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위구르 요약
1. 지형과 지리
-“신강”(新疆, 신쟝, “새로운 영토”, 1884년, 청/ “중국령 투르키스탄” “동투르키스탄”)
-“위구르”(“단결, 연합”, 55개 소수민족 중 장족, 만주족, 회족, 묘족 다음으로 다섯번째)
-지형(산맥, 분지와 사막, 오아시스 도시)
-북강, 남강, 동강 북강(한족, 카자흐족, 목초지, 강수량 풍부, 산업화, 발전된 경제, 부유) 남강(위구르족, 농업, 건조, 사막, 낙후) 동강(위구르족, 한족, 부농)
-자치구, 자치주(5개), 지구(8개) 1)창지 회족 자치주 2)뽀얼타라 몽고 자치주 3)빠인궈러 몽고 자치주(35%) 4)크즈러수 키르기즈 자치주(64%) 5)이리 카자흐 자치주 : ①알타이 지구 ②타청 지구 ③이리 지구(27%) ④하미 지구(20%) ⑤투르판 지구(71%) ⑥악수지구(77%) ⑦카쉬지구(90%) ⑧호탄지구(97%)
<< 신강성 각 지역별 경제지수(1992년) >>
2. 개관
(1)지리적 위치 : 중국의 서북지역에 위치. 몽고, 러시아, 카작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직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8개 국가와 접경.
(2)면적 : 164만 7천㎢(중국의 1/6, 남한(98,500㎢)의 17배)
(3)총인구 : 1580만명(48개 민족, 주요민족은 13개 굵은글씨는 무슬림) 위구르족(748만, 46.7%), 한족(616만, 38.4%) 카자흐족(118만, 7.4%), 회족(72만, 4.5%), 키르키즈족(15만), 몽고족(14만), 석백족(3.6만), 타직족(3.5만), 만주족(1.8만), 우즈벡족(1.2만), 러시아족(0.84만), 따우르족(0.57만), 타타르족(0.41만)
(4)무슬림 인구 : 760여만명(10개 민족, 58%) : 위구르, 카작, 키르키즈, 쌀라, 우즈벡, 타타르(이상 투르크계), 회족(투르크족+한족), 타직(페르시아계), 똥시앙, 빠오안(몽골계), (5)수도 : 우루무치
(6)행정구역 : 3개 직할시, 5개 자치주, 8개 지구, 15개 현급시, 64개 현, 6개 자치현
(7)주요도시 : <북강> 우루무치, 이닝 <남강> 카쉬(카쉬가르), 샤쳐(얠캔), 호탄, 악수, 쿠쳐, 쿠얼러 <동강> 투르판, 하미 (8)기후 : 대륙성 건조 및 반건조 기후 지역. 북부는 춥지만 많은 비와 눈 (연평균 강수량 200㎜, 1월평균 -20℃, 7월평균 20℃) 남부는 따뜻하면서 건조. (연평균 강수량 50㎜, 1월평균 -10℃, 7월평균 25℃)
(9)언어와 문자 : 중국어와 위구르어가 공용어, 기타 소수민족 언어도 자치주별로 사용.
(10)주요산업 : 농업, 석유채굴업, 석유가공업, 방직업, 식품업, 목축업 <북강>한족, 회족-운송업, 무역 / 카자흐족, 몽골족-목축업, 유목생활 <남강>위구르족-농업
(11)주요 농축산물 : 면화, 식용유곡물(옥수수, 땅콩, 해바라기, 콩류)은 전국 최고 사탕무우, 하미과(메론), 포도, 홉(맥주원료), 사과, 배 등 : 몽골의 뒤를 이어 중국 두 번째의 목축지역(양, 소, 말, 낙타 유목)
(12)주요 광산자원 : 석탄, 석유, 천연가스
3. 위구르 민족사
742-840 오르혼 위구르 제국 (100년)
840-1284 카라한 왕조(카쉬가르, 이슬람교) vs 고창회홀칸국(투르판, 불교) (450년) {10세기 초 투르크족 최초의 무슬림-술탄 수툭 부그라칸} {카라한 왕조 이슬람 국가 된 후 위구르 문화의 제 1 전성기}
1225-1514 차카타이 칸국 치하 (450년) {14세기 중반(1352) 몽골칸의 개종-투글룩 티무르칸} {15세기 투르판 이슬람화를 끝으로 신강전지역 이슬람화} (몽골족+위구르족+이슬람화 ----> 1514-1680 얠캔 칸국)
1514-1678 얠캔칸국 (150년) {위구르 문화의 제 2전성기} -투르판 불교 문화 흡수. 불교에 대한 이슬람의 확고한 승리 -왕들에 대한 이슬람 종교귀족(호자)의 영향력 증가 -호자들 간의 정권다툼 도중 아팍호자가 서몽골을 끌어들인후, 서몽골의 속국으로 전락, 멸망.
