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진출

[스크랩] 신장의 주요 지구(地區)

주거시엔셩 2007. 2. 26. 02:19

신장의 주요 지구(地區)

 

99년 위구르 F/O 보고서

  1. 이리지구-이닝시, 후어청현(티무르칸 능), 차부차알 시보어족 자치현
  2. 악수지구-쿠쳐현
  3. 크즈러수 키르키즈 자치주-아투스시(수툭 부그라칸 능)
  4. 카쉬지구-카쉬시(아팍호자묘&향비묘, 이드카모스크), 잉지샤현
  5. 호탄지구-피샨현, 호탄시
  6. 투루판지구-투루판시


1) 이리지구(伊犁地區)-“瀚海中的濕島”

: 이리카자흐 자치주1) 관할 하에 있음.

: 1개 시와 8개 현

: 경지면적 321,533 ha

: 인구 196만명 중 위구르족 27%(53만명), 한족 33%(64만명), 카자흐족 23%(45만명)를 차지하여 비록 한족인구가 더 많긴 하지만, 이리카자흐 자치주 내의 다른 두 지구(타청지구-4.7%, 알타이지구-1.8%)에 비해 위구르족의 비율이 높은 편.

: 면적은 56,000㎢로 남한(99,000㎢)의 절반 정도 크기.

: 이리강에서 그 명칭이 유래.

: 유리한 자연조건(연평균기온 4℃, 연평균 강수량 250-800㎜)/ 신강의 황량한 사막가운데 떠 있는 섬 “濕島” “메마른 대륙 속의 젖은 섬” /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임/이리강과 그 지류들이 비옥한 토지와 초원을 조성/ 아름다운 풍경/유목민족의 주요한 활동구역, 초원문화의 발상지/신강의 주요한 식량?식용유 산출지/ 양봉업, 이리강을 이용한 인공양식어장 일리 강에는 20여 종의 많은 물고기. 일리에 있는 양식장에서는 중국 내의 가장 많은 종류의 물고기를 양식할 수 있음. /석탄, 철, 금, 은, 우라늄 등 10여 종의 광물질. 이러한 광물질들은 쉽게 캐낼 수 있음./ 축산품/ 사과/ “塞外江南” “平果之鄕” “天馬的故鄕”/북강 지역에서 과일 생산량 최고/ 농사를 위한 이상적인 기후조건/ 강물, 지하수, 빙하는 풍부한 수자원/497,333 ha의 녹지 보유. 녹지비율 6.5%로 신강의 녹지비율보다 6배 높음

: 카자흐스탄과의 접경 지대에 3개의 국가 1급 국경무역시장(?爾果斯口岸, 都拉塔口岸, 木紮爾特口岸)이 있음. 과거 북쪽 비단길의 주요거점, 현재 중국-중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

: 신강생산건설병단의 農業師 중 제 4 師團(農四師)이 주둔하고 있음. 農四師는 그 휘하에 21개의 사단 소속 농업 집단농장 및 목축업 집단농장(사단의 농장이라는 의미에서 “團場”이라 함.), 41개의 공업?교통업?건설업?상업 기업, 28개의 행정사업단위를 거느리면서 전체 9만 여명의 직원과 20여만 명의 인원을 보유. 농?목축업 위주. 신강의 유명한 양식?목축업 기지. 150만苗의 경지와 500만苗의 초장을 보유하여 농?목축업의 중심적 역할. 이외에도 식량?식용유 가공, 양주(釀酒), 제당, 전력, 시멘트, 건축재료, 피혁, 모방직, 인쇄 등 10여개 부문의 공업 주도.


<新彊生産建設兵團 : 신장생산건설병단>

공산혁명 시기의 인민해방군을 전신으로 하는 신강지역의 독특한 생산조직으로서 농?임?목축업에서 공업 및 관광업에 이르기까지 신강 전 지역의 경제활동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조직이다. 특히 신강의 농업은 1949년 이래로 인민해방군 생산건설부대에 의해 확장되고 현대화되어 왔다. 전통적인 농업 중심지인 남부 오아시스 지역과 伊犁-塔城 지역에서 기존농경지를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루무치의 서북부, 石河子市 주변, 昌吉回族自治州와 같은 북쪽 지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농경지를 개간하였으며, 관개시설 또한 상당한 속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산건설부대에 의해 농업 기계화가 활발히 추진되어서, 1987년에 이미 파종 전 밭갈이의 2/3, 파종의 1/2 이상, 추수의 1/5 정도가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국민당으로부터 신강지역을 평화적으로 인계받은 후, 10만명의 군인을 신강지역에 파견하여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생산건설병단을 세웠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병단으로는 흑룡강, 내몽고, 티벳, 해남섬 등에 세워진 것을 들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병단은 신강성에 세워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생산건설병단은 1975년에 모두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강생산건설병단만 1982년에 유일하게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신강의 병단은 1950년 처음 설립되었을 때, 당시 이 지역 최고 군 지도자였던 왕진의 지휘 아래서, 군사?정치?경제 방면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인원이 군인이었으나, 점점 현지 출신이 아니라, 동부 연해 지방에서 보내진 젊은이들로 대체되었다. 병단은 변경 수비 임무를 띤 준군사적인 기관으로서, 언제나 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임무이기도 했지만, 그와 더불어 토지개척, 도로 등의 기간시설 건설, 특정 농작물 장려, 새로운 산업과 광산 개발 등의 주요한 경제적 임무 또한 띠고 있었다. 비록 병단 산하의 농장, 목장, 산업기업, 비농업기업들이 북강과 남강 지역에 모두 존재하지만, 그 활동 범위와 규모는 북강지역에서 더 활발하다.


: 이리지구는 다른 지구에 비해 한족을 비롯한 각 민족의 퍼센테이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민족간 긴장지역이라 할 수 있음. 주로 이리지구에서 반란사건 발생. 97년 이닝현에서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 유혈사태 발생.

: 중심부에는 한족 거주. 주변부로 갈수록 위구르인 많아짐. 위구르족 거주지역과 한족 거주지역의 뚜렷한 구분.


①이닝시(伊寧市)-위구르인들은 “굴쟈”라고 함.

