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성경주석-마태복음2

주거시엔셩 2016. 2. 10. 16:47

성 경: [마15: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그때에(*, 토테) - 마태가 즐겨쓰던(약 90회) 표현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주는 연결사의 기능을 하는 말이다(2:7 참조).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장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종교 회의로부터 갈릴리로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목적은 예수의 소문에 대한 실체를 조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모해(謀害) 하려고 하는 목적을 띠고 그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유대 교권주의자들과 예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날로 더해가도 있었으며 예수의 공생애 후반기로 가면서 이러한 갈등은 격렬한 신학 논쟁(神學論爭)을 통해서 더욱 더 첨예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파견은 예수에 대한 예루살렘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히 모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마15: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장로들의 유전 - 여기서 먼저 '장로들'(*, 톤 프레스뷔테론)이란 문자적으로는 연세가 많은 어른들을 일컫지만 구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에 능통한 자나 랍비 등의 종교 지도자를 가릴킬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들은 율법 해석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일르의 해석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러한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존중되었다. 여기서 '유전'(*, 파라도시스)이란 '넘겨주다', '전해주다'는 뜻의 원어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상적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행위법(行爲法)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법은 '장로들의 육전'이란 말 외에 '사람의 유전'(막 7:8; 골 2:8), '너희의 유전'(15:3)', '조상들의 유전'(갈 1:14)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모세에게 말로 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바벧론 포로 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集成)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다(Rabbi Judah the Prince C. A. D. 135-200).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내용상 (1) 율법의 세부 규정을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2)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격인 '게마라'(보완이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면에서는 (1)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2) 각종 이야기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본래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벧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 특히 매우 미미(微微)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장로들의 유전은 외형상 별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다는 점과, 율법의 목적과 그 정신을 저버리고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을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결과적 으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점에서 장로들의 유전은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비록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대전제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유대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더 자세한 이해는 막 7장 강해 '탈무드의 이해'를 참조하라.
?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 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에 대한 신학적 농쟁이 계기가 된 말이다. 식사 때에 손을 씻는 예법(禮法)은 먼지가 많은 팔레스틴의 풍토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풍속에 의해 위생(衛生)적 필요에서 마련 되었다. 또 한편은 이방인들과의 모든 접촉, 예를 들어 길이나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스치거나 이방인의 물건에 무의식적으로 닿는 일 따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에 의시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야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응 효과적인 정결 의식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술하고 있는 '손'(hands)에 관한 행위법을 다룬 책자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만일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다. 그런데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에 붓는다면 그 손이 불결하나 1/4통 이상의 물을 더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마15: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어찌하여...범하느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들의 유전과의 근본적인 권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계기로 삼아 여호와 신앙의 정수(essence)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율법을 인위적으로 해석한 유전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율법의 의식보다는 그 정신을 더욱 더 중요시하시는 것이다. 실로 유전의 형식을 어기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을 어기는 일은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범하느뇨'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바이네테'(*)는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바다'는 뜻의 '바이노'(*)의 합성어로서의 정도(政道)를 벗어나 '곁길로 빗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벗어나 곁길로 가게하는 오류(誤謬)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렬한 질책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15: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 본절과 평행구인 막 7:10에는 '모세가 말하기를'로 기술되었다. 이런 차이는 계명의 원계시자와 그 계시의 전수자를 상호 교호적(交互的)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즉 계명은 그것을 전수받고 기록한 기자(記者)의 말인 동시에 그 기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한 것이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훼방하는 자는 - 이는 출 20:12에 기록된 율법의 제 5계명과 출 21:17에 기록된 제 5계명의 실천적 법규이다. 예수께서 특별히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신 이유는 손을 씻지 않는 일이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모를 거짓으로 공경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약점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하셨기때문이다. 사실 제 5계명은 대인(對人) 계명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2)로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보다 더 중한 계명이다. 한편 훼방하는 자에 해당하는 '카콜로게오'(*)는 '욕하다', '악의로 말하다', '비난하다'등의 뜻으로 결국 부모를 훼방하는 자란 자신의 부모의 은혜와 권위를 무시하고 나쁘게 말하거나, 저주하는(curses)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패역(悖逆)한 자들은 예외없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잘못을 보상해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것(레 24:16)과 더불어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극한 형벌을 당하는 두 가지 죄 가운데 하나이다(레 20:9).

성 경: [마15: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내가 드려...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 유대인들의 서약의 한 형식으로 부모를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뜻이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 크시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는 면제가 된다. 막 7:11에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제물)을 가리키는 말 이었다. 그러나 이 봉헌의 맹세는 후대로 가면서 차차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다. 즉 사람이 만일 고르반이라는 말을 써서 맹세한 경우 가령 그 가리켜 맹세한 것이 부모의 부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취하(取下)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고르반' 맹세 후 그 맹세한 것의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다. 진정 이는 출 20:12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違背)되는 것이다.

성 경: [마15: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하나님의 맡씀을 폐하도다 - 여기서 먼저 '폐하는도다'(*, 에퀴로사테)는 말은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로서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3절의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죄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조상의 유전을 절대시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인 것이다.

성 경: [마15: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외식하는 자들아 -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불렀던 첫 번째 기록이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 휘포크리테스)란 원래 '대답자'란 뜻이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배우'란 의미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자신의 본모습과 겉모습이 다른 위선자란 의미이다(6:2). 한편 예수께서는 특별히 의식에 대해 단호히 책망하셨는데 이는 당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외식이며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외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소극적 의미의 외식 : 이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대개 선조들의 유전이나 인습 등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종교적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江水)같은 기름 보다도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더 기쁘게 하는 것" 임을(미 6:7,8)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2) 적극적 의미에서의 외식 : 이는 자신의 행위가 외식인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旣得權) 수호나 기타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사나 규례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와 밀착되면서부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종교적 허울 만을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수호하기에 급급하였다.
? 이사야가...잘 예언하였도다 - 예수께서 70인역(LXX)에 따른 사 29:13을 다순히 기계적으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묘사를 나타내기 위해 단지 4행(行)만을 선별하여 축약 인용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형식주의 종교로 잔락(轉落)시켰다. 바로 이러한 점에 예수를 성경의 증거를 들어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왜 이 말씀을 인용하셨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사야 당시나 예수 시대나 경고를 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이었다. (2) 그들은 예루살렘(종교 중심지)에서 왔다. (3) 그들은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적 종교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4)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은 실제로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사야가 예리하게 비판을 하였던 위선과 가증한 것에 얽매인 조상들의 정신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마15: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 이는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二聿背反的)인 신앙 형태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신앙 형태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간교한 위선. (2) 율법의 근본 정신이자 원목적인 진정한 회개와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만을 지키고서는 마치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형식적인 위선 등이 그것이다.

성 경: [마15: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계명'에 해당하는 '엔탈마타'(*)는 종교 생활의 실천적 규칙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계명'이란 인간 자신의 방법에 의해 즉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발상애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롤 무시한 채 아무리 외형이 화려한 경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헛될 뿐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히브리 성경의 원의미는 '그들이 나를 경외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혹은 기계적으로 배운 사람의 계명에 의한 것이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여기서 '헛되이(*, 마텐)란 '열매가 없는', '아무런 목적이 없이'란 뜻으로 그릇된 목표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처음부터 목표가 없었던 것과 같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외식적 경배 행위는 종교적, 윤리적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허무한 경배일 뿐이다(말 1:6-10).

성 경: [마15:1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 예수께 질문하러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에 대한 존경과 계층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그의 파격적(破格的)인 말씀에 의해 당황하고 있는 무리들을 가까이 불러 더이상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말에 미혹되지 않도록 종교와 윤리의 본질, 즉 내적 정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성 경: [마15:1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입에 들어가는 것...입에서 나오는 그것 - 입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의미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을 통해 밖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정서(情緖)와 사상을 가리킨다(17-20절). 이러한 측면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불결함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의의릍 가질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형(형식)적인 불결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부도덕한 언행과 인격 등 영적인 요인으로 그 해독은 오히려 아주 치명적인 것이다.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더럽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 '코이노이'(*)는 '저속하게 하다', '품위를 떨어뜨리다'(makes common)란 의미로 부정하다고 취급된 음식을 구분해둔 레위 제사법에서 유래한 종교적 용어이다. 한편 저속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계는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이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것'으로 번역됨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레위 제사법상 부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발생하는 더럽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음식 자체가 지닌 더러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어기는 불순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음식은 인간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청결는 무관하다(딤전 4:3, 15). 실로 인간의 부정은 오직 인간의 불순종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에 연유하지 않는다. 한편 11절의 말씀은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야기(惹起)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행 10:9-16:11;롬 14:13;고전 8:10).

성 경: [마15:1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께 말씀을 드린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크계 화가 났음을 보여준다. 즉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제자들 역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었으므로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렇게까지 분노케 한 예수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시 듣고 싶어 한 것 같다.
? 바리새인들이...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 공동 번역에는 그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십니까?"로 번역하여 분노한 종교 지도자들의 상태를 더욱 생동감(生動感)있게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한 예수의 말씀을 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터뜨리고 실족하여 진리의 대적자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진리를 말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1)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자신에 대한 배반감으로 인해서 생성된 분노, (2) 자신의 판단이 거짓이었으며 불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거부하고 진리를 말한 사람을 오히려 이단(異端)시하는 태도에서 오는 분노로서, 이러한 왜곡된 모습은 진리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오히려 두려워하고 외면하려는 마음에서 나타난다.

성 경: [마15:1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심은 것 - 이스라엘 민족은 종종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심으신 식물(植物) 혹은 물댄 동산(사 58:11), 하나님의 밭 혹은 토지(고전 3:9), 하나님의 포도원(사 5:7)으로 생각하여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을 나무로 묘사하곤 했는데(사 5:1-7) 특별히 포도나무로서 비유되었다(시 80:8). 어떠한 상징이든지 중요한 것은 심기운 것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심은 이가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 위선자들의 종말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따른 모든 그릇된 교리는 근절되어 버릴 것을 시사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암시적으로 말씀하셨다(3:9;8:11,12). 따라서 그들은 악한 자가 심은 가라지(13:25, 39)와 같이 절망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당신의 말쏨을 왜곡, 변조(變造)시킨 그들을 자신이 심으신 식물로서 인정치 아니하신다(사 41:19;요 15:2). 한편 모든 거짓 식물은 대심판의 날에 의인의 자리에서 내어 쫓겨 최종적인 파멸을 당할 것이다(13:19, 40).

성 경: [마15:1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그냥 두어라(*, 아페테 아우투스) - 직역하면 '그들을 가게하다'(let them go), '포기하다', '버려두다'는 말로, 13:30의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이는 지대한 사랑의 관심에서가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에서의 유기(遺棄,abandonment)를 뜻한다. 더욱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태도로서 결국 그러한 자들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게 된다.
?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 - 이는 그 당시 널리 알려진 속담적 경구(警句)였던 것 같다(23:16;요 9:39). 이와 유사한 헬라 속담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가르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여기서 진리를 분간치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일컬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영적 소경이라 할 수 있다. (1) 율법의 문자와 그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문자적인 해석에 매어 달려 일평생 살아 간다. (2)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러 오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그를 대적했다. 따라서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녔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眼目)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거짓의 길과 파멸의 길로 나아 갈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영적 무지(靈的無知)는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요 지도자라고 하는 데에 결정적이며 비극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 죽음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의(義)와 진리(眞理)로서 받아 들이는 백성들까지도 위험한 인도자요 멸망케 하는 자들이다. 영생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만이 그리고 그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망이 안전한 인도자에 해당한다.
? 구덩이(*, 보뒤논) - 들짐승을 잡기 위해 들판에 파놓은 웅덩이와 같은 함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하트'(*)와 동일한 의미이다. 따라서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불신케 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함께 파멸당할 운명이 되게 하는 것이며 지옥 불을 던져지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성 경: [마15:1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 비유를 - 가장 충동적이며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께 11절 말씀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햇다. 여기서 '비유'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말', '불가사의한 말'이란 뜻이다.
?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 즉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계명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데에 익숙한 일반 백성들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가르침을 비난한 예수의 말씀을 즉시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수수께끼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께서 지나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시거나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깊은 전통과 반(反)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부터 젖어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영(靈)적인 것과 의식(儀式)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15:1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 제자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분의 이적과 교훈과 행동들을 직접 보고 확인했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해 바리새인은 걸림이 되어 분노하였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눈 먼 장님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 순교 때까지도 완전한 영적 진리의 지식(知識)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신 후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의 사람들이 된다(요 14:26).

성 경: [마15:1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 예수는 영적 둔감(鈍感)상태에 놓인 제자들을 향해 유치하리만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은 배로 들어가서 소화 작용을 거친 후 결국 배설되어 버리므로 사람의 마음(인격)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마가는 모든 식물이 그 식물 자체로만 볼 때 깨끗하다고 기록하였다(막 17:19). 그렇다고 하면 이 말이 식물에 관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율법의 폐기(abolition)를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진정 더러운 것이 무엇이며 깨끗한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면서 율법과는 다른 수준에 서서 말씀하고 계셨다'(Banks). 초대 교회는 특히 음식물에 관한 유대의 율법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였으나(행 10:9-16), 본문에서의 예수의 행동 즉 형식에 사로 잡힌 유대인의 식사 예법을 질책하신 것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까다로운 음식 규례를 폐지하는 것이 점차 보편적 동의를 얻었으며, 이 본문의 교훈이 기존의 유대 율법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길잡이가 되었다.

성 경: [마15:1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근원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들은 그것이 비록 무형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고 결국 멸망에로 이끄는 것이다.
? 마음에서 - 마음은 인간이 지닌 지(知) . 정(情) . 의(意)의 핵심적 좌소(座所)로서 인간은 바로 이것이 있기에 비지성적이고 무책임한 짐승과는 구별된다(롬 9:2;10:6, 8;고전 4:5).

성 경: [마15:1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악한 생각의 목록(list)은 본문에서는 6가지로, 막 7:21, 22에서는 12가지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십계명의 후반의 계명들을(제 6-9 계명) 예로 들었는데 이는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은 쉽게 지키면서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함을 빗대어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 악한 생각 - 문자적으로는 '나쁜 의견' '불건전한 대화'를 의미하는 말로, 살인(제 6계명), 간음과 음란(제 7계명) 도적질(제 8계명), 거짓 증거(제 9계명), 그리고 신성 모독의 죄에 해당하는 훼방(12:31) 등의 죄를 짓게 하는 근본 요소가 된다(5:21-48).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피력한 바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전제하예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7:11).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적 순수만을 추구하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궁극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구약을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하시는 데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참된 종교는 인간의 본질(本質)을 다루어야지 외형적인 것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다.

성 경: [마15:2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예수께서 외면(外面)보다 내면(內面)을 그리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강조하신 것은 본문에서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8절;5:28;12:34). 예수께서는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으나(마 5:17),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극도의 매너리즘(mannerism)과 위선에 빠져 있었기 때문애 율법의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내면적인 죄악보다는 늘 외형적인 더러움만을 씻어 내려고 하는 일에 급급(汲汲)해 있었다. 이것이 새롭게 변화받지 못한 인격들이 지니는 한계이다.

성 경: [마15:2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거기서 나가사 -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리 전도 사역은(4:12-15:20) 이제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0-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한편 막 7: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이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Bengel)하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따히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성 경: [마15:2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 '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 가나안 여자 하나가 - 막 7: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민 13:29;삿 1:30, 32, 33)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야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2세기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 '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 그 지경에서 나와서 -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여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집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Lohmeyer, Bonnard).
? 주 다윗의 자손이여 - 여인이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주'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야적 칭호((:27;12:23)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체적인 불구자들(9:27)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아보고 순종(順從)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단지 예수의 자비한 성품(性品)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채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 여기서 '흉악히'에 해딩히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아마 주위로 부터 질병과 귀신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마15:2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뮨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가지 경우이다(요 8:6). 본문의 경우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24절)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요 4:22-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5-4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데 (1)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挫折)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 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 경: [마15:2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 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도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고 하였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요 10:16;행 1:8).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겔 34:6) 유래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되신 예수를(요 10:11)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성 경: [마15:2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無視)와 냉대(冷待)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2:2; 8:2) 예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 프로세퀴네이)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써 그녀가 예수의 발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짖음'의 뜻인 '보에'(*)와 '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 더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15:2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자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排他的)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였다(호 1:9, 10).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에게였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롬 2:9, 10),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民族)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롭 3:1, 2;9:1,2).
?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개'(*, 퀴온)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출 11:7;삿 7:5;마 7:6;빌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59:6). 그러나 예수께서 사용하신 '개'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는 사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나 '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성 경: [마15:2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but even) '마는...도'(*, 카이 가르)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submission)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改進)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다(삼상 24:14;왕하 8 :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卑下)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삼하 9:8;16:9).
? 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근방의 지역들에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 으로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參預)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입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tasker, Schlatter). 실로 그녀는 자신에게 적용된 비유를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割愛)된 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Pulit Commentary)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헤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열방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다(롬 3:29).

성 경: [마15:2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 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trust), 확신(confidence)과 아울러 겸손(modesty)과 인내(patience)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選民論)을 암시하고 있다(행 7:6).
? 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 호스 델레이스)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難關)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마15:2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막 7:31은 예수가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 있는 시돈으로 가선 다음에 다시 헤롯의 통치 영역의 밖, 즉 갈릴리 호수 남동 쪽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정(旅程)은 예수께서 사악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관할 지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까지 유대 지경이 아닌 이방인의 땅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곳에서의 병고침과 4천명의 급식(supply of food) 사건은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부스러기, 즉 한정된 축복 밖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예수께서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과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시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 이는 산상수훈의 장면(5:1)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자로서의 여독(餘毒)으로 인해 잠시 휴식 하셨다. 그러나 이 휴식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동적(動的)인 휴식이었다. 즉 본 기사를 영적으로 살필 때,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예수는 모든 자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 찾아오시는 자를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한다.

성 경: [마15:3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막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사설 그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 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자를 가리킨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예수의 발앞에 두매 - '두다'라고 하는 헬라어 '마토'(*)는 사람이나 무거은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 놓는다고 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더구나 '두다'의 미완료형 '엘마산'(*)은 병든 사람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15:3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벙어리가 말하고...소경이 보는 것 - 마태는 이사야가 언급했던(사 35:5, 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 9:1, 2)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현재 예수께서 머물러 계신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잘 지나 다니지 않는 곳인 이방 땅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점과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을 통해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이방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 이방인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의 권능은 바알세불 등의 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5:3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 5천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반(反)해서 여기서는 예수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
? 내가...불쌍히 여기노라 - 이번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준다. 즉 예수는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 '심장'이란 뜻의 '스프랑크논'(*)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 실로 바로 이 예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14:14;눅 7:13).
?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 '함께 있다'라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로, 행 11: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해 있는 무리들은 그들이 비록 예수를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는 참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病)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 이미 사흘이매 - 이는 예수의 병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듸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팔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헬라어 성경에서 쓰인 '메포테'(*)는 '혹시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으로, 조건문을 이끄는 종속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예수께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한편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한다.

성 경: [마15:3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어디서...떡을 얻으리이까 - 제자들의 이 물음이 필요한 양의 떡을 공급하는 일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 달린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요 6:7)라는 오천 명 먹일 때와 같은 식의 계산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배부름을 예상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오천 명의 급식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R. C. H. Lenski). 반면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히 무지하고 불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다(D.A. Carson, William Handriksen). 그중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즉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5:3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예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可能性)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생겨난 것이다.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 일곱 개 - 이 '일곱' 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적 측면에서보다 그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증시키는 것이 좋다.
? 작은 생선(*, 잎뒤디온)- 이 말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적어도 하찮은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금은 과소평가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성 경: [마15:3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땅에 앉게 하시고 - 이 때의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14:19에서 푸른 잔디(막 6:39)에 앉게 하셨을 때의 계절이 우기(雨基)가 막 지나고 유월절이 가까와 오는 봄이었다면 이방 땅에서의 전도 여행을 끝맺음하려는 이때는 유월절이 훨씬 지난 건조기의 여름에 해당한다.

성 경: [마15:3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축사하시고(*, 유카리스테사스) -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화(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습관처럼 드렸다(14:19).

성 경: [마15:3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배불리 먹고 - 같은 동사 '코타조'(*)가 5장의 산상수훈(山相羞訓)에도 나온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6). 이 동사는 주로 '만족을 채우다'라는 의미로, 각 사람들이 각자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 광주리 - 유대인들이 여행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인 바구니(코피노스 ;14:20) 와는 달리 광주리 '스퓌리스'(*)는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이다. 어떤 것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것도 있었다고 한다(행 9:25). 따라서 본문의 남은 떡 조각은 5,000명 급식 때보다 더 많은 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롤린슨(Rawlinson)에 의하면 최소한 유대인들도 정결한 음식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코피노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광주리'라고 하는 표현도 이무리들이 역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성 경: [마15:3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사천 명이었더라 - 이는 예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구(未九)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준다. 향편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 사방 (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4,000(4×1,000)이란 영으로 세게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전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게하고도 남을 만큼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15:3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프로스메노;32절) 사람들을 이제 '풀어 보내시다'(*, 아폴뤼오)는 의미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 보낸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다. 예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사실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1)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이나 전토(田土),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christian)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그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Christ follower)이기 때문이다. (2)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릍 그들의 임금으로 옹위(擁衛)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던 것이다. (3) 더욱이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갔고 혼히 이들은 이방 교회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 마가단 지경 - 막 8:10에는 '달마누다지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의 어떤 사본(바질 사본, 오전시스 사본)에는 '막달라 지경'으로(KJV에도 이를 따름) 나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틴 벌게잇 역(Vulgate)에는 '마게단'(Magedan)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하튼 '마가단'의 이름의 뜻은 '망대'로 그 위치는 불명확하나 아마도 디베랴의 북쪽5km 지점의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에 있었던 성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 경: [마16: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 이들은 종교, 정치, 사회적인 사상 및 의식면에서 서로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띠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온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이 어떻게 그들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연합할 수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시 2:2). 특히 본문 '호이 파리사이오이 카이 사두카이오이',(*)로서 두 집단을 지칭하는데 관사(*, 호이)가 하나만 사용되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2:28-45과 1-20등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비교적 객관적 자세로 예수의 능력이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들과 사상 및 이념, 주의, 주장이 전혀 다른 사두개인들과 연향하여서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더 깊어지고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 예수를 시험하여 - '시험하여'의 헬라어 '페이라조'(*)는 '조사하다', '입증하다', '유혹하다'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 광야에서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4:1). 그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좀 더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1) 처음부터 자기들의 기존 신앙 체계만 고집하는 선입관을 가졌던 동시에 (2) 예수를 무조건 음해(陰害)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하늘로서 오는 표적 - 그 당시 랍비들은 지상에서 연출되는 각종 이적들은 사단과 그 수하의 졸개들에 의해서도 능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대신 하늘로부터 전해진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에게 모세의 때에 내려졌던 만나 사건(출 16장;요 6:32)이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인해 허와 달이 멈춰졌던 사건(수 10:12-14), 사무엘 시대의 우뢰 사건(삼상 7:10) 및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사건(왕상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이다(chrysostom). 이러한 요구에 응할 때에만 그들은 예수의 신적(神的) 진정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속깊은 저의는 그러한 이적의 유무(有無)와는 관게없이 어떻게든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눅 16:31). 따라서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과연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야인지 당신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표적'(*, 세메이온)이란 '표시', '이적' 등의 뜻으로서 결정적이고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12:38에서도 예수께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었다, 그러나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다(고전 1:22,23).
? 청하니(*, 에페로테산) - 이 말의 원형 '에페로타오'(*)는 요청하다는 뜻외에 '심문하다', '갈망하다'는 뜻도 있다. 더욱이 이 '에페로타오'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어떤 중요한 판단을 위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근거로 삼을 자료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심문하듯 예수를 다그쳤던 것이다.

성 경: [마16: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대답하여 가라사대 -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2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And he sighed deepiy in his spirit, and saith, KJV)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하고도 편협한 질문의 저의(底意)를 깨달으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 탄식하신 것을 가리킨다.
?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 이처럼 저녁 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 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변화들을 통해 때의 징조를 예측했다고 한다(Virgil, Pliny). 그리고 심지어 랍비들은 기상의 변화에 따른 각종 생활의 지혜를 교육했으며, 신년(新年)에는 그 해의 강우량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연계의 제현상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성 경: [마16: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흐리면(*, 스튀그나존) - 이 말은 주로 침울한 감정이 얼굴로 표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10:22). 그런데 가끔 분위기나 기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매우 짙은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둠침침한 상태를 나타낸다.
? 날이 궂겠다 - 이를 표현한 원어 '케이몬'(*)은 단순히 찌푸린 날씨가 아닌 폭풍우치는 날씨를 Emt한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날씨의 궂은 정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궂은 날씨가 어김없이 찾아들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다.
?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 '천기'(* ... ,토 프로소폰 투 우라누)란 '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the face of the heaven)을 의미한다.
? 시대의 표적(*, 세메이아 톤 카이론) - 여기서 시대를 뜻하는 '카이론'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초림 내지는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관한 비밀한 정보들을 여러가지 표적들(signs)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때에 대한 긴박한 선포(막 1:15),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마지막 주간의 도래(단 9:1-27장), 유대 전방에 걸친 메시야 도래에 대한 기대감 고조(눅 2:26, 38), 예수께서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증거하고 이적을 베푸신 사실(12:8,32;13:37;24:30;눅 17:22-35) 등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만한 중요한 표적들을 제시하셨다. 한편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후자는 그 이면에 신적(神的) 목적이 있는 영적 차원의 현상을 가리킨다. 특히 후자, 즉 표적이란 성육신하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새시대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6: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동의어를 반복하여 강도의 뜻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음란자라는 말이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점에 착안하여 악하다는 말은 각 개인의 심성이 츙악하고 추하게 타락된 상태를 가리키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런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충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Watchman Nee).
? 표적을 구하나 - 표적을 구한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러 기회에 순전한, 즉 공정하고 진실한 심령을 가진 자들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각종 표적을 때에 맞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즉 이미 그 마음에 순결성을 상실하고 편견과 독단에 의하여 진리를 통찰할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 이미 충분한 표적과 가르침이 주어졌음에도 악한 의도로 표적만 계속 구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 요나의 표적 박에는...없느니라 - 표적을 보여 달라는 자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구체적 표적을 당장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례다고 표적을 안 보여 주신 것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표적을 안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 즉 요나처럼 자신도 3일동안 죽으셨다 살아날 것을 강력히 암시한 것으로서(욘 1:17) 분명 결정적 표적을 제시하신 것인데, 다만 그것이 미래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간에 예수의 이 대답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 표적은 예수께서 어려움에 직면하실 때마다 제시하신 것으로서(12:38-40;요 2:18-22),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부활의 확실한 증표가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주어질 심판의 전조(前兆)가 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주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을 언급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들어줄 경우 잘못된 그들의 비신앙적 욕구와 호기심을 들어 주는 것이 되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과 사역을 행하시는 뜻, 즉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되심과 당신이 전하신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다는 뜻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2) 스스로 죄의 길에 서서 마음의 눈을 닫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표적은 그들의 비신앙적인 욕구와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채워주는 표적이 아니라 그듸의 인습적 관념을 극적으로 깨뜨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줄 결정적 표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 저희를 떠나 가시다 -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제의 단절은 1차적으로는 인간 관계의 단절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 교훈의 기회의 박탈이라는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어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끝내 거절할 때에는 3년 밖에 안 되는 공생애의 특수성을 고려하시어 곧 그들을 떠나시곤 했다.

성 경: [마16: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건너편으로 갈새 - '마가단' 지경(15:39)의 반대편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13절) 가기 위해 '벳새다'가 있는(막 8:22) 갈릴리 호수 북동편으로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15:39;16:13). 이에 제자들만 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더불어 동행하셨다(6절).
?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가단에서 황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 당시 마가단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긴장 상태가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제자들의 수중에는 배 안에 있었던 오래된 한덩이 떡만 있었을 뿐이었다(막 8:14).

성 경: [마16: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 누룩(malt)란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그 음식물을발효시키는 효소이다. 즉 누룩이 들어가면 음식물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 성경은 이점에 착안하여 주로 나쁜 관점에서 타인에게 강한 정신적 전염을 시키는 것을 누룩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5;레 2:11;고전 5:6-9;갈 5:9). 여기서 누룩은 율법과 계명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일반 백성을 인습적으로 오도(misleading)하는 당시 교권주의 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12절). 한편 본문에서 누룩이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에게 걸린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이란 측면에서 한 통속(通俗)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다각의 특징상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과 외적 시식에만 치중하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성(性)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모세 오경 외의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특히 사단의 실체와 부활 교리를 부인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함으로써 철저히 현실 지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부류의 누룩은 시대를 초월하여 극단의 보수와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실로 참 신앙인은 이 두 양극 우(愚)를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과 끝임없는 자기 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확립해가야 한다. 한편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5에는 '사두개인' 대신 '헤롯'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위(優位)를 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헤롯당원으로 활용했던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 경: [마16: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사실을 알 수 있다. (1) 예수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의 어리석음 (2)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적 교훈을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셔서 깨달았다는 것(8-11절) 등이다.
?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 지금 영의 눈이 어두워진 재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친 교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빚어진 현상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반적인 떡의 모양과 크기는 둥글며 지름이 약 15cm, 두께가 약 1.5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보통 밀기울을 빻은 소맥분(小麥分)으로 만들어졌으나(삿 6:19;삼상 28:24;왕하 4:41), 때로는 보리 가루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민 5:15;여하 2:10;요 6:9). 한편 이는 6절의 예수의 영적 교훈을 이 땅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아직 이들이 예수의 참 정체, 즉 예수께서 신적 메시야이시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에 연이어 일어난 것임을 고려할 때 예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는 아직도 심각한 상태이며, 더 나아가 예수께서 영원과 절대의 구원 문제에까지 권능과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는 이 당시 제자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많음을 발견한다. 즉 예수께 영원한 절대적 구원이 아닌 이 땅의 빵과 권력의 축복만 요구하는 기복(圻福)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를 재현시키고 있다.

성 경: [마16: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서 '아시고'(*, 그누스)는 체험적 앎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대화를 전해 듣거나 였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시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끔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다(6:30;8:26;14:31). 이는 '믿음이 없는'(17:17)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그들이 예수의 인격과 신분을 믿긴 믿되 그분의 능력 또는 역사(役事)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14:31) 잊고서 생각치 않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Clarke).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온전하고도 전적인 믿음을 바라고 계신다(히 11:6).
?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의 물질 중심의 사고를 질타(叱咤)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니도록 인도하시려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진리를 조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히 11:1,2).

성 경: [마16:9]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이성적 깨달음 또는 지적 인지(認知, perception)를 가리킨다. 이는 곧 제자들이 예수께서 베푸신 교훈과 각종 이적을 접하고서도 아직 이성적 지식으로 완전히 수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말이다(15:16). 이는 곧 이적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전인적인 지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진정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없이는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요 14:26).
? 몇 바구니 - 여기 '바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여행자들이 지니고 다녔던 조그마한 손바구니를 가리킨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적 급식(給食) 사건(14:13-21) 뒤에 제자들이 그 남은 떡 조각을 거둬들일 때 사용했던 용기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광주리'(10절)란 말과 대조되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이 본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두 이적이었음을 확연히 보여준다.

성 경: [마16:10]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몇 광주리 - '광주리'에 해당하는 원어 '스퓌리스'(*)는 장년(壯年)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릴 수 있을 만큼의 큰 바구니이다(15:37;행 9:25). 이는 9절에서 말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칠병이어 사건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15:32-38).
? 기억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제자들을 질책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기억'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 과거의 이적적 체험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예수의 두 이적 사건 흘러간 과거의 일로 간과해버렸지 그것을 산 경험, 산 지식으로 수용하여 현실 성활에 재현, 재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기적 사건들을 대대 후손에게 전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종교 교육을 시행했었다(신 7:18,19;32:7;대상16:12,13:시 77:11;78:4,11;105:5, 6;106:7,13,21).

성 경: [마16:1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어찌 내 말한 것...깨닫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거듭해서 제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지를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미 주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인위적인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훈'을 질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예수와 그가 베푸신 이적을 믿지 않는 바로 그러한 불신앙적 태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들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이적들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두 급식 사건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다시 기억토록 촉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6:1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그제야 제자들이...깨달으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가들에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하나 설명하며 진리를 깨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당신이 주신 계시를 그들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영적 훈련을 통해 성슥한 제자로 자라게 하셨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 이는 위로부터 내려온 참계시와는 반대되는 인본주의적 교훈을 가리킨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들로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義)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인 무지와 전인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만든다(눅 12:1). 이에 비해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시 권위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 세계 및 귀신의 실재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이었다(행 23:8). 특히 그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언행이 불일치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제사장 계급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교묘한 합리주의적 교훈을 통해 백성들을 미혹했다(6절).

