들의 통일전선 공작을 더욱 강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자유 연방 제도를 채택하여 중국 북부, 몽골, 티벳, 신강을 통일하여 중화 연방 공화국을 건립'할 것을 주장해 왔다. 1931 년 11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립하고 '소수 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는 데, "절대적 무조건적으로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승인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소수 민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통일전선을 형성, 당시의 중화민국 국민 정부에 대항하려는 저의(底意)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중국 정권의 현행 헌법 <제 3 장 국가기관>에는 특별히 '민족 자치 지방의 자치기관' 이라는 한 절(節)을 설정하여 자치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민족 자치구 역법'은 헌법을 근거로 하여 구체적 사항을 27개 조항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나 법조문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소위 자치권을 중국이 현재 확대해 가고 있는 기업자 주권의 성격과 거의 같다. 결국 형태만 갖추었을 뿐 공문(空文)이나 다름없다.
중국의 헌법이나 민족 구역 자치법에는 공산당 위원회의 지위에 관한 규정이 없다. 그러나 사실상 당위원회가 바로 각급 국가 권력 기관이고 지방행정 기관은 다만 당위 8 원회의 집행기관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자치기관의 수장(收藏)이 소수 민족의 간부가 담당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권한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5개 자치구의 주석이 모두 소수 민족의 간부라 하지만 당위원 서기는 모두 한족(漢族)이 맡고 있다. 가령 소수 민족 간부가 당위원회 서기를 담당한다고 해도 당성?피압박민족의 특성 등으로 인해 자치권 강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 (3) 중화 인민공화국의 모든 민족은 다같이 평등하다. 각 민족은 서로 단결을 꾀함으로써 제국주의와 각 민족 내부의 인민의 공적에 대항, 중화 인민 공화국 은 모든 민족 우애의 큰 가정으로 만 들어 대민족주의와 좁은 민족주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50조 여러 소수 민족이 집중되어 있는 지구에서는 민족의 구역 자치를 실시해야 한다. 민족이 집중 거주하는 인구의 많고 적음과 구역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각각 각종 민족 자치 기구를 설립한다.』- 51조
(4)대표적으로 민족 의학교, 민족 위생 학교, 민족 사범학교 등이 있음.
(5) 행정명으로 종교를 소멸시킬 수 없으며, 또 강제력에 의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강제로 사람들에게 유심주의를 버리도록 할 수도 강제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믿게 할 수도 있다.』- 모택동 선집 5
(6)인류역사에서 최종적으로는 종교가 소멸될 것이다. 단지 사회주의를 경과하고 공산주의적 장기 발전이 이룩되면, 종교가 의지하고 있는 사회 근원과 인식 근원이 소멸할 때가 오며 그때 비로소 종교는 완전히 소멸된다.- 민족문제 기초 지식 --------------------------------------------------------------------------
▶ 분쟁사
★ 분쟁(分爭)의 발단(發端)
: 초기의 위구르인들은 회족과 단일 민족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7년에 체결 된 제정 러지아와 청나라의 '카흐타 조약'에 의해 신강 지역이 중국과 러시아로 인위적(人 爲的)인 분할이 이루어져, 신강 지역구의 위구르 인들이 중국에 흡수되어 소수 민족화 되버렸다. 이를 발단으로 해서 중구과 위구르의 분쟁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持續的)으로 발생하고 있는 실정 (實定) 이다.
★ 분쟁사(分爭史)
(1) 1927년
: 중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카흐타 조약'에 체결로 신강 지구가 인위적으로 중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간섭 하에 놓이게 되었다.
