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자의 형통
(출 2:1-25)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을 향하여 형통하도록 역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되 그 일을 통하여 오히려 더 형통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는 두려운 일이요, 원망할 일이요, 실패를 당하는 일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택한 자를 향하여 더 유익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이다. 이제 택한 자의 형통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정한 때에 출생케 하심 (1-3)
인간이 볼 때에 모세가 출생한 때는 불행한 때였다. 왜냐하면 바로가 이스라엘이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버리는 정치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모세같이 위대한 인물이 날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났다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옥동자를 낳은 모세의 부모가 삼개월을 숨겨서 기르다 더 기를 수가 없으므로 죽으라고 원수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이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된다는 것도 불행스러운 일이요 악한 민족에게 이유없이 아들을 빼앗긴다는 것도 사람으로써는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일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없다면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이방의 객이 되어 그 민족에게 괴로움을 받는다는 말씀이 응하지를 않으므로 괴롭게 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되 하나님의 징벌이 애굽에 올 때가 온 징조이다. 모세의 부모가 장차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시킬 영도자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상상치도 못할 일이다. 극동 난제가 닥쳐온 오늘 우리가 이 때에 났다는 것이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정한 때에 가장 복된 민족중에 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본다면 우리가 지금 동방 땅 끝에 출생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모세가 애급의 악정 아래에서 출생한 일과 같이 된 것이며 모세에게 형통한 일이 있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있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다.
2. 복된 길로 인도하심 (4-10)
옥동자를 나일 강변에 버리는 그 슬픔 인간으로써는 극도로 낙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볼 때는 모세가 버림 당한 것 같았으나 실지는 복된 길을 가게 되었다. 쓸쓸한 가정에 태어난 모세가 화려한 바로의 궁궐에 들어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화려하게 자라났을 뿐만ㅇ 아니라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품에 안고도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하여 아들을 기를 때에 무엇보다도 숨은 기도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 숨은 교훈이 많았을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세상 학문을 배우는 것도 특별한 교훈을 받게 되었고 사상적, 종교적인 교훈도 어머니에게 특별히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도탄중에서 모세를 기르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서 길렀다면 그렇게 안타까운 기도가 어머니에게 없었을 것이다. 가장 어린 소년의 축복은 어머니 품에서 기도로 길러주는 일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남의 나라 사람보다도 왜정 시대와 공산 정권 아래에서 눈물겨운 기도를 하며 자라난 일은 큰 축복이 될 일이라고 본다. 인간의 복된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숨은 비밀에서 있는 것이다. 숨어서 기도하고 숨어서 성경을 보고 숨어서 주의 일을 받드는 그 심정! 이것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이라는 것을 나도 체험한 바이다. 우리는 복된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배워야 한다. 나는 기도 생활 40년 동안에 여러 가지 고통을 겪어 온 것을 날 택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복된 길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닫게 된 것이다.
3. 실패의 길 같으나 성공의 길 (11-12)
만일 모세가 애급 사람을 쳐 죽이는 일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힘을 믿고 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인간 감정으로 민족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가 있으므로 민족을 살리게 된다는 것을 몰랐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민족을 지도할 것인데 혈기에 속한 육의 사람으로 민족을 지도하는 일은 실패를 당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몸르는 모세에게 쓸쓸한 미디안 목자의 생활 40년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거룩한 장막이 되었다. 우리도 신과 같은 사람이 되기 전에 도저히 나가 일할 수 없는 시대를 만났다. 그러므로 과거에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택한 사람에게는 성공을 가져오는 길로 옮겨지는 형통의 길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실패를 당하여 도망하던 길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패를 당한 모세의 40년 생활은 세가지로 형통했던 것이다.
첫째: 영의 사람이 된 것이요
둘째: 복된 가정을 이룬 것이요
셋째: 원수의 손을 벗어 나는 피난처가 된 축복이었다. 우리도 앞으로 가는 길이 이와 같이 형통이 있게 될 것을 확신하고 세가지 축복을 받아야 한다. 형통이라는 것은 자기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결 론
모세가 거친 바로 궁궐의 40년, 미디안 40년이라는 기간은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지루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400년이라는 기간을 정해 준 때가 차기까지 모세를 길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한 때에 써야 할 택한 사람은 인간이 볼 때 지루한 것 같으나 쓸만한 사람이 또록 기르는 기간을 두고 모든 일이 형통케 하시는 것이다. 조급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낙심하고 원망하는 일을 하게 되지만 택한 백성이 부르짖는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되는 길
(출 2:1-15, 3:1-8)
서 론
영적 지도자 라는 것은 정치적이나 문화적이나 어떤 경제적 지도자 보다도 제일 큰 사명자이니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쓰는 자를 영적 지도자 라 하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인간 경제나 문화계, 경제계를 초월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도자가 될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느냐 하는데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장성기의 길 (2:1-10)
영적 지도자는 자라날 때도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 예정이 계심으로 모태로부터 택하되 그 시대를 따라서 나게도 하시고 자라게도 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는 영적 지도자를 해치려는 박해는 어려서부터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생명을 빼앗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다. 그 길은 전화위복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라는데 불행스러운 것 같으나 결국은 영적 지도자를 만들기 위하여 불행스러운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세상에 나올때도 원수의 공포 속에서 낳고 자랄때도 원수의 무서운 정권 아래서 자라나되 하나님의 보호는 항상 같이 했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시대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원수의 강한 세력 아래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원수의 강한 압박 속에서 장성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라날때부터 하나님의 보호 에서 자라나게 하며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해서 기른다는 것이다.
2. 시련의 길 (2-25)
영적 지도자는 실패를 당하게 한 후에야 지도자의 자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남을 지도하려면 자기가 어려운 시련을 겪어 보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애급의 학술을 배운 인격이었으나 이것으로만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실패를 당케하여 미디안 사십년의 시련의 길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세계로 인도했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 할 때는 인간과는 끊어지도록 만들어 놓는 것은 하나님과만 접촉할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즉 사람에게 박해를 받고 축출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숨어 있지 아니하면 안될 환경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명예와 권리의 영광을 맛보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마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로 쓰려는 사람은 세상의 쓴맛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계10:11, 사40:27).
3. 명령을 받는 길 (3:1-8)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명령할 때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기대나, 어떤 연구나, 계획을 가질 때가 아니다. 만일 자기의 어떤 주관적인 계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 지도자는 될 수 있으나 영적 지도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 없이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망, 낙망, 공포속에서 명령이 나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나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니 인간의 어떤 힘이나 지식이나 세력을 초월한 역사이기 때문에 홀연히 명령이 나리되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하는 명령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요, 큰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 명령을 받는자는 목숨을 내걸고 참된 희생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길이다. 실패같으나 성공이요, 죽는길 같으나 생명이요, 약한 것 같으나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길이다. 앞으로 전진할 때 그때 그때 홀연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는 길이니 조금도 좌우나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시대가 바뀌어지는 동시에 당신의 영적 활동의 법을 변경시킬 때 영적 지도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언약 신앙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율법시대에는 모세에게,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에게, 환란 시대에는 동방의 사람(말세 증인). 이와같이 쓰시는 것은 지도자 없이는 시대를 개혁시키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에게는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세를 맡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출3:1-14)
우리는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신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는 역사에 대한 예언적으로 나타난 역사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역사를 보아서 분명히 알게 되는 동시에 완전한 소망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완전히 세우실 적에 행하신 일은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열매가 될 증거로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어떠한 신이라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세우신 언약대로 행하시는 신이시다 (6, 출2:24)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한 것은 그들에게 언약을 세운대로 행하시는 신이라는 것을 뜻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천하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 언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은 언약대로 복을 받을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을 동방 땅 끝의 야곱이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세운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을 종을 가르친 것이다. 완전한 성경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전에도 언약하신 말씀대로 행하셨거든 완전한 언약의 말씀을 성경대로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시는 것은 분명한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는 동시에 현저히 그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문서가 없이 말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록한 문서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것과 같다.
2. 자기 백성을 고통 중에 건져주시는 신이시다(7-8)
하나님께서는 친 백성을 고통을 당치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요, 고통을 당하되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난관을 당할 때에 홀연히 나타나셔서 건져주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 택한 백성들에게 진실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요
셋째: 인간 종말에 환란을 당할 백성들에게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당할적에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부르짖는 사람이 된다면 그밖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게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려운 고통이 올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든다면 어린 아이가 배고플 때에는 우는 것 밖에는 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어려운 난관이 올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더할 수 없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에 북방으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물밀 듯이 내려올 때에 시온의 백성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3. 택한 종과 함께 하시는 신이시다 (11-1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종과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기를 기뻐하시는 신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들어쓰는 일이 없이는 왕국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종과 함께 하시어 그를 들어 쓰시되 그에게 왕권을 주시므로서 승리를 이루게 하는 동시에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영광을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4. 스스로 계신 신이시다 (13-14)
하나님꼐서는 스스로 계신 신이시니 그 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순종해야될 피조물된 사람으로서 조물주가 아닌 신을 공경한다는 것은 주인을 대적하는 종이므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된 사람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즉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부르짖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역사가 있을 떄에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만민이 알게 되는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된다.
기독교와 추수감사절
성경 본문: 출 23:14-17
오늘은 추수감사절 에배로 드립니다. 해년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매년 치루는 행사가 되어서는 안되고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더욱 안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므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겠습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절기입니다.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23;16)고 했습니다. 수장절(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던 삼대절기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추수하게됨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세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대적인 규례입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규례이므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된 기독교인들도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한 다른 계명은 지키면서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오묘하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맹목적으로 행하는 것보다 그 의의를 알고 행할 때 더욱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추수감사절도 우리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규례요 절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추수 감사절은 역사적인 유래가 있습니다. 영ㅇ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수많은 역경과 고생을 겪고 1623년에 비로서 훌륭한 추수를 거두게 된 것을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1923년 11월 당시의 행정관으로 일하던 보랄포드(Boralford)가 감사절을 지킬것을 선언하였으나 정식으로 국경절이 된 것은 워싱톤이 1789년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정한후부터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그뒤 아브라함 링컨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절로 제정했습니다. 다시 1939년 전 루즈벨트 대통령이 11월 셋째 목요일을 감사절로 정하였으나 미국 여러 지사들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추수감사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 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감사화되어야 합니다.
2.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감사에 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앞에 감사의 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시100:4, 107:8, 118:19, 138:2), 그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신것을 감사하고 (시7:17, 28:7, 35:18),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사악한 자를 징벌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감사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속으로 부터 자발적으로 솟아난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은혜에 대하여 유일한 신앙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살전 5:16~18). 감사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요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며 그의 기르시는 양임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신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감사의 말, 감사의 노래, 감사의 예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곳에는 마귀가 역사합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건강주신 것을 감사하고, 만물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죄에서 구속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금년 일년동안 하나님의 우로지택으로 농사짓고 수확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그 은혜의 표시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처음익은 열매 제일 좋은 것을 감사의 예물로 드리는 그런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출23:16~19).
이와같이 하므로 그리스도인이 이땅위에서 사는 동안 감사와 기쁨이 더욱 넘치는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3.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 은혜때문에 쉬지않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9)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박국은 그의 소망과 기쁨과 감사의 근거가 이 세상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천재지변의 재앙의 날에도 흉년과 전쟁의 날에도 비록 물질이 풍성하지 못할지라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성도에게 넘치는 축복이 있을줄 믿습니다.
진실로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그릇입니다. 감사없는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 주시는 하나님은 몸 드려 헌신할 때 건강의 축복으로 물질로 감사할 때 물질의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한3서 2절)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축복을 다 받았더라도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광을 다 누린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낙오자가 되면, 불쌍한 사람입니다.비록 물질이 풍성하지 못하더라도 천국을 소유한 자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천국은 감사할줄 아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원망이나 하고 불평한 사람이 천국가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땅에서 심령의 천국이 먼져 이루어져야 천상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위대한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가 목사님들에게 찬란한 법의를 입히고 최고의 영예와 생활보장을 부여하며 교회의 의자를 귀금속으로 꾸며 주었을 때 하늘로부터 한 소리가 들려와 이르기를 오늘 교회는 독소의 침입을받아 그 영적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일러주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잘 짓고 장식을 잘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돈많고 지식많고 명예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때 기뻐하십니다.
처음 기독교는 큰 성전도 회당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날마다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결 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천국을 바라보며 이땅에서 사는 동안 성령충만 은혜충만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움을 해결하는 비결
성경 본문: 출 14:10-1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
으로 하여 우리 인생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런지 그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이스라
엘 민족은 많은 수난을 겪어오면서 더 훌륭한 민족이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두터운 종교적인민족이 되었고 자신들을 재
발견하여 정화해 나가는 강한 민족이 되었고 불굴의 신념과 정신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과 서로 합심하여 단결해 나가는 민족이 되었
다. 이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를 극복하게된 그 비결이 과연 무엇에 있
었겠는가?
첫째, 신앙적인 통찰력이었다.
통찰력이란 난관은 바로 관찰하고 처리해 나가는 신앙적인 안목과 지
식을 의미한다.신앙적인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려움만 보인다. 그
래서 어려움이 생기면 먼저 겁부터 집어먹고 원망하고 좌절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되고 그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며 이끌어 주신다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된다. 하
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위대한 손길을 보게 되는 것이다.
둘째, 긍정적인 신앙이었다.
우리 신앙의 성격과 형태를 정리해 보면 긍정적인 신앙과 부정적인
신앙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긍정적인 신앙은 만사에 적극적이며 낙관
적이며 소망적이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신앙은 소극적이요, 비관적이요
현상유지로 만족하는 것이다.
모세의 신앙을 긍정적이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중의 신앙은 부정적이
었다. 이스사엘 민중의 부정적인 신앙을 고찰해 보면 두려워하고 당황
하고 불평하고 원망했고 절망했다.그러나 모세의 긍정적인 신앙 태도
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했다. 어려움중에도 실망하지 않고 소망중에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확신하고 앞으로 전지해 나갔다. 이러한 태도
야말로 문제 해결의 비결이며 승리의 첩경인 것이다. 긍정적인 신앙,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을 성공시키는
비결인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방법을 택하라
하나님의 방법이란 모세로 하여금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로 홍해위에
내밀이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말씀 순종의 방법인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은 질서를 파괴하고 화평을 깨트리고 역사를 후퇴하게 하지만 하
나님의 방법이나 신앙의 방법은 질서를 확립하고 화평을 유지하고 계
속 인생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말씀에
순종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최대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뒤쫓아오던 애굽 군인들은 모두 홍해바다
속에 묻혀 죽고 말았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하나님의 방법
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
성경 본문: 출 16:13-20
애굽은 430년만에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30
년 동안 먹었던 식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나]였습니다. 색깔은 흰빛이
고, 모양은 갓씨와 비슷했습니다. 일정한 곳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을 형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날 그날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머물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0년 동안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심지 않
고 거두지 않았지만 4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
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26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
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
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만나의 교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1.식량대로 거둬야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가족 1인당 한 호멜씩 식량대로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
은 약 2.3리터가 됩니다. 식량대로 거두라는 것은 먹을 만큼 거두라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남거나 모자라지 않게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호멜을 재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짐작으로 거둘 수 밖
에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짐작으로 만나를
거둬다가 호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게 없고, 적게 거둔 사람
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집 밖에 나가면 하얀 빛깔의 만나가 지면에 마치 눈송이처
럼 덮혀있습니다.
그릇을 가지고 식구들의 식량대로 거두어서 요리를 해먹곤 했던 것입니다.
"1인당 한 호멜""식량대로"라는 만나의 법칙 속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언젠가 과적차량 진입금지라는 표지가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과적차량은 타이어가 펑크날 위험이 있는가 하면, 도로를 파손하
게 됩니다.
구청 공무원의 세금 횡령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1인당 한 호멜이면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량초과가 빚
어내는 비극 때문에 울고 망하고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려서 자라던 동네에 [꾸러기],[짱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
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은 별 탈이 없는 집 아이였습니다. 그
런데 그 아이는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욕심꾸러기의 끝자를 따서
꾸러기라고 불렀습니다. 먹는 욕심도 보통이 아닙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제일 큰 것이어야 하고, 떡을 먹어도 다른 사람이 하
나들고 먹는 동안 그 아이는 입에다 하나물고 양손에 하나씩 쥐고 새끼를
한꺼번에 먹곤 했습니다. 배가 부르다 못해 올챙이 배처럼 튀어나와도 계속
먹다가 바닥이 나면 물러서는 아이였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튀어나오고 씩씩거리며 쉼쉬는 사람
을 짜구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별명은 [짜구]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위하수병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하게 되자 신경
과민 증세가 합병되더니 고등학교 지학도 포기했습니다. 몸은 젓가락처럼
마르기 시작하고 노이로제 환자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시대는 꾸러기들과 짜구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흔하다
는 점입니다.
1인당 한 호멜! 그것이 정량입니다. 욕심부리지 맙시다.
2. 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19절을 보면 "다음날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런데
20절을 보면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나가서 거두는 것이 귀찮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
나는 그 결과를 시험해 보고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고 했
습니다.
한 호멜을 넘게 거둔 것들, 즉 정량초과분의 만나는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그날 거둬다가 그날 먹어
야 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6:34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
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그날 것으로, 걱정도 그날로 자족하고 끝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9 이하를 보면 여러해 동안 먹고 살 돈과 양식을 창고에 쌓
아놓고 인생을 즐기려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백합니다. "내 영혼
아 여러해 쓸 문건이 창고에 가득하구나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꾸
나"라고.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비축이 불가능합니다. 썩고
냄새나고 도둑이 가져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0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
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 먹지도 못할 것, 다 쓰지도 못할 것들을 챙기고 쌓고 숨기려다가 망하
는 사람들이 추태는 다시 한번 [그날의 만나]가 주는 뜻을 되새기게 해줍니
다.
3. 안식일분은 비축이 가능했습니다.
23-24을 보면 안식일 전날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둘 때 이틀분을 거두라고
했고 안식일에 먹기위해 거둔 만나는 썩거나 냄새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밖에 나가 먹을 양식을 거둘 필요가 없었고 그날은 만나도 내리
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후 쉬던 날입니다. 성경은
그날을 하나님의 날이라고 했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 민족은 그날 사사로운 일이나 오락을 금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도 내리지 않고 거두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
도 그날은 쉬셨고 백성들도 쉬는 날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쉬는 것과 자기를 위해 쉬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 인식은 영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만 산좋고 물맑은 바닷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
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피로를 풀거나 여가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호화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별장주인이 자살시체로 그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부
간의 갈등과 정신적 쇼크로 인한 자살이었습니다. 쉬기 위해 만든 별장에서
왜 자살을 해야 했겠습니까?
참된 쉼은 먹고, 마시고, 여행을 하고, 돈을 쓰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
다. 참된 안식은 영혼이 평안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참 쉼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안식의 비결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만나를 거두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해서 늦잠을 잔다든지, 놀
라간다든지, 죄를 짓는 날로 여기면 안됩니다.
최소한 일주일 중 하루만이라도 주님을 생각하고, 위해서 심부름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었습니다.
3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광야에서 먹인 양식"이라고 했고 35절을 보면
40년 동안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절로 땅 위에 내린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만
나가 처음 내린 것은 출애굽 한지 한달이 지난 달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2월 15일로 되어있습니다. 연대로 따지면 BC 1446년이
됩니다. 그리고 만나가 그친 것은 41년째 되던해 유월절 직후였습니다.
40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먹기위해 수고도 땀도 흘린 일이 없습
니다. 자고나서 집 밖에 나가면 지면에 덮여 있습니다. 그것을 거둬다가 요
리를 만들어 먹으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만나사건 속에서 다음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부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욕심부리고 한 호멜 이상을 거둬들이면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만나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그날 넉넉한 양식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욕심부리다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
았습니다. 한번으로 끝났으면 존경받고 행복했을 집권자들이 헌법까지 뜯어
고치면서 두번 세번 하려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월급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 돈이나 삼키려다가 철창신세를 진사람들과
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도 듣고 있습니다.
욕심, 그것은 비극의 씨앗입니다.
만나는 아침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스러졌습니다. 24시간 땅에 널려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
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늦게 나가면 만나가 없
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광야의 만나는 영원한 생명양식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에서 거둔 곡식을 먹게 된 날부터 만나는 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이 세상 떠나면 모조리 끝나게 됩
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48-49를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
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고 했고, 6:51를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만나, 생명의 떡입니다. 세상 것들을 영원한 양식
으로 생각하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
자가 됐고, 43세에 미국의 정유산업을 장악했고,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
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과
눈썹이 빠지고 소화불량으로 우유와 크래커로 연명했습니다. 그리고 공포심
에 사로잡혀 수십명의 보디가드가 지켜야 했고 불면증으로 매일 밤을 뜬눈
으로 지샜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조사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
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회개하고 거듭나기 시
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구호단체, 의학연구소,
대학 등을 도왔습니다. 페니실린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개발된 것입니
다. 그는 건강을 되찾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영원한 만나를 발견했고 먹
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어야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야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사람답게 가치있게 뜻있게 보람있게 살려면 영원한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
원합니다.
위대한 인격 위대한 사역
성경 본문: 출 2:1-10
인류 역사는 위대한 인격자가 위대한 사역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자녀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인
격자를 기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교육의 중요한 예를 보여주
는 것이 바로 본문에 나타나 있는 모세의 경우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430년동안 애굽의 온갖 압제 아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낸 위대한 사역자인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위대한 사역
자, 출애굽 운동의 놀라운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모세 자신이 가
정에서 배운 가정교육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을 보면 "그후에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
였다."는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 이스라
엘의 영조자였던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의 "모세가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한 말씀처럼 모세는 모든 면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25절의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는 동족을 구해야겠다는 사명의
식이 투철했던 것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싸울 때에 모세
가 화해케 하려 한 것을 보면 모세는 화목의 사람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민수기 12장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하니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으니 그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하였지만 그는 그들의 대적에 잠자코 대항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온유하고 겸솨난 사람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모세의 인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믿음의 사람이라
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
하고"라는 말씀을 봅니다. 과연 모세는 믿음으로 인생의 삶을 살아가던 신
앙의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면 모세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이 되게한 것은 결단코 우
연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모세다운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살아있는 신앙교육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출생하여 자라난 그 성장배경은 매우 좋지 않았습
니다. 모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태어나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
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쿠데타에 대한 중
요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애굽나라는 힉소스 왕조가 역사적으로 계속하여
통치하고 있었는데 모세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투트모스 1세가 쿠데타로 애
굽을 정복하고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투트모스1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
굽에서 수십만명으로 번성하는 것을 볼 때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
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거든
살리라고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
에 던지고 여자거든 살리라고 온 애굽 사람들에게 공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점점 죽음의 위기가 닥쳐오는 그런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아이를 낳고 정상적
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나 마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대를 봅시다. 이 시대
는 위기의 시대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문화가 발달되고 문명이 발전해
가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악한 원수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온 시
대가 음란해지고 있습니다. 온 시대가 불의와 불법으로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위기입니다. 원수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공
격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는 시대입니다. 정치적,문화적,
영적,육적,모든 면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매우 어
려운 일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런 위기의 시대에 태어난 모세를 어떻게 교육을 시켰
는가 하는 사실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의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만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아므은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믿음으로 양육했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하고 모든 여건이 좋지 못할 때일
수록 더욱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만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철저
하게 양육한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해도 악한 시대를 반
드시 이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왜 신앙적인 자녀 양육방법이 중요한 것입니까? 왜 우리의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각
가정에 사랑의 선물로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나빠서, 돈이 없어서,
또는 여러가지 문제로 자녀를 잘못 가르치지 마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절박한 환경속에서도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을 볼 때에 환경 때문에
자녀의 교육이 안된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선인장을 연구하는 바벴크라는 박사가 있었습니다. 선인장은 습기를 좋아
하지 않고 물이 없는 사막에서 삽니다. 짐승의 공격도 받고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 시달립니다. 그러면서 가시가 뻗고 키가 자랍니다. 바벴크 박사가
선인장을 연구하면서 실험을 했습니다. 사막지대의 선인장을 옮겨서 따뜻한
비닐하우스에서,맹수도 없는 좋은 환경에서 선인장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선인장은 가시가 다 수염같이 되어서 바람만 불면 흐느적 거리게 되었
습니다. 환경이 좋은 곳에서 오히려 선인장의 가시는 수염과 같이 되어버리
고 선인장 구실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환경이 좋고 집안이 좋고, 지식이 많고, 돈이 많다고 해서 자녀교육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신앙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최악의 절박한 환경 속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에서 모세가 태어났지만 위대한 자녀로 성장한 것은 신앙교육 때
문인 것입니다. 환경이 나쁘고 여러 조건이 좋지 못해도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면 좋은 자녀 극상품의 포도나무 같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부모는 어떤 자세로 자녀를 양육했습니까?
1. 통찰력을 가지고 자녀를 기르십시오.
2절에 보면 "그 준수함을 보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라아'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감지했다,느꼈다"라는 말입니다.
만져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자녀를
살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 보면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
운지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아름답다는 것은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내적
인 속사람이 순결하고 깨끗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으 어머니 요게벱은 믿음의 눈으로써 자기가 낳은 아들 모세를 보고
정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인 통찰력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보내주신 자녀를 바라볼때에 자녀들
의 장점, 유능한 점을 발견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자녀를 살펴보면서 길러야
할 것입니다. 창조적인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에
게는 비록 내 자녀가 지금은 개구장이요, 말썽꾸러기요, 나빠보여도 잘 살
펴보면 장점도 여기저기 보입니다. 바로 그 장점을 발견하는 영적인 안목으
로 자녀를 보야야 합니다. 그러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부분을
자녀들에게서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과 남보다 뛰어난 아름다운 부분
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본문 2절과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모세를 숨길 수 없을 때까지 숨겼
습니다. 숨기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기에 "숨겼더니"라는 말은 히브리
말에 '차판'이라는 말입니다. 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하여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 자녀교육에 필요한 것입니다. 조금만 더 밀어주었다면 자녀가 성공
할 수 있었음에도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를 밀어주는 일을 등한히 합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녀를 양육하십시오.
유대인들을 표현하는 말에 '루프트멘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기
인가'이라는 말입니다. 공기는 문을 다 닫아도 문틈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도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을 '루프트멘쉬'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인이 '루프트멘쉬'
즉 어느 상황에서나 적응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부모의 전통
적인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자녀의 교육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밀어
주십시오. 끝까지 인내하고, 최선의 기도와 최선의 물질적 후원을 다해야
합바니다. 미국을 보면 1년 내내 가출자가 13만명으로 거의 18세 이전의 청
소년들입니다. 이들이 집을 떠나서 하는 말이 "나의 부모는 나에게 하등의
신경도 써주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는 쳐다
보지도 않고 어머니는 구박만 한다."는 것이빈다. 그래서 집을 떠나는것입
니다.
여러분, 기다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하고 후원하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자녀가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하나
님의 자녀입니다.
3. 자녀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그를 위하여 갈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
이를 거기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에게 자녀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갈대상자와 같은 복음의 상자인 것입니다. 말씀의 상자요 기도의 상자인 것
입니다. 오늘날 나일강의 하수처럼 갈대상자 속으로 스며들려고 하는 이 세
상의 불건전한 세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사탄 원수와 같은 존재가 우
리의 자녀들을 공격하려고 할때 마귀를 이기고 세상의 세파를 극복할 수 있
는 영적인 공간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
님의 복음 공간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해주어
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지적이고 양식있는 부모는
지식을 남겨주고 지혜있는 부모는 신앙을 남겨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신앙적으로 교육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벌써 교회생활을 등한히 한다면 자녀교육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빨리 신앙교육을 시키십시오. 신앙교육을 잘 시켜서 행
복한 가정 승리하는 자녀를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어머니
성경 본문: 출 2:1-10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향을 삼고 살면서 늘 애칭되는 인간 있
다고 하면 그것은 어머니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무섭고 삭막할지라해
도 어머니만은 언제나 훈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을 보호하도록 역활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고 하면 가장 근사한 것이 어머니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인간의 형성과 인격의 완성에 가장 큰 영향은 어머니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을 잃어버리고 냉혈 동물화 되어가
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본문에서의 모세의 어머니는
역사를 창조한 어머니이다.