: 이리카자흐자치주 및 이리지구의 정치, 경제 중심지. 農四師 본부 위치.

: 인구 30만 명 중 위구르족 48%,(14만명) 한족 36%(10만명) 차지하여, 이리카자흐 자치주 내의 다른 중심도시들(타청시-3.3%, 알타이시-2.6%)에 비해 위구르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히 높은 도시.

: 1992년 변경지역 대외개방 도시로 지정됨.

: 97년 유혈사태 발생

: “白楊城” “古麗斯坦”(花城), “果園城”


② 후어청현(?城縣)

: 인구 34만명

: 7개 鄕과 3개 鎭, 6개의 국영 집단 농?목장(團場), 淸水河경제개발구, ?爾果斯口岸 관할.

: 1989년 대외개방현으로 지정. 1992년 국경무역권 부여받고 邊民互市貿易市場 건설. 주변 국가들과 “二日遊” 프로그램 개발, 淸水河경제개발구 설치. 1996년 또 한 번 6개 綜合改革試点縣 중 하나로 지정됨.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개발 유도하고 있는 지역. 농업, 목축업, 공업, 변경무역의 4대 산업에 주력하고 있음.

: 청대 신강의 정치?경제?군사의 중심지였던 惠遠古城, 칭기스칸의 7대손인 티무르칸의 무덤, 아름다운 꽃들과 야생 과일의 방향으로 가득한 초원의 놀라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과일계곡 등이 유명하다.


- 투헤이루 티무르칸 능(禿黑魯鐵木汗麻?)

: 이닝으로부터 80㎞ 떨어져 있음. 징기스칸의 7대손으로서, 신강에서 무슬림이 된 첫 번째 몽골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죽었을 때 모슬렘 식으로 매장되었다. 벽돌. 높이 14m, 넓이 150㎡.

: 카라한 왕조(840-1230) 시기에 이슬람교가 신강지역에 초기 전파되기 시작. (수툭 부그라칸)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원, 명 시기는 이슬람교가 신강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시기. 이 시기에 기본적으로 신강 경내의 다수 거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이슬람교의 광범위한 전파는 당시 신강지역을 통치했던 차카타이칸국의 투헤이루 티무르칸과 그 아들이 이슬람교에 귀의하면서 이슬람교를 힘써 보급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투헤이루 티무르칸은 징기스칸의 7대손으로서, 동차카타이 兀魯斯汗 也先不花의 친소생이라는 설도 있다.

투헤이루 티무르칸의 시대에는 차카타이칸국이 이미 동?서로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동차카타이칸국은 “蒙兀爾斯坦”이라고도 하며, <明史>에는 “별실팔리(別失八里)”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범위는 현재의 신강 전 지역과 소련의 七河 유역과 이식쿨호 동부 일대를 포함했고 그 통치의 중심은 阿里麻里(현 이리지구 후어청현 경내)였다. 也先不花는 차카타이탄국이 분열되고 난후 동부의 제 일대 칸이었다. 也先不花가 1320년에 죽자, 신강 각 지역의 몽고부락은 여러 해 동안 칸의 직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 각 지역마다 지역정부가 난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남강의 서부 지역을 점하고 있던 몽고 杜格拉特部의 수령 布拉吉(악수에 거하고 있었다)가 18세의 투헤이 티무르를 이리에서 악수로 맞아들여, 蒙兀爾斯坦칸국의 칸으로 옹립했다.

투헤이 티무르는 1347년에 즉위했다. 이 때는 마침 원나라의 쇠퇴기로서, 서역이 시끄러워지면서 칸국이 분열되는 시기였다. 그는 차카타이칸국의 통치를 재건하기로 결심하고 원나라 조정이 서역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틈을 타서, 1360년 군사를 일으켜 다음해 사마르칸드와 河中地區를 점령하고 그 아들 伊里亞斯를 하중총독으로 임명해서 서차카타이칸국을 통일하면서 차카타이칸국을 부흥시켰다. 이 사건을 전후로 그는 칸국 내에 이슬람교를 대량 보급시켰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신강지구에서 첫 번째로 이슬람교를 믿은 몽고칸이었다.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즉시 16만 몽고인이 무슬림이 되었고 이슬람교가 천산 남북을 휩쓸었다.

투헤이 티무르가 이슬람교를 믿게 된 경위에 대해서 사료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악수로 돌아올 때, 기근을 피해 고향을 떠나 유랑하던 무슬림인 舍黑??馬魯丁을 만났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에, 티무르는 그 무슬림을 매우 공경하여 보내면서, 자기가 일단 칸이 되어 최고 권력을 장악하면 반드시 그를 다시 초청하여 이슬람교에 귀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건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舍黑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 아들 아르샤드 웃 딘에게 티무르와의 일을 이야기해주면서 꼭 그 몽고인이 칸이 되면 찾아가서 자기와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 일 후 티무르는 蒙兀爾斯坦의 칸이 되었다. 아르샤드 웃 딘은 이 소식을 듣고 악수로부터 阿里麻里(이리지역 후청현)으로 칸을 만나러 왔으나,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칸을 직접 만날 수 없어서, 매일 새벽 궁정 부근에서 큰 소리로 칸을 불렀다. 결국 소원대로 칸을 만나고 약속을 상기시키자, 티무르칸은 즉시 이슬람교 입교의식-眞주기도문을 읽고, 할례를 행함-을 행함으로써 무슬림이 되었다. 이 때무터 이슬람교가 전 蒙兀爾斯坦에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야기는 우연으로 점철되어 내용이 허술한 점이 많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슬람교가 매우 강력한 사상적 영향력을 지녔고, 티무르칸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데에는 중요한 정치적 원인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투헤이 티무르의 집정 당시는 차카타이가 칸이 되어 나라를 세운 지 이미 백여년이 지난 상태였고, 이 시기 이래로 중앙아시아와 신강지역에는 이미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중지구로 진입한 몽고인들이 유목사회에서 정주사회로 전향하고 현지 주민과 통혼하면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남강지역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북강의 이리강 유역의 阿里麻里(후청현) 일대에는 이슬람교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1363년 티무르칸이 사망하자, 20여년의 왕위 쟁탈전을 거쳐 1383년 남강 杜格拉特部 수령 忽?達(布拉吉의 아들)가 티무르의 어린 아들 黑的爾火者를 별실팔리의 차카타이칸으로 옹립시켰다. 黑的爾火者와 그의 계승자는 모두 신실한 이슬람교도였고, 이슬람교를 보급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黑的爾火者는 칸이 된 후 바로 동쪽의 불교도들을 향하여 “성전”을 발동했고, 투루판등의 지역을 억지로 개종시켰다. 馬黑麻의 재위 시기에 대다수의 몽고부락이 그의 강제적 조치들로 인해 이슬람교로 귀의했다. 또 다른 칸인 歪思汗은 무슬림을 공격하는 것을 금하고 직접 북강의 이교도 瓦刺人을 정벌하러 나설 정도로 이슬람교 전파에 힘썼다. 이렇듯 몽고칸들의 장기적인 노력으로 인해 이슬람교는 천막생활에 익숙한 몽고인들의 마음에 점차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쯤에는 이슬람교가 동강의 투루판과 하미 지역에서도 우세를 점해서 각기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위구르인들의 통일 종교가 되었다. (남강 카쉬--> 이리--> 악수 --> 북강 ---> 동강 투루판, 하미) 이슬람교 문화와 사상의 영향 아래, 각 지역의 위구르인들의 언어, 문자, 풍속습관, 도덕규범 등이 점차로 일치되어 갔다. 차카타이 몽고인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위구르인들과 통혼하면서 점차 정주민화 되어, 위구르족에 융합되었다.