성 경: [마16:1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견해]
? 가이사랴 빌립보 -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방,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와는 구별된다(행 10:1). 따라서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나 갈릴리 호수 북방 약40km 지점, 헬몬산 기슭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조그마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 확장되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가이사랴'라 하였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이곳 주민들은 데부분이 이방인으로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중 원주민들은 바알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野獸)의 신(神)인 '판'(pan)의 산당을 지었으며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의하여 이곳에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러한 우상의 땅에서 예수 제자들에게 당신이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도 무리들을 위해 봉사하시기도 했지만(17:14;막 8:34) 주된 사역은 12제자에게 국한되었다.
? 물어 가라사대(*, 에로타) - 여기 헬라어 '에로타'는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묻기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건을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끼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핵심적 사항을 문답식으로 교육시키셨다. 그 첫째 질문이 예수 자신, 곧 인자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같은 질문에 앞서 먼저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앞 일을 의탁하시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9:18). 실로 중요한 시점이 이를 때마다 예수는 이처럼 마음을 하늘로 향하시었다.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이를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를 인자로 부르는 이, 사람들은 나를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이다. 이에 비해 마가와 누가는 '인자'란 용어를 생략하고 있다(막 8:27;눅 9:18). 여기서 어느 형태의 질문이 본래의 것인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신 것과, 이 칭호로서 예수 자신의 칭호로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서의 형태가 원형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아마 마가와 누가는 이방 출신 독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이 칭호를 삭제하고, '나'라는 1인칭 칭호만을 쓴 것 같다. 한편 여기서 인자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때 즐겨 표현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 81번, 공산 복음서에만 69번 나오는이, 단 두번의 경우(눅 24:7;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라 표현하신 데에는 (1)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을 가지신(요 5:26), 즉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완전한 사람이심을 암시한다. (2) 예수께서 단 7:13, 14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예시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메시야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키 위해 오신 이심을 암시한다(21절;20: 18, 19,28). 더 자세한 내용은 눅 5:24의 강해 '인자의 개념'을 참조하라. 여하튼 예수께서 하신 이 질문은 당신의 생대를 마감하시면서 당신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던진 신앙 고백적이며, 종말론적인 물음이다. 실로 이 물음은 예수를 믿든 믿지않든 호흡이 있는 인격들이면 예시없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담은 곧 그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16:1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유대인들의 예수의 대한 견해]
? 더러는 - 백성들이 '인자'이신 예수께 대하여 온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비록 대부분이 다시 오기로 약소된 예언자적 인물이나 메시야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이해하고는 있었었만 아무도 예수의 메시야성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이하를 살펴보면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가 '예수께 호의적이다'라는 사실을 보고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인상을 준다. 그 예로 그들은 예수를 소의 '바알세불' 또는 죄인의 친구(11:19)라는 일부 극단적인 견해들은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레 요한 - 하나님을 위해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과 능력(눅 1:17, 80)으로 일한 자이며 그의 메시지가 예수의 천국 선교 메시지와 거의 일치했던(4:17) 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분봉왕 헤롯 빌립처럼(14: 1, 2) 예수의 능력과 행하신 역사를 보고 과거 세례 요한의 능력과 복음 전파의 폭발적인 영을 기억한 데에서 기인(起因)되었다. 이것은 또한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부활 신앙관에서도 비롯되었다(14:2).
? 엘리야 - 구약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백성들의 타락과 종교적 불의를 꾸짖었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왕상 19:10), 말라기에서 바로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이 그분의 선구자로서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되었다(말 4:5, 6). 특히 그는 죽음을 경험치 않고 승친(昇天)했기 때문에(왕하 1:11) 이러한 기대는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11:14). 한편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오해한 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보지 못한 비신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 예레미야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며(렘 9:1;14: 17;31:16;애 1:2, 16) 애쓴 선지자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지으셨던 예수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눅 19:41). 또한 예레미야의 죽음과 연관된 유대인의 후기 전승 및 구약 외경 마카비 하(下) 2:1-12;15:14, 15 등에 의하면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신구자로 와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저희를 다시 긍휼로 받으시기까지 장막, 언약궤, 분향단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할 자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카미그낙(J. Carmignac) 같은 학자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예수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 예언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예레미야와 같은 비운(悲運)의 선지자로 보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 선지자 중의 하나 - 이 말은 그 당시 종말론적 기대들이 매우고조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모세(신 18:15), 이사야(에스드라하 2:18), 에스라(에스드라하 14:9)처럼 다시 부활하여 일련의 종말을 예비하는 큰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행구인 눅 9:19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위의 분위기를 더욱 확중적으로 제시해 주고있다.

성 경: [마16:1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는 헬라어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 이(*)로서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이다. 이는 분명 예수께서 앞의 견해들(14절)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정확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너희는'( , 휘메이스)은 2인칭 복수 형태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한 두 제자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12제자들 각자에게 관심을 두시고 강조하여 질문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신앙의 주관성과 구원의 개별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겔 18:20). 베드로의 고백은(16절) '너희'라는 복수 인칭으로 질문하신 예수의 물음에 대해 자신을 위시한 12세자 모두를 대신한 예언적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성 경: [마16:1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시몬 베드로 - 사실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 나서는 등의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千金)갈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어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게속 실패했으나(23절;17:4, 5;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며(행 2:14;3:3-7;4:8;8:14)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신조(信條)의 핵심을 이른다. 이 고백 가운데에 예수의 인성('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 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 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여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20:28;눅 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29:29;30:30;삼상 16:13;26:11;왕상 19:16;시 89:20;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1;눅 1:32, 33;행 3:22, 23;히 4:15;5:6,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야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살아계신'(*, 토 조온)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 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의 신성(神仙)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요 7:28, 29;8:18,19)이요, 하나님과 하나되신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점(요 5:17,18;10:29,30 33)등을 나타낸다.

성 경: [마16:1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바요나 시몬아 - 여기서 '바'(*, 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뜻하며, '요나'(*)는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로 히브리어 '요하나'(*, John, 요한으로도 부름, 요 1:42)의 축소형이며, '비둘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을 부르신 것, 즉 새 이름인 '베드로'(요 1:42)라 부르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실로 그의 천연적인 신분인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 등과 같은 탁월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사용하신 것이다.
? 네가 복이 있도다 - 신약성경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한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의 정도를 뛰어 넘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이다. 한편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이는 바로 뒤이어지는 말 앞에 축복의 이유를 밝히는 '호티'(*, 왜냐하면, for)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여기서 '알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계시하다', '보여주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실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의 산물(産物)로서의 영적지각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온건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 혈육(*, 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 이를 직역하면 '육신과 피'를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본성적인 재능, 지식, 지혜 등을 뜻한다(갈 1:16;엡 6:12;히 2:14). 베드로의 이러한 천연성으로서는 도무지 영적 진리를 간과(看過)할 수 없어 것이다. 즉 타락한 이성, 거듭나지 못한 분별력으로는 복음의 비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 이는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의 대구이자 그가 말한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신 것이다. 여하튼 영적 진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적 능력의 소지자에게 한정적(限定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고전 2:11-14).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야말로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성 및 그 각 위의 상호 교호적(interaction)인 인격성 그리고 각 위(位) 사이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내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셨다(11:27;20:23:26:39, 42).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신분 강조키 위해 '하늘이 계신'이란 말로 수식하고 있다(5:34).

성 경: [마16:1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니(*, 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 하면 '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 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다McNel).
?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요 1:42; 고전 15:5;갈 1:18)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4:18).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요 1:42),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 내가 이 반석(盤石) 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 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 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엡 2:29;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16-19절 강해 '베드로의 신앙고백 해석'부분을 참조하라.
?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여클레시아'(*, the church of me)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창 2:20-25;엡 5:22-32).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 ...로부터)와 '칼레오'(*, 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요 1:16,19). 한편 70인역(LXX)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Munchen),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된 무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졌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 연합된 회중이란 뜻)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 조차도 구약에 연유된 것이다(룻 4:11;삼하 7:13;시 28:5;118:22;렘 1:10;암 9:11). 이와 관련해서 래드(G. E. Ladd)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이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야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은연(隱然)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중요점이 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이 땅에 오시고, 신앙 고백되어진 메시야의 백성이 된다.비록 당시 쿰란 공동체가 스스로를 언약 백성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오직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에클레시아라 말씀하신다, 정녕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써 확립된 새 언약의 백성만이 그의 에클레시아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26:28). 이와 더불어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교회'와 그의 '나라'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Hill). 이 두 단어는 서로 상이한 개념, 즉 전자는 '백성', 후자는 '지배', '통치'의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닌다(13:28-30, 36-43).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를 완전히 구별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Walvoord). 왜냐하면 메시야의 통치는 메시야의 백성을 불러내어 구분하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메시야에 의해 세워지고, 그 백성은 바로 그곳에 모이게 된다. 또한 예수의 에클레시아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최종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에 나타난 전초 기지이다. 실로 그 나라가 최종 완성될 때 메시야의 백성은 그 나라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메시야가 친히 세우신 교회를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세우리니(*, 오이코도메소) - 헬라어 원문에서는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백의 실체 위에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암시한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원을 가진다. (1) 근원적인 기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는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헤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이루어졌다(엡 1:3-6).(2) 역사적 기원. 그리스도의 예언(8절)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신약 교회가 성립되었다(행 2:2-4;4:32). 구약에 이미 '교회'라 불리우는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가 있었지만(행 7:38) 이는 장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예표(豫表)였고, 실제는 주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들 위에 임하신 오순절 때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하여 새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셨다(행 2:1-4;4:32;고전 12:13).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여기에서 '음부'란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지하 세계, '죽은 자의 거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히브리어로 선인과 악인이 구분없이 들어가는 '죽은 자의 영역'이란 뜻의 '스올'(*)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어둡고 소외된 장소로서 매우 높고 단단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처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한 번 받아들이면 다시는 내어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권세'(*, 퓔라이)란 문자적으로 '대문'이란 뜻이다. '음부의 권세'란 '음부의 문'(gate of Hades)이라는 의미로서, 음부로 들어가는 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 및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정경(욥 17:16;38:17;시 9:13;107:18;사 38:10)이나, 유대인의 외경에서(솔로몬의 지혜서 16:13;마카비 3서 5:51;솔로몬 시가서 16:2), 또는 이방 문서에서도(Homer, Iliad 9. 312;Odyssey 11. 277; a Schylus Agam 1291;Euripedes Hecuba 1) 자주 나타나는데, 쓰일 때마다 이 말은 사망과 임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RSV는 본문의 구절을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기지 못하리라'를 나타내는 '카티스퀴수'(*)은 '대항하여 힘을 겨루다'는 뜻의 '카티스퀴오'(*)의 직설법 미래 3인칭 형태로서 결국 죽음의 세력이 교회의 한 부분도 이길 수 없거나, 비록 잠시 이긴다 하더라도 곧 패망하여 영원히 굴복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暗示)를 제공하고 있다. 실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육체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정복자로서(롬 6:9;계 1:18) 군림하시기 때문이다(Alford).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생존하셔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保證)이 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속성의 영원한 지지자(支持者)가 되신다(고전 15:50-58).

성 경: [마16:19]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 (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Wycliffe, Hendriksen).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행 2:14)과 이방인들(행 10:1-11;15:7, 14)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28:18-20).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혜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4:23)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행 2:14-39;3:11-26;4:11, 12:8:20-23)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행 2:45),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18절).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행 8:21;고전 5:1-13).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18:17;딛 3:10)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8:12).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 땅에서...매면 히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처럼 대치되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용어 사용법에 의하면 '매다'(*, 데세스)란 '금지하다' 또는 '금지하여 불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풀다'(*, 뤼세스)란 '허락하다' 또는 '허락하여 합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 용어를 어떤 행동의 규율을 부가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대치되는 두 용어를 응용해 유대인들은, 인도적이고 자유스러운 힐렐(Hillel) 학파의 랍비들과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샴마이(Schammai)학파의 랍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首長權)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比準)될 것이라는 견해이다(Josephus).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salvation historical primacy)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여지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예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權懲) 일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고전 5:1-13;고후 13:10;딛 2:15;3:10 ,11). 더욱 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6:20]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이에(*, 토테). - '그리고 나서', 그 때에'(then)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 제자들을 경계하사...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요 6:14, 15).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야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로마)의 압제(壓制)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요 12:34;행 1:6).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웅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막 3:12).

성 경: [마16:2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첫번째 수난 예고]
? 이때로부터 -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한편 이 표현은 여러 학자들(Lohmeyer, Stonehouse, kingsber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4:17)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17:12, 22, 23;20:19;26:12) 제자들로 하여금 '그 때'를 준비하게 하셨다.
? 예루살램에 올라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증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엄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예루살렘에 욜라 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한 바였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26:54;눅 24:26, 46). 즉 예수께서는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등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것이었다(막 10:45;요 1:29;고후 5:21).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2:4). 그런데 마태가 특별히 이들 각각을 여기에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장로들'이란 유대의 열두제자들 가운데에서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왕상 2:35)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고, '서기관들'이란 '율법사'(22:35;눈 7:30;10:25;11:45, 46, 52) 또는 '교법사'(눅 5:17; 행 5:34)로 불리우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Nosgen).
?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만약 성경의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 삼 일에'란 '사흘반에'(막 8:31)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24×3)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Hendriksen)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비로소(*, 에릍사토) -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局面)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마16:2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질책받은 베드로]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붙들고'(*, 프로스라보메노스)란 '프로스'(*, 옆으로 )와 '람바노'(*, 손에 취하다 , 사로잡다 )의 합성어의 중간태 분사로서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Syriac Sinaitic)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靜的)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간하여'(*, 에피티마오)란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rebuke)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訓育)한 사실을 보여준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히레오스 소이 퀴리에) - 본문은 헬라어 '히레오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히레오스'를 '호의를 가진', '자비로운', '은혜로운' 등으로 보아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Gracious to you, Lord)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히레오스'가 히브키어 '하릴라'(*, 결코...않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는 70인역(LXX)에서 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누구와 맞서는 상황에서 '결코'(never),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를 인류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사 53장)으로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이다(Wycliffe). 결국 베드로의 이 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속 사역의 참의미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혈기방자한 인간의 감정을 내세울 때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 이 일이 결코...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우메 에스타이 소이 투토) - 이틀 직역하면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this never shall be to you)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의 발생을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단호한 부정의 의지를 피력(披瀝)한 것이다.

성 경: [마16:2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질책받는 베드로]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 혹자는(B.F.Meyer) 이를 '예수께서 베드로를 외면하시며(등을 돌리시며)'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문맥 전개상 조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기 위해 그를 향해 돌아서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갈은 세 가지의 호된 비난을 하신다.
?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 이 명령은 예수께서 사단과 직접 대면(對面)하셨을 때 이미 하신 바 있다(4:10). 한편 이는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단에게 이용받은 도구, 즉 사단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살아있는 생물, 특히 사람들을 매개체(媒介體)로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창 3:1-5;요 13:27;행 5:3;계 12:9). 한편 이 꾸짖음은 단순히 사단의 도구가 된 베드로가 예수의 시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헛된 생각이 예수가 추구하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 되므로 그 길에서 즉시 제거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제자란 따르는 존재이지 주의뜻을 거스리고, 이끄는 자가 아닌 것이다(막 1:17, 20;8:34).
?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스칸다론 무 에이) - 이를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방해물)이다'(you are an offense to me) 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를 결코 넘어뜨리게 할 수는 없으나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조금전만해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셨다. 그러나 사단의 도구로 전락(轉落)한 지금 그를 다른 종류의 '반석', 곧 장애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벧전 2:8). 마치 사단이 예수에게 고난없는 영광과 왕권을 제공하려 했던 것처럼 메시야가 승리자요 정복자로 오실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지닌 채 이제 사단과 똑같은 방해 요소로 등장하고만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오해함으로써 예수에게 넘어지는 자가 되었던 그 고난의 메시야 개념은 예수의 부활 후에는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전 1:23).
?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21절)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다(Chrysostom).

성 경: [마16:2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 좇을 것이니라(*,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성 경: [마16:2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여기서 '목숨'(*, 프쉬케)이란 '영혼'(soul), '생명' 등을 의미한다. 이는 목숨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및 인격의 중심 또는 그 사람의 자아까지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갖고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거나(히 2:15) 인격적 자아, 곧 지성, 감정, 의지 등을 고수(固守) 보존함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위배되는 일로서 종말에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말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10:39).
?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면 그는 오히려 종말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의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정녕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 참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 역설적 진리가 가능한 것이다(요 11:25, 26;15:1-7). 예수의 참제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 생명을 단호히 버릴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한편 본문예서 '찾으리라'는 말은 '구원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는다'는 말보다 더욱 완전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다. 즉 이 '구원'은 뜻밖의 구원을 의미한다(외경 지혜서 5:2).

성 경: [마16:2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 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왕상 18:21;히 11:25).

성 경: [마16:2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재림 예고]
? 인자가...오리니 -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24절;10:24, 25) 장차 있을 당신의 재림과 심판을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도록 다시 한 번 고무(鼓舞)시키셨다. 한편 여기서 예수와 더불어 오게 될 천사들은 예수의 사자(使者)들이며 종말적 추수 때에 심판의 대행자들(agents)로서 수종들 것이다(13:41;24:31;25:31, 32).
? 아버지의 영관으로(*, 엔 테 독세투 파트로스,아투루) - 이를 직역하면 '그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실 때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24절)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초월적 특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진 것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것에 대한 확실한 중거이다.
?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 여기에서 '행한'(*, 프랖시스)은 '행한 일(행 19:18), '기능', '활동'(롬 12:4)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진 직임을 온전히 수행했는지(눅 12:47, 48;고전 3:12-14;계 20:13)에 관한 평가가 근거가 되는 실천적 삶을 일컫는다. 한편 비록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할지라도(엡 2:8) 각 개인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서 현세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9). 즉 예수께서는 형벌과 더불어 행위에 따른 적절한 상급을 주실 터인데, 이는 각 사람의 일한 대로 주어지는 차등적(差等的)이며 조건적인 것이다(고전 3:8;딤후 4:6-8;계 22:12).

성 경: [마16:2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재림 예고]
?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 본문은 인자, 곧 예수의 오심과 그분이 지닌 왕권의 실재성을 강조한 것으로(Wycliffe) 임박한 예수 자신의 수난과 또한 각 제자들의 수난의 현장에서도 결코 두려움 없이 제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여겨져 왔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석이 다양하다. (1) 막 9:1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말할 때 이미 도래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C.H. Dodd). 그러나 이것은 '보다'는 말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견해이다. 더욱이 마태는 마가의 표현인 완료분사(*, 엘레뤼뒤이안, '이미 왔다')와는 달리 현재분사(*, 에르코메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 해석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2) 부활 사건 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Calvin, Grotius).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나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죽기 전에 설명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문맥상으로 충분치 못하다. (3)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Gaechter, Clarke, Westein). 그러나 바로 앞절(27절)이 예수의 졔림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4)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Allen). 그러나 예수의 선교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마28:20), '여기 섰는 자들'이 죽기 전에 그 선교적 사역이 완수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급하다. (5) 얼마 후에 있을 변화산 사건을 예고한 것이라 본다(Bengel, Chrysostom, Hilary). 그러나 이 사건이 불과 얼마 후에 일어날 것이라면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진지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나 '여기 섰는 자들중 죽기 전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터무니 없다. 더욱이 변화산상에서의 3제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과 본문의 공개적 가르침과는 문맥상 일치를 이룰 수 없다(17:9). 이상의 견해들 보다 (6) 본문을 좀더 일반적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갈다. 즉 본문은 부활, 오순절 등의 특수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 후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나타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것이다. 그 예로 제자들의 급증과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거기 섰던 자들'중 다수는 예수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되는 것과 개종자들을 풍성히 거두어 들이는 수확의 현장을(9:37,38) 목격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공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유연성(flexibility. 3:2;10:23;12:28)과 본문의 문맥에 잘 어울린다. 한편 본문에서 '그 왕권을 가지고'(*, 엔 테 바실레이아 아우투)란 직역하면 '그의 왕국으로'가 된다. 이 말은 결국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왕국에 속한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특별히 '왕국'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라는 말이 '왕국', '나라'라는 뜻 외에 '왕권', '왕의 통치' 등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해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실 것을 강조한 말이라 볼 수 있다(Hendriksen). 이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고, 또한 오순절 성령을 통해 각 심령들에 영원히 임재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늘 우편에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친히 다스려가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해 가고 계신다(엡 1:19-23;빌 2:9;벧전 1:3;계 12:10).

성 경: [마17:1]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 따로(*, 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 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벨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벨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벨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성 경: [마17:4]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 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 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 경: [마17:6]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성 경: [마17:7]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 10: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성 경: [마17:10]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엘리야와 세례 요한]
? 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 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7:12]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엘리야와 세례 요한]
?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 1:9-11)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임의로'(*,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성 경: [마17:15]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귀신 들린 아이 치유]
? 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막 9:17).
?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 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 심히 고생하여(*, 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성 경: [마17:16]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귀신들린 아이 치유]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 경: [마17:20]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믿음의 능력]
?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떤 사본은 '아피스토스'(*, 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리고피스토스'(*, 믿음이 부족함, 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믿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닌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도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 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성 경: [마17:22]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두번째 수난 예고]
?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현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24절;막 9:30).
?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눅 24:6).

성 경: [마17:23]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두 번째 수난 예고]
?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하셨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16-22).

성 경: [마17:24]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성전세(聖殿稅) 납부 문제]
?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
? 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벨론 포로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 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성 경: [마17:27]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성전세(聖殿稅) 납부 문제]
?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 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 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 한 세겔(*, 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한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성 경: [마18: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 경: [마18: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다.

성 경: [마18: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는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성 경: [마18: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실족케 한 자의 화(禍)]
? 네 손...찍어 내버리라 - 여기서 '손' 이나 '발'은 문자 그대로의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5:29).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해당 부위를 즉각 찍어 내버리면 우리의 신체 중 지금까진 남아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손과 발은 유혹의 도구, 수단 및 그 죄악의 실천적 기능에 불과한 것일 뿐 죄의 원인과 동기와 그 근원은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찍어 버리라고 하는 이 경고의 말씀은 악한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씀이며, 이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고 무자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씀이다.
? 영원한 불 - 9절에 의하면, '지옥 불' 이다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 몰렉에게 자기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던 곳으로 (대하 28:3;33:6),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불결한 곳, 부정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왕하 23:10). 그러나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은 사 66:24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다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묵시 문학의 등장으로 '지옥'이라는 개념이 차차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신약의 가르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헨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8:12, 바깥 어두운 데 ;13:50, 풀무 불 등).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 즉 임박한 세계 종말종과 심판 사상에 충만해 있던 예수는 이러한 사상을 사람들에게 고취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곧 실현하기 위해 진리와 공의로써 행동하게 하였다. 한편 지옥에 관한 여러 표상들, 예컨데 '영영한 불', '바깥 어두운데' 등은 지옥에 대한 상징과 비유로서, 죄를 지은 영혼이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성 경: [마18:1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생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18:1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18:1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성 경: [마18:1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망)은 이 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마18:1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이 아니라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렝코'(*)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성 경: [마18:1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듣지 않거든(*,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 세리처럼 되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성 경: [마18:1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가 '어떤 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오'(*)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성 경: [마18:2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마'(*)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성 경: [마18:2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성 경: [마18:2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성 경: [마18:2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의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둘로이)이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성 경: [마18:2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령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성 경: [마18:2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마18:26]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절하며(*,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와 '강한 감정,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랫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성 경: [마18:2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빚'(*,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 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성 경: [마18:2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 빚을 갚으라(*,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8:2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간구하여(*,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관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전의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성 경: [마18:3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성 경: [마18:3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 네가 빌기에(*,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 경: [마18:3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 마땅치 아니하냐(*,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성 경: [마18:3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 그 빚을 다 갚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는 '...까지'의 뜻으로, 제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개한 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퓔라크스'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성 경: [마19: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
? 이 말씀을 마치시고 - 마태븍음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다섯 설교의 다섯 종결 문구(ending formula)중의 네번째 것으로 앞장(18장)의 설교가 끌났음을 의미하는 문구이다. 이로써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뒨다. 이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시기 약 한달전으로서 대략 A.D. 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된다. 한편 본서에 언급된 다섯 종결문구는 본문 이외에 7:28;11:1;13:53;26:1에 나오고 있다.
? 갈릴리에서 떠나 -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 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유다와 베레아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신 기사이다. 따라서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의 출발(1절)로 시작되어 베다니에서 왜 마리아의 기름부음(26:6 ff.;막 14:3)으로 끝난다. 이 기간 동안에도 예수는 역시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로부터는 질시(疾視)와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다.
?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 -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는 평행구절인 막 10:1에서는 분명히 이 지방이 베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눅 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땅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도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1) 요단 동편 베레아로 가셨다(Plummer, D.A.Carson, Carr). (2) 요단강 서편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다(Delitsche, Weiss)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대체로 베레아 방문설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요 4:9) 예루살렘에로의 순례여행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단강 동편이 베레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은 유대땅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건너편'이라는 표현인 '페란'(*)이 바로 뒷 단어인 '유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페란'과 '유대'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카이)가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여 '요단강 건너편과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써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2) 유대 지경이라는 표현은 그 '구역'을 의미하는 코우스트(coast)가 아니라 '경계'를 뜻하는 보오더(border)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요단강 건너와 유대지경(사실은 '경계')은 동격으로 베레아가 유대지방이 아니라 그 경계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보도가 될것이다. 한편 베레아란 이름의 뜻은 헬라어 문자그대로 '건너편'(*, 페라이아)으로, '요단 저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 베레아는 그 남쪽 경계가 헤롯의 요새인 마케루스(Machaerus)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이며(14:1-12), 북쪽의 경계는 야르묵(Jarmouk)강까지로 비교적 넓고 비옥한 지역이었으며 예수 당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통치하에 있던 구역이었다.

성 경: [마19: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
? 큰 무리가 좇거늘 - 마가의 평행 구절에서는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막 10:1)이라고 표현한 것에 비해서 마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사 '좇다'(*, 아콜루데오)를 통해 그 무리들이 보통의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고 있다. 보통 이 동사는 '따르다', '제자가 되다' 등의 의미로 갈릴리에서 베레아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까지 계속 예수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제자무리'들 임을 나타낸다. '제자됨'을 나타내는 이 동사는 21절과 27절에서도 다시 사용되고 있다.
?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이적기사가 많은 마가복음에 오히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고 되어있고, 설교기사를 선호하는 듯한 마태복음에 도리어 '병고침'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의 19장 본문의 내용이 설교가 아니라 주로 설화 부분이기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A.W.Argyle).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의 주요 세 사역인 가르치심(teaching)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이 베레아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선포자(18장의 설교), 예언자의 모습을 갖춘 메시야로서 예수의 완전한 사역을 설명하려는 마태의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Gerhardson).

성 경: [마19: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해짐으로써(14:1) 그곳의 산헤드린에서 급파된 진상조사단인 이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방(誹謗)했으며, 모함(謀陷)할 요소를 찾기에 분주했다(9:1-13; 12:1-21; 15:1-20). 그리고 본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 논쟁을 벌이고있었다. 한편 지금 예수가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肥沃)하고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참으로 평화로운 전원풍의 지역으로서 유대적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에까지 찾아와서 적대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의 문제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제기한 이혼문제는, 곧 바로 예수의 처형을 획책하려는 음모(陰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처럼 보이는 이혼법에 관한 난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였다.
? 시험하여 -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시험당하거나 유혹받은 것은 맨 처음 사단에 의해서이고 그후에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서였는데(4:1, 3;16:1;22:18, 35), 이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형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만일 '옳다' 하여도, 아니면 '그르다' 말씀하셔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변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 이는 문자적으로 '어떠한 원인으로든지'라는 뜻이다. 이같은 물음은 규율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하고 있는 힐렐학파가 취한 태도와 학설에 근거해서 제기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룬 샴마이학파는 일정한 이혼사유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계약을 맺고 들어간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J.R.Muller). 새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이유가 있으면', 공동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본문 해석상 적절한 것 같다. 한편 NIV의 'for any and every reason'이란 번역은 공동번역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 24:1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와트 다바르'(*), 곧 '수치(羞恥)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indecency)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즉 샴마이학파는 수치를 '간음'(姦淫)과 갈이 엄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22:22).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경우에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우게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민 5:5-31).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편 힐렐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속의 범죄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 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였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9: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사람을 지으신 이가...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유대인들은 신 24:1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리(창 1:27)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을 강조하시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의 '본래'라는 말은 남.녀의 근본적인 창조 목적을 소개하고자 하는 강한 암시가 내포된 말이다. 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다(고전 7:25-38).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말 2:16) 선포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는 창 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이러므로 - 창 2:24에서의 이 말(for this reason, NIV)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정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 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淸算)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창 2:24).
? 합하여(*, 콜레데세타이) -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어 '콜라오'(*)의 단수 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 한 몸이 될지니라 -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 씨릍스)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인 결합(한 정신)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육체리 합일)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루이스 에이 바비에리(Louis A. Barbieri Jr.)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성 경: [마19: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짝지어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쥬그뉘미'(*)가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더욱이 이는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짝지어 주신 그 일이 영원히 진리(眞理)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대명사 '호'(*)의 중성 단수형이 사용됨으로써 부부는 벌써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단수 관계대명사 '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확히 짝지어 주신 '것'(What)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입법(立法)하신 결혼법을 말하는 동시에 그 법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녀의 결혼 관계에 적용됨을 암시하고 있다.
?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당위론적인 진술이다. 맥네일(A.H. McNeile)은 말하기를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이혼이란 인간의 사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유대 용어로 결혼을 나타내는 말은 '키두신'(*)인데, 이 말은 성별(性別), 헌신의 의미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W. Barclay).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요 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키두신'이다. 그러므로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둘로 나뉘어진 '키두신'은 이미 '키두신'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 분리된 부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정죄를 받는다. 정녕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과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떠한 분열 의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다.

성 경: [마19: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어찌하여 모세는 -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 24:1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께 공격하였다. 실로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기준이며 원리였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적 판단이 정지된채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 28, 32)라고 하심으로써 매번 모셰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구속사의 전개상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실체(實體)이신 예수의 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며 그분의 말씀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어리석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최소한의 규정을 담고 있는 모세 율법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한 것인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 그 당시 히브리인 남편들은 단지 구두(口頭)로 아내와의 이혼을 합법화(合法化)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신 24:1-4의 율법 조문에 근거하여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 이혼을 공식화할 수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혼 사실에 대한 공적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간 이혼 사실을 공중예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혼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실제적인 목적은 (1) 합리적 이유를 들어 아내 내어 버리기를 쉽게 생각하는 남편의 방종(放縱)을 막고, (2) 신실치 못한 아내에 대한 자비의 수단, 즉 그 아내에게 미칠 각종 불이익과 공개적 형벌을 미리 예방하고 아내로 하여금 자유케 하려는 데 있었다. 사실 당시만해도 법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던 남자가 이혼 증서를 준비할 권한과 그 약정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고대에서는 나무잎 위에 '자신의 아내가 이제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는 내용을 적어 여자에게 주었으나 나무잎이 시들게 되면 그 내용이 희미해져서 잘 알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어서 후에는 작은 돌, 양피지, 종이의 순으로 이혼 증서의 재료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濫用)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게 됨으로써 이 이혼 문제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고민 거리가 되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의 제단 앞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성 경: [마19: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허락하였거니와 -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 스크레로카르디안)이란 '거칠고 잔인하며 완고한 마음' 또는 '말라붙은 마음'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반영해 주는 말이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결혼법을 지킬만큼 순수하다거나 신앙적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살해할 의사까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서 남녀가 함께 기거하느니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 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묵허(黙許)한 것이었다. 따라서 허용된 이혼을 빌미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은 '작은 악'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치였다.
?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결혼법에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아내의 수치되는 일(*, 에르와트 다바르, 신 24:1)을 보았을 경우에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허용했을 따름이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혼이 성립될 것인가 말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기본 입장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허용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혼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모세의 본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에 대해 빈센트(Vincent)는 말하기를 '최초에 제정된 결혼법은 결코 폐지되거나, 또다른 법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한 바 있다.

성 경: [마19: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모세의 권위를 초월한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권위(權威)로 절대적 윤리(倫理)를 가르치셨다.
? 음행한 연고 - 음행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르네이아'(*)이다. NIV에서는 음행을 '결혼한 사람들 간의 성적(性的)인 관계에서의 부정'(marital unfaithfulness)으로, KJV에서는 미혼 상태의 남녀간의 '사통'(私通, fornic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학자들은 이 음행이라는 말을 (1) 결혼이 금지된 촌수 내에서의 결혼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하면(Baltensweiler) (2) 겔다드(Mark Geldard)와 같은 사람은 KJV의 번역과도 같이 결혼 전의 부정으로 본다. (3) 또한 플레밍(Fleming)과 시갈(Sigal)은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간음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4) 또 다른 견해로는 '포르네이아'가 무분별(無分別)하고 방종하며 집요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문란한 성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 한번의 잘못된 부정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게속되는 이러한 부도덕(不道德)한 아내의 성생활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결혼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의 근친상간의 결혼은 이미 합법적인 결혼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으며, (2) 결혼 전의 부정이나 간음으로 보는 것은, 첫째, 간음(adultery)란 말의 '포르네이아'가 아니라 '부부간의 성실성이 없음'이란 의미의 '모이케이아'(*)란 말로 분명히 달리 쓰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둘째, 간음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한다면 예수의 의견은 샴마이학파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막 10:11-1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떠한 연고에 의해서도 이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시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10절의 제자들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4) 번의 견해와 같이 결코 고칠 수 없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아내의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한 여자가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 받던 죽음의 형벌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고, 이제부터는 이혼함으로써 부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의 절대 금지에서 예외적인 조항을 밝힌 이 부분은 바로 앞 (4-8절)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께서는 분명 4-8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방향을 제시하셨을 뿐이다. 더욱이 성적인 죄악은 창 1:27;2:24의 결혼법에 관한 예수의 관점(4-6절)과 특별한 관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 기사에서 인용한 구절들(창 1:27;2:24)이 예수가 옹호하고 있는 결혼의 영구 불변성인 성적인 결합, 곧 한 몸됨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인 부정은 이혼 금지에서 제외되는 예외적 행동에 속한다. 실로 성적 부정이 반드시 이혼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혼과 재혼을 허용한 모세의 정신은 예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되고있다. 마하니(Mahaney)는 '포르네이아'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흔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태가 이들이 점점더 교회에 들어오게 됨을 염려하여 그들이 예수의 절대 이혼 금지(음행한 연고 외에는)를 그들 이방인들의 부정한 결혼을 묵인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하여 이 구절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이 예수의 절대적 윤리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점차 상대적 윤리로 전향(轉向)해 가는 과정을 반영해 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성 경: [마19:1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 직역하면 '만일 사람의 연고가 아내에 대해서 이같을진대'로, 개역 성경에는 '연고'(*, 아이티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의 연고'란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올 요구할 수 있는 이유,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조건의 까다로움 또는 더 나아가서 이혼불가라는 예수의 너무나도 엄한 결혼관에 대해 불평하는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사회가 이혼과 재혼 또는 축첩(蓄妾)의 제도가 성행(盛行)하고 있던 시대이므로 예수의 말씀은 실현뷸가능의 이상으로써만 이해되었을 것이다.

성 경: [마19:1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사람마다 이 말을...타고 난 자라야 - 예수의 답변 중의 '이 말'은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인 '장가들지 않는 것(독신)이 좋삽나이다'(10절)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받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코레인'(*)은 그릇이 일정량의 빗물을 받듯이 '어떤 것을 위한 공간(空間)의 자리에 담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그와 상응하는 도덕적 의지가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말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를 전의지적으로 따른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내지 금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타고난 자'란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름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하고있다. 예수께서는 12절에 새 유형의 고자(鼓子)를 예시함으로써 이 말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소개해 주셨다.

