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스크랩]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요약)

주거시엔셩 2016. 2. 23. 16:5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1항 작정의 바른 개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교리는 고전적 유대교 정통주의, 이슬람교 정통주의 그리고 기독교 정통주의가 표명하는 것이다. 모든 유신론에서 단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은 우연적인 모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입술에서 조음되기 전에,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일지 알고 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금하실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결정하셨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말하도록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것을 말하도록 필연적으로 강요하지 않고도 당신이 무엇을 말할지 아시며 말하는 것을 허용하시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유다의 죄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일부였다고 할지라도 유다의 죄에 대한 변명이 결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우리 죄에 대해서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고 피조물의 의지를 억압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1원인 되신 하나님은 제2원인들(인간, 자연법칙 등)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지 않으시며 확립하신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이루어지고 있다.

 

2항 작정과 예지의 관계: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해 미리 알고 계신다. 우리는 미리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예지로 인해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한 구절은 로마서 8장으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였으니......(로마서 8:29-30)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믿을 것을 알고 선택하셨다는 것(조건적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자신에게 이끄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심에 있다.

 

3항 이중 예정: 작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구원과 선택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지옥에서 심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나타내고 공의를 나타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 예정은 적극(선택)-적극(유기)의 견해라기보다는 적극(선택)-소극적(유기) 견해이다. 즉 하나님은 택자들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기 위해 역사할 뿐만 아니라 유기자들의 믿음을 방해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견해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의 원인자와 제공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영원토록 구원받을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기할 자들을 창세전에 따로 적극적으로 유기하셨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범죄한 후 구원과 무관한 인간들이 출생하게 될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다. 창세전 선택과 무관한 그들은 저절로 유기된 자들의 자리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웨민신학자들은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에로 예정되고(predestinated)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로 예정된다(foreordained)고 용어를 바꿈으로 적극(선택)-적극(유기)의 대칭적 견해를 조심하게 만든다.

 

4항 예정의 성격: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누가 자신의 소유인지 아신다. 그리고 택한 그릇들은 예정되되 낱낱이 그리고 불변하게 계획된다. 이것은 예정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기회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전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포를 통해서 택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회자는 설교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이끌어 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수가 증거할 수도 감소할 수도 없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결코 구원받을 자들의 수효를 늘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 받은 성도들의 수효를 채우기 위한 방편이며 교회 바깥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다.

 

5항 선택의 은혜성: 하나님은 생명에로 예정된 사람들을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라는 고백은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창조와 타락의 입장이 먼저 오고 구원에 대한 작정이 따라온다고 본다(타락후 선택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고 불변한 목적과 자신의 뜻의 비밀스러운 계획이다. 따라서 택자가 아닌 사람을 선택해 달라고 결코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운명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택자라고 가정한다면 현재 그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성취되고 실현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다.

 

또한 예정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스러운 계획이다. 하나님의 뜻은 감춰진 뜻과 계시된 뜻이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춰진 뜻, 즉 비밀스러운 계획은 사색을 금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을 알려고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신의 선한 기뻐하심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백성들을 주신다. 선택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성자를 높이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우리가 구원받은 수단인 오직 믿음오직 은혜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려고 선택하셨다.

 

6항 구원의 수단들도 예정하심: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받고, 적당한 때에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로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칭의 받고 양자가 되고 성화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호된다.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도 정하셨다(구원의 서정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자신의 구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성찬이나 주일 예배에 빠져서는 안된다. 공적 예배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설교되는 말씀에 항상 집중해야 한다.

 

7항 유기의 목적: 단일 예정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주권적으로 몇몇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원에로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적절하게 반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유기에 대해서 거부한다. 어떤 이들은 확실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확실하게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등한 궁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이 택자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방식과 동등한 방식으로 유기자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유기자들을 간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기자들의 타락하고 죄악된 상태에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이러한 면은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구원과 공의를 찬미하기 위해서다.