첫째, 생명의 신비를 보았다.
"믿음으로 모세가 낳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다"(히 11:23) 여기 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말은 인물이 잘나서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숨긴
것이 아니다." 그때에 모세가 낳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
은 생명인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며 모세를 통해서 나
타나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어머니는 보았던 것이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인간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이다.
둘째, 모세를 살리는 지혜가 있었다.
어머니는 갈대상자에 아이를 담고 강물에 띄웠을 때에 바로의 공주에
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모성애 본능을 일깨워 주었다. 모세의 어머
니가 유모가 되어 젖을 먹였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인 것이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이 살리시고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하
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모세가 살아난 역청 갈대상자는 인류 구원의
사건을 신비롭게 예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세
우신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자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
르쳐 주는 것이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더욱 현명한 일인 것이다. 성경
이 가르치신 "마땅히 행할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머니로서 첫째는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셋째,애국심을 길러 주었다.
모세의 어머니는 하나님 없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은 짐승도 못하
고 자기 동족을 버리고 자기 안위를 위해서 산다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는 간절한 기도가 늘 모세의 가슴을 울려 주었을 것이다. "도리
어 자기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이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력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 모
세가 어머니의 교육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궁궐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수 있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을 심어주고 바르게 살도록
어머니의 의식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한 아들과 딸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여종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추석과 제사
성경 본문: 출 20:3-6, 신 16:12-15
추석명절과 고향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때처럼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길이 막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가야하고 북녘
땅에 고향이 있어 갈 수 없어도 임진각 근처에서 고향하늘만이라도 보며 그
리워하는 곳이 고향입니다. 명절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 보고 제사의 문제
점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 추석의 의미 =
공동체의식 - 이스라엘 민족이 지켜온 초막절은 추수가 끝나고 곡식을 곳
간에 저장하고 지키는 절기이므로 수장절 이라고도 합니다. 이절기에는 모
든 가족과 종들 그리고 레위인, 외국인 고아와 과부등 모두가 함께 모여 잔
치를 엽니다 (신 16:14) 빈부의 차이나 계층의 차이가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되는 의식입니다. 신약의 추대교회는 애찬을 통하여 서로 하나
되는 좋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추석의 큰 의미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
에 모여 가족 공동체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적 의미 - 초막절은 출애굽후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며 후대들
을 교육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매년 7월 15일이 되면 집을 떠나 들에 나
와 나무를 엮어 초막을 짓고 칠일간 머므르면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경험을 후대들이 경험합니다. 우리들도 오늘의 역사를 이루기까지 선조들이
살아왔던 고난과 빈곤의 삶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의 훈련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30년간 노예생활을 청산
하게 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을 지나오는 동안 먹을 양식을 주시고 물
을 주시고 온갖 질병에서 지켜주시며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면 한발자욱도 전진할 수 없었습니
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도 지난 일년을 돌아보
며 하나님이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는 자세는 너무도 진지하고 엄격함을 볼 수 있습니
다. 우리는 의미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명절 또는 연휴를 맞아 휴양지로
떠나는 명절 또는 조상을 숭배하는 명절로 의미가 잘못 지켜지고 있음을 보
게 됩니다.
= 제사 =
전도를 하다보면 제일 많이 부딪히는 문제가 제사문제입니다. 제사문제는
의미가 잘못 정착되어 전통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조상의 무덤을 크게 만
드는 민족치고 잘사는 나라가 없고 대개는 가난하며 문화적으로 퇴보하는
민족입니다.
제사의 역사 - 세계에 많은 민족이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민족은 몇나라
밖에 없는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국가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
나라와 [상] 나라에 제사기록이 있는데 처음에는 부모에게 제사 지낸 것이
아니요 뛰어난 업적을 남긴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밑
에 소국가의 제후가 생겨나고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질서가 무
너지자 평민들까지 왕의 조상도 훌륭하냐 우리의 조상도 훌륭하다고 생각하
며 제사가 확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고구려 시대에 모든 왕이
아닌 특별한 업적을 남긴 왕에게 제사지낸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고려
시대에 불교가 성행하였어도 제사를 지낸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불교국가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초기 우리나라 무속과 불교가 섞여서 생긴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태조는 나라의 종교를 고구려 불교로 부터 성리
학을 중심한 유교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제사지내던 풍습을 덕을 쌓으라는 의도에서 일반 백성에게 장려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근본은 중국에서 들여 온 것을 우리나라에서 잘못 정착시
킨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문화는 우리것이요 기독교는 외래
의 것으로 받아들이나 불교는 인도에서 유교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요 우
리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제사 지내게된 동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공
통적으로 왕이나 제후 또는 특별한 충신에게만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후
대에 제사를 지내야 훌륭한 가문이 될 수 있다는 조상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의 유익에서 발단되었습니다.
천주교와 제사 - 천주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조상숭배를 금해야 한다
고 했으나 1939년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의 교서를 통해 유교의 조상숭배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요 시민적 의식이라 하여 1940년 한국 천주교도 신사 참
배나 조상숭배는 시민적 의식이라고 표명했습니다. 이런 교황의 교서 배경
에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이탈리아가 협조했다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습니
다. 그러나 진리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효도와 제사 - 기독교의 효도는 살아계실 때 잘 모시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제사는 그 배경이 효도라기 보다는 신앙적 의미가
다분히 큽니다.
(1) 제사는 숭배의 형태입니다 - 경배와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2) 재앙을 면하는 수단입니다 - 묘자리를 잘 써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제
사를 지내야 조상이 후손을 재앙에게 막아주고 복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복
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 뿐이요 재앙을 막은 분도 하나님 뿐입니다.
(3) 조상을 귀신으로 여깁니다 - 조상귀신이 구천을 떠돌다가 자손이 제사
드리면 제사밥 먹으러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을 모시고 섬긴다는 것
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이상의 세가지 동기에서 볼 수 있
듯이 제사는 부모에 대한 효도의 차원이 아니요 가문이 잘되고 후손이 복을
받으려는 단순한 기복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인간에
게 복을 내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죽은자와
산자는 대화할 수 없기에 죽은자는 인격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효
도의 차원이 아니요 신앙적인 단계로 넘어서서 의미가 잘못 전달되고 있으
며 이해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효도한다면 추도식으로 모이고 돌아가
신 분을 위해 무얼 하려고 말고 살아계실 때 남기신 유언이나 평소의 가르
침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자세가 중요하
다 할 것입니다.
= 결론 =
명절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절기요 형제가 모여 햇곡식으로 음식
을 장만하여 애찬을 나누며 하나가 되는 절기요 그래서 가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가문을 지키고 행복한 가정 감사가 넘치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제사는 언제고 용납할 수 없고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자주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을 만나 세상풍습과 허례허식에
마음 뺏기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을 보이며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
니다. 무지를 깨우치고 어둠을 밝히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성도의 가정
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완전한 종
성경 본문: 출 21:1-6
모세의 율법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법, 시
민법, 의식법입니다. 이중 의식법에 나타난 성자 예수님은 죄의 종의
모습과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사회와 시민 생활에서 종이나
노예에 관계된 규범인데 여기서 우리는 세종류의 종에 대한 교훈을 받
게 됩니다.
[용어해설 ]
@ 율례(1):재판하다. 그리스도
@ 종(2); 히브리인의 종 (1) 부모가 팔경우 (2) 도적질한 다음 배상
할 수 없을때, (3) 빛을 못갚았을때 (4) 가난하게 되어 스스로 몸을
팔경우 등).
@ 6년 (2) : 세상숙 (계 13:18).
@ 7년(2): 안식년
@ 재판장 (6) : 하나님
@ 그 귀를 뚫음(6) : 십자가
2 완전한 종으로서의 그리스도
구약에서 "종"이란 말이 80여회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주님과 관
련된 것은 272회나 됩니다. 이는 극도로 낮은 자리로 오신 굴종을 의
미합니다. 완전한 종으로서 그리스도는 6년동안 인간이 빚진 책임을
감당하셨습니다(2절,갈4:4).
완전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를 포기하고 계속 종이 될 것을 자
원하십니다(5절). 그 이유는 상전을 사랑하기 때문이요(눅 2:49),아내
된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54:5).
무엇보다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안식일이 되
어도 종의 자리를 포기하기 않고 계속 그 사랑의 종노릇하시기 된 것
입니다(히 2:13).
그 사역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종은 재판장에게 문설주에 송곳으로 그 귀를 뚫었습니다(6절). 이
는 출애굽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건과 동일하며, 결국 예
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표는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에 지금도 그대로 있으며, 우리를 위
하여 하늘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며 (롬 8:34), 우리가 거할 성을 예
배하고 계십니다 (요 14:1-).
[ 결론 ]
오늘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위로 하나님을 위하며, 이웃과 체계를 위
하여 사랑의 강권적인 역사로 실천하는 종이 됩시다.
반드시 죽일지니라
성경 본문: 출 21:12-17
본문은 이스라엘의 시민법 중 사형에 해당하는 네가지 종류의 범죄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용어해설]
@ 한곳을 정하리니(13) :도피성 6개성읍 (1) 골란 (2) 라못 (3) 베셀
(요단동편) (4) 게데스 (5) 세겔 (6) 헤브론
@ 짐짓(14):외람되고 거만하게
@ 후린자 (16): 몰래 도적질한 자, 유괴범
1. 사형에 해당하는 죄
요즘 법조게 일부에서는 사형 폐지론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지 4개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살인죄입니다(12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입니다
두번째는 부모를 구타한 죄입니다(15저례, 정신적 폭행도 바로 부모
를 저주하는 행위 (17절)가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육친, 영적 지도자(왕하 13:14), 정치지도자, 노령자를 하나님이 세우
신 부모의 권위를 가진자로 표현합니다. 그 외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
로 사람을 유괴하는 "후린자"가 해당됩니다. 옛날 노예제도나 오늘날
의 인신매매가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2. 그렇다면 살길이 무엇일까요?
살인에 해당하는 영적 범죄를 많이 범한 우리들이 왜 당장 죽지 않습
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피난처" (13절)를 세워 놓으셨기 때문
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요단강 동쪽에 세곳, 서족
에 세곳, 모두 6개의 도피성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는 모두 성전이
요,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 18:2-3, 게레스,
세셈, 헤브론, 골란, 길르앗라못, 베셀).
또 이유가 있다면 주님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눅 23:34).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있
는 것입니다 (벧후 3:8).
[ 결론 ]
성도 여러분!
이 사랑의 하나님도 참으심의 기한이 있습니다. 살인죄를 범하지 않
는 소극적인 것도 중요하나, 한 영혼을 진정 한다면 귀하에 전도하는
일입니다.
쓴 나물의 유익
성경 본문: 출 12:5-10
저희가 어렸을 때에는 학질 즉 말라리아가 몹시 성했습니다. 저도 학질을
여러 번 앓았습니다.하루 걸러 한 번씩 열이나고 춥고 고생을 했는데, 이
학질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나중에 고치는 약이 나왔는데, 긍계랍이라고도
하고 키니네(과이나인 Quinine)라고도 하는 이 노랗게 생긴 약만 먹으면 학
질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얼마나 쓴지 어린아이들이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먹어야
병이 낫겠는데 안먹으려고 합니다. 먹어야 병이 낫겠는데 안먹으려고 하니
까, 어떤 엄마는 큰 말누깔 사탕을 보여주면서 먹으면 이 사탕을 주겠다고
달래기도 합니다.
영의 세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신앙의
연단을 주기 위해서, 쓰디 쓴 약을 먹이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기
전에, 일년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는 대문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먹되 쓴 나물도 아울러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만
먹지 말고 반드시 쓴 나물을 사이 사이에 먹어 가면서 고기를 먹으라고 말
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달콤한 것만 주시지 않고 때로는 쓰디 쓴 것을 먹으라고 주
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쓴 나물을 먹이실 때는 괴로워도 그것을 먹
어야 우리에게 유익하고, 긍계랍 먹은 후 왕사탕을 물려 주듯이 달콤하고
수지맞는 큰 축복을 주십니다.
달콤한 것만 주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쓴나물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 미국에 부흥회 인도하러 가서 치과 의사 선생님 집에
서 숙식하는 때가 있었는데, 그 치과의사는 아이들에게 쵸콜렛을 절대로 먹
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가 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달콤
한 은혜만 주시는 법이 없고, 수지맞는 일만 생기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
육간에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이고, 삼층천에 올라
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내려온 사람인데,하나님은 그에게 사탄의 찌
르는 가시를 주셔서 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 했습니다. 이것을 제거해 달
라고 세 번이나 특별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이 제거해 주시지 않고 " 내은
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하셨
던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
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이 깨닫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
력이 내게 머물게 하시려고 이 가시를 뽑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쓴 나물을
더 많이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쓴 나물을 먹이시든지 뱉아버리
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 먹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1. 말씀의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9절에 보면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갖
다주며 받아 먹으라고 했습니다. 받아 먹으니까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
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때는 꿀같이 달고 맛이 있지만, 이 말
씀을 깨달은대로 내 생활에 실천해 옮기려면 쓰디 쓴 것을 경험하게 됩니
다. 말씀의 쓴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덜된 신자요, 성숙되지 못한 신
자입니다.
어떤 고통이 오고 손해가 와도 말씀대로 실천해 옮기는 삶이 있어야 합니
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쓴잔이므로 밤새도록 기도하시며 그 쓴잔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
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
가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제1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달콤해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죄와 멸망을 끌어 들였지만, 제2의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하여 십자가의 쓴 잔을 받아 마심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가져 왔습니다.
말씀의 쓴 맛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2. 징계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불순종하고 곁길로 갈 때에는 사랑의 채찍으
로 때립니다. 무섭게 때릴 때가 있고 약하게 때릴 때가 있습니다. 물질로
때릴 때가 있고 질병으로 때릴 때가 있고, 교통사고나 재난으로 때릴 때가
있습니다. 또 자식을 통해서 때리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즉 구
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
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
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1절에는 "무릇 징계가 당
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
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징계의 쓴 나물을 감사히 받아 먹고 회개하면 달콤한 축복의 열매를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 한번만 범해도, 십일조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들어서 한 번만 떼어
먹어도 하나님은 징계의 쓴 나물을 먹여서 깨닫게 하십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을 우연으로 돌리거나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욥기 5장 17절로부터 보면 "볼지어다 하나님게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
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수치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과 칭찬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치도 당하게
합니다.쓰디 쓴 욕도 먹게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0-33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뺨을 때리시며, 수치를
당하게도 하시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
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
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
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뺨을 때릴 때는 실컷 맞고, 망신을 주고 수치를 당하게 하실 때
는, 아무 변명이 불평하지 말고 실컷 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풍부한 자비대로 갚아 주시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높이실 때가 있는가 하면 낮추실 때가 있고, 낮추실 때가 있는가
하면 높이실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높여주시지만 않고, 또 언제나 낮추시
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고 우쭐하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억울하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
다.
이사야 51장 7-8절에는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
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
라 그들은 옥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
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비방이나 훼방에 지나치게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4. 환난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언제나 맑게 개인 하늘만 계속되면 기분은 좋을런지 모르지만, 나무도 자
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생활에도 기분좋은 일이나 평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쓰디
쓴 고난과 환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안의 꽃처럼 만들기 원치 않습니다. 때때로 환나도
당하고 승픔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게 합니다. 언제나 성공과 승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있고 낭패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죄를 깨
닫게 되고, 죄를 끊게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난공불락의 큰 여리고성도 함락시켰는데, 조그마한 아이
성 싸움에서 실패하여 크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불의 사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해서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 한 여자의
공갈 협박에 낙심하여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까지
요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찬을 듣고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으나,후
에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놓고 큰 망신을 하고 수치를 당하기도 했
습니다.
어느 누구도 늘 승리와 성공의 삶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과정으
로 보고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통의 쓴 나물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고난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는데 감당치 못할 고난과 시험은 없는 것
과, 고난과 시험 뒤에는 큰 축복이 있다는 것과, 모든 고난은 합동하여 유
익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할 렐 루 야 !
교제를 통한 축복
성경 본문: 출 24:1-11
<서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식사에 초대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시간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
것은 어떤 특별한 음식이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함께 먹는 사람들과의 교제
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음식은 교제의 수단일뿐 음식 먹는 그 자
체만을 위하여서 모임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어서 자주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단순히 먹는 재미가 아니라 음식을 먹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한 식구들이 기쁨으로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마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식구들도 서로 뿔뿔히 흩어
져서 저마다 각기 음식을 먹으면 함께 모여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
간이 없어지게 마련이고 분위기도 서먹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는 멀리 흩어져 있는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하고 한 식구들 끼리도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
나 교제를 나누면서 즐거운 식사를 함께 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론>
1. 이때 당시의 상황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것
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
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셔야만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주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로 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만 자신을 보이십니다. 마음이 청결
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
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회개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안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를 통해 전달 되었습니
다. 그들은 그 말씀대로 따르겠노라는 결단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2) 하나
님은 우리 존재의 창조자시요, 우리 생명의 보호자시며, 우리가 보상할 수
도 없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
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순종 뿐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길을 갈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모든 약속을 책임지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장 처참하고
암담한 순간에도 계약의 목적과 희망과 약속이 결국 성취되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
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
이기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원천이 되십니다. 이를 지키고 받
아들이기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3. 이 결단의 약속을 위해서는 피흘림의 언약이 필요합니다.
(1)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모든 희생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이 피는 백
성들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는 예식이며, 자신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결단
의 행위입니다. 죄값으로 온 죽음은 피흘림을 통해서만 사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피흘림은 곧 생명을 바치는 것이며 그 때만이 자신의 생명은 구
속된 것이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백성들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는 예식, 곧 피 흘림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은 자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범
죄함으로 인해 자신의 창조주의 은총을 상실했기 때문에 생명을 대신한 피
흘림에 의해 속죄가 먼저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언약에 의한 교제가 있을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결
단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의 피를 둘로 나누어서 한 쪽은 제단에
뿌렸고, 한 쪽은 백성들 위에 뿌려졌습니다. 백성들이 드린 희생제물의 피
가 제단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해 백성이 그들 자신
의 삶과 그들의 존재를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
신 희생제물의 피가 백성들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그
의 은총을 백성들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이와같이 오
늘 우리들에게도 희생제사를 통한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
신하여 흘리는 생명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
를 대신하여 생명의 피를 흘리신 분이 계십니다.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
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죄를 대신 피로
값주고 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매신 예수를 믿기만하면 우리
의 모든 죄는 깨끝함을 받고 비로소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됩니다.
4. 이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하나님은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 하셨습니
다.
(1) 언약의 피로 그들 자신을 성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산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고 거기서 하나님을 뵈옵고 음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분이
서 계신 곳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갖춘 사람들도 많
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으
며,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으며, 예수의 이름
을 부를 때 나와 함께 교제를 나누시게 되었습니다. (계3:20)
(2) 하나님의 백성들 끼리의 거룩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적인
교제가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식탁의 교제를 잘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지려면 식탁의 교제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마음에 확신이 생겼고 또 동행자
들이 그 위치한 곳에서 참으로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행복입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이 온전히 거룩한 연합을 이루어 그리스도
의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3) 여기에 하나님의 임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의 진실된
교제 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을 뿐이요, 그가 주시는 선물에 같은 사랑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하나님
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사람들을 보시고 모든
이스라엘에 축복해 주셨듯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우리의 제
단과 여기에 속한 모든 자녀들의 가정까지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모습은 멸시하는 자가 아니고 보호하시며 기쁨
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무한히 거룩하실뿐 아니라 무한한 사랑이신
그분 앞에 마음 문을 열어놓고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
다.
<결론>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은 여러가지이겠으나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있는 자로서 주님 안에서 성도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가운
데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놀라
운 역사를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
성경 본문: 출 3:1-12, 고전 15:10
모세는 히브리의 위대한 정치가요, 최초의 입법자였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인들을 독립시켜 한 민족으로 가나안에 세운 애
국적 지도자이다. 본문은 이집트의 대왕 파라오를 피하여 호렙산에서
양떼를 치던 어느날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
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모세는 자기의 백성을 이집트
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 때 모세는(11절) '제가 감히 누구
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저 내겠습니까?'하고 대답한다.
이 물음은 하나님은 모세라는 한 사람의 영원한 본질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라는 사명으로 이해하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사람의 특성은 사람을 고립된 사람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고 하
나의 관계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를 떠나 고립된 사람은
없으며 사람은 어디까지나 여러가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살고 또 죽
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해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에게로 온다. 구약성서의 창
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본래 히브리말의
'아담'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집합명사로서의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은 동물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생명은 동물
에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 넣어 주심으로서 부
여되며 이 입김이 떠날때에 사람은 죽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홀로 닫
혀진 세계 속에서 살다가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한 초월자 앞에서 그
와의 관계에서 살아야 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자신의 가
능성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능성, 즉 초월적인 가능
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사람은 무엇인가?','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은 하나님이 그의 미래를 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사람
이 얻은 것은 사람의 영혼 불변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아
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위한 사명이다.
모세가 표현했던 '감히'라는 말은 무엇인가? '감히'라는 말은 '죄송
스러움이나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는 뜻과 '주제 넘게'라는 뜻이 있다.
'감히'라는 유한한 존재를 철저히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관도 신앙을 통해 새롭게 다져져야 한다.
고대 이집트에는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라는
괴물석상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아침에는 네발로 다니고 낮에는 두발로 다니고 저녁에는 세발로 다니
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이라는 답을 맞추는 사
람은 살려주고 답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동물, 합리적 동물이라고 했다. 프
랑클린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하고,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
라는 말로 인간을 표현했다. 중국에서는 만물의 영장이라고하고, 생물
학자는 진화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고등동물이라고 했다. 막스쉘러는
무엇이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존재로 인간을 표현했다. 철학자들은 옳
바로 사고하는 존재로, 윤리학자들은 바로 행동하는 존재로, 종교가는
옳게 믿는 것으로, 공자는 生도 모르는데 어찌하여 死를 알겠는가? 했
고, 시인은 바로 느끼고 힘차게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으며, 예수는 바로 죽는것이 참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이 인생
관이나 인간관은 한 민족이나 한 인생의 정신적 지주요 마음의 대들보
요 생활의 뿌리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는 힘차게 성장한다.
'감히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모세는 새로운 희망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값없고, 깨지기 쉽고, 오래가지 못하는 흙으로 창조
된 사람은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말씀이 있다. '나'를 위해 외아들을
내어 주는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신학에서 '사람'이란 물음은 하나님이 그의 미래의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 물음
에 답변으로서 사람이 얻은 것은 사람의 영혼불멸한 본질이 무엇인지
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위한 사명이다. 이와같이 성
서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를 위하여 사
람을 찾으실때 비로서 일어나며 여기서 '제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
은 하나님의 사명앞에 서있는 사람의 무력함을 표현한다. 이 세계를
역사화 시키고 그리하여 비인간적인 세계를 인간적인 세계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와 그 세계를 기다리는데 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사람'은 무아의 경지에서 무시간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존재가 아니라 죄와 고통과 죽음이 없는 새로운 하나님의 세
계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존재'요, 이를 위하
여 애쓰고 땀흘리는 '창조활동의 존재'이다. 인간은 주어진 현실에 만
족하고 이에 안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
아가는 이 땅위의 '순례자'이다.
엘리야를 보자. 너무나도 대적이 많다보니 그만 진리의 싸움에 지쳐
서 광야 깊숙히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하
게 되었다. 다시말해 죽여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사명을 다하
지 못한 그의 소원을 하나님은 들어 주시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물을 마시우고 떡을 먹이고 어루만져 피곤을 풀게하고 40주야를 달래
서 피곤치 않게 하시어 호렙에게까지 보내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여
후계자를 삼게 했으며, 나중에는 두루마기를 벗어주어 갑절의 영감을
받게 한 후에 승천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누가 말했듯이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는 말이다.
80년 5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글귀가 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묶어 두려고 만든것이 아니
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라는 말은 바로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말이
다. 나의 삶의 자리를 바로알고, 나의 할 일을 깊이 깨닫고 나의 나아
갈 목표를 옳게 세우고 나의 생명을 역사에 바칠때 진정한 사명적 자
아가 탄생한다. 소명감(Calling), 사명(Mission) 이런 말은 라틴어
Missio에서 유래한바 '보낸다'라는 뜻이다. 인간은 어떤 직분과 책임
을 다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진 존재이다. 스위스의 사상가이며
명작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를 쓴 Karl Hilthey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라고 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하
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있게 사느냐
가 중요한 문제다.
반드시 우리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옳바른 신념체계와 확고한 자아
확립과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성경 본문: 출 34:1-9, 고전 13:1-7
고린도 전서 13장의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본능적인
생활 관습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
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우리의 본능적인 행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인내와 온유- 이 두
긍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동
시에 그 다음에 나오는 여덟 가지의 부정적인 것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내와 온유" 이 두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움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 두가지 성품을 먼저 배
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인내와 온유가 자리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어떤 대단한 일 즉 천사의 말을 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산을 옮기거
나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
고 온유하게 행동하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해 가시는
모든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이 사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
리가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은 먼저 인내와 온유함을 배우는 일
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인내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인내의 어려움
"인내"라는 희랍어는 "끓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
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오래 고통을 받는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오
래 참는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오래 참는다는
것은 더욱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더
욱 큰 고통입니다. 동남아에서 한국인들의 별명은 "빨리빨리"입니다. 우리
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두르다 보니 인내심이 부족하게 되었나 봅니다. 자
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두르게 되고 앞차가 조금만 지체
하면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려대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심의 부족은 결국
우리에게 사랑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때문에 다른 사람을
참아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철저한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
다. 사랑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과오에 대해 너그럽게 대하
며, 오래 참으라고 하는 것은 큰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가만
히 돌아볼 때 인내심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10년 가까이 주일 저녁이나 수
요일 저녁이면 찾아와서 용돈을 가져간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습니다. 사업
에 실패하고 가정도 파탄이 되어 완전히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 동창들
을 찾아다니며 그날 그날을 연명해 간 친구였습니다. 10년 동안 그 얼굴
을 대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통하여
나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부족한 자인가를 확인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 친구가 지난 성탄절 아침에 귤 한 상자를 가지고 찾아 왔었습니다. 지
금은 의정부 어느 양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신세를 갚겠다고 하였을
때는 제가 오히려 쑥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는 "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인내심은 우리
속에서 우러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실 때만 오래 참
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
으시는 분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은 그 인간의 죄악에 대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지 120년 뒤에야 홍수로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참으신다고 오히
려 화를 냈습니다. 악독한 성읍인 니느웨를 바로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로 이 참으
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심을 보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오늘 읽어드린 출애급기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
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
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
브리였던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원하여 내시어 시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므로 그들을 자기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은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
실하지 못했고, 그를 떠나 우상에게로 갔으며, 감사와 찬양대신 불평과 원
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이스라엘의 배반을
참지 못하고 그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리면서
화를 냈습니다. 또 한번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두
번 내리침으로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들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약속의 땅에 인도하여 들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계약에
신실하셔서 그들을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적인 배반의 역사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
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
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들의 모든 죄
악을 담당하게 하시므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진노를 스스로에게 돌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런 오래 참으심의 본을 통해 우리에게도 오래참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
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내심 있는 어떤 목사님이 한 노인에게 전
도엽서를 계속 보냈습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아무 회답도 없었습니다. 목
사님은 다시 3년 동안 봉함편지를 꾸준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
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단념치 않고 더욱 정중하게 두루
마리 종이에 붓으로 써서 보냈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자 목사님은 마
침내 그 노인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보니 그가 이제까지 정성스럽게 보낸 편지들이 휴지가
되었거나 또는 가늘게 꼰 끈이 되어 담뱃대 청소에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방문을 받은 노인이 하는 말이 "그것 참, 담뱃대 청소에는 두루
마리 종이가 아주 좋습디다"였습니다. 인내심이 많은 목사님도 이 말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몇 천년도 더 기다리셨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돌
아와서는 계속 그 노인에게 더욱 정성을 들여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
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어느 주일에 말쑥하게 차린 노인이 그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자기 고집과 오만함으로 굳게 닫
혔던 그 노인의 마음문이 목사님의 인내심과 깊은 사랑과 기도로 열렸던
것입니다.
