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8일 토요일 - 향비묘에 가다
카스 시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광안내지도, 향비묘는 안내판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안내되어 있는데 저기에서 20로(路)를 가야한다고 쓰여있다. 꽤 먼 거리다.
어디부터 구경을 해야 할까? 가이드북에 소개된 버스노선을 적어왔지만 그동안 너무 무리를 했는지, 기차표 구하느라 그랬는지 몸이 녹작지근 피곤해서 모든 게 귀찮기만 하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향비묘(샹페이무 香妃墓)로 갔다. 파키스탄의 경험처럼 내릴 곳을 잊을 것 같아 버스 차장과 주변 사람에게 계속 ‘향비묘 간다.’고 내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이 버스 종점이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것에 비하여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향비묘,
향비묘 앞에는 버스와 몇 대의 택시 그리고 먹을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있고, 특히 단체손님이 오는지 식당도 번듯했다. 성문같이 생긴 이슬람식의 문에 파란색으로 기하학적인 무늬가 질서 있게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국가지정문화재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카슈가르(Kashgar)’의 관광목록 1호로 지정되었는지 가이드북마다 향비묘(香妃墓)에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가이드북에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본다.
향비묘(샹페이무 香妃墓)는 카스의 북동쪽에 위치한 능묘로, 1640년 이 지방의 권력자인 ‘아파 호자’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향비묘라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실제로 향비묘라기 보다는 ‘호자 가족들의 묘’이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향비(香妃)의 고향은 바로 ‘카슈가르(Kashgar喀什)’다. 정설은 없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향비는 이 지역 종교귀족 가문인 호쟈 가문의 딸인데 어느 기록에는 카슈가르의 한 추장의 부인이라고도 하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2살 때(1756년), 혹은 26살 때(1760) 청(淸)나라 건륭제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어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혹은 28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 망향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에는 동릉에 묻혔는데, 124명의 카슈가르 사람들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시체를 운구하여 ‘호자가족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또 카슈가르 사람들은 요즘에도 죽은 뒤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건륭제라면 청나라 전성기 때의 황제가 아닌가? 건륭제라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정권을 누르기 위해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가 호화스러운 자금성(紫金城)에서도 사랑하는 정인(情人), 또는 변방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살을 하였다는 것은 조금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중국의 통치를 받는 위구르인들에게, 과거 건륭제의 후궁으로 끌려가서 외롭게 죽은 향비의 눈물나게 슬픈 이야기는,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자극해줄 수 있는 훌륭한 소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서 한족(漢族)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위구르인들의 가슴 속에 아직도 ‘아픔과 저항의식이 깔려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향비묘는 중국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것 같다. 묘소안에 심은 은사시나무의 흰 살결위에 이렇게 두사람의 사랑의 밀약을 서 넣은 것이 많았다.
매표를 하고 문을 들어가면 곧게 뚫린 길 오른편으로 벽돌로 쌓은 허름한 문이 나타나는데, 문 안쪽으로 사람들이 번잡하다. 게시판을 보니 옛날 전통복장을 빌려 입고 정원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또 시간을 정해서 민속공연을 한다며 그 입장권을 팔고 있다.
향비묘 지구 - 정확하게 아파호자의 가족묘 - 에 잠들어 있는 '아파호자 가족'들의 무덤들, 죽어서도 메카를 향해야 하는 무슬림들의 저 처연한 질서를 보시라!
특별한 감흥은 없다. 단지 지금 보고 있는 부분은 중요한 묘역인 것 같고, 반대편 담을 넘어서도 묘역은 계속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향비의 묘’가 어느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곳도 제사청(祭祀廳) 같은 곳이 있는지 중요한 묘역이 잘 보이는 부분에 하나의 건물이 있다. 딱히 그렇다는 것 아니고 건물의 위치상 짐작해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향비의 묘가 있어야 할 텐데 특별해 보이는 무덤은 찾을 수 없고, 단지 모든 무덤이 한쪽방향으로 질서 있게 만들어 진 것이 눈에 뜨일 뿐이다.
묘지의 반대쪽으로는 푸른색 돔을 가진 단층의 건물이 있는데, 언듯 보아 무슬림 모스크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각형으로 생긴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미나르’가 서있고, 가운데는 범상치 않은 돔이 가볍게 올라 앉아있다. 돔에는 아름다운 비취색의 타일이 입혀졌었으나 지금은 위쪽에만 조금 남고 거의 떨어져 나갔다. 외장의 타일들도 군데군데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품위가 있는 건물이다.