성 경: [마19:1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선천적인 성불구자나 성욕이 완전히 핍절(乏絶)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자'(*, 유누코이)란 원래 '침실을 맡은 자'란 뜻으로 고대 동양에서 왕의 침실에 수종들던 내시(內侍)가 모두 거세(去勢)당한 자들인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레 21:20)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신 23:1).
? 사람이 만든 고자 - 고대 동양에서는 왕의 아내들에게 수종드는 남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식기를 거세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왕의 부인과의 성적 접촉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여자가 사제인 이교(異敎)에서도 그들을 돕는 남자들도 역시 거세되었는데, 예를 들면 에베소에 있는 다이아나(Diana) 신전에서 봉직하는 자들도 그러했다. 선천적인 고자나 내시나 환관 등의 특수 계급의 고자는 모두 장가를 들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로서 성욕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욕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절제자들이다.
?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의 오리겐(Origen)을 들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란 '천국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천국의 요청과 천국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독신 생활(獨身生活)을 하는것을 가리킨다(J. Blinzler). 이 구절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천국을 위하여 결혼 안한 사람같이 된다고 하는 페이(F.R. Fay)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7:32, 33에서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아내를 기뻐할 일에 골몰하고 장가를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께서 기뻐하실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말하기를 '참된 고자는 육체적인 쾌락(快樂)에 빠질 수 없도록 된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결혼을 천박하게 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 즉 하늘 나라 봉사를 위해 결혼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이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영적고자로 부름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선택적 규범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받은 바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되어진 자발적인 선택의 일로 보고 있다(고전 7:7, 26).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독선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보지 않았을(딤전 4:1-3;히 13:4)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차원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8:14;고전 9:5).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하여 특별한 소명(召命)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만약 스스로 이러한 생활이나 훈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고전 7:9) 바울의 권면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9:1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계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 말이다(2:7). 결혼의 신성함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그 결혼 생활의 고귀한 열매(아이들)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계신다.
? 사람들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랍비들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안수(按手)라는 관례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축복받게끔 하였다(창 48:14;민 27:18;행 6:6). 그런데 원래 이 안수는 상징성이 강한 행위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길을 떠날 때 혹은 죽음이 임박하여 자손에게 특권과 축복을 시여(施與)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대부분 축복의 기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안수의 축복은 유대교에서 전례되어 초대 교회에 정착되었고(행 6:5-6;딤전 4:14), 또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병고침과 필요만을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의 축복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하면서 안수받는 대상에 대해 마태가 7세 이하의 '작은 아이들'(*, 파이디아)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반해서 누가는 눅 18:15에서 신생아 또는 젖먹이 아이, 즉 유아(乳兒)를 가리키는 말인 '브레페'(*)를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아이도 있었고 품에 안거나 어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8:1-10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귀히 여긴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데서 나온 행동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 제자들이 꾸짖거늘 -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경고하다' 등의 의미로 엄히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자들(NIV, those who brought them)이었다(막 10:13). 이 때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예수의 권위가 손상된다거나 예루살렘으로 가던 여행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고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많은 병자와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으므로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서 귀한 보배라고 하는 인식(認識)이 없었던 제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고 축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priority)은 어른(남자)이며, 그 다음(secondary)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신체적으로 미숙하며 지적인 발달이 미진한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성 경: [마19:1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기뻐 달려오는 일을 용납(容納)한 것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고'(*, 아페테)란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의 강한 요구이다. 그리고 '금하지 말라'의 원어 '메콜뤼에테'(*)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 '메' + 현재 명령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금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을 제재하는 일을 당장 포기하라', '당장 허락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오스카 쿨만(O. Cullmann)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 말이 쓰인 것은 원시 기독교의 세례식(洗禮式) 용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동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세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14;행 8:36;10:47;11:17). 그러나 쿨만은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서 예수가 유아 세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신약의 교회가 이 기사를 기록하여 전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린이 축복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부모의 믿음과 관련된 유아 세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그 마음과 믿음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순결하고 순수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다(18:3). 따라서 지금 신경질적으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제어 하는 제자들은, 무엇보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습을 떨쳐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이들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성 경: [마19:1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13절). 그런데 그 소원들 중 '기도하심을 바란' 소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도 하셨으나(요 11:42;12:30) 본 시점에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 세례의 기원이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시대 때부터 큰 반발없이 자연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겐(Origen) 및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그 중 아레니우스는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Hoer. *, xxii, 4)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자신도 유아 시절에 세례받은 경험이 있는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 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특히 롬 5: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Hom, on Lev. viii, MPG,ii, 496). 한편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아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행 2:38;16:15;고전 1:16). 더욱이 앞절(14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內侍)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행 8:36)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 사람들에 의해 유아세례가 거부되기도 했지만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한 바이다". 더욱이 개혁자(改革者)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하튼 유아 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및 신앙적 의속성(依屬性)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실로 교회는 마치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訓育)하고 성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 거기서 떠나시니라 -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行步)를 재촉하셨다.

성 경: [마19:1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본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 이두)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20). 아마도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발생했을 것이다.
? 어떤 사람이 -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며, 막 10: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에게로 달려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求道者)였으며, 눅 18: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관원'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징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 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눅 18:18). 이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世代)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3-15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자 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먼저 이 청년이 예수를 '선생'(*, ,디다스칼레)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물론 이말은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그 존칭의 의미가 약하지만(막 10:51;요 20:16), 어쨌든 그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10:17)과 누가복음(18:18)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오직 한 분이시니라"(17절)고 하였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암 5:4, 6, 14).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公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영생을 얻으리이까 - 청년이 지닌 치명적(致命的)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사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지만 메시야의 나라에서 그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그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있다. 랍비들 가운데는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계명(어겨도 별 상관없는)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경(恭敬)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 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것(doing)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절대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재가 되는 데(being)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9:1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1과 눅 18: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몇몇 학자들(Hoskyns, Allen)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등)과 라틴 벌게잇 역(Valgate) 등에는 예외 없이 본서의 읽기를 따르고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 29).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는 지금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마태의 표현은 마가-누가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18이 예수의 무죄성(sinlessness)을 묻고 있지 않듯이 본절도 역시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合法性)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누가 그 어느 기자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D.A. Carson). 그렇지만 마가 우선설 때문에 만일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可能性)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 수는 없다. 실로 마태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그 관원은 예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思考)와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녕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義認)된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여기서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란 16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기 위한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본문의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구약을 통틀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 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레 18:5;롬 10:5;갈 3:12).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盲目的)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하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계명의 참 순종(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성 경: [마19:1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청년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게명이 이미 자신이 다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명인지를 예수께 묻고 있다. 관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수 많은 조항들을 덧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고 실행하기 매우 힘들어 그 계명을 준수(遵守)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성 경: [마19:1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살인하지 말라'부터 '부모 공경'까지의 다섯 계명은 출 20:12 이하와 신 5:16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그런데 마태는 막 10:19의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을 생략했는데, 이는 구약의 본문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출 20:1-16의 히브리 본문에 일치하도록 변형되었다. 또한 마태는 레 19:18의 '이웃 사랑'을 새계명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바울도 롬 13:8에서 십계명의 네 계명(6, 7, 8, 10)과 더불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였으며 그 당시 랍비들도 이웃 사랑의 계명이 율법을 요약한 것이라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페이(F.R. Fay)에 의하면 본절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돌판의 계명들을 각각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부모 공경은 제 5계명까지, 이웃 사랑은 제 6-10계명까지의 요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 조항들이다. 즉 인간관계와 이웃에 대한 태도들을 규정(規定)하는 계명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 1-5게명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1)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根菜)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행치 않았다(23:23). 따라서 당시의 율법주의에 빠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세를 비판하신 것이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2)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 아이오니오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W. Barclay).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상태이며 이는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모두 낱낱이 준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2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막 10:20에 의하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붙어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의 종교적 행습(行習)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의 이 대답을 통해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찾아볼 수있다. (1) 긍정적인 측면 : 세상의 열락(悅樂)에 빠질 만한 여러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은 건전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실로 그가 완벽한 율법 준수자라고 자처한 것도 과장이나 위선에서가 아니라 열정(熱情)에서 실토한 순수한 자기 주장이었다. 마가의 보고(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이를 잘 됫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물은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내면적 공허함을 해결하고 외형적 율법 준수로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平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철저히 고갈한 상태'였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측면 : 율법과 계명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의 사고 방식은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일일이 다 지키었으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은 잘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율법의 의(義)로는 전혀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빌 3:6). 따라서 그는 율법의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얽매임으로써 아무런 의심없이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의'(自己義)를 주장했던 것이다. 실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막 10:21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장담(壯談)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한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계셨다. 바울도 그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빌 3:6).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확실히 선한 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功績)이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롬 7:24).

성 경: [마19:2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온전하고자 할진대 -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 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성 경: [마19:2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재물이 많으므로 -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는 현재에도 재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그 풍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로 인한 풍요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가치로서, 그의 미래와 희망과 운명이 걸려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처럼 영원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을 절대화(絶對化)하는 것은 영생과 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 근심하며 가니라 - '조심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스 '뤼페오'(*)는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 하다' 등의 뜻으로, 막 10:22에 의하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띤 것'을 의미한다. 한편 16:3에서 이 동사는 궂은 날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lowering)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재물과 예수 사이이다(6:24). 사실 구약의 전통적 개념으로 보자면 부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에 속향다(욥 42:10-12;잠 18:11). 그 청년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대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함에 따라 영생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써의 물질포기에 대한 예수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장된 현재 때문에 보장될 미래와 영생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실로 이같은 선택을 한자에게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 중에 '근심하며' 또다시 영원한 허무(虛無)와 갈증만 있는 형식적 율법 준수의 길로 되돌아서 가고 말았다. 정녕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만 주어진다(요 14:1).

성 경: [마19:2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재물과 탐욕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막 10:23에 의하면 부자는 바로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부자나 빈자(貧者)나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고 부자라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들일 경우에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영생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나온 '어렵다'의 뜻인 부사 '뒤스콜로스'(*)는 소화되기 어려운 나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힘들게나마(with difficulty)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방법은 꼭 한가지, 즉 모아두었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것 뿐이다.

성 경: [마19:2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Calvin)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인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벧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지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성 경: [마19: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유대의 지혜사상(智慧思想)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실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욥 5:17).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잠 19:7, 23). 그러므로 예수의 부자에 대한 경고(警告)와 재물 포기와 가난으로의 권유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 관원들 보다 못한 자신들 역시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염려로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여기서 본문의 '심히 놀라'(*, 여세플레쏜토)란 말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의 지금까지의 통념(通念)을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천국과 천국의 진리는 기습적이고도 충격적으로 각 개인의 심령에 돌입한다.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이는 제자들의 심각한 회의에 휩싸인 질문이다. 즉 만일 천국 입성이 부자에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의 놀람과 불만 섞인 물음이다. 사실 (1) 유대인의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Carr, Plummer), (2)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과 욕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De Wette, Homer A. Kent, J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강제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마19: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저희를 보시며 - '보다'의 뜻인 헬라어 '엠브레포'(*)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과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불안(不安)을 완전히 씻어버릴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리킨다. 구원에 대한 염려로 떨고 있는 제자들의 내면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는 구원자요, 참 스승이신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여기서 먼저 '사람으로'라는 말은 (1) 사람의 판단으로(Frizsche, Edward) (2)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De Wette, Meyer)등의 뜻으로 사람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행함, 즉 도덕적 선행과 자유 의지(自由意志)의 결행 등으로는 구원이 절대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약대비유의 참 의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公言)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엡 2:8-10).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재물에 대한 의존력을 과시하시고 하나님 그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은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대답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이끌어질 수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약대를 바늘귀에 꿰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강권과 그분의 능력에 의해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적(意志的) 선택으로 인해 심지어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 거의 불가능한 부자들 조차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9:9;27:57;눅 19:9;행 4:32-37).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경륜(經綸)에 따른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재물로 인한 장애요인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성 경: [마19: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 감탄사 '보라'(*, 이두)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로, 인칭 대명사 '우리'(*, 헤메이스)와 더불어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는 가버린 부자 청년에 비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 자신을 주목해 보십사고 하는 말이다. 더불어 제자들이 말한 '모든 버린것'은 바로 부자 청년이 거절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써, 사실 제자듸은 예수의 부름을 받으면서 세상적인 욕구나 생존(生存)의 터전및 자신들의 친족과 옛 생활까지 모두 갈릴리 해변에 버려두고 예수의 고난의 길을 좆아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이다(4:20, 22;9:9;눅 5:11).
?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이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Calvin, Carr),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確證)을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제기된 물음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Homer A. Kent. Jr).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본다. 만약 이 견해에 의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이 부자 청년의 재물과 명예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일이 과연 예수의 말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 청년의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버림으로써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Paradox)이다.

성 경: [마19: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발언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언약(言約)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적은 기대를 가진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심으로써,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의(義)를 쌓아가는 바리새파나 엣세네파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제자 집단만이 올바른 것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다.
? 세상이 새롭게 되어 - 심령이 거듭난 상태, 즉 중생(重生)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딛 3:5) '팔링게네시아'(*)는 만물의 재탄생(renewal of all things), 재창조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의 '새롭게 됨'이라고 하는 말은 RSV에 의하면 '새 세상이 와서'(in the new world)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참예(參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완전히 '중생의 과정'(rebirth)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실로 예수의 초림으로 만물의 변화(빛이 어둠을 몰아냄)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被造物)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설파하였다. 한편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1) 현존의 질서와 우주의 종말(24:35)과 (2) 자연의 대파국(大破局)(24:6; 7)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벅찬 사실은 모든 세대가 고대하고 바라던(사 65:17;66:22;벧후 3:13;계 21:1, 5) 세상종말에 도래할 만물의 변화(갱신)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현재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 이는 최후 심판의 비유의 서두(25:31)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정확한 시점이 명시된 이때는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가 '심판주로 보좌 위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앉음'은 단순히 막연한 의미에서의 착석(sit)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judge)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좌에 인자가 앉으실 때는 메시야가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공의(公義)와 불의를 가르실 때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영광의 보좌'란 단순히 재림의 주이신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내실 보좌라는 뜻이 아니라 그 보좌 자체가 영광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F.R. Fay).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께서 앉으실 보좌는 그분의 영광의 중심이요, 그분의 충만한 영광의 광휘를 나타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앉다'라는 말인 '카디조'(*)는 '앉게 하다'의 의미로, '임명되다', '승진하다'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심판주로서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열 둘도 심판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의 보조 심판자로서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인자와 함께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눅 22:30;고전 6:2). 한편 예수의 사도와 이스라엘 족속의 '열 둘'이 일치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수의 사후, 가룟 유다의 자살로 공백이 된 사도의 자리는 반드시 메꾸어 져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열 두지파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즉 (1) 열 두 사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두 족속을 심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2) 새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 전체(계 21:12-14)에 대해 심판을 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혹시 (3) 열 두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할 메시야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점이다(계 20: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야 되신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Baumgarten, France). 한편 본문의 '심판하리라'는 말은 선악(善惡)을 구분하고 형벌을 선언하는 심판의 주체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주권(主權)은 오직 예수 한 분만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심판하다'는 말이 '판결하다'는 뜻 외에 '통치하다'(시 9:4, 8) 또는 '감독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문의 이 말은 12제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덧입어 그분의 심판의 모든 절차를 보좌하고 대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성 경: [마19: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내 이름을 위하여 - 막 10: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 집이나...전토를 버린 자마다 - 여기서 예수의 권고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獻身)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1) 광의적 의미의 가정(집) (2) 친족(자매, 부모, 자식) (3)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창 12:1)와 비교할 만하다. 실로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시었다(12:46-48). 정녕 이러한 떠나는 믿음은 얻는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 여러 배(倍)를 받고(*, 헤카톤타플라시오나) -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한다(막 10:30). 이에 비해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눅 18:30).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없다. 여하튼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백 배 또는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먈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를 버린 자는 신앙 공동체(信仰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은 신앙의 형제 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12:49, 50).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 영생을 상속하리라 - 마가에 의하면 백 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막 10:30). 성도가 이세상에서 자기 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한편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5:5;21:38;25:34).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으로, 다음 장에(20:1-16)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이 교훈과 비유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이격언은 메시야 왕의 통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전(大逆轉)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 나중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날에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한 윤회(輪廻)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Clarke).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주장은 오히려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하 두 견해가 가장 적절한 해석인듯하다. (4) 카슨(D.A. Carson)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觀念)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5) 한편 또 다른 학자는 이 격언이 사용된 막 10:31과 눅 13: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먼저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 나라에서 쫓기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등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를 따른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적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0:1]

? 포도원.- 여기 "포도원"을 천국(교회)에 비유함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법이었다. 왜 포도원은 그렇게도 많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는가? 그 이유는, (1)팔레스틴 지방에는 무엇보다도 포도원이 많은 까닭이며, (2)또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심은 자 곧, 농부가 있음이, 마치 교회의 설립자(하나님)와 관리자(그리스도)가 계심과 같기 때문이다. (3)포도원은 목재를 얻으려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영적 열매를 얻으려고 하시는 까닭이다.

성 경: [마20:2]

?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니 노동자의 하루 품 값이 될만한 돈이다. 약속을 받고 천국 노동에 들어간 자는 복음의 초청에 선참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천국 노동에 선참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노동을 독점하게 된 것처럼 교만해지면 안될 것이었다. 그들이 비록 고용 관계로 천국 노동에 들어간 듯하나 그것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고용하심이 아니고 그들을 그런 노동으로 훈련시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며, 또 안주셔도 될 보상을 사랑으로 주시기 때문이다(눅 17:7-10).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진리를 모르고 교만하였으니 그릇된 것이다.

성 경: [마20:3]

? 제 삼시. - 이것은 현대의 오전 9시를 이름이다.
? 놀고 섰는 사람들. - 하나님 나라의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좋은 일을 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놀고 섰는 사람과 같다. 그 이유는, 천국 노동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무슨 일이든지 무용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요 6:28-29). 아! 시장같은 이 세상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본절에 관설된 "놀고 섰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늦어도(세상 끝이 가까울지라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천국으로 불러 들인다(5-7 참조).

성 경: [마20:4]

여기 이른바 "너희도"라는 말은, 힘 있게 하는 말이니 그 주인이 저희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게 하는 주권을 보인다.
? 상당하게 주리라. - 이것은, 적어도 그들이 일하는데 비례하여 공정하게 주겠다는 말씀이다. 그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이상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역시 그의 은혜로운 태도이다.

성 경: [마20:5,6]

"육시"는 오늘날 우리 시간의 12시를 가리키고, "제 십일시"는 오후 5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그 주인은 여러 차례 나아가서 포도원 일군을 얻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복음을 사람에게 주시어서 일을 시키시는(믿게 하시는)하나님의 사역을 비유한다. 혹이 말씀을, 전도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적용시키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은 어떤 일정한 시기에만 일군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고, 그 어느 시기에든지 계속적으로 세우시어 그 일군의 충성하는 것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 경: [마20:7]

?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 과연 모든 사람들이 천국 노동 이외에 그 무엇을 하든지 수고한 값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고하여 어떠한 수입을 가진다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보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세의 생명을 얻는데 하등의 효과도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성 경: [마20:8,9]

? 저물매...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세상 끝에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름이다.

성 경: [마20:10-12]

?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원망하여. - 이것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상으로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을 시기하였으니 사도 행전을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눅 15:25-32을 보면, 거기에도 역시 유대인의 시기가 비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눅 15:25-32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마20:14,15]

이 두 귀절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그의 무상권, 그의 자비 이 세 가지 성질에 대하여 말한다.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심이고,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 란 말씀은 그의 무상권의 표시이고, "내가 선함으로네가 악하게 보느냐" - 란 말씀은, 그가 후에 온 자(이방인)도 누구보다 못지 않게 대우하시는 자비를 가리킨다.

성 경: [마20:16]

나중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받는 경우는, 교회 역사상에 많이 있다.

성 경: [마20:17]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하실 때에 -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신 때를 가르킨다. 한편 29절을 참고해 보면 이 순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머물럿던 곳은 여리고였음을 알수 있다.

성 경: [마20:20-21]

마가복음에 따르면 (10:35),예수님께서 요청한 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머지 열 제자가 그들에게 분개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24절).

성 경: [마20:22]

?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성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폭력과 정복을 통하여 이 땅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사람들의 눈에 실패처럼 보이는 에수의 죽으심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히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영광과 권능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임하실 때를 말한다. 잔을 마실수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할 수 있나이다” 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말은 스승을 위해 수치와 박해를 견디어 내겠다는 어느정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성 경: [마20:25-27]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하나님을 모르는 세속 사회에서의 세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부패하게 되어 지배자들은 쉽게 폭군이나 압제자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그러한 권력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지배자이신 예수 자신이 섬기는 종이시다(28).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위대하다는 말은 예수의 성품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성 경: [마20:28]

예수는 일생을 봉사받기 보다는 봉사하시면서 사셨다. 남을 섬기는 삶의 가장 감동적인 실례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이며 봉사의 극치는 그 분의 죽으심에서 보여 졌다.

성 경: [마21: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한 바대로의 수난(受難)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두 소경의 눈을 고치신(20:29-34)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24Km로,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동안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약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悲壯)한 각오를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는 장엄한 순간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 감람산 - 해발 약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그리고 시온 언덕(the hilof Zion)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슥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가 그 내용이다. 그래서 24:3에서는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개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 벳바게 -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는 '벳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벳바게와 베다니가 동일한 지명(地名)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Barcley). 그러나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寄宿)하셨으므로(요 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즉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이며, 감람산 동편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케프르에트 투르'(Kefret Tur)가 이곳과 동일시 되고 있다.
?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 두 제자가 (1) 베드로와 요한(눅 22:8), (2) 야고보와 요한, 혹은 (3)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 혹은 (4) 두 제자중의 한사람이 나귀의 임자일 것이라고 하응 추측(Zahn) 등이 있으나 어느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어 나귀를 끌어 오게 하신 이유에 있다. 즉 두 제자를 보내신 이유는 (1)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를 구하러 갔을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하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장래 일을 예견(豫見)하시는 예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2)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까지 약 3Km가 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유의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슥 9:9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들의 선생인 예수께서 바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더욱 더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3) 지금까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숨겨왔던 자세와는 달리 이제 그 사실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심으로써, 이미 3차에 걸쳐 예고한 바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게 될 인류구속의 사역이 임박해왔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성 경: [마21: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나귀와 나귀 새끼 -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70인역(LXX)을 참조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의 슥 9:9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되고 있고, 마가와 누가에서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태의 본문에서의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한편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 (1) 나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를 메지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Jerome, Justin, Alford). (2) 나귀는 예수 이전의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Theocracy)를, 나귀 새끼는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를 탔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나귀는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 (창 49:10-12;민 24:17;사 9:6;11:1 이하;미 5:2)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슥 9:9의 메시야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동물이다. 또한 2차적인 의미로서의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어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왕하 9:13) 이외에 이것을 탄 유대왕이 별로 없었던 점과,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한다고 하는 점과 비교해서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대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속성의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이며 이는 예수가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 경: [마21: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문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 호 퀴리오스)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마가와 누가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번 경우의 '주'(Lord)는 '소유주'(owner)를 의미할수도 있다. 그러나 눅 19:33에 의하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그 임자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나귀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 여기서의 '주'(主)는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가장 친한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온 해석은 (3) '주'라는 말이 나귀의 소유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신적 속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한 자기 계시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점점 더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한 그의 후기의 사역기간의 특징과도 잘 부합(符合)된다(D.A. Carson). 예수는 수난의 일주간을 앞두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며 따라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위에 순복(順服)해야 함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써, 자신을 '주'로 부르시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 즉시 보내리라 - 예수께서 이미 나귀를 예약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에 따라 나귀를 즉시 보냈다고 하는 추측(Lange)은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벱바게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친구가 있었을 뿐더러(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 그 나귀의 주인도 역시 예수의 숨은 제자로 예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use)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보냈다고 하는 견해(Carr)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은 공생애의 후반기를 보내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성과 신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또 하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성 경: [마21: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선지자로 이루려 하심이라 - 마태가 예수의 사건이 구약성경의 본문의 성취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한 문구이다(1:22;2:15;4:14;8:17; 12:17 ;21:4;27:9). 여기서도 마태는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일이 바로 예수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實現)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예수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바로 그 예언을 성취시킨 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다. 몇몇 사본에는 '선지자'라는 말 다음에 '스가랴'나 '이사야'가 덧붙어 있다.

성 경: [마21: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본절의 상반부 '시온 딸에게 임하나니'는 이사야 62:11를, 후반부는 슥 9:9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예언서들에 대한 정확하고 자구적(字句的)인 인용이 아니라 다분히 신학적 관심과 의도가 첨가된 것으로, 예수의 나귀 입성을 사 62:11와 슥 9:9에 담긴 상징적인 두 의미로써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인 마태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사 62:11의 구원 선포에 의하면 구원자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정복군주 또는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으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입성하고 있다. 한편 슥 9:9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겸손히 입성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들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傳令)들이 사용하던 짐승인 나귀(삿 5:10;10:4)를 타고 오신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모든 피조물(被造物)들의 고대하던 진정한 구주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시온 딸 - 예루살렘 및 그 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구약의 시적(詩的) 표현이다. 특히 '딸'이라고 하는 표현은 예루살렘이 이미 적(敵)으로부터 침입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당한 것에 대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한 처녀의 심정으로 그곳 주민들을 상징한 것에서 유래된 말로 '바벧론의 딸'(사 47:1), '두로의 딸'(시 45:12)의 표현도 있다. 한편 '시온의 딸'을 거론하고 있는 사람의 의도에는 시온의 딸이 '누가 오는가를 알았을 때 크게 기뻐하리라'고 하는 생각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멸망의 참담한 폐허(廢墟) 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과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다가오는 메시야를 무관심과 신앙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일어나 환영하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시온의 딸이 신약에서의 새이스라엘, 즉 교회에 적용되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헬라어 '카이'(*)는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어떤 사람은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여 예수께서 '나귀 그리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번갈아 타시고 입성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곧'으로 해석된 '카이'는 본래 '그리고'의 뜻인 히브리 접속사 '와우'(*)를 직역한 것으로 히브리어 '와우'는 '그리고'(and)의 뜻도 있지만, 보다 상세한 내용은 부연(expatiation)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히브리적 병행법)에 대해서 랑게(Lange)는 본문의 경우의 '곧'(카이)의 용법은 '보다 자세한 묘사를 위한 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더구나 출발지인 벱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3K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나귀를 갈아 탈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예수께서는 한 마리의 나귀만을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 헬라어 '휘포쥐기온'(*)은 '짐을 나르는 짐승'을 의미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나귀(donkey)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막 11:2에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으로 되어 그 순결성과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마태는 그 나귀가 아직 멍에를 메고 있지는 않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할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시(豫示), 상징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멍에를 메야 할 나귀와 참으로 유사한 것이었다.

성 경: [마21: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하여 - 이 구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부분으로서 평행구절인 막 11:4-6에서는 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 경: [마21: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 본문에서의 문제는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아우톤'(*)이라고 하는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연 그 지시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우톤'이 (1) 나귀의 복수, 즉 나귀와 나귀새끼(donkey and her colt)를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와 (2) 나귀 위에 쌓아 놓은 겉옷들(garments)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를 지지하는 스트라우스(Strauss)는 예수께서 두 마리의 나귀를 함께 타셨다고 주장하며 프릿체(Fritzsche), 플렉(Fleck#8), 알포드(Alford) 등은 예수께서 두 마리의 짐승을 번갈아 타셨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워즈워드(Wordsworth), 메이어(Meyer), 카스탈(Castal), 베자(Beza), 플루머(Plummer)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두번째 견해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 경: [마21: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무리의 대부분(*, 호 데플레이스토스 오클로스) - 정관사가 붙은 절대 최상급(最上級) 명사로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의 의미이다. KJV, NIV는 모두 '매우 큰 무리'(very great multitude;KJV, very large crowds;NIV)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9절에 의하면 예수의 앞에서 가고 또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데, 요 12:12,13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나선 무리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구분될 수 있는 두 무리들이 모여 환호의 물결을 이루었으며 또한 이들은 메시야를 대망(大望)하는 열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에서 예수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 겉옷을 길에 펴며 - 7절에서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은 것은 안장(鞍裝)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심히 부끄러운 가난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J. Calvin). 그러나 제자들의 이 행위, 즉 겉옷을 나귀에 얹어 놓는 것은 나귀를 탈 사람에게 대한 엄청난 경의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8절에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편 이와같은 사례는 왕하 9:13에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경우가 있었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온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찬 이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던 것이다.
?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이와 같은 선례(先例)는 B.C. 165년에 성전을 재봉헌하고 시몬 마카베오가 입성하던 때에도 있었다(마카베오상 13:51;마카베오하 10:7).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야외에 초막을 짓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Lightfoot), 또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초막절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축제용의 작은 가지, 즉 '룰랍'(lulab)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막을 만들기 위한 나무는 달개지붕(lean-to)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큰 가지들이며 나귀 앞에 깔아논 가지들은 길가에 심어놓은 종려나무의 잔가지에 해당한다(요 12:13). 여기에서 '베다'의 뜻인 '에코프톤' (*)과 '펴다'의 뜻인 '에스트론뉘온'(*)은 모두 미완료형태의 동사로, 이 동사가 나타내고 있는 동작이 단 한 번에 끝나버린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자꾸 길에 깔아놓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낸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중의 하나였다. 한편 가지를 흔든 이날을 기념하여 초대 기독교도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불렀다.

성 경: [마21: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소리 질러 가로되 - 무리의 환호 소리는 시 118:25,26에서 인용된 말이다. 시 118편은 대찬양시(the Great Hallel), 즉 시 113-118편의 일부로서, 장막절, 수전절, 유월절 때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의 이 환호 소리는 예수 탄생시 천군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과도 흡사하다(눅 2:14). 한편 이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질러'(눅 19:40) 인류 대속(代贖)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삼하 14:4;왕하 6:26)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사용되었다(Gundry, use of O.T.pp. 41-43). 차차 이 말은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기쁨, 환호등의 의미가 함축된 일종의 구호(口號)가 되어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되게 되었다(렘 31:7).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쁜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Hosanna Day)이라고 부른다.
? 다윗의 자손이여 -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그의 유대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결코 부정할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으로서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待望)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 만세'의 뜻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에 대해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15절).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3절의 `주'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시는 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이 시 118: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성 경: [마21:1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장면(눅 19:41)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아마도 현재 '성 스데반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곳, 즉 성전 바깥 뜰로 들어가는 북쪽 입구의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을 것이다.
? 온 성이 소동하여 - 마태만이 언급한 이 소동에 대해 요 12:19에서는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고 표현하여 예수에 관한 소문으로 온 성이 들끓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큰 명절을 지키기 위해 각 도시들에서 올라온 순례자의 무리가 약 200-300만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혼잡한 생활 가운데서 예수의 갑작스런 출현은 예루살렘을 극히 혼돈스럽게 했을 것이다. 전에 박사들의 예기치 않는 방문으로 소동한 적이 있는(2:3) 이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군사지도자들은 '뜻하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마음이 동요(動搖)되었으며 불안에 떨게 되었다.
? 이는 누구뇨 - 이 말은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Bonnard). 이 말은 이런 큰 소동을 불러 일으킬 만한 사람인 이 사람의 정체(正體)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성 경: [마21:11]
주제1: [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무리가 가로되 - 예수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잘못된 대답, 즉 '선지자 예수'를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무리들은 갈릴리나 베다니로부터 예수를 좇아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종려가지를 흔들고 예수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행렬 밖에 있던 사람들로 예수를 메시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 이들의 대답에는 결코 선지자가 나올 수 없는 천한 곳인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선지자가 종말론적인 선지자(the eschatological prophet)를 의미한다고 하는 암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대답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저를 메시야로 받들고 있으나 실제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는 강한 부정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적(異蹟)을 행하고 그 가르침에 권세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7:29)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만 또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이해했을 뿐 고대(苦待)해 온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성 경: [마21:1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성전에 들어가사 -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입성하신 그 다음 날, 즉 월요일에 행해졌던 사건이다. 이 성전은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벧의 제 2성전을 개축한 것으로 주전 19년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되었고 주후 64년에 이르러 완전히 새성전으로 완성되었으나, 얼마있지 않아(주후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었다. 한편 예수께서 들어가신 곳은 '지성소'(*, 나오스)가 아니라 '성전'(*, 히에론) 가운데서도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셨다. 이방인의 뜰은 지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는 특별히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배를 드리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짐승, 나무,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賣買)되고 있었다.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권위를 위임받고 있었다. 시장이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려는 예수의 정화 행위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대제사장 등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칼빈(J. Calvin)에 의하면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상인들은 장사할 장소를 얻기 위하여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데, 이 돈 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돈궤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따라서 이 소매 상인들과 제사장들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들의 상행위는 제사장들의 묵인과 권장 아래서 점차 커져갔는데, 특히 큰 명절 때에는 부당하게 가격을 매겨서 비싸게 물건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2)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희생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전 정화 행위를 통해서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의 경배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셨으며 성전이 물건 판매대와 환전대가 놓인 장터로 변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묵인할 수 없는 신성 모독(冒瀆)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을 드릴 경우 그것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 대부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산 경우는 의심할 바 없이 깨끗하고 완전한 제물로 인정되는 반면에 집에서 가져온 제물들은 흠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실제로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이 흠이 있고 잘못된 제물일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까다로운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하여 흠이 있는 제물을 그대로 제단에 바치곤 하였다.
? 돈 바꾸는 자들 - 출 30:13;레 27:3에 의하면 속죄제물의 값으로 다른 나라의 돈을 가져오는 것은 불법이었다. 돈 바꾸는 자들은 로마와 헬라의 표준 화폐를 성전의 화폐로 바꾸어 주었는데 이 화폐로 그들은 반 세겔(shekel)의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17:24-27).
? 비둘기 파는 자들 - 비둘기는 문둥병자가 치료를 확증받기 위해서(14:22)또는 여인이 해산한 후 정결례를 행하기 위한 속죄제물로(레 12:6-8) 이용되었다. 그리고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드리는 제물이었다(레 5:7). 여하튼 비둘기 등의 제물은 주로 여인들에 의해 판매되었다고 한다.

성 경: [마21:1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사 56:7의 인용으로 `만민의'라는 용어가 빠진 문구이다. 이사야의 본문은 이방인의 구원과 그들의 천국에서의 동참을 선포한 것으로 민족주의적인 패쇄성이 극복된 문맥이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전 영광으로 회복하셔서 세계 도처의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문구에서는 성전의 본래적인 모습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와 예배 등이 행해지는 경건의 장소라고하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 일컬음을 받으리라(*, 클레데세타이). - 이는 `부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칼레오'(*)에서 유래한 말로 공공연히 선포되어 이젠 공식적으로 선언된 사실을 뜻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와 인준으로 인해 영원한 진리로 인정되었음을 시사한다.
?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 렘 7:11의 인용으로, 예레미야는 성전이 악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 형벌로서 성전이 멸망당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에 있어서 강도의 굴혈은 보통 광야의 암벽에 있는 것으로 약탈자 혹은 열혈당원 등의 피난처가 되는 곳이다. 렘 7:10에 의하면 사람들은 도적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를 일삼으면서도 여호와의 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주민들 중에도 예루살렘 안에서의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는 성역(聖域)이라는 미명 하에 영원히 보호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장사꾼과 결탁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여질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도 또한 멸망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성 경: [마21:1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소경과 저는 자들이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 마태만이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호산나를 다시 외치게 된 치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눅 19:47에서는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다고 보고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는 예수께서 영적 소경이며 불구자들인 매매하는 모든 자들은 내어 쫓으시고 육신의 불구자들은 맞이하여 영을 고쳐 주는 기이한 일을 행했다고 보고하였다. 즉 예수께서는 고침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성전을 기도하고 찬양하는 집으로 만들게 하셨다. 또한 출입이 제한된 신체장애자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고침을 받게 함으로써 성전에 대한 그의 우위권, 즉 자신이 '성전보다 큰 이'(12:6)임을 입증하셨다.