: 61사단농장(團場) 근처. 관리인 할아버지(마흐무트)와 손녀(네지레)


③차부차알 시보어족 자치현(察布察爾錫伯自治縣)-약칭 察縣

: 시보어족 자치현 읍내 ‘행복 유아원’ 방문. 가족 18명


2) 악수지구

: 총인구 185만 중 위구르족 76%(142만명), 한족 22%(41만명), 인구밀도 11.3인/㎢

: 총면적 13만 ㎢로 남한의 1.3배

: 1개 시와 8개 현

: 農一師 휘하의 19개 團場(이겠지...)

: 1인당 년평균 수입 1462元(*150="219300원)" 신강지역 내에서 중하위권

: “阿克蘇”라는 명칭은 청대 건륭 이십이년(1757년)에 정식으로 정해졌다. 악수는 돌궐어로서 “흰색 물”이라는 뜻이다.

: 경지면적 600만 무, 1인당 경지면적 3.8무. 주요 농작물은 쌀, 보리, 옥수수

: 난온대건조형 기후로 대륙성 기후의 특징/년평균 기온 7.6-11.5도/평균 일교차는 11.7-15.8도/최고 기온 41.9도, 최저기온 -32도/ 연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큼. 산간지대는 200-300㎜, 북부 및 서부의 산근처는 70-90㎜, 중부 및 동부 평야지대는 40-60㎜, 사막 변두리의 아라르, 샤야는 37㎜, 남부 사막은 더욱 적음. 천산산맥 위의 만년설이 이 지역의 주요 하천의 발원지. 주요 강은 악수강, 웨이간강, 타림강. 광산자원 풍부, 질도 우수. 중요 광물은 석유와 석탄

: 공업발전 연평균 성장 속도 15.8% . 그러나 GNP(1,700元*150="250,000만원)도" 낮은 편에 속하고 1차 산업 비중이 50% 이상.

: 타림강-타림강은 타림 분지의 북부를 완만히 돌아가며 옐캔강(카쉬지구), 호탄강, 악수강의 근원이 됨. 전체 길이가 2179㎞이며 중국에서 가장 긴 내륙강. 매년 매우 뜨거운 여름이 되면 빙천이 녹아서 강물의 양이 갑자기 늘어나 한 필의 “고삐없는 야생마”와 같이 흉용하게 포효하며 황막한 들을 달려간다.


①쿠쳐현 : “歌舞之鄕?藝術寶庫”(음악, 춤, 석굴)

: 총인구 35만명 중 위구르족 90%(32만명), 한족 9%(3만명)

일반 도시의 인구가 20만 정도임을 감안할 때, 쿠쳐는 인구가 35만명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市로 승격되지 않고 계속 縣으로 남아있음. 이이는 인구 56만명의 沙車縣(옐켄)도 마찬가지. 정책적으로 시로 승격시키지 않음.

: 천산 남부, 타림분지 북부에 위치.

: 團場 4개(악수 지구 19개 중 4개면 8개 현 중에서 團場이 많은 편)

: 농업위주(밀, 면화), 수공업 발달(양탄자 짜기, 2000년 이상의 역사)

: “吐魯番的葡萄?善的瓜, 庫車的羊羔一枝花”라고 할만큼 새끼양가죽이 유명. 말린살구(杏干)도 유명. 쿠쳐는 살구 재배는 이천년 역사. 20여종의 우수한 품종.

: 실크로드 중간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중간지점이었음.

: 쿠쳐는 일찍이 “龜玆”라고 불리우며 한 대 서역 삼십육국 가운데 하나였다.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동서문화의 집결지였던 까닭에 이곳에 거주했던 각 민족은 찬란한 가무를 발전시켰다. 쿠쳐의 음악과 무용은 서역에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내륙 장안에까지 전파되어 인기를 누렸다.

: 지리적, 종교적으로 불교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음. 신강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전 쿠쳐는 불교의 성행지였고, 유명한 고승 鳩摩羅什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키질(붓다라는 뜻) 천불동-중국 4대 석굴 중 하나. 쿠쳐현과 빠이쳥현(拜城縣)의 중간지점에 위치. 현존하는 석굴 중 동굴이 제일 많고, 벽화의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은 석굴. 키질석굴은 기원후 3-4세기 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6-7세기 전성기를 누리다 8세기 후에는 폐기되었다. 1만 ㎡의 벽화가 있으며 그 내용은 소승 불교를 묘사한 것이다. 종교 내용 외에 농사짓는 것, 사냥하는 것, 상인들의 왕래, 음악과 무용 등이 있다. 키질천불동 외에 4개의 천불동이 더 있는데, 한 지역에 이렇게 많은 석굴이 몰려 있는 것이 가히 기적이라 할만하며, 이는 그만큼 불교가 성행했었다는 증거이다.