오래 참으심과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
리의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인내로써 인간이 그 죄악
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대로인 것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
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 개하기에 이르기
를 원하시느니라."(3:9)
오래 참는다는 것의 의미
그러면 오래 참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예수님의 용서의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죄지은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일
곱 번쯤이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일만달란트를 빚진 종의 이야
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서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가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종은 궁에서 나오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그에게 사정하였습니다.
"나를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처럼 그의 빚을 탕감해 주
는 대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말을 듣고 화가나서 그 종을
다시 잡아들여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
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결국 용서하는 마음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
람들이 나에게 저지른 짓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이는 오래 참을수 없는 것
입니다. 상대방이 아직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라
도 나의 쪽에서 먼저 용서해 줄 용의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을 때는 결국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복수나 응징이 따르게 마련
입니다. 요즈음 페르샤만의 전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라크가 쿠웨이
트를 무력으로 침략한 사실에 대해 세계가 다 분노를 하였고, 그것을 참아
줄 수가 없어서 결국 응징하는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전쟁은 정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
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인 것입니다.
자동차가 잔뜩 밀려 있을 때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어떤 사
람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노래를 문을 닫고 목청
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면 짜증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
니다.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노래를 부르면 지루하고 짜증스럽던 일
이 사라지고 마음에 여유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바로
이와같다고 하겠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한 일에 대해 집착을 버리지 못할
때는 증오심 밖에 생길 것이 없지만 그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오히려 용
서할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래 참음과
용서에는 나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손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손해본 것을 회복하려다가 마음에
더 큰상처를 입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어 버릴 것입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많은 도발과 억지
와 생트집이 있지만 그럴수록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필
요한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로 우리가 많은 손해를 보지만 전부를 잃은 것
은 아니었습니다. 인내로 저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며, 저들의 죄악을 용
서해 줄 아량을 우리가 갖지 못하면 통일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폐르샤만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만약 최악의 사태로 발
전하여 후세인이 쿠웨이트의 9백개의 유전을 모두 폭파하고 송유관을 열어
기름을 바다에 흘러들게 할경우 이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큰 과오를 세계
에 안겨 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좀더 구
체적인 우리 생활에 있어서 오래 참는다는 것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일이기
도 합니다. 잠언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석하여도 마음이 조급
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14:29),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15:18), "노하
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
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거창한
자선이나 동정을 베풀기 이전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화를 내지 않는 데서
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4:26)라고 하였습니다. 노함과 분냄은 그리
스도인들이 모두버려야 할 옛 사람의 구습인 것입니다. 한가지 더 오래 참
는다는 것은 남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도행
전 26장 3절에 아그립바왕 앞에 선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신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자신의 변명하
는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는 일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사실 별로 마음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과 앉아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을 때 인내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
해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대단한 일에
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데서 나타나는 것입
니다.
한 부인이, 자기가 지금 정신 분석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자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지 않
니? 무슨 문제가 있다면 왜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거지?" 그러자 그녀가 대
답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일일 거야.
만일 그 친구들 중 단 하나라도 내 말을 들어만 준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교회 친구들이 얼마나 재빠르게 나한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말을 하
는지 넌 모를거다. 누가 내 말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좀 우습긴 하다만 50분이나 다른 데 신경쓰지 않고 내 말을 들어주
는 상대가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단다."(A. L. McGinnis 사랑
과 우정의 신비 P115)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이 우리의 본성과
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수 밖에 없는 것입
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그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제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사랑의 인내를 열매로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노
하기를 더디하며, 용서하며, 남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며, 남의 죄를 참아
줄 수 있는 사랑의 생활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무
엇보다도 이와같은 사랑의 인내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 모두가 금년에
는 인내를 신앙의 목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임을 기
억하시면서 모든 신앙의 생활을 이 사랑 위에 세워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성경 본문: 출 4:1-9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모세라고 하는 사람
을 꼽을 수가 있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이고 탁월한 정치가이고
용감한 군인이며 인간 최대의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큰 업적을 쌓았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서 이 모세와 함께 해 주신데에 위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는 저 애굽으로 가라 거기 너희 백성들이 400년동안 노예생활속
에서 이끌어 내고 그들을 인도해 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모세는 민족 해방의 지도자가 될 아무런 조건을 갖지 못해서 사양을 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든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맡기면서도 어떤 능력이나 약속을 하신 것이 아니다. 오직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또 그것으로 나타날 표적을 보염아
을 뿐이다. 그러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씀을 생각해 보자.
첫째, 현재 나에게 있는것을 찾아 보야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지킬려고 하실때에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묻는다. 모세처럼 지팡이입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 하나님 앞에 대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없는 것
으로 일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해도.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라고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받은 은사대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가지
고 있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가진것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지팡이라고 상징이 되고 있다. 지팡이는 곧 모세 자
신을 가키린다, 마른 막대기 같은 존재를 통해서 큰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자 하시는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땅에 던져진 존재 사탄의
노리게 감인 존재 그러고 주의 손에 잡혀서 하나님의 지팡이요 위대한 능력
을 발휘하는 손이 되는 것이다.
둘째,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실패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유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모세는 40년 목동생활에 할 수 있는
것이 지팡이로 움직이는 일이었다. 성공자의 공통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라다. 우리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냐, 역
사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은 일을 시키신 때는 큰 능력을 주시고
일을 시키시지 않는다. 현재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는 큰 일을 이
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일
하신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일하라
고 주님을 말씀하신다. 지금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셋째, 내 손에 있는 것을 주께 드려야 한다.
모세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는 양치는 지팡이에 불고하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손에 드릴 때에 하나님의 지팡이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길을
향해서 가는데에 기적을 만든 놀라운 지팡이의 역사를 이룩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자에게서 일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고 일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 손에 있는 것 까지 다 포함하게 하시고
최후의 남은 것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후에 일하게 하신다. 이제 우리
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겸손이요,능력이요,축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의지하면서 그리고 내 가진 것을
던져 버릴 때에 귄세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땅에서 보람있는 큰 일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이 주는 확신
출 15:1-11
고전 15:42-58
오늘은 부활의 아침입니다.부활의 환희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다시 산다는 이 놀라운 희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넘어 부활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은 정말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달리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까닭은 바로 이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진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굳굳하게 그 신앙을 지켜오는 것도 바로 이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과 같은 절망적인 시대에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까닭도 거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욱 이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절망의 밤에 등대와 같이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1. 부활의 주님은 진리의 승리를 확신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 진리 되신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난한 자요, 약한 자요, 권력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하셨고 권력자들에게 쫓겨다니셨으며,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약함에 대하여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약함과 죽음이야말로 악의 근원인 사단을 패배시킨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철저하게 낮아지셨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셨던 예수, 사단은 예수의 철저하게 가난하고 무기력함 때문에 오히려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장악하던 죽음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로부터 진리를 좇아 행하던 자들은 불의한 세력에 의하여 박해와 멸시를 받아왔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약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인들이 이같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의를 따르는 자들의 최후 승리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약한 자요, 패배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의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의 손에 못을 박던 망치 소리는 요란하였습니다. 그 순간 모든 진리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 사단의 영원한 패배를 가져오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진리는 오히려 죽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불의의 세력은 아직도 자기의 패배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고 무덤 문을 굳게 봉인하고 군인들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때늦은 일이었습니다. 진리는 봉인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에 얼어붙었던 대지라 할지라도 그 밑에서 솟아나는 새순의 싹틈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이 역사 속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봉쇄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탄압하고 위협하며 옥에 가두고 공갈 협박을 하지만 그것으로 진리가 봉쇄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로 확신하게 한 것입니다. 비록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지만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에게 속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의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2.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 15:42-44). 이것은 우리의 큰 소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부활이 없었다면 또 부활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의 약함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주님의 음성을 따라 사도 바울도 확신 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확실한 것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것이 생명의 부활이요(요 5:29), 영광스러운 부활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의 육체는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병들고 쇠할 수밖에 없고 마침내 썩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뿐 아니라 이 땅의 생애 자체가 실패의 연속이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태어난다면 좀 더 멋진 생애, 좀 더 성공적인 생애를 살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인간의 생애는 마침내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실패의 생애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다시 새로운 생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썩지 아니할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는 슬픔과 눈물이 없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생애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한 새로운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실패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고생만 하다 살아온 사람들, 못생겼다고 비관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병들고 고생한 사람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니 영광스러운 것으로, 썩지 아니할 것으로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확신을 가졌던 자들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온전히 주의 복음을 위하여 아낌없이 바쳤으며, 때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믿음을 지켜왔던 것 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건 상관할 것 없습니다. 다만 이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오직 주님 위하여 봉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개의할 것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영광의 부활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그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부활하시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들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의심하였을 것이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도 별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도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여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맥이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셨기에 주님의 이 모든 말씀들은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과 확실성을 가지고 다가와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가 가르쳐 주는 것처럼 포도나무 원줄기 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므로 가지인 우리가 살고 또한 날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능력 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풍성하고 적극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이 아닐 줄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한 바요 다같이 고백하는 신앙인 줄로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서 우리 속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확신을 갖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봄바람이 대지 위에 불어올 때 죽었던 생명들이 꽃을 피우고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위하여 점점 더 푸르러가며 무성해지듯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죽어가던 우리의 심령 위에 임하여 오실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체험하게 되고 그 생명이 더욱 푸르러 가면서 마침내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확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가난과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와 절망으로 쪼들린 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줍시다.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를 이 땅에 이룩합시다. 부자유로 질식해 가고 있는 이 땅에 자유의 대기를 불어넣읍시다. 생명의 봄바람을 이 겨울의 대지에 불어넣어 움츠렸던 생명을 약동하게 합시다.그래서 봄의 계절이 오게 합시다. 부활의 계절이 오게 합시다.
아무리 죽음의 세력이 기승을 부려도 부활은 다가오는 생명의 약동입니다. 봄이 필연적으로 오듯이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그 논리적 증명에 의해서 부활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오늘도 살아 계셔서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확신으로 여러분의 생애가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 씀 : 출20:12
오늘의 세상은 말로 할 수 없이 급변하고 있다. 정말 숨돌릴 수 없을 많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의 상황이 변하고 우리의 관계가 변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속에는 불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모 자식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는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관계를 천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함부로 깨뜨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부모를 죽인 패륜아를 보면서 이 사회의 패역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얼마가지 않아서 패역하여 생지옥으로 변하여 결국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실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할일이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전교회에서 지키는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아침에 본문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신 말씀을 중심하여"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목으로 이 세대를 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한다.
첫째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볼 수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는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많은 곳에서 명령하시고 계신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솔로몬을 통하여 잠1:8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을 통하여도 엡6:2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라고 하셨다. 그외에도 많은 곳에서 명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을 통하여 말씀사시고 계심은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에 내가 살고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매우 패역한 세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신풍조가 만연한 세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미워하고 구타하고 살해하는가 하면 이혼이 급증하는 오늘날에 부모가 자식을 서로 맡지않겠다고 미루다 무책임하게 버림받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대로 가다다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지옥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성을 올바로 회복할 수 있는길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임을 알아 부모를 공경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둘째 네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네 부모"라고 말하고 있다.이는"너의 부모"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 "부모"라고 하면 몇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낳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잠23:22에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고 25절에서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다. 여기보면 너를 낳은 아비와 어미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나를 이땅에 존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오늘 잘나고 출세를 하고 권세를 잡았다고 하지만 부모가 나를 낳아주시지 아니 하였다면 우리는 이땅에 존재하지 못했을것이요 이 모든 일은 이루지 못하였을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볼 때 내가 오늘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자체가 바로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양육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는 젖으로 양육하고 자라나면 밥으로 양육하였고 먹을것 입을것 쓸 것을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 주었 양육하여 준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부모의 양육을 받지않는자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서 피덩이였을 때에 어머님의 손길이 아니면 우리는 지금 이땅에 살지 못하였을 것이 아닌가? 가만히 돌아보면 부모가 없다면 나는 이땅에 태어나지도 못하였으며
오늘까지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는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즉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옳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에나 성서에 비추어 보아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륜으로 받아들여지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 자녀에게 있어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왜 마땅한 일이라고 했는가?하면 엡2절에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중에 첫번째 있는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꼭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어떻게 공경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인가? 본문에 "공경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카베드"라고 하는데 이는"존경하다" 또는 "영광되게 하다"라는 뜻의"카바드"의 명령형으로 잠3:9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을 가르킬 때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부모를 공경하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경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틴 루터는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해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에 의하여 자녀의 육체가 조성되기 하나님의 생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여야 하는가?
첫째 청종하는 것이다. 잠23:22에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청종"이란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지성을 다하여 부모님께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한다 하여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불효가 되는것이다. 여기의 "순종"이란 온전히 부모 중심적이여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안맞아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어도 순종하는 것이 효도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 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를 몰고 지붕위로 올라가라고 해도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부모님이 하시는 명령이므로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인 것이다. 아무리 잘하는 부모를 공경이라도 그것이 자기 중심적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원하시는 대로 해주는 것이 공경하는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즐겁고 기쁘게 하여야 한다. 잠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네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를 염려하게 하거나 근심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딸을 시집 보내거나 아들을 장가를 보낸 어머니들에게 들어본다 딸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기쁜 것인가? 물어보면 저들끼리 속안섞이고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용돈을 많이 보내주고 좋은 옷을 철따라 해준
다고 해도 서로 싸우며 사느니 못사느니 한다면 이는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즉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부모에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것이 기쁘게 하는 것인 줄로 안다. 그래도 자식이 자라나서 한자리 할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사회에서 문제아가 되고 없었으면 하는 존재가 된다면 이는 부모를 근심시키는 불효가 되는 것이다.
셋째.부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다. 부모를 잘공경한 자녀들이 성경에 많이 있다. 그중에서 우리는 특히 노아의 아들들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노아의 아들 중에 축복과 저주를 받은 아들이 있다. 창9:25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여기에"가나안"은 노아의 아들로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농업을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어 그포도의 열매를 추수하여 포도주를 마시고 그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 아비의 수치를 보고 그 형제들에게 알게 한 자이다. 그러나 9:26이하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
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여기에 "셈"과 "야벳"은 형제 가나안으로부터 아비의 수치의 말을 듣고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 하여 아비의 하체를 덮었던 자들이였다. 여기서 볼 때 아비의 수치를 들어낸 자는 저주를 받아 종의 종이 되었고 아비의 수치를 덮어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부모의 수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진정한 공경인 것이다.
셋째 공경할 때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자식으로서 자식된 도리를 다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알아야 한다. 본문에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에 "그리하면"이라는 말은 앞에 있는 말씀을 행하였 때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여 주고 있다. 우리가 부모를 온전히 공경할 때 오는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축복은 첫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본문에 "나 여호와가"라고 하였다. 이는 복을 주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진정 우리에게 복을 주는 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복을 줄려면 복을 가지고 있어야 할 줄로 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복에 대하여 관심이 참많다.그래서 새해가 되면"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인사로 하고 또 복을 받기 위하여 복을 구할때도 있다. 그런데 진정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복을 주실 분이 누구인가? 복은 높은 사람이 낮은사람에게 빌어주는 것이 복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고 왕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중에 누구의 복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복인 것이다. 하나님은 만주의 주가 되시고 이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나의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여호와의 복을 받을 때 참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부모를 잘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둘째 어떤복을 주시는가? 첫째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을 받게 된다. 본문에 "네게 준땅에서"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가나안 땅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각자에게 적당한 땅을복으로 허락하여 주시고 계신다. 여기에 땅은 삶의 터전을 의미하는 것이요 쉽게 말하면
우리의 생활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지을 땅을 의미하고 있고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옛날에 사람이 적을 때는 일자리가 매우 적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지고 산업이 발달되자 일자리가 매우 많아지게 된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적당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허락하여 주신 것 이다. 오늘 본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허락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사도바울은 엡6:3에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에 "잘되고"라는 말은 "형통하고"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일거리가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를 잘섬기고 공경할 때 일거리를 얻는 것 뿐 아니라 그하는 일이 잘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알 수 있다. 둘째 장수하겠다고 하셨다. 본문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오래도록 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오래산다는 것은 축복중에 축복인 것이다. 오래 살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오래살수있는것
이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원수들이 침공하여 그들의 땅을 빼앗아 버릴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힘을 오래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다 오래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못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연수를 살고 죽은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야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대려가시면 우리는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모두 주의 말씀을 듣고 청종하여 주의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말 씀 : 출24:9-18
어떤 시골에 교회에 결석을 자주하는 할머니가 있있는데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넓은 들판에 사닥다리가 세워졌는데 그 위에는 하늘 문이 열려있고 거기에는 밝은 빛이 찬란하더란것이다. 그래서 이 할머니 그사닥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붙잡고 활짝열린 하늘문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한참 올라가다 보니 이상하게 다리가 한칸씩 빠져 있더란 것이다. 그래서 힘드려서 올라갔는데 또 조금 올라가니 세칸이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올라갈려고 다리를 옮겨 놓으려 하다가 너무 칸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만 올라갈 수가 없어서 다리위에서 울다가 잠을 깨어보니 꿈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날이 주일인데 이번에 빠지면 교회를 세번이나 결석하게 되는 날이되드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결석한 많큼 천국 올라가는 그 사닥다리가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은 열일 제쳐놓고 교회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르다가 힘들고 어려우면 몇번이고 주저 앉고 다시 내려가야 되겠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올라갈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정상에 오를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11절에 "하나님
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라고 하였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라는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는 어떤 자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 9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하나님이 파송한 자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파송한 자를 만나주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파송한 자인 것이다. 그는 원래 호렙산 근처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던 목동이었다. 그가 과거에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여 왕제로서 애굽을 위하여 쓰임받기 위하여 준비된 일꾼이였으나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애굽사람을 쳐서 죽인 죄가 들어남으로 바로의 낮을 피하여
도망쳐 광야를 지나 미디안에 와서 망명생활을 한 자였다. 그는 그곳에서 장가들어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이였다. 하나님은 모세가 양치기 사십년을 한 뒤에 호렙산에서 불러주셔서 자기 백성을 인도해 낼 막중한 사명을 맡겨서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파송하여 보내신 것이다. 이는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서 세워서 파송한 자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택하여 불러서 능력을 주시고 사명을 주어 파송한 것처럼 파송한 것이다. 하나님은 파송된자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자주 만났다. 애굽에서 열가지 기적과 재앙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셨고 모세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순종하였슴을 알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선택하여 불러서 하나님의 교회로 파송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둘째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본문에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는 이스라엘 백성들중에서 모세를 돕기 위하여 뽑아서 세워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성소의 분깃을 가지고 살아가는사람들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주의 제단에 열심과 충성으로 헌신 봉사하여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섬기기를 전무한 사람들인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일하다가 보면 믿음이 성장하는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교회에 출석만하고 일하지 아니하면 믿음의 기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여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 세운 백성의 대표를 만나 주신다. 본문에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라고 했다. 여기에"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연륜이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백성들 가운데서 뽑아서 백성의 대표로 세워 모세를 돕는 자들이다. 이들은 상당한 식견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로들인 것이다. 이는 오늘 교회에서 영적으로 말하면 신앙의 경륜이 오래된 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교회에 노장들을 의미하기도 한다.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주의 제단에서 열심으로 봉사헌신 충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나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한다.
둘째.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다. 여기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만날 것을 명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렇게 하나님의 초청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청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도 아론도 나답도 아비후도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인도 하나님께서 친히 초청한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본장1절에"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라고 하셨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들을 초청하셨음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정하여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중에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왕이 종들을 보내어 청한 사람들이 있다. 이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왕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청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왕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고 지쳐 있는 우리의 심령들을 초청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또 요7:37에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다. 이는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시고 계신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알아야한다.
둘째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본문에"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고 하셨다. 여기에"산"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산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산이요 하나님께서 거룩한곳이라고 구별하신 산인것이다.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에 올라와 "여호와 하나님께로 와서 거기 있으라"고 명하셨다.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게시는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미국인으로서 최초의 음악박사 학위를 취득한 로웰 메이슨이란 사람은 "내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일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나가기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려면 그많큼 어려움도 많고 방해꾼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힘들어도 괴로워도 주님을 향하여 쉬지말고 포기하지 말고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모세도 아론도 나답도 아비후도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산에 오른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산에 올랐을 때 본문10절에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 보면 "듯하고"라든가 "같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으므로 이렇게 비슷하게라도 표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거하여야 한다. 여기에"거한다"는 말은"머무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아론과 그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데 첫째 하나님 앞에서 교제가 이루어진다. 본문11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의 산에 올라온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을 하나님은 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교제를 한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먹고 마셨더라"는 말은 계약 체결 후에 공동식사는 대개 계약을 체결한데 대한 상호
신뢰와 교제를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동식사를 한 것은 피로 맺은 계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교제가 회복되고 실제적인 관계가 확립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백성들은 적대관계가 아니라 한편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맺은 새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주께서 세우신 성찬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에 참예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새로와지는 것이다.
둘째 인생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신다.본문12절에"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다. 여기에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이 돌판에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고 삶의 목표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형통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올라오게 하시는 목적이 바로 이것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를 가르쳐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이웃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오늘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오늘의 세계의 경제권을 잡고 있는것도 세계의 학계를 잡고 있는 것도 모두가 그들의 조상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돌판에 적힌 글을 삶의 근본으로 삶고 살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정말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지킨다고 한다. 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인데 이때는 십리 이상 걷지 아니하며 곡식을 손으로 비비는 일까지도 죄가 된다고 해서 하지 않는 자들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무엇인가?를 하나님은 우리들
에게 가르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있는 자들마다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문제의 해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방법에 문제가 생겨났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켜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여 문제가 생기고 고장이 난 것이다. 밤이 새도록 고기한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는 이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그물을 씻고 있을때 예수님을 만나 두배에 가득한 만선을 만나게 되었고 자기가 바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여호와의 거룩한 성산인 교회에 올라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한다.
아 멘
손을 붙들어 올릴 사람
말 씀 : 출17:8-16
옛말에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장군이라고 하여도 혼자서는 싸울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도 가만히 보면 영적인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엡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듯이 승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승리할려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에서 하나님의 인도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 도착하여 매우 강한 대적 아말렉을 만났다. 한번도 전쟁을 치루어 보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싸워야 하는 모세의 마음이 어떻했겠는가? 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울것을 명하였고 자기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때 본문12에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아 그로 그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하여 "손을 붙들어 올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아무나 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여 예비한 사람이다. 본문9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고 하였다. 여기 보면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선택하여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바로의 학대아래서 고생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많고 많은 사람들중에 특별히 모세를 택하여 애굽으로 보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제사장을 세우실 때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특별히 레위지파를 택하여 제사장을 삼으신 것이다. 또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지파 사울을 특별히 택하여 주셨고 후에 유다지파 다윗을 택하여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들의 선택과 다르다는것을 알아야 한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택할것을 사무엘에게 명하시고 나서 사무엘에게 다윗을 택하실 때 이세에 집에서 이세의 아들 엘리압을 만났을 때 그 외모를 보고 기름을 부으려는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인 삼상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나 나의 보는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택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둘째 백성중에서 택한 자들이다. 본문10절에 "여호수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라고 했는데 여기에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를 돕도록 백성
가운데 택함받아 이제까지 모세를 도와온 자이며 또 "훌"은 히브리어 원어로 "존귀함" 또는 "고귀함"이라는 뜻인데 누구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으로 주석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이며 유명한 성막 건축가였던 브살렘의
조부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모세처럼 다른 곳에서 불러서 세운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택하여 세운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애굽에서 고역을 격은 사람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들로 모세를 돕도록 택하여 세운자들임을 알아야 한다.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서 쓰실만한 사람을 택하여 쓰시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모세의 부족함을 채우시려고 택한 자들이다.우리가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왜 하필이면 모세를 불러서 애굽으로 보내셨을까? 허물많고 말도 잘할 줄 모르는 모세를 어떻게 하라고 보내셨을까? 그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세가 적당 인물이라고 생각하셨기에 보내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잘알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해주겠다는 표적까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을 깨닫고 출4:13에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다시 거절하게 된 것이다.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며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사람 네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완전하다고 택한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잘알고도 그가 적임자였으므로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아론을 예비하셔서 모세의 부족한 점을 채우도록 하신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협력하여 도울 때 온전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본문에 모세의 팔을 붙잡아 준 사람들은 바로 모세를 돕는사람들이였다. 어떻게 이들이 모세를 도왔는가?
첫째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 본문10절에 "여호수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라고 하셨다.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사람들을 택하여 전쟁에 나가서 직접 싸웠고 아론과 훌은 모세와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산꼭대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산꼭대기에 올라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라간 것이다. 여기에 아론과 훌이 함께 올라간것은 기도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백성들가운데 택함 받은 아론과 훌은 모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갈 때 함께 동행하여 올라간 것이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동참하는 것이요 협력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협력하여 기도하는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본문의 모세도 기도하기 위하여 손이 올라가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고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마18:20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모세는 아말렉을 물리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갈 때 혼자가지 아니하고 아론과 훌이 동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 한주간 동안 교회를 위하여 특별 작정 새벽기도를 하였다. 많은 성도님들이 동참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너무 감사를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가 함께 합심하여 한뜻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둘째 모세를 앉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본문12에 "모세이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아 그로 그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고 하였다. 여기보니 모세도 사람이므로 손을 들고 계속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피곤하면 손이 내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아론과 훌은 본문에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아 그로 그위에 앉게 하고"라고 하였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전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서서 기도하는 것보다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더편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함께 올라간 아론과 훌의 임무요 사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아론과 훌을 모세를 도와서 부족한것을 채우라고 택하여 세운 자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할 때 불편함이 없도록 그들은 맡은바 자기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을 하고 아론과 훌은 모세를 도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이다.
셋째 모세의 손을 붙들어주었다. 본문에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고 하였다. 여기에 아론과 훌은 모세를 앉게만 한것이 아니라 모세의"손을 붙들어 올렸더니"고 했다. 사실 이것은 모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요 힘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세는 앉아 있고 손은 아론과 훌이 붙들어 올려 주었다. 그저 모세는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였다. 그러나 아론과 훌은 서서 있어야 했고 아푼 팔을 견디고 힘을드려 손을 올려 주어야 했다.이는 무엇인가? 모세의 힘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진정으로 아론과 훌은 모세에게 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아니였다면 모세는 해가 지도록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옆에서 힘이 되었기 때문에 그 전쟁은 승리하게 된 것이다.
셋째 결과는 어떻했는가?
오늘 본문에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려준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힘을 다하여 충성을 다하여 모세를 도와 주었으므로 놀라운 결과가 있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첫째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본문13절에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백성을 처서 파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처서 파하니라"는 말씀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이들이 충성스러운 도움으로 그 전쟁을 온전히 이기게 된 것이다. 이는 본문의 전쟁이 여호수아와 함께 나가서 싸운 백성들만으로 이긴것이 아니라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협력으로 이루어진 승리인 것이다. 그것도 아론과 훌의 끝없는 헌신이 이루어 놓은 승리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본문에 모세와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이 각자가 맡은바 사명을 잘감당하므로 얻어진 승리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호수아나 그백성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아론과 훌"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였다. 나이도 모세보다 아론은 세살이나 많았으며 훌은 모세의 누이의 남편이라고 할 때 모세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람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순종하고 복종하여 자기의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모세를 도운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기 안일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
의 맡은바 사명을 게을리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이르비딤 전쟁에서 패하여 그종족이 망하였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 교회도 이같이 어느누구의 한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목사와 장로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보냄 받은 목사를 협력하고 도울 때에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승리하게 되고 성장하게 되고 형통하게 되는것이다.