1680-1759 서몽골 치하 (80년) {위구르인들은 이 시기부터 아팍호자 때문에 자신들의 식민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함} {서몽골은 불교를 신봉했으므로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이교도의 지배하에 있게 된 셈}
1760-1911 청조 치하 (150년) -1864-1876 야쿱벡 정권 잠시 청으로부터 독립 -1884 청이 다시 이 곳을 정복한 후 “신강”(새로 편입된 영토)이라는 이 름으로 이 지역의 소유권이 청에 있음을 명백히 함. -1892-1948 스웨덴 선교사들 사역
1911-1949 국민당 군벌 치하 (40년) -“위구르” 민족명칭 부활, 카쉬가르 인쇄소 기독교서적 출판 -1933 독립시도 -1938 스웨덴 선교사들 추방/ 1939 신약성경번역/ 1939-40년대 순교/ 1946 구약성경번역 -1944-49 독립시도 -1949년 산동성에서 “서쪽으로”의 비전을 받고 출발한 한족 그리스도인들 하미에 도착(서북 영공단)
1949-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치하 (50년+?) -1955 “신강위구르자치구”로 선포됨 -1966-76 문화대혁명, 종교대탄압 -1980년대 모스크 재건, 80년대 말 개방 시작. 종교활동 규제 완화 -1987 외국인 선교사들 다시 들어오기 시작 -1990년대 구소련 붕괴후 분리독립운동 증가, 종교활동 규제 다시 심해짐. -2000년대 서부대개발(?) -2002년 여름 카자흐스탄의 위구르인 그리스도인들 준비중
1892-1938 스웨덴 선교사들 1939-40년대 위구르인 그리스도인들의 순교 1949-현재 한족 그리스도인들 (서북영공단, 변전복음단) 1987-현재 외국인 선교사들 2002 여름 카작흐스탄의 위구르인 그리스도인들
(1)위구르 부족국가-샤머니즘
(2)회홀칸국(오르혼 위구르제국)(742-840)-마니교(국교)
(3)분산과 위구르 왕국들(840-1284)-이슬람교 vs 불교/남강지역 이슬람화 : 정착화(유목민족--->농경민족) : 분산 후 두 개의 중심지 형성 1)고창회홀칸국(카라호자 왕조, 과주국)(840-1284)-불교 2)카라한왕조(840-1230)-처음에는 불교, 마니교를 신봉하는 국가였으나 왕자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한 쑤툭이 3대 칸(술탄 쑤툭 부그라칸)1)으로 등극한 후, 이슬람교가 국교로 선포되어 중앙아시아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됨.