 

8항 예정 교리의 유익들: 나의 구원의 확신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의 최종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안전히 데려가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다. 이 교리의 유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분에 대해 큰 확신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찬미와 경외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고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자기들이 용납된 것을 기뻐할지라도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겸손, 부지런함 그리고 풍성한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예정은 지적인 확신을 제공함과 동시에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 위한 구체적인 은혜의 방편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위로가 되며, 험난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풍성하게 넘치는 영적인 삶을 체험하게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장 요약

-인간의 타락, 죄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형벌에 대하여

 

1항 사람의 타락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이 인류의 역사적 타락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역사와 세상에서 인간의 죄의 철저한 보편성이 역사적 타락을 진리로 보여준다. 즉 타락의 증거는 압도적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궁극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참한 피조물이다.

 

세속적인 인류학자들은 진화론의 관점으로 인류의 발전을 본다. 역사와 인류 자체는 향상되고 진보한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진화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퇴보의 차원에서 본다.

 

우리를 위해서 타락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창세기3).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으로부터 강요받지 않았고 유혹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자신의 지혜와 거룩한 계획에 따라서 허락하시를 기뻐하셨는데 이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그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2항 타락의 결과 / 3항 원죄

인간의 타락으로 원의를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 죄로 죽게 되었고 부패하게 되었다. 인류의 뿌리인 아담의 죄책은 전가되었고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담의 죄책과 죄가 그 후손에게 전가되었다는 가르침은 신약 성경에서 흔히 발견된다. 특히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발견된다(5:12; 고전15:21-22). 아담과 그의 후손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가장 대중적인 이론 두 가지는 실재론과 언약주의이다.

 

실재론- 이 이론 배후에 있는 근본 원리는 아담이 죄를 지을 때 우리가 실제 거기 있어야만 하나님이 아담의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담은 인류 전체를 구성한다. 7:9-10을 근거로 아담의 몸에서 나온 그 모든 후손들은 아담 본성이 개별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언약주의- 아담의 대표적 성격을 강조한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적 우두머리가 된다. 아담의 시험은 자신 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타락으로 인류들도 타락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되신다. 십자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대리인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시키고 또한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이중적인 전가를 필요로 한다.

 

4항 원죄의 부패성과 실제적인 죄들

죄의 부패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능력이 없고 죄를 지으려는 성향과 기질이 있으며 이것으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나온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죄 짓기 원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우리는 죄의 쾌락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추구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하고, 자선적이고, 정직하고, 동정적이고 근면할 수 있다. 실제로 비그리스도인이 동료들에게 희생적이고 나누어 주고 선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신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것은 수평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더라도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닐 수 있다. 무엇이 선한가? 수평적 차원 뿐 아니라 수직적 차원에서도 선해야 한다. 즉 둘 다 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동기)에서 나오는 순종(행동)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누구도 의롭지 않고 선하지 않다. 우리의 가장 큰 덕도 근사한 악일뿐이다.

 

5항 부패성의 남아 있음

본성의 부패는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리스도에 의한 용서와 억제라도 부패한 본성과 행동은 모두 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처음의 중생에 의해서든 나중의 성화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든 완전해진다는 모든 견해를 부인한다. 중생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결과를 즉시 그리고 자동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항 죄의 결과

원죄와 자범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이다. 이 죄는 죄책을 초래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사망 그리고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된다. 1960년대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관주의를 옹호하고 객관적 진리와 권위를 부인한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진리와 실재를 그들의 감정에 따라 결정한다. 이를 들면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객관적인 죄책을 가져오고 죄책은 우리가 객관적인 율법을 범한 정도에 따라 측정된다고 단언한다. 객관적인 죄책에 대한 성경의 유일한 치료책은 객관적인 사면이다. 하나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였으면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용서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첫 번째 결과는 죄책이다. 이 죄책은 실재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책 전부를 한꺼번에 다 보여 주시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으로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령은 서서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적절한 회개와 뉘우침의 상태로 이끄신다. 최고의 법정인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지옥불과 멸망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신학을 공포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에드워즈의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사실 하나님의 손이 조금도 완화되지 않는 진노의 화염에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핵심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실재를 가장 순전하게 입증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불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실재을 알고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죄책과 진노의 객관성에 덧붙여 세 번째 결과로 저주에 대해서 말한다. 저주는 인간의 타락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뱀과 하와와 아담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3;14,16,17). 우리는 저주 아래 사는 삶은 현실이다. 질병, 죽음, 깨어진 관계, 험담 등. 세상은 죄악 되기 때문에 저주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죄책과 저주를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슴에 솟구치고 있는 소망과 확신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자유의지에 대하여

 

1항 본성적 자유

-우리는 본성의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강제되거나 강요 되지 않을 수 있는 의지를 부여받았다. 개혁주의 신학은 운명론과 본성의 힘에 기초한 어떤 결정주의도 단정적으로 거부한다. 우리는 선이나 악을 행하는데 본성적 원인이나 우리의 환경에 의해 강제되거나 강요받지 않는다.