둘째. 후세에 귀감이 될만한 일이라고 하셨다. 본문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고 하였다. 여기보면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라고 했다. 하나님은 본문에 나오는 아론과 훌의 행한 일을 후세에 기념할만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사실 우리가 아무 일이나 기록에 남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반듯이 후세에 귀감이 될만한 일들을 기록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라고 하셨다. 그뿐 아니라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될 것을 아시고 후대의 백성들에게도 본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이들이 받은 축복은 생각해 보자. 먼저 아론은 혈육으로 볼 때 동생인 모세를 협력하여 여호와의 뜻을 이루었으므로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그들 후손들이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복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훌은 유다지파였지만 출24:14에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 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 찌니라"고 하였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는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 되었으며 출35:30이하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여호와께서 유다지파 훌의 손자이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라고 하셨다 이를 볼 때 이들이 받은 축복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주의 종의 손을 붙잡아 올려 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아무리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해도 전능한 것은 아니다. 부족함이 많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론과 훌을 세워주신 것이다. 만약 모세가 부족한 것이 없었다면 아론과 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여 자자손손이 축복받는 아론과 훌과 같은 성도님들이 되기를 원한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
말 씀 : 출3:10-12
성서에는 나라를 위하여 일한 애국자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모세이다. 모세는 애굽의 왕 바로의 후계자의 좋은 자리를 버리고 혈기로서 자기의 동족을 위하여 일하려 하다가 살인자가 되어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외롭고 고독한 망명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양을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가시뗄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다. 너무 신기하여 모세는 가까이 가봐야 보겠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갔을 때 그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음성은 본문10절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는 말씀이였다. 이는 지금 애굽 바로 밑에서 온갖 학대와 억압을 받으면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불상히 여기사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원하여 모세를 택하여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중심하여"내백성을 인도하라"는 말씀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모세를 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인도하기 위하여 본문10절에"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기 위하여 먼저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시겠다는 말씀인것이다.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어떻게 보내시는가?
첫째 오랫동안 참으시다가 보내시는 여호와이심을 믿어야 한다. 여기에 "이제"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슨일을 하실 때에 즉흥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알아야 한다.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그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기다리시다가 하나 하나씩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심을 알수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를 기다리시고 계신 것이다. 그때는 언제인가?본문9절에"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였고
애급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셨다. 여기에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였고"라는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였다고 하셨다.이들의 부르짖음은 어떤 부르짖음인가?이는 고통의 부르짖음이요 괴로움의 신음소리이요 사망의 골짜기에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억울하게 당하는 자의 아품과 억울함을 들으시고 계시는 분이신것이다.
둘째 너를 보내시는 여호와이시다. 본문에"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고 하셨다. 여기에"너"는 지금 바로 하나님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는 모세를 향한 말씀인 것이다. 이는 오늘 이 시간 여기에 앉아 있는 나와 여러분들을 향하신 주님의 음성임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세상에서 죄와 사망에서 억울하게 눌리며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우리를 보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자를 불러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를 불러서 보내시겠다고 명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모세 너를 보내시는 하나님 바로 나를 보내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모세가 누구인가? 모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으로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온 자이다. 본장1절에"모세가 그장인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하였다. 모세가 자기가 양떼를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호와의 산인 호렙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사는 주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 나오게 된것이 내가 스스로 나온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주께서 우리의 걸음을 주의 성산 호렙인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줄로 믿는다. 모세는 여호와의 산 호렙에 온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불꽃에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간자
이다.오늘 우리도 주의 성산인 교회에 나오는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불꽃인 살아계신 여호와을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그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앞에 서있는 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자기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는 모세를 보내시겠다고 명하시고 계신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로 보내시겠다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겠다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가 다스리는 애굽인 것이다. 애굽은 바로 모세의 생명을 찾고 있는 위험한 곳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강팍한 바로가 있는 곳이며 절망과 고통의 부르짖음이 있는 고난의 장소이며 술객과 속임이 있는 거짓된 곳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것은 본문에서 모세를 불러서 가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 주의 제단에 있는 나에게 명령하심을 들을수 있기를 원한다.
둘째 모세를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는 분명한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사명은 본문에서"너로 내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애굽 바로에게서 고통하며 죽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시고 계신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백성이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구원 받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인것이다. 이들은 원래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아온 자들이였다.그런데 이들이 흉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급으로 내려간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땅을 떠나는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이다. 한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였다. 그런데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애굽인 세상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 자유를 상실한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환영도 받고 귀빈 대우를 받았으나 사백삼십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바로와 애굽백성의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은 곤고한 삶을 보내는 것이다. 목적도 가치도 없이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기쁨없는 자들인것이다.
둘째 참된 안식을 잃어버린 자이다. 종에게는 참된 안식이 없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기거하여도 종은 종인 것이다. 먹을 것이 많아도 종은 종인것이다. 종은 주인으로 부터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 스트레스는 그 종으로 하여금 온갖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군대 가서 첫휴가를 떠나는 장병들에게 집에 가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집에가서 잠 한번 실컷 자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같이 항상 긴장하여 있어야 하는 것이 종인 것이다.
셋째 이들은 내일의 소망을 상실한 자들이다.이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돌아가야 할땅 하나님이 약속한 축복의 땅이 있어도 돌아갈 힘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종은 자기 힘으로 종의 굴레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바로에게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본문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다.바로의 손에서 인도하셔서 아브라함 때부터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 "인도하여"란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종된 백성이 어떻게 그 주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종이 주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스스로 해방시켜 주든지 아니면 누가 종의 몸값을 지불하여 주든지 또 누가 주인과 전쟁을 하여 종의 주인을 처서 항복하게 하는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잡고 있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스스로 놓아 보낼 위인인가?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강팍한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가? 이는 모세를 통하여 바로를 처서 싸우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본문11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
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하였다.모세는 자신을 잘알고 있는 자였다. 그는 혈기로 동족을 위해 싸우다 살인자가 되었고 이것이 발견되어 바로의 손길을 피하여 지금 도망자가 되어 보고싶은 부모형제도 만나지 못한채 사십년을 지나고 있는 자가 아닌가? 이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는 것이다.거기다가 이젠 팔십노구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잡은 지팡이 하나밖에 없지 않는가? 이런 모세를 하나님이 불러서 애굽왕 바로에게로 가라고 명하신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낼 수 있는가? 거기다가 모세는 말에 능하지 못한 자라고 4:10절에"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하였다.지도자는 말을 잘하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바로에게 가서 바로를 설득 시키려면 말을 못한다는 것은 적격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애굽에서 인도하게 하리라고 하신것이다.
셋째.어떻게 인도하여 내는가?
오늘 우리는 모세를 불러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신 하나님께서 이시간 죽어가는 내 부모 형제를 구원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한가? 나는 말을 할줄 몰라서 또는 나는 지식이 없어서 내게는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고 핑계하고 변명한다.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으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명령하실 때는 그명령을 이루실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오늘 본문12절에"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하였다. 여기보니 하나님은 모세를 혼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해답인 것이다. 부족한 것 많아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신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여기에 "정녕"이란 '반듯이' 또는'어떤 일이 있어도'라는 의미가 있다. 어려울 때도 함께 하시고 힘들 때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비록 네가 살인자라는 죄명으로 도망자가 되었으나 내가 애굽으로 갈 때 너와 함께 하여 주어서 너를 지켜 주고 보호하여 줄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다윗은 시118:6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팔십노구라 할찌라도 바로가 두렵지 아니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내가 말을 할 줄 몰라도 함께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를 인정하여 주지 아니하여도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주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모든일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에게 가기만하면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기적을 행하는것도 하나님이 행하시고 싸우는 것도 하나님이
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저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순종하여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흔히들 전도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말도 잘할 줄 모르고 담대한 용기도 없고 지혜도 모자라고 인물도 잘나지 못했고 하면서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하며 전도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본문의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할 줄 모르나 말씀에 순종하여 하겠다고 나가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셔서 전도되게 하시는것이다.비록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해도 나는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10:19절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였다. 나는 할줄 몰라도 내가 가서 입을 벌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때 하여야 할말을 친히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녕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구하여 인도하여 내게 될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가기는 모세가 가지만 일하시는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애굽에서 모세가 행한 열가지 재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른 새벽에 홍해를 갈르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홍해를 다시 흐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본문에"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후에"라고 하셨
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반드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될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장이신것이다.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세상에 사탄에게 보낸다. 거기에 죽어가고 있는 네 부모 형제 친척 이웃들을 인도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이곳에서 예배드리게 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모세 처럼 변명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한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
말 씀 : 출23:14~17
한 젊은 여인이 영국 철도역의 매표소에 갔다. 그녀는 세상의 향락만을 위
해 살아온 결과 공허하고 지쳐있었다. 그는 매표소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영장에서 "내가 전에는 한번도 이런 글을 본적이 없는데 저 말이 어디에 나오는 말인가요" 역장은 "성경에 나옵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젊은 여인은 서점에가서 성경을 샀다. 옆 좌석에 있는 승객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글이 있는 곳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일고 또 읽었다.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말씀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격스러워졌다.
"하나님! 만약 하나님이 나를 그처럼 사랑하신다면 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상신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겠어요" 그후 그는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그 여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화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 산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뜨겁게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에는 한 해를 절기로 시작하여 절기로 마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많은 절기가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절기라 한다면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이라 할 것이다. 이 3대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의 남자이면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중앙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보여야 했다(17절).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그 절기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당신을 기억시키고 당신의 주권을 환기시키고 그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이스라엘의 절기속에 감추어져있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자.
과거의 은혜를 감사하는 무교절이다. 하나님께서는 무교절을 지키라 명령
하셨다. 이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혹독한 종살이에서 구원됨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을 지키면서 과거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바로왕에게 베풀었
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다. 이처럼 과거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곧 자신의 존재 원인과 목적을 뚜렷이
인식하는 신앙적인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었다. 과거에 우상을 섬겼었다. 과거에 미신을 섬겼었다. 과거에 대항하였다. 과거에 멸망과 어둠의 자식이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 우리는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감사한것은 매일매일 기억하고 찬양해야 한다. 어떤분은 이야기 하는것의 대부분이 섭섭한 것이다. 부모에 대해서 섭섭한것 뿐이다. 형제에 대해서 섭섭한것 뿐이다. 자식에 대해서도 섭섭한것 뿐이다. 이웃에 대해서도 섭섭한것 뿐이다. 친구에 대해서도 섭섭한것 뿐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섭섭한것 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섭섭한것 뿐이다. 이는 섭섭한 인생인데 대단히 불쌍한 인생이다. 또한 어떤분은 늘 감사한것 뿐인분도 많다. 부모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형제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자식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이웃에 대새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친구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감사하는 인생인데 이는 대단히 행복한 인생이다. 이 시간 이후에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모든 섭섭한것을 다 씻어버리고 감사함으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중국의 워치만 니 목사가 몸에 병이 있어 간절히 기도했으나 그 병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는 응담이 왔다. 그가 하루는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꿈을 꾸었다. 배를 타고 양지강을 지나가는데 큰 바위가 가로막아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바윗돌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감동하셨다. "워치만 니야. 바윗돌을 제거하랴, 강물이 넘치게 하랴" 그때 그는 "강물이 넘쳐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는데 강물이 넘쳐서 배가 지나가는 꿈을 꾸고 깨었다. 그 이후로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인 질병이 제거되지 않아도 넘치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열심있는 교인들에게 "섭섭마귀"가 붙기 쉽다고 한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안 알아주니 섭섭하다. 섭섭해서 안하겠다. 그만 두겠다. 이는 하나님이 주는 마임이 아닌 사탄이 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들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고 더욱 기도하며 승리하길 바란다. 우리를 죽음과 죄악에서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현재의 은혜를 감사하는 맥추절이다. 하나님께서는 맥추절을 지키라 명하
셨다(16절). 맥추절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추수가 성공적으로 끝마침을 감
사하는 절기이다. 백성들은 맥추절을 지키면서 한해 동안 먹을 수 있는 양
식을 공급해 주셨고 현재도 자신들의 생업을 주장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
나님을 기억했으며 또한 감사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고난과 궁핍
에 빠지지 않게 계속적으로 돌보아 주신다. 며칠전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에 갔었다. 거기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쌀도 얻어왔고, 마늘도 얻어왔고, 파
도 얻어왔고, 오리도, 가지도 얻어왔고 그외 여러가지를 얻어왔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만 놓고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호해주고,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준다. 창세기 32장 10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요단강을 건너기전 과거에는 지
팡이 하나와 개나리봇짐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짐승떼가 두떼나 된다. 즉
헤아릴수 없는 정도로 큰 복을 받았다는 고백이다. 약속대로 은혜를 베풀
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은혜를 측량할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무엇
으로 다 감사할수 있겠는가. 풍족하게 먹을것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풍족
하게 잊을것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풍족하게 마실것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평화롭게 살수있는 집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정신적으로 평화와 안정
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하고 봉사하도록하
신 하나님이시다. 쇠얀 키에르케고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1813~1855, 42세). 그는 "인생은 나에게 있어서 쓴잔이었다. 나는 한방울 한방울 쓴잔을 세면서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우수와 고독, 불안, 절망속에서 갈등을 느끼며 매일매일 죽어갔던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느낀 그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고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본격적인 신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우수와 고독, 불안, 모든 죄책감에 휩싸여 살던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왔다. 눈먼자, 병든자를 고쳐주셨던 예수의 기적이 키에르케고르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그는 1848년 36세 되던해 4월 19일 오전 10시30분에 다음과 같은 환호성을 지르게 되었다. "나는 내 기쁨에 대해 기뻐하고, 내 기쁨과 더불어 기쁨을 통하여, 기쁨에서, 기쁨 안에서, 기쁨으로 말미암아, 기쁨에 기쁨을 기뻐한다" 철학자의 말이라 어렵기는 하지만 짧은 문장에서 기쁨이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올 정도로 예수를 만난 그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한 가장 행복한 삶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의 유명한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의하면 절망이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다.(절망= 자기 상실 =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할 때 인간이 절망하게 되는데, 이 병에서 회복되는 방법은 신앙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때 살게 된다. 기쁨이 충만케 된다. 이런 생명과 기쁨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미래의 은혜를 감사하는 장막절이다. 장막절을 수장절, 초막절이라고도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16절). 이는 광야40년의 여정을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에 의해 잘 마친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같은 보호와 인도를 미래의 생활까지도, 천국까지 계속 인도해 주실것을 간구하는 절기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도 축복하실 것이다. 무궁무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은 좋은 예화를 남겼습니다. 한 난쟁이가 있었는데 그는 거꾸로 서서 공을 굴리는 재주를 보여주며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수도사가 난쟁이를 불쌍히 여겨 수도원에 들어와 편히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난쟁이는 점점 풀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수도사는 그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그 난쟁이의 행동을 주시해 보았습니다. 난쟁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제단 앞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난쟁이는 주머니에서 공을 꺼내 들고는 "예수님, 저는 아무것도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공 굴리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이 재주라도 주님께 보여 드리겠습니다"하면서 거꾸로 서서 다리로 공을 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교회당을 한 바퀴 돌면서 재주를 다 부리고 제단 앞에 와서 땀을 닦고 았을 때 수도사가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난쟁이에게 내려오셔서 "네가 나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을 주었다. 너는 나를 가장 기쁘게 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 이후부터 난쟁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인격이 살아나고 있었
습니다.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인생은 행복하고 주님이 받으신다. 자기
명예를 위해 큰 교회를 짓고 싶어하는 한 왕이 있었다. 그는 그 교회를 짓는 데에 누구도 무엇을 기증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그렇게 해야만 모든 공적이 자기 차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가 완성되자 왕은 건축자의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런데 그 날 밤, 그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천사가 왕의 이름을 지우고 대신 어느 가난한 과부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었다. 이 굼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꿈에서 깨어나 왕은 곧장 꿈에 본 그 과부를 찾아 불러들여 교회를 지을 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집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간절히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집을 짓는 이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잇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했습니다. 결국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벽돌을 실어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더미를 먹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그 여인의 이름을 교회건물에 새겨 넣도록 하였다. 작은 것이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은 주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신다. 지난 며,달동안 교육관, 사택, 주차장 공사를 거의 마무리 하게 되었다. 먼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또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 많았다. 40일 작정기도 하는 분들과 정성껏 헌금을 하신 분들, 기술과 재능을 드린 분, 몸을 드린 드린분, 이름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고 봉헌한 분들이 수없이 많았다. 여러분들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게서 역사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할수 없는것, 무리한것은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불평하지 아니하고 내가 잘 하는것을 최선을 다 해서 드리고 노력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측량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다. 그 은혜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승리의 깃발을 든 사람들
말 씀 : 출 17:8-16
두렌츠라는 역사가는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리고 했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운명은 싸움과 함께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곧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전
쟁을 겪었습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반석에서 물이 나와 목을 축이고 휴식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아
말렉 군대가 공격을 해왔습니다.
이때 모세는 여호수아라는 젊은 장군을 싸우라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세
는 능력의 지팡이를 가지고 산에 올라가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손이 내려오고 기도가 약해지면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번쩍 들고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그때 그곳 이름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가 승리하셨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여호와닛시'에 대해서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군인과 같습니다. 그런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명령은 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정신적인 무장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따라야 할 대장을 잘 분간해야 합니다.아무리 건강하고 준비된 군인이라도
적군의 대장을 따라가면 그 군인은 군사재판을 해서 사형을 시킵니다. 참으로 좋은 군인은 대장을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해야 대장을 기쁘게 하냐면 자율적인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충성을 함에도 억지로 함과 기쁨으로 하는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에도 보면 어떤 아이는 시키자마자 "예" 하고 뛰어가는가 하면 어떤 애는 시무룩해서 못마땅하게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아이들의 걸음을 보면 굉장히 느립니다. 싫은거 하니까 물론 가기는 싫지만 보내는 사람편에서는 당장에 "야! 임마 그만둬!" 하고 싶은 생각이 속으로 솟아오릅니다.
군인은 대장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발
걸음도 빨라야 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속도에서 납니다. 요즈음 전쟁을 속도전 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 더 빨리 달려서 1등 하
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군사가 된 우리는 자신의 명예를 위함이 아니요, 조국의 영
광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싸우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상한 미신을 믿는 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열병에 걸린
환자는 무조건 앞을 향해 전속력으로 뛴다는 겁니다. 이유는 병이 자기를
쫓아오지 못하도록빨리 달리면 된다는 겁니다. 아마 이런 사람이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하면 금메달 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이리 분주하게 살
아야 합니까? 무얼 위해 달리시나요? 가난의 자리에서 떠나기 위해서 입니까? 나를 쫓아오는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기 위해 뛰어 가십니까? 혓바닥을 내놓고 헐떡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엇을 잡으려고 뛰십니까?
세상의 자랑과 썩어질 세상 영화 잡으려고 달려간다면 우리의 대장되신 주님의 마음이 섭섭합니다.
아말렉 군사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지극히 육신적이고 비신앙적이고 영적
인 것을 무시하는 하나님 없는 유물주의적 환상만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결국 패배하고 멸망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무엇하려 이 애굽을 탈출해 광야에 왔습니까? 육체의 안일을 위해서도 아니고 물질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걸 위했다면 애굽에 그냥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는 육체를 위한게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자유를 누리고 정신적 해방을 맛보기 위해서 그 수많은 고
통을 치르고 탈출했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해도 숭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길을 달려도 멋있
게 달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 한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장대비를 맞으면서 홀로 뛰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엘리야 시대가 모든 면에서 가장 어둡고 암울했습니다.
거기에다 3년 6개월동안 비가 안왔으니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비를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기도가 응답되어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너무 기뻐서 어린 아이처럼 빗속을
달렸습니다.얼마나 달렸냐면 약 18마일 달렸으니까 적어도 50리는 됩니다.
대략 안양에서 서울까지 되는 거리를 달렸습니다. 달리는 이유는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아이처럼 빗속을 마구 달렸습니다.
성경에 보니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함께 출발한 아합의 마차를 앞질러 갔
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영적인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세상을 추구하는 아합보다 더 신속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왜 잘 믿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군이 공격하는 시련을 주십니까?
아무리 믿음의 성벽을 견고히 쌓고 그안에서 안전하게 있어도 언제나 시험은 있습니다.
특히 르비딤의 전쟁을 치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먼저 이 아멜렉 적군이 공격한 장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르비딤은 백성들
이 모세에게 원망을 했던 곳입니다. 다투고 분열을 일으킨 곳입니다. 부정
적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탄이 주는 불평불만의 지배
를 받게 되자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
또 르비딤이란 원뜻은 `쉬는 곳, 휴식'이란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거
기서 휴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휴식의 계절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잘
쉬어야지 영적인 무방비상태로 돌아가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여러분! 교통사고가 언제 가장 많이 일어납니까? 휴일에 가장 많이 일어나
고 연중에는 여름휴가때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자 이제 이스라엘에게 큰 어려움이 왔습니다. 영적 무방비상태에서 일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지도자 모세는 여호수아를 택해서 야전사령관으로 내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의 사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사람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습니다. 그중 열 사람은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너무 기골이 장대하고 무섭
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습니다. 여기 괜히 왔습니다."
풀이 죽어서 두려워하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힘있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땅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니 우리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얼마나 용감합니까? 이것은 그들의 용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힘 주시는 결과로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큰 믿음, 적극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모든 일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오토피퍼 교수는 "세계의 모든 종교는 적응의 종교와
구원의 종교로 나누어 진다"고 말했습니다.
적응의 종교는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운명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운명대로 사는 삶이 아
닙니다. 내 환경에 이끌려서 그럭저럭 사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
음으로 능히 변화시키고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 다음 모세는 산에 올라가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이 모습은 신
앙이란 수직적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아말렉과 같은 두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먼저 마음부터 흔들립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에 신통한 방법이 없는가 이리저리 마음이 흔들립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어깨동무 하듯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이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손을 든다는 건 전폭적으로 온전히 믿고 의지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얼마전에 오디오에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고장이 나서 안돌아 갔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조급한 맘으로 제가 그걸 몽땅 분해했습니다. 그 방면 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몇시간 동안 땀흘리며 노력했는데 헛수고만 했습니다. 제가 그걸 몇시간 하면 되겠습니까? 평생해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방면에 지식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없어서 전화로 서비스맨을 부르니까 즉시 왔습니다.
그 기계를 공장으로 가져갔습니다. 3일후에 완전히 고쳐왔습니다. 그때 믿
음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내 삶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즉시 내 자신을 그분에게 드리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변화의 줄기를 잡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가 잘못 설정되어 있어서 그
렇습니다. 믿는다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입술만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믿음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형식화된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진실
된 자아를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중 독실한 크리스찬인 존웨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불이 났습니다. 비행기가 바다에 추
락하기 직전입니다. 어떤 천주교인은 묵주를 잡고 기도합니다. 기독교인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때 빠리에서 미국의 백만장자와 결혼하러 가는 여배우가 목에 구명대를
메고 조용히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냅니다. 그리고 짙게 화장한 얼굴을 하나 둘 지우기 시작합니다. 붙였던 인조눈썹을 떼어 냅니다. 가발을 벗었습니다. 의치를 빼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흉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흉하게 된 얼굴을 보니까 허무합니다.
이게 바로 나의 모습인데... 이게 나의 진실인데...
지금까지 화정을 하고 가발을 쓰고 자기를 꾸미고 살아왔지만 그건 진실된
자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진실된 자기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건 인간적인 군더더기를, 벗어버리고 모세가 두손을 든것같이 진실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상달될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승리'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승리의 길을 위해 여러분의 자아를 포기하고
순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화와의 승리의 깃발이 우리의 사는 날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 닛시
말 씀 : 출17:8-16
모세의 시편에서 시인은 `인생 사는 것이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즐거움과 기쁜 날도 있으나 괴로움 많은게 인생길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참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가 무교회를 창시했음에도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꼭 100년전에 그의 초기 저술중 `구안록' 첫 페이지에 "인생을 즐겁다 말
한 사람 누구인가? 내게는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고 워털루 같은 전투가
내 마음속에 늘 일어난다"
인생은 끝없이 싸움하는 존재이고 이 피곤한 싸움 속에서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구안록의 내용입니다.
옛 어린 시절, 동네 개구장이들과 싸우던 추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애 들은 머리채를 잡고 쥐 흔들었고 남자 아이들은 코피를 터뜨리는 쪽이 이기고 피를 흘리는 쪽이 패배자라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싸울 때는 상대방 코밖에 안보였어요.
그런가하면 걸프전처럼 국가간의 거창한 전쟁도 있고 집단적인 노사간의
싸움도 있습니다.
모든 스포츠는 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싸움의 형식을 빈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사람되고 거듭
났어도 끝난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향한 새로운 싸움의 시작입니다. 내
잘못된 습성과 구부러진 성품과 추하고 불경건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내
적인 치열한 싸움을 전개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싸움도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싸움만 아니라 우리
속에 마귀가 들어와서 그들의 영토를 넓힐 때 싸워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하루는 밤에 잠을 자려하는데 마귀가 벽쪽에 나타난 걸 보
고 책상위에 있는 잉크병을 집어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우는 모습이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귀와 싸울 것
을 독려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즉 육체적인 싸움이 아니고 하늘에 있
는 악의 영들에게 대적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라"
싸움의 속성은 승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의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군의 희생이 전혀 없이 승리한다면 좋지만 그건 물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속에 나쁜 병균이 들어가서 감기에 걸리면 그냥 꾹 참고
나으면 좋은데 안되니까 약을 먹습니다. 약먹는 목적은 몸속에 나쁜 병균
을 죽이려는 것인데 약을 먹으면 몸 전체가 약해집니다. 휘청거리고 힘이
없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병균이 죽고 건강을 다시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탄의 자식이 되어 갈 때
하나님이 그의 삶속에 강력하게 간섭하셔서 싸움을 거시는 경우가 있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는 무기 가운데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생명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물질 손해나 다른 위기는 어느 정도 참
는데 생명의 위기 앞에 서면 굳게 닫힌 문을 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가 하나님이 잘못한 당사자 보다는 아내나 자녀의 생명을
건드려 봅니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고통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
으라고 그래요.
`땅끝에서 오다', `제국과 천국' 등의 작품으로 요즘 기독교 문학가중 가
장 뛰어난 활동을 하는 김성일 권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3대째 신앙의 가
문에서 자라다가 하나님의 버리고 막걸리를 항아리로 받아 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하나님과의 이별식을 했답니다. 철저히 하나님
을 부인했어요. 니체의 무신론 사상에 젖었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대학 나오고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대우중공업 이사까지 승
진하는 평탄한 항해를 합니다.
어느날 그의 항해에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10살 아래의 젊고 예
쁘던 아내가 위암 3기의 진단을 받고 쓰러집니다. 모든게 절망입니다. `내
삶을 나 혼자 살아도 끝까지 평탄할 수 없는가?' 이런 질문 앞에 도전합니다.
자기가 완전히 무너지고 자기 지혜와 인간적인 명예와 승리가 아무것도 아
니었어요. 아내의 고통을 그런 걸로 위로할 수 없어요.
결론은 젊은 사절에 떠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
나님을 불러 봅니다. 자기 지식을 버리고 교만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음문을 열고 주께 나갑니다. 주님을 다시 만나는 뜨거운 체험을 합니다. 상황은 분명히 어둡고 불행한데 입에서는 자꾸 찬송이 나업니다. 감사가 자꾸 터집니다.
이 고난 속에서도 이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자기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습
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뒤에 온전히 감추고 하나님의 능력
만 의지합니다. 그러니까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아내의 질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간증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산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싸움을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싸워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깁니다.
최근 미국 IBM사에서 신기한 볼펜을 발명했는데 시험 볼 때 정답을 쓰면
잉크가 나와 잘 쓰이고 틀린 답을 적을 때 잉크가 안나와 안 써지는 볼
펜입니다. 그건 학생에게 얼마든지 의지하고 맡길만한 능력의 볼펜입니다.
이런 볼펜만 있다면 시험이 무슨 염려겠습니까?
그런데 밤 늦게 집에 오는데 깡패를 만났습니다. 이 학생 마음에 볼펜이면
다 할 수 있을 것같아 그걸 꺼내 이리 저리 '얏! 얏!'싸웁니다.
그 싸움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도록 얻어 맞고 다 빼앗겼습니다. 의지하
긴 했는데 의지하는 대상이 틀렸습니다. 학생이 능력의 볼펜을 의지하듯이
마귀가 도전 할 때 자기의 힘으로 하면 패배합니다.