(4)몽골족의 지배(1225-1759)-불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승리/신장 전지역 이슬람화 : (1225년 차카타이칸국에 구획되어 배분됨) (몽골제국 초기에는 이슬람을 싫어했지만, 13세기 중반 수피운동으로 인해 이슬람 확장)
1225-1397 차카타이 칸국 치하에서 대립 계속 카라한왕조(카쉬가르, 이슬람교) vs 고창회홀칸국(투르판, 불교) 1352 투글룩 티무르칸2)이 이슬람교로 개종.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신강 최초의 몽골인으로서 그의 개종으로 신강에서 이슬람교가 불교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점하기 시작. 15세기 투르판 이슬람화. 신강 전지역 이슬람화3). 1514-1680 얠캔칸국 지배층은 몽골인이었지만 위구르인들의 이슬람 문화에 점차 통합되어 위구르인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했음. 전민족(몽골족+위구르족)의 이슬람화. 투르판 불교 문화는 카쉬가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화에 완전히 흡수 통합됨. *호자-아팍 호자4) 1680-1759 서몽골 치하
(5)만주족의 지배(1759-1911)-이슬람 공고화 : 1759-1862 만주족 치하. 간접지배. 일리가 군사지배의 중심지
1864-1876 야꿉벡 독립정권/일리는 러시아 지배하에
1876-1911 다시 만주족 치하. 직접지배로 전환. “신강”(1884). 한족이주시킴. (1892 스웨덴 선교사들 들어옴)
(6)혼란기(1911-1949)-다시 “위구르”라는 이름으로 : 한족(국민당)과 소련/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쟁탈전 : 원래 “위구르”라는 명칭은 투르판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를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위구르 제국 멸망 후 고창회홀칸국을 이루고 살았던)을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로 전향한 15세기 이후부터는 쓰이지 않았던 명칭이었다. 무슬림이 된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을 “투르크인” 또는 “무슬림”으로만 지칭해왔다. “위구르”는 불교도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0년대 소련이 자국 내에, 특정한 민족이름이 없이 오아시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위구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명칭을 1934년 신강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국민당 군벌이 채택하면서, ‘신강지역의 오아시스 주변에 정착해 사는 투르크계 이슬람교도들’을 다시 “위구르”라 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구르”라는 명칭은 실로 500여년 만에 불교도를 가리키는 것에서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부활되었다.
1933 동투르키스탄이슬람교공화국(카쉬가르, 영국의 지원) (1939 스웨덴 선교사들이 신양성경 번역. ) 1944-49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일리, 러시아의 지원 )
(7)한족의 지배(1949-현재)-“위구르족은 무슬림이다” : 공산당 치하. “신강위구르자치구”(1955) : 중심지 이동(카쉬, 일리 ----> 우루무치) : ‘신강생산건설병단’5). 북강에 신강의 산업화를 위한 한족 유입. 경지개간.
★ 50년대-70년대 1954년 헌법에 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종교활동은 금지. 신강에 대한 통치 강화. 모스크가 주요 공격대상. 많은 모스크들 훼파됨 1950년대 중?소 간의 군사충돌 1955 “신강위구르자치구” 공식선언 1962 대약진 실패 후 대폭동. 수천의 위구르인, 카자흐인들 일리에서 소비에트로 망명. 구소련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 20만명의 위구르인 1966-76 문화대혁명. 종교탄압의 절정. 모스크 및 코란 파괴. 성직자들 살해. 한족/위구르족 갈등 최고.
★ 80년대 1980년 자유화정책 추진. 1983-87 모스크 급속 재건됨.