이것이 바로 ‘아파호자의 가족묘’다. 안에는 관리인이 있어 묘역을 청소하지만 본연의 임무는 사진찍는 것을 말리는 것 같았다. 내가 들어가자 바로 다가와서 주의를 준다.
“노- 포토!, 노-”
카메라를 가르키며 두 번이나 주의를 주는 바람에 감히 실수인척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그러며 뒤쪽의 어느 묘곽(墓槨)을 가르키며 무슨 말인가 해 주는데 눈치로
“저기 있는 것에 네가 찾는 ‘향비의 무덤’이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끝을 따라간 곳에는 황금색 천을 덮고 꽃으로 장식한 무덤이 눈에 띄는것 같았는데, 사실 모든 무덤을 천으로 덮고 치장을 해 놓았으니 어느게 어느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아파호자의 가족묘’ 바깥쪽으로 역시 작은 미나르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것은 모스크 같았다. 그러나 문은 잠겨져 있고, 들여다 본 안쪽의 모습은 퇴락하여 있다. 여기에 잇대어 지어진 건물에는 모두 작은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아마 여기는 우리식으로 제사 지내는 장소, 즉 추모의 장소가 아닌가 한다. 고색창연한 기둥이 펼쳐진 지붕을 받들고 있다. 마침 팻말이 있어 보니 'koranprea chng hall'라고 쓰여 있다. 눈치로 보아도 죽은 자의 가족들이 와서 애도를 하는 장소인 것 같다.
향비묘 입구의 한 정원에는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무엇인가 들여다보니 식당과 같이 차린 곳에 민속무용 같은 것을 공연하는 것 같았다. 또 어떤 사람은 의상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고, 또 혼자 몸에 특별한 취향도 없어 그냥 발길을 돌렸다.
가족묘라 하지만 향비묘에서는 더 이상 장례(葬禮)가 행하여 지지 않는 것 같았다. 'koranprea chng hall'에 더 이상 활동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멋있었던 기둥은 퇴락하여 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 앞에 많은 상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흥미가 있어 돌아와 ‘향비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팍호자는 이슬람 수피파의 지도자 아마드 칸사니(1461 - 1542)의 증손자로, 티벳의 ‘달라이 라마’와 연합을 맺고 ‘준가르 - 몽골족’족을 끌어 들여 호탄, 야르칸드, 쿠얼러, 쿠차, 아커수와 카슈가르까지 동투르키스탄을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향비는 그의 5대 손으로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 건륭황제(1736-1795)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비(妃)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로는 지금의 가이드북에 카슈가르 대표유적이 ‘향비묘’가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았다.
향비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 융장상' - 정복을 입은 향비모습 - 이라는이 사진은 나중에 이런것이 있음을 알고 인터넷을 검색해 찾은 것이다.
"향비는 회부(回部,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명령대로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향비에 대한 이야기에도 서양인의 기록이 빠질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향비(香妃)라는 명칭의 유래를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즉 그녀의 칭호 ‘비(妃)’는 건륭제의 후궁(後宮)으로서의 칭호가 아니라, ‘회부(回部) 어느 왕의 왕비’로서의 칭호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기어이 죽음을 택한 이유도 쉽게 설명되고, 카스 사람들이 향비를 숭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찌되었던 청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동릉권역에 있는, 건륭제의 무덤인 유릉(裕陵)에 건륭제의 비빈(妃嬪)이 같이 묻혀 있으니 향비도 이곳에 묻혀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곳에 진짜 시신이 묻혀 있는가는 누구도 모르는 채.
또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이 향비묘실에 걸려있다는 정보도 있었으며, 어떤 정보에는 향비묘 앞의 ‘기념품 가게에서 팔고 있다’고도 했다. 또 향비묘실에는 ‘향비의 관을 옮겨올 때 사용한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라 찾아보지 못했다. 조금 더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올 수 있었는데 그만 아깝게 놓쳐버린 것이다.
향비의 관을 운반해온 가마라고 하는데, 향비묘 문간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정보가 없어 이것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위 사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구입한 것이다.
'내가떠난여행,남이떠나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Ducky Lim의 중국 서역지방 여행기 3편 ? 카슈가르 (0) | 2016.06.22 |
---|---|
[스크랩] Ducky Lim의 중국 서역지방 여행기 2편 (0) | 2016.06.22 |
[스크랩] Ducky Lim의 중국 서역지방 여행기 2편 (0) | 2016.06.22 |
[스크랩] Ducky Lim의 중국 서역지방 여행기 1편 ? 중국 국경을 넘다 (0) | 2016.06.22 |
[스크랩] Ducky Lim의 중국 서역지방 여행기 1편 ? 중국 국경을 넘다 (0) | 2016.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