본문에 보면 신앙적 싸움에 대한 고전적인 사건,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
쟁이 나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싸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걸 단순하게 보면 안됩니다. 칼과 창으로
피흘리고 죽이고 너무나 끔찍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전쟁은 영토를 빼앗는 싸움, 집단적 이기심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싸움의 동기가 영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과 싸우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방민족이나 세속적 불의를 응징합니다.
그런데 싸울 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승리
할 때 승리했고 하나님 없이 싸울 때는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싸움에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는데 그럼 승리의 비결
이 무엇입니까? 먼저 싸움의 상대를 알아야 합니다.
아말렉은 창3:6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 엘리바스의 아
들 아말렉. 아말렉의 조상인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왜 중요합니까? 재산상속을 받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아니고 이 장자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메시야의 약속보다 자기의 굶주린 창자를 채우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영적인 관심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고 축복에서 멀어집니다.
아말렉은 자기 중심의 삶,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
는 삶입니다.
이 불신의 세력과 싸우는데 이건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내적인 싸움
이기도 합니다.
자 아말렉과 싸워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날에 여호수아는 전쟁하
러가고 모세는 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모세에게 관심을 둡시다.
모세가 두 팔을 올리고 기도하면 이기고 팔이 내려오면 졌어요. 신기한 전
쟁이었어요. 그래서 아예 아론과 훌이 좌청용 우백호처럼 양쪽에서 팔을
못내려오게 붙잡고 그래서 크게 승리하고 거기에다 단을 쌓고 `여호와 닛
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라 이름했어요.
그런데 어디에 깃발이 있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모세가 손을 들고
가도할 때 맨손만 불끈 든게 아니고 거기에 무엇이 들렸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지팡이' 이걸 잡고 손을 듭니다. 그러면 이런 상징적 해석과 성서의 모형론적 이해가 가능합니다.
깃발은 두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깃대와 깃폭입니다. 모세는 깃대가 있었
습니다. 지팡이를 깃대라고 상징할 때 펄럭이며 달려야 할 깃폭은 없습니
다.
깃발은 상징입니다. 보기만 해도 압니다. 태극기를 보면 `아 저게 우리 나
라구나' '우리 편이구나'. 그래서 스포츠나 외교활동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갑니다. 언제 보아도 어디서 보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언어에는 문자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속도
로를 몇시간 달리면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연료가 떨어집니다. 그때 고속
도로에 휴게소가 있는데 길가에 그림이 있습니다. 커피잔과 자동차 수리하
는 연장과 기름 주유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운전하다가 그 상징적인 그림만 보고도 `어 저질 가면 안식이 있구나, 배부른 음식이 있구나, 기름을 넉넉히 채울 수 있구나'를 압니다. 그 상징을 보고 휴게소에 가기만 하면 모든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깃대에 누가 달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야 합니다.
이사야 10:10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예수가 기호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깃발
이 되어 달린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율법의 나무에 달려서 율법을 이
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모세는 혼자 못합니다. 모세는 인간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인간이지만
율법은 항상 미완성입니다. 거기에 은혜이신 예수님이 계실 때 승리합니다.
율법과 은혜가 동시에 나타난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닛시는
십자가의 깃발입니다. 십자가에서 불의를 이기시고 모든 질고와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로 죽음까지 승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십자가 깃발을 들고 그 아래 모이면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 본 `엑소시스트'라는 귀신영화가 생각납니다. 피를 먹는 흡혈귀가
이쁜 처녀를 죽이려고 하니까 막 도망가다 지하실로 갑니다. 이 흡혈귀신
이 싫어하는 것은 마늘, 빛, 십자가인데 지하실에 흩어져 있는 막대기 두개를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귀신앞에 딱 대니까 그냥 놓아버리더라고요. 십자가의 능력이 대단해요.
결국 십자가 앞에서 승리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보면서 십자가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시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
의 간구를 들으소서"
진실로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무력합니다. 내 능력 내 생각을 포기하고
주의 도우심만 바랍니다. 하는 겁니다.
기도를 통하여 능력이 옵니다. 기도해야 승리가 옵니다. 기도는 능력의 원
천이신 하나님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토마스 로렌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19년 파리평화회담이 있을 때 로렌스는 아랍 대표들과 중재역할을 합니
다. 아랍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관광을 했는데 그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호텔의 목욕탕입니다. 사막에서 물이 얼마나 귀해요? 그런데 호텔 목
욕탕에서 조그만 무슨 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지요. 그래서 계속 감탄
합니다.
회담이 끝날 때 호텔에서 로렌스에게 사람이 왔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로렌스씨 아랍 대표들이 목욕탕 욕조 시설을 뜯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이걸 뜯어서 아랍으로 가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
막에다 목욕탕만 갖다 놓으면, 그리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진
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그걸 사막에 가져간다고 물이 나옵니까? 그래서 로렌스가 땀을 흘
리며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관이 따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
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요한건 승리 자체가 아니라 그 승리를 위해 내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지나간 세월 동안 당신의 삶이 무력했다면 오늘 다시 이 말씀을 통해 나의
실패와 영적인 침체의 원인을 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어떻게 싸우셨습니까? 무엇을 바라보셨습니까? 내 맘과 내 뜻대로
살 때에 답답하고 짜증스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다시 주님을 보시
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보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보세요. 손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세요. 거기서 도움이 옵니다. 여호와 닛시의 신앙이 여러분 사
는 날동안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헌신해야 합니다.
말 씀 : 출 1:1-5
하나님은 여러번 헌신의 삶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걸 몰라서 미처 행하지 못하고 때로는 알면서도 연약해서 행하지 못한
것 뿐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하나님앞에 거짓없이 자신의 삶을 오전히 바쳤던 모범적인
헌신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보면 성경의 모든 무대는 언제나 역사의 한복판입니다. 때때로 한
민족의 역사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가 되기도 하고 한 개인의 질병이
나 고난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혹은 전쟁이나 패배나 승리같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사건을 이루시는데 거기에 꼭 중심인물을 두십니
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
당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헌신의 삶을 살려면 몇가지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아
무렇게나 준비없이 무턱대고 헌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단계가 네가지 입니다.
1) 인간의 혈기로 나섰다가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2)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3) 기룩한 단계입니다.
4) 소명을 받고 헌신합니다.
첫째,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 뜻대로 살려고 내가 몸부림치
는 단계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긴했는데 깨어지지않는 인간의 모습을 갖고
왔습니다. 이런 단계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왜냐하면 속이 텅빈채로 왔다
갔다하니까 주변이 시끄러워요.
왔다갔다 하고 스스로 몸부림치고 노력하는 것도 알고보면 힘이 있으니까
그럽니다. 힘없이는 못합니다. 그런데 힘이 있긴 있는데 안에서 밖으로 나
가는 힘입니다. 인간의 힘, 지식의 힘, 경험의 힘... 모든 자기 힘을 총동
원하다간 그만 지치고 쓰러집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도 하고 좌절도 합니다.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이 밉고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우리
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신비한 체험을 하는 단계를 주십니다.
몸부림치다 하나님앞에 얻어맞고 KO 당합니다. 힘이 다 빠지고 못일어납니
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때가 이때입니다. 하나님앞에서 교만하고
까불고 제 힘만 믿고 뛰면은 "그래 너 잘한다. 끝까지 잘할 수 있나 니 맘
대로 해봐라!" 하십니다.
그러다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토기장이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걸 느끼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우리를 꼭 안아주시고 내 삶을 간섭하십니다. 주님
이 함께 하시니까 다시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은 전적으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능력의 힘입니다. 그전에는 내속에 있는 힘을 쏟으며 살았는데
이제는 밖에서 안으로 임재하시는 힘으로 사니까 더 편합니다. 피곤함도
없습니다. 그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힘을 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마치 전율처럼 느껴오는 영적인 기쁨과 감동이 있
습니다. 성령님이 감동시키시면 기도하다 막 웁니다. 눈물을 흘리고나면
오히려 더 힘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그때 힘을 더하신 겁니다.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게 신비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함의 단계로 올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
시고 쓰실만한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소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준비한 뒤에 본격적으로 헌신
하게 됩니다.
모세가 맨처음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사람 생각과 자기 교만으로 했습니다.
민족적인 의분을 갖고 애굽인을 때려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혈기와 방법으로 하니까 안됩니다. 큰 좌절을 맛보고 미디안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자기 자신 앞에 두손을 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을 보고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것을 경험합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
이제부터는 너의 세상적 삶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라는 명령
입니다.
그리고 헌신을 명하십니다.
"가라! 네가 있어야 할 역사의 현장에 우뚝 서라. 떨기나무의 빛처럼, 그
영광처럼 헌신하여라!"
성경에 하나님앞에 헌신했던 모든 사람들은 전부 이 과정을 거칩니다.
엘리야도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그렇게 당당하던 그가 깊이 절망
합니다. 로뎀이라는 가시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죽여달라고 해요? 살다가 죽고싶을 때도 있지요?
그런데 신비체험을 하는데 강한 바람과 바위가 터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신
비를 봅니다. 그 다음에 `세미한 음성'을 듣는데 그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일 한다고 혈기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다가
다메섹에서 거꾸러집니다. 요나도 똑같이 이 과정을 거치고 이사야도 그렇
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특히 모세의 체험은 갚은 감동을 줍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세상이 뭔지 모
르고 자만심에 빠져있는 모세입니다. 하나님없이도 하나님의 일 할 수 있
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단한 야심과 넘치는 패기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집과 인간의 정열과 지식으로 무장한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자기가 무너지고 절망을 느낀 채 미디안으로 도피행각을 떠납니다. 이 고독한 모세 절망에 찬 모세를 상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신앙안에서 자신에 대
해 철저히 절망하는건 소망의 아침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 거기서 깨달은 것이 "나도 별수 없는 인간 이렇게 살다 죽지 뭐"입니다.
여기 두 가지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두 가지의 착각속에서 삽니다.
첫 번째 착각은 "나는 대단한 인간이야"(I am somebody)
자기가 굉장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오만과 허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두 번째 착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I am nobody)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걸 깨달은 그 한 가지 사실 앞에 선한 기대와 삶의 의욕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냥 살다 가는거지 뭐" 물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질그릇같은 내 생애속에 임하시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잘 것 없
는 나를 사용만하시면 내 삶은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하나님의 도구로 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대단한 사람'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서 새롭게 피조된 거듭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람은 빌립보서 4장 13절
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씀 윗부분을 빼면 세상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건 세상 사람도 해요. 그러나 전반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엔 크리스토" 그안, 그리스도의 은혜안, 그 능력안에 거하는 것이 신비한
체험입니다. 이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작년까지 과학기술처 장관을 했던 정근모 박사의 간증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I am somebody,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 생
각하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천재였습니다.
지금까지 평생 수석, 수석입니다. 경기중 수석, 경기고 수석, 경기고에 입학 해서 고교 3년 과정을 4개월만에 끝내고 검정고시 쳐서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그때만 차석이었습니다. 고교과정을 4개월만에 끝내고 대입에 차석했으니 실은 수석보다 더 났죠.
외국에서도 전부 1등이고 세계적인 핵물리학자입니다. 우리나라 Kaist의
전신인 Kaist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없이 백날 수석해야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안하게 살다가 가정적으로 큰 시련이 왔는데 아들
진우가 만성 신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메는 고통을 당합니다. 무서운 불치병
입니다.
아들이 살 수 있는 기간은 3년. 최악의 상태입니다. 그때 최초로 하나님을
부르고 롱아일랜드 교회에 나갔답니다.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명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았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맡기고 기도한 결과 아들의 불치병이 깨끗하게
나았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죽 하는데 어떤 체험을 통해 니고데모처럼 중생을 체험
을 하고 싶었답니다. 워싱턴중앙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체험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데 밤집회시간에 어떤 음성이 들려와요.
"네 아들에 대해 감사해본 적이 있느냐?"
너무 뚜렷한 주님의 음성이었답니다.
"네 아들이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한 번이라도 아들에 대해 감사
해본 적이 있느냐?"
"주님 내가 어떻게 아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콩팥까지 아들
에게 주었습니다. 제 도움이 아니면 아들은 죽었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감사 해야지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아니다 네가 지금까지 큰 짐으로 여겨온 네 아들을 통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거든요. 그날밤 예배 끝날 때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끝날 시간에는 이 박사 집사님이 대성통곡을 하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네 아들에 대해 감사하라. 네 십자가를 인해 오히려 감사하라"
아내도 아들도 딸고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못하실게 없어요. 정근모 박사는 그때부터 정말 진실한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자기의 간증을 어느 교회에서 불러도 몇십명되는 개척교회도, 수천명되는 대교회에서도 순종하며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가 어디있
어요? 내 중심으로 영으로, 인격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시 모세를 생각해 봅시다. 모세가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뵙게 된 것
은 40년의 훈련 끝에 된 것입니다. 40년간 광야에서 혼자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 고독 속에 혼자 있다는 건 끈기와 집념으로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어지려면 고독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고독을 아십니까? 깊이가 없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기를 싫어합니다.
모세가 자신을 반성하고 성실히 양떼를 칠 때에 하나님이 불꽃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어디에 오셨냐면 떨기나무인데 신33:16절의 이 나무가 가시떨기 나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잘 타겠어요. 이건 신비한 사건입니다.
나무에 불붙은게 왜 신비한 사건입니까? 그불은 보통불이 아니고 하나님의
불이니까 신비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가시떨기나무가 모세의 그림자였다고 합니다. 즉 불타고 있
는 나무는 모세 자신입니다. 모세가 불타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들도 모세
처럼 하나님의 불로 다 타야 합니다. 과거에는 우리 힘으로 불을 붙였습니
다. 때로는 혈기에다 불을 당기기도 했습니다. 야망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삶을 불태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도 타지 못하고 하루도 견디지 못해 연소되어 버립니다.
재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연기가 안나고 꺼질 줄 모릅니다.
계속 탑니다. 물이 아름답게 탑니다. 자 이 가시떨기 나무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보잘 것 없이 평범한 나무입니다. 더 나아가 이 나무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창3장에 범죄한 인간에게 저주받은 땅이 가시덤불을 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나무가 저주를 나타낸게 아니라 축복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왜? 그를 태우고 있는 불 때문에, 이 가시나무를 태우고 있는 불이 이 나무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도구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다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붙잡아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붙잡아 일으킬 때 너는 다시 할 수 있다. 잠깐 있다가 연기를
피우며 사라지는 인생이 아니라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빛을 발하며 아름답
고 거룩한 빛을 나타내는 삶으로 너를 변화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이 불로 내삶을 불사르지 않으면 하나님앞에 바칠 수 없습니다. 온
전히 불사른 제물만이 제단에 바칠 수 있습니다.
히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
이 불이 임해 옛사람을 다 소멸시켜야 합니다. 이 불이 임해 아직 남아있
는 죄, 죄악의 찌꺼기를 불사르고 인간적인 것을 다 태워야 합니다.
그후에 주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없이는 헌신
할 수 없습니다. 80세가 되어서야 참된 순종을 배웠던 모세, 75세가 되어
서 순종함으로 떠났던 아브라함.
`미션'이라고 하는 선교영화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천주교 제슈이트들입니다. 이 제슈이트를
처음 일으킨 사람은 이그나치오 로욜라인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조직적으로 반종교개혁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 종교개혁의 불이 붙었을 때 자기 나름대로 천주교를 옹호했습니다. 그가 볼 때 루터는 엉터리였습니다. 루터의 개혁을 저지하려고 일부러 45세까지 대학을 다니며 대학에서 동지들을 모아 제슈이트-예수회를 조직했습니다. 자기 동지들을 철두철미하게 경건훈련으로 무장시킵니다. 그런데 이 경건훈련의 최고 중요한 부분이 상급자에 대한 순종입니다. 자기 맘에 안맞아도 위에서 명령하면 순종해야 합니다. 즉 상급자에 대한 순종이 곧 하나님께 대한 순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순명을 받들어 자기 교구를 지키다가 불에 타죽습니다. 죽을줄 알고도 피하지 않습니다. 카톨릭 사회의 순명의 정신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모세에게 `가라' 명하시니까 "제가 누군데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하나
님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니까 갑니다. 겸손해져서 순종합
니다. 더 이상 오만하지 않습니다.
나약한 것같은 겸손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겸
손과 능력을 입고 다시 일어선 모세를 보세요. 가시덤불같은 우리 인생에
불을 붙여주신 주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귀한 신비의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절망도 했다가 거기서 신비한 주님을 뵙기도하고 거룩함을 입고 헌신의 결단으로 들어가는 귀한 은총이 여러분의 사는날동안 일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
말 씀 : 출 19:3-6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학창시절에 함께 보냈고, 남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독서도 하고, 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친구는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지는 날 두친구는 아주 특이한 약속을 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20년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합니다. 무슨일을 하든, 어떤 상황이든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을 합니다.
20년이 지났습니다. 두 친구의 모습은 변해있었습니다. 한친구는 경찰이 되어서 범인을 최포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한친구는 죄를 짓고 경찰을 피해 쫏겨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쫓기는 친구는 자신을 쫏고 있는 친구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0년전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고민합니다. 내가 그 약속을 지켜서 만남의 장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도망가야 하는가? 결국 그 친구는 그 약속 장소로 나갑니다. 결국 그 약속을 지킴으로 해서 그 친구는 체포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사이에 약속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약속을 하든 어떤 약속을 하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또 우리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신뢰하게 되고, 그 사람과 가까와 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약속을 번번히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여러분들도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고, 가까이 하기를 실어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조금 어려운 말로 계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고, 노아와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모세와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과도 약속하셨지만 지금 우리와도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방면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하고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 바로 나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을 맺으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맺은 약속을 지킨다면, 내가 너희를 더욱더 사랑할 것이며,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와 맺은 약속을 지키는 않는다면 너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책임을 질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보면 시내산에서 맺은 약속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게 말씀하고 있는 계약, 약속은 무슨 약속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17절까지 있는 말씀으로 십계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등부 학생들과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10번까지는 사람들과 사람사이에 지켜야할 것들입니다.
1)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하나님만 섬기라.
2) 우상을 만들지 말라 -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든것
3)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 하나님을 경외
4)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 6일은 열심히 일하지만, 7날은 하나님께 예배.
4가지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 행해야 할 것들이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을 만들지 말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5) 부모를 공경하라 -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것. 하나님이 가장 기뻐함.
6) 살인하지 말라 - 친구에게 욕하는것, 미워하는 것.
7) 간음하지 말라 - 야한 비디오나 책을 보는 것.
8) 도적질하지 말라 - 컨닝하는 것
9) 거짓증거하지 말라 - 친구를 모함하는 것
10)탐내지 말라 - 남의 것을 부러워 하면서 빼았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살라고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이 계약 안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인 동료 인간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동시에 하나님에게도 책임을 지게 된다. 또 이 계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정의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험악한 세상입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자기 부인이 많은 위자료를 요구한다고 살인청부업자를 시켜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학교에서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한 학생을 반전체 학생들이 1년동안 때리고, 기압주고, 구박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돈 때문에 죽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10계명을 지킨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험악한 세상이 아니라 아름 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는 그러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상점에 취직이 되었다. 주인과 약속하기를 아침 9시까지 출근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동안은 어김없이 9시까지 출근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주인은 항상 10시경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년은 꾀를 생각했다. 꼭 9시까지 나오지 말고, 조금 여유있게 나오자. 그래서 이 소년은 주인 몰래 출근시간을 조절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죄책감으로 주인 얼굴을 바라볼수 없었다. 주인과 맺은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을 어기면서 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이 소년은 곧 회개하고 처음 주인과의 약속대로 9시까지 출근하고, 잃었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어기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올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는 귀한 중등부 학생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들을 따로 세우라
말 씀 : 행 6:3, 출 18:21-22
벌써 1995년도 20일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신년예배를 드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거리에는 케롤송과 추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청년들은 차분한 가운데 1년을 정리하고, 다가오는 96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절기로 강림절이라고도 하고, 대강절이라고도합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것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하며 예수님이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우리 청년부가 총회를 하는 날입니다.
총회를 통해 1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1년동안 우리 청년부에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출석이 저조하고, 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많은 일을 했고, 보람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신년기도회를 시작으로, 나눔장터, 농산물 직거래, 정수직업 훈련학교와 함께 하는 사업, 군선교, 군소식 시를 했습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등광교회에 가서 농촌봉사활동으로 여름수련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또 지난주에는 비록 많은 청년들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오클로스의 밤이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모든 일을 마치게 된 것은 우리 임원들과 조장들, 부장들이 열심히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청년들의 수고를 다 아시고, 우리 청년들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과 신약에서 보았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모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인구가 장정만 6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많다보니, 자연히 사건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도 많고, 강도들도 많고, 싸우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그들은 지금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었는데, 오직 그것을 판단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서로 모세에게 달려옵니다. 모세가 재판장이 되어서 그들을 재판합니다.
인구가 많으니 자연히 하루종일 모세는 재판만 합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할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판만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장인인 이드로가 보게 됩니다. 이드로가 모세에게 충고를 합니다. 이 많은 사람을 네게 혼자 재판하는 것을 옳지 않다. 그러니 사람을 따로 세우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고, 큰 문제가 있을 때만 모세에게 오도록 하게 합니다. 모세가 이 충고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꾼들을 선택합니다.
신약의 말씀은 초대교회가 사도들로 하여금 말씀 전하는데 전력하도록 하게하고, 구제와 봉사에 전념할 7집사들을 선택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구약과 신약의 말씀속에서 과연 성경에서 일꾼들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선택했는지 살펴보고, 오늘 총회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선택할 때 어떤 인물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하고,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일꾼으로 선택될 수 있도록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령이 충만한 자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입니다.
초대교회 7집사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충만한자입니다.
3절에 "성령이 충만한 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탄생은 성령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임할 때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받고, 복음을 전파하여 초대교회를 이루고, 복음에 온 세계에 확장되어 가는 일을 했습니다.
모세도 사실은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9절 "하나님이 함께 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모세 앞에 수많은 어려운 점들이 있고, 인간적으로 도저히 해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때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킬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첫째 조건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성령에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에는 돈을 믿고, 권력을 믿고, 나 자신을 믿을 때,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어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놀라운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변화되어 성령충만함을 받았을 때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에 사회에 꼭 필요한 일도 많이 하지만, 지탄의 대상의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성령을 받지 않은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생각대로 교회일을 하기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지만 비난받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참예언자는 고난이 되어도 진실을 예언하는 자들이고, 거짓 예언자들은 진실을 예언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이들이 되는 예언만을 골라서 하는 자들입니다.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하는가? 아니면 자기 생각을 말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고, 성령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자들이 참예언자들입니다. 참 예언자들은 고난을 받습니다.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예언자들을 인정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교회의 일꾼들도 이러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내가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그 일을 실행해야 합니다. 내가 하기보다는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 함께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재덕을 겸비하고, 지혜가 충만한자입니다.
본문 21절에 "온 백성가운데 재덕을 겸비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덕이 무엇입니까? "재주, 덕행" "힘이 있는 자""능력이 있는 자"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실행해 나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덕을 신약본문에서는 지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충만한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일꾼으로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면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가? 성령이 충만한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가?
신앙못지 않게 중요한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재덕을 겸비한자. 지혜가 있는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일을 하든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덕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복잡한 사회를 바르게 살아갈수 있고, 우리 앞에 있는 일들을 처리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여러가지 행사가 있고,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신앙만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신앙과 함께 능력있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재덕을 겸비한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을 세웠습니다. 재덕을 겸비한 자들을 중간 지도자로 세운후에 이스라엘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지도자인 모세는 자기일에 충실할수 있었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고, 공동체 안에 어려운 문제들 잘 해결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혜가 충만한 7집사를 세우기 전까지는 헬라파 기독교인과 유대파 기독교인의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일부로 빼놓는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충만한 자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운후에 초대교회는 화평하고, 날마다 성장하는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것을 후이 주시고, 꾸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할때 하나님게 영광돌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정의를 사랑하며,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21절에 "불의를 미워하는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세울때 모세는 불의를 미워하는 자, 다시 말해서 정의를 사랑하는 자를 선택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칭찬을 받을수 없습니다. 정의를 사랑하는 자라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불의를 행하는 자를 몰라서 칭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정의를 행하는 자를 칭찬하십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주의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애매한 고난도 있습니다. 신앙인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불의를 행하기 때문에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 3서에서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디오드레베 책망을 받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남을 대접하기를 싫어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칭찬을 받습니다.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일꾼들은 정의를 사랑하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도, 진리이신 예수그리도에게도, 하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칭찬이 외식된 칭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일은 무슨일이든 앞장서서 하는 사람입니다. 주의의 사람들로 부터 많은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사람은 주의의 사람들에게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많은 돈을 빌려와 대책없이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도 밥먹듯하는 사람이었습니 다.
겉모습은 정의를 사랑하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 받는 것 같지만, 속마음은 안그런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사람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도를 믿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때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고,
맡겨진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위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정당한가? 아니면 부족한가?
나의 모습의 하나님의 일꾼을 부족하다면
우리는 성령을 충만을 위해, 지혜를 위해, 칭창받는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부족함이 없는 귀한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
말 씀 : 출 34:21-24
시대적으로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이유는 농촌에도 보리농사를 안 짖고 도시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 하셨다.
유월절-애굽에서 구원받은 것 기념하는 감사절기
맥추절-초실절, 첫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
추수절-수장절, 마지막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
하나님의 명령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리(맥추)라는 의미보다는 첫 열매에 대한 감사 의미이고 이 절기를 통해서 신앙생활의 핵심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1. 계속된 감사 생활을 위해서이다.
잃어버린 감사 생활을 다시 찾아야 한다. 사람은 다 건망증이 있다. 그래서 일년에 3번씩이나 절기를 지키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생활 주변에는 감사로 가득 차 있다.
잃었던 감사를 찾는 것이 감사절이다. 감사의 온도 높이고, 감사를 알게 되는 것이 감사절이다.
매주일 감사하고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지함이 께달음으로, 불평이 감사로, 짜증이 즐거움으로, 우울이 기쁨으로 바뀌어지는 절기가 감사절기이다.
2.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까지 절대로 두번째 열매를 따지 아니하였다. 보리농사를 짖고 나서도 첫단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결코 두번째 단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레23:9-14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지고 갈 것이요...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 커다란 비난거리였다.
맥추감사절은 철두철미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를 배우는 절기이다.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되 제사장의 양식이었다.
레 23:10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 곡물이 첫 이삭 한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제사장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절에 곡식을 거둔 다음에 가난한 이웃들을 청하여 추수의 기쁨을 나누었다.
밭 모퉁이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나가는 나그네 들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레 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밸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맥추절은 감사 가운데 사랑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3. 온전한 정성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드린 것은 첫 것이다. 하나님은 첫것을 요구하셨다.
출애굽 할 때 첫아들과 처음난 짐승의 새끼는 다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첫 것은 바치라고 하셨다.
맥추절에 첫열매를 드리라는 것이다. 첫것은 귀하다. 가장 귀중한 것으로, 정성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문둥병 고침 받은 열 문둥이 중 사마리아 사람만 주님께 감사하러 왔다. "다 구원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자가 없느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9명은 육신의 구원만 받았다. 감사로 정성을 드린 그는 영육이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 문둥병이 낫는 기적 엄청난 축복이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기절 초풍할 만한 축복의 완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출애굽하는 축복을 받았지만 두명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면 자기를 제일 먼저 반기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반기는 자가 외동 딸이었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기에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갚을 지니라"
하나님과 약속하고 아직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신앙생활을 검토해 보자. 정성이 없어 그렇다.
감사는 신앙생활의 완성이다. 감사는 모든 신앙생할의 기지이다. 밀가루 없이 빵을 만들 수 없듯이 감사없이 신앙생활을 이룰 수 없다.
감사를 잃어버린 삶은 마귀에게 정복당한 삶이다.
미국 어느 갱이 무너져 구조를 한 일이 있다. 그런데 구조대가 이상하게 느낀 일이 있었다. 원망과 불평, 짜증부리고 안절부절 하던 사람들 다 죽고, 감사하며 기도하며 침착하게 기다린 사람은 활기 차게 살아 있었다.