★ 90년대-현재 구소련 붕괴후 분리주의 운동 증대. 엄격한 탄압. 종교활동 규제. 새로운 모스크 건축 제한. 모든 종교학교 철폐. 1996 “엄타” 대규모 종교탄압 1997. 2. 이닝에서 대폭동 발생
4. 정치 : 동화정책, 분리주의 운동 철저 탄압
“지금 신강에는 이미 위구르족보다 한족이 더 많아요. 그리고 한족은 지금도 계속 이리로 오고 있어요.....우리 주변에는 우즈벡족, 카자흐족, 키르기즈족들이 세운 그들의 나라들이 있지요. 그렇지만 위구르족이 세운 나라는 없어요. 한족은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나라를 세우는 대신, 우리를 자기들과 똑같이 만들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계획은 지금 성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한어를 모르면 좋은 직장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위구르 사람들이 모두 한어를 공부하고, 그러면서 생활, 생각, 옷, 머리모양 등이 점점 한족처럼 변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위구르 여자들 중에서도 스카프도 안 쓰고, 화장하고, 바지 입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하면서 한족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생각에 위구르 여자들은 점점 나쁘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여성은 그 민족의 어머니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점점 잊어버리고 있어요.... 한족은 이슬람교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신강의 이슬람교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점점 더 많은 한족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우리의 저항력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요.” (20세, 여학생)
“만약 싸움이 일어나면 내가 옳고 한족이 그르다 할지라도 경찰은 언제나 한족 편을 들지요.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아이를 한 명 더 가질 수 있지만, 그것도 언제 중단될른지 모르지요..뭐...이미 그들은 8살에서 18살 사이의 남자아이들이 모스크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거든요..” (20대, 남성)
“난 당신에게 한족이 위구르족을 어떻게 대하는지 말해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말 할 수 없군요. 경찰이 와서 잡아갈테니까요” (젊은이)
“자, 날 봐요, 나는 어디 병신도 아니고 건강한 남자고 교육도 받을만큼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중국 회사들은 나를 채용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기차역에를 한 번 가보면 당신도 알겠지만, 한족들은 이 곳에 방금 막 도착해서도 모두들 일자리를 얻어요. 이건 아예 우리를 몰아내려는 정책이에요..정책...정책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거라구요...” (젊은이)
-장쩌민 주석은 매년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신강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지 말 것을 촉구. 중국정부는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중앙아시아 국가와 체첸 내의 “聖戰”을 주장하는 세력과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 (구소련 시절부터 위구르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어왔던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은 이제 중국과의 원만한 경제관계를 위해 ,자국의 발전에 위구르족 문제가 걸리적거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중국과 협력)
-현재 신강에는 무장 독립운동 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중국정부의 경제, 종교 정책에 대한 일반인들의 분노와 불만은 점점 더 고조되어가고 있음.
-티벳의 달라이 라마처럼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없지만, 독일, 터키, 미국 등에 망명한 위구르 지식인들(다이아스포라 위구르인)이 활동하고 있음. 그들은 위구르 관련 소식들은 발간하고 있고 최근 워싱톤에서 “위구르인권연합”을 조직하여 위구르인의 인권문제에 대해 세계적 관심을 유도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음. 이는 북경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하여 양자간의 갈등은 더 심해질 전망.
-위구르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좌절.
(1)밀려오는 한족
-정책적 이주--->경제적으로 유입 유도 -신강개발붐을 타고 내지의 사천, 섬서와 같은 가난한 지역에서 이주노동하는 사람들 유입. -한족들이 일자리를 다 차지하므로 위구르인들은 직업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 현재 실업문제는 아주 심각. 위구르 남성들 분노. 한족과의 갈등 계속 커지고 있음. -독일의 위구르 운동가 에르킨 알프테킨은 “민족 감정은 터지길 기다리고 있는 시한폭탄과 같다. 투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한족이 들어온다는 걸 의미한다”고 언급. -밀려들어오는 한족들로 인해 이들은 흡수되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정체성이 더 강 화될 것인가?
(2)규제와 감시
-학교에서 선생, 학생 불구하고 ‘나마즈’(기도)나 ‘라미잔’(금식) 등을 하다가 들키면 퇴학. -8살부터 18까지의 소년들 모스크 출입 금지 -종종 범죄자들의 공개재판이 이루어짐.
(3)산아제한 정책
-도시와 농촌(소수민족은 도시에서는 2명, 농촌에서는 3명까지 낳을 수 있음) -호적에 올려지지 못한 아이들: ‘흑사회’(黑社會)
(3)언어&교육 정책
-‘民考漢’(한어로 교육받는 위구르 학생들, 일리, 투르판, 하미) -‘民考民'(위구르어로 교육받는 위구르 학생들, 카쉬가르, 호탄) -한어냐? 영어냐? 우루무치 신강 대학 캠퍼스에서 마주쳤던 위구르족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와 기대로 다가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입학한 한족 젊은이가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을 때 지배민족의 언어인 한어(중국어)를 공부해야하는 위구르족 젊은이에게 이미 시작부터 기회는 불평등할 뿐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절규하던 우리의 젊은 시인을 떠올려 볼 때 어두워만 보이는 민족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위구르족 젊은이들의 삶의 무게는 짐작할 만합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5. 경제 : ‘개발’인가? ‘착취’인가?