성 경: [마21:1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 - `이상한'의 뜻인 '다우마시아'(*)는 비상한, 놀라운, 찬양할 만한 일들의 복수형으로서, 예수가 육체의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뿐만 아니라 성전을 숙정하신 일까지도 백성들에게 찬양받을 만한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가 행한 이러한 일련의 기이한 일들은 마땅히 메시야의 할 일들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전에서 소리질러 하는 아이들 - 성전의 경내(境內)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성전의 거룩함에 대한 모독이므로 즉각적으로 성전의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승리의 입성시의 '호산나' 찬미소리를 다시 한번 재현(reappearance)하기 위하여 마태에 의해 특별히 첨가되었다. 예수를 반대하는 대적자들이 아이들이 소리지른 것 그 자체를 제지하지 않고 다만 외쳐진 말의 내용에 대해서 분노한 사실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W. Argyle). 한편 소리를 지른 '아이'의 뜻인 '파이디온'(*)은 젖먹이 아기인 `네피오스'(*)와는 달리 성전에서 율법과 탈무드를 배울수 있는 5세 이상의 아이들을 가리킨다. 잠 20:11에 의하면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이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호산나 찬미를 기쁘게 여기셨다. 이미 소경들(9:27;20:30)과 무리들(12:23), 이방 여자(15:22), 예루살렘의 무리들(9절)로부터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 칭호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이제 아이들에게까지도 찬미 받으심으로써 명실공히 전유대인으로부터 왕이시요, 메시야라고 하는 고백을 받으셨다.
? 보고 분하여 -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분노는 예수가 성전을 숙정하신 일과 성전안에서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때문에 발생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이적으로 인해서 예수가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수난 예고(16:21;20:18)에서 언급된 소위 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원들로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의 각 방면에서 고유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성전에서의 이 사건은 곧 예수의 수난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마21:1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 시 8:2의 인용이다. 일부의 해석자들은 시 8편이 메시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는 견해를 피력(披瀝)하기도 하지만 이 시 8편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적용, 해석하심으로써 분명히 메시야적성격을 가진 것으로 취급(고전 15:27;엡 1:21;히 2:6)하셨다(F.J. Maloney). 다윗의 이 시에는 원래 모든 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빠는 젖먹이들을 들어 당신의 능력을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에 따로 대변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J. Calvin). 이처럼 이 시 8편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은 고백이었으나 예수는 이것을 자신, 즉 메시야에 대한 온전한 찬미로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한편 앞 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과 대조되고 있는 이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이라는 말은 11:25의 예수의 말씀('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을 상기시킨다. 한편 히브리어로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인 '올랄'(*)은 노닐 수 있을 만큼의 큰 아이를 의미하며 `야나크'(*)는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 여인들은 아이가 3살이 될때까지 젖을 먹인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본문에서 나온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간신히 노래할수 있는 나이인 3살이상의 아이들로 보려는 델리취(Delitzsch)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들의 찬미는 그들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부를 찬양을 암시하며 예수는 이들 속에서 유대의 오랜 불신앙을 버리고 참된 신앙 즉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새이스라엘을 본다고 하는 어떤 학자들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예수의 말씀은 성숙한 어른의 찬양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40) 자기 스스로 찬양을 준비(準備)하시고 완전케 하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면 이미 말할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호산나' 찬양이 노래되어야 함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히 여겨 이를 갊'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 구약의 본문(시 8:2)에 의하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報髓者)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다'이다. 이 중에서 '권능을 세우다'(founded strength)이란 말씀이 70인역(LXX) 헬라어 성경에서는 `찬송을 완전케 하다'(perfected praise)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마태의 본문에서는 구약과는 달리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힘찬 그리고 확신있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큰 찬송은 무지하고 불법한 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으나 동시에 예수에 의해 그들의 말을 잠재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여기서 `온전케 하셨나이다'의 뜻인 헬라어 `카타르티조'(*)는 본문에서 중간태형으로 쓰여서(스스로를 위한 찬미를) `온전케 하다' 혹은 `준비하다'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있는 레위자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로 하여금 당신만을 찬양하시도록 준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로 하여금 그의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시편 8편의 본문에서는 아이들의 합창이 대적자들의 입을 잠잠케 하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의 말씀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셧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찬미를 기쁘게 받으심으로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찬양(`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사실, 곧 그들의 영적 무지를 들어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성 경: [마21:1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시니라 - 아마도 예수는 감람산 동쪽 기슭의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의 집이 위치한 베다니에서 그의 수난의 마지막 며칠 밤을 유하셨던 것 같다(26:6;막 11:19;눅 21:37). 그가 예루살렘 성밖에서 숙박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 예루살렘성이 순례자들의 방문(訪問)으로 무척 붐볐기 때문에 베다니로 나오셨다고 하는 설이다. 로마 식민 시대 당시 유대 예루살렘의 명절에는 사람들이 약 270만명 정도나 모였다고 한다. (2) 하나님이 정하신 때 즉 그가 체포, 구금되고 사형의 시간이 될 때까지 유대 산헤드린이 그를 체포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위험한 예루살렘 성 안 보다는 성밖에서 유하셨다고 하는 설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성 경: [마21:1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 시장하신지라 - 이 구절 때문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에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와 베다니의 한 집에서 유숙하신 것이 아니라 길에서 노숙(露宿)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또한 '시장하다'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께서는 신(神)이시며 인간의 육체는 임시로 취하셨기 때문에 아픔, 배고픔, 죽음등의 고통을 느끼시지 못한다고 하는 가현설(Docdtism)을 반박할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성 경: [마21:1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 유대 율법에 의하면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다고 하면 그 열매를 따먹는 일이 허락되어 있었다(신 23:24,25). 또 톰슨(Thomson)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길가의 무화과나무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이 열매를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Hendriksen). 여하튼 무화과나무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왕상 4:25;왕하 18:31)으로 나무 자체가 우람하고 보기에 아름답다. 밑 둘레의 굵기가 약 1m, 높이가 5-6m나 되며 가지가 8-10m의 너비까지 뻗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요 1:48). 또한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열매를 일년에 두번(태양력으로 6월과 9월) 혹은 세 번(6월과 8월과 12월) 딸 수 있다고 한다.
?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 푸른 빛깔을 띤 무화과열매들은 대개 6월까지는 먹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익지 않아서 6월에 먹기에는 매우 껄끄럽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다. 따라서 보통잎이 있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혔음을 암시한다. 마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그의 유대인 독자들이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라고 간결하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막 11:13에 의하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해결점이 된다. 즉 그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왜 예수가 이 특별한 나무, 곧 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나무에 갔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 나무의 '잎들'은 바로 그것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시장기를 메울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실물 설교의 기회를 포착(捕捉)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는데, 그것은 제 철이든 아니든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열매가 있는양 무성한 잎만 자랑했지 실상은 아무 열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6월에야 비로소 열매맺는 무화과나무임에도 불구하고 4월에 벌써 그 잎을 냄으로써 '열매'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리게 했던 이 나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1) 선민이라고 하는 자의식(自意識) 속에서 형식에 불과한 희생제사를 위해 부지런히 성전을 오고 갔지만 단 한 번의 진정한 희생제사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2)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신앙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생활 태도를 상징한다.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3) 크리스찬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사랑의 계명들은 실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찾는(7:21) 오늘날의 수 많은 교인(churchman)들을 가리킨다.
? 이제부터 맺지 못하리라 -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에 있는 여러 나무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애용되고 있는 나무였으며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곤 했다(호 9:10;율 1:7). 또 이 나무는 언약의 땅을 가리켜 '무화과나무의 땅'이라고 하는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신 8:8), 그 열매는 가나안으로 정탐(偵探)갔던 사람들이 그땅의 비옥함과 번영을 증명하기 위해 가져온 산물(産物) 중의 하나였다(민 13:23). 그리고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평화와 안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왕상 4:25;미 4:4;슥 3:10).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고 쳐서 죽게 하실때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해당한다(시 105:33;렘 8:13;호 2:12). 따라서 예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해 왔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그가 삼년을 이곳 예루살렘에 와서도 열매(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제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나무(예루살렘)를 찍어버리겠다고,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던 것이다(눅 13:7).
? 곧 마른지라 - 마가복음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그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곧 마르지 않았다. '곧'의 뜻인 부사 '파라크레마'(*)는 물건을 살때 그 물건과 함께(`파라') 돈('크레마')을 지불한다고 하는 즉각적인 현금지불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예수의 저주가 말해지는 동시에, 비록 그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연장일뿐 이미 그 본질상 마른 나무로 바뀌었다(교환)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결국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능력과 위엄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 인류의 심판 주로 오셔서 그 외모(잎)가 아닌 내면(열매)의 유무(有無)를 관찰하시고 그에 준해 심판하실 것이다.

성 경: [마21:2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 막 11:21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생각해 내었다. '이상히 여기다'의 뜻인 '다우마조'(*)는 1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異常)하고 의아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워하거나 찬양한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Moule, Idiom Book, p. 207).
?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부사 '포스'(*)는 왜(why)의 뜻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how)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마를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과 찬미가 섞인 물음이다. 그들은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주에 의해서 그 나무가 그대로 말라버린 눈 앞의 사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마21:2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믿음이 있고'는 가정법 현재시상이며 '의심치 아니하면'은 가정법 부정과거시상의 중간태로,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계속적인 결단을 의미하며, 의심은 스스로와의 싸움이 과거의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눅 17:6에는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로 나타고 있는 이 실례는 마 17:20에도 등장하고 있다. 17:20에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강조한 것에 반해서 본문에서는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Hill). 이 산이 뽕나무를 상징하는 것인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인지 혹은 감람산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한 여러의견이 있으나 감람산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런데 혹자는(Lane, Mark. p. 410) 이 감람산이 사해와 붙어있다는 이유로 예수의 이 말이 슥 14:4과 관련 있다고 보면서, 도래하는 종말론적 통치를 위해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예수로부터 요청받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스가랴가 감람산을 바다에 던지우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마21:2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기도할 때에 다 받으리라 -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는 한편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A. W. Argyle) 21절과 본문이 무화과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작업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일 경우 그들이 준비한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다 받고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나 믿음없이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희생제사도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희생제사의 형식을 갖추지는 못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하시어 그분과 우리와의 화해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믿음'이란 결코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하나님의 뜻의 분별 및 그 뜻에의 순종과 관계된다(19:20).

성 경: [마21:2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 막 11:27에 의하면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이며 눅 20:1에 의하면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로 시간적인 배경은 마가에 의하면 화요일이 된다. 성전 곧 이방인의 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그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점 때문에 그 주민들을 위한 본격적인 복음전파 행위가 되는 한편 또한 그곳이 유대인 남자와 여자, 아이들 그리고 이방인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전세계인을 위한 복음전파의 사역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는 종교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이들 이외에도 서기관이 섞여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산헤드린(Sanhedrin)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의 기이(奇異)한 교훈과 소문이 전파됨에 따라 그 소문의 진위(眞僞)를 파악하기 위하여 갈릴리까지 파견되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종교 진상조사단과 같은 임무를 띤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권위를 문제삼는 이들의 메시지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도전이었고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예수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라고 하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誘導)하려는 것이었다.
?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이 첫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의 권세가 신적(神的)인 것이냐 혹은 인간적인 것이냐 하는 것으로 10절에서 제시되었던 질문, 즉 '이는 누구뇨'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그들은 '이런 일'에 포함되고 있는 많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더이상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라고 묻지 않고 대신 예수의 자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이런 일을 하는 예수 당신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내신 백성들의 선생이나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는가'의 뜻으로,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종교적 지위를 갖지 못한 예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강한 반발이 내포되어 있다.
?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 두번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를 묻는 질문으로 첫번째 질문 보다 본래적이며 그것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의 경우 백성들을 교훈할수 있는 권한의 위임(委任)은 대개 산헤드린이나 탁월한 랍비가 그들의 정통적 교리의 정신에 입각하여 랍비가 될 사람의 교훈의 타당성을 시험하여 그 정통성이 입증된 후에야 허락되었다고 한다(Edersheim). 물론 이 둘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가 산헤드린이냐 스스로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냐 사람에게서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도 이 두번째 질문, 곧 하늘에게서냐 예수 자신, 즉 사람에게서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성 경: [마21:2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이 질문은 동문서답도 아니며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저희들에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마21:2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요한의 세례 - 세례 요한의 사역과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암시하는 말로, 세례 요한은 그의 사역을 통해 참된 예언자로 대중적 인정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그를 믿어야할 것을 가르쳤다(요 1:29-37;3:26-30).
?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여기서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로서'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완곡한 표현이다. '하늘로서'라는 말은 저들이 용납해야 할 참된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로서'는 저들이 무시할 만한 거짓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출처는 동일한 곳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로서'였다.
?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 예수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의 반격을 받아 스스로 딜레마(dilemma)에 빠지게 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 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연구하는 모습을 '서로 의논하여'의 뜻인 '디엘로기존토'(*)의 미완료시제가 잘 드러내고 있다.
?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 이는 예수가 대답할 것까지 미리 연구해 낸 말이다. 즉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예수의 의도가 요한의 세례 및 사역의 주목적이 바로 예수 자신에 대한 증거에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요한의 권위의 출처가 '하늘에게서'라고 한다면 (1)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는 질책이 따를 것이며 (2) 그 다음에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의심까지도 책망받을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1:2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백성이 무섭다 - 이 구절에서는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위해야 할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상대적 존재인 인간들의 눈을 무서워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는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헤롯 궁전 내부에도 영향을 끼쳤다(14:5).

성 경: [마21:2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가(可) 부(否)를 정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참으로 악한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위선을 극복하는 답변 방법으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고 가르치신 바 있다. 사실 국내의 종교 문제를 완전히 관장(管掌)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직무 중의 하나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는 직무유기(職務遺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고 있는 계시와 세례 요한의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책임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 것이다.
?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제기(提起)했으나 예수는 그들이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를 문제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께서 그들의 답변을 거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성 경: [마21:2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그러나'의 뜻인 접속사 '데'(*)는 앞의 문장에 대한 반대 내용(역접)을 연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알라'(*)와는 달리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갈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 문구는 '한편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확증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는 말은 마태가 예수의 비유를 소개할 때 혼히 사용하는 표현(17:25;18:21)이다. 본 비유에서 이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라 비유의 내용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므로써 이 산헤린의 공회원들로 하여금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다.
?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두 아들과 포도원을 가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아버지'가 세리들과 창기들이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후에는 믿고 따랐던 세례 요한을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전자가 더욱 적절한 해석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법적 상속권이 강조된 용어 '휘오스'(*)가 아니라 이 보다 훨씬 부드러운 단어인 '테크논'(*)을 사용함으로써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비유의 이 두 아들들에 대해서 (1)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과 그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한다는 견해(Bruce, Calvin), (2)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이스라엘 백성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하는 주장(Plummer)이 있다. 어찌되었든 본문에서 마태는 이 두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서로 상반(相反)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구약에서는 흔히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 되었는데(사 5:1;렘 12:10), 신약에서는 교회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 한편 '오늘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은 긴박성(緊迫性)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이미 어떠한 계획(schedule)이 있든지간에 이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웃 사랑을 통한 복음전파의 사역은 그 일을 맡은 주의 성도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부여(附與)되고 있는 긴급명령이다.

성 경: [마21:2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이 표현되고 있는 이 대답에는 '내가(*) 틀림없이 가겠다'고 하는 확신과 자발적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맏아들은 부르심이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래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마21:3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싫소이다 - 아버지의 면전에서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는 이 표현은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공공연한 죄를 짓는 것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명령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명령은 다른 모든 해야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것이므로 '싫다'고 거절한 태도는 어쨌든 잘못된 것이었다.
? 뉘우치고 갔으니 - 뉘우친 것에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다. '뉘우치다'라는 말에 사용된 '메타멜로마이'(*)는 마음과 생각과 의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메타노에오'(*)보다 약한 의미로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후회, 뉘우침, 나중에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타멜로마이', 즉 '뉘우치고'가 꼭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도 뉘우쳤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어 버렸다(마 27:3-5). 그러나 본문의 둘째 아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 전체, 즉 '뉘우치고 간' 바로 그 행동 자체가 올바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가 되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하면 '뉘우침'이란 말에는 '때늦은 지혜와 병 치료 후의 몸조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성 경: [마21:3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 두 아들은 모두 죄인이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은 완전히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다. 맏아들은 예의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세다.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유대교권주의자들에게 제기하심으로써 그들이 답변을 통해 스스로의 정죄를 선언하게 하셨다.
? 세리와 창기들이 - 일종의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그들은 완전히 죄인들이요 소외받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사회의 쓰레기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이다. 한편 '세리'라는 말인 '텔로네스'(*)는 '통행세 등을 착복하는 자들'(RSV, tax collector)로 보통 '강도'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될 정도였다.
?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앞서가다', '앞으로 인도하다'의 뜻인 '프로아고'(*)를 '너희 보다 먼저 들어가리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너희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Bonnard, NIV도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말이 유대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에게도 여전히 소망이 되는 말씀이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먼저 회개하는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따라서 나중에 회개하는 자들은 나중에라도(시기가 너무나 늦은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1:3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요한이 의(義)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 두 아들의 비유와 23-27절의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연결시키는 구절이다. 요한은 회개한 죄인들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쳤었다. NIV는 '요한은 의의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고 번역하였으나 '의의 도로 왔다'(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righteousness)고 함은 아마도 (1)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의미와 (2) 요한은 의로운 일을 행한 자, 즉 '의인'이었다고 하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사실 `의'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실행되는 의'(rightousness that is peacticed),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의미한다(Hill, Przybylski). 따라서 요한이 의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요한의 사역과 죽음을 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요한이 증거한 예수의 사역조차도 의로운 것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의'는 좁은 의미의 윤리(倫理)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성 경: [마21:3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산울 즙 짜는 구유 망대 - '산울'은 야생동물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가시나무와 같은 식물로 두른 울타리나 또는 돌담을 가리킨다. 또 '즙 짜는 구유'(winevat)란 돌이 많은 땅을 원형으로 판 한 쌍의 웅덩이로 크고 깊은 것은 포도를 짜는 틀(히브리어로는 '갓'이라고 부름)로 사용하고 그 보다 작고 긴 것은 도관을 통해 흘러나온 즙을 받아 놓는 (히브리어로는 '예케브'라고 부름)로 사용한다. 한편 '망대'는 파수꾼이 약탈자와 이리, 여우의 침입을 막고 경고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것으로 때로는 포도나 포도즙을 저장해 놓는 창고 역할도 하였다. 구약 시대의 경우 포도원의 망대는 그 당시의 세워진 명물 중의 하나로서 때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비해 놓은 이 시설들에 대해서 칼빈(J. Calvin)은 백성들의 신앙을 율법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보강(補强)하기 위해 덧붙여진 제사와 기타 다른 여러 의식(儀式) 등과 같은 '보조수단'이라고 보았다. 한편 벵겔(Bengel)은 산울은 율법을, 즙 짜는 구유는 예루살렘성을, 망대는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이해하였다.
? 세(貰)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 예수 당시에는 외지(外地)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팔레스틴의 경작지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이 부재지주(不在地主)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상황 설정(設定)은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작지대'(小作地代)의 경우 주인과 소작인이 나누는 비율은 보통 반반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본문의 '타국에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데메오'(*)의 문자적 의미는 '멀리 떠나있다' 혹은 '여행하다'로 본문에서는 집주인이 당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집주인이 모든 설비를 구비해 놓고 가꾸던 포도원을 그 농부들에게 맡기고 오래 떠난 것으로 보아 그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의 오랜 여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포도원의 나무들은 갓 심은 포도나무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갓 심기운 포도나무일 경우 첫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적어도 2, 3년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성 경: [마21:3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실과(實果) 때가 가까우매 - 과실을 얻을 만한 때를 가리키는 말로, 팔레스틴의 포도는 대개 7월부터 포도송이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다음달 8월이면 작은 포도송이가 완전한 포도알이 되어 보통 9월에 따게 된다. 본문에서의 이 말은 성도들이 부지런히 성결의 삶을 살므로써 '성령의 열매(갈 5:22)를 얻게 되었을 때' 혹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게 되었을 때'등을 의미할 수 있다.
? 그 실과를 받으려고 - 마가복음에는 '포도원 소출 중 얼마'(막 12:2)로 표현되고 있으며, 소작료를 지불할 때는 계약에 따라 돈이나 생산물 중의 일부로 지불하는데, 계산 방식은 (1) 수확량의 일정비율로 서로 나누거나 (2) 풍작이든 흉작이든 정해진 양의 소출(所出)을 바치는 경우가 있다.
? 자기 종들을 보내니 - 마가와 누가는 한 번에 한 명씩의 종를 보냈다고 기록했으나 마태는 한 번에 여러명의 종을 보내었다고 하였다. 아마 마태는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같은 복수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렘 35:15에 의하면 여호와는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 하였다.

성 경: [마21:3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거늘 - 마가와 누가는 심히 때리고 소작료도 주지 않고 거져 보냈다고 표현한데 반해서 마태는 매를 맞은 사람, 죽임을 당한 사람, 돌로 맞은 사람 등등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농부들의 악행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세 가지 행악이 거론된 것에 따라 처음 주인이 보낸 종들이 다만 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때리는 것은 예레미야가 당한 것에(렘 20:1,2), 죽인 것은 이사야에(히 11:37), 돌로 친 것은 스가랴(대하 24:20,21)에게 관련시키지만 이러한 고통을 당한 선지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각각의 행악들은 모든 선지자들이 각각 당하였던 행악(行惡)과 박해(迫害)의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거론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본문과 연관시켜 심한 채찍질하는 것(문자 그대로는 가죽을 벗겼다는 말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는 태장(苔杖)을 가리킨다. 고후 11:24 참조), 살해하는 것, 죄인처럼 돌로 치는 것 등의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1:3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니 -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21:3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 이 비유의 클라이막스(climax)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아들을 보내기까지의 주인의 태도는 자신이 고용한 악한 농부들에 대한 지극한 인내심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농부들의 철저한 사악함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문구이다.막 12:6에 의하면 이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이며 최후로 보낸 사자(使者)'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인이 보낸 같은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종으로, 예수는 아들로서 비교되었다.

성 경: [마21:3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는 상속자니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 악한 농부들은 마땅히 주인에게 갚아야 하는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유권을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예수께서는 여섯달 동안이나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종교당국자들이 자신을 죽이리라고 하는 예언을 해 오셨는데(16:21;17:23;20:18), 이제 당사자들 앞에서 그들의 속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셨다. '자 죽이고'라는 표현은 요셉의 형들이 그의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할 때 사용하던 용어를 연상케 하는 것(창 37:20)이다. 특별히 이 용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불법적으로 모인 공회에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밀때 그대로 사용되었다(요 11:47-50).

성 경: [마21:3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마가복음의 경우 포도원 안에서 죽이고, 밖에 내던졌으나 마태와 누가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뀌었다. 이는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요 19:17;히 13:12) 예수의 수난사건과 이 비유를 좀더 연관되게 하기 위해서 마태와 누가가 각색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A. W. Argyle), 또한 알포드(Alford)는 예수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넘겨져 심판받은 사실을 암시한다고 본다.

성 경: [마21:4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주인이 올 때에 - 주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성령 혹은 부활하신 성자의 재림), 또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예루살렘 멸망때(<A.D. 70년> 혹은 최후심판 때)하는 물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징벌의 때가 임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성 경: [마21:4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악한 자들을 진멸(殄滅)하고 - 비록 이 결론은 예수의 비유를 듣는 종교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으로, 예수와 그들은 동일하게 악한 농부를 정죄하고 있다. 한편 '악한 자들을 진멸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헬라어 '카쿠스 카코스'(*)의 뜻은 '악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파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NIV에서는 유사음을 사용한 헬라어의 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비참한 종말을 당하게 하다'(wretches wretched end)의 의미로 번역해 놓고 있다.

성 경: [마21:4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너희가 성경에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이 표현은 신약성경 중에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표현이다(12:3;19:4;21:16;막 12:10). 예수께서 이러한 말을 하시는 경우는 모두 성경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경우이다. 본문의 내용은 시 118:22를 인용한 것으로, 행 4:11;엡 2:20;벧전 2:7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를 영접함을 표현하는 증거로서 사용되었다.
? 건축자들의 버린 돌 - 시 118편은 다윗이 모든 건축자들, 즉 사울과 그 추종자들의 세력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케 하셨다고 하는 내용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시는(118편)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여러 강대국으로부터 학대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퉁이의 돌, 즉 선택받은 민족으로 삼으시고 축복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등의 지도자들은 다윗의 원형(原形)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되신 예수를 내어 버렸다. 예수는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본 비유에서 당신께서는 악한 농부로 비유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에 의해 새이스라엘을 건설할 그들의 메시야로서 적합치 않다고 하여 버림을 받은 돌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지붕이나 건물 바깥계단 혹은 성벽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돌(Derrett)로, 건물의 상부구조를 유지하고 그 모양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다른 모든 돌들은 이 돌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과 예수, 모든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가 건축물과 모퉁이 돌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건축의 비유는 교회의 그것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분명 예수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동시에 교회의 머리, 즉 교회의 주인(골 1:18)이시다. 따라서 모퉁이 돌의 비유는 교회론적인 것인 동시에 기독론적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당하신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사 영광받게 하셨으며 신령한 건물로 지음을 받는 영적 공동체인 성도들의 모임에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다(엡 2:20-22)

성 경: [마21:4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유대 지도자들의 권세 밖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혈통상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행 13:46;18:5, 6;벧전 2:9).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의 권세로 율법을 전달하던 특권을 가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 권한을 박탈당하고 그 나라의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이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특권과 사명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너희'는 율법사, 서기관 등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1:4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이 구절은 사 8:14, 15와 단 2:35의 내용을 그 배경으로 한다. 실로 예수는 모퉁이의 돌로서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지만 악한자들에게는 멸망을 가져다 주는 돌이 되신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칼빈(Calvin)은 이 돌을 유대 백성들의 외고집의 돌멩이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견고하심으로 그돌을 파멸케하시고 더욱 더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와 '이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의 경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견해들이 있다. (1) 전자를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자라고 보고, 후자는 그리스도예수의 비천한 출생과 지위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해 공격적으로 대적해 오는 자라고 하는 견해(A.C.Williams)와 (2)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歪曲)된 지식으로 인해 그를 용납치 않는 자, 후자는 예수와 그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자라는 견해(Bruce)와 (3) 전자는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 모의를 꾸미는 사악한 자들이며, 후자는 그리스도를 넘어 뜨리려고 질주(疾走)해 오다가 그분께 떨어지는 자, 즉 그 분의 강력한 반격(反擊)을 받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Calvin)와 (4) 전자는 그돌에 대해서 반항하는 자, 후자는 그 돌이 추궁하여 심판한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Barclay)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예수의 심판 선언의 맥락 속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 '돌 위에 떨어진다'고 함은 예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앙이 스스로에게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박살내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가 의미하는 바는 그대로 해를 당하여 파멸에 이르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의 뜻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종말의 때를 예언하시는 것으로, 그날에 악한 자들은 키질의 결과로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와 같이 구별되어 영원한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3:12;시 1:4).

성 경: [마21:4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비유를 듣고 - 지금까지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두 비유는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경고의 말씀이다.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난 사악한 인물들이 바로 종교 지도자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듣고 아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완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마21:4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지금 예루살렘 성안에 있으므로 성전 경비원을 불러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경우와도 같이 예수를 의의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 하여 공식적인 석상에서 체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훗날 가룟유다의 배반에 의해 산에 계신 예수를 밤에 은밀히 체포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이것은 백성들에 대한 예수의 지지도(支持度)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요 11:53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의회원들도 나사로가 부활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謀議)하고 그 명분을 찾기 위해 계속 예수를 따라다녔음을 보게 된다. 실로 그들에게는 이미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를 체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예수를 죽일 죄목과 명분이 구상, 모의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2: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다시' 라는 말로 이 비유는 21장의 두 비유(21:28-32;33-34)에 연속된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그들에게'(*, 아우토이스)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23:1에 '무리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여'라고 새롭게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1장의 비유를 듣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21:15, 23, 45)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전의 두 비유에 대한 그들의 반응(21:45,46)을 아시고 유대 지도층의 죄악에 대한 지적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예언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시켜 결과적으로는 예정된 죽음의 길을 재촉하셨던 것이다.
? 비유로 - 비유는 랍비들의 일반적인 교수법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옳고 그름이나 특정한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할 때 실생활에서 쉽고 분명하게 가릴 수 있는 경우를 대비시켜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유대인들이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하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정통세력으로 여기는 교만과 편견에 대하여 예수는 천국의 실상을 비유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여기서 비유(*, 파라볼라이스)는 복수인데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이지만 크게 두 부분(2-10절, 11-14절)으로 나눌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13:1-30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성 경: [마22: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 이것은 예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이다. 여기 `과'에 여격이 쓰이는데, 이것은 `에서와 같은 그런 상황이다'라는 말의 간결한 표현이다(Jeremias). 그러므로 여기서는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 자기 아들을 위하여 - 그 임금에게 자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든 것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은 아버지인 임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 아들이 다 커서 혼인도 하고 이제는 나라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왕궁에는 행복과 권세와 명예가 가득했다. 왕은 이 혼인과 잔치의 성사에 정성을 다하며 친히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것을 본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곧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신 것이다.
? 혼인 잔치 - 원문에는 `가무스'(*)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여러 날 계속되는 잔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된다. 성년이 된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것을 축하하는 그 잔치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축제이다. 천국이 이런 '혼인 잔치'로 비유 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다(사 54:5). 거기에 상응(相應)하여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엡 5:23-32). 그리고 혼인 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계 19:7-9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신.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첫 이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이다(요 2:1-11).

성 경: [마22: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종들을 보내어 -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에 5:8;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종들을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나, 천국의 임박함을 처음 선포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종들은 바로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던 신앙의 선조들과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천국 시작의 선포였다. 특히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29)에서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하였다.
? 그 청한 사람들을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케클레메누스)에서 '청하다, 부르다'(*, 칼레오)의 현재완료 수동분사로서 그 초청이 과거에 단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종들을 보내는 그 시점까지 계속 유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왔고 그것이 결코 취소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가 때가 되매 실제로 시작되고 초청이 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왕궁의 행사에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한다(막 6:21). 마찬가지로 천국의 약속과 초대의 말씀도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초청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던 자들로서(요 1:19-28) 지금 예수와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 오기를 싫어하거늘 - `싫어하다'(*, 우크 에델론)는 미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내분(內紛)의 조짐이 있거나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은 나라의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이 그들은 반드시 응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기다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잔치가 임박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 거절의 이유를 그 왕궁의 혼사에 걸맞는 중한 선물을 바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Derrett), 그것이 고유한 관습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본 비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 자신의 비유 해석대로(21:32)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메시지(3:7-10)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마22: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왕의 영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명(command)을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또 한 번 간청(懇請)하다시피 청하러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 종들'은 바로 예수 자신과 그의 사도들로 시작된 신약 시대의 전도자들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셨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11)는 메시지를 주어서 파송하셨다.
?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 여기서 오찬(*, 아리스톤)은 유대인들이 들던 하루 두 끼니 가운데 첫번째 끼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통 늦은 아침(midmoming)쯤에 갖는 식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며칠을 계속되는 성대(盛大)한 혼인 잔치의 풍습으로 볼 때, 이 '오찬'은 잔치가 시작되는 식사이이었을 것이다(Meyer).
?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그런데 그 오찬은 친히 왕이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量)과 질(質)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요 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요 4:14) 말씀하셨다.

성 경: [마22: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 이것은 '도외시하다' 혹은 '개의치 않다'는 의미로서(A.T.Robertson)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의 이 큰 무례함은 교만과 무지 때문이었다. 유대의 지도층은 요한과 예수의 천국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윗의 뒤를 이은 용사로서 군사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자기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로마와 열방을 정복해 나가 천하의 왕국을 세워야할 자인데, 예수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회개하라고 대적(對敵)하니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도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해방과 현세적인 이득을 가져다 줄 것같지 않자 나중에는 다 예수버리고 만다.
?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 그들 가운데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소극적인 자들이 있었다. 예들 들어 예수의 천국초청과 명령을 뒤로 하고 크게 고민하면서 자기의 신(神)인 재물을 향하여 갔던 젊은 부자관원(눅 18:18-23)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observance)에서 얻은 자기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다(눅 16:14).

성 경: [마22: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그 남은 자들은 죽이니 - 헤롯왕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무고(無辜)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2:1-16). 자기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위험한 세력을 근절(根絶)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다(막 6:17-29).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27:18)로 가득차서 예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殺意)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했다(요 11:47-53).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능욕하고'(*, 휘브리산)라는 말은 학대하다는 말보다 더 혹심한 모욕과 처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선지자 노릇해 보아라"며 침뱉고 주먹으로 쳤었다(26:65-68). 이와 함께 그들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죽였던(23:35) 선례가 있고, 이어서 예수의 사도들을 투옥하고 죽일 것이었다(행 4:1-3;5:17,18;8:1).

성 경: [마22: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임금이 노하여 불사르고 -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왕 자신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왕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군대를 보낸다. 그 '군대'(*, 스트라튜마타)는 대군이 아니라 한 무리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전란(戰亂)이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도시를 왕이 군대를 보내 파괴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살인자들이었고, 예루살렘 성도 더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아니라 그 살인자들의 동네(*, 텐 폴린아우톤)였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다. 이 부분을 후대의 가필(加筆)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20:17-19)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24:2)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사 10:5;45:2) 간혹 하나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성 경: [마22: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초청은 이제 무효화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Lenski).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권리를 갖는다.

성 경: [마22: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사거리 길에 가서 - 사거리 길(*, 타스 디여소두스톤 호돈)은 성읍 경계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길들이 시작되는 넓은 광장으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왕래하는 곳이다.
? 사람을 만나는 대로 -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눅 14:21에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드러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다. 왕의 분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갑절의 호의(好意)로 나타났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는 세리와 사마리아인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성 경: [마22:1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

성 경: [마22:1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 이 부분부터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청한 손님들이 다 참석하면 잔치가 시작된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잔치에 주인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Jeremias).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러'(*, 데아사스다이)라는 말은 대상의 참된 성질과 특성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왕은 이 잔치에 부적격(不適格)한 사람을 즉시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후 5:10).
?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는 하나(왕하 10:22), 1세기의 혼인 잔치에서는 그것이 확실하지않고, 본 비유에서도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길에서 바로 온 사람들에게 알맞는 예복이 있을 리도 없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올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궁정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audience)하려는 자에게 왕으로부터 예복이 주어지는 관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고,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그 잔치에 합당한 예의와 함께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다. 이 예복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사 61:10)이며,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롬 10:9,10)이라는 옳은 행실이다(계 19:8).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하나(Tasker), 오히려 예수의 답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받은(16:6-12)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이들은 교회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멸시하다가(고전 15:12-19) 종말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마22:1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친구여 - '친구여'(*, 헤타이레)라는 말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20:13)에게와 가룟유다(26:50)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애정이나 특별한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아래 사람에게 하는 그저 무관심한 투의 말이다.
?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입지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25:41-46), `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7:21-23).