 

2항 무죄 상태에서 자유의지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와 순종을 선택할 도덕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여 받은 의지는 가변적인 것이었다. 사람은 변하여 그 원래의 경향성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창조 때의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둘 다를 가지고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즉 우리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싸움은 일종의 의지적인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신자의 싸움은 본성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려는 의지를 극복하는 싸움이다. 따라서 의지는 중립적이지 않다.

 

3항 죄의 상태에서 자유의지

-종교개혁자들은 타락한 상태에서라도 의지가 여전히 시민적 덕이나 시민적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타락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신호등이나 기타 여러 가지에 순종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해선 마음이 기울어질 수 없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45)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올 수 없다는 것은 아무도 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중생이 온다고 믿는다. 이것은 회심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여 그분에게 가기로 결정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아르미니우스도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실 때조차도 여전히 당신은 그 은혜를 거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제공된 은혜에 협력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그 제안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한다. 즉 사람의 선택에 따르게 된다. 이러한 사고의 문제점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택하였기에 인간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드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나니”(6:44)

 

-이것은 결정론처럼 들릴 수 있다. 자기 결정은 자유와 동의어로 당신의 자아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자아가 타락했고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그 결과 죄악된 욕망과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정 혹은 선택은 필요한 자유를 주지 않는다.

 

4항 은혜의 상태에서 자유의지

-회심 전에 우리는 자유롭게 죄를 짓는다. 회심 후에 우리는 남아 있는 부패로 자유롭게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하나님께 순종한다.

 

5항 영광의 상태에서 자유의지

-영광의 상태에 이르는 천국에서 우리에게는 오직 순종할 자유만 존재한다. 이것을 왕적 자유라 부리며 천국에서 우리의 선택은 오직 선하기만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하여

 

1항 일반적 서술

-하나님께서 누구를 효과적으로 부르시는가? 오직 택자들만이다. 효과적 부르심은 또한 칼빈주의 5대 강령에 포함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불린다. 저자는 어느 정도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짐으로 이 용어보다는 효과적인 은혜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효과적인 부르심의 핵심은 성령이 당신의 본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실 때, 그 영혼의 변화를 달성할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부르심은 복음을 듣고도 응답하지 않는 일반적 부르심과 구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내적으로 역사하실 때인, 하나님의 부르심은 항상 유효하다. 또한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죽은 나사로를 부르셔서 살리신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은 먼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갖지 못하는 신적이고 초월적인 빛을 제공한다. 즉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로마서1장에서 자연인이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들을 알고 있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이 자연인의 이해를 조명시켜 주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불신자가 진리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의 영혼이 바뀌어야 하고 그 마음의 기질이 바뀌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이 어두워졌고 죄로 죽어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가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을 주실 때만이다.

 

-성령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버둥 치고 비명을 지르며 천국으로 끌려가는가? 그렇지 않다. 성령은 당신의 의지와 생각을 바꾸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신다. 따라서 효과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며, 성령이 우리 안에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신 이후에만 우리는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이 된다.

 

2항 전적인 은혜성 -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인가? 신인협력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한 사람에 의해서 성취된 어떤 일을 묘사한다면, 후자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행한 어떤 일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신학과 온갖 형태의 반펠라기우스주의 신학의 차이의 핵심을 담고 있다. 문제는 구원을 위한 처음 역사가 하나님이 홀로 일하셔서 성취한 것인가 아니면, 죄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는 점이다.

 

-죄인을 중생시키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 혼자 힘으로 행하신다. 먼저 우리를 변화시키셔야 비로소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중생은 믿음에 선행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려면 그 전에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즉 우리의 협력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도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라 협력적 은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도 은혜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식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믿을 것인지 어떨지를 근거해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신 기쁘심에 기초하여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효과적인 부르심의 은혜를 오직 택자들에게만 주시기로 주권적으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형벌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어떤 사람에게 공의를 나타내셨을지라도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다.