(2) 1949년
: 지도자 「이사유수프 알프테킨」이 터키족과 연대하여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동터키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으나, 장기적인 독립 공화국 수립에 실패하고 터키로 망명
(3) 1955년 10월 12일
: 자치구가 성립됨에 따라 「민족 구역 자치 요강」(7)등의 많은 제약이 발생
(4) 1956년
: 소련의 영향을 배제한 강한 동제를 실시하여, 유목민들의 중국화와 정착을 강요, 이 때문에 위구르인들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시작
(5) 1990년 4월
: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소수 민족과 인민 해방군의 충돌로, 수십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
(6) 1996년
? 4월 27일 - 혁명 이후 해결되지 않았던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지크스탄, 키르키즈 등과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국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자국 내의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시작
? 5월 7일 - 러시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등 주변 국가들에서 위구르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압력을 행사
? 5월 25~30일 - 중국 공안의 일제 단속을 통해 1,700여명의 테러리스트와 분리 주의자가 체포됨
? 5월 - 위구르족과 중국 공안의 교전에 의해 20여명이 숨지고 분리 주의자 약 5천명이 체포됨
? 2월~5월 - 위구르 분리 주의자들 자치구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부주석 등 6~7명 암살
? 6월 30일 - 위구르족과 중국 공안군과의 교전으로 20여명이 사망
? 7월 4일 - 위구르 반군 세력 중국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중국 국경 수비대 20명 사살
? 7월 14일 - 중국 공안 당국 회교 분리 주의자들을 없애기 위한 백일 소탕 작전에 돌입
? 4월~7월 - 위구르 분리 주의자들에 의해 4백 50여명의 중국군과 의용군 대원이 살해당함
? 9월 3일 - 중국 공안 당국의 회교 분리 주의자 단속에 의해 지하 학교 19개 폐쇄, 98명 체포됨
? 4월~12월 - 중국의 대대적인 검거 활동에 의해 위구르 분리 주의자 5만 7천여 명이 구속되고, 그 중에 1천 7백명이 처형당함
(7) 1997년
? 2월 5~6일 - 이닝에서의 위구르와 한족의 유혈 사태가 발생하여, 100여명이 사망하고 위구르족 500여명이 체포됨
? 2월 25일 - 우루무치시 3건의 버스 폭탄 테러로 9명 사망, 24명 부상
? 3월 7일 - 북경 시내의 버스 테러 사건으로 3명 사망, 30여명 부상
? 4월 13일 - 신강 분리 주의자들이 수력 발전의 요충지인 마나스강의 댐 폭파
? 4월 19일 - 신장 자치구에 공안 부장 현지 파견과 함께 5개 사단의 인민해방군 및 무장 경찰 증파
? 4월 24일 - 위구르 청년 1천명 피의자 호송 차량 습격하여, 무장 경찰과 충돌 2명 사망, 7명 부상
? 10월 1일 - 신장 자치구 동부 쿠이든시 폭탄 공격으로 22명 사망, 다수의 건물 파괴
? 12월 18일 - 11만 명의 병력 신강 지역에 추가 증파
? 11월~12월 - 중국 인민 해방군 2,100명 이상의 분리 주의자 체포하여 이 중에 186 명 처형
(8) 1998년
? 4월 14일 - 북아일랜드의 폭력 투쟁이 영국과의 평화 협상을 이끌어 낸 것에 자극받아 폭력 투쟁 노선을 더욱 강화
? 8월 10일 - 신강 분리 주의자들 무장 경찰관 8명 살해
? 8월 14일 - 무장 경찰관 살해 사건으로 인해 신강자치구 가스카현에 계엄 선포
? 8월 16일 - 이닝시와 자오수구 교도소 2곳을 습격하여 교도관 8명 사살, 정외범 80 여명 탈옥
-------------------------------------------------------------------------- (7) 각 민족 자치구는 모두 중화 인민공화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이다. 각 민족 자치구의 자치기관은 모두 중앙 인민 정부가 통일 영도하는 1급 지방 정권이며, 아울러 상급 인민 정부의 영도를 받는다.
▶ 다수의 전략과 소수(위구르)의 대응
: 중국과 위구르는 각기 다른 정책에 의해서 서로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다수인 중국의 위구르 통치 정책은 당가작주(當家作主).(8)와 분리?독립 불허(不許) 정책이다. 당가작주를 통해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고, 분리?독립 불허의 정책에 의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정책은 '당근과 채찍 정책'이라 설명할 수 있다. 중국은 자치 특혜,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건설 등 '당근'으로 표현된 '회유책 (回遊策)' 과 함께, 공안의 주민 감시, 폭동 강경진압, 언론 통제, 역사 왜곡 등의 '채찍'으로 표현된 '강경책(强硬策)'을 통해 위구르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이에 맞서서 소수인 위구르는 폭력 투쟁 노선(路線)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위구르는 폭탄 투척, 테러, 폭동, 시위 등의 강한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의 폭력 투쟁 노선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정책에 대응(對應)하고 있다.
★ 중국의 정책 고수(固守) 원인
: 중국의 정책 고수 원인은 크게 지역적, 자원적, 연쇄적 파급효과(波及效果)의 세 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신강 지역의 전략적?지리적 중요성을 들 수가 있다. 신강 지역은 중국, 인도, 러시아, 이란, 서양제국 등이 인접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동서문명의 교류의 요충지(要衝地)로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지리적으로도 완충지(緩衝地) 역할을 담당하 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로는 자원적 중요성을 들 수가 있다. 신강 지역의 초원 면적이 중국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중국 전체 광물 매장량의 38%를 차지하고, 석유?천연가스가 중국 전체 매장량의 25%를 차지하는 등 광범위한 자원이 산재(散在)된 지역이다.