성 경: [마22:1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사환들에게 말하되 - 1-10절에는 `종들'(*, 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 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비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마 13:41,49) 영원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8:12;13:42,50;24:51;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니다.

성 경: [마22:1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 -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이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 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거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눅 14:24).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16:17;요 6:65).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

성 경: [마22:1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상론하고 - `이에'(*, 토테)는 때로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앞뒤의 사건을 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접속사로 쓰이는 마태의 독특한 용법이다(90회). 예수를 잡아야 하나 예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의가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께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표로 쓴 것이다.
? 말의 올무에 걸리게(*, 파기듀소신) - `올무에 걸리게 하다'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이다.

성 경: [마22:1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다(막 3:6). 평행구인 눅 20:20은 헤롯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로(年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다. 누가는 그들이 정탐(spying)했었다고 말하는데, 정탐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찬을 시작한다. 그 첫째가 '선생님이여'(*, 디다스칼레)이다. 이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둘째는, '당신은 참되시며'(*, 알레데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가르칠 수 있다. 다시 한 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으로 해답을 앙망하는 자세로 가장한 것이다. 이는 비록 겉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독을 넣은 인사말이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를 바리새인 스스로가 내린 것이다. 이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과분한(?) 칭찬에 걸맞게 어떤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시원한 해답을 두려움없이 제시해야 했다. 그러면 당연히 로마당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답할 것이고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헤롯당원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告訴)하면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2:1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F.F.Bruce).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 세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세'(*, 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다.

성 경: [마22:1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다(막 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성 경: [마22:1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셋돈 데나리온 하나 -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W.Barclay).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다. 그 가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다.

성 경: [마22:2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Pontifex Maximus,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인각시키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Beasley-Murray).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이다(Robertson).

성 경: [마22:2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 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 B.C. 100-44)의 성(姓)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식 직함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無害)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다.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신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鑄造)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다. 예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각되어 있는뎨( 롬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던 것이다(23:23).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 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시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이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생활을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바치라(*, 아포도테)는 17절의 '바치다'(*, 두나이)와는 다르다. 이것은 마땅히 돌려 주어야 할 것을 돌려 준다는 의미이다. 똑같은 동사가 21:41에서 농부가 제때에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D.A. Carson은 가이사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돌려주다'(pay back), 혹은 '지불하다'란 의미보다 그냥 '주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눈에 보이게 준 것은 없어도 그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 받아서 하는 일이어서 거기에 해당하는 존경과 두려움과 세를 마땅히 바쳐야 하기 때문에(롬 13:1-7) 어떤 대가를 '지불하다'는 의미로는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2:2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기이히 여겨 -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 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기이히 여겨'(*, 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한다.

성 경: [마22:2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사두개인(3:7, 주석 참조)들은 숫자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개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 31:16;32: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오경외에 사 26:14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없는 상상과 억측으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 28: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은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고 규정했다.
? 그 날에 물어 가로되 - 마태만이 그 질문이 같은 날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유대 지도층의 세 파가 예수를 시험한 그 날(화요일)은 질문의 날이었다(Tasker).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킴으로 예수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직접 관계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리새파의 전통적인 부활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그 교리의 모순된 점을 공격하여 백성의 인기가 최고도에 달한 '선생님'이신 예수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 망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성 경: [마22:2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선생님이여 - 그들도 바리새파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하여 가졌던 우월감 때문에 아첨까지는 하지 않는다.
? 모세가 일렀으되 -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에게 있음을 은연(隱然)중 강조한다.
?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장가들어 - 이것은 신 25:5,6의 요약 인용이다. 그들은 신명기를 모세의 말로 인용한다. 신명기까지의 첫 다섯전을 모세의 저작으로 받는 것은 유대인의 정설(定說)이었다. 원래 레 18:16;20:21에서는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신 25:5에서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원문: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제수)를 취하여 아내 삼도록 했다. 여기 `아내에게 장가들어'(*, 에피감브류세이)는 무자(無子)한 과부인 형수에게 장가드는 자에 대해서 쓰였다(창 38:8;신 25:5). 신약에는 이곳에 한 번 나온다. 모세 이전에도 이 수혼(嫂婚)의 풍습은 있었다(창 38:8). 그리고 고대에서 근세까지 여러 동양 민족들에게서 그 관습을 찾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법으로 정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다. 그리고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 뱉고, 저주했다(신 25:7-10). 그러나 이것은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었다고 한다.
?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 `형을 위한'은 원문에 `그의 형제에게'(*, 토 아델포 아우투)이다. `후사'(*, 스페르마)는 원래 파종(播種)을 위해 보관해 둔 씨를 뜻한다. 그리고 `세울지니라'(*, 아나스테세이)는 `일으키다'(raise up)는 뜻이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문이 끊기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고대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Speaker). 형수와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은 형제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되어 죽은 형제의 이름을 물려 받고 그의 족보에 오르고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2:2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우리 중에 칠 형제가 - 이 말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 제시한 예증이 대단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 끼쳐두고 - `아페켄'(*)은 '남겨 두었다'는 의미이다.

성 경: [마22:2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 모든 결혼이 아이를 생산하는데 실패했다. 아이가 있었다면 부활 때에 아이를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 논쟁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실제 있었던 어떤 경우를 확대하여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실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해도 법적인 가능성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성 경: [마22:2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최후에 죽었나이다 - 사두개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여인의 죽음은, 곧 지상에서의 삶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가능성도 바랄수 없는 완전한 종결로 보았다(신약 총론 '신약의 종교적 배경'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여인은 여전히 존재하며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언젠가는 죽음의 문을 열고 일어나야할 잠재적인 부활체였다. 이 신앙에 입각하여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확신했으며(고전 15:19), 또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에 대한 뜨거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2:2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이것은 철학적인 토론을 하기 좋아하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파와 부활을 믿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수수께끼였던 것 같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부활 후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확히 대응된다면 부활한 그 여인은 근친상간의 결혼의 죄의 책임을 지든지 그 형제들 중의 한 아내로 지목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개념은 불합리한 것이 될 뿐이다.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법(嫂婚法), 계대(繼代) 결혼법이 모세의 법인데 모세가 그런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면 율법을 준수했을 때 그런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되는 그런 계명을 명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모세도 알지 못했던 것이며, 솔로몬 시대 이후에야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Lenski). 이 문제는 과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바리새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었으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존재와 운명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있는 것이었다.

성 경: [마22:2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 '성경'(* 하이 그라파이)은 구약전체의 문서를 가리킨다(눅 24:27, 44;요 5:39). 예수는 부활 교리가 전 성경(선지자와 시편을 포함)에 걸쳐 지지(支持)를 받고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데, 만약 부활 교리가 모든 성경에서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는 모세오경을 잘 믿는다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교훈(욥 19:25-27;사 26:19;단 12:2)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 헤 뒤나미스 투데우)이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혼과 흙이 된 육체를 통하여서 영적인 몸을 만드시는 것(고전 15:42-44)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을 현생에서의 육체적 상태로 만드신 것에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경시하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 알지 못하는 고로 - 원문은 '메 에이도테스'(*)로서 문자적으로는 '보지 못하므로'이다. 이 말씀은 눈으로 성경과 피조계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바른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의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다(요 3:10;9:41). 사두개인들은 세상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오해하였도다’(*, 플라나스데)는 중간태로서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를 지적한다.

성 경: [마22:3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원문에 제시된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의 `가르'(*)가 생략되어 있는데,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인 것이다. 예수는 먼저 부활의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부터 언급하고 다음에 성경으로 입증하신다.
? 부활때에는 시집도 아니가고 - 현생에서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창조 법칙이다. 그래서 결혼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출산이다. 그러나 부활 때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된 마지막 때이므로 더 이상 출산이 필요없고, 그러므로 자연히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도 없어진다. 부활의 몸은 이렇게 존재의 규모와 질(質)이 달라지므로 결혼관계가 해소(dissolution)되고, 결혼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게 된다. 이 대답으로부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는 그 이전의 삶이나 여러 관계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선한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할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듯이, 일곱 형제들의 아내는 틀림없이 모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모두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D.A. Carson).
?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는 부활체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천사들과 비교해서 가르치신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천사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존재 특성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부활한 몸은 무성(無性)이라고 했으나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하셨지 남녀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남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는 증거로 존속될 것이다. 천사들과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은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공격이며, 천사들의 실재와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성 경: [마22:3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예수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신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 3:6)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청중에게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영원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므로 그 말씀을 늘 읽고 바로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성 경: [마22:3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로라 - '나는 의 하나님이다'(*, 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라는 이 말씀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의 정형이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어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대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냄으로 우리 자신을 높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피조물의 이름에 즐거이 자신의 존재를 결부시킴으로 그와 맺은 언약의 소중함과 그것에 대한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하나님으로서 틀림없이 약속을 지켜오신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조성되는 기반으로 쓰임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후손됨을 구원의 보장(保障)으로 여겼던 것이다(3:9;요 8:39). 한편 본 구절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노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 의미를 예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셨다.
?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는 예수의 해석을 첨가했다. 실로 예수는 부활과 영혼의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신다.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이상 죽은 자가 아니다. 그들은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 멸절(滅絶)되었다면 그들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이 참여할 수 없고, 지켜 볼 수 없는 언약의 성취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모세와 백성들도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멸절되었다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용한 그 본문은 이 논증의 맥락에 있어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은 물론 천사의 존재와 영(靈)의 존재도 부인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영혼의 불멸성과 부활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모든 것의 멸절로서의 죽음과 사후의 생명 사이의 선택이었다(D.A. Carson).영혼의 불멸이 육체의 부활을 암시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오경의 기록자인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성 경: [마22:3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무리가 놀라더라 - 누가는 바리새파로 거의 확실시 되는 어떤 서기관들이 '선생이여 말쏨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0:39).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상적 반대파인 사두개파를 예수께서 완전히 격파하신 것을 기뻐한 것이다. 대부분의 백성들도 유대교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을 일으켰던 신학적 난제를 단지 성경만으로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지식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성 경: [마22:3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소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벙어리가 되어 다 물러갔다. 그들로서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패(敗)하지 않은 것이 일단은 안심이었다.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은 유대의 정통성에 벗어나 있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켰던 이론들로서 예수께서 이 논쟁에서 패했다면 그 반대 편에서 모든 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던 바리새파도 잘못하면 함께 넘어지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이 예수를 넘어뜨리면 정통성은 더욱 확실해지고, 예수를 신임하나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로부터(요 7:49) 예수를 분리시켜 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 '모였다'(*, 쉰에크데산)에 `에피 토 아우토'(*)가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행 2:1처럼 '같은 장소'를 의미한 것이다. 이 문구는 사 2:2의 인용이며(26:3에 반복사용),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Tasker). 바리새인들은 마치 총회로 모이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책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첫번째 질문이 바로 그들이 짜내고 짜낸 유일한 묘책(妙策)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모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적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다.

성 경: [마22:3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마가는 '한 서기관'(*, 그람마튜스)으로 기록했다. '율법사(*, 노미코스)는 '교법사'(*, 노모디다스칼로스)로도 불리우는데, 율법의 해설자이고 가르치는 박사들로서 넓게는 서기관에 속한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며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성경 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과 유전들이 방대했고, 실제 생활의 민사(民事)적인 일들에 적용하는 데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 12:28-34에는 그 서기관이 질문을 하는 것을 책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논박하여 물리치신 것을 기뻐하며 나왔으므로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점 때문에 마태의 기록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태는 바리새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도를 표현하고 있고, 마가는 그들 중에서도 내심 예수께 호의적인 소수가 예수의 사두개파를 이기신 것을 기뻐하고 더욱더 자기들과 일치하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물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눅 10:25-37에는 율법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의 입으로 두 큰 계명을 말한다. 그리고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연결된다. 이것은 같은 내용이 다른 상황에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을 생략할 수 있다.

성 경: [마22:3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마가복음에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이다(막 12:28). 이는 동일한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크다'(*, 메갈레)는 말이 정도나 계급에 대하여 사용될 때 최상급으로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가 된다(Arndt Gingrich). 유대인들이 계명들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들로 구별했던 것은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의 정신에서 그리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 아키바의 이야기이다.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하라는 이방인의 도전에 부정적 황금률-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 '율법의 전체'이며 그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또 한편 랍비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율법 중에 613(십계명 글자의 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중에 248(사람 몸의 지체 수)조는 적극적, 365(일년의 날 수)조는 소극적인 금지 계명으로 분류하였다. 그 중에는 중요하여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15:4-6의 예). 이러한 변론의 정당한 근거로 그들은 다윗(시 15:2-5, 11계명), 이사야(사 33:15, 6계명), 아모스(암 5:4, 2계명), 미가(미 6:7, 3계명), 하박국(합 2:4, 하나의 계명) 등의 율법 요약 선례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적이고 실제적인 중요한 문제였다. 더욱이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은 유전은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었던 것이다. 눅 20:39, 40의 증거를 보면 이미 예수의 답변은 존경받는 율법사들에 의해 유대인 중에서 우세한 견해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연구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행치 아니하였고(23:2-4), 구약의 목표요 정점인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데 실패하였다.

성 경: [마22:3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 - 신 6:5의 인용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 '쉐마'(*)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이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신 6:8, 9에 따라 '쉐마'를 문의 오른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를 상자에 넣어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잡아 매었다(경문, 23:5).
? 마음(*, 카르디아)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 목숨(*, 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며, 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 뜻(*, 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 다하여(*, 엔 홀레)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라는 말이다. 신 6:5의 원문은 '뜻' 대신에 '힘'이고, 마가와 누가에는 '힘'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중복되는 개념들로서 강조하는 것이지 의미상의 별 차이는 없다. 결국 전 인격을 기울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Tasker), 전 생애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 사랑하라 - 원어 (*, 아가페세이스)는 미래 시상인데, 이것은 명령어의 대용어로서 법조문에 쓰이는 방식이다(Lenski). 이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과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요일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요 13:43).

성 경: [마22:3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크고 첫째 되는 - 원문상(*, 헤 메갈레 카이 프로테) '가장 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카이'는 설명적 용법으로서 가장 크기 때문에 첫째라는 말이다. 막 12:31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성 경: [마22:3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둘째는 그와 같으니 - 분명히 이웃사랑은 두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 호모이아 아우테)는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 헤 엔톨레; 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킨다. 즉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5:1-9). 더욱이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5:43-47).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 4:20, 21에서 설명하고 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이것은 레 19:18의 인용으로서, 본서에서는 이미 5:43;19:19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결실된다. 이 두 계명의 결합은 '12족장의 언약'에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문헌이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해도 누가복음의 평행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계명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형식적인 일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잘못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여 주를 죽였어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는 열심인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이 이웃의 개념이 레 19:18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원수(5:44)를 비롯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 10:29-37)에게까지 확대된다. 사실 누가복음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웃 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요 11:52).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언약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의 반영인 것이다(5:48).
? 네 몸과 같이 - 원문은 '호스 세아우톤'(*)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네 자신처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인되면서 이웃 사랑의 표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억지 해석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랑이 너무 과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한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가? 예수는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계명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 경: [마22:4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이 말씀은 그 뜻을 바로 알기가 무척 힘들다.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강령'(*, 크레마타이)라는 말이다. 먼저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다(사 1:17;58:6, 7). 그리고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구약성경의 요체는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정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근본 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전구약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법은 그 나라의 성격과 형태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신다(신 10:12). 마음으로부터의 하나님 사랑은 다른 모든 종교적 의식들의 기둥이다(삼상 15:22;호 6:6;암 5:21-24;미 6: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질서로서 연합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질서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십계명의 전문에 나타난 바 이미 충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 또 공동체 내부에서 나라가 설 수 없으니 성경과 민족과 역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물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계명이어서 다른 계명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구체적인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다른 계명들이 준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 준수가 헛된 것이다.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가 오히려 비판을 받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희생과 관용이 없고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현신과 자기 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보훈(5:17-20)의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께서 7:12에서 똑같은 표현으로 '황금율'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롬 13:8-10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한편 랑게(Lange)는 예수의 신성 주장이 신 6:4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하도록 해서 책잡고자 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음모가 이 질문에 있다고 하나,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의 입을 통해 사두개파보다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의 율법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에 비해서 옳은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들의 치명적인 헛점을 다음의 질문(22:41)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 경: [마22:4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물으시되 - '모였을 때'(*, 쉰에그메논)라는 완료분사는 '그들이 여전히 예수 주위에 모여 있을 때'라고 번역할 수 있다(Knox). 공관복음의 평행구들(막 12:35-37;눅 20:41-44)은 본문을 예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문과 그들의 답변으로 구성하지 않고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서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기관들의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만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문답을 통해 모여든 유월절 축제의 순례자와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시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음을 평행구들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들의 기록 목적에 따른 편집자의 권한이다.

성 경: [마22:4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 지도층과의 공식적인 논쟁의 출발이 된 그들의 질문-'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에 대한 예수의 역습(counterblow)이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서 그들의 판단의 한계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이 견해는 가장 보편적으로 수납되었던 것이고 선지자와 시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삼하 7:13,14;사 11:1, 10;렘 23:5).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 자신도 예루살렘 입성시에 기쁘게 받아들인 적이 있다(21:15,16). 마태는 거듭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호칭(9:27;15:22;20:30;21:9,15)과 족보(1:1-16) 뿐 아니라 유대인의 왕(2:2;21:5;27:11,29,37,42)이라는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메시야 개념이 세속화되어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16:20).

성 경: [마22:4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 예수는 시 110편(LXX역에는 109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는 사실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와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 110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엔 프뉴마티)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없이 일치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 자신에 의해서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주'(*)로 불리워졌음을 지적하심으로 메시야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윗의 입의 증거로 입증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대의 지도층으로부터 책잡힌 유일한 항목은 당신의 신성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요 5:17, 18;8:56-59;10:24-38). 즉 예수의 신성 주장은 메시야의 초월성 예언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메시야 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과 기적이 가능했다고 인정한다(요 3:2). 그러나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요 10:33). 유일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방 문화와 정치 질서 속에서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와 신격화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문제였고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의 초월성 주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그 이유로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되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세로 일하여 그의 존재와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기대까지는(요 12:34) 있었지만, 영원한 선재(요 8:58),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요 8:54;10:30)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점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윗의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이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어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면서 그의 주이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윗의 주이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참람죄로 죽이려 하지만,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다윗의 주이니 그도 참람하다 하여 죽이겠구나"라는 말씀이다.

성 경: [마22:4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주께서 내 주께 - 윈문은 '야웨(*)께서 내 주(*, 아도나이)께'로 되어 있다. 70인역(LXX)이 모두 '야웨'(*)를 '주'(*, 퀴리오스)로 번역한고로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신구약에는 종이 주인에게, 백성이나 신하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주'(*, 아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이 '나의 주'라고 불러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미 자기의 후손인 메시야가 한낱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신관(神觀)이 이미 메시야 예언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결코 철학적 사고의 반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 이르시되 - 원문(*, 느옴)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비밀한 통첩(通牒)을 의미하여 하나님께만 쓰인다(Lenski).
? 내가 네 원수를 앉았으라 - 그리스도의 '원수'(*, 에크드로이)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다.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인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이며,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당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으며(요 8:44),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요 6:70). 마귀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비방하며, 백성들로 그 통치를 받지 않도륵 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 일을 훼방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원수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 죄와 죽음의 악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니 우편에 앉으셨다. 고대의 왕들은 정복당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밟음으로, 그들의 승리의 기개를 드높였다(수 10:24). '발 아래 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즉 완전한 폐배와 굴복인 것이다. 이는 모든 악의 세력을 근절(eradication)하기 위한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일들이 야웨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소개된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린양처럼 원수들의 죽음의 함정으로 무기력하게 끌려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세로 원수를 결박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성 경: [마22:4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다윗이 자손이 되겠느냐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성경의 예언(사 9:6,7;미 5:2)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요 8:41,42).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한 예언(단 7:13;말 3:1)을 들어 갈릴리 출신 인간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요 7:27).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증거를 권세있는 가르침과 표적과 기사로 이미 충분하게 나타내셨다(요 7:31;10:24-38).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전통과 왜곡된 성경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들과 상관없이 오시고, 또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도층은 늘 예수를 시험한다(12:38;막 8:11;눅 11:16). 그러나 예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그들의 요청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다윅이 주로 알았다면 누구도 주이신 그리스도를 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주께서는 사람의 증거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스스로 증거하시고 아버지의 증거로서 행하셨다(요 8:18). 그리고 오히려 주께서 그 백성들을 심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였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반영한다. 또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회개를 선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3:7-12). 그러나 유대의 지도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표명(表明)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의 전통적 질서와 배치되었으나 백성들로부터는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 못했을 따름이다.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요, 서기관들이었다. 그들, 권위자들이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의 지도층은 예수를 칭할 때 보통 2인칭 호격으로서의 '당신'이라고 했으며, 호의를 가지고 경의를 표할 때 조차 반드시 `선생님'(*, 랍비)이라는 칭호만 사용했다(19:16;요 3:2). 이 공식적인 논쟁의 시작에서 그들은 예수께 '네가'라고 했다(21:23).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고 회의에서 요한처럼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과 일반 백성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고백하고 '주'라고도 칭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지식이 아버지로부터(16:17) 왔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11:25). 이처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또한 예수는 당신의 남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 사실을 증명하셨고,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계 22:16)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셨다.

성 경: [마22:4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한 말도 능히 묻는 자도 없더라 -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동시에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감된 말씀을 감히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문제로 삼을 수도 없었던 사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심사할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책임자들로서 자신들과 이스라엘 전체를 기만(期瞞)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눅 11:52). 마태는 이 해설로 논쟁 기사 전체(21:23-22:45)를 종결짓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미 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음을 밝힌다(막 12:34;눅 20:40).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 대답하셨으나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한 번도 바르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대 지도층과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대화는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아는 잘못된 지식으로 자기들의 주를 죽이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불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으로 고소하는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은 수난주간의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즐겁게 들은(막 12:37) 예수의 이말씀이 나중에,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후에 다윗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 오순절 설교(행 2:34-36)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찌른다. 그리고 그 답변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한 바리새인에 의해서-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이루어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시라"(롬 1:3, 4).

성 경: [마23: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이에 - 본장 초두에 언급된 `이에'(*,토테)는 마태복음에서 독특하게 사용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상관적 부사이다. 그런데 `이에'란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서의 `그 때'(then)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지 막연한 한 시점인 '그 때'(at that time)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시점이 지난 '그 후', 또는 '그 다음', `그리고' 등의 뜻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그 다음', '그리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23장은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장면을 다룬 22장에 바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무리와 제자들에게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누구를 상대로 하여 설교를 시작하는지 말해준다. 여기서 '무리'(*, 오클로이스)란 군중 이외에 민중, 백성, 평민, 서민(the common people)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리'란 특수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및 헤롯 당원들과는 구분되는 일반 평민들의 군집(群集)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2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곤경에 처하여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음을 미루어(22:46) 볼때,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떠나 갔을 가능성이 많다.

성 경: [마23: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 예수께서 질책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특히 '서기관들'은 구약 율법을 연구, 교육하는 일을 전담(專擔)했던 자들이었으며(2:4), 바리새인들은 독선적일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자들이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 중에서 서기관들이 주로 배출되었다. 한편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선생'(teacher)과 같이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신학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서기관이라는 말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질책(叱責)하신다기 보다 하나의 왜곡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비판했으며 또한 그것을 신봉(信奉)하고 전파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율법에 남다른 열정과 열심있는 연구를 통해 요한 힐카너스 시대(B.C.135-105) 이후, `150년 간 백성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지만 그들은 위선과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신앙 형태로써 이스라엘 종교 전반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먼저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공식적인 율법 교사의 석재(石材)로 만든 자리를 가리킨다. 그 당시 유대의 바리새인 또는 서기관들 중 가장 유력한 자가 회당에 마련된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E.L. Sukenik). 예수께서도 이 관례에 준하여 가르치신 적이 있다(눅 4:20-22).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일반적 관념으로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다'라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繼承)하다'는 의미로 이해 되어졌다고 전한다(왕상 1:35,46;시 132:12;Jos.,Antiq. VII, 353, XVII,2). 따라서 율법 강론(講論)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공식적인 모세의 법적 계승자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권위의식을 통박(痛駁)하시면서 계속해서 언행(言行)이 불일치한 그들의 허구성을 고발하셨다(3절 이하).

성 경: [마23: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교훈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힐책(詰責)하신 것은 단지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율 배반적(二率背反的)인 삶의 태도였을 뿐이다. 사실 그들이 가르치는 바 율법 그 자체는 그들의 실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된 진리요 신앙인의 실천 강령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행하고 지키되'라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을 빌어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가르침을 준수하라고 명하셨다. 한편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사테'(*)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며, '지키되'의 원어 '테레이테'(*)는 거의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 땅에 율법의 폐기자(廢棄者)가 아닌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인간이 마땅히 습관처럼 지켜야만 될 절대적인 진리임을 천명(闡明)하셨다. 실로 참 진리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시 119:105).

성 경: [마23: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되 - 이 구절은 3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바리새인들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의한 위선적인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막중한 의무(Alford)라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바리새인들의 자의적 율법 해석에 따른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들 및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된 규칙과 예법 등을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율법의 생활 규범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었다. 즉 그들은 마치 운반하기 곤란할 정도의 무거운 나무단이나 곡식단처럼 성가시고 귀찮고 감당키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백성의 어깨에 지움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율법의 보지자(保持者)가 아닌 곡해된 율법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자기들의 의(義)에 도취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첫번째 잘못이었다.
?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두번째 잘못이다. 즉 그들은 성가신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이(Born-Kamm,Josef Schmid,Schweizer, Sand) 아니라 그들이 만든 힘겨운 규칙들에 눌려 쓰러져가는 자들을 위해 그 의무 규정을 가볍게 해주거나 실천 가능하도록 그 짐들을 경감(輕減)시켜주는 등의 도움주기를 거절했던 것이다(Manson, McNeile, Filson). 여기서 '손가락'이란 앞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의 어깨'와 대조되는 말로서, 결국 '손가락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은 아주 사소한 도움이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배려를 뜻한다. 진정 그들은 율법이 근본 명하는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에 대한 관심은 멀리한채 오히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같은 미세한 규범을 크게 부각시켜 백성들의 어깨에 종교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짐을 부과하였다(23절;행 15:10;갈 5:1). 진정 그들은 가르치고, 부과하고, 제한만을 일삼았을 뿐 그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거나, 가볍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지시고, 나누어지셨다. 그분은 단호한 어조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30) 말씀하시며 당신의 가르침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신다.

성 경: [마23: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 6:1에 이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허영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 전체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임을 선언한다. 그들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일종의 가증한 연극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과 찬사와 인정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요 12:43). 결국 이러한 비판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 심리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숨겨져 있는 잠재적인 욕망까지 모두 제거하는 근본적 인간 변화를 암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 신약성경에서 경문(phylactery)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헬라어로 '퓔랖테리온'(*)이라고 하는 이 '경문'은 본래 '보호물', '호신패'(護身牌), '부적' 등의 뜻으로서 '표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타포트'(*)라는 말에서(신 6:8) 유래한 것인데 예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도의 끈'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테필로트'(*) 또는 '테필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퓔랖테리온'은 바로 이 '테필로트'의 번역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 이후부터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으나, 차차 자기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혹은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이교도들의 부적 같은 것으로 믿고 착용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경문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부분들(출 13:2-10;11-16;신 6:4-9;11:13-21)을 써 넣은 한 조각의 고급 피지(皮紙)를 담은 사각형의 상자였는데 묶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가죽이나 양피지로 덮혀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 13:9,16;신 6:8;11:18을 여자적(如字的)이고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왼팔 안쪽 부위에나 앞 이마에 가죽끈으로 부착하였다. 이 두 부분은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한편 처음 이것을 부착하기 시작했던 때는 아침 '쉐마'(신 6:4,5) 기도 때 뿐이었으나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慣行)으로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경문'의 크기는 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극단의 경건주의자들(사실은 외식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크고 눈에 잘 띄는 경문을 만들었으며 그와 더불어 묶은 끈을 푸는 법과 매는 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規定)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 옷술을 크게 하고 - '옷술'이란 민 15:38;신 22:12등에 명한대로 '심라'(*)라는 겉옷의 네귀에 단 '술'(tassel)을 가리킨다(9:20). 그런데 이 '술'은 석류 문양의 장식으로 된 것이며, 주로 단청색실로 짰다고 한다. 여기 이 청색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청색의 '술'을 달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자기의 거룩성을 자랑하는데 힘썼다. 더욱이 그들은 이 옷술을 크고 길게하여 될 수 있는한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 했다. 사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의복에 '술'을 다는 예를 취하셨지만(9:20;14:36)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의 탈(mask)로서 착용하신 것은 아니었다.

성 경: [마23: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 - 막 12:39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나온다. 즉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으로 어순이 짜여 있다. 강조점을 우선하여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마가복음은 회당에 강조점을, 마태복음은 잔치에 강조점을 더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여기서 '잔치'(*, 테이프나)란 많은 손님을 초대하며 밤이 맞도록 즐기는 저녁 식사(supper)를 가리킨다. 이 잔치 자리의 '상석'(上席)은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유대 또는 헬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역이, 그리고 그 오른쪽 끝에는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다. 이 우측 상단 끝이 바로 '상석'으로서 이곳에서는 몸을 틀거나 고개를 좌우로 하지 않아도 식탁 전면을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 상석을 매우 원했기 때문에 연회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是非)가 발생했다고 한다(눅 14:7). 이같은 상석 차지는 결국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심취해 있는 바리새인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이와 함께 '회당의 상좌'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있는 회당 관리자 옆, 곧 궤 앞의 우측상단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하곤 했다고 한다(Lenski). 바리새인들은 참다운 예배보다는 바로 상좌 차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약 2:2, 3). 실로 그들은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허영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적 즐거움(잔치)과 신앙적 희열(회당)을 놓쳐버린 채 메마르고 배타적(排他的)인 삶에 찌들어 있었다.

성 경: [마23: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시장에서 문안(問安) 받는 것 - 시장 역시 공공장소이다. 공공장소에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이 된다.
?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 랍비(*)는 히브리어(*, 랍비)를 음역한 말로서 '나의 주', '나의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이 용어는 존경의 표시이지만 때로는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랍비 학교에서는 흔히 이 용어를 반복(랍비여, 랍비여)하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보다 한 시대 이전 시대인 힐렐(Hillel, 당시 유대교 율법 주석가 중 한 사람, A.D. 10.년경 사망) 때부터 사용 되었다. 그런데 이말이 공식적 직책으로 사용된 시기는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말은 존경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에게도 사용된 바 있다(26:25,49;요 1:38;3:26). 물론 이 용어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한편 탈무드 시대(Talmudic times, A.D.3-5C)에는 랍비의 지위가 상당하여 랍비의 제자는 그의 명령에 어떤 이의(異議)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 복종만이 가능했으며, 그의 앞이나 옆에서 걸어갈 수도 없었고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Moses, Aberbach).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랍비의 지위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성 경: [마23: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그러나 너희는 - 여기서 이야기가 전환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율법 학자들을 향한 비판을 일단락 짓고 '너희는'(*, 휘메이스)이란 말을 강조하시어 청중과 제자들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설교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 이는 겸손에의 요청인 동시에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한 하나님, 한 주님을 모신 교회구성원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허영심(虛榮心)이나 계급 의식을 버리고 오직 섬김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20:25-28). 특별히 '받지 말라'(*, 메 클레데테)란 부정 과거형으로서 어느 때라도 칭함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이 금지 조치가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당시 특권 의식을 지니고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던 특수 교권주의자들의 권위를 철저히 분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금지 조치는 제한적이며 정신적인 교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나 교사들에 대한 존경 의식마저 금지시키신 것이 아니었다(고전 11:1;12:28;엡 4:11-13;딤전 1:2). 교직에 대한 합당한 칭호는 지나친 공명심(功明心)이나 사사로운 명예욕에 근거하지 않는 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 너희 선생은 하나요 - 시내산 사본이나 베자사본 등에는 본문의 '선생'(*, 디다스칼로스) 대신에 '지도자'(*, 카데게테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의 흐름상 '지도자'란 말은 10절 이하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절에서는 바티칸사본이 제시한 바대로 '선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편 본문의 '너희 선생'이 과연 누구냐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즉 (1)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Carson). (2) 하늘에 계신 모든 존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Bengel, The Puplit Commentary). (3) 각 개인의 내면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는 성령이시다(Alford). 이 가운데 (1)의 견해는 비록 후대에 수정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본문의 표현이 추구하는 바가 예수로 보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뒤이어지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에 근거해 성도들은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자연스럽다고 본다(16:17;요 6:45;행 10:28).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 유언적 메시지로 성도들의 영원한 안내자요 교사이신 성령(聖靈)을 약속하셨다는 점에서(요 14:26), 그리고 뒤이어지는 성부(聖父, 9절)와 성자(聖子, 10절)에 대한 각각의 권위에 대한 삼위 일체(三位一體)하나님의 탁월함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도 무시는 할 수 없다.
?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단 한 분, 영원한 랍비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라는 이 선언은 (1) 인간중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2) 지금껏 누려왔던 종교상의 독재나 특권을 모두 폐지(廢止)하시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므로 어떤 직책이나 전통(傳統)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갈 수는 없음을 명시하신 것이다.

성 경: [마23: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 여기서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가 대비 되고 있다. 먼저 '아비'(*)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는 용어로서, 특히 '땅의 아버지'라 함은 그 시대 이전의 율법선생, 또는 위대한 스승, 원로 교사. 어떤 학파의 태두(泰斗)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Prike,Aboth). 유대인들은 위와 같은 자들을 절대적으로 숭상(崇尙)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요 4:12). 한편 예수께서는 '땅의 아비'를 '하늘의 아버지'와 대비시켜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사람의 영광과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에 미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사람으로부터 찬양받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암시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특별 대우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실로 초대고회 성도들은 오직 종교상의 아버지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하였었다(고전 8:6;고후 6:18). 그러나 이 교훈은 광의적,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이 '아비'란 육친적으로도 능히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로, 디모데의 아버지로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전 4:15;딤전 1:2).