“서부대개발이라고 들어 봤어요? 쳇.....그건 한족 자기네들을 위한 거에요. 신강에는 자원이 많지요. 한족들은 우리한테 있는 자원들을 다 가져가고 있어요.” (20세, 여학생)
(1)90년대 ‘신강붐’ 현상
-구소련 붕괴, 동서격차로 인한 불만 -1990, 유라시아대륙횡단철도 개통. 동서연계의 중심지로 부상 -1992, 신강경제개발구 -1993, 신강중점개발계획
(2)‘서부대개발’과 위구르족
[중국, 서부개척시대] 왜 서부개발인가 중국 당국은 서부개발을 해야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가 국가발전 전략.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덩샤오핑(鄧小平) 은 "동부 연안 발전이 달성될 때까지 중서부가 참고, 동부가 발전된 다음엔 서부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며 이때는 동부가 참는다" 는 원칙을 세웠다. 따라서 동부지역이 어느 정도 발전한 지금이 균형잡힌 국토발전을 위해 서부 개발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3단계 발전전략을 세웠는데 첫단계인 원바오(溫飽.배불리 먹는다) 단계는 80년대 말 완료했다.이달 초 9.5(9차 5개년 경제사회발전 계획) 를 마무리하면서 열린 중국 공산당 15기5중전회(제15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 에서는 둘째 단계인 샤오캉(小康.어느 정도 여유를 가진다) 단계의 완료도 선언했다.남은 단계는 선진국 진입을 의미하는 사회주의 현대화. 중국은 서부 개발로 선진국 진입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둘째가 정치적 배경. 서부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대부분이 살고 있다. 티베트 자치구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분리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낙후한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분리 움직임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게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다. 지도층들이 "경제투자가 정치투자" 라며 서부에 중앙정부 예산의 70%를 쏟아 붓겠다는 것은 이같은 우려를 바탕에 깔고 있다. 서부의 안정으로 국가단결과 사회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셋째가 경제적 측면.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동남아 시장이 무너지면서 수출에 큰 타격을 본 동부 연안 산업체들에 서부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동시에 서부는 지하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중국의 3대 교역상대국인 한국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부 대개발 계획은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이 밀집해 있고 중국 내에서도 심하게 낙후되어 있는 서부 지역의 경제를 개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민족들의 감정을 경제적인 발전을 통해 달래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서부 대개발 계획이란 미명 아래 위구르인들의 땅인 신강 지역에 수많은 한족들이 계속 이주해 들어오고 있고, 수많은 지하자원들이 발굴되어 신강 밖으로 실려 나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부 대개발 계힉은 그 땅의 주인인 위구르 민족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개발을 통해 생겨난 고용의 기회는 위구르족이 아닌 새로 이주해 들어온 한족에게 주어지고 있어 개발 이전보다도 지배 민족인 한족과 피지배 민족인 위구르족 사이의 불평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구르민족의 입장에서 서부 대개발 계획은 신강을 초토화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답니다. 지난 10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중국 서북부에서 130억톤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기사가 보도된 바 있습니다. 서부 대개발 계획을 통해 신강의 석유와 석탄, 가스는 계속 파헤쳐져 중국 내륙의 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 자리를 엄청난 양의 물로 채워 넣지 않는다면 이 지역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피할 수가 없답니다. 불행히도 신강의 2/3는 사막이고, 물은 그리 풍부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위구르 민족에게 서부 대개발 계획은 반갑지 않은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 3단계, 50년 장기계획, 4대 프로젝트 ▲