 

3항 선택된 유아들 - 선택된 자들은 반드시 구원 받는다.

-이번 항은 외적인 부르심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유아들이 죽었다. 이들은 지옥에 가는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이들은 모두 멸망하는가? 하나님께만 너무 어려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 또한 복음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대로 역사하실 주권적인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단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죽은 모든 유아들이 필연적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은 유아들의 마음을 바꾸고 은혜를 주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선택된 유아들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이 유아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유아들은 순진무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아기는 원죄의 상태로, 하나님과 소외되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유아 때 죽은 신자들의 자녀는 택자라고 확신한다. 그의 이러한 신념의 이유는 다윗 왕이 자신의 아기가 죽었을 때 보인 확신 때문이다(삼하12:23).

 

- 우리는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을 희망할 순 있지만 그런 일에 기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지만 그런 일을 자주 행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진군 명령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가져가야 한다.

 

4항 선택되지 못한 자들 - 선택되지 못한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이 항의 마지막 진술은 그들이 구원받을지도 모른다고 단언하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해롭고 가증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미국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는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따라서 배타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종교적 편견이며 다원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우리는 종교적 관용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자라났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박해할 수 없다.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더라도 나는 당신의 종교가 내 종교만큼 참되거나 타당하다는 것에 동의하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보면, 불교는 하나님께 신성모독적인 것이고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께만 예배하라 명령 대신 부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또한 모하메드, 부처, 공자, 그리고 모세는 모두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부활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구원받을 수 없다. 더 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그들은 본성의 빛과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규칙에 맞추어 살 만큼 열심을 내지 못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해설 13장 성화

1) 성화는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성화는 거룩하게 하다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따로 떼어 놓다또는 성별시키다또는 거룩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 거룩의 이차적인 의미는 순결함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품 속에 어떤 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 루터는 의롭다고 간주된 사람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법적으로 우리가 의롭지만 행위는 여전히 죄인이다. 로마 가톨릭은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려면 그는 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 진영에 널리 퍼져 있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가장 유력한 견해는 아무 변화 없이도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변화된 사람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반율법주의다. 왜냐하면 믿음은 중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아주 중대한 변화다. 또한 사람이 의롭게 되면서 성화의 열매에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도 성경은 완전히 반대한다. 의롭게 된 사람은 성화가 필연적으로 반드시 즉시 시작된다.

 

3) 교회는 완전 성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이 교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파괴한다. 이 땅에서 완전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한편 교회는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정한 경향을 발견한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거룩해지는데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는다. 즉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게 된다. 완전 성화 교리는 복음주의권에서 대체로 사라졌지만 다른 형태로 등장한 그룹이 있다. 바로 케직 운동이다. 그들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 말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승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성경의 인물들은 죄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 생애에 걸쳐서 투쟁했다.

 

특히 바울의 영과 육 사이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볼 수 있다. 우리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천국에 가야지만 이 싸움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완전주의 교리는 이러한 미래의 약속을 지금 원한다. 물론 우리는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 성경읽기, 기도, 부지런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이러한 은혜의 수단을 정기적으로 사용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무엇보다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을 알아 갈 때 일어나며 이 변화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변화할 것이다.

 

1

1) 이 신앙고백서는 효과적인 부르심과 중생을 먼저 언급한 후 성화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 신학자들은 구원의 순서에 관심을 갖는다(8:29-30). 성경에서 구원하다는 단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사용한다. 구원의 순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순서와 관련 있다. 그 순서는 논리적 우선성을 말하지 꼭 시간적이지 않다. 우리는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시간적으로 얼마나 지나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앞설 뿐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중생에 앞선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그 반대이다. 그 순서는 효과적인 부르심, 중생, 믿음,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다. 이 순서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은혜를 드러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성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2) 개혁주의 신학은 중생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임을 매우 크게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라고 가르친다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반면 반펠라기우스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인 협력적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효과적인 부르심과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지만 그 후에는 협력적이라고 말한다.