성 경: [마23:1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지도자 -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헬라어로 `카데게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앞서간다', `안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카데게테스'(*)의 복수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교사', '스승'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특히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며 그 각각의 제자들을 책임지는 전인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감히 자신들에게 이 용어를 붙이곤 했다(롬 2:19,20). 실로 자기를 추켜 세워 선생이요, 지도자라 하여 사람들은 끌어 모아 이끌어가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 혼란의 시대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참된 스승이요, 참된 지도자라고 못박는다. 실로 예수께서 앞서(2-7절) 자칭 '지도자'라는 자들의 모순됨을 파헤쳐 비판한 바와같이 그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들이었다. 진정 전인격적인 면에서 모든 이를 바르게 인도하실 분은 예수 한 분 밖에 없다(히 12: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전인격을 그분께 맡기고 오직 그분의 가르침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앞서 가시는 그 분만을 바라며 좇아가야 할 것이다(11:28).

성 경: [마23:1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너희 중에 큰 자는 - 이는 예수께서 질서상 인간 사회(교회 포함)에는 계급이 형성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큰' 것이 한 개인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겸손과 신뢰와 헌신으로 아래 사람을 섬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26,27).
?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 - 타인의 유익만을 위해 성심껏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가리킨다. 실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큰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이들의 권위와 능력은 오직 섬김과 봉사와 헌신과 겸손을 통해 드러난다.

성 경: [마23:1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 본문의 역설적 교훈은 자연법(natural law)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을 반영한다. 즉 종말의 심판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고, 낮아진 자를 높일 것이다(겔 21:26). 그리고 본문이 전하는 것은 겸손과 봉사이지 겸손과 혼성된 노예적 봉사 행위나 바보스러움은 아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구절은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발견된다(18:4,눅 14:11;18:14). 빌립보서 2:8, 9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시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0:26-28에서는 예수 자신이 섬기러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실로 그가 보여준 겸손이나 타인에의 봉사는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봉사 행위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행사하는 최고의 권위와 완벽히 조화되었다. 예수는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의 최고의 겸손과 최상의 희생을 완수하신 후, 그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셨다(빌 2:8-11). 한편 이 역설적인 의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섬김의 자세이다. 다시 말해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 섬김과 겸손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3) 이러한 진리는 명령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명령문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발적 양심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다.

성 경: [마23:1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첫번째 저주 선언]
? 화 있을진저 - 헬라어 '우아이'(*),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적이며(24:1,2)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계 20:7-15).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禍)선언이라 한다. 이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自肅)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Lenski).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이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 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 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2-7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 25:10에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이 말은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4절). (2) 진리를 독점(獨占)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 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성 경: [마23:1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첫번째 저주 선언]
본절은 권위있는 고대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사본들(8,9세기의 모스코, 아도스 사본 등)에는 개역 성경의 13절이 14절에 실려있고 대신 1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심판이 더욱 무거우리라'(KJV)로 되어 있다. 이는 막 12:40과 눅 20:47에서 보충한 후대 필사자들의 인용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3:1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두번째 저주 선언]
?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 두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XX 2,4; Calvin, Bengel). 물론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 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 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라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3절;5:22).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된 성경관과 신앙은 제거되어야지 재생산 되어서는 안된다.

성 경: [마23:1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인도자여 - 세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10절;15:14).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 성전으로 맹세(盟勢)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장).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5:33-37).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성 경: [마23:1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 여기서 다시 16절에서 지칭하였던 '소경된 인도자'를 우맹(愚氓)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우맹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로이'(*)라는 말은 지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은'(foolish)이라는 뜻으로서 5:22;고전 3:18,딤후 2:23등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점증시킨다.
?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은 16절에서 묘사한 행위에 대하여 반문하면서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즉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그 답이 너무도 자명(自明)한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명쾌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극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질문의 의미는 신앙의 척도가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로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들(하나님, 성전)에 의해 부차적으로 거룩한 것(성전의 금)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성 경: [마23:1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너희가 또 이르되 지킬지라 - 여기서 다시 16절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다만 '소경된 자'가 '너희'로 바뀌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고, '성전의 금'이 '그 위에 있는 예물'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17절과 19절도 서로 대칭되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태복음의 특징인 대칭적 구조이다.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운율적 반복형태는 호소력이 강하다. 실로 거룩과 생명의 근원적인 실체를 외면한 모든 종교 행위는 허식이요 우상 숭배일 뿐이다.

성 경: [마23:1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 역시 17절과의 대칭적 구조로서 반복되는 형태의 문장이다. 17절과의 차이점은 17절의 '우맹'이라는 칭호가 빠졌다. 또 18절과 마찬가지로 '금'이 '예물'로 바뀌었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다. 여하튼 예물은 제단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후속적 성물(聖物)이다(출 29:37).

성 경: [마23:2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 이 구절은 맹세에 대한 결론적 선언이다. 내용은 제단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나 예물을 제단위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맹세는 어떻게하든 무조건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5:33-37에서는 결단코 맹세는 하지말라고 선언하셨는데 그 내용과는 상호 모순(矛盾)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9절 주석참조). 표면상으로 볼 때 상호 모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 그 언급 내용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오히려 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補完)적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5:33-37의 내용은 엄격하게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외에 다른것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 모든 맹세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맹세 할수 있는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뿐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내용은 모든 맹세는 어떤 물질적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5:33-37에서 언급된 맹세에 대한 교훈을 보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이 21-22절에 계속 점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 경: [마23:2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 앞의 20절에서는 제단 위의 예물이 제단에 속하여 있음을 밝히고, 예물과 제단을 대비시켜 제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높인 것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그 제단이 있는 성전을 하나님과 대비시켜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물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그리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정직하게 지켜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그 안에 계신 이 - 공동번역에서는 '그 안에 계신 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계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케산티'(*)는 '카토이케오'(*)의 과거분사이다. 그 뜻은 '산다', '거주한다', '자리잡는다'(live, dwell)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초자연적 존재가(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등)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서 '거하다' 등으로 쓰인다. 따라서 특정한 장소에 대해 쓰여지기도 하며, 사람과의 인격적관계의 의미로 쓰여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카토이케산티'(*)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분사형이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나타낸다(1회적 의미).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솔로몬이 완성하여 헌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는 전통적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대하 6:2;7:1-3). 그러나 이러한 성전 중심 사상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보편적 하나님 임재 사상(臨在思想)으로 바뀐다. 즉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이 실현되는 곳,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속에 계신다(요일 4:16).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성전이나, 제단 위의 제물, 또는 제단과 같이 장소나 물질적인 것을 두고 맹세의 근거를 삼아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그 맹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人格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실로 예수에게는 특정한 장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내면적 신실성이 문제인 것이다.

성 경: [마23:2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하늘로 맹세하는 자 - 이 구절 역시 20절과 21절에 이어 똑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그 강조점을 점증(漸增) 시키고 있다. 즉 헬라어로 '우라노스'(*)는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heaven)을 말한다. 그리고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지며(22절;행 7:55;히 8:1;벧전 1:12) 인격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21:25;막 11:30, 31;눅 15:18, 21;20:4,5). 이 본문에서는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졌다. 5:34에서도 역시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와 같은 의미로 묘사한다.
? 하나님의 보좌 -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로노스'(*)라고 하는 보좌(寶座)는 '왕좌' 또는 '옥좌'(공동번역)로 해석한다. 이 단어는 왕이나 지배자의 권자로 사용되기도 하고(눅 1:32,52;행 2:30), 하나님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히 12:2;계 7:15), 그리고 하늘과 동등하게( 5:34;행 7:49) 또는 그리스도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19:28;25:31;히 1:8;계 22:1, 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장소적 의미의 '하늘'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보좌를 두고 맹세한 것은 하나님과 맹세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 그 위에 앉으신 이 - 이 구절은 20절의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21절의 '그 안에 계신 이'라는 구절과 같은 형식을 취하여 '그 위에 앉으신 이'라고 문장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단과 성전 안에 있는 이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에 대한 관계성이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그 위'란 앞에 나온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따라서 '앉은 이'는 하나님이 된다. 20-22절은 세번째 저주 선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은 22절이 된다. 그런 점에서 20, 21절은 마지막 결론인 하나님에게로 이끌기 위해 서술한 잠정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3단계에 걸쳐서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 비판의 내용이 (1) 맹세에 대한 무조건 거부가 아님을 차근 차근히 밝혔고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가르침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그리고 (3) 성전 중심이나 예물 중심 사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와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즉 제단-성전-하늘로 옮겨가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그 안에 계신 이-그 위에 앉으신 이의 형식으로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제단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의 관계를 옮겨갔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마23:2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네번째 저주 선언]
? 박하와 십일조를 드리되 - 여기서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 바뤼테라)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 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23:2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인도자여 - 이 구절은 3번째 저주문의 시작인 16절과 똑같은 문구이다.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에 대해 또다른 형태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다음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 비유적이면서 상징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다. 하루살이와 약대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과장법은 19:24에도 나타나고 있다(5:29,30:17:20,21:21,특징적인 과장법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하루살이는 팔레스틴 기후에서 흔한 곤충(昆蟲)이자 가장 조그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하루살이는 담근 포도주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하기 전에 채로써 포도주를 걸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해서이다(레 11:20,23;17:10-14). 그리고 약대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으나 이것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다(레 11:4). 이와같이 부정한 곤충과 동물을 비유로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더욱이 그들이 삼킨 약대는 곧 그들의 무한정(無限定)한 탐심과 육체적 향락 및 무절제한 죄악을 암시한다. 여하튼 이 비유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 요약하고 있다. 즉 하기 쉬운 일에는 생색을 내며 자랑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여 책임을 피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다.

성 경: [마23:2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다섯번째 저주 선언]
?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通稱)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24의 내용과 비슷하다.
?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그리고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 '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 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성 경: [마23:2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다섯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바리새인아 깨끗이 하라 - 이 본문은 진지한 충고(忠告)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소경된 바리새인'라는 호칭은 24절의 형태를 따랐지만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을 지칭하였고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강렬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이 24절과 다르다. 눅 11:41의 평행구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안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이다. 여기서 '구제하라'는 말은 아람어로는 '깨끗하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는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본문의 전체적 의도는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이 갖는 목적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속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물론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의'(義), '인'(仁), '신'(信)에 입각하여(23절) 행실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결국 위선된 자기 생활로부터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즉 회개하고 거룩에 이르라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과 행실을 바꾸는 것은 먼저와 나중이 없다. 실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知行合一). 그러나 여기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겉치레와 외식에만 치우쳐 있는 그들의 편협(偏狹)한 생활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마23:2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여섯번째 저주 선언]
이 본문은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25절과 같은 형태의 문장 구조를 가졌다. 즉 '겉'과 '안'을 대칭적으로 묘사하면서 비판하고 있으며 특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드러나지 않은 악한 영향력들을 집중 공박(功駁)하고 있다.
? 회칠한 무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斷罪)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창 3:9;요일 3:14,15).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민 5:2;6:6).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성 경: [마23:2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여섯번째 저주 선언]
? 겉으로는 안으로는 - 여기서도 '겉'과 '안'으로 나누어 27절에서 상징적으로 비유했던 위선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겉으로 옳게 보이되'가 27절의 '아름답게 보이나'와 대응되고 의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가 27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로 대응된다. 이것은 마태 특유의 묘사 방법으로써, 강조적 표현이다.

성 경: [마23:2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이 본문은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다(29-36절). 여기서도 역시 저주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 전체 내용상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心醉)한 모든 유대인들이라 볼 수 있다.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성 경: [마23:3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아니하였으리라 -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보강(補强)하는 것이 34절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즉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조상보다 도덕적(道德的)으로나 종교적(宗敎的)으로나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2) 자신이 선지자들의 활동을 조상들과는 달리 용납하고 따르겠다는 말이거나, 지금 선지자들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고백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미화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선지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역시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과 같이(26, 27절) 묘비와 무덤을 세우는데 관심갖는 그릇된 종교인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는 그들의 업적을 통해 비판을 가하여 비판효과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영예를 통해 자신들이 이득(利得)을 보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멀리 있는 일일수록 자신있게 말할 수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과 같지 않다고 호언장담(濠言壯談)한 것이다.

성 경: [마23:3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 조상을 비난하는 자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을 가리켜 '우리가 조상의 때에'라고 말함으로써 그 조상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실로 셈족 언어에서는 누구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과 본질적(本質的)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조상의 죄를 이어 받아 같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원죄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죄의 유전적인 전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필시 운명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죽은 자의 자손됨'에 대한 증거는 선지자를 죽인 자들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신들이 스스로 말한 점이다. 따라서 십계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通念)에 따라서 그 가문의 죄과(罪過)에 대한 책임은 대(代)를 이어져야 했다(출 20:5). 진정 이러한 사실은 죄가 한개인의 돌발적 사고나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전달됨을 뜻한다. 즉 죄의 사회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실로 죄악된 환경에서는 죄인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자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의 자손이라면 더욱 자숙(自肅)하고 남보다 선행에 힘쓰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일곱가지의 저주문을 통해 폭로한 바 처럼 도리어 위선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조상의 죄까지 소급(溯及)하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이미 간파하신 바 있듯이, 당신을 모살(謨殺)하려는 그들의 음모가(21:46;22:15;요 11:47-53)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23:3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이 구절은 매우 도전적이고 역설적이면서 '화 있을진저'와 같은 암시적 저주가 담겨있는 문장이다. 여기서 조상의 양(量)은 30, 31절의 내용을 참고하며 이해해야 한다. 즉 조상이 저질렀던 죄의 양(量)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은 분량을 재는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서(quantity, number, measure), 본문은 결국 그 채우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본문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했던 죄의 잔을 채우는 일을, 너희들이 그 충만한 데까지 채우라는 냉소적인 명령이다(살전 2:16). 한편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서는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조상들이 저질러온 죄악을 이어받아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죄의 포화 상태까지 채워 보라는 말이다. 물론 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마지막 한 방울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일이다(Meyer). 이러한 어투에서 몇가지 의미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선지자를 죽였던 자들의 자손들이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조상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대한 탄식이다. (2) 그들에 대한 희망의 포기이다. 즉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 않는 그들에게 너희 멋대로 해보라는 투의 말이다. 물론 채워진 이후에는 곧 징벌(徵罰)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창 15:16). (3) 역설적 의미이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려고 하다가 해보라고 포기해 버리면 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처럼 저주섞인 포기 선언을 통해 그들이 돌아서기를 바라는 충격 요법적인 어투이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께서 얼마나 죄인들에 대하여 연민(憐憫)의 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연민의 정에서 무서운 저주 선언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이 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노하며 경멸적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사랑에 바탕이 되지 못한 비판과 저주는 분쟁만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바탕을 둔 비판은 회개의 촉구가 되고 양심에 감동을 주게 된다.

성 경: [마23:3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이 구절은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어투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이 어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퍼부었던 내용과 일치한다(3:7).
? 뱀들아 - 공동번역에서는 '이 뱀같은 자들아'로 번역하여 그 의미하는 바를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예로 든 것도 있고(7:10;막 16:18;눅 11:11;고전 10:9 등) 상징적 존재로서 악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고후 11:3;계 12:9,14;20:2). 여기서는 타락하고 저주받을 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뱀이 간교(奸巧)하여 죄악의 씨앗으로 여기는 생각(창 3:1-5)과 저주받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통념 때문이다(창 3:14,15).
? 독사의 새끼들아 - 먼저 독사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의미보다, 여기서는 사단의 기질과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함이 좋다. 그리고 새끼란 문자적으로는 '산출된 것', '탄생된 것', '자식',`자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독사라는 동물을 취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비유된 것이므로 '자식'이라는 말이나 '족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 비유에서 독사와 그 새끼는 똑같이 한 가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조상들의 죄를 비난하지만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조상들의 족속이므로 똑같이 악한 족속이라는 뜻이 된다.
? 지옥의 판결 - 이같은 표현은 랍비들에 의해 자주 사용된 바 있는데(Wetstein) 직역하면 '지옥에 떨어질 심판' 또는 '지옥(게엔나)에 위탁된 심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게엔나'에서의 심판은 영영한 멸망에의 판결이다(5:22). 한편 이와 같은 번역은 모두 종말적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영원한 절망에로 결정된 것이다.
? 피하겠느냐 - 가정법적 표현이면서 반문하는 형식이다. 심판이 피할 수 없이 자명하게 닥칠 것이라는 강조적 표현법이다.

성 경: [마23:3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 여기서 '선지자'란 구약의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동등한 권위와 영적 감화력(感化力)과 자질을 갖춘 복음의 선포자로서 소위 순회 복음 전도자 정도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엡 4:11).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이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덧입고 지혜있는 가르침으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서기관들'이란 유대교 인사가 아닌 그리스도 복음의 휼륭한 교사들을 뜻한다(13:52). 한편 이들은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울 등과 같은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산 증인들을 위시한 많은 교회의 역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예수께서 하신 '내가 보내매'(*, 에포스텔로)라는 말은 현재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회적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계속적 파송으로 인한 당신의 사람들의 지속적인 박해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계시다. 그중 '죽임당하는' 박해는 스데반(행 7:59)과 야고보(행 12:2)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박해는 베드로(요 21:18,19;벧후 1:14)나 시므온이나 안드레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은 많은 사도들이(행 5:40;22:19;26:11;고후 11:24,25), '구박당함'은 수많은 복음 전파자들이(10:23;행 13:50;14:6,20;26:11) 감수(甘受)해야 했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다. (1) 30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들의 호언장담에 대한 반박(反駁)으로서. 그들의 조상들이 지혜자와 선지자들에게 행했던 악행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들도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절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31절의 내용과 더불어 바리새인들도 조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암시한다. (2)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직접 예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장차 예수께서 파송할 자신의 제자와 전도자들에게도 그들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조상들을 비판한 것처럼 그들도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적인 의도로 볼 수 있다. (3) '죽이다', '십자가에 못박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 자신이 앞으로 당할 고난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예언은 예수께서 자주 해왔다(10:23;16:21).

성 경: [마23:3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이 구절 역시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아벨이 성경에 나타난 첫번째 살인의 희생자인 것은 분명하다(창 4:8). 그러나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Zechariah son of Berekish)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된다. 몇 가지 견해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1) 이 사람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으나(Chrysostom) 그가 순교했다는 증거는 없다. (2) 이 사람이 바리스(Baris, 또는 Baruch 또는 Bariscaeus, 이 이름들은 사본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두 열심당원들(Zealots)에게 죽임을 당한(Jos. Wars, IV, 334-44<4절.) 사가랴(Zechariah)였다는 설이 있다(Penn). 그러나 그가 선지자이거나 순교자(殉敎者)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비록 그가 성전 경내 한 가운데서(*, 엔 메소, in the mist) 죽임을 당했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증거도 없다. (3) 이 사람이 구약에서 베레갸의 아들(son of Berekish)인 선지자 스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다(슥 1:1)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다. (4) 이 사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가랴였다는 설이 있는데(Albright and Mann) 이런 견해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증거가 없다. (5)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사람이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sh the son of Jehoiada)일 것이라는 설이다. 이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히브리 정경(正經)에서 마지막 책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 곧 히브리 성경의 첫 책(창 4:8)에서 마지막 책(대하 24:20-22)에 기록된 모든 순교자들이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한다면 이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순교자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가 말하는 사가랴(Zechariah)가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ah)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야다'라는 부칭(父稱)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슥 1:1에서는 선지자 스가랴의 아버지인 베레갸의 이름이 언급되는 한편 스 6:14에서는 그의 할아버지인 잇도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호야다가 대하 24장에 나오는 스가랴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호야다가 130세까지 살았던 사실(대하 24:15)은 이런 견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데, 왜냐하면 스가랴는 여호야다가 죽은 직후부터 그의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알수 없는 바라갸(Berekiah)는 스가랴를 낳고 평온한 세월을 살다가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본절)라고 말할 경우 바라갸가 사가랴(대하 24장에서는 스가랴)의 아버지라는 것도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피 - 이는 '의인의 피'(애 4:13), '무죄한 자의 피'(왕하 21:16;24:4)라는 표현과 흡사한 의미로서 의롭다 인정받는 자의 죽음 및 그 피흘림과 관련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자(犯罪者)의 선고를 받은 것 까지를 포함한 넒은 의미이다(히 11:4). 즉 이것은 아벨과 마지막 순교자 스가랴까지 의(義)를 위해 순교당한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번역에서는 '땅에서 흘린 무죄한 피값'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러왔던 불의한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형벌의 선언인 것이다. 한편 조상들이 저질러왔던 악행은 예언서들과 시편에 잘 나타나고 있다(시 94편).
?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공동번역에서는 '피'를 '피값'으로 번역하여 본문의 의미, 곧 악행에 대한 그 대가를 지불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한편 이 35절은 27:24, 25을 예언한다. 즉 그때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回避)한 데 비해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을 소리지르며 자청하여 떠맡았다.

성 경: [마23:3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다 이 세대(世代)에게 돌아가리라 - 주목할 점은 29절에서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될 때 그 대상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리고 35절에서도 '너희'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한 말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값을 받아야 할 대상이 이 세대(世代)로 지목되고 있다. 즉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집단적, 사회적 책임성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절 주석).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늘 이 세대에서 회개하고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 조상의 악의 양을 충만히 채우면(32절) 바로 이 세대가 멸망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예언을 한 후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다. 실로 과거의 죄악을 오늘 청산(淸算)하지 못하면 오늘 이 세대는 과거의 죄악을 용인(容認)하고 반복하는 것이 되며 결국 과거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본절은 일곱 가지 저주 선언문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23:3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이 절은 23장 전체의 내용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감정을 첨가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문장 형태는 탄식문 형태이다.
? 예루살렘 -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두 번 부름으로써 애절하고 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이 부분에는 마태가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헬라식 발음으로서의 `예로솔뤼마'(*)가 아닌 히브리식 발음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할 수 있고 종교적 중심지로서 상징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탄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을 향한 애정어린 부름이다.
?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 이는 평화의 성읍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였던 도성이 살인자와 반역의 도시로 변한 사실에 대한 예수의 엄숙한 개탄(慨嘆)이다(34절). 한편 모세 율법은 사술(레 20:27), 우상숭배(신 17: 5, 7)등을 위시한 가증스런 범죄자를 돌로 쳐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미쉬나(Mishnah, M. Sanhedrin 7:4)는 한발짝 더 나아가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돌로 치는 일은 분노한 폭도(21:35;행 7:57,58)나 사전에 계획된 공모(共謀)에 의해 이뤄지기도 했다.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이와 같은 표현은 36:7;사 31:5;36: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격언구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격언구는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강렬하고 순결한 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
? 내가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초월적으로 돌아보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요 8:58). 그러나 본문의 '몇번이냐'(how often)라는 말은 주어(主語)가 예수자신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기간 중 마치 암탉이 독수리의 침입을 예상하고 자기 새끼를 바삐 모으듯이 예루살렘(모든 유대인들을 뜻하는 환유법적 표현)을 모아서 보호하려고 노력하셨다(신 32:11;렘 48:40).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심판과 화를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처럼(겔 18:32) 누구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단 1회만이 아니라 집요(執拗)하고도 끈덕지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이 의미는 단지 그들이 원치 않는 수동적인 배척 뿐만 아니라 비난과 공격 등의 적극적인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앞의 '죽이고', '돌로 치는'이라는 표현과 연관시켜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무모하게도 자신들의 멸망의 날을 앞당겼던 것이다. 정녕 하나님의 사랑을 영속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정한 때에 극렬하고도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사 28:1, 2).

성 경: [마23:3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 너희 집이 -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 외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를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신령한 성전으로서 기독교인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딤전 3:15;벧전 2:5;4:17). 또 '나라'나 '가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집'을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며(24:1),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렘 12:9). (2)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여하튼 예수를 끝까지 배척함으로써 버림받은 성전이나 국가는 '나의 집'이 아닌 '너희 집'이 되는 것이다.
?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한편.이 '황폐한'(*, 에레모스)이라는 단어는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 바로 뒤이어지는 `버린 바 되다'(*, 아피에타이)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실로 예루살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정녕 생명(生命)과 복(福)의 근원이신 예수가 '버린 바 된' 곳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영영히 '황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사 5: 5, 6).

성 경: [마23:3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시 118:26을 인용한 문구로서 얼마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의 연호와 함께 사용된 구절이다(21:9). 아마 이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러 온 자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했던 말로 추측된다. 그런 점에서 성전의 주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도 존귀한 승리자로 오셨으므로 마땅히 모든 이들로부터 인사와 존경을 받아야 했다(France). 한편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배열됨으로써 '까지'라는 말을 예루살렘 입성 때 곧 종려 주일(Palm Sunday)까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이 말을 외쳐된 일은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고대하는 역설적인 성취(ironic fulfillment)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 예수께서 있다. 특히 `이제부터'(*, 아프 아르티)란 말은 대부분 종말의 완성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26:29, 64) 의해 더욱 확실해진다. 이와 더불어 본절의 '나를 보지못하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 후의 예수의 출현(出現)을 가리키지 않고(행 10:41) 그의 종말적 도래(Parousia)를 가르킨다고 본다. 그런데 문맥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24:30, 31;빌 2: 9-11;계 1:7). 한편 인용된 시 118편의 구절, 즉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고려할 때, 예수는 심판자로서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왕으로도 재림할 것임을 알 수 있다(Benoit, Bonnard, Sohlatter).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지금껏 메시야를 배척해 온 잘못을 회개하며, 전민족적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메시야를 '호산나' 찬송하며 그분의 절대 권위를 승인(承認)할 것이며(롬 11:26;슥 12:10), 그로 인해 선민의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호 3:4, 5).

성 경: [마24: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 여기서 '성전'(*, 히에론)은 문자적으로 성전 경내, 곧 거룩한 경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셀돈'(*)은 제 2 과거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뒤이어 나오는 '가실 때에'(*, 에포류에토, 서술적 미완료 시상)보다 앞선 시제로 볼 수 있으나 전체 문맥상 두 행동이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떠나고 계셨으며(여셀돈) 그렇게 나아가실 때 성전 건물 옆을 지나가셨다(에포류에토). 따라서 1, 2절의 내용은 성전 뜰에서 나눈 대화로 볼 수 있다. 즉 21:23에 예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성전을 '나왔다'함은 21:23 이후 행해진 모든 가르침은 줄곧 성전 뜰 안에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7화(禍) 선포(23장) 직후 영영히 성전 밖으로 나와 그 곳을 떠나가셨다.
?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 평행구인 눅 21:5에서는 '제자' 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킨 것으로 표현한다. 더구나 같은 평행구인 막13:1에서는 '제자들 증 하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켜 보인 것은 앞서 23:38에서 언급한 예수의 선언과 관계가 있다. 즉 당시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그 웅장한 성전은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선언한 성전의 '황폐와 버림 받음'에 대한 예언은(23:38)쉽게 믿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성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정말 황폐하고 버림받게 됩니까? '라는 말없는 물음을 했을 것이다(막 13:11).
? 성전 건물들(*, 타스 오이코 도마스 투 히에루). - 이 성전 건물은 원래 B.C.19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에(2:1) 의해 착공된 것으로 비록 제 2성전을 개축할 의도로 시작한 것이기는 하나 거의 신축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제 3성전이라고 불리운다. 즉 이 건물은 솔로몬에 의한 제 1 성전(왕상 6:1-8:11, B.C. 959-586)과 스룹바벨에 의한 제 2성전(포로기 이후 B.C. 520년경에 재건)에 이은 새 성전 건물이었다. 이 제 3성전은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의 기나긴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중간에 봉헌식(착공 9년만에)을 하는 등 나름대로는 화려(華麗)한 외모로 치장되기도 했다(요 2:20). 실로 제 3성전은 유대 출신 제자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으며 마치 눈덮인 산처럼 아름다움 것이었다(Jos, Wars 5, 6).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전은 거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졌으며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꾸며졌다고 한다.

성 경: [마24: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 대답하여 가라사대 - 새번역과 공동 번역 성서는 '말씀하셨다'로 이 부분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절에서 질문 내용이 전혀 언급 되지 않았는데 '대답'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1절 주석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같은 질문을 제자들이 던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2절에서 답변하신 내용이 1절 주석 끝 부분에 가정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절하다.
?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지금 화려하고 장엄한 자태를 자랑하는 성전 건물의 외형을 사실 그대로 긍정하셨다. 그리고 이같은 인정을 통해 뒤이어지는 당신의 경고를 더욱 강렬한 뉘앙스(nuance)로 대비시키셨다. 한편 공동 번역 성서는 이러한 대비적 표현에 맞추어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 성전 건물에 사용된 돌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용된 돌 하나의 크기는 25×12×8 규빗 (1 규빗은 약 45.6cm)의 상당히 큰 것으로서 누가 복음에서는 '미석', 즉 '아름다운 돌'이라고 묘사한다(눅 21:5). 그런데 이러한 돌들이 돌위에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회복 불가능의 완벽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에도 여러번 언급된 바 있다(렘 26:6, 18; 미 3:12; 학2:15). 그런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는 심판은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A.D. 63년에 제 3성전이 완공된 후 겨우 7,8년 후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성전의 허무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렇게 성전 파괴에 대한 단호한 표현을 통하여 24장에 소개될 종말에 관한 메시지의 긴박성과 그 파멸적(破滅的)인 성격을 웅변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러한 언급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있을 극렬한 심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시고 있다.

성 경: [마24:10]
주제1: [역사의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시험에 빠져(*, 스칸달리스데손타이)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 '죄를 짓게 하다' 또는 '노하게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새번역에서는 '믿음을 잃고'라고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결국 박해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다(살후 2:3). 이처럼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면 교회의 외적인 풍랑과 더불어 교회 내부로부터의 분란이 발생하게 될것이다. 이때는 인내와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벧전 4:12).
?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새번역과 공동 번역 모두 '서로 배
반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분열의 모습이다. 여기서 '서로'(*, 알렐루스)는 상호대명사로서 쌍방간의 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똑같이 배신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의 간교(奸巧)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되면 사랑과 하나됨의 공동체인(요 15:17) 교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같은 교회 내부의 분란이야말로 성도가 맞는 가장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징조이다.

성 경: [마24:1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거짓 선지자(*, 프슈도프로페타이) - 여기 이들은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과 능통한 언변(言辯)을 지녔을지라도 그 가르침과 행위가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이다(계 13:11 ff). 실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는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여러 번 주어져 왔는데(7:15; 24:5; 고후 11:13; 딤후 2:17, 18), 그들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 등의 모습으로 교회의 질서와 진리를 와해시키는데 힘을 쏟았다(행 20:30; 갈 1:7-9; 골 2:18-23). 실로 기독교회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수없이 유린(蹂躪)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특(邪慝)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살후 2:8-12).

성 경: [마24:1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불법(*, 아노미아) -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이라는 미명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현상'이라고 지칭한다.
? 사랑이 식어지리라 - 여기서 '식어지다'(*, 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 또는 '차가워지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사랑'(*, 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과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상호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다. 여하튼 모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 만다(고전 13장).

성 경: [마24:13]
주제1: [역사의 종말과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끝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의 '끝'은 5절부터 나열한 여러가지 재난과 박해 그리고 공동체의 분열이 있을 고난의 기간이 끝날 때를 말한다. 그리고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굳게 서다', '참아내다'는 뜻으로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적 신앙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텨나감으로써 끝내 승리, 쟁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뢰하며 온갖 실망이 겹쳐 절대 절망에 이르렀어도 희망을 갖고, '아노미 현상'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곧 견디는 자이다.
? 구원을 얻으리라 - 끝까지 견디는 자의 보상은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세상의 끝날에 얻게 되는 천국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은 곧 세상의 완성이므로 그때까지 견딘 자는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천국 백성의 자격을 갖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종말적 심판의 때에 얻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2) 현세의 구원에 대한 의미도 생각할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상 끝에 나타날 종말적 징조는 예수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았고, 또한 종말의 징조는 역사 속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지적했던 그런 징조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종말적 최후의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현실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성도에게 매일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process)으로 볼 때 날마다 겪는 새로운 여러가지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일 구원을 고대(苦待)하며 필요로 하는 자는 날마다 종말적 자세로 사는 것이다.

성 경: [마24:14]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증거]
? 천국 븍음(*,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4:23 ;갈9:35; 24:14).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자신을 지칭한다(요 1:14; 고후 5:18). 한편 복음의 요체는 '천국' 곧 모든 나라와 모든 인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이다(3:2; 4:23).
?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 혈통과 민족을 초월한 천국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전 1:24). 여기서 '증거'(*, 마르튀리온)란 신앙에의 부름을 위한 유일한 근거이자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음 증거의 양면성이다.
?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여기 '온 세상'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 때,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라는 사상은 사도들이 계승한 사상이었고 신약 성경 안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눅 :1; 4:5; 행 11:28; 17: 6, 31; 19:27; 롬 10:18; 계 3:10; 12:9; 16:14). 한편 당시 '온 세상'을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영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행 1:8; 롬 15;23). 그러나 본문에서의 '온 세상'이란 좀 더 포괄적이고 광의적(廣義的)인 의미로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지역, 곧 전세계의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봄이 좋다. 어쨌든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세상의 심판과 멸망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세상의 완성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8절, 13절 주석 참조). 실로 세상이 완성되는 날, 그날은 모든 민족이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끝은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무한한 기대가 된다.