: 천불동 이외에도 쿠쳐현 동북쪽 20㎞ 지점에는 고대 쿠쳐의 저명한 불교사원 유적지가 있다. 일명 蘇巴什古城. 이 사원은 기원 후 5세기 초에 이미 존재했고 당나라 때 현장스님이 이 사원을 방문하고 <대당서역기>에 기록했다. 높이 20m의 현존하는 탑 및 불전, 사원벽 등으로 보아 과거에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고 위용이 찬란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4)크즈러수 키르키즈 자치주

: 총인구 40만 중 위구르족 64%(26만명), 한족 5%(2만명), 키르키즈족 30%(12만명)

: 위구르족은 주로 평원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 키르키즈족은 주로 산지에 거주하며 목축업 종사.

: 총면적 70,900㎢. 남한의 0.7배

: 1인당 년평균 수입 742元(*150="111300원)." 신강 전체에서 최하위

: 서쪽으로 키르기스탄, 타직스탄과 접해있음.

: 1개 시, 3개 현, 康蘇鎭의 광산지역.(석탄채굴, 제철, 발전 및 시멘트 생산, 내화재료 등을 생산하는 종합 공업?광산 지역, 파미르 고원상의 중요한 공업 중진)

: 광산자원 풍부, “南彊寶庫”

: 경작지 40만畝

: 목축업, 농업 위주

: 천산남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위치. 하천 수량 이용 수자원 풍부.

: 지형과 지세에 따라 (해발고도에 따라) 기온차이 심함.

해발 2,000미터 이하 1년 2작, 2년 3작 가능

해발 2,000-2,500미터 중산지 1년 1작

해발 2,500-3,000미터 고산지 쌀보리나 청과맥, 목초만 자랄 수 있음.

해발 3,000 이상 만년설 지대


①아투스시(阿圖什市)

: 총인구 18만 중 위구르족 80%(14만명), 한족 6%(1만명), 키르기즈족 13%(2.4만)

: 1952년 이후 새로 건설된 도시

: 삼선동-동한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중국의 제일 서쪽 땅에 위치하여 보존되어 내려오는 最古의 불교유적.

: 한대 疎勒國 수도 및 송대 카라한왕조 왕조 유적지-《突厥語大詞典》, ≪福樂智慧≫가 모두 이 카라한 왕조의 겨울 왕궁에서 씌여졌음.


-사툭 부그라칸 능

: 아투스시 松他克鄕에 위치. 10세기 카라한왕조 시기 카쉬가르의 군주로서 최초로 이슬람교를 믿은 위구르인. 955년경 사망. 백성들에게 무슬림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장려.


사툭 부그라칸(?-955)은 10세기-13세기 초 천산남부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던 카라한조 유명한 칸들 중 하나이다. 카라한조 제일대 카간(可汗)의 손자. 그의 아버지는 제2대 왕이었던 巴玆爾. 사툭이 생활하던 시대는 카라한조의 초기 건국시기로서, 당시 카라한조에는 두 개의 정치적 중심지가 있었다.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발라샤군(현재 토크막)으로서 그의 부친인 巴玆爾 때부터 다스리게 된 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경내의 카쉬가르(현 카쉬)로서 그의 숙부인 오굴챡이 다스리고 있었다. 巴玆爾 사후, 대칸의 직위는 사툭이 계승해야 했으나,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려 숙부인 오굴챡이 사툭이 성년이 되면 왕위를 돌려주기로 약속하고 대신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사툭이 16세가 된 후에도 숙부가 왕위를 내놓지 않자, 수툭은 힘을 키워 왕위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이 때 오굴챡은 중앙아시아의 사만조와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만왕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왕조로서 내부의 파벌투쟁이 격렬한 상태였다. 대략 10세기 초에 사만왕조의 한 왕자가 카쉬카르로 망명했는데 오굴챡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를 비호하여 카쉬 이북의 아투스에 주재시켰다. 그 왕자의 영향 아래 숙부로부터 왕권을 탈취하기에 급했던 사툭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후에 사툭이 칸직위를 되찾는데 성공하자 칸의 지존무상의 권력으로 이슬람교를 크게 보급시켰고, 이슬람교는 이때부터 일종의 사회?정치적인 세력으로서 신강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사툭 부그라칸은 카라한 왕조의 첫 번째로 이슬람교를 믿은 칸이었다. 그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데에는 역시 정치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사툭은 이슬람교도가 된 이후, 교명을 阿布都?克里木이라 했다. 사툭은 충분한 준비를 거친 후, 수십명의 측근을 데리고 숙부의 왕궁을 공격하여 카쉬가르르 점령하고 칸에 올라 부그라칸(돌궐어로 “公駝汗”-숫낙타라는 뜻)타라 자신을 칭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또 출병하여 사만왕조의 수중으로부터 카라샤군을 획득하여 왕위를 공고히 했다. 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955년 또는 956년에 사망했는데, 아투스에 장사되었다. 그는 45년간 재위에 있었고, 이로부터 이슬람교가 신강에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를 10세기 초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의 계승자들은 모두 신실한 이슬람교도로서 이슬람교를 널리 전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맏아들인 木薩는 왕위 계승 후 阿爾斯蘭汗(숫사자라는 뜻)이라 칭했다. 수피파 전도사의 도움 아래 칸국의 이슬람화를 실현했다. 960년 경에는 20만帳의 돌궐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해를 木薩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한 해라고 여기고 있다. 당시 남강 타림분지의 남북 가장자리는 모두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시종 불교세력과의 마찰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자하드(성전) 정신의 영향으로 불교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木薩와 그 아들 奧布?哈桑의 장기간에 걸친 분투 끝에 수툭의 증손인 玉素甫?카디얼칸(998-1032) 재위 시에는 이슬람교가 우전국(현재 호탄)일대 까지 뻗어 나갔다. 玉素甫이 우전의 통치권을 획득한 것은 20여년의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불교를 국교로 하던 이씨왕조를 멸망시킨 후에 실현된 것으로서 카라한조의 동쪽 경계를 約昌城(현재 신강 若羌縣) 까지 확장시켰다. 玉素甫이 우전을 점령한 것이 대략 1006년으로서, 이는 이슬람교가 이 시기에 남강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일종의 종교신앙이자 생활방식, 문화형식으로서의 이슬람교가 남강에 전입된 후 본래 이곳을 지배하던 불교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신강 역사상 이슬람교의 전면적 전파 과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11세기부터 남강지역에서는 아랍어 자모가 점차 회골문을 대체해 갔다. 11세기 후기에 저술된 《福樂智慧》,《突厥語大辭典》의 양대 거작은 카라한조 시기에 이슬람교 문화와 돌궐문화의 결합이 이미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福樂智慧》는의 발리샤군 사람인 유숩 하스 하집(YusufKhass Hajib)이 1069년에 카쉬에서 운문형식으로 돌궐어를 사용하여 저술한 것인데, 내용은 이슬람교의 도덕표준과 가치관념을 선양한 작품이다. 《突厥語大辭典》의 저자는 마흐무트?카쉬가르로서 1074년에 아랍어로 씌어졌고, 내용이 매우 풍부해서 학자들로부터 백과전서로 불리우고 있다.