 

3) 중생의 결과로 의지가 노예 상태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죄가 완전히 정복된 것이 아니라 의지에 대한 그 속박이 풀렸다는 의미다. 옛 사람은 이제 죽고 그 힘을 박탈당하게 되며 새 사람은 모든 은혜 가운데 활기를 얻고 강해진다. 우리의 정욕이 약해지고 죽게 되어 참된 거룩함을 실천하게 된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우리라고 하는 말에 마귀가 기수의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한 마리 말을 두고 싸우는 두 기수가 존재한다. 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성화는 최고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접근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4) 성령이 일단 우리를 중생시키면 우리는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할 (또는 일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우리 삶을 일치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신령하게 되는 것(영성)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성화)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

 

2

성화는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성화는 이 땅에서 불완전하지만 영화를 향해 전진하며 영화되면 완전히 성화된다. 성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어느 정도 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영과 육신 사이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예수님은 의에 대한 추구를 우리 생애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2,13)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성화를 도울 것이다.

 

성화 교리의 두 이단은 행동주의와 정적주의다. 행동주의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정적주의는 하나님께만 맡기라고 한다. 하나님이 일하기를 단지 기다리는 것이다. 또 다른 이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다. 쟁점은 하나님의 율법이 성화의 전진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1) 율법주의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형식화되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부패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대체했다. 하나님의 법보다 자신이 만든 법을 더 앞세운 것이다. 예를 들면, 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술 취하는 것은 죄다. 만약 술 마시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면 율법주의가 된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자유(아디아포라)에 법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할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등이 그 예다.

 

율법주의는 사소한 것을 크게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개정) 예수님은 율법을 매우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 때문에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를 중요하게 여기고 율법의 정신을 무시했다. 둘다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대용품을 세운다(: 험담하지 않고 사는 것 보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교만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것이 춤추는 것을 삼가는 것보다 더 쉽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법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법을 회피하는 식으로 법을 해석했다(: 안식일에 이동하는 것). 하나님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보아야 한다.

 

2) 반율법주의

반율법주의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반율법주의자는 자신을 반율법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율법주의의 견해를 조장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조셉 플레처가 쓴 상황윤리. 이 책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의 계명이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축소한다. 그래서 주어진 상황에서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라는 플레처의 추론은 인간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혹의 길의 근원이 되었다(: 남자의 성관계요구, 여자의 거절. 남자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는 많은 법들을 주신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타내 준다. 상황 윤리자들은 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모든 율법을 타협하고 조정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반율법주의다.

 

세대주의자들은 반율법주의다. 반율법주의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구약의 도덕법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가, 그렇지 않는가?’와 관계가 있다. 구약의 도덕법에 대해서 어떤 의무든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반율법주의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 율법에 대해서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믿는다.

 

3

이항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는 과정을 말한다. 옛 사람이 우위를 가지고 우세한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저조한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승리를 위해 필요한 무기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생한 본성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 몰아가시기 때문에 은혜 안에서 자라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성도들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1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거짓된 확신을, 참 신자는 참된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 확신에 관해서 네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실제로 구원을 받지 않았고, 자신이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둘째, 은혜의 상태에 있으나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심각한 타락에 빠져 있을 때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으나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셋째, 실제로 은혜의 상태에 있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넷째, 자신은 구원 받지 않았으나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선한 삶을 살면 천국에 갈 것으로 믿고 있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믿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도인도 예배와 헌금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 7장의 오해(주여, 주여······)은 예수님이 우리를 아느냐 모르느냐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렇게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우리 문화에 깔려 있다. 이것이 잘못된 확신에 이르게 하는 첫째 이유이다. 둘째,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이다(로마 가톨릭의 견해). 더욱이 교회의 회원이 되면 구원이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개신교도들도 있다.

 

거짓된 확신이 있는 곳에는 구원 교리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바른 교리만으로 구원에 대한 진정한 확신을 갖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바른 교리를 가지고도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실제로 구원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구원을 갖고 있지 않지만 구원을 갖고 있다고 잘못 확신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참 확신과 거짓 확신을 구별하기 위해서 성경을 부지런히 그리고 기도하면서 연구해야 한다.