성 경: [마24:15]
주제1: [역시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다니엘의 말한 바 - 본문은 단 9:27; 11:31; 12:11의 70인역(LXX)에 의한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 멸망의 가증(可憎)한 것 - 이는 단 11:31; 12:11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은 여호와 경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를 폐하고 우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즉 성전을 더럽히겠다는 말이다.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가증한 것'은 여호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신성 모독과 연관된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브델뤼쏘마이'(*)로서 원뜻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 '혐오스럽다'이다. 실로 하나님께 우상과 거짓 사술 등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멸망의'란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다니엘서의 이 말은 분명 .B.C.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의미한다(마카비 서 1; 54-64, Josephus, Antiq., 5:4).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통해 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거룩한 곳이 황폐되고 치욕당할 것이라 하셨다. 이런 사실로 인해 (1) 혹자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우스 갈리굴라(Caligula) 황제(A.D.37-41년)가 그의 상(像)과 기(旗)를 성전에 세우려 했던 계획을 본 예언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과 예수가 말씀하신 내용과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다. (2)또다른 학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눅 21:21, Bengel, Bruce).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같은 독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그의 경배와 동일한 차원의 경의를 그 기에 표해야 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ephus, B.F.,Ⅵ. 6) A.D.70년. 예루살렘을 훼파(毁破)한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로마군기를 성전 동편 문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미 수년간 로마 군대의 기를 보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말(一抹)의 새로운 징조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예언과 본 견해를 연관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A.D.70년 이전 열심 당원들(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Alford). 그 당시 열심 당원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하고 매일의 제사를 훼방했으며,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제사장을 임명하였(Jos., Wars , 147-57, 162-92, 334-44). 요세푸스는 그들의 만행(蠻行)이 바로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한편 당시 그들의 만행 동안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곳을 달아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Lane, Gaston). 그러나 이 견해 역시 확정적으로 인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한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처참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의 예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증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내용이 갖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9-12절) 교회 분열의 혼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때 신앙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전(殿)인 인간의 내면을 공격하며 파괴하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살후 2:4, 8).
? 거룩한 곳(*, 토포하기오) - 앞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예루살롑 성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사 6013; 2 Macc 1:29; 2:18). 그러나 본문에는 정관사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한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회당까지도 포함한 신앙의 중심지들로 보기도 한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都城)인 예루살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앙인의 마음속이 될 수도 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평행구를 이루는 눅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표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거룩한 성전에 대한 유린을 멸망과 연결시킨다.
?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언한 바를 어떤 영적 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感知)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이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그 보다는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고지(告知), 즉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단 9:25; 12:10)는 말처럼 예수께서 친히 경고적, 교훈적 메시지로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성 경: [마24:16]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유대에 있는 자들은 - 닥쳐올 재난이 단지 예루살렘에만 국한(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 구절이다.
?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유대인들에게는 산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시 11:1). 또한 구약시대 때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고(출 19:1-2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다(출 3:1-12). 그리고 예수의 핵심 설교인 산상 수훈도 역시 산에서 이루어졌다(5-7장), 지금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는 곳도 바로 산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산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반영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여하튼 이 경고에 의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한 적이 있다. 즉 A.D.68년 로마의 베스파시안(Vespasian)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城內)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모두 요단강 계곡에 위치한 베레아 지역의 펠라(Pella)라는 곳으로 피신함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Euesebius, H.E. , 5:3). 한편 본문의 이와같은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거룩한 곳이 더럽혀지고 성전이 유린당했을 때, 즉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속히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도망은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4:17]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지붕 위에 있는 자는 - 유대인들의 가옥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하여, 주로 기온이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場)으로 활용되었다(신 22:8; 막 2:4 행 10:9). 그리고 이 지붕에는 지상과 연결된 두 통로가 있었는데, 그하나는 지붕에서 집 외부로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붕에서 그 집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 집 안에...내려가지말며 - 이는 재난을 만난 사람이 취할 태도로서 결코 집 안 귀중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먼저 천하보다 귀한 생명부터 보존하라는 교훈이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각종 난리와 폭란이 겹쳤는뎨(6절), 이때 민첩한 도피가 필요했었다고 한다. 적어도 재난을 만난 자는 롯의 처를 생각해야만 한다(창 19:26; 눅 17:32)

성 경: [마24:18]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거처가 있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성 밖에 마련하였다. 그리고 일터에 나갈 때는 두터운 외투는 집 안에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의복으로 나섰다고 한다. 재난의 때에는 그 겉옷을 취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을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급박(急迫)한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원을 향한 단호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다. 악으로부터의 확연한 갈라섬, 비신앙에서 돈독한 신앙으로 돌아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성 경: [마24:19]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아이 배 자들(*, 가스트리 에쿠사이스) - 여기서 '가스트리'는 배를 나타내기도 하고 자궁(Womb)을 뜻하기도 한다(1:8, 2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계 12:2). 그리고 '여쿠사이스'는 '소유', '보관', '결혼', '사랑의 소유', '즐긴다', '필요하다', '궁핍하다' 등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자궁'(*)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임신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1:18, 23; 눅 21:23; 계 12:2 등). 실로 임신한 사람과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이는 홀몸이 아니다. 즉 자신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확연하다. 이는 여자에 대한 저주도, 임신부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날의 고통이 남을 돌볼 만큼 여유있게 대처할 만한 것이 못되기에 미리 미리 종말의 때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날이 오면 민첩하게 구원의 일에 몰두하도록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며, 다른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A.D. 8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미처 도피하지 못한 유아와 어머니들이 예루살렘을 가득 메웠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아사자(餓死者)와 고통받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한다(Jos, Wars, V 10:3).
? 화가 있으리로다 - 여기서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은 저주 선언이 아니라 동 정을 표시하는 탄식문이다. 즉 '아 ! 안되었도다'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오 ! 슬프도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본래 '우아이'(*)라는 뜻은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화를 입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불쾌하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의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 경: [마24:20]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 겨울과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활동하는데 가장 어려운 때이다. 즉 겨울에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질고 식량 확보도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취약(脆弱)한 계절이다. 또 안식일에는 종교적 행사에 주력해야 했으며, 율법적으로 1.8Km이상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산으로 오른다거나 피신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이 경고로 미루어보아 안식일을 그 당시에 철저히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도 바로 이러한 때에 환란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신다. 역사적으로 볼 때 B.C 168년 수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공이 있던 날도 안식일이어서 유대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살육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성 경: [마24:2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이는...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 본절은 '이는'(*, 가르, '왜냐하면')이라는단어를 사용하여 17-20절에 걸쳐 피난하라고 권면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기 제시된 '환란'(*, 둘립시스)은 단 다니엘의 내용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즉 다니엘은 '건국 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표현한 것에 견주어 예수께서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 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은 피상적 예고가 아니라 역사롤를 통해 밝혀진 진실이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예루살렘의 함락(陷落)에 관한 보고에서 예루살렘 함락 당시 유월절 절기에 참석키 위해 수많은 민중이 그 성내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군 침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10만명,포로가 9만 7천여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Wars, 9:3). 그에 덧붙여 그곳이 각종 질병과 기근(饑饉)으로 고통당할 뿐 아니라 진쟁의 참화로 너무나 참혹하여 장례식도 치릍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여인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끔찍한 참변(慘變)은 미래의 역사에 도래할 마지막 대환난의 전조(前兆)이자 예표가 된다(계 11:3, 11; 12:6, 14).

성 경: [마24:2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 '그날들' 앞에 나열한 환난의 날에 겪게 될 고난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감하지'에 해당하는 원어 '에콜로보데산'(*)은 '지다'는 뜻인 '콜로보오'(*)의 제 2조건문으로서 비록 미래와 시점에 와 있으나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특질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고통의 양을 큰 묶음으로 줄여 주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한 공동 번역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이다. 여기서 그 환난의 날에 대한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마지막 날에 준비된 환난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이지 않는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여기서 '모든 육체'는 단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전 인류로도 보아야 한다. 이는 예언의 이중성(현재, 미래)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에서는 본문을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재난의 혹독성과 파괴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감하시리라 - 이 말은 '택하신 자들'을 위한 약속이다. 그렇게 무서운 환난이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환난은 유동적(流動的)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약속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상기시킨다. 즉 의인 열명만 있어도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비슷하다(창 18:32). 한편 여기서 '택하신 자'(*, 에클레크토스)란 '뽑혀진'(chosen, selected)의 뜻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 모두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선민 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앞의 13절의 내용처럼 환난속에서 끝까지 견디며, 12절의 역설적인 의미처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변치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들로 인해 비록 세상이 파멸로 달음질 칠지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이 도리어 완성과 완전한 구원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개방적으로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앞에서 교회의 파괴를 말하면서 13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기서도 세상의 환난을 가장 무섭게 묘사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난의 예고는 멸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희망의 예언이라고 볼 수있다.

성 경: [마24:23]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그 때에 - 이 말은 앞 내용과 직접 연결되어지나, 곧바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시점에 과연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한 서언적 표헌이다(Chrysdstom). 한편 여기서부터 35절까지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제 현상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번째 묶음이다. 특별히 이 세째번 묶음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지금까지의 초점에서 발전하여 세상 종말이라는 큰 흐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물론 예수의 예언은 항상 이중적(현재, 미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을 절대시할 수는 없다.
?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 환란의 때에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다(5절). 자칭 메시야가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에 재난이 많을수록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한편 본절은 5절의 표현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5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소문에 의해서 여기저기 혼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에게 안내하는 자들의 무리가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이 바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모여들 것이나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의적이 구원 개념과 유사한 절대자를 찾아 헤맬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의 재림으로 모든 것을 밝히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성 경: [마24:24]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교활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의 권위와 이름과 능력을 도용하여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자들이며(5절 참조), 거짓 선지자는 그릇된 영적 탁월성과 거짓 사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는 자를 가리킨다(7:15 참조). 이런 자들에게는 선택받은 자들 조차도 속을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표적(標的)과 기사(奇事)를 통해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적'(*, 세메이온) 말은 '표징', '표시'(sign), '증거', '상징'(indication), '전조', '징조'(protent) 또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증명하는 각종 이적을 가리킨다. 또한 '기사'(*, 테라스) 역시 '경이', '놀라운 일'등의 뜻으로 '표적'과 거의 흡사한 의미이나 '표적'이 주로 인간과 관계된 외형적 증거라면 '기사'는 주로 자연 만물과 관계된 내면적 능력이나 영향력 등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주로 같이 연결하여 쓰여졌다(요 4:48; 행 2:22; 4:30; 살후 2:9; 히 2:4). 물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잡은 자, 곧 사단도 악의적 측면에서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이 말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활동함을 암시한다.그리고 가능하면 택하심 받은 이들도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공동 번역 성서는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하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라고 번역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을 속이려하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할 수만 있으면'(*, 에이 뒤나톤)이란 미혹하는 이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만약 가능 하기만 하다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심지어 선택받은 자도 미혹(迷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성도들을 '반드시' 미혹시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택한 자, 곧 예수의 참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공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엡 6:10-18).

성 경: [마24:25]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내가...미리 말하였노라 - 예수께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은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들로 담대하게 하려고 할뿐 아니라(요 16:4) 자기 자신에게 있는 초월적 권위를 소개하기 위함이다(신 13:1-4; 요 14:29).

성 경: [마24:26]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광야 - 여기서는 23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제시하고있다. 이 의도에 대하여는 27절의 주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향편 '광야'는 전통적인 유대 관념에 의하면 메시야 도래의 공개적 장소로 이해되었으며, 예언자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왔고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 외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3:3). 또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과 같은 엣세네파 공동체가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요세푸스의 보고에 의하면(Jos., Wars, 5.7) 많은 사기꾼들이 광야를 주무대로 백성들을 미혹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골방은 좁고 밀폐된 비밀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대중적이고도 집단적인 단체나 집회에 주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밀한 개인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 경: [마24:27]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주의 재림이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신다.
?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 이 비유는 세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주의 재림이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재림 시기는 44절에도 언급되고 있다. 또 25장의 비유들 속에서도 재림시 급작성과 돌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2)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번개가 순식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나타나듯이 주의 재림도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Weiss, Broadus). (3) 재림의 선명성(鮮明性)이다. 은밀하거나 교묘한, 그리고 모호하여 아리송한 형태로 재림하지 않고 번개의 섬광처럼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엄격한 방법으로 모두가 공히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와같은 재림에 대한 선언은 앞에서(5, 23, 24, 26절) 묘사된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의 소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거짓된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5절에서 자신있게 그리고 선언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속지 말라고 권면하셨다(26절)

성 경: [마25: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때에(*,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4:17;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 등(*, 람파다스)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눅 15:8;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성 경: [마25:2]
주제1: [종말을 대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성 경: [마25: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성 경: [마25: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성 경: [마25: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 '졸며'라는 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성 경: [마25: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밤중에(*,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5:7]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 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성 경: [마25: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성 경: [마25: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요 14:16).
?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성 경: [마25:1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성 경: [마25:1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 경: [마25:12]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성 경: [마25:1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5:1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또(*, 가르) - 이 등위 접속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달란트 비유가 바로 설명한 열처녀 비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종말적 심판에 관한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때 - 이 구절은 막 13:34의 문장과 같은 형식이다. 막 13:34은 마가복음서의 종말론에 대한 결론부로서 그것이 본 달란트 비유의 도입부가 되고있다. 또 막 13:35는 마 25:13, 즉 열처녀 비유를 통해 암시한 종말 교훈의 결론이 되는'깨어 있으라'는 구절이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막 13:34,35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사람'은 같은 평행비유인 눅19:12-27을 보면 왕위를 받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귀인(귀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헤롯이 분봉왕(분봉왕) 책봉을 받기 위해 오래도록 로마에 있었던 사실이나, 아니면 당시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먼 무역 여행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났던 사실에 근거한 비유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같은 일상적 사실을 암시한 것이기 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 땅에 성육신(Incarmation)하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이 땅에 심판의 주로 오실것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타국에 갈제'(*, 아포데몬)란 문자적으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막떠나려 할 제' 또는 '해외로 가려 할 시점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눅 19:12은 이와 유사하게 '먼 나라로 갈 때에'로 번역되어 있다.
? 그 종들을 불러 - 여기 '종들'(*, 둘로이)은 그 주인의 전적인 소유였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인격적 친근감을 주는 그야말로 주인과 동등한 위치로서의 신분을 암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 '종들'은 여전히 주인의 권위아래 놓여 있다. 한편 이 '종들'은 상징적으로 주의 승천 이래로 당신의 교회를 책임질 복음사역자들 및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
?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고대 사회에서 종들은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종들에게 자기의 동업자처럼 각각 소유를 나누어 준다. 한편 여기서 '소유'(*, 휘파르콘타)란 '재산', '소유물'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주로 '돈'을 가리킨다. 이 '돈'은 그들 각자에게 적당하게 '맡겨'질 것이지만 여전히 그것에의 원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즉 비록 '종들'의 노력과 지혜로 많은 이윤(이윤)을 남긴다 하더라도 그것의 법적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성 경: [마25:1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각각 그 재능대로(*,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하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것은 불공평에 의한 공평의 원리를 실현하시는 그분의 지혜를 반영한다(민 7:4-9). 이러한 재능에 따른 배분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인은 맡김을 받은 청지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물질적 소유 뿐 아니라 성격, 지식, 교육, 의지, 환경 등은 근본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져졌다는 것은 저마다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것은 각각 소중하고 존귀한 것임을 말한다. 각 사람마다의 개성과 창조적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각 독특하게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적합한 소유가 맡겨졌다는 믿음은 각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그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달란트'(*)라는 말은 구약시대에는 무게의 단위로 쓰였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무게와 화폐의 단위로 동시에 쓰여졌다. 본문의 경우에는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무게 단위가 화폐 단위로 발전된 것은 금이나 은을 저울로 달아서 상품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달란트를 화폐 단위로 취급했을때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가 된다(1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에 해당). 이것은 눅 19:11-1에 언급된 '므나'(1므나 = 약100 데나리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한편 본문의 비유를 통해 '달란트'는 보통 상징적 의미로 '재능'을 뜻하게 되었다. 실로 각자의 독특한 재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인 것이다.
? 떠났더니 - 주인은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를 마친 후 더 이상의 염려나 망설임 없이 자기 길을 떠났다. 이것은 주인의 그 종들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행동인 동시에 그 종들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성 경: [마 25:16,17]
주제1: [종말의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바로 가서(*, 유데오스 포류데이스) - 헬라어 원문에는 '바로'(유데오스)라는 말이 15절 끝에 붙어 있지만 오히려 개역성경의 방식대로 16절 초두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하튼 이 말은 종이 소유를 맡고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여 어떤 일에 착수(着手)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지체없이 그 일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로서의 바른 자세이다.
? 그것으로...남겼으되 - 여기서 '그것으로'란 제한 문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 종은 주인이 제공한 재능(달란트)에 근거해, 주인의 분부와 소망에 따라,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받은바 '그것으로' 일한 것이다. 여기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돈을 투자하여 이윤을 남긴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단지 은행에 안전하게 넣어두고 이자(利子)나 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알다시피 장사에는 확정적인 이윤이 무조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래 갖고 있던 소유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일이다. 따라서 장사를 하는데는 위험 부담을 안고 모험을 해야 한다. 이러한 모험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1)주도 면밀(周到綿密)한 계획과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2) 장사를 할 종목과 상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3) 항상 진취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청지기로서의 마음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이윤을 남기었다는 것은 자기 맡은 바에 최선의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람의 종 가운데서 두 사람을 성실하고 층성된 종으로, 한 사람을 불성실한 종으로 묘사한 것은 숫자적인 비율로써 선한 종에 대해 강조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그보다 적게 받은 사람이 똑같이 성실하게 장사하였음을 말함으로써 (1)소유하고 있는 양의 차이에 따라 성실성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며 (2) 주인의 주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 데에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성실히 노력함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는 자세에 있음을 알 수있다. 실로 그들은 100% 충성과 성실을 통해 100% 결실과 만족을 주인께 돌려 드렸다.

성 경: [마25:1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땅을 파고...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돈을 땅에 파묻어 두는 것은 그 당시의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즉 13:44에서 천국 비유를 말할 때 '밭에 감추어진 보배'라고 묘사하는 바와 같이 땅 속 보관은 당시 안전하게 재산을 보관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앞서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위험을 안고 장사를 한 두 종에 대비시켜 모험을 두려워하는 안전 제일 주의의 소심한 종을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범죄나 사취(詐取)가 아니었다. 그는 1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의 도를 정확히 간파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고의(故意)로 그 재능을 묵혀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한 적극적 충성과 봉사를 등한히 한 것이다. 실로 진취적인 봉사 의식의 결여는 곧 소극적인 범죄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또한 그의 불충한 죄의 동기(動機)를 언급하자면 적어도 그는 상대적 빈곤 의식 때문에 주인이 맡긴 '1달란트'의 가치를 무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5:1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오랜 후(*, 메타 데 포륀 크로논) - 여기서도 종말적 심판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표현은 5절과 24:48의 '더디 오다'(*,크로니조)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다. 물론 이같은 '오랜 후'라는 시간적 감각은 순전히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실로 천년이 하루같으신(벧후 3:8, 9) 그 분께는 영원한 경륜(經綸)의 한 부분일 뿐이다.
? 주인이 들어와 - 이 말은 '너희 주가 임하다'(24:42), '인자가 오다'(24:44), '주인이 오다'(24:46)라는 표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이다.
? 저희와 회계할새(*, 쉬나이레이 로곤) - 18:23에서와 같이 종말적 심판을 상업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Deissmann). 이 상업적 용어는 종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장사로 비유하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실로 심판과 재림의 주께서는 종말의 심판 때에 지상에 거하는 모든 종들의 사역 결과를 놓고 회계(會計)하실 것이다(고후 5:10; 계 20:11-15).
?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처가 주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고전 15:58).

성 경: [마25:2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저가 주인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고전 15:58)

성 경: [마25:2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더란트 비유]
?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주인의 칭송(稱頌)이다. 특별히 '잘 하였도다'는 뜻의 헬라어 부사 '유'(*)는 종의 지난 노력에 대한 주인의 다함없는 만족과 인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26절의 '악하고 게으른 종'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그 종의 온 인격이 무흠(무흠)하거나 완전하다는 뜻이기 보다 그 주인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특히 '착하다'(*, 아가도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을, '충성되다'(*, 피스티스)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신실성을 강조한 칭찬들이다. 정녕 선(善)과 충성은 주인의 시험을 감당할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Wycliffe).
?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 이 구절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이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말은 역시 주인의 관심,즉 회계(會計)의 내용이 투자에 대한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주인이 맡긴 5달란트는 상당히 많은 액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미미(微微)한 것이었다. 여하튼 종말적 심판의 때에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했고,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에 있지않고, 순간순간 매사에 얼마나 성실했는지에 있어야 한다.
?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 이 구절은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돌아가는 보상 내용이다. 물론 이 보상은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이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이 분명하며, 또 그 보상이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가 더욱 신뢰감으로 깊어졌다는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參豫)할지어다(*, 텐 카란투 퀴리우).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카라)은 (1)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10절) 주인이 와서 벌이는 천국 잔치로 볼 수 있다(계 19:9).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르자면 우선 그 종이 천국 또는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그 주인의 초대를 받을 만큼의 영화로운 신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천국은 잔치와 같은 축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2) 또 '즐거움'은 주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 제공하는 넘치는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충성된 자로 인정된 사람은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시 16:11; 21:6).

성 경: [마25:22,2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참예할지어다 - 셈어의 특징인 반복 기법을 사용하여 20, 21절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칭찬과 약속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동일 내용의 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주의 회계 기준은 은사와 능력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맡은 바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도에 있다는 점이다. 한편 주인은 두 종에게 모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두 종이 똑같은 양의 '많은 것'을 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천국은 획일적인 평등주의(equalitarian)의 실현장(實現場)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 충성이 모두 인정되는 곳이다.

성 경: [마25:2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한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 주인이 주관하는 회계의 현장에는 충성된 자이든 불충분한 자이든 모두가 나아와 주인의 판결에 응해야 한다(고후 5:10). 한편 여기 '한달란트 받았던 자'(*, 호토 엔 탄란톤 에이레포스)의 시재가 완료능동태 분사로서 아직 그에게 '한 달란트'만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여기 '굳은'(*, 스크레로스)라는 말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다'는 뜻으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같은 평행 비유 눅 19:21에서 나오는 '엄한 사람'(*, 아우스테로스)이라는 단어보다 더 강경한 뜻으로 쓰인다(요 6:60; 행 26:14; 약 3:4; 유 1:15). 여하튼 종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세워 결국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遺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주인 앞에서 범하였다.
?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 주인을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투자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 비난 속에는 자신이 다른 두 종들보다 훨씬 적은 양을 받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은근한 화를 분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Derrett).
?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호덴 우디에스코르피사스) - 이는 추수한 곡식을 마당에 늘어 놓고 말린 후 키질을 하여 겨를 헤쳐서곡식을 모으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즉 좋은 주인을, 키질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알곡(재산)을 모으려고 하는 불로 소득자로 비난한 것이다. 이와같이 좋은 주인을, '굳은 사람', '심지도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 등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 비난이 한 달란트를 받아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주인 앞에 나온 게으른 종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즉 이 본문은 자기 변명을 통하여 자기 모습을 묘사하는 우화적(寓話的)인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의 주인에 대한 비난은 모두 종 자신의 게으르고 완악한 심성의 고백적 표현으로 보면 된다(26절; 눅 19:22).
? 내가 알았으므로(*, 에그논 세) - 이는 제 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을 통해 익히 알아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그는 자신의 왜곡된 판단을 근거로 주인의 품격을 극도로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5:25]
주제1: [종말을 대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두려워하여 -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즉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여 본전도 돌려 주지 못할 때 엄격한 주인에게 당할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이 종은 소심하고 진취적이지 못한 용기없는 사람인 동시에 자기 생명과 안녕에 대해 강한 집착을 지녔던 자이다.
?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 종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한 것이다(18절). 평행 본문인 눅 19:20에서는 수건에 싸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두 표현 모두 맡겨진 돈을 아무일에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기서 게으른 종이 무엇을 하여 모험을 감행할 의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元金)에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고 잘 보존해왔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내 할 바를 다했으니 당신은 내게 아무런 꾸중도 할 수 없습니다'는 뜻의 무례하고도 원망 섞인 불평이었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보관을 위해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그에 따른 이윤을 남기라고 맡겼음을 알지 못했다.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께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었다.

성 경: [마25:2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악하고 게으른 종아(*, 포네레 둘레 카이오크네레) - 여기서 '악하고'(*, 포노스)는 '성가시게 굴음', '무가치한', '악독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게으른'(*, 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둔하다', '머뭇거리다'의 뜻을 가졌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주인의 의도에는 전혀 무신경하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하여 결국 주인에게 해(해)가 된 무익하고 무가치한 종에 대한 묘사이다. 이는 21, 23 절에 이미 제시된 바 '착하고 충성된 종'과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 나는...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이 구절은 앞서 종이 주인에게 변명한 내용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24절). 이 반문의 의도는 주인인 자기 자신이 절대로 종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악질적인 구두쇠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데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게으른 종에게 그렇게 반문함으로써 도리어 그 내용이 종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을 끊지 않고 게속 연장시켜 본다면, '그렇게 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말이 나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평행 구절인 눅 19:22은 이와 같은 의미를 분명하게 해준다. 즉 누가복음에는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는 문장이 삽입되어 종의 변명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 선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5:27]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그러면 네가 마땅히(*, 에데이 세 운) - 이 구절은 앞서 게으른 종이 한 변명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의 변명대로 주인이 매정할 뿐만 아니라 원금을 손해볼까 해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면 적어도 안전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릴 수 있는 일이 또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 취리(取利)하는 자들(*, 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 - 돈을 맡아 보관하면서 이자를 주거나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는 환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은행이나 돈놀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돈놀이가 금지되었고(신 23:19; 시 15:5). 다만 이방인과의 거래에만 인정되었다(신 23:20). 그렇지만 이같은 율법적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느 5:10-12).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유대 랍비들은 '변리(邊利)로 돈을 빌려주는 것'(lending at interest)과 '고리 대금업'(usury)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변리로 돈을 빌려주는 무리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 변리(*, 쉰 토코) - 이 뜻은 원래 '이자'로서 여기서는 높은 이윤 곧 고리 대금(usury)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낳다', '생기게 하다', '자손' 등의 뜻을 지닌 '듸크토(*)에서 유래된 말로 본전(本錢)에 이자가 증식하는 대금업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부당한 이익이나 억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통상적 관례에 의한 이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합법적 이자율이 8%였으나 차츰 12, 24, 48%의 고이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Vincent, W. W. Bukland).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변리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찬성하시거나 폐기하셨다는 이론을 전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자놀이에 대한 도덕성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으셨다. 다만 당신의 선한 의지를 설명하실 목적으로 융통성 있게 세상에 있는 제현상들을 활용하여 설명하셨을 뿐이다(눅 16:1-9; 181-8).

성 경: [마25:2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해 단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은 정도의 심판이 아니라 그에 따른 물리적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21절)에 극한 대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더 큰 것을 맡기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욱 깊은 신뢰감으로 형성되는 착한 종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악한 종의 경우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악화되고 그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된 것이다. 실로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과 은혜를 성실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그 주어진 것은 그대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다(계 12:5).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타인을 부요케함으로써 고통의 강도(강도)를 배나 더하게 된다.
?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비록 게으른 자에 의해 조금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 정한 목적에 따라 당신의 일을 맡을 만한 자를 통해 끝내 성취하시고야 마신다. 한편 열 달란트를 맡은 자는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던 자로서, 결국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마25:2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 이러한 격언 구절은 막 4:25에서도 사용되고 13:12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달란트 비유와는 전허 다른 내용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독립적으로 전해져 사용되는 격언구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무리 짓는 결론적인 말을 대중이 익힌 사용하고 있는 격언구로 맺으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종말적 심판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료(明瞭)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정녕 영적 세계에서도 물질적 세계에서처럼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삼상 21:3, 4)

성 경: [마25:3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이 무익한 종(*, 톤 아크레이온) - 이 말은 '유익하다(*, 크레이아스)라는 단어에 부정 접두어 '아'를 붙여 '유용하지 않은', '쓸모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실로 능동적으로는 선한 일에 매진(매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는 주인이 맡긴 일에 소홀히 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자인 것이다(눅 17:10).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외에도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페역한 죄가 된다.
? 바깥 어두운 데로(*, 토 스 코토스) - 이 구절은 앞의 21절과 23절에서 착한 종에게 했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말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는 주인과 영영한 관계 단절(斷絶)을 암시하는 동시에 어둠의 세력인 사단이 거할 최종적 심판 장소로 익혀 알려진 표현이다(8:12; 계 20:10-15).
?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와 같은 구절은 종말에 관한 비유를 제시한 24:51외에 8:12; 13:42, 50; 22:13 등에도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끔찍하고도 영원한 징벌을 나타내는 상투적 문구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25:3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안드로푸)의 아들(휘오스)이 된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맥상(24:3) 종말의 때에 심판주로 구속주로 임하시기로 약속된(단 7장; 율 3:1-12; 슥 14:5)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다(8:20; 눈 5:24. '인자 개념' 참조).
?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16:27; 24:30; 살전 4:16; 살후 1:7, 8). 여기서 특별히 '영광으로'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신적) 광휘가 충만한 예수가 오시는 모습을 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붙여진 형용구이다(Broadus).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은 예수 재림의 장면이 전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장엄한 것임을 암시한다(24:31; 살후 1:7, 8; 계 14:14-20). 한편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당하시기 전 단지 3일전에(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신적 탁월성과 차고 넘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심판자로서 뿐 아니라 왕으로서(34절)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19:28 ). 특히 그의 '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28:18; 고전 15:25; 히 12:12).

성 경: [마25:32]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모든 민족을(*, 판타 타 에드네) - 똑같은 구절이 24:14과 28:19에도 나온다. 여기 '모든 민족'은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까지 가리키는 것으로서(행 17:26)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주고 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이 보편적 심판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실로 천국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2:1-12; 3:15, 16; 8:11) 모든 민족은 왕 앞에 서야 한다.
? 모으고(*, 쉬나크데세타이) - 수동태로서 번역하면 '모여지고'가 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추수꾼 천사의 사역이 역력히 암시된 표현이다(24:31).
?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볕하는 것같이 - 종말적 심판의 때에, 열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례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을 비유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인지라 저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가 직접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모든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마25:3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양분함로써 심판의 명료성(明瞭性)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 3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정녕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을 뿐이다.또 여기서는 오른편에는 양을 세우고 복받은 자로 칭찬하고 왼편에 선 염소를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른편'을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을 저주받은 자리, 곧 불의한 자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 떠부터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해 온 사실에서 비롯된다(출 15:6; 왕상 2:19; 욥 30:12 ;시 45:4).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서 이해되어 왔다(삿 3:15; 삼하 20:9:10; 전 10:2). 따라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의 이같은 구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 염소보다 더 가치있고 값비싼 짐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 양이 흰색인 반면 대부분 검은색으로된 염소를 대비시켜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정적으로 대비하고자 했을 것이다.(3) 하나님을 목자로 보고 그의 벡성들을 양떼로 보는 당시의 유목민적 사고를 빌어왔기 때문인 것이다(18:10-14; 겔 34:11, 12; 막 6:34; 눅 15:3-4; 요 10:1-21; 히 13:20). (3)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여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염소를 왼편에 세워 불의한 짐승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성 경: [마25:3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임금 - 여기서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뀐다. 즉 31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인자'(인자)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인자를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러한 비유는 2:2; 21:5; 27:11, 29, 37, 42에서도 나타난다. 여하튼 이같은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통치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14:9; 계 19:16).
? 내 아버지께 -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고 있다(10:32, 33; 11:25-27; 15:13; 16:17, 27:18:10 ;20:23; 26:29,5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행자(대행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의 궁극적 시여자(施與者)는 아들을 통해 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 복 받을 자들이여 - 오른편에 선별된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다. 여기서 특별히 '복 받을 자들'(*, 호이 율로게메노이)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는 한번 시여된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결국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말은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아'와 대비되는 문구로서 단순히 축복의 말씀 이상의 실제적인 복의 전달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 나와라 - 이 단어 역시 41절의 '나를 떠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나아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친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같은 형식의 비유인 열처녀 비유에서 '잔치에 들어가고'라는 구절과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라는 구절(10, 21, 23절)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구원은 주님과의 만남이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있다(요12:26).
? 창세로부터(아포 카타보레스 코스무). - '세상올 창조한 이래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Bengel)는 `...로부터'라는 뜻인 '아포'를 '그 이전부터'(*, 프로)라는 뜻으로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올 창세 전부터 미리 선택해 두시고 그 유업을 상속케 하셨다는 것이다(요 17:24; 엡 1:4; 벧전 1:20).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오한 예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성실성을 대변해 준다.
?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이 귀절은 앞에서 '복받을 자'라는 말에서 나온 '복'의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예비된 나라'는 하늘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계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비된'(*, 헤토이마스메넨)은 완료 분사 형태를 취함으로 해서 그 동작이 이미 오래 전부터 성취된 상태에 있었음 보여 준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의 입국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상속하라'(*, 클레로노사테)는 말의 원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체치 말고 즉시 네 분깃올 얻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라를 '상속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 피명령자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본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있는 권리(권리)로서 하늘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실로 아무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이 상속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즉 영원한 자기 소유인 것이다. 구원 받은 성도는 창세 때부터 준비된 하늘나라를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게 된다. 여하튼 '예비된 나라'라는 구절은 41절의 '예비된 불'과 대칭적으로 앞에 나온다. 이것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대칭 구조속에서 반복 어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 경: [마25:35,3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두절은 복받은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환영을 받고 유업을 상속하도록 초대받은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을 섬겼기 때문이다(사 58:7). 그런데 이 섬김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섬김이 곧 그들 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약 2:20-26). 즉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37-39절). 정녕 의인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과 기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엠 2:10).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행 중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는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창 19:1,2; 출 23:9; 신 10:18; 14). 36절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 이상의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식. 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 방문'은 복음시대 기간 중에 복음과 그리스도로 인해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고난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고난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행(善行)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6절).

성 경: [마25:37-3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의인들(*, 호이디카이오이) - 여기서 '복받은 자들'이 '의인들'이라는 호칭으로 바뀐다. 즉 마치 '인자'가 '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어 그 인격에 대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하듯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자들을 가리켜 의인으로 선언함로써 그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들'이라 함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써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자기 만족의 유혹과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앞에 선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선언에 근거한 것일 뿐 사람들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의인들의 대답은 앞서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지금껏 행해왔던 선행이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며 또한 커다란 상금을 바라고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의 최상의 겸손을 나타내보였다. 이러한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모습은 외식하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그 당시 위선적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 생활에 몰두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23:1-36; 12:38-40; 눅 11:37-52; 20:45-47). 결국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해 주며 당시의 비실천적인 이론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6:1-4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론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묵묵히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5:4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내 형제(*, 아텔폰무) - 여기서 형제(*, 아멜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12:47-50)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2절). 따라서 여기서의 형제는 광의적인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는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35, 36절).
?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42; 18: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다.
? 내게 한 것이니라(*,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 35, 36 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있다. 여기서 특별히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깨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빌2:6-8). 또한 그는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보시었다(8:17; 사 53:4; 63:9).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히 4:15). 따라서 그분은 자신있게 고난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22:34-40; 히 13:2).

성 경: [마25:4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 이 구절은 34절의 '복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문구이다. 한편 7: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 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즉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영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계 20:10). 실로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에서도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4:1; 눅 4:2 요 13:2; 옙 4:27; 히 2:14; 딤후 2:26 등). 그런데 여기서의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主動者)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자'(*, 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한다. 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 영영한 불(*, 토퓌르 토 아이오니온) -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라는 뜻이다. 이 말은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한편 '불'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3:12; 5:22; 18:8; 유 1:7; 계 20:10-15).

성 경: [마25:42,4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 우)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 하고 있다. 즉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19:19). 한편 예수께서 이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세,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해 질 것을(딤후 3:3) 익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25:4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 이다. 실로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한편 그들이 놀란 이유는 (1)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2)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웅(retribution)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성 경: [마25:4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이다.