3)카쉬지구

: 총 인구 308만명 중 위구르족 90%(276만명), 한족9%(27만명), 위구르족 최다 지역.

: 총면적 16만 ㎢로 남한의 1.6배.

: 고원, 평원, 사막의 세 부분. , 온대대룩성기후, 겨울이 짧고 여름이 길다.

: 서한시기 카쉬지구는 서역 36국 중 疎勒, 莎車, 蒲犁, 依耐, 子合, 西夜 등 여러국가가 위치한 곳. 기원전 2세기 하반기에 한무제가 파견한 장건이 서역을 통과한 후부터 서한정권에 편입되기 시작. 기원후 1세기에는 반초의 서역 경영의 대본영. 당태종 이후 이 곳은 당 정부의 중요한 군사거점이 되었는데, 유명한 “안서사진” 중 하나였던 疎勒鎭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 (현재 소륵현) 오대십국시대부터 송대까지 카쉬지역은 카라한왕조와 서요의 관할하에 있었다. 원대에는 카쉬가르주가 건립되어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인 차카타이 및 그 후예들의 봉지가 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 카쉬지역은 서역사대 回城 중 하나. 1884년 청정부가 신강성을 설치한 이듬해 카쉬가르 兵備道를 설립. 신중국 성립 이후 카쉬專區와 莎車專區를 건립했는데, 후에 莎車專區가 카쉬專區에 병합되었다.

: 1개 시, 11개 현

: 경내 5줄기의 강으로 인해 수자원 풍부. 1인당 평균 연간 점유수량이 전국의 2배.

: 예청현(葉城縣) 석유 매장량 상당. 이미 몇 십개의 유정 개발

: 파미르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곤륜산맥, 만년빙산으로 “빙산의 아버지”인 慕士塔格 빙산 등 풍광도 뛰어남.

: 기원후 11세기 《突厥語大詞典》을 쓴 위구르족 언어학자 馬赫穆德?喀什?里의 묘와 위구르족 장편시인 ≪福樂智慧≫의 작가 玉素甫?哈斯?哈吉甫(유숩 하스 하집, Yusuf Khass Hajib)의 묘가 있음.

: 위구르족 문화의 농축지. 카쉬의 가무는 1000여년 전에 이미 중원에 전파되어 수당 시기에 카쉬의 춤과 음악은 장안에서까지 유명.

: 농업 위주. 1차 산업 비중 60% 이상, 1인당 년평균 수입 1,025元(*150="153750원)" 하위권.

: 農三師 주둔.

: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5개국과 활발한 교류


①카쉬(카쉬가르)시 : “絲路明珠”

: 총인구 25만 명 중 위구르족 75%(19만명), 한족 2%(6만명)

: 동?서 문명 교류의 중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신강역사의 활화석”이라 불리움. 중국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도시. 신강의 특색과 위구르인들의 민족적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서 신강성의 축소판. “카쉬에 가보지 않고서는 신강에 가 봤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

: 남쪽으로는 키질강(克zhi勒河), 서쪽으로는 파미르 고원, 북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접해있는 전형적인 오아시스 도시. 키질강의 충적평원 위에 위치. 이천년 전 전한(서한)시대에 장건이 서역으로 떠났을 때, 최초로 이 곳의 상황을 서한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그 때의 명칭은 “疎勒”이었다. 동한 시대에는 반초가 서역 경영의 대본영으로 삼았다. 당나라 때에는 安西四鎭 중 하나였다.

: 카라한 왕조(喀喇汗王朝)2)(A.D. 840-1230) 시기에 수도였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남쪽의 8개 성을 다스리는 카쉬가르 참찬대신의 주재지였다.

: 위구르족 춤추면서 노래하는 오락형식 “麥西萊浦”

: 옛부터 문화가 발달, 조각도안, 수공예품 유명. “춤과 노래의 고향”, “과일의 고향”, 시장 발달. 오늘날은 “동문바자르”는 남강 최대의 무역시장. 위구르인들의 꽃모자(花帽), 잉지샤현의 작은칼(小刀), 각종 도기 등 민간예술의 중심지.

: 1986년 역사문화 명승고적지로 지정받음.

: 남강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

: 파키스탄, 인도, 타직키스탄 사람들 장사하러 종종 카쉬에 옴. 서남쪽으로 파키스탄과 통하는 고속도로 있음. 파키스탄과의 접경 지대에 紅其拉甫口岸 있음.

: 카쉬시에서 20㎞ 떨어진 곳에 농장 있다고 함.


-아팍호자묘&향비묘,

: 카쉬시 동북쪽 5㎞ 거리에 있음. 이슬람교식 고대 건축군. 1640년에 지어지기 시작. 아팍호자는 백산당의 거두 였음. 카쉬 이슬람교 백산파의 수장 및 그 후예들 72명이 매장되어있음. 제 1대는 阿吉買買提?玉素甫?加이지만, 그 장자인 아팍호자가 더 유명하여 전체 능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또한 청조 말기 건륭제의 “香妃”가 묻혔다는 전설에서 “향비묘”라고도 불리운다.