2000-2005 개발초기단계. 주요정책 수립. 기초시설 건설 2006-2015 대규모 개발단계. 서부지역 투자 확대와 함께 중국판 ‘골드러쉬’가 본격화할 시기. 2016-2050 전면발전단계. 자체투자 여력 확보, 서부지역의 시장화, 국제화 강화
①靑藏鐵路(청해와 티벳트를 잇는 철도 건설) 칭하이성 거얼무-티벳 라싸-윈난성 다리를 잇는 철도 건설. 이 공정이 완성되면 지금까지 기차가 없던 티벳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될 예정
②南水北調(남쪽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들이는 대수로 프로젝트) 티벳고원, 칭하이 고원, 쓰촨 분지를 흐르는 강을 황하와 연결하는 1800km의 대수로를 만 드는 것. 현재 수도 북경을 포함한 중국 북부지역은 황하가 말라가고, 고비사막이 계속 남 쪽으로 내려오면서, 수자원이 딸리고 있음. 그래서 티벳 최대의 강 야루창푸강(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발원하는)의 물을 물이 부족한 중국내륙으로 끌어들여서 쓰겠다는 의도. 수 로 일대의 황무지를 농경지로 바꾸고, 목초지 형성. 대수로가 통과하는 6개 강에는 19개의 대형댐과 9개의 발전소를 건설해 농업, 공업 용수와 전력을 공급. =">이상은" 주로 티벳 관련
③西氣東輸(서쪽의 천연가스를 동쪽으로 연결시키는 천연가스관 건설 프로젝트) 신장 타림분지의 천연가스를 4,200km 떨어져 있는 동부 상하이 일대로 끌어와서 에너지원으로 쓰겠다는 의도. 140억$ 투자.
④신실크로드 랜드브리지 프로젝트 깐수성, 칭하이성, 신장성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개발하여 이 일대를 종합석유화학 공업지역으로 변모. 신장을 중앙아시아와 중동, 유럽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만듦. =">이상은" 주로 신강 관련
-중국정부는 신강을 밟고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겠다는 야심. 신강과 접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배후지로 해서 신강을 성장시키려 함. 장쩌민 주석이 매년 상해에서 중앙아시아 5개국(올 해 우즈벡스탄까지 가입해서 이제 6개국이 되었음) 정상회담을 여는 이유가 여기 있음.
-서부대개발은 서부와 동부를 단순히 경제적으로 결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한족의 대대적인 서부이주를 통해 정치, 사회적인 통합 및 안정까지 이끌어낸다는 복안. 그러나 한족의 이주는 현지 위구르인들의 분노를 사서 민족간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음.(도대체 한족의 이주를 통해서 어떻게 사회적, 민족적 통합을 이루어낸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감.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민족통합은 한족과 위구르족 두 민족이 공존하는 통합이 아니라 위구르족이 흡수(한족화)되는 통합임을 알 수 있음. 민족통합, 사회안정은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무조건 한족들로 밀어붙이는거다) 중국정부는 현지의 위구르인들이 분노하건 말건 계속 한족들을 신강으로 끌어들여서 남강까지(북강은 이미 장악) 한족들로 하여금 완전 장악하게 만들고 있음.
="=>신강의" 내부식민지화(자원공급지, 상품시장, 동부의 실업률 해소) ="=>철도와" 도로 건설의 의미 :진정으로 이 지역의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병원에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고, 외딴 지역을 좀 더 넓은 시장과 연결시키는 작은 간선도로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현재 중국정부는 거대하고 돈이 많이 드는 철도,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만을 확충하고 있음. 이는 1)서부의 자원을 신속히 동부로 빼돌리고 2)폭동 발생시 진압 군대가 신속히 진입하게 하며 3)내지의 한족들이 좀 더 손쉽게 신강으로 유입되어 들어올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진정하게 소수민족을 위한 개발이라고는 볼 수 없음. (물론 이로 인해 어느정도 소수민족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기는 하겠지만 중국정부의 기본적인 동기는 여전히 의심스러움. 일제시대 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철도와 도로 건설했던 것과 비슷한 거지요)
주목!! 그렇다면 서부대개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6. 위구르족 농민생활
-집단농장 -부업(가축사육, 수공예품(카페트, 돕바) 제조) -잉여자금은 양 구입 -새로운 계층 불평등(위구르족 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 가속화) -위구르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보다 카쉬가르 사람, 아투스 사람, 호탄 사람, 악수사람, 등의 지역별 정체성 강함. 각 도시별로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인 듯. (우리가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하는 것처럼?)