 

중생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구원의 상태에 있다는 거짓된 소망, 육신적인 억측으로 헛되이 속을 수 있으나 그들의 소망은 무너질 것이다. 반면 참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그를 신실하게 사랑하며, 선한 양심을 다해 그분 앞에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2

우리의 정신과 감각(오감)은 한계가 있다. 감각적 인식에 근거한 모든 지식은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철학적인 면에 동의하지만 신학적 의미로 확신을 말할 때 학문적인 인식론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명제나 개념과 관련하는, 우리 영혼 안에 가지는 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확신은 신적인 계시(진리의 궁극적 원천)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순전히 인간적인 사색, 합리적 연역 혹은 감각적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배운다. 신적인 계시는 사고나 감각을 제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 우리 지성 안에 있는 내적인 생각에서 우리 자신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서 접촉할 수 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한 것처럼 어떤 내적인 빛을 우리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은 자기 눈으로 보았고 자기 귀로 들은 것(벧후1:16; 1:1-4)을 하나님께서 계시했다는 말한다. 하나님은 계시를 자신의 대변인을 통해서 주신다(: 모세).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초월하는 진리의 원천과 접촉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기적의 가장 주된 기능은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입증하고 그 대변인이 하나님의 보증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에게 능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메시지 배후에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 기적이 있다는 것은 신적인 계시의 현존에 대한 어떤 것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이것이 성경의 속성을 연구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진리에 대한 모든 논쟁의 최종 재판관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최고의 법이다. 지금껏 계시와 인식론에 대해서 말한 것은 2항에서 말한 구원의 확신이 무오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 확신은 신앙의 무오한 확신이며,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신적인 진리(성경)에 근거한다.

 

이 확신은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들 안에 있는 은혜의 내적 증거, 그리고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성령의 증거에 기초한다. 은혜들의 내적 증거에 대해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열매를 맺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기를 원한다(벧후1:2-4, 10,11). 베드로는 믿는 사람이 회심할 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은 구원의 확신을 찾는 실천적인 이유가 된다고 말한다. 구원의 확신은 고난을 견디게 하며, 세상, 육신, 마귀를 대적하는데 영적인 힘을 제공한다. 더욱이 사탄은 고소자로서 우리의 확신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또한 성령은 우리의 영에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증언한다(8:1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언한다. 따라서 그 말씀이 무오하고 성령의 증언도 무오하다. 성령과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3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과 같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 일체 그리고 이신칭의(종교개혁자)는 구원의 본질이다. 구원의 확신 교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 의심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성화와 영적인 성장에 중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면, 성경의 무오 교리는 구원의 본질이 아니다. 성경에 대한 학문적 비평의 쇄도에 노출되어 있다면 자신의 신앙을 상실하지 않고도 성경의 정확성과 무오성의 범위에 대해 실제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 받기 위해서는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부활 등)을 믿어야 한다. 또한 성경의 무오를 포기한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는 일이 일어나며 구원에 본질적인 진리를 부인하기 쉬우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유아 세례 여부도 구원의 본질이 아니다.

 

참 신자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신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계시 없이도, 통상적인 수단들을 바르게 사용해서 그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단어는 특별한 계시 없이라는 구절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비범하고 특별한 계시를 주지 않는다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일반적인 원칙으로 가르쳤다. 마리아, 성 프랜시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고 구원의 확신도 가졌다. 일반신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참 신자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많은 투쟁과 어려움을 겪더라도 은혜의 통상적인 수단으로 이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다.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열매(평안, 희락)를 맺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넓히며 순종하려는 우리의 결단을 강화한다. 구원의 확신은 사람들을 결코 방탕한 생활로 이끌지 않는다. 반면 로마 가톨릭은 반율법주의와 방탕함을 낳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공격했다.

 

4

참 신자라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며, 감소하고 일시 중단할 수 있다. 게으름, 특별한 죄, 격렬한 시험,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는 침체하여도 절대 끝장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로 적당한 때에 구원의 확신이 되살아나며 하나님께서 견딜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

1

본성의 빛(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어떤 하나님이신지도(거룩, , 영원 등) 풍부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연 계시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본래적인 의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게 준다. 타락한 인간은 서둘러 예배할 대체물이나 대용품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진심을 가지고 열심을 낸다.