-이드카 모스크

: 카쉬의 상징, 문화생활과 오락의 중심지.

: 카쉬시 중심의 이드카 광장에 위치. 시의 중앙에 위치.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모스크. 면적 16,000㎡(25.22 畝). 동시에 4,200여명이 예배 드릴 수있음. 500여년의 역사. 모스크 앞 광장은 평소에는 바자르에 온 사람들로 붐비고, 이슬람 절기가 되면 만 명이상의 위구르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이용된다. 예배 후 에는 태평소와 북 소리에 맞춰 잘 차려 입은 군중들이 광장으로 나와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광장 중앙에는 각 민족의 단합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원현의 화원이 조성되어 있음.

: 매일 5번의 예배가 있고, “居瑪日”에는 근 만여명이 “居瑪” 예배를 드림. 逢開齋(Rozi Eid-금식을 푸는 날)와 古爾邦(Qurban) 축제 때에는 5만 여명 이상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현 이드카 모스크가 위치한 자리는 원래 궁정 관료들과 그 선조 및 후예의 매장지. or 동서를 왕래하며 카쉬에 우거하는 상인들이나 전도하려는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및 내지 무슬림들의 묘지. 대략 1442년경 카쉬가르의 집정왕이었던 Saqsiz Mirza가 묻히고 난 후, 그 후손들이 조그만 사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이드카 모스크의 전신. 이후 1533년 차카타이의 후예인 蘇丹米爾??艾則shi 와 카쉬가르 통치자 烏布勒哈德?米爾??阿巴拜克의 동생이 이곳에 묻히고 나서, 烏布勒哈德?米爾??阿巴拜克(Ubul Hadi Baig)에 의해 매일 5번의 예배만 드리는 보잘 것 없던 작은 모스크가 매주 금요일마다 “居瑪禮拜”(금요예배)를 드리는 “居瑪寺”로 개수되었음.

그러나 이드카모스크가 비교적 대규모로 증축된 것은 두 명의 부녀자에 의해서임. 1798년 굴리나(古麗熱娜)라는 이름의 여인이 파키스탄에 가려는 목적으로 카쉬를 지나게 되었는데, 불행히 병에 걸려 많은 재물을 남기고 사망. 카쉬에는 그녀의 일가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산을 모스크 증축에 썼음. 이후 또 Zulpiya라는 잉지샤현 출신의 한 여인이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려고 바느질로 여비를 마련하여 길을 떠났으나, 페르시아에 도착했을 때, 전쟁을 만나 길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카쉬로 되돌아 와야만 했는데, 이 여인은 자신의 오랜 숙원을 보상하기 위해 남은 여비를 털어 사원을 증축하고, 대량의 토지를 구입하여 사원의 토지(瓦合甫)로 기증.

이어 1809년 카쉬의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이드카모스크도 부단히 중건과 시설 확충을 거듭. 1839년 카쉬 당정자는 도시의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모스크를 성내로 편입시켰고, 무슬림들이 사원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한적했던 모스크 주변은 북적거리게 되었다. 1873년 야꿉벡 정권은 종교를 이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해 각지의 禮拜寺와 묘지를 개수했는데, 이 때 이드카 모스크도 다시 한번 확장되어 비교적 대규모로 되었다. 그러나 후에 카쉬지역에 지진이 발생해서 일부 건축물이 무너지고 균열이 가서 20세기 초 이래로 여러 차례 개수공사를 하고 인공호수 등을 새로 조성하며, 모스크 전면에 이드카 광장을 만들었다.

신중국 성립 후, 1962년 신강성 문물중점 보호단위로 지정되면서, 정부 주도로 여러차례 개?보수 및 증축 공사를 실시했다.


: 아라비아와 위구르족의 건축풍격이 하나로 녹아들어 독특한 민족적 특색을 나타냄. 종교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의 회합 장소이기도 함. “이드카”는 위구르어로서 “축제의 광장”이라는 뜻. 국내외의 무슬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

: 그러나 외양은 의외로 초라해 보임. (직접 찍은 사진) 내부는 잘 갖춰져 있음.

: 위구르인들의 정신적 지주 같다.



②잉지샤현

: 총인구 20만, 위구르족 98.5%, 한족 1.5%

: 쿠샨강(庫山河)과 이그즈야강(依格zhi亞河)의 충적평원에 위치.

: 농업(밀, 옥수수, 면화, 보리) 위주/ 작은칼 유명

: 현 동남쪽으로 명나라 때(1529년) 세워진 모스크(艾提喀美其特淸眞寺) 있음.

: 잉지사는 ‘칼’이 유명.


5)호탄지구 : “絲路絹都”

: 총인구 150만 중 위구르족 97%(146만명), 한족4%(2.7만명)

: 총면적 25만 ㎢. 남한의 2.5배

: 1인당 연평균 수입 787元(*150="118050원)" 최하위권

: 1차산업 비중 65%로 신강 전체에서 제일 높음.

: 和田農場管理局

: 1개 시, 7개 현

: 옛명칭은 “于?”. 현 호탄지구에는 과거 皮山, 精絶(현재의 民豊, 니야), ?? 등의 왕국이 있었음. 우전국이 서한에 귀속된 후, 청대에 “和?”이라 불리우다가, 1959년 현 명칭인 “和田”으로 확정. 고대의 우전국은 서역 불교문화의 중심지. 기원전 5세기에 창시된 불교가 기원전 1세기 전후에 인도로부터 유입. 위진남북조 시기에 화전의 불교가 흥성하기 시작. 기원후 11세기 카라한 왕조가 우전국을 멸망시킨 후, 점차 이슬람교가 불교의 지위를 대체.

: 파란만장한 역사. 실크로드 남로3)상의 오아시스 도시로서의 번영, 불교국가 우전국으로서의 창성, 이슬람교의 동진 등을 겪음.