마지막으로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에 발생할 연쇄적 파급효과의 이유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티벳, 내몽골 자치구 문제 등 많은 독립 운동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만약 중국에서 신강성의 분리?독립을 허용할 경우 발생하는 타 지역의 연쇄적인 분리?독립의 요구를 통해, 구 소련의 붕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여 중국 자체가 분열되는 상황까 지도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에 의해서 중국은 위구르의 과격한 분리?독립 운동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당가작주(當家作主)와 분리?독립 불허(不許)라는 두 정책을 현재까지도 고수(固守)하고 있는 것이다.
-------------------------------------------------------------------------- (8)'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민족이 해당 지역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 위구르 분리. 독립 운동
★ 위구르 분리?독립 운동 종합
: 현재 위구르에는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 UNRF(연합민족혁명전선),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당을 중심으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다. 위구으의 주체적인 지도자로 아이사를 꼽 을 수 있는데, 아이사는 이샤유수프 알프테킨의 뒤를 이어 현재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를 8이끌고 있다. 위구르의 분리?독립의 이유는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인 종교적인 이유에서 기인(起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구르인들의 분리?독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하여, 주변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크스탄, 키르 키즈와 연대(連帶)한 '투르크인의 땅'인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수립(竪立)이다
★ 위구르의 정체성(停滯性) 유지를 위한 노력
: 위구르의 정체성은 지역적?문화적인 동질성에서 기인한다. 이슬람교도인 위구르의 99.8%가 신강 지역에 살고 있으므로, 종교와 땅은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위구르인들은 실제로 신강 지역을 '우리들의 땅, 우리들의 지역'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신강 자치구는 정체성을 유지하기에 지역적으로 유리한 이점(利點)을 지니고 있다. 신강성 자치구가 중국 면적의 1/6을 차지할 정도로 광범위해서, 중국 중앙 정부의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슬람 문화를 유지하기에 유리하다. 또한 풍부한 자원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부가적(附加的)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중앙 정부의 다소 관대(寬大)한 문화 정책에도 흔들리지 않고, 종교적인 아집(我執)을 통해 스스로가 고립적인 길을 택하고 있다. 때문에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해서 교육 수준이 낮지만, 정체성 유지를 위해 지속적(持續的)으로 고립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중국내 위구르 민족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위구르 민족들과도 유대(紐帶) 강화를 추진하여 중국 중앙 정부에 거대한 성벽을 쌓고 있는 중이다.그리고 터키, 우즈베키스탄, 타지크스탄 등의 이슬람교 분리 주의자들을 통한 꾸란의 유입과 독립 지원을 통해 중앙 정부에 대항(對抗)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 위구르의 분리?독립 운동이 폭력적인 이유
위구르의 분리?독립 운동은 타 자치구의 분리?독립 운동에 비해 대단히 폭력적이다. 이는 폭력이 국내에서 강압적인 민족 통제가 있는 경우, 조직적으로 존재가치를 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위구르의 경우 티벳과 비교했을 때 티벳과 달리 독립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같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분리?독립 문제를 강력하게 어필(appeal)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신강성이 중국 면적의 1/6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중국의 완전 통제가 불가능하고, 지역 적 ?문화 적으로 완전 독립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그리고 민족구성 비율도 한족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민족적인 유대와 결속력이 타 자치구에 비해 강하다.
신강성 위구르의 경우 주변에 인접한 이슬람 문화권의 외부세력이 많은 지원을 해주고있어, 폭력적인 분리?독립 운동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부차적(副次的)인 요소로 유목 민족이기 때문에 타민족보다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띄는것을 이유로 들 수가 있다
▶ 앞으로의 전망
: 신강성의 분리?독립 문제는 낙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 것이다. 위구르인들의 폭력적인 과열 분리?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중국 측의 입장 변화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신강성의 자원을 이용한 이익과 독립의 허용으로 인한 연쇄적인 효과로 인해, 중국 측의 강경한 입장의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특구 지역과 5~6배의 격차를 보이는 등, 여타 한족거주 지역과 생활 수준에 있어서 큰 격차를 보여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고, 또한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 민족 폭동과 강경 진압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중앙 정부의 통치 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 신강성의 분리?독립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양상(樣相)도 배제(排除)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마치면서...
: 이 조사가 있기까지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분리?독립운동을 무조건 안 좋은 시각으로만 바라 보았다. 왜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단지 테러 행위나, 폭력적인 시위의 모습만으로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변화를 갖게 되었다. 위구르의 분리 ? 독립 운동만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소수 민족의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들 모두는 강대국 즉, 다수에 의한 피해자라고 여겨진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역시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서 똑같은 문제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미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일제 치하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일 것이다.
위구르의 분리?독립 운동을 다루면서 독립을 갈망하는 위구르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 역사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 위구르인들의 폭력적인 분리. 독립 운동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일제 치하에서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벌이시던 선조들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위구르 분리?독립의 장래가 불투명하고 어둡지만, 그들의 바램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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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관련 사이트 > ? http:// www.turkistan.org ? http:// www.uygur.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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