오늘 우리는 맥추 감사절을 맞아 신앙생활의 핵심을 배워 실천 하자.
1. 잃어버린 감사를 찾자
2.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자
3. 하나님께 첫 것, 정성을 드리자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
본 문 : 출32:11-14, 약5:13-16
야고보의 특색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것은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강조는 믿음을 격하시키거나 믿음을 무시하는 것이라니라, 믿음과 행동의 일치를 주장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주목해야 할것은, 행함을 강조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여러차례 권면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야고보서 처음에, 즉 1장5-8절에서 기도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5절)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절)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
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절)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
(8절)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행함이 없는 자로다.
이같은 기도에 관한 권면은, "후히 주시는 하나님, 꾸짖지 아니하시고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권면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의 본문 역시 기도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1)"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면 서로 기도하라
(2) 너희중에 병든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기도하라 믿음의 기도
는 병든자를 구원해 주신다.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당부하
고 있습니다.
야고보선생께서 행함을 강조하는 그의 편지에서 이토록 기도에 대해서 쓰고
있음을, 기도가 바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로써 실천해야 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의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야고보선생께서 강조한 경건생활의 두가지는, (1)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일, (2)형제사랑과 자선을 베푸는일 (가난한자를 돕는일) 청빈하고 절제있는 생활, 형제를 위해서 기도에 힘쓰는 일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경건
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것, 경건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한 기도보다 더 힘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말로는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위하여 기간을 내어 기도하는 일은 사실에 있어서 그
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위해서 기도한다는것은 많은 시간과
관심과 정열을 쏟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바로 형제를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많은 값을 지불해야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들의 매일하는 기도생활에서 경험하듯이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속해
있는 가정과 식구들을 위해서는 길게 기도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그렇게 많이 갖지 못하는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선생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즉, 구체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선생은, 구체적인 형제사랑의 대상은 고난중에
있는가, 병든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위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
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카코파데인)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불행한 일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기쁨으로만 살아 갈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어려운과 불행한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평생토록
단 한번도 역경과 고난이나 불행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질병 때문에 고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 우리들은 우리들의 몸에 지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의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인생의 어려움과 몸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야고보선생은 그것은 "기도"라고 합니다. 자신의 고난이든지, 남의 고난이든지, 자신의 질병이든지, 다른사람의 질병이든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하는것은 다른사람의 고난과 불행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것입니다. 사람들이 아프거
나, 고난과 역경가운데 있을때, 누가 관심을 가져주고 위로해 준다면 이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함으로 형제의 고난과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또 주목해야 할것이 있는데, "혀를 조심하라"고 한것
입니다. 그리고 "피차 비판하지말고,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쉽게 경험하는것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서로 원망하고, 피차 비방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몹쓸
병에 걸리면, 우리의 혀를 함부로 놀려 저주하는 말을 하고, 악담을 하는 경우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님은 혀를 함부로 놀려 저주하는 말을 하지말고, 서로 비방하지 말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고 간
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장래, 우리교회의 장래, 이사회, 이나라 이 민족의 장래인 우리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식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녀들, 이땅의 청소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30여명의 입시생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합
시다.
우리교우들 중에서 병든자들이 있습니다. 큰 수술을 받고 요양중에 있는자들,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자들, 병원에서 가정에서 질병으로 인하여 고
통하고 있는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인들 중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직장문제로, 사업문제로, 어려움에
처한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는 서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사회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해야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대한 하나님의 심
판이 임박했을때, 모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막아 서서 중목의 기도를 드렸
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
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시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 막아서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출32:11-14)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심판의 뜻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
서 화를 거두시고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모세가 또다시 기도하기를,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근
심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
를 사하시옵서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지금 상황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온 교회가 서로 위해
서 기도하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 막아서서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를 함께 합시다. 아멘.
축제가 있는 교회
본 문 : 출 23:14-16
우리보다 기독교 역사가 앞선 나라의 예배에 참여해 보면 우리의 예배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에 기쁨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예배도 교회와 인도자에 따라 차이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통점은 대체적으로 거룩하고 엄숙하다는 점이다. 거룩의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는 여러 가지 분분한 의견이 있겠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거룩이란 바로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분위기를 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독교 문화가 앞선 외국의 부흥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의 예배가 "축제" 라는 사실이다. 뭔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들의 예배와는 확실히 다르다.
기왕이면 우리들의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한다. 기쁨을 경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다소 우리들의 생각에 비추어봐서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다소 우리의 마음에 다르다고 생각되더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실까? 오늘의 말씀에는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온다. 절기를 지키라는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축제를 올려라"가 된다.
우리가 절기를 비롯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축제로 드려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14절: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교회의 잘못된 전통을 꾸짖으셨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사람이 전해 준 유전을 말씀보다 중히 여기는 잘못"이었다.
가장 보수적이고 복음 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잘못은 "자신을 살피지 않는 잘못"이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는 눈은 밝다.
세상에서도 국가의 고위공직에 있는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대체적으로 준법정신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만든 법을 자신이 지키지 않는 모순을 인간이 지니고 있다.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이다. (15-16)
무교절: 애굽 종살이 청산하고 출애굽한 사전 기억하는 행사
맥추절: 그 해의 첫 열매를 드리는 행사. 수학한 종류가 무엇이든,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수장절(추수절): 한 해의 소득을 결산하는 행사를 말한다.
맥추절은 첫 열매를 거두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축제이고 수장 절은 한해의 농사를 결산하는 축제였다.
우리는 흔히들 교회의 절기를 잘못 오해하고 있다. 그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예산을 충당하는 행사쯤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지키는 절기이다.
고통의 절기가 아니라 바로 축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어떻게 지킬까?
성도는 늘 감사하며 늘 축제의 분위기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구원의 감격, 천국의 소망, 날마다의 만족한 은혜로 이 세상을 살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진정한 예물일 것이다.
믿음을 보여 드리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성경을 보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감격하게 하였다.(백부장-딸들)
믿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감사를 보여 드리자
사람이 사람됨은 감사할 줄 아는데 에 있다. 바울은 거듭 강조한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8) "범사에 감사하라"
♤어느 날, 돈들의 만남의 장소인 지갑에 배추잎사귀의 색깔을 한 만원 짜리 들어옴. 오랫동안 무료하게 지갑 안에 세월 보내던 천원짜리 반갑게 입을 열었다.
"형님! 참 오랜만입니다. 우째 형님은 그렇게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려!"
"오랜만-나는 요즘 바쁘다네! 아줌마 따라 찜질방도 가야지, 노래방, 백화점, 때로는 아저씨 따라 사우나도 가야지! 뿐만 아니라 아이들 따라 문방구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바쁜 생활하고 있네! 그런데 이 바쁜 세상에 아우는 이렇게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천원짜리가 힘없이 "--형님이 부럽소! 저는 갈곳이 없어요. 지난번 설날 세상에 나갈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갑에서 나오는 내 얼굴을 보고 '요즘 세상에 천원짜리 세뱃돈이 어디 있어요?" 한마디에 멋쩍게 지갑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지 뭡니까/ 결국 저는 갈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저희 천원짜리가 갈곳이라고는 주일날 교회밖에-- 그래서 이렇게 주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을 보여 드려야 한다.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1년에 3번은 감사하라고 명령 했다. 이는 우리의 감사 생활을 보시기 위한 것이다.
□ 감사에는 3가지가 있다.
조건부 감사: 무엇을 주시면 드리겠다는 1차원적 감사
때문에 감사: 무엇이 이루어졌으니 드리는 2차원적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어려운 환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3차원적인 감사- 이것이 진정한 감사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옛날에 믿음 좋은 왕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하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어느날 큰 잔치배설하자 거지가 들어왔으나 신하들이 거지를 내좇아버렸다. 거지가 그냥 가려하자 왕이 거지를 불러 세웠다. 이를 본 신하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왕이시여 당장 저 놈을 능지처참하십시오" 그러자 왕이 "왕인 내 앞에서 단 한번 먹어 보았을 것이다. 배고픈 마음에서 배를 채운 스스로의 감사가 있었을 것이다. 너희들은 매일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서도 감사하지 않치 않느냐"고 말하자 신하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배고플 때 곧잘 감사하면서도 배부른 삶을 살 때는 감사를 소흘히 하는 경우가 많다. 천사가 우리 모습 본다면 아마 "주님! 저 인간은 계속 배가 고픈 생활을 해야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인간입니다. 물질 축복 거두어 주옵소서" 이런 하소연이 안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그렇기에 이런 감사 절기를 맞이하여 자기의 지난 생활을 돌이켜 보며 반성과 함께,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란다.
성찬의 삶
본 문: 출 24:6-8, 마 26:26-29
성찬 혹은 성만찬이란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식사를 의미한다. 원래는 "축사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서 가장 중요하고 배불리 먹은 뒤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성찬의 상은 성도들의 친교의 장소요 주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희생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여신 일이다. 특히 성찬은 구약의 희생제사에 적용되어 희생제사의 위대한 행위가 성찬인 것이다. 성찬을 위하여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생명에 접붙힘을 받음을 확증하고 한 몸과 한 피를 받은 형제. 자매와의 영적 교제를 이루는 것이다.
1. 성찬은 나눔이며, 완전히 죽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주신 것은 자신의 것이었으며 줌으로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은 목숨을 버리시므로 가장 큰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나눔에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젊은 부자관원의 잘못은 소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나누지 못한데 있었다. 소유는 나눌 때에 의미가 있고 나눌때에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눔이란 생명을 얻은 일이다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포도주는 살과 피로서 주님으로 희생이 따랐고 주님으로 많은 생명을 얻으신 것이다.
2. 떡을 주신 것은 몸을 주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떡을 주시며 "이것은 떡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다. 주님이 주셨고 진정코 주시기를 원하신 것은 떡이 아니라 몸이었다. 떡은 상징이지만 실제로 주님이 주신 것은 몸이었다. 우리에게 성찬의 의미는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을 주는 것이다. 아무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고 하더라도 내 몸을 주는 희생이 없으면 성찬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후 장기기증은 구체적인 성찬의 삶이다. 주님께서 주시고 기념하라고 하신 일을 우리도 구체적으로 몸을 주는 삶을 통하여 실천해야 한다. 장기는 줌으로 또다른 생명을 살리는 희생제사인 것이다.
3. 포도주를 주신 것은 피를 주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다시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나의 언약의 피다"라고 하셨다. 주님은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를 마시게 한 것이다. 피는 곧 생명인데 주님은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감격하고 고난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피를 주는 일이 없으면 참된 기념은 안된다. 그러므로 헌혈이란 구체적인 성찬의 삶이다. 헌혈을 통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은 구체적인 생명운동이며 성찬의 삶인 것이다.
사색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실천적인 기독교가 되기 위하여 장기를 기증하고 헌혈을 실천함으로 살아있는 기독교인으로 성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날을 기념하라
본 문: 출 12:1-14; 고전 5: 6-8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희년법을 중심으로 하여 8. 15광복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을 지키면서, 남북평화통일의 차원에서 희년법이 가지고 있는 기본정신-해방, 자유, 정의, 사랑, 평화-을 밝혔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우리 민족의 광복은 남북평화통일이 있을 때 완성된다는 것이고, 궁극적인 이 민족의 소원은, 하나님의 희년(Jobel Jahr)이 이 한반도에 실현(도래)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역시 우리는 8. 15광복의 날을 회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해방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스라엘의 유월절(Passover) 절기가 가지고 있는 그 의미를 밝혀 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광복절의 의미를 일본과의 관계에서 밝혀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본문 출애굽기 12장 14절에서,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해방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켜라"(출 12장 14절)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규정에 대하여 본문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그 달은 반드시 한 해의 첫달(아빕월 또는 니산월)이여야 하고,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서는 그 달 10일에 가족 단위로 계산하여 한 가족당 한 마리씩의 흠 없는 새끼양, 또는 새끼 염소 수컷을 14일까지 준비해 두었다가 해질 무렵에 잡아서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야 하며, 그 잡은 고기를 불에 구운 것과 누룩 없는 빵과, 그리고 쓴 나물을 유월절 음식으로 장만해 두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음식의 준비가 완료되면 이 음식을 아침이 되기 전에 다 먹어야 하는데, 음식을 먹을 때는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은 채, 그리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은 채 서둘러 먹어야 합니다. 먹고 남은 것은 남김없이 모두 불살라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이같은 준비를 해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월절 짐승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는 이스라엘의 집은 여호와께서 애굽의 장자를 죽일 때 들어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Passover) 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고, 둘째는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음으로 인하여 애굽인들이 놀라서 한 밤중에 일어나서(출 12장 30-31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둘러 재촉하여 내어 보낼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너무 경황이 없어서(출 12장 33-39절) 누룩 없는 빵과 기타 유월절 음식을 허리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서 먹었던 그 사실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해방사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 절기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기념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우리민족의 출애굽 사건인 8. 15해방, 광복절을 지키는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들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해방과 이 민족의 8. 15해방은 희생의 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8. 15해방은 같은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고난]이라는 역사적인 정황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의 바로왕 밑에서 억압받고 고난받았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일본의 천황 밑에서 억압받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절규와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 그냥 구원해 내신 것이 아니라, 양을 잡아 피를 집의 문설주에 바르게 하시고, 양고기를 먹는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 구원의 일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해방사건을 [고난]을 통해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사건은, 유월절 사건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없이는, 피흘림없이는, 우리들에게 구속이 없습니다. 8.15해방은 우리 선열들의 고통과 고난, 피흘림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해방사건과 마찬가지로, 8. 15해방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출애굽해방과, 우리 민족의 8.15해방사건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애굽의 신(태양신)과 일본의 천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구원은, 바로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 가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 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힘은 하나도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바로 왕과 우리 민족을 억압했던 일본의 천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왕의 힘의 기세가 꺾이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며, 일본의 제국주의와 천황의 코가 꺾이는 사건이 또한 8.15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태양의 아들이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고, 일본천황이 신이 아님을 선언한 사건이 바로 8. 15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광복 47주년을 맞이하여, 8.15의 해방의 날을 기념하면서, 한일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답답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0년이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한일관계의 감정은 깨끗이 정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적대의 응어리와 앙금이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서로 싫어하는 감정과 반일감정이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깊숙이 스며들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이같은 관계는 일본과 한국, 양국이 모두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먼저 일본의 책임을 이야기해 보면, 일
본은 전쟁 범죄 국가이며, 우리민족에 대해서는 엄청난 피해를 준 가해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국가에 대한 [참회]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제적으로 강국을 이루었다고 해서 오만불손하고, 이젠 경제대국으로서 경제 침략의 마수를 뻗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와서 또 다시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동남아를 힘으로 지배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 조심을 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같은 현상은 일본이 식민시대 사고(植民時代思考)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소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식민시대사고]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고이고, 이것은 또한 힘으로 남을 지배하는 사고이고, 이것은 또한 힘으로 남을 지배하고 팽창해 보자는 팽창주의 사고입니다. 이 힘의 사고가 하나님을 무시 할 때,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무서운 응징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본은 깨달아야 합니다. 일본은 하나님 앞에서, 세계인류 앞에서 특히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특히 한국인 앞에서는 겸허하고 참
회해야 합니다. 어제 8. 15일에는 일본의 각료들이(12명)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19세기말 명치유신이래 전몰자의 명령을 모신 신사입니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자들의 명령도 함께 안치를 했습니다. 이 신사에 일본인들
이 참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과 중국인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정부에서 이 문제를 반대해 왔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일본의 수상과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군국주의의 부활을 의미 하는 것이고, 전쟁범
죄 국가로서 조금도 [참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오만 불손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일본사람들의 태도와 독일사람들의 태도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세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히틀러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하여 세계 앞에 특히 피해국가들에게 겸허한 자세로 [참회]라는 단어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지금도 독일 대통령이나 수상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땅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인 그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범죄자들이 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지금도 전쟁 범죄자가 발각이 되면 그냥 두지 않고, 상당한 응징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후 처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독일에 비하면 너무나 뻔뻔스럽고 오만불손 방자하기 그지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렐리아의 경제학자인 조지헉스교수는 "일본은 결함 있는 문화의 상속자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결코 세계인류를 지도해 나갈 지도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대국이지만, [결함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는 결코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은 [경제동물], [성동물]이라고 혹평한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비판의 학살을 돌려야 합니다. 한일관계에서 우리들에게 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정치, 사회의 지도자들이 대부분이 친일파였고, 이들이 정치와 사회를 지도해 나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일제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일본과 유착하게 되고, (물론 이승만대통령은 반일 감정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각료와 특히 경찰계통은 70%이상이 친일파 계통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앞에 비굴하게 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일감정을 가진 백성들은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일본을 대처하지 못하고, 일본을 증오의 대상으로만 일본상품을 선호하고, 사대주의 근성으로 아부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젠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고난의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그날을 기념한 것처럼, 우리들도 8. 15를 그렇게 기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감정적으로 일본인을 증오하면서,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대모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차분히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일본에서 해방되기 위하여(벗어나기 위하여)탈출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일의 늪앞에서 해어나와야 합니다. 주저앉아 편안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기름
진 음식을 먹으면서 흥청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편안히 잠을 자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깨어나서 신발을 신은 채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서 음식을 먹고, 남이 편히 잠을 자고 있는 밤에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일본경제의 예속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여기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주도 정신을 차려 깨어 있어야 하고, 노동자도 깨어 정신을 차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상입니다. 임금투쟁을 하고, 노사분규로 조업정지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 백성들 흥청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호화외국 관광을 하여 외화 낭비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외국상품, 특히 일본상품을 선호할 때가 아닙니다. 고난의 떡을 먹으면서 쓴 나물을 먹으면서 이 비상시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절에 보리죽을 먹고, 피죽을 먹고 나무 껍질, 풀뿌리를 캐 먹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의 떡을 먹으면서 출애굽 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고난의 떡을 먹으면서 8. 15해방을 기념하십시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방법
본 문: 출 15:22-26
옛부터 기회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스마일즈은 말하기를 만약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으면 스스로 좋은 기회를 만들어 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짤막한 한토막 인생을 살면서도 내게 찾아온 기회를 고스란히 흘려보내 버리고 나서 탄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회를 잃으면 다시는 그것을 영원히 찾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회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기회란 말은 희랍어로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때를 측정한다. 때를 적응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회는 때를 측정하고 적응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바디메오는 거지였습니다. 구걸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알고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18:35-43). 허겁지겁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그 때 눈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회를 포착하면 생의 변환점을 찾습니다. 기회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시간 무엇이든지 가능한 한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행14:8). 마침 그때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바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병고칠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 나아가서 은혜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살전2:13하)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이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외치는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은혜가 된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환경과 사물까지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의 축복받는 기회인 줄로 믿습니다.
예를 든다면, 똑 같은 길이라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의 기분과 정신에 따라 즐거운 여행 길이 될 수도 있고 괴롭과 먼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 몸이 괴롭거나 기분이 우울해졌을 때는 가까운 길도 먼 길로 느껴지지마는 건강상태가 양호하고 기분이 상쾌할 때는 험해도 평지처럼 수월하게 갈 수 있습니다. 인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인생길인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롭고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밝고 즐겁게만 느껴집니다.
그것은 곧 그에게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물질로 실패하여 궁지에 처해 있거나, 질병으로 사경에 헤매다가 살아났거나, 가정 생활에 실패하거나, 사업에 파탄을 가져 왔거나, 어떠한 모양이든지 패배와 절망에 부딪쳐 하나님께 항복하고 무릎을 꿇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은혜 중에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1. 믿고 구하는 자가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좋은 분위기와 자세, 기도하는 방법, 기도하는 요령, 기도와 인내, 기도 응답에 방해 요소를 모두 제거했다고 해도 마지막 마무리 작업을 잘 해야만 기도 응답이 분명히 주어지는 줄로 압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응답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믿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오랫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고, 응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했다 해도 기도하고 난 후에 받은 줄로 믿지 아니하면 그 기도는 무효가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가장 신속하게 틀림없이 받은 요령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막연한 목표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목표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 목표가 업시 무엇을 구할지 모르는 사람은 기도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 목표를 정해야 할까요?
다니엘이 고향을 바라보며 고향 쪽으로 창문을 열고 하루에도 3번씩 기도한 것은 참으로 본 받을 만 합니다. 기도의 창문을 열어야 합니다. 기도의 포문을 열어놓고 쏴야 합니다. 기도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쏴야 합니다. 목표없이 기도는 허공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빗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기도는 신앙의 생명입니다. 성도의 신령한 호흡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마귀와 싸워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은 모든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갈멜산의 기도는 3년6개월 동안 우로가 없었지만 비를 내린 참으로 놀라운 역사였습니다(왕상18:41-44).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 손과 발목이 묶여 있었지만 기도의 위력으로 옥문이 열리고 손 발에 묶인 착고가 다 벗어지는"(행16:25)악조건에 놓였다 할지라도 기도함으로써 매였던 것들이 다 풀어지는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기도의 입을 넓게 열었습니다. 입을 크게 넓게 여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출15:22-26)
세상을 바라보면 너무나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공산주의나 무신론주의나 황금만능주의나 어떤 타종파이건 사상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 권세, 명예, 욕심, 탐심, 음행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육신의 질병을 가진 사람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영적 육적의 병을 치료하십니다.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수 많은 병을 고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본문에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쓰다는 의미와 썩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본 즉 마라는 쓰고 부패한 물만 있었습니다. 이 물을 먹은 사람들은 병들고 구토를 일으키고 배가 뒤틀리는 무서운 증상이 일아날 것입니다. 현사회는 정치, 도덕, 윤리, 양심, 공해로 썩어져 가는 세상이요, 수도물도 오염치가 넘어선 상태에서 내 생활이 병들지나 않았나 내 육체가 병들지나 아니했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왕하20:1-7).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예언하길 "당신은 죽게 되었으니 유언이나 남기고 죽으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아 15년이나 생명이 연장된 줄로 믿습니다.
십수년전, 저는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혈당700까지 올라가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아 지금은 건강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혹시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의학, 의술을 다 의지했지만 효험이 없는 차에 예수를 찾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편히 가라. 네 병에서 나아 건강할지어다."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3. "이 불이 붙었더라면"하고 탄식하시던 하나님 입니다(욜2:29)
이태리의 문인 빠삐리가 말하기를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개조가 없이는 인간의 개조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 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정치의 힘으로, 과학의 힘으로, 교육의 힘으로도 경제의 힘으로도 어느 배경으로써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큰 산아,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스4: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보아 큰 산길은 어려운 애로도 성령받은 사람 앞에는 평지처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인 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 제자들은 어디론가 우수에 잠겨 쓸쓸하게"(요21:1)흩어졌습니다. 저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본업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쳐 봤지만 고기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뼈가 굵은 제자들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죽는 것 같이 예수 떠난 심령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하던지 거듭 실패만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때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기다리는 것이 성공의 제일 비결입니다.
나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해야 할 제자들이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들의 위험이 두려워서 그들이 있는 집에 대문을 잠그고 비겁하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요20:19).
그러나 무엇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망할 일, 죽을 일만 생기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항하여 숨을 내 쉬어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셨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험만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며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저하니라"(행4:29-31)고 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닫혀진 입을 열 수 없습니다. 닫혀진 전도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봉사하고 싶거나 하나님 사업을 하고 싶으시다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욜2:16).형식에 처하지 말고 중심으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선물로 성령 받으십시요.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있게 하소서"(왕하2:8-14).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렘33:3).
기도의 입을 넓게 여시기를 바랍니다.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영육간에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마라의 쓴 물
본 문: 출 15:22-27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송백(松柏)지조(志操)"라는 속담이 있는데, 곧 겨울이 온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푸르른 것을 알수 있다는 말로, 시련을 닥쳐봐야 그 사람
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람만큼 참으로 간사한 존재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는 이도 평상시 에는 좋아 보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포기하는 이가 있고, 반면에 어려울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만 환경이 좋아지면 나태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약점을 잘 아시기에 삶과 환경을 통하여 성숙한 신앙인으로 그의 자녀들을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상황은 이스라엘민족을 그렇게 다루시어 만들어 가시는 모습입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여 감격적으로 홍해를 통과합니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과 흥분의 도가니에 달합니다. 홍해의 체험, 이것은 대단한 기적입니다.그러므로 환호와 기쁨에 젖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전10:1-2에서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지적하며, 홍해의 체험을 세례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옳습니다. 홍해는 애굽과 완전히 결별하는 마지막 순간이요, 세례도 세상과 결별을 고하는 성도의 고백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기쁨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멸망과 죄로부터의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연속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펴봅시다. 홍해 체험의 감동에 젖어 수르 광야를 하루 종일 통과합니다. 이튿날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가도가도 끝이 없고 목욕하거나 세면할 물이 없습니다. 아니, 세면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얻지를 못합니다. 또 하루가 지납니다. 이제는 갈증에 지치고 맙니다. 본문22절을 봅시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제 그들은 현실의 고통 때문에 홍해를 건넌 감격을 까맣게 잊습니다. 그러다가 사흘 만에 겨우 발견한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마라라고 부르게 됩니다(23절). 그러므로 그들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24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모두에게 있는 일들입니다. 모세도 인생의 절정기인 40세에 광야에 보내어 40년간을 절망의 기간으로 걷게 하셨고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간을 준비시키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 분이 쓰시고자 할 때는 시련의 길을 걷게 하여 준비 시키시고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산산히 부수고는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마음 속을 그분은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물질욕이 있다면 그것이 깨지도록 다루실 것입니다. 명예에 관심이 있는 내 모습이라면 그 명예가 좌절되게 낮추실 것입니다. 세상에 관심이 있는 만큼 철저히 부술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 안에서 허락하시는 풍성한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너지기까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챨스 코우만의 "애벌레 관찰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치(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 동안 애벌레가 몸부림치고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 주고픈 충동을 느끼고는 가위를 가져다가 그 구멍을 크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 나방의 애벌레는 퉁퉁 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며 고치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그 나비가 날기ㅡㄹ 기다리며 하루 이틀 사흘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비가 날기를 기다리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때서야 나비를 도와 준 것이 아니라 나비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기 위해 긴 긴 시간을 몸부림칠 때, 비록 고통의 순간들 이지만 퉁퉁 불은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날기에 알맞은 몸이 되어서야 그 구멍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고통은 나비엑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중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옳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 당할 때 고통을 못 이겨 금방 가위를 들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더 큰 위험에서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좁은 구멍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을 배반까지 하며 넘어지는 고통을 겪었던 베드로도 벧전1:7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의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에는 더 큰 섭리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알아왔던 번개, 그러나 번개가 없으면 지상의 모든 생물은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현대 과학은 발견했습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 그빛과 열에 의해서 공중에 떠 있는 질소가 빗속에 녹아들어 땅 위로 비와 함께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만일 번개가 없다면 그 중요한 비료인 질소가 식물에 공급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번개도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기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도 이처럼 더 큰 섭리로 그들앞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배웠습니다. 25절에"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하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옳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하는 노래처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있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짖고 기도할 때 응답으로 "한 나무"를 지시해주셨습니다 (25절). 벧전2:24에서는 나무는 곧 십자가의 상징이라고 언급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고통과 역경이 있을 때 몸부림치고 기도하면 그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여기에서 그 물이 달아지는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체험이 있는 신앙, 그것이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생명력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라의 쓴 물의 고통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섭리로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시험에 잘 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고통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하여 25절과 26절에 나타납니다."...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치료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약속입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갈기 갈기 찢겨졌을 때에 호세아 선지자가 이 말씀을 다시 선언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늘, 이 자리에 찢기고 상한 마음으로 오신 분이 있다면 치료의 하나님 앞에 모두 내어 놓으십시요. 마라의 쓴 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원망하고 좌절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나는 치료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이 시련 뒤에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위로의 손길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고통을 지난 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엘림은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기고 나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약속과 엘림의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어버리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 같은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본 문: 출 40:1-38
모든 명하신 일을 마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겉옷을 입히라고 명하셨다. 바야흐로 대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질 순간이었다.