: 타클라마칸(생환불능이라는 뜻) 사막 가운데 있는 남도 최대의 오아시스 도시. 동쪽을 흐르는 백옥강, 서쪽을 흐르는 묵옥강(흑옥강) 사이에 끼여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연강수량이 30㎜도 안 되지만 두 강의 물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고대로부터 크게 번영할 수 있었음.

: 견직물. 당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족된 “비단을 전해준 공주”의 이야기는 호탄의 양잠과 비단직조 기술의 유구함을 말해줌. 오늘날 호탄은 현대식 견직물 제조 공장으로 그 명성을 계승하고 있음.

: 카페트, 화전의 카페트 공장은 신강 최대.

: 옥석 유명. 역대 지방정부가 중앙의 조정에 바치는 공물중 가장 귀중하고 주요했던 산품이 바로 화전의 옥이었음. 화전현을 지나는 玉龍哈什河은 옥석을 주울 수 있는 옥석강. “곤륜의 옥”

: 타림분지 남부의 식량, 면화, 양잠의 중요 산지. 과일, 박피호두. 각종 수공예품이 전시된 바자르. : 경지면적 239만 무, 화전의 포도재배 면적은 신강 포도재배 면적의 1/3


①피샨현(皮山縣)

: 총인구 20만, 위구르족 98%, 한족 1.4%

: 농업현. 주요 농작물은 옥수수, 밀, 녹두, 면화, 유채(겨자과 채소의 총칭. 배추,갓, 양배추의 세 종류), 참깨 등. 특산물로는 박피 호두가 있음.

: 피샨대모스크(皮山大淸眞寺), 阿zhi吾加木麻?, 布特勒克遺址 등의 명소.

: 작은 마을임에도 다른 지역보다 이슬람이 강함.

시장에서 모스크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지나던 사람들이 몇몇 모여들면서 강하게 못 들어간다고 제지. 자전거 타고 지나가던 한 청년이 “여기는 위구르인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라며 꺼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함. 우리를 한족으로 보고 그렇게 한 듯. 한족에 대한 적개심이 특별히 강한 듯. 회족이냐고 무슬림이냐고 물어보고 아니라니까 그냥 가라고 함. 그들의 분노. 시장 거리에서 만난 여인들도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사진 찍으려니까 단호하게 거부.


②호탄시

: 총인구 15만 중 위구르족 85%(13만), 한족 14%(2만)

: 농업 위주(밀, 면화), 농업+목축업 결합


6)투루판지구 : “火州”

: 총인구 52만 중 위구르족 71%(37만명), 한족 22%(12만명)

: 총면적 7만㎢,

: 1개 시, 2개 현(선선, 톡순)

: 1인당 년평균 수입은 2, 734元(*150="410100원)으로" 신강 전체에서 최고. 위구르족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높은 지역.

: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해수면 이하의 면적 이 분지면적 8.1%. 투루판 분지의 수원은 주로 뻐거다산과 카라우청산. 이 두 산은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여름에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 내리는 것이 투루판 지구의 강과 지하수의 주요 원천. 하계에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데 일년 강우량의 50%-80%가 하계에 분포. 동계와 춘계에는 물이 아주 적기 때문에 카알징, 소형 저수지, 최근에 발전된 관개시설에 의존하여 부족한 봄, 겨울의 물을 보충. 천산의 물은 대부분 지하로 침투해 버림. 화염산 기슭에서 지표의 경류와 체류 형식으로 화염산 이남의 평원까지 이름.

: 투루판의 독특한 환경은 기후에 많은 영향을 미침. 분지중심과 둘레의 산지대가 비교적 많은 차이. 분지 중심의 절대최고 온도는 47℃ 이상. 35℃ 이상일 때가 100일 이상, 아주 더운 40℃ 이상의 날이 35-40일, 여름 지표면 온도는 70℃에 이름. 그러나 분지의 주변 산 지구는 이러한 큰 더위는 없음. 특수한 지형과 기후조건으로 큰 바람이 많이 일어남. 투루판 분지내 연평균 강수량 16.6㎜, 증발량은 2,844.9㎜.

: 二二一田(병단직속개간지구)

: 경지면적 67만畝, 그 중에서 물은 대는 면적 66.5만畝.

: 양식작물(밀, 수수) 파종면적 66.8%, 경제작물(면화, 포도, 땅콩, 유채, 수박, 메론, 채소 등)은 28.8%, 포도재배면적 8-9만畝. 특히 포도가 매우 유명. 청포도를 비롯하여 색깔과 크기가 다양한 품종.

: 위구르족 지역 가운데서 유일하게 2차 산업 비중(54%)이 1차 산업 비중(19.2%)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신강 전체에서 2차 산업 비율이 최고.

: 공업기업 100여개. 전민소유기업이 39개에 불과한 것은 개체호인 향진기업이 60여 개에 이른다는 것으로 이 지역 고소득의 주요한 원인인 듯 함.

: 공업은 석탄, 화공 위주. 기계, 전력, 건재, 식품, 방직, 봉제, 피혁, 제지, 양조, 통조림 생산등의 공업이 있음. 화력발전 3개소, 수력발전 28개소.

①투루판시

-소공탑(蘇公塔: 어민탑)

: 현지의 위구르인들은 이곳은 투루판탑이라 함. 투루판시에서 동으로 2㎞ 지점에 위치. 1778년에 건축. 이 탑은 신강 최대의 고대탑이며 중국에서 유일한 고유의 건축풍격의 고대탑. 이 탑은 투루판 군왕 소라만이 아버지 어민허띠아오의 준거얼 귀족반란을 진압하는 과정 중 세운 혁혁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축한 것. 이 탑 밑에는 투루판 최대의 모스크가 있는데, 탑과 모스크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음. 모스크는 장방형으로 중간에는 전당이 있고 몇 천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음. 매 주마다 그리고 무슬림 절기면 이 곳은 무슬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함.



-어느 지역에서나 위구르족과 한족의 거주지역은 뚜렷이 구분됨. 같은 도시에서도 중심부에는 한족이 거주하고 주변부로 갈수록 위구르족이 많아짐.


-수시검문 등을 통한 일상에서의 민족갈등.