 

존 칼빈은 교회가 개혁될 필요성이 있는 주된 영역이 예배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교회에 대한 교리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가 미신과 우상숭배로 전락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청중에 영합하기 시작하는 순간 심각한 문제에 빠진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 예배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우상숭배로 끌려갈 것이다. 그래서 참된 예배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1계명은 유일신론을 확립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확고히 할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 금지를 확립한다. “나 외에라는 말은 가장 최고를 의미하는 선호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너는 내 눈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의미다. 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할 때 예술작품을 금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규정하신다.

 

나답과 아비후가 심판받은 것은 하나님이 승인하지 않고 제정하지 않은 실험적 예배 때문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다(10:1-3). 따라서 예배에는 두려움과 떨림의 분위가 있어야 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주일 예배에 사람들은 교제를 위해서 간다고 한다. 교제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2

어떤 사람이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종교가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되고 거짓된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우상숭배다. 우리는 참 하나님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과 맞바꾼 것이 아니라 거짓 신과 맞바꾼 것이다(1:20-25).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은 세 위격들 안에서 한 존재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모두 우리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우리는 성자(saint), 천사, 어떤 그림이나 상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 받으셔야 하고 우리는 오직 중보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세상의 견해에 따르면 등산 비유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심지어 교황은 무슬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진술했다. 교황이 한 말의 의미는 교회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유익을 적용할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다.

 

3

이항은 하나님 보시기에 용납되는 기도의 조건과 특징들을 열거하고 있다. 신약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항상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예배의 특별한 한 요소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가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항상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 성령이 계신다. 성령은 성자께서 성부에게 가져가길 원하는 것을 성자에게 우리가 말하도록 돕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성자에게 요청하고 그렇게 함으로 성자는 그 요청을 성부에게 가져간다. 우리의 기도는 삼위일체적이다.

 

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다.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은 결코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수억 원 연봉을 주는 직업이나 이 세상에서 모든 문제, 고난 또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만약 우리가 기도 가운데 그런 것들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해, 경외, 겸손, 열정, 믿음, 사랑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경외감과 존경심 그리고 겸손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기도하고 기도에 진지한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탄원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끈질긴 과부가 했던 것처럼 우리는 기도 가운데 인내해야 한다.

 

만약 소리를 내어 하는 경우에는, 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는 진술은 방언 기도를 주장하는 현대 은사주의자들을 반대해서 진술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어인 라틴어로 기도하는 로마 카톨릭의 관행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함께 모인 사람들이 알고 이해하는 언어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바꾸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권하시는 것과 똑같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열렬하게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분명히 권하신다.

 

4

기도는 합당한 것을 위해서 해야 한다. 어느 사창가를 운영한 사업가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자신에게 복을 부어 주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공격이다. 우리의 기도는 율법에 일치해야 한다.

 

기도는 살아 있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장차 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죽은 자들이나, 죽음에 이른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자들을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기도에 대한 책자 중 한 장 전체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다루고 있다. 이는 적법하지 않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9:27). 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친밀하게 아신다고 말씀한다(1:5). 태어나지 않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적법한 일이다.

 

또한 신앙 고백서는 죽음에 이른 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저자는 이 내용이 본문(요일5:16)에서 부당한 추론을 끌어내었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5

성경은 예배 중에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경외하는 태도와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양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자녀가 존경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는 두려움이고 기대를 저버리거나 또는 실망시키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해와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건전하게 설교하고 바르게 들어야 한다. 이 신앙고백서에는 역동적이고 신나고 흥미진진하고 유창하고 매혹적인 설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설교가 건전하고 성경적이 되는 것이다. 회중은 건전한 경청 즉 바르게 말씀을 듣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계속해서 깨어 주의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신자인 우리의 의무다.

 

은혜로운 마음으로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노래해야 한다. 하지만 이해 없는 공허한 노래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래하는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나쁜 신학을 표현하는 찬송을 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손상키시게 된다. 또 여기서 시편 찬양만이 언급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교회들은 시편 찬송만을 배타적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다른 개혁주의 그룹들은 자신들의 공 예배에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도 포함시킨다(5:19).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을 적절하게 시행하고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 성례 베푸는 것을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제한하는 성경적 근거는 주의 만찬이 합당하지 않게 시행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회중을 감독한 책임은 목사와 장로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극히 불가피한 경우에는 안수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성례를 시행하는 것이 종종 허용된다(전쟁 기간).