1. 거룩하게 하라(1-16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대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과 하나님이 세우신 아론과 그 아들들을 이제 거룩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다. 그들이 성막을 위해 만든 모든 것들이 본래는 그 백성들의 여러 금붙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것들로 만들어짐으로써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을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다시 거룩하게 바침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을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다시 거룩하게 바침으로, 그리고 온 백성들 앞에서 거룩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온전히 거룩한 것이 되었다. 아론과 그 아들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였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과 제물들을 거룩히 하여 하나님의 것들로 삼아야 한다.
2. 모든 것을 바친 모세(16, 33절)
출애굽에서부터 지금 하나님의 성막과 제사장들을 세워 바치기까지 모세가 한 일들은 참으로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모세는 끝까지 믿음과 순종으로 성실하게 그 맡은바 책임을 다하고 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시작하기는 쉽고, 또 순간 순간 믿음과 순종을 지키기는 쉽다. 하지만 수많은 날들의 역경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세는 그 쉽지 않은 일을 마침내 이루었다.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3.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여호와(34-38절)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성막짓기를 마치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 위에 충만하였다. 그 영광이 얼마나 충만하였던지 모세조차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충만한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 영광의 구름은 떠올랐다,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이
스라엘의 진퇴를 결정해 주었다. 하나님의 명대로 만들어 세워진 성막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그 영광을 온 이스라엘 족속이 그 모든 길에서 친히 보게 되었다.
제사장의 의복
본 문: 출 39:1-43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의 거룩한 옷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들은 성소에서 섬길 제사장들의 옷을 정교히 만들었다.
1.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들(10-14절)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는 흉패 위에 네 줄로 된 보석을 물렸다. 그것은 모두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다(홍보석-르우벤, 황옥-시므온, 녹주옥-레위, 석류석-유다, 남보석-단, 홍마노-납달리, 호박-갓, 백마노-아셀, 자수정-잇사갈, 녹보석-스불론, 호마노-요셉, 벽옥-베냐민). 그 곳에는 도장을 새기듯 각 지파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렇게 제사장의 옷에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단 것은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도록 한 것이다(28:12절). 무릇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석들을 위해 사는 지도자는 언제나 하나님께 그 백성이 기억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기억하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복 주시도록 하여야 한다.
2. 여호와께 성결(22-31절)
제사장이 입을 옷에는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반드시 방울을 달아서 울리게 하였고, 머리에 쓰는 관의 전면에는 정금으로 만든 패에 `여호와께 성결'을 새겨서 달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 몸 바쳐진 사람들이 먼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삼가고 성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옷 가장자리 에 달린 방울소리를 그가 성소에 들어가고 나올 때 마다 울리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은(레 28:35) 그 스스로 하나님 앞에 삼가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선택받지 않고 구별되지 아니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범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명대로 한 사람들이 받을 복(32-43절)
모든 작업을 마치자 모세는 일일이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되었는가 점검하고, 그들이 모든 것을 그 명하신 대로 한 것을 인하여 그들을 축복하였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 속에서 정확히 지켜지도록 점검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명대로 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성막의 뜰과 예물들
본 문: 출 38:1-31
금을 재료로 한 성물 만드는 일들이 끝난 브살렐은 다시 놋 제단과 놋 물두멍, 그리고 세마포로 성막의 뜰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였다.
1. 번제단을 만들라(1-7절).
브살렐은 모세의 명대로 조각목으로 번제단과 뿔을 만들고 그것들을 놋으로 싸고 단의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리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고 그물과 꿸 고리를 만들었다. 이 놋 제단은 짐승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의 단으로 쓰이는 것으로 성막 뜰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아무도 번제단에서의 희생제물을 드림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하였다(레 1:1-8:36).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 제단에는 뿔이 있어서 범죄자들이 보호와 무죄를 호소할 때 그 뿔을 잡았으며(왕상 1:50, 2:28), 속죄제를 드릴 때 그 피를 그 곳에 발랐다. 이것은 능력과 보호의 상징이다.
2. 자원의 믿음으로 이룬 큰 역사(24-31절)
이스라엘이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쓴 재료의 총 물목은 성소를 위하여 드린 금이 성소의 세겔대로 29달란트와 730세겔이며, 조사를 받은 회중이 드린 은이 100달란트와 1,775세겔이고, 바쳐진 놋이 70달란트와 2,400세겔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세가 그만 가져올 것을 명했을 때 된 것이었다.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넉넉함이 보이며 그것을 또한 아낌없이 바쳐 위대한 역사를 광야 중에서 이루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신앙이 보인다.
3. 모두가 함께 이루라(26절).
성막을 위해 바쳐진 것 중에서 은은 20세 이상 되는 장젖 603,550명이 모두 다 반 세겔씩 드려서 모든 것이다. 특별히 열심이 있는 몇몇의 지도자나 백성이 아니라 60만명이 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믿음과 힘을 합해 이루어 낸 위대한 역사였다. 그들 각 개인은 비록 반 세겔씩 내었지만 그 모두가 참여하여 힘을 합쳤을 때 큰 역사를 이루어 낸 것이다. 천만 성도의 기도의 연합과 마음의 연합으로 우리 민족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여야 한다.
성막의 재료
본 문: 출 35:1-36:1
새로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온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은 광채나는 얼굴이었다.
1.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모세(1, 4, 10, 30, 1-19절)
범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다시 이전처럼 회복하고자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의 말씀을 새로이 받아 온 모세는 온 백성을 불러모으고 그 말씀을 다시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킬 규례와 만들어야 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빠짐없이 그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전하는 자가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다(롬 10:13-14). 지도자와 먼저 믿은 자들의 임무는 그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하는 것이다. 전한 연후의 일들은 모두 그 말씀을 들은 자의 책임이지만, 전하지 않은 것은 말씀을 먼저 들은 자의 책임이다. 구원과 심판의 소식을 우리는 모두 빠짐없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전해야 한다.
2. 자원하여 드린 예물(20-29절)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선언을 듣고 회개하여 다시는 그 몸에 치장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듣고서는 즉시 돌아가 그 마음에 원해지고 감동되는 대로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쓸 것을 만들 재료를 헌납하였다. 그들은 모두 감동되는 대로 자원하여 드렸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것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각양의 것이었다. 그들은 금과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 염소 털,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조각목, 호마노, 각양 보석, 관유, 향 등을 가져왔으며 슬기 있는 여인들은 수를 놓아 가져왔다.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치고 싶은 것을 즉각 바쳐서 주의 일의 재료가 되게 하여야 한다.
3. 재주와 지혜를 바쳐라(35:30-36: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은 성막과 그 밖의 것들을 만들 재료만이 아니었다. 지혜 있는 여인들은 수를 놓아 바쳤고, 특히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과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은 그 충만한 지혜와 재주를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명하신 일들을 잘 이루어 내었다. 우리의 가진 바가 무엇인지 살펴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최대의 계시
본 문: 출 34:1-35
다시 시내 산에 오른 모세에게 여호와의 성호가 반포되었다.
1. 산상에서 받은 계시(1-17절)
모세는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석판 둘을 만들어 가지고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강림하셔서 자기의 이름을 선포하시고, 자비하심과 은혜로움, 노하기를 더디하심,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등의 다섯 가지 속성을 알려 주심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셨다.
그의 요구는 오직 순종과 수명(守命)이었고, 이에 따르는 많은 복과 번영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본토인과 언약이나 통혼을 하지 말고 우상숭배를 삼가할 것을 겅계하셨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은 여호와는 자연 존재자가 아니라 절대 권력자이심을 드러낸 것이고,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은총의 구주이심을 보이신 것이며,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확증을 주신 것이다.
2. 절기를 지켜라(18-27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총 주신 때를 상기하여, 무교절과 칠칠절을 지킴으로 은혜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무교절(유월절)은 특별한 구원의 은총으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칠칠절(맥추절,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일 후가 되는 날로서 처음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이 칠칠절은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란 뜻이고 동시에 이 날은 바로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으므로 성령강림절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스라엘 선민들의 영원한 규례인 이 3대 절기는 입국후에도 지켜야 하되 누구든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명하셨다.
3.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28-35절)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모세가 산을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 주신 두 개의 돌판이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였다. 하지만 모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본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야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다. 죄 있는 민중 때문에 모세는 수건을 써야 했다. 그 수건은 가면이다. 구속받지 못한 심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어 오늘날까지 수건이 덮여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수건과 같은 가면을 벗고 참 얼굴로 그의 영광에 참예해야 한다.
모세의 기도
본 문: 출 33:1-23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미래를 계획하다 내려와 이스라엘의 큰 범죄를 본 모세는 동족을 죽이는 아픔을 겪는다.
1. 너와 함께 가지 아니하리라(1-6절).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애굽을 떠난 것에서부터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살아난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함께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신다. 생명의 주, 인도의 주님의 동행거부 선언인 것이다. 신자의 생명과 힘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면 그들은 원수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신자들이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면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 버리신다.
2. 너희를 진멸할까 하노라(6-11절).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심 속에서도 그의 사랑을 버리지 못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그들의 범죄의 결과이나 동시에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정의와 거룩의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그들과 계속 함께 계시면 그들은 결국 그 공의의 심판으로 전멸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 진노하시면서도 그것이 염려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슴 아프지만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해야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슬퍼하면서 그 스스로 치장을 제하자 또 다시 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을 알려 주겠노라고 마음을 돌리신다(5절).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곧 우리를 용서하시고 마음을 돌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도 아시는 이름 `모세'(12-23절)
자기의 백성의 범죄를 보며 또한 하나님의 결별 선언을 들은 모세는 오직 자기 민족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의 산에 올라 간절히 기도한다. 그는 그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영광까지 보여 주시마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게 하셨다. 그리고 모세의 이름까지도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17절). 먼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무릇 모세처럼 하나님께 이름까지 기억하신 바가 되도록 은총을 입어야 한다.
성 막
본 문: 출 26:1-37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성막을 짓도록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의 표현이다.
1. 천으로 성막을 만들라(1-29절).
하나님께서는 그가 계실 곳임에도 불구하고 성막을 천으로 만들 것을 명하셨다. 그것은 그 때의 이스라엘이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막도 이동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는 어디에나 함께 가셔서 그들 중에 계시겠다는 의사표시이다. 후에 솔로
몬이 성전을 지어 드리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성막 속에 거하셨지만, 그 성막이 천으로 지어진 것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것으로 짓기보다는 천으로 된 성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규정대로 짓기를 원하셨다.
2. 하나님께서 보이신 대로 만들라(30절).
하나님이 계실 성막은 외견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다른 천막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이 있는 이스라엘의 경제사정을 생각해 주심이며, 동시에 그들의 이동을 언제나 염두에 두신 하나님의 배려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성막은 하나님께서 계실 곳이므로, 어떻게든지 백성들이 사는 천막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아니시며 인간과는 구별되는 거룩한(구별되다, 서로 다르다의 뜻임)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각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3. 지성소에 둘 것들(31-37절)
지성소는 이름대로 지극히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정해 주시고 그것들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요구하신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지성소에 둘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 증거궤와 속죄소를 따로 구별하여 두도록 명하셨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속량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거룩하게 따로 구별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1:23, 28:20). 우리는 하나님의 임마누엘하심을 언제나 깨닫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그렇지 못한 자는 낙제한 그리스도인이다(고후13:5). 임마누엘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다.
승리의 노래
본 문: 출 15:1-27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의 분위기에 넘쳐 있었다.
1. 백성들의 구원의 노래(1-18절)
이것은 유대인들의 첫 번째 찬양이다. 그들은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위대하신 성업을 이룬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 이 곳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계속 반복되지만 헛된 것이 하나도 없다. 여호와는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시며 힘이 되시고 구원이 되신다. 그들은 그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찬양했다. 6-10절은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한 노래이다. 해방의 구원, 위기에서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다. 11-18절은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지켜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격으로 찬양하고 있다.
2. 미리암의 합창과 춤(13-21절)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위치의 여성 지도자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구국의 역사에 공이 많은 인물이다. 애국자인 그녀는 시인이며 음악가이기도 한데, 그녀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합창과 무용단이 한층더 백성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미리암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바로의 딸과 함께 모세를 성장시킨 세 여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찬양의 선봉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몸소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과 현재에 구원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높이며 노래와 춤으로 찬양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의 손은 소고를 잡고, 그녀의 발은 뛰면서 춤을 추고, 그녀의 입은 구원하심을 소리높여 찬양했다. 죄의 노예, 그리고 죽음의 음부에서 해방되어 새 자유와 새 생명을 얻은 감격으로, 여호와를 높이높이 찬양했다.
3. 성결하지 못한 백성들의 원망(22-27절)
마라에서 엘림까지의 광야여정 중 첫 번째로 들어선 `수르' 광야는 애굽 동편 국경지대로서 히브리말로 `벽'이란 뜻이다. 광야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기쁨은 하나, 둘 사라지고 광야의 시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성결하지 못한 본성이 겨우 광야 3일 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당면한 문제는 `물'이었다. 사막은 아닐지라도 덥고 건조한 광야에는 물이 없었다. 그 다음에 도달한 곳은 `마라'였는데 그곳에 있는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단물이 되게하셨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는 물샘 12개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70주를 준비해 두셨다. 그것이 `엘림의 축복'이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그 신앙까지 흔들거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같이하신다.
십계명을 받음
본 문: 출 20:1-26
율법은 정죄를 위한 규범이 아니라,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자라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감사함으로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다.
1. 십계명의 의의(1-17절)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깨닫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계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① 유일신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금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와 예배를 드릴 것 ②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면 형통과 장수의 축복을 받음 ③ 이웃을 침해하지 않으며 거짓과 탐심 등을 버릴 것 등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위
로는 하나님을 지성으로 섬기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 십계명을 갖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신 것이다.
2. 백성들의 두려움(18-21절)
백성들은 떨며 멀리 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살았더라면 그 산상의 광경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해서 그들은 벅찬 감격과 감사의 즐거움으로 흥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불신으로 가득한 그들이 떨면서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인은 감히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직접 보게 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어 왔다. 장차 주님의 재림 때에도 사람들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산아,바위야, 나를가리워다오."
3.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22-26절)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목격하였으므로 이방 사람이 하듯 하나님을 금이나 은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 안 된다는 분부를 받았다. 이런 뜻에서 천주교의 화상예배나 신상조각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제사드리는 것은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며, 제사드리는 자의 기도는 제물의 연기와 같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화를 뜻한다. 그리고 제단의 돌은 정으로 다듬지 말라 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공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진리에도 인간의 지식이나 사상이 가미될 필요가 없다. 또 계단을 만들되 오르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부정을 금하고 신성을 요구하신 것이다. 모든 계명과 규례는 인간의 축복과 번영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홍해의 기적
본 문: 출 14:1-31
가까스로 해방되어 행진해 가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또 다른 난관이 봉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애굽군의 멸망을 친히 보게 되었다.
1. 바로 왕의 변심과 추격(1-14절)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의 바알스본 맞은편에 이르렀을 때 바로의 마음은 다시 강퍅해져 버렸다. 그는 장자가 살해당한 것과 막대한 노동력이 손실된 것에 대해 심하게 분노를 느끼고, 이스라엘을 다시 노예로 삼기 위하여 특별 병거 600승과 애굽에 있는 모든 병거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추격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묘책이라곤 전혀 없는 상태였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며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한 불신앙의 원망만을 쏟아냈다.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이다. 악마의 모형을 가진 바로는 지금도 우리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닫고,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2.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15-20절).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모세에게 전진을 명하셨다. 그러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을 갈라지게 하라고 명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행하니 하나님이 큰 동풍을 불게 하셨다. 곧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같이 되었고,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진 하였다.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번 크게 체험하게 되었다. 불평에 빠진 민중과 모세의 담대한 신앙의 발표를 볼 때 신앙과 불신앙의 큰 차이점을 느끼게 된다. 이스라엘을 권능과 은총으로 인도하여 내시는 하나님! 그분은 불가능이 없으심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3. 홍해(21-31절)
홍해는 자연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증거로써 기적을 만들어 냈다. 강한 동풍이 불었고, 바닷물이 갈라졌고, 바다를 땅같이 건너갔다. 다시 바닷물이 합쳐져 애굽 군대가 모두 수장되어 버렸다. 이 아슬아슬하고 경이로운 사건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곧 생명과 사망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고, 믿지 아니함으로 인해서 사망에 빠졌다. 홍해는 십자가의 모형이다. 믿으면 생명을 얻고, 믿지 아니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승리의 노래
본 문: 출 15:1-27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의 분위기에 넘쳐 있었다.
1. 백성들의 구원의 노래(1-18절)
이것은 유대인들의 첫 번째 찬양이다. 그들은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위대하신 성업을 이룬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 이 곳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계속 반복되지만 헛된 것이 하나도 없다. 여호와는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시며 힘이 되시고 구원이 되신다. 그들은 그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찬양했다. 6-10절은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한 노래이다. 해방의 구원, 위기에서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다. 11-18절은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지켜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격으로 찬양하고 있다.
2. 미리암의 합창과 춤(13-21절)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위치의 여성 지도자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구국의 역사에 공이 많은 인물이다. 애국자인 그녀는 시인이며 음악가이기도 한데, 그녀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합창과 무용단이 한층더 백성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미리암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바로의 딸과 함께 모세를 성장시킨 세 여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찬양의 선봉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몸소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과 현재에 구원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호를 높이며 노래와 춤으로 찬양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의 손은 소고를 잡고, 그녀의 발은 뛰면서 춤을 추고, 그녀의 입은 구원하심을 소리높여 찬양했다. 죄의 노예, 그리고 죽음의 음부에서 해방되어 새 자유와 새 생명을 얻은 감격으로, 여호와를 높이높이 찬양했다.
3. 성결하지 못한 백성들의 원망(22-27절)
마라에서 엘림까지의 광야여정 중 첫 번째로 들어선 `수르' 광야는 애굽 동편 국경지대로서 히브리말로 `벽'이란 뜻이다. 광야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기쁨은 하나, 둘 사라지고 광야의 시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성결하지 못한 본성이 겨우 광야 3일 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당면한 문제는 `물'이었다. 사막은 아닐지라도 덥고 건조한 광야에는 물이 없었다. 그 다음에 도달한 곳은 `마라'였는데 그곳에 있는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단물이 되게하셨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는 물샘 12개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70주를 준비해 두셨다. 그것이 `엘림의 축복'이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그 신앙까지 흔들거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같이하신다.
출 애 굽
본 문: 출 12:37-51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수는 장정만 60만 명이니 여자와 어린아이를 합하면 200만 명이 넘는 숫자이다. 매우 놀라운 수의 백성이 출애굽을 했다.
1. 기적의 출발(37-39절)
불과 70여 명이었던 이스라엘의 가족은 430년 동안 비약적으로 번성하여 20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어 출애굽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바로와의 투쟁도, 백성들의 훈련도 끝이 났다. 남은 문제는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까지 성공적으로 민족 대이동을 할 것인가이다.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여정은 우리 신자들의 이 땅에서의 생활을 연상케한다. 신령한 가나안으로 가는 신앙의 출발이 반드시 쉬운 길만은 아니다.
2. 해방의 달을 기념(40-42절)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 애굽의 학정과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맞은 날을 한 해의 첫 달인 정월로 정하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날을 영원히 기념하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가나안을 향한 출범이었지만 200만 명에 달하는 민족 대이동은 놀랄 만한 모험적인 장도였다. 그 많은 백성이 어떻게 먹고 마시며, 어떻게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의 땅으로 소유할 수 있겠는가!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는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염려와 불안, 불평의 요소가 있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불신자의 불평과 같다. 그러나 신앙인은 오직 믿음을 갖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그와 함께 모든 문제를 타개해야 한다. 본문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3. 유월절 규례(43-51절)
모세와 아론에게 유월절 규례를 주어 지키게 하셨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기념일이요, 민족 최상의 사건으로서 영원토록 기념해야 할 절기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날과도 같다. 유월절을 지키는 규례는 이방인은 먹지 못하게 하고,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아야 먹으며, 고기는 집 밖에 내지 말며 뼈도 꺾지말고, 동거한 외국인은 할례 후에 먹을 것 등이었다.
구약의 할례제도는 신약의 성결의 모형이다. 할례는 양피를 제거하는 것으로 음란 제거의 의의가 있고, 성결함은 주의 피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그 때로부터 유월절 규례를 계속하여 지키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함
본 문: 출 1:1-22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1. 고난의 원인(1-10절)
1) 이스라엘 민족의 창성 : 처음 70명(창 46:27)이 날로 번식하고 창대하여 시내산에서 인구조사를 한 결과 20세 이상의 남자만 60만 3천 550명(레위 지파 제외)이 되었으니(민 1:46-47)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200만, 한 국가를 이루기에 족한 숫자이다.
2) 애굽인보다 많고 강하다 : 정확한 수가 많다기보다 이스라엘의 번성과 강대함이 신속함을 보고 그렇게 느끼고 두려워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대적과 합세하여 애굽을 공격할까 두려워서 핍박한 것이다. 불신하면 별 생각이 다 난다.
2. 고난의 내용(11-14절)
1) 정신적 고통 : 감독자를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괴롭게 하였다. 이는 자유의 제한 내지 박탈이요, 공권력의 탄압이었다. 자유 없는 삶은 행복이 없다. 독재 하의 탄압받는 국민의 정신적 고통은 형언할 수 없다.
2) 육체적 고통 :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데 부역을 시켰다. 그리고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짓는 일을 시켰다. 이는 이스라엘이 해보지 못한 일로서 고역이었다. 저들의 생업은 목축이었다.
3) 생활의 고통 : 사람은 빵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인정도 받고 사랑도 나누고 향상하고 발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타국의 설움과 여러 가지 제한과 핍박으로 이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3. 고난의 절정(15-22절)
1) 남자 아이는 죽어라 : 바로는 히브리 산파에게(십브라, 부아) 남자거든 죽이고, 여자거든 살려 두라고 명령하였다. 이스라엘의 씨를 없애려는 무서운 살인 계획이었다. 국가가 정권유지를 위해 숱한 살인죄를 범한다. 어린이를 죽이라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다.
2) 남자 아이는 하수에 던지라 : 산파들이 왕명에 따르지 않자 남자 아이는 하수(나일 강)에 던지라고 신민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무서운 살인형이었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창 15:13). 고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지나고 나면 유익한 것이다(롬 5:3-4).
하나님의 계산방법
본 문 : 출 16:13-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은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애급에 내린 재앙들을 생각해 보라. 그 하나하나가 모두 애급 사람들의 우상 숭배와 깊은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징계를 통하여 자기들의 신을 향하여 증오를 가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떠하였던가 ?
애굽인들과는 명확하게 구분하였다.(8:22) 그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분하리니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할 것이요. 이러한 현상은 독종과 우박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애급 전역에 흑암이 가득하였을 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하는 고센 땅에 밝은 햇빛을 주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11: 7에 보시면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하는 말씀이 있다. 이 여러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별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처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길은 온통 실수투성이다.
①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 년이나 방황하였다.
② 그 40년 동안 가나안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③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한마디로 불순종이다.
*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수한 실수를 발견하는데 사실 이러한 실수로 인하여 후에 믿는 우리가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가 ? 출애굽기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실천방안'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산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1. 하나님은 어린 양의 머리 수를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
- 매 사람마다 어린 양을 취하라고 하셨다.
- 혹시 식구가 작은 경우에는 이웃과 함께 어울러 잡도록 하였다.
- 희생 양은 1 년된 흠없고 순수한 것이라야 하였다.
- 이것은 1 년에 한번 가지는 유월절 예식에서의 제물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 다시 말하여 안식일 교훈은 지킬 줄 알면서 부모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계명은 중하게 생각하면서 저 계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양을 잡았느냐가 아니다. 그 양의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리워져 있느냐 하는 것을 보신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 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다. 처음 유월절을 지낼 때 어린 양의 피가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 것 같이 오늘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능히 구원하신다. '그 집 안에 몇 사람이 있던지 그것을 개의 하지 않으신다.' '이방인라고 하여도 구원하신다.' '염소나 황소 암송아지의 피가 부정한 자를 정결하게 한다면 하믈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
2. 하나님은 원망보다 감사를 헤아리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벽돌 만드는 일이 힘들게 되었을 때 부터였다. 그후로 홍해 앞에서 애급의 군대를 만날 때 까지는 순풍에 돛 단듯이 좋았는데 또 다시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출14:10-11 에서 보는대로 한편으로는 여호와께 부르짖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로 끌어내어 죽이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 홍해를 건넌 후에도 수르광야에서 마라라고 하는 곳에 사흘 길을 물도
마시지 못하고 있다가 또 다시 원망을 하였다.
- 양식을 얻지 못하자 또 다시 원망을 하였다.
- 고기가마 옆에서 살다가 지금은 고기냄새도 잊어버렸다고 원망하였다.
이러한 원망에 대하여 모세는 말하였다. 우리가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원망하느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인생들의 기도를 담으려고 바구니를 들고 세상에 내려왔답니다. 1) 원망의 바구니 2) 감사의 바구니 그런데 한 시간도 안되어서 원망의 바구니는 가득하였다. 그러나 감사의 바구니는 종일토록 다녀도 비어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빈 바구니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조금만 더 ... 하다가 겨우 두어 사람의 감사를 받아 가지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고전 10:10을 보라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은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3. 하나님은 거역하는 것 보다는 순종하는 것을 헤아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출 15:-16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두가지 행하신 시험이 있다. 15장: 율례와 법도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다. 수르광야 마라샘 곁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① 청종하는가? ②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는가? ③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는가? ④ 내 모든 규례를 지켰는가? 만약 순종하면 애급에 내린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심이라.(15:26)
16장: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만나' ... 이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이것을 매 사람마다 한 호멜씩 거두라고 하셨다. 각 사람이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두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한 호멜 = 10 에바. 1에바 = 36:44 리터이므로 약 두되 정도이다. 그러므로 한 호멜은 약 두말 정도의 분량이다.
여리고 북방에 갔을 때에
ⓐ 저는 동료 목사님과 함게 그 지역이 너무나 메마른 것과 식물이라고는 말라 시들어 진 것 같은 한 자 높이의 풀들을 보았을 뿐이다.
ⓑ 다른 것은 시내반도에 많은 식물로 타마리스크 나무 일종의 성류나무로 6,7월 경에 밤에 나와 아침에 굳어지는 누런 진액으로 해만 쬐이면 녹아 내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팔기도 하였다.
성경의 기자가 기록한 것은 자연적인 식물은 아니다.
① 60 만명이 먹을 만나가 내렸다.
② 거둬 들인 만나가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다.
③ 안식일에 먹을 것은 미리 거둬 들였는데도 상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이 만나를 먹었는데 어느 욕심 낳은 사람이 명한대로 거두지 않고 더 많이 거두었다. 그는 그것을 아침까지 두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였다.
16:18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진리는... 그 백성들이 오멜로 되어 보았는데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필요를 따라 채워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어떻게 다 채우겠는가 ?
① 40년 행진에 언제 농사가 가능한가 ?
② 광야 길에 무슨 나무 실과가 있어서 그것을 따겠는가 ?
③ 혹시 저장을 한다고 해도 40 년은 어렵지 않겠는가 ?
④ 더구나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제외하고 장정만 60만명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산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를 준비하셨다.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다. 메추라기는 지금도 비슷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잘 날아가던 메추라기가 갑자기 비가내라고 우박 떨어지듯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의 생각을 아들이 따라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러한 차이를 비교하기를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 하셨다.
1.제사의 횟수나 양을 생각하지 말자.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을 깊이 의지하자.
2. 빠지기 쉬운 원망에 물들지 말자. 감사할 내용을 찾아야 한다.