-시를 둘러싼 주변 현의 농작지로 중심도시를 먹여 살리는 구조가 뚜렷. 즉 주변 현의 위구르족이 중심도시의 한족을 먹여살리는 구조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위구르인 내부에서도 소득 수준에 따라 전통/ 현재적 생활양식을 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것 같음.


-무슨 일만 나면 어쨌든 위구르인들 몰려들고 봄. 특히 한족과 위구르족이 붙었을 때는 몰려들어 지켜보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동족의 편부터 들고 보려는 눈빛. 둘러싼 위구르인들 가운데에서 은근하면서 묵직한 反漢感情을 느낄 수 있었음.


-이리지구-위구르족, 카자흐족 관계

크즈러수 키르키즈 자치주-위구르족, 키르키즈족 관계

=">한족과" 붙었을 때, 카자흐족, 키르키즈족이 결정적 변수역할을 할 수 있음. 이들이 누구편을 들 것이냐?


=">이슬람교의" 유입-왕들로부터. 정치적 이유로. 위로부터 강요(?)된 종교. 오히려 정사의 영과 관련 있지 않을까? (정치적 자원으로서의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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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리카자흐자치주(伊犁哈薩克自治州)는 세 개의 지구와 한 개의 직할시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쪽으로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면서 천산산맥 북쪽에 위치한 이리지구(伊犁地區), 타청지구(塔城地區), 알타이지구(阿勒泰地區)와 타청지구 내에 위치한 꿰뚠시(奎屯市)가 그 관할구역이다. 자치주 인민정부는 이리지구의 중심지인 이닝시(伊寧市)에 위치해 있다. 자치주의 전체 인구는 360만 명으로 이 중 위구르족이16%, 한족이 45%, 카자흐족이 26%를 차지한다.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사막의 모래바람만 날리는 천산산맥 이남의 남강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은 신강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서 식량?식용유의 주요기지인 동시에 삼림자원이 풍성하며 신강 전체 초원 중 42%에 해당하는 초원이 펼쳐져 있는 신강 최대의 목초지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카자흐족들이 대부분 이 지역에 거주한다. 그러나 신강성 전체 124만명의 카자흐족 중 95만명에 해당하는 카자흐인들이 거주한다는 측면에서는 카자흐자치주라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강생산건설병단 휘하의 11개 農業師 중 제 4, 7, 8, 9, 10 등 5개 農業師가 이 자치주에 몰려 있으며, 전체 360만 인구 중 1/5에 해당하는 70만명 정도가 신강생산건설병단에 속해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중국정부는 카자흐스탄 및 몽고와의 접경지역을 따라 8개의 대외개방 국경무역시장(口岸)을 설치하고, 변경지역에 위치한 16개의 시와 현 및 이닝시, 타청시, 꿰뚠시 등 주요 도시를 대외개방지로 선정하면서, 이리카자크자치주를 소수민족지구의 개혁개방 시험구로 지정했다.

2) “카라”는 돌궐어, 회골어로서, “검은색”이라는 뜻. 북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돌궐, 회골족은 북방민족이었기 때문에 북쪽과 그 방향을 상징하는 색을 숭상하여, 검은색을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검은색이라는 뜻의 “카라”라는 말은 “숭고함”, “고귀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카라칸”은 “고귀하고 숭고한 카간”이라는 뜻이다.

몽골리아에서의 패권을 상실한 뒤, 타림분지의 북방 즉 호초(투르판), 베쉬발릭(오늘날의 짐사), 카라샤르, 쿠차 등지에 정착한 위구르 투르크인들은 과거 토하라인들이 살던 이 지역을 투르크인들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곳의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의 특징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세기에 카쉬가리아의 서부와 서북부, 그리고 일리 강과 이식쿨 지역에 자리잡은 카라한조 투르크인들은 위구르 투르크인과는 달리 이슬람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특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같이 무슬림과 투르크가 결합됨으로써 생겨난 영향력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이 지역에는 과거의 어떠한 잔재도 남아 있지 않다. 10세기 카쉬가르의 군주였던 사툭 부그라칸은 최초로 이슬람교를 믿은 위구르인(?). 955년경 사망. 백성들에게 무슬림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장려. 10세기 나머지 시기와 11세기 내내 서부 타림의 오아시스들과 추 강과 탈라스 강의 평원은 이미 모두가 무슬림이 된 그의 일족들이 나누어 갖고 있었음. 11세기 말 발라사군과 카쉬가르, 호탄은 카라한조의 부그라 칸 하룬(1102년 사망)에 의해 또 한 번 통일. 발라사군 출신의 유숩 하스 하집(Yusuf Khass Hajib)이 1069년에 저술한 《福樂智慧-》(Qutadghu Bilig)는 부그라 칸 하룬에게 헌정된 것. 카라한조 덕택에 카쉬가리아와 이식쿨 분지에는 1130년에 ‘우상숭배자’ 몽골인 즉, 북경의 거란인들이 그곳을 정복할 때까지 무슬림 투르크인들의 주도권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유라시아..> p.224-228

3) 유라시아 초원의 가로로 된 디는 북쪽으로 중부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삼림지대와 몽골, 만주 지방의 북변과 연결되어 있다. 이 초원지대 안에는 초원이 슬며시 사막으로 바뀌는 세 지역이 있다.....이같은 초원에 대한 사막의 우위는 현재 중국령 투르키스탄인 타림분지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지역은 초원의 유목생활에서 유리되어 -물로 sgkd상 북방 유목민의 위협이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도시적이고 상업적인 오아시스의 특징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오아시스들이 사슬을 이루어 이란, 인도, 지중해 세계 등 서방의 거대한 정주문명과 동아시아, 주로 중국의 문명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타림 강의 남쪽과 북쪽으로 두 개의 루트가 형성되었는데, 북방 루트는 돈황-하미-투르판(車師)-카라샤르(焉耆)-쿠쳐(龜玆)-카쉬가르(疎勒)-페르가나를 거쳐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어졌고, 남방 루트는 돈황-호탄(于?)-야르칸드(莎車)-파미르 협곡을 지나 박트리아로 연결되었다.<유라시아..> p.24

출처 : 여호와닛시
글쓴이 : 임형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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