-로말 (특별히 카쉬가르 및 호탄의 위구르족 여성들이 착용하는 얼굴 전체를 다 덮는 고동색 천) 로말을 착용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직장에 다니지 않는 전업주부로서,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집안일을 돕다가 농부나 소상인에게 시집 간 여성들이다. 이들은 집에서 돕파나 옷을 만들거나, 수를 놓아 부업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저학력 소지자들인 이들이 시집을 가면, 시집간 후 3일 후에 시어머니가 쓰고 다니라고 하면서 로말을 내어준단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로말 안에서는 예상외로 바깥이 잘 보인다. 본인이 원해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시어머니와 남편의 권유(?)로 쓰게 되는 것 같다. 1966년 이전까지는 흰색비단을 사용하여 만들었었는데, 1966년 이후부터는 현재의 로말(갈색천)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로말이 보편화되게 되었다.
1) 신강지역에 이슬람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875년 최초의 페르시아계 이슬람 왕조인 사만 왕조의 한 왕자(앱부 내씨르 사마니)가 정권을 잡으려다가 실패하여 인접한 카라한조로 망명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쑤툭은 당시 카라한조의 칸(왕)이었던 오굴챡의 조카였다. 원래 왕권은 쑤툭의 것이었으나, 쑤툭이 어리다는 이유로 삼촌이 섭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망명한 내씨르는 쑤툭에게 이슬람교를 전하였고, 10세기 초 쑤툭은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인으로서는 최초로 무슬림이 되었다. 원래 카라한조는 불교와 마니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칸인 오굴챡은 특히 이슬람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왕권을 넘겨주지 않는 삼촌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쑤툭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내씨르 왕자와 연합하여 삼촌인 오굴챡에 대해 지하드를 발동하였고,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력의 도움으로 마침내 삼촌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 제 3대 칸에 등극, 술탄 쑤툭 부그라칸이 되었다. 이로 보아 그의 개종에는 정권 탈취라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955년 그가 사망한 뒤, 960년 그의 맏아들이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카라한 왕조는 중앙아시아 최초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되었다. 쑤툭의 개종은 신강지역에 이슬람교가 유입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 때부터 카라한조의 수도였던 카쉬가르는 이슬람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타림분지의 남북 가장자리는 모두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 데에는 시종 불교세력과의 마찰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지하드 정신으로 불교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1006년경에는 쑤툭 부그라칸의 증손이 불교를 신봉하던 우전국(현재 호탄 일대)을 점령함으로써, 이슬람교가 남강지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1세기부터 남강지역에서는 아랍어 자모가 점차 회골문(위구르 전통문자)을 대체해 갔고, 11세기 후기에 저술된<쿠탇구 빌릭>(福樂智慧),<투뤀틸 디와니>(突厥語大辭典)의 양대 거작은 카라한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와 투르크문화의 결합(카라한 이슬람-위구르 문화)이 이미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쿠탇구 빌릭>(복락지혜)는 이슬람교의 도덕표준과 가치관을 투르크어를 사용하여 저술한 것이고, <투룩틸 디와니>(돌궐어대사전)은 아랍어로 씌여진 투르크어 사전이다.