3.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교묘하게 거역하지 말자.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일 뿐이다. 순종하라.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의 길에 굳게 서는 것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1-6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 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오늘은 종교개혁 47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 날은 마틴 루터가 구 동독지역인 비텐베르그(Wittenberg) 성당에 95개 토론조항을 써 붙임으로서 종교개혁 논쟁에 불을 당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유럽에서 종교개혁운동은 몇 백년 동안 계속된 거대한 운동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9월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달간 머물렀던 트로얀 교수가 자주 언급한 체코의 존 후쓰(John Huss), 그 이전에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가 루터보다 100년 전에 이미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00년 후에 루터에 의해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했고, 그 다음에는 스위스에서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추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교회와 사회의 정화작업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죄로 오염된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신앙, 교회의 구조, 사회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 사회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역사 가운데서 영혼에서부터 사회구조에까지 가장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킨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종교개혁이 중세와 근대를 역사에서 나누는 기점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광범위한 것이어서 제한된 시간에 모두를 다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그 중 하나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주된 관심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True church of Christ)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잘못된 교회이며,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참된 교회의 기준은 그들이 자주 인용한 교회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있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칼빈 자신이 한 말로서 "참된 교회는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두 말이 참된 교회의 기준입니다. 여기에서 첫번째 예수님의 말씀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있겠다"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 참된 교회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란 말입니다. 교회는 그 조직의 거대함이나 직제나 규모에 관계없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렇게나 두 세 사람이 모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그리스도가 임재한 교회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인위적인 요소를 강하게 부정하는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교회란 인간이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단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즉 그리스도가 세우고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곳입니다. 칼빈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할 때는 자연히 당시 교황이라는 인위적인 힘을 갖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교황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교회조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교회 위에 주권을 행사할 그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원칙이 되는 중요한 기준은 "참된 교회란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곳이다"는 칼빈 자신의 말입니다. 이 말은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실제 정통(Orthodox)이란 말도 올바르게(Ortho) 예배드린다(doxa)는 뜻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이 무엇이며 예배드리는 자는 누구이며 예배 받을 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의 대상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례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된다 하니까 정치적 설교나 사회적 설교는 하지 않고 소위 순 복음만, 순 성경이야기만 하는 것을 순수한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염두에 두었던 순수한 말씀은 인위적 요소를 제거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설교자가 인위적 요소를 넣어서도 안되고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설교를 듣겠다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설교자도 설교를 듣는 자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성례전을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례전에 참여하면 자기의 신앙이 없이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우상에 대해 그렇게 많이 반대하고 우상배격에 가장 앞장 선 사람들인데, 그 실체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실 당시 유럽에는 우리 아시아처럼 다른 종교가 없었습니다. 종교라고는 기독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우상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 속에 우상적인 요소가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인위적인 의도를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비록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려도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자, 종교개혁의 참된 뜻은 교회와 신앙에 있어서 모든 인위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위치에 사람이 가 있는 모든 형태는 우상숭배이고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시대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교황에게까지 도전하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독일 나치시대의 히틀러나 구 쏘련의 스탈린은 역사 속에서 신적 권위를 주장한 독재자고 전체주의자였습니다. 그를 섬기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독재자들이 신의 자리에 군림했던 역사적 현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이런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은 순교적 각오로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생각할 때 주로 다른 종교를 섬겨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이해를 많이 압니다만, 실은 인간을 신으로 섬겨서 안된다는 뜻이 그 속에 적지 않게 들어가 있습니다. 실상 오늘 우리는 조직사회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큰 권위를 주장하는 인간적 권위가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대통령, 여당, 직장상사,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복종합니다. 과연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된 권위입니까?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더라도 인위적인 생각을 갖고 나오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목적 이외에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병 고침 받고, 치유받고, 내가 축복받는 목적으로 예배에 나오는 것은 일차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지라도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과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십시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가령 우리 한국교회에서 많이 문제가 된 부분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물질적 축복도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복과 축복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복은 물질적인 축복을 목적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고, 축복은 신실한 신앙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복에는 인위적인 목적이 들어가 있고 축복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원칙은 대단히 중요한데 예를 들면 우리가 기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파는 상품의 질이야 어떻든지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이 중병을 앓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건설하고 성실하게 일한 결과 소비자가 거기에 대한 신뢰를 얻고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을 때는 기업도 성장하지만, 소비자도 무한한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번다는 경제원칙에는 같으나 그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 이 정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에나 교회에도 인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명설교, 부담없는 교회생활, 이런 것들이 출석교회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목회자나 사람을 보고 교회에 온 사람은 사람을 보고 쉽게 신앙을 버립니다. 목회자가 자기의 마음에 안든다거나 그 교회 어떤 교인이 나에게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은 곧 그리스도를 섬긴 결과가 아니라 사람을 의식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도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가 많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일단의 그룹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쉽사리 분리해서 다른 교회를 세웁니다. 우리 마음에 맞는 교회를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두 세사람이 모여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기에는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개혁의 대상이었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띄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과 교회의 삶에 인위적인 때를 벗겨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만들고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그런 교회갱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세기가 낳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계명이 신학과 신앙과 교회의 좌우를 평가하는 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교회 안에서 혹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지 않은지, 인위적인 요소를 따라 우리의 신앙이 따라다니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참된 신앙, 참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참회의 기도
진리의 주 하나님,무지한 가운데 방황하는
주의 백성들의 참회를 받아주시고
바른길로 나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진리 찾아 애를 쓰던 성실함을 잊어버렸나이다.
불의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로 대항하던 용기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는 겸손과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오 하나님, 저희들로 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오백여년 개혁신앙의 맥을 이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참회를 주께 침묵 가운데 드리오니
받아주시고 온전히 용서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들
본문: 출12:12-14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짧은 기간이었고 더구나 3년의 공생애 기간은 전 역사를 통하여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닌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3년의 공생애 기간 중에 하신 일이 무엇인가? 제자를 삼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신 일 외에는 남겨두신 것이 없다. 승천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되고 그들이 비로소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여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었다. 열두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정리하자.
1.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제자의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여러계층의 사람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보통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주님은 제자를 삼으셨다. 주님은 어느 계층이나 어느 종류를 제외하신 흔적이 없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신 생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서 하시지 않은 차별로 어떤 사람을 제외하거나 소외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먼저 모든 성도들이 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감사하고 누구나 다 제자가됨을 교회가 실천하자.
2. 누구나 다 자격이 있으나 받은 달란트는 각각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의 명단은 성경에 네 곳에 (마10장, 막3장, 눅6장, 행1장) 있는데 이 명단은 그냥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가 제일 그룹에 속한 제자이고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가 제 이 그룹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가 마지막 그룹이다. 이것은 달란트에 따라 선택한 예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주님께서는우리를 다 한결같은 사랑과 같은 은혜를 주시지만 소명은 각자의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는 달란트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얼마나 받았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남겼나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3. 누구나 자신을 잘 관리하면 귀한 제자가 된다.
베드로는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고 야고보, 요한도, 도마도 실수가 많은 제자이었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에 변화하여 위대한 초대교회의 인물이 되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처음에는 꼭같은 능력을 준 제자이고 회계의 일까지 보게 했으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주님을 파는자가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가 어디있나? 그것은 자신의 관리이다. 딤후2:21에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된다고 하셨다. 자신을 잘 관리하면 누구나 귀한 쓰임받은 제자가 된다.
광야교회
본 문 : 출 19:16-22, 행 7:37-38
스데반의 설교는 가장 뛰어난 귀납적 설교이며 또한 변증적인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스데반은 그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증명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교회란 그리스도안에서의 서로 관계를 가지는 백성을 말하며 특히 성경은 모든 사람을 불러 내었다는 의미로 에클레시아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의 생활에서 현대교회의 의미를 찾아보자.
1. 광야는 애굽에서 불러내신 곳이며 이것이 곧 교회이다.
교회는 불러 내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선민을 불러 내어 함께 모이게 하신 백성의 집단이다. 이런 의미는 곧 교회의 의미이다. 성경에서 애굽으로 간 사건이 여러번 나오는데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잠시 동안의 피난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신의 장소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재앙이라고 하는 희생과 아픔이 따라야 구원이 있을 수 있으며 문설주의 피는 내가 발라야 하므로 작은 댓가는 지불해야 하며 더구나 400년 이상을 살던 생활터전을 뿌리채 뽑아옮긴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 후에도 홍해의 가로막힘, 고기가 없어 불평함,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하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오는 것이 교회이다. 또한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곧 교회의 참 모습이다.
2. 광야에서의 시험과 축복은 교회의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의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열흘이면 갈 길을 40년씩이나 헤매야 했다. 이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교회도 예수님의 오심을 장구하게 바라보며 기다리는 곳이다. 또한 그곳은 물질의 시험과 불평 때문에 죽는 고통과 전쟁의 어려움과 이성을 토안 시험과 우상 숭배와 갖가지 시험이 있었다. 지금도 교회는 이러한 온갖 시험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기간이었지만 반면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던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은혜를 얻게 했으며(렘 31:2) 갖가지 은혜를 주셨다 (신8:4),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가지 시험이 있으나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받고 나아가는 것이다.
3.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것이 교회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광야로 이끄신 것은 광야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가나안은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이며 아버지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가나안이 없는 광야는 무의미한 곳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나라없이 교회는 무의미 한 것이다. 광야가 애굽과 가나안의 중간지대 이듯이 교회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중간지대이다. 광야에서 출애굽한 일세대는 다 세상을 떠나고 이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 교회는 다시 태어난 거듭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출33:17-19, 엡2:1-10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놀라운 경험은 구원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꿰뚫어 흐르는 물줄기는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한 바울의 이같은 경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자를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살게 된 것, 즉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구원함을 받게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에서 바울의 구원론의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강력히 주장된 "오직 은혜"와 "오직믿음" 이란 사상입니다. 칼빈 선생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은혜"라는 것이 강조된 것 같고, 루터 선생님은 "오로지 믿음"이란 것을 더 강조한 것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 방편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믿음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 편에서의 유일한 조건은 "오로지 은혜"이고, 인간 편에서의 유일한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엡2:8절 하반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구원의 조건은 결국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는 칼빈의 구원론에서 있어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는 칼빈의 신학 사상중에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과 함께 칼빈 신학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칼빈의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에는 칼빈의 인간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칼빈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고, 따라서 부패한 인간들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으며, 온갖 오물과 악취의 노걸이 되었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란 황폐한 페허가 되어 있을 뿐이며 부끄럽고 서글픈 모습뿐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 볼품없는 인간을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령과 단절됨으로 인간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인간 이해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혀 소망이 없는 부패해 버린 것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해 버린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인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뿐입니다.
# 바울의 구원론과 인간론
이같은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생명이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엡2:1)
<바울의 인간 이해>
(1) 허물과 죄로 죽었다.(1절)
(2) 세상 풍속을 좇으며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다.(2절)
(3)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마음대로 살았다.
(4) 그리하여 진노의 자녀로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2) 우리를 어떻게 살리셨는가? 긍휼의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3)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조금도 효력을 발생 못합니다. 이점이 칼빈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확실한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총애" - "하나님의 호의"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구체적인 것은 그 아들의 속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주신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은혜는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구원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경험을 사도 바울 만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처음에 말씀드린바 대로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경험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함을 알게 된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은혜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에,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1) 바울 사도는 구원 얻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인간적인)을 했는지 모릅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만 행하는 인간의 죄된 현실만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탄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2) 그러나 바울은 이같은 인간의 부패에 대한 좌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에서 또 다른 인간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절망을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철저한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인간의 공로가 조금도 행세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니고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도무지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을 이 은혜 때문에 산 사람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큰 것이기 때문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칠 줄 모르고 모든 교회에 전했습니다. 그 분의 서신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니라"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났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지 않고 복음을 위해 내 던질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상이 칼빈 선생에게 가서 새롭게 발견되었고, 칼빈의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 상실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부패는 인간의 공로를 구원의 실현으로서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업적이,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리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옛날처럼 살 수 없습니다.
① 허물과 죄된 상태에 그대로 살 수 없습니다.
② 세상의 풍속을 좇으며 사탄의 지배하에 살 수 없습니다.
③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④ 진노의 자식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2)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감격으로, 은혜에 감격해서 살뿐입니다. 이 것이 은혜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는 성숙한 삶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본문 : 츨20:16
본문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말로 짓는 죄에 대하여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용어해설>
* 거짓 : 1)비진리(출20:16, 샤펠)
2)성실하지 못한 말, 천박한(신5:20, 쇼아)
1. 거짓말이란 어떤 것인가?
구약에서는 진리이신 예수님과 대조되는 사단적인 "비진리"(출20:16)를 가리킵니다.(요8:44) 신명기에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말이 진실되지 못하거나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하게 될 경우를 말합니다 (신5:20) 신약은 중상, 모략, 참소를 말하며 모독, 훼방(엡4:31)과 개가 뒤에서 무는 `잡아먹다'(고후12:20)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이 죄의 실제적인 면은 중상모략을 한다던가, 거짓말, 거짓증거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도이세벨, 바리새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거짓 증거로 재앙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거짓으로 맹세 한다던가(슥8:7), 과장하는 것(골2:18)도 거짓말이요, 마땅히 말을 해야 할 경우에 침묵하는 것도 거짓 증거입니다.(삼상19:4,5) 그리고 아첨이 이에 속합니다.(시12:3)
2. 왜 거짓 증거합니까?
먼저 전리의 영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요1서4:6) 이런 일에 경각심이 없어 무의식 중에 행할 수 있습니다.(시116:11) 그리고 인간의 허영, 두려움, 이기심으로 인해 거짓을 말하며 특히 배후에 사다느이 조정으로 악의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행5:3)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마19:8)
3. 거짓말의 결과
거짓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잠6:16-19) 이런 자들은 갑자기 패망한다고 했습니다.(잠12:19) 더우기 아나니아는 즉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행5:5) 계시록에는 이들을 향해 영원한 멸망이 예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계21:8) 이 거짓말을 당한자는 경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삼하16:1) 그런데 주님때문에 모함을 받는 경우에는 오히려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기 때문입니다.(시31:20)
4. 거짓 증인이 되지 않으려면
먼저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맙시다.(약1:19) 참된 말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엡4:15) 이 일을 위해 성령충만을 받읍시다 (행1:8).
<결론>
우리는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안하기 위해 회개하고 찬송합시다. 이 입술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시다.
약속있는 첫 계명
본문 : 출20:1-12
오늘은 광복 48주년을 맞는 해방 기념일입니다. 이날은 어떤 면에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날입니다. 국가적인 업신 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켜 이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해야 되겠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는 예배요, 인간과의 관계는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오늘은 두번째 돌판에 있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용어해설>
* 부모(12) : 족장, 지도자, 스승, 왕(삼상24:11), 선지자(왕하2:12, 딛1:4), 고용주(왕하5:13), 연로한 자(딤전5:1,2)
* 공경하다(12) : 무겁다, 존귀하다, 영광스럽다(간장 : 인체의 50분의 1)
* 잘됨(엡6:4) : 영, 육(요3서2절)
1. 공경의 대상
부모란 웨스터민스터 대요리 문답이 정의한대로 나를 낳아주신 친 부모를 포함, 연장자, 은사,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기록이 된 교회 성원, 국가의 권위를 다 포함합니다.
2. 공경의 방법
부모를 공경하여야 할 조건은 무조건으로 그의 업적이나, 인격에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경이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 부모를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룻1:16,17) 무엇보다도 이삭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잠6:20 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하시는 일을 수용하고 격려하며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골3:20) 또 부모가 물려준 유산이 있다면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왕상21:4) 특히 레갑의 부모들이 주신 것처럼 바른 정신적 계훈(렘35:6,7)이나 디모데에게 준 믿음의 유산(딤후1:5)을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형제간에는 우애하며(시133:1), 세상의 삶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창28:14)
3. 공경의 결과
그렇다면 5계명을 줏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먼저 사회와 국가의 기초가 되는 가가정을 중요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사상이 있고(12절) 이를 잘 지키는 자에겐 땅에서 잘되는(요3서2) 형통과 건강의 복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창6:9)
<결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라(시128:1-4).
복되고 거룩한 날
본문 : 출20:8-11
<용어해설>
* 안식일(8) : 휴식, 평화, 행복
* 거룩(8) : 구별, 성별, 약혼(안식일은 신부로 상징된다)
* 기억(8) : 단순한 memory가 아닌 rememberance임(눅22:19, 고전11:24)
1. 안식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이요 귀한 선물이 "안식"입니다. (출16:29) 유대 백성들은 1주에 1번씩 안식할 뿐 아니라 유월절, 나팔절, 대속죄일도 먼저 안식으로 시작하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7년에 1번씩 안식년으로 1년 쉬게 하였고, 7년에 7번을 지낸 다음해인 제50년째를 희년이라 하여 다시 1년간을 안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천국은 바로 슬픔뿐인 인생에게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으로 예비하신 곳입니다.(계14:13)
2.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날에는 먼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8절) 여기서 "기억"이란 말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사건이 나와 직접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되는 날에 쉬신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5:15)
출애굽을 통하여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예수님의 피로 죽음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의 노예에서 해방받은 제사장 나라요, 택하신 족속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출애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가나안이 보장되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히 이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날로 교회가 창설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지킴으로 죄용서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거룩이란 말은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신부로 이스라엘은 신랑으로 "약혼"을 하여 정성을 쏟는 날입니다. 이런 성별을 위해 이 날엔 일하지 않았습니다.(10절) 이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라는 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데 안식일에 떡을 떼는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20:7-예배임) 성도와 교제하고 봉사하는 일로 생명을 위해서 일하는 날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엿새동안 힘써 충성하여 이 안식일이 의미있게 해야합니다. (9절) 그럴때 여호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58:14) 그러나 이 안식일을 짓밟을때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대하36:21)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을 통하여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참 쉼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주신 목적
본문 : 출2:18-24
오늘부터 십계명을 강해합니다. 이 시간은 서론으로, 십계명을 주신 이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용어해설>
* 인도하여 낸(2) : 계명을 주시는 이의 권위(율법 수어자의 자격)
* 여호와(2) :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하나님의 유실성)
*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20) : 계명의 소극적인 목적
* 복을 주리라(24) : 계명이 적극적인 목적(신10:13)
1. 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1,2절)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명을 주시기 전 먼저 그가 누구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아버지가 되심을 설명하십니다(고후6:18). 자식에 대한 아버지는 낳으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에게 남편이십니다(사54:5). 남편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며(숙2:8) 사랑하며(아2:10) 비밀이 없는 것입니다 (사25:14). 그는 결혼 예물로 우리에게 왕국을 하사하셨습니다(눅12:32). 그리고 그 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에서 구속하신 것입니다.
2. 언제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지 만2개월만에 시내산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하신 후에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세상에서(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 지켜야 할
도덕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나 반 율법주의나 모두 율법의 목적을 모르고 무지한 것입니다(롬3:20)
3. 계명을 주신 목적
계명을 주신 목적은 범죄치 않게 하고(20절) 복을 주시기위해서입니다(24절) 이는 우리의 참된 행복과(신10:13) , 번성(출20:6) , 참된 자유함(악1:25)과 영혼의 소생(시19:7), 그리고 영적 분별(시19:8)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4. 현대에 주는 의미
이 십계명이 오늘 우리에게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법을 완전케 하려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다(마:517-19) 그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은 구체적으로 성경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법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마24:12)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동기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명심하고 이 사랑에 사로 잡혀 다윗과 바울처럼 계명을 사랑합시다(시119:97, 롬7:22)
치료하시는 여호와
본문 : 출 15:22-27
공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인간에게 무공해요, 참 행복과 만족을 줄 수 있을까요? 본문이 이 사실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용어해설>
* 물(22) : 생명의 근원(렘 2:13, 요 4:14, 암 8:11)
* 마라(23) : 쓰다, 쓰게하다
* 12,70(27) : 은전, 풍성, 완전의 상징적 의미(12지파, 12제자, 70장로, 70전도대)
1. 시험받는 이스라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깨달으면 받드시 "광야 훈련소"에 입영하게 됩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여정은 구원의 체험이요, 훈련이며, 영적 싸움이며 승리의 기업입니다. 시험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기억시키기 위한 것이 있습니다. 400년동안 애굽에서 우상에 익숙해 있었을때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깨닫도록 시험을 준것입니다(호 6:3상).
두번째는 시험을 통해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창22:12).
그래서 주신 것이 출애굽의 승리의 노래가 끝나자 마자 3일간 물한모금 얻지 못하고 헤메다가 겨우 "마라"에서 물을 만났는데 먹을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라"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과 위선, 해를 끼치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마 23:13-29). 우리가 제 사명을 감당치 못할때 마라의 쓴물을 만날수 있습니다.
2. 치료하시는 여호와
쓴물이 단물이 되며, 마라가 엘림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사람 모세는 "마라"를 극복하기 위해 첫번째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25절). 모세는 간절히 기도한 후 마라의 쓴물에 나무가지를 던지라는 명령에 이유없이 순종했습니다(25절) 기적을 일으키는데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26절). 우리는 여호와의 말을청종합시다. 그의 의를 행합시다. 계명에 귀를 기울입시다. 규례를 지킵시다. 이것이 치료의 첩경입니다.
그리고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25절의 "한 나무"의 의미입니다. 이 나무는 생명나무(창 3:24), 쉬는 나무(창 18:4), 이삭의 번제나무(창 22:6), 번제 단위의 나무(레 1:7,8,12), 십자가의 나무(신 21:23, 갈 3:13)와 같은 뜻으로 쓰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치료 하실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마라"가 있습니다. 주의 십자가의 밑으로 나아와 "여화와 라파!"의 치유의 손길을 만납시다(말 4:2). 그리고 우리가 치료를 나누어 주는 치유의 전달자가 되십시다(마16).
기도의 정의
(출애굽기 17:8-13)
들어가는 말
몇년전 유명한 설교가 죠웨트박사(Dr.Jowett)가 '열 사람에게 설교하기를 가르치기보다 한 사람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기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 봅시다.
辭典을 들추어 보면 기도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 상호 교통을 위해 행해지는 것'
2)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
3) `인간의 욕구와 언제나 그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행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의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 론// 성경에서 찾아 볼수 있는 기도의 정의
1.영혼의 호흡(呼吸)입니다.
(살전5:17) 기도해 대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신다.
(엡6:18절)에서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숨을 쉬듯 기도는 쉼이 없이 시간마다 때를 가릴 것 없이 계속되는 호흡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바쁜 때에도 숨쉬는 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음식을 먹거나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에도 호흡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영혼도 예외는 아닙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생명이 끝나듯 기도 없는 영혼은 죽은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느혜미야는 자기의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상하자 당시 바벨론왕 아닥사스다가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때 느혜미야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느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라는 하였습니다. 왕의 명이 떨어졌는데 기도할 줄 아는 느헤미야는 정말 기도를 호흡처럼 여긴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할 때 기도 생활이 여의치 못한 사람은 영혼의 천식증에 걸렸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 <기도론> 강해를 배우면서 이런 병들이 깨끗이 해결되는 은혜의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메뚜기를 잡아서 머리를 물 속에 집어 넣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리를 집어 넣으면 얼마 안가서 죽습니다. 왜냐하면 메뚜기는 허리에 숨을 쉬는 기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기도 없는 영혼 역시 죽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과의 대화(對話)입니다.
기도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라는 말은 듣는 이와 대답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듣는 이도 없고 대답하는 이도 없다면 그것은 독백이든지 아니면 정신나간 사람의 헛소리나 우스갯거리 밖에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들으시는 분과 응답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사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삼하22: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라는 것은 응답을 원합니다.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느냐에 대하여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향료(香料)입니다.
기도의 정의 가운데 독특한 부분입니다.
(계5:8)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계8:3)"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祈禱를 향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은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필요성 여부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차원에까지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4. 선한 싸움의 무기(武器)입니다.
(출17:8-13)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졌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 무기인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결국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은 군대의 힘이나 전략 때문이 아니라 기도 능력으로 이긴것입니다. 기도는 무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화>// 두 어린이가 이상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중학생 하나가 호기심을 갖고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한번 만져보자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얼른 장난감을 움켜쥐더니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중학생은 약간 억양을 높이면서 억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도 완강히 버딥니
다. 그러자 위협을 주면서까지 그 장난감을 보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것을 안 빼앗기려는 듯 더욱 힘있게 쥐었고 중학생은 기어이 보아야 되겠다고 손을 엽니다. 그러자 어린아이는 '아빠- '하고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중학생은 겁이 났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왜 그러니'하고 대답합니다. 중학생은 얼른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빠'라는 부름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듯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찾을 때 우리를 위협하던 모든 것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선한 싸움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징계를 받는 고난 중이었지만 여호와께 부르짖을때,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고성능 최신식 무기입니다. 말세에 날뛰는 악마의 세력을 무서워만 하지
말고 기도의 무기를 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5.만능의 열쇠(Key)입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자물쇠와 열쇠의 세트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물쇠는 12개인데 열쇠는 13개였습니다. 특별히 열쇠 중 하나가 돋보이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목사님이 그 열쇠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설명인즉 한 열쇠로 한 자물쇠를 열 수가 있지만 이 한 열쇠는 주인열쇠로 12개의 자물쇠를 다 열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 <Master Key>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도 <만능열쇠// 마스타 키>가 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인생의 만능열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제약이 없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미자립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형편이 어려워서 도시 교회의 보조를 받기는 했으나 이것으로도 가정생활을 제대로 할 수 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했습니다. 밥 한끼와 밀가루 음식 한끼로 하루를 살고 추운 겨울에도 제대로 불을 때지 못했습니다. 심방을 다니면서도 궁상스럽게 돈 걱정만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하룻밤을 새우며 해산 비용을 달라고 하나님께
졸랐답니다. 그 당시의 화폐가치로 3만원만 있으면 미역국이라도 제대로 해 줄 것 같아 3만원만 달라고 밤 10시부터 새벽기도회까지 눈물까지 흘리며 기도합니다. 유별나게 추운 겨울밤 온기 없는 교회당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목사님중 한 분이 오는 중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셨는데 성탄절 특별예배 설교를 부탁하러 일부러 그 시골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기로 하고 가서 설교했더니 교통비라고 봉투를 건네줍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3만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아울러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기쁨이 함께 어우러진 눈물이었습니다. 정말 만능의 열쇠는 기도입니다.
맺는 말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하나님과의 대화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이요 선한 싸움의무기며 동시에 만능의 열쇠입니다. 만사에 해(害)됨이 없고 유익한 것이 기도이니 기도하기가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루실솔렌버거가 `기도는 인류에게 본능적인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생명적인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도가 필요 없으리만큼 위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우리는 쉬임 없이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본문 : 출20:1-13
현대는 그 어느때 보다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생명의료윤리에 대한 바른 해답은 6계명에서 얻어야 될 줄 압니다. 이제 몇가지로 나누어서 오늘 본문의 의미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용어해설>
* 살인하지 말지니라(13) :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살인(능동강조, 미완료 명령형으로써 영원히 살인해서는 안된다는 뜻)
1. 본 계명에 해당되지 않는 살인
세상에는 죽이는 일들이 많지만 모두 다 이 계명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먼저 대량 살상이 일어나는 전쟁들은 모두 다 이 계명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 공의를 목적으로 한 살상전쟁은 살인이 아닙니다.(시20:16,17) 물론 김일성, 후세인, 히틀러 등의 침탈행위는 살인입니다. 또 정당방위는 살인으로 취하지 않습니다.(출
22:2) 더욱이 오늘 많은 경우 사형을 폐지론을 주장하거나 또 시행하는 나라도 있지만 합법적 사형은 살인이 아닙니다.(창9:6)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자의 죄는 그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면에서 동물과 사람을 같은 차원에서 해석
해선 안됩니다. 동물 살생을 살인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창9:3)
2. 본 계명에 해당되는 살인
그렇다면 본 계명에 해당되는 살인이 무엇일까요? 직접적으로 살인 한 것, 즉 자살과 타살이 여기에 해당됩니다.(고전6:19,20) 두번째는 우리가 소홀히 하기 쉬운 간접적인 살인이 해당됩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지적처럼 걱정, 분노, 의심이란 세가지 살인 요소를 우리가 나와 남에 대하여 품을때 간접 살인입니다.(마5:21,22 요1서3:15)
3. 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길
하나님은 인간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특히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안다면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품어야 합니다.(요13:34,35) 이를 위해 성령충만을 사모합시다.(살5:22,23) 이런 시기, 질투, 살인, 분노를 물리치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사랑이 없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저주와 미움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비극을 극복하고 성령이 약동하고 화평과 평안에 우리 속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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