 

위에 것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종교적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다. 이 외에도, 종교적 맹세, 서원, 엄숙한 금식,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감사가 있다. 이것들은 여러 차례 그리고 절기를 따라, 거룩하고 종교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6

기도나 종교적인 예배는 시행되는 장소에 얽매여 있거나 어떤 장소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즉 동쪽이나 메카나 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도록 강요를 받지 않는다. 또 장소에 따라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 공적 예배를 드리는 것 뿐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공 예배로 모이는 것을 등한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또 다른 의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의 삶과 사역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루터에 의해 해설된 종교개혁의 원리들 중 하나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원리다. 루터와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일이 성직자에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참여하고 양육 받으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역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7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시간 가운데 적당한 시간을 따로 구별해야 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신앙고백서는 처음에 본성의 법칙에 호소한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피조물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는 안식일 제정과 관련이 있다. 청교도들과 많은 대륙의 신자들은 안식일을 창조 규례로 이해했다. 다른 이들은 모세 시대 이전에는 제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안식일에 창조 규례라면 결혼 규례처럼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며 정부에 의하여 이행되고 규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만 준수하라고 주어졌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어떤 것을 신성하고 거룩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을 거룩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는 별개로 자신의 말씀으로 실제적이고 도덕적이고 영구적인 계명으로, 즉 십계명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안식일이 영구적인 의무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취한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 날로 바뀌었다. 그날이 주의 날로 불린다. 이 날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계속된다. 안식일 자체는 특정한 날이 아니라 단지 일주일 가운데 하루다. 조나단 에드워즈(청교도)는 안식일을 단지 일주일 중 하루를 규칙적으로 돌아가며 지키면 된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교회가 합의한다면 매주 수요일이 안식일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모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여 예배하고 주의 만찬을 행했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외적인 표다.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과거의 창조 사역을 회상하고 미래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내다본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천국을 미리 맛본다. 우리는 성령이 천국에서 우리에게 주실 기쁨과 평강으로 들어간다. 안식일은 하늘과 땅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창조가 회복될 때까지 성례적인 의미를 갖는다.

 

8

유럽 대륙의 신자들과 청교도들은 둘 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그들은 예배가 안식일의 필수라는 것을 동의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지상의 성소뿐만 아니라 천상의 성소에도 들어가는 신비한 상황에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 천사들, 대천사들 그리고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12:22-24).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예배에 참여할 때, 막대한 회중 속에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공통된 시간이 존재한다.

 

우리는 안식일을 준비해야 한다. 영적인 준비와 다른 여러 준비를 포함한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섯째 날에는 만나가 두 몫이 내렸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노동을 쉬고 예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청교도들도 여섯째 날에 이틀 분의 식사를 준비했기 때문에 일곱째 날 그런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질적인 필요를 준비하는 것에 더해서 영적 준비와 신체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주의 날에 영혼이 천국을 맛보는데 준비되기 위해서 기도에 특별한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토요일 밤 늦게 자는 것 때문에 피곤하고 부주의하게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서 우리의 기쁨과 행복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청교도들이 안식일을 위해 이렇게 준비하고 그 날을 한 주의 하이라이트로 고대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얻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직업에 대한 말과 생각 그리고 오락으로부터 거룩하게 안식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소풍, 배드민턴치기 등 여가활동은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 대륙 신자들은 여가활동을 허용했다. 그것은 쉼이 주는 재창조를 위한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다(: 존 낙스는 스위스에 갔다고 주일에 칼빈이 가족과 함께 잔디 볼링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차이는 사58:13절에 근거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여기서 오락이란 안식일에 계속해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기쁨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한 것이다.

 

또 신앙고백서는 사람들은 내내 공적으로 사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필수적인 의무와 자비를 베푸는 데 전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교도들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자비의 일을 행하셨기에 우리도 안식일에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 일은 안식일의 의무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안식일에는 예배, 성경공부, 병원 심방으로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도 주일 오후에 교제와 낮잠 잘 시간이 존재한다. 원래 안식일의 주된 초점은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광주 예수 가족 교회
글쓴이 : 나강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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