2) 차카타이칸국의 카간인 투글룩 티무르가 몽고의 왕으로는 최초로 무슬림이 되어 신강 전지역에 이슬람을 전파시켰다. 그는 신강의 이슬람화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고, 백성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불교 지역에는 지하드를 발동시키는 등 각종 수단을 사용했다. 이후 15세기경에는 이슬람교가 악수, 일리, 투르판 지역까지 전파되어 신강 전지역이 이슬람화되었다. 투글룩 티무르가 이슬람교에 대해 가졌을 수도 있는 정신적 매력과는 상관없이, 그가 개종한 이유에는 서투르키스탄 지역을 손에 넣으려는 목표에다 개종으로 얻게 될 정치적 이익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얻기 위해서 쿠란식으로 엎드려 절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3) 몽고칸들의 장기적인 노력으로 인해 이슬람교는 천막생활에 익숙한 몽고인들의 마음에 점차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쯤에는 이슬람교가 동강의 투루판과 하미 지역에서도 우세를 점해서 각기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위구르인들의 통일 종교가 되었다. (카쉬--> 호탄 --> 악수 --> 일리 ---> 투루판, 하미) 이슬람교 문화와 사상의 영향 아래, 각 지역의 위구르인들의 언어, 문자, 풍속습관, 도덕규범 등이 점차로 일치되어 갔다. 차카타이 몽고인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위구르인들과 통혼하면서 점차 정주민화 되어, 위구르족에 흡수, 융합되었다. 4) 위구르 사람들은 17세기 즉 얠캔칸국의 후반기를 “수피즘의 세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명목상 칸이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호자”라고 불리우는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종교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수피즘을 전도하기 위해 사마르칸드나 부하라 같은 곳에서 얠캔칸국으로 들어온 종교집단에 불과했으나 점차 수피즘에 취한 얠캔칸국의 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하여, 정권을 조종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수피즘 종교귀족들 즉 호자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백산당’(白山黨)과 ‘흑산당’(黑山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즉 백산당과 흑산당은 신강에서 이슬람교의 양대 주요 파벌이었던 것이다. 이 양대 파벌의 조종 하에 수도 얠캔과 지방정권 사이의 정권투쟁이 끊이질 않았고 그들의 정권다툼 가운데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얠캔 칸국은 이 두 파벌의 상호 투쟁 중 멸망되었다. 이 얠캔칸국의 멸망을 초래한 인물이 바로 아팍호자이다.(카쉬가르의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그는, 잘 나가던 위구르인의 얠캔칸국, 위구르 문화의 전성기를 망쳐놓은 몹쓸 수피놈...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 멸망경위는 이러하다. 1667년 압달라칸이 사망하자 그의 큰 아들 욜바스가 백산당의 지지 아래 칸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흑산당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욜바스의 동생 이스마일을 칸으로 등극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670년 4월 2일 이스마일과 흑산당 수령들은 악수에서 출발, 카쉬가르로 진격해, 얠캔까지 곧바로 쳐들어갔다. 이스마일은 형으로부터 칸위를 빼앗고, 얠캔칸국의 새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형을 지지했던 백산당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백산당의 수령 아팍호자는 간신히 카쉬가르를 탈출하여 서몽골(천산산맥 이북 즉 지금의 북강지역에 준가르라는 강력학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에 지원을 요청했고, 1678년 서몽골은 아팍 호자를 앞세우고 카쉬가리아를 정복했다. 이렇게 해서 카쉬가리아(천산산맥 이남, 타림분지, 지금의 남강지역)는 다시 통일이 되었지만, ‘무슬림 신권정치’ 아래에 새로운 몽골 제국인 준가르의 속국으로 전락, 150여 년간 지속된 얠캔칸국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라를 잃은 위구르인들은 그로부터 약 70년간 서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물론 아팍 호자와 그의 일족은 몽골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며 위구르인들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아팍 호자는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적을 거꾸러뜨리고 정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위구르인들이 독립을 잃고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백산당과 흑산당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양측은 앞을 다투어 몽골 지배층에게 잘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제압하려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 위구르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5) 공산혁명 시기의 인민해방군을 전신으로 하는 신강지역의 독특한 생산조직으로서 농?임?목축업에서 공업 및 관광업에 이르기까지 신강 전 지역의 경제활동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조직이다. |
'중앙아시아진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어느 대학생의 배낭여행기 (0) | 2007.02.26 |
---|---|
[스크랩] 위구르 분리독립운동사 (0) | 2007.02.26 |
[스크랩] 신장의 주요 지구(地區) (0) | 2007.02.26 |
[스크랩] 신장 위구르 지역연구 자료 (0) | 2007.02.26 |
[스크랩] 최근 러시아 기업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은어에 대해(1) (0) | 2007.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