성 경: [마25:4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먼저 영벌(*, 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벌(punishment)을 뜻한다. 여기서 '콜라시스'는 원래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벌'을 이야기할 때 이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가 더 적합할지 모를다. 그러나 이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히 10:29).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18:8; 살후 1:9; 유 1:13).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물론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 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至福)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살전 4:14-17). 한편 '형벌'과 '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네번째 수난 예고]
?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 마태복음에는 다섯개의 설교가 나오는데, 매 설교마다 이종결 문구가 나온다(7:28; 11:1; 13:53; 19:1). 여기서는 마지막 다섯번째 감람산 설교가 모두 끝났다는 의미에서 '마치시고'라는 말 앞에 '다'(*, 판타스)라는 복수 형태의 수식어가 첨가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시고 드디어 십자가 제단에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희생당하시는 제사장적 사역에로 발길을 옮기셨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때는 시작된 것이다(1:21; 20:18, 19).

성 경: [마26: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네번째 수난 예고]
?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 마가는 이 부분을(막 14:1) 하나의 보고 형식으로 기술한 데 비해 마태는 예수의 직접적인 언급으로 표현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말을 첨가시킴으로써 수난의 때가 분명히 도래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마태는 본서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유월절이란 시간적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3번(요 2:13; 6:4; 13:1)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간이었다는 확실한 중거를 찾기도 한다. 여하튼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로서 출애굽 사건과 밀접(密接)한 연관을 맺는다(출 12장). 이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아빕 월, 곧 니산월 14일인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7일간 계속된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이틀'이란, 시간적으로 정확히 48시간이 채되지 않는 기간일 것이다. 특히 본서에 기술된 사건의 시간대를 살펴볼 때(21:23-22:46; 23:1-36; 24:1-3),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지금의 시각이 화요일이 아직 지나지 않은 때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화요일 늦게 감람산에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은 해질녁(오후 6시경)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인의 요일 계산법에 의하면 수요일이 시작되는 때이다.
?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미 여러 번 예고해 오신 바 있다(16:21; 17:22; 20:18). 그런데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죽음 사건이 유월절 기간 중에 발생할 것이라 비로소 말씀하고 계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연결시킴으로 해서 당신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양'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을 통해 바로의 압제 아래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유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 예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츨애굽, 즉 새로운 구원의 때를 열어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나(고전 5:7), 요한(요 1:29)의 신앙관과도 일치한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구약의 유월절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거룩한 성찬으로 대체(代替)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유월절은 죄의 저주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 의지에 근거하고 있다(요일 4: 10). 그리고 그 성격상 화해하신 하나님 자신의 유일회적 죽음이었므로 그때로부터 영원토록 속죄제를 위한 제물로서의 양은 필요없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팔리우리라(*, 파라디도타이)는 수동태의 현재 직설법을 취하고 있다. 즉 본문은 현재 시제가 지니는 명확성과 긴급성 및 예언된 미래와 필연적인 성취 등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인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임박했으며, 또 그것이 유월절 기간 내에 필연코 이뤄질 것임이 예시되고 있다. 또한 수동형을 취함으로해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접 시사해 준다. 한편 이 '팔리움'은 유다의 배신 행위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완악한 고소를 모두 염두에 둔 말씀으로서, 사형권을 지니고 있던 로마 정부 또는 그 파견 근무자에게 제소(提訴)될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마26:3]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그때(*, 토테) - 시간적 부사로서 본문에는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자신이 팔리우리라던 예수의 말씀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모임 사이를 '그때'라는 말로 연결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과 급박함을 강조하고 있다.
?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 본문과 평행구릍 이루는 마가복음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율법학자들)'이라고했는데, 본문에서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대신에 '백성의 장로들'로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학자는 마태가 '서기관들'을 '백성의 장로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백성이 떠맡았다는 것을(27:25) 미리 예시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재판소 역할을 했던 산해드린(Shanhedrin) 공회원들로서 예수를 못 박기 위해 소집되었던 자들의 면면들을 각자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16:21 ;21:23).
? 가야바라하는 대제사장 - 마태복음과 요한복옴(요 11:49)에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라고 언급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눅 3:2; 행 4:6) 안나스가 대제사장이라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기록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야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는데, '가야바'와 '안나스'의 관계는 '장인', '사위'의 관계이다. 가야바에 앞서 그의 장인 안나스는 총독 구레뇨에 의해 A.D. 6년에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9년만인 A.D. 15년에 해임되었다. 그 자리를 이스마엘, 안나스의 아들인 엘르아살, 시몬 등이 차례로 승계하다가 A.D. 18년에 가야바가 빌라도의 전임 총독인 '발레리오 그라토'(Valerius Gratius, A.D. 15-26)의 후원으로 대제사장이 되어 A.D. 36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대제사장에 머무른다. 그런데 가야바의 대제사장직은 유대법에 의하면 불법이다. 왜냐하면 유대법은(민 20:25, 26) 대제사장직을 종신제, 세습제로 규정하는 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는 그의 장인 안나스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점령한 후 자기들이 통치하기에 편리한 인물로 피지배국의 종교 지도자들을 임의(任意)로 선출하고, 정치적 목직에 따라 자주 교체했기 때문이다. 실로 종교적 자주권을 상실했던 B.C. 37년부터 성전이 파멸되기 전 마지막 대제사장이 임명되었던 B.C. 67년 사이에 무려 28명 이상의 제사장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여하튼 사람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자들을 모두 대제사장이라 칭했던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안나스와 가야바를 모두 대제사장이라고 불렀고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안나스는 사임 뒤에도 그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 아문에 모여 - 산헤드린 의회가 열렸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사실 대제사장의 아문에서 열리는 회의는 유대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의 공식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회의이다. 이곳 '아문'은 대제사장 집 안 뜰(atrium)로서 그 주위에 궁전 건물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열리는 회의는 비공식 회의이고, 공식 회의는 대제사장 궁전의 뜰 남쪽에 있는 다듬은 돌로 건측된 공회당(Gazith,Chanujoth)에서 열렸다. 한편 산헤드린의 구성을 볼 것 깊으면 총 72인의 공회원으로 구성되는데, 대제사장, 서기관, 족장급의 장로 등 세 계층에서 각 24인씩 차지한다. 이 회의의 의장은 '나시'(Nasi, 방백)라 불려지는데, 로마 총독의 임명을 받은 대제사장이 이 직을 맡았으며 그 아래 심판 장관급인 '압벧딘'(Ad Beth Din)과 대변인격인 '차참'(Chacham)이 있었다. 이 회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결 기관으로 형식적으로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총독의 인준하에서 그 권력이 행사되었다.

성 경: [마26:4]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궤계로 잡아 -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궤계'라는 단어를 '흉계'로 번역하고 있는데 어떻게 번역이 되었든지 저들이 예수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당한 명분없이 음해하려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려고 준비하시는 예수의 모습과 궤계로써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짓된 종묘인들의 권모 술수(權謀術數)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는 예수의 정정당당한 발걸음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영적으로, 정신적로 깊은 병에 든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대비되고 있는 것0]다.
? 의논하되(*, 쉬네불류산토). - 이는 '협의하다', '계략을 짜다'는 뜻인 '쉼불류오'(*)의 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그들의 모의가 상당히 다급하고 긴장된 상태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실로 그들은 비밀리에 죄인 아닌 죄인을 극형에 처하기 위해 몹시도 당황했었던 것이다(Robertson).

성 경: [마26: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민요가 낱까 하노니 -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 Wars 12:1-2) 메시야 대망 사상이 심히 고조되었던 A.D. 1세기를 전후하여 백성들의 봉기와 소란이 빈번히 발생했다고 전한다(행 21:34). 사실 유월절 기간에는 각 지역, 특히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갈릴리 지역 주민들이 예루살롑으로 많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처형할 경우 민란의 위험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 명절에는 말자 - '명절',곧 유대 최대의 절기인 유월절(2절)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은 수많은 인파와 고조되는 종교적 열기, 여기에다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메시야 사상의 고조 등으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커다란 폭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는지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잘 알려 주고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총독 케스티우스(Castius) 때에 유d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엄청난 숫자의 유대 군중들이 통치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네로 황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유월절에 제물로 드리기 위해 잡는 양의 수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때 조사한바에 의하면 256,5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양 한 마리 당 대개의 경우 10정도가 한 무리가 되어 제물을 드리며, 어떤 경우에는 20명이 한무리를 이룰 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숫자는 약 200만명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갈릴리 사람들을 비롯해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공개적으로 예수를 체포하거나 위해(危害)하려는 시도는 폭동이나 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므로 명절을 피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저들의 의도는 너무나 당연하다. 즉 그들은 7일간의 유월절 공식 기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 운집했던 무리들이 각기 고향으로 흩어질 때 예수를 처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예정은 유다의 배반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단지 유다의 배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며, 사람들의 계획은 그 앞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성 경: [마26: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 본절 이하의 예수 도유(unction)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가 기술한 이야기(막 14:3-9; 눅 7:37-39; 요 12:1-8)이다. 그중 요한복음의 경우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상 주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가족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면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모두 '베다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시간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데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사실 본문 이하의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하루 전,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보내실 때(21:1-11)인 유월절 엿새전에(요 12:1, 니산월 8일로 추정) 일어난 일로서 마태가 시간상의 순서를 무시하고 이곳에 수록한 까닭은 예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속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였다(12절). 한편 누가복음과는 사건, 장소, 시간, 인물 등의 차이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없다(Calvin, Bruce, Meyer). 그러나 혹자는(Robinson, Chrysostom)시몬이라는 이름의 일치를 이유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에 시몬이라는 이름은 워낙 흔한 이름이었다. 그 실례로 신약성경에만 '시몬'이라는 이름이 10회 가량이나 나오는데, 그들은 열심당 시몬 (눅 6:15), 마술사 시몬(행 8:9, 24), 구두장이 시몬(행 10:6) 등 별명과 함께 불리어졌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시몬'과 마태복음의 '시몬'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은 당신의 생애중에 두 차례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Plummer, Bengel). 한편 '문둥이 시몬'이라고 해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문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와 그 일행이 종교적 의식법에 개의치 않고 집에 들어갈 때는 이 사람이 문둥병 환자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추측컨대 일전에 그는 예수로부터 병고침을 받았을 것이고 그 답례로 이같은 잔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Roberson, Wycliffe, lange). 따라서 문둥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더이상 그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울 때마다, 예수의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는 사도가 된 후에도 세리란 명칭으로 불리웠던 마태의 경우와 그 의미를 같이한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이 문둥이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 또는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 보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 경: [마 26: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한 여자 - 본문과 평행 구절인 요 12:3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이자 마르다의 동생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본문과 마가복음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당시에 생존해 있던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유대인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을 은연중 경시(輕視)하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반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재산 목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출 20:17).
? 매우 귀한 향유 - 마태는 그 향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매우 귀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평행본문인 막 14:3에 의하면 이 향유는 '나드'향이었다. '나드'향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인데,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하신분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캄비새스가 에디오피아 왕에게 보낸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나드향이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300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간 벌어들이는 소득과 맞먹는 액수였다. 요한복음에서는 계산에 밝고 재물에 욕심이 많은 유다를 강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여인의 해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귀한'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함으로써 여인의 행위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 옥합 - '옥합'으로 번역된 헬라어 '알라바스터 병'이라는 뜻인데, '알라바스터'(alabaster)는 석회 또는 황산 석회 성분을 띤 부드러은, 반(半) 투명의 대리석 비슷한 광물이며 그 주산지(애굽)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병들은 값비싼 기름이나 향을 넣어두기 위해 사용되는데,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을 하고 있어 사용할 때는 인봉(印封)한 주둥이를 깨고 그 안에 든 모든 향유를 꺼내어 쓰게 되어 있다.
?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식사 도중에 그 잔치의 가장 귀한 예빈에게 향유를 부음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유대의 전통적 관습이었다(시 23:5). 한편 본문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요 12:3)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실 기름을 부은 곳은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몸 전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복음서 제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하튼 발이든, 머리이든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기름을 부은 부위가 문제가 아니라 기름부음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 향유를 붓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성경에 나타난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게 하는 고대적 예식으로 향유를 붓는다(창 28:18), (2) 제사장들의 의식적 성별에 사용되었다(레 8:12). (3) 선지자로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왕상 19:16). (4)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삼상 10:1; 왕상 19:16). (5) 손님을 환대하는 데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6) 전통 장례법에 따라 시신에 바른다(요 19:40). 이중 본문에서 묘사하는 바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은 위에서 열거한 도유식(塗油式, 머리에 기름을 븟는 예식) 가운데 왕의 취임식을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육신적 조상인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왕이 되었고(삼상 16:13),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들'이었다(시 45:7; 89:20). 이 고대 의식에서 유추하여 다윗 가문의 메시야도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의식에 의해서 임명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베다니에서의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다윗의 임명식의 모든 국면들을 극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 밖'에 그리고 '한 평범한 처소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또한 예수의 즉위식은 왕이나 사제가 임명을 받을 때의 그 화려함과 장관 속에서의 축하가 아니라 '한 초라한 집'에서의 식탁 친교에서이다. 그리고 예수는 사제나 대제사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익명의 여인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더욱이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환영과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8절). 따라서 본문의 도유식은 예수께서 인정하신 바대로 장사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12절)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록 그 여인은 순수하게 예수께 대한 다함없는 헌신과 사랑의 표로 기름을 부었다 할지라도 그 도유는, 곧 예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구속사에 있어서 크나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었다.

성 경: [마26: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 요한복음에 의하면(요 12:4)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제자들이 분을 낸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두로의 이방여인에게도 분을 내었고(15:23), 어린 아이들을 주께 데려왔을 때도 그러했으며(19:13),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제안에 대하여도 분을 내었다(20:24). 이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나타난 현상들과 배치될 때 일어나는 성급하고 악향 감정이었다. 실로 타락한 인간 본성(本性)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와 반발 요인이 너무 많다. 진정 누구보다도 사태의 진전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할 제자들이었건만 그들은 이 기름부음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인격과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허비하느뇨 - '허비하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레이아(*)는 일말의 생산적인 결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한 낭비, 즉 값진 것을 무용(無用)하게 모두 소모해 버린 것을 뜻한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관심이 오직 노동자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그 물질에 집착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실로 그들의 물질 중심의 평가는 신앙 중심, 사랑 중심의 '한 여인'의 순수한 마음을 무참히도 짓밟아버린 것이 되었다. 정녕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곤 한다.

성 경: [마26: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많은 값에 팔아 -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다.
?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의 관행(慣行)이었다. 사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누누이 전하셨다(19:21; 25:35). 실제로 이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수십리 안팎에 수천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로 위선적이고 가증한 유다가 가지고 있던 동기(요 12:6)가 무엇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의로운 분노 때문에 그 여인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기에 저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요 물질 중심적인 것이었으며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정녕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성 경: [마26:1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아시고(*, 그누스) -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제 2 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그 정확한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관적(直觀的)인식이야 말로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16:8).
? 괴롭게 하느냐 - 여기서 '괴롭히다'는 뜻의 헬라어 '코포스'(*)는 '때리다', '치다', '자르다'를 뜻하는 '코페'(*)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거의 폭력에 가까운 압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 당시 이 여인이 제자들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앞에 얼마나 괴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수 있다.
? 내게 좋은 일 - 이는 그저 선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기쁘게 받으실만하며 영원히 기억하고 인정할 만한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의 이같은 신적 인준에 의해 받아들여진 이 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비난받을 수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막 14:7) 선행이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향유로 삼아 쏟아 부은 모든 수교자들에게도 이같은 아름다운 변호를 해주실 것이다.

성 경: [마26:1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거니 -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께서 세계의 가난을 뿌리뽑을 수 없다고 말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과 자신에게 사랑을 표시한 것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시는 그런 선행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땅위에 존재할 것이다(신 15:11).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맞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매우 특수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 순간을 올바로 포착(捕捉)한 것이다. 곧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그 순간의 중요성을 포착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써 그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다. 적어도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결단코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300 데나리온의 돈은 매우 많은 것이며 그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300 데나리온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놀라운, 곧 인류 구속의 위업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 여인은 바로 그 값진 일에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은 것이다.

성 경: [마26:1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내 장사를 위하여 -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례에 의하면 장례 절차 가운데 도유하는 의식이 있었다(대하 16:14). 그런데 막 16:1에 의하면 첫 부활절 아침에 세 여인이 예수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아갔으나 예수께서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기름을 바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수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기름부음이었고, 예수는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여인이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예수 자신의 '장사를 위해' 자기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누차 공개하셨다(16:21; 17:22; 20:18). 그런데 오직 그 여인만이 예수께서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되풀이하여 말했던 바를 이해하며 그 운명의 시간을 준비(準備)해 왔던 것이다. 즉 그 여인은 나름대로의 영적 안목으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장례 예식으로서의 도유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미리 예수께 찾아와 관례에 따라 기름을 부은 것이다(Wycliffe).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정치적 왕국에 대한 자기들의 그릇된 관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해 있는 예수와 조그마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1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다 기념하리라 - 이렇게 귀중한 약속이 담겨져 있는 13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예레미아스(Jeremias)에 의하면, '어디에서든지'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푸'(*)를 '... 때로' 해석하여 이 구절은 재림때 온 세상에 복된 소식이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당당하게 선포될 때에 이 여자의 행위도 기억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복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사용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 제자들의 전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을 예견하셨고(8:11),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임도 예언하셨다(24:14). 13절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인과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More). 정녕 예수의 복음은 그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죽음을 장식한 이 여인의 행위는 복음과 함께 없어지지 아니한다. 또한 이 여인의 행동은 사랑, 믿음, 용기, 그리고 자기 희생 등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적 자질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실로 한 사람의 평범한 여인이 베푼 사랑의 행위가 이처럼 구속사의 한 모퉁이가 될 만큼 인정되고 기억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편 '저를 기념하리라'는 말은 그 여인의 행적이 영영히 기억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지금 그대로 성취(成就)되고 있다.

성 경: [마26:1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그 때에 - 향유 도유에 관계된 예수의 말씀이 막 끝난 때이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간 때를 지시한다. 결국 이 장면은 대제사장들이 가야바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잡기 위해 모의하던 내용(1-4절)과 연결된다.
?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 - 거룩한 만수(滿數)인 '열 두' 사도의 목록에는 대부분 맨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가 언급된다(10:4). 한편 이 말석에 위치한 제자 가룟 유다는 베다니 도유 사건을 기화(奇貨)로 예수를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길 것을 결심하게 된다. 즉 가룟 유다는 예수의 장사라는 암울한 예고와 무모한 물질의 허비 등으로 인해 예수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배반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물론 가룟 유다 배반의 근본 동인은 사단이지만(눅 22:3)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었다. 한편 3절에서는 당국자들의 행위가 전혀 부각되었다면, 여기서는 유다의 배반이 '그 때 그가 갔다'는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과 더불어 기름부음 직후에 일어난다. 특히 '열 둘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준다. 즉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마저도 이런 죄에 빠지시는 것을 보아도 우리 성도는 한층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사단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능히 우리를 실족시킬 수 있다(10:36; 미 7:6).
?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 가룟 유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제 대제사장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배반 의지가 어떤 장애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매우 적극성을 띤 것이었다는 점이다.

성 경: [마26:1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내가 예수를...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 유다는 요 12:6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의 욕심이 많은 자였다. 이제 그는 그러한 탐욕스런 본성을 분명히 노출시켜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정식으로 팔려고 그 값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같은 사악한 흥정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간접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직접 화법으로 묘사함으로써 돈을 탐하는 유다의 죄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약속만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돈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물욕에 가득찬 행동을 더욱 생생히 보여 준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넘겨 준다'는 말은 그가 직접 예수를 묶어 공회에 넘긴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불의한 죄목(罪目)을 뒤집어 씌워 고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가 피소(被訴)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들 수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였다(57-68절). 따라서 '넘겨 준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적기(適期)를 마련하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파송된 무리에게 예수가 손쉽게 체포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6, 47-59절). 여하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놓고 벌어진 흥정은 순식간에 완결되었다. 실로 죄악된 계획은 죽음의 화살처럼 빨리 진행되는 것이다.
?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기로 하고 받은 돈은 은30 세겔이다. 출 21:32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삼십 세겔을 배상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노예의 값어치에 불과한 적은 액수로 불의한 자들의 손에 거래된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적은 액수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그들은 은 삼십으로 그를 팔았다'는 슥 11:12의 예언을 자구적으로 맞추기 위해 그 액수의 양을 축소하여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해석인 듯하며 오히려 그 당시 공회와 유다 양자간에 예수를 노예 정도의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멸시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Robertson). 정녕 예수는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가장 고통받고 멸시받는 존재로 이 땅의 마지막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하(自己卑下)를 통해 예수께서는 이 땅에 멸시받고 고난받는 자들과 죄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던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것이다(히 4:14-16). 한편 가룟 유다가 예수를 은 30세겔에 팔아넘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특이한 견해가 있다. (1) 예수에 대한 실망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게 되었다. 유다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즉 민족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했었는데 반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는데, 바로 이 점이 유다의 기대에 어긋났다. 결국 실망 속에서 유다의 헌신은 미움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2) 유다가 예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봉기하게 만들려고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봉기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다의 배반 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그의 배반 동기는 탐욕과 예수에 대한 실망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유다의 배반 동기는 그렇게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유다의 배반 사건이 성경의 예언(슥 11:12)의 온전한 성취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성 경: [마26:1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기회 - '기회'의 헬라 원어인 '유카이리아'(*)는 본래 '좋은 시기를 뜻한다. 아마 예수를 넘겨주기에 '무리가 없을 때'를 찾는 것이리라.

성 경: [마26:1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무교절의 첫날에 - 이는 문자적으로 '누룩없는 떡의 첫번째 날에'가 된다. 무교절은 본래 유대력으로 니산월(태양력 3, 4월경) 15일부터 그달 21일까지 7일동안 지키는 유대인들의 큰 절기이다(출 12:15-20; 레 21:6; 민 28:17). 그러나 유대인들은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출 12:6) 무교병을 먹는 바 흔히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말을 상호 교호적(교호적)으로 사용하였다(출 12:18). 그리고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13일경부터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하였는데 이날을 준비일로 본다. 여기서 가리키는 '무교절의 첫날'이란 '유월절', 곧 '양 잡는 날'(출 12:6)이 아니라 하루전 날인, 니산월 13일인 준비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평행구인 막 14:12과 눅 22:7에는 이 날을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잡는 날', '유월절 양잡을 무교절 일'등으로 각각 기술함으로써 이때가 니산월 14일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engstenberg, Anddrews 등 ). 그리고 본 장 19절에 그들이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관복음서보다 대체로 시간적으로 엄격, 정확한 요한복음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밤을 세워 기도하시고 그 다음 새벽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서로마 관정으로 끌려갔을 때를 기록한 요 18:28부분에서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유월절 잔치'는, 곧 '유월절 양을 먹는 것'을 가리킨다(Dods, Godet, Bermasd 등). 따라서 이때는 니산월 14일 ,곧 성(聖) 금요일 새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께서 심문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당하신 때를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 31),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인 니산월 14일(출 12:6)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이같이 심문과 죽음이 있기 전날인 니산월 13일, 곧 목요일('무교절의 첫날')에 최후의 만찬을 준비토록 하셨던 것이다. 이 만찬은 정규 유월절 식사보다 만 하루 앞선 날에 베풀어졌다. 유월절 최후 만찬의 시간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요 13,18,19장 강해를 각각 참조하라.
? 유월절 잡수실 것 - 유월절 식사는 원래 니산월 14일 해지기 전에 양을 잡아 쓴 나물과 함께 준비해 두었다가 해가 지는 시점(P.M.6t시)을 전후로 하여 식사를 개시한다. 물론 본문의 사건은 이 정례적 행사일보다 만 하루 앞선다. 한편 유월절 식사의 순서를 살펴보면 (1) 먼저 손을 씻고 결례(潔禮)를 행한 후 가장이 축제에 대한 감사(유월절 키두쉬,kiddush)를 드리고 네번에 걸쳐 마시게 되는 물을 탄 포도주 중 그 첫째 잔을 마실 때 기도함으로써 시작된다. (2) 계속해서 채소와 쓴나믈을 전체로 먹은(양념에 찍어 먹음) 뒤에는(애굽에서의 고역 상징) 유월절 학가다(Haggadash)와 할렐(Hallel) 찬양의 첫 부분(시 113편 또는 113, 114편)이 이어진다.(3) 유월절 학가다에서는 집안의 자녀들이 이 예식의 의미를 묻고(출 13:8) 가장(家長)이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서 이러한 상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게 된다(M. Oesahim 10:4-5). 그 다음에 이어지는 순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4) 대체로 포도주를 두번째 마심으로써 본 만찬이 시작되고, 이때 양고기가 식탁에 오른다. (5) 그 뒤에는 세번째 포도주 잔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축복의 잔'(고전 10:16)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 잔을 마실 때 또 한번 감사의 기도가 있게 된다. (6) 그때 참석자들은 할렐 찬양의 나머지를 부른다(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 그리고는 네번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상당히 많았다.
?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었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 날을 성전에서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 장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와 더불어 그 식사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어린양, 무교병, 포도주, 쓴나물, 등불 등)이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식사 장소에는 누룩이 모두 제거되어야 했기에(출12:15) 미리 청소도 해야만했다. 이러한 복잡한 준비 작업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의 의사를 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적어도 정규 식사일인 금요일 곧 니산월 14, 15일 걸치는 저녁보다 하루 앞에 먹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하루 앞서 행하신 유월절 식사에는 율법에 정해진대로 내일까지 양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양 고기는 식탁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19절, the Pulpit Commentary). 이것은 결코 우연(偶然)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 것이 아닌,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양잡는 날, 곧 니산월 14일 오후에 당신이 친히 십자가라는 유월절 식탁에 오를 예정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1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성 안 아무에게 가서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이 상당히 이적적인데 반해(막 14:2-16; 눅 22:7-13) 마태복음에서는 마지막 만찬이 이적적으로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성 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있을 터이니'라고 번역되어 있고, 새번역에는 '성안에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로 번역되어있다. 더구나 '아무'라는 뜻의 혤라어(*, 톤 데이나)에는 관사가 붙어있어 예수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마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당시의 정황에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그 당시 예수께서는 당국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으며 살해 음모가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와 그 일당에게 만찬 잔치를 제공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만찬 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을 보호해 주기 위혜서 예수께서는 '아무개'라고만 말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예수일행에게 장소를 제공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예수의 무명 친구라는 견해도 있다. 이 무명친구가 예수에게 비밀 장소를 공급하였는데, 이 친구는 큰 다락방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하고 종들도 있었으나 매우 겸손하여 만찬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Zahn) 이 사람이 요한 마가의 아버지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하고, 개심한 니고데모 또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라고도 하나 모두 확실한 증거가 없다.
? 선생님 말씀이 -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해들을 사람이 적어도 당신을 '선생님'(*, 디다스칼로스)이라고 호칭해도 깨달을 정도의 안면이 있고, 또 신앙이 성숙해 있는 자임을(Lenski) 암시한다.
?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언으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문구이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정해진 때' 곧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때를 의미한다(옙 1:9).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이나 그 집의 주인이 듣기에는 그 말이 유월절 식사에 예수께서 시간을 맞추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의미로 들렸을 것이다. 후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예수의 그 말씀이 그 당시 임박한 십자가, 즉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적(代贖的) 죽음의 성취를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본문을 기록 할 때, 그는 예수의 죽음과 순차적 사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구속사의 순차적 사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성 경: [마26:1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예언한 바대로 모든 것이 되어 있음을 제자들이 발견하였다는 말 대신에(막 14;16)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는 말로 대신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가 준비된 곳은 큰 다락방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만찬이 준비된 곳이 다락방이라는 암시는 없다. 유월절 행사에 있어서 양을 잡는 일은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이었다(17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은 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월절 준비를 위해 '집', 곧 '방'만을 준비하고 정작 유월절 식사에 필요한 '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유월절 양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깨서 친히 유월절 양이 되므로 또다른 유월절 양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17절).

성 경: [마26:2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물 때에 - 유대력에 의하면 니산월 13일이 끝나고 14일이 막 시작하려는 시간(오후 6시 전후), 곧 성(聖) 목요일에서 성(聖) 금요일로 접어드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서 예수 최후의 만찬은 니산월 13일에서 시작하여 14일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앉으셨더니 - 여기서 '앉으셨다'(*, 안나케이마이)는 말은 '기대어 앉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식탁쪽으로 기대어 오른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유대인의 식탁 자세에서 연유한다(8:11). 여하튼 예수께서는 모든 외부 인사를 물리치시고 오직 당신의 12제자들과 더불어 내밀하고도 뜨거운 교제를 나누시고 계신 것이다(눅 22:14, 15; 요 13장).

성 경: [마26:2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희가 먹을 때 - 역사적인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었다(유월절 식사 절차는 17절과요 13장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제자들로 더불어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잔치였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최후의 유월절이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가 예표하는 바 '구속'은 그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완성된 것이며, 여기서부터 유월절의 지위는 우리 주의 성만찬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성례가 되었다(막 14:22-25, '유월절과 성만찬' 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 당신이 친히 선택한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이 선언은 마태, 마가, 요한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다는 은밀한 중에 예수를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만약 제자들이 그 계획을 알았다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으며, 유다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의 배반적인 거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은 물론 그 죽음에 이르는 절차(節次)까지도 은연중에 예견하신 바 있다(2절; 17:22; 20:18). 한편 예수께서는 유다의 악행을 아셨으나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로 마지막까지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것을 권고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완곡한 사랑의 호소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위압, 강요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회개를 호소하신다.

성 경: [마26:2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 요한은 이때 '서로 마주보며'라고 기록함로써(13:22) 제자들의 의아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과 새번역운 '저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각자가 한 사람씩'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각자가 한 사람씩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주여 내니이까(*, 메티에고 에이미 퀴리에) - 여기서 의문사 '메티'는 질문자 쪽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를 달리 번역하면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죠? " 정도의 질문이 될 것이다. 사실 11제자들은 이러한 본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을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연약함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부지 불식간(不知不識間)예수를 해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여'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신앙의 주(主)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랍비여'라는 말로 부름으로써(25절) 예수를 단지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2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 이 '그릇'은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소스를 담은 '대접'으로서 도구를 사용치 않고 주로 손으로 취식(取食)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쓴 채소와 함께 음식을 여기에 담갔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때가 구운 양고기를 먹는 시간이었다면 '그릇'에는 나물과 과일 그리고 퓨레(puree)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누룩없는 떡과 함께 그것을 먹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있는 대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라는 말로만 가지고는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 때에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 각자가 그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먹기 때문에 예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사람이 함께 손을 넣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에 대한 설명도 여러가지가 있다. 즉, 이말은 (1) 예수와 동시에 찍어 먹는 자(Bengel), (2) 예수가 말씀하실 그 순간에 그릇에 손을 넣은 자(Plummer)등의 견해가 있다. 이외에도 휀샴(Fensham)이라는 학자는 쿰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서 유다가 예수와 함께 손을 그릇에 넣은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릇에 손을 넣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계급에 따라서 차례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가 예수의 지도자적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반역의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체 분위기상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단지 예수와 함께 같은 접시에서 먹는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할 뿐인데(막 14:18), 마태복음에서는 방금 그의 손을 예수와 함께 접시에 넣은 자가 배반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사자에 대한보다 구체적인 암시이다. 더욱이 예수 자신이 떡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주는 것을 기록한 요 13:26, 27에서는 배반자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가장 친근한 사람끼리 마음을 터놓고 식사하는 유대인의 풍습에 비춰볼 때 식사 중에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한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시 41:9). 그것은 곧 예수께서 다함없는 사랑을 베푼 바로 그가 예수에게 가장 해로운 배신(背信)을 한 것이었다.

성 경: [마26:2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인자는...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구약 예언에 대한 일반적 언급이다('인자'에 대해서는 눅 5:24 강해를 참조하라). 그러나 본문에 있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줄 수있는 구약 성경 인용구는 찾을 수 없다. 혹 고난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7-9이나 다니엘 9:26과 같은 구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언적 유형론(2:15; 5:17-20)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말을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대로 되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간다'는 말은 죽음을 향하여 갈 길을 간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요 7:33; 8:21, 22) 이 단어의 직접적 의미는 죽는다는 뜻이기보다 차라리 '떠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대하여 예언한대로 고난의 길을 '갈'뿐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한 후 영광을 받아 아버지께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를 파는 자의 죄는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의 형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그런 종류의 형벌인 것이다. 아뭏든 이는 유다의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두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고 구속사가 성취되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악한 마음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한 것이다. 그 결과로 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게 되고(1:21), 인간이 유혹에 빠짐으로 인해서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 가룟 유다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비참하게 될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는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적 표현으로 욥기(욥 3:2, 10, 11)와 외경(에녹 38:2)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배신하여 절망적 운명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 햇빛을 보지 않은 자가 훨씬 좋았겠다는 이 비극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 자신의 반역 의지를 실천해 갔다. 그리고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때 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요 13:30).

성 경: [마26:25]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랍비여 내니이까 - 이 문장 앞에 나오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는 문구는 마태가 열두 제자의 명단(10:4)을 제시할 때마다 덧붙였던 형용구였다. 여하튼 이미 예수를 팔기로 공회원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며(14-16절), 더욱이 예수의 회개에의 권고성 발언에도(21절)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僞善)이다. 더구나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랍비'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부른다(22절).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의 메시야성을 철저히 무시한 언사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다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적대자들의 반열에 서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이 칭호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하는 순간에 또 한 번 사용할 것이다.(49절).

성 경: [마26:2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저희가 먹을 때에 - 본절 이하 사건의 시간적 위치를 말해 주는 기록이다(21절). 아마 이때는 유월절 본 식사가 끝나기 전, 곧 '축복의 잔'인 세째번 잔이 비워지기 전으로 추정된다(17절 참조).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떡기 '떡'은 무교병 큰 덩이일 것이다(출 12 :15; 13:3, 7). 그리고 '축복하였다'는 것은 마치 '오병 이어'에서처럼 감사와 찬양의 평이한 식기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식탁의 전통적 관례에 따라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떡'이라는 단어는 (1) '들어'(took), (2) '축사하시고'(blessed), (3) '떼어'(broke), (4) '주셨다'(gave)는 네 동사와 연결되는데 본래 이 동사들은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감사드릴 때 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17절). 아마 이때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공식 문구인 '우리 주 하나넘, 우주의 왕이시여, 땅에서 떡을 내신 당신께 영광이 있기를'과 같은 말로 축사하셨을 것이다.
? 떼어 - 떡을 떼는 행위는 공동식사에서 혼히있는 일로 식탁의 주체자의 고유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떼는 행위는 단순히 먹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이 떼내어진 떡은 곧 선민 이스라엘의 뼈아픈 과거의 고통을 상징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의 문을 여선 예수께서 친히 떡을 또시며 당신과 연관시킴으로써 장차 고난받아 찢기실 당신의 몸을 예시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 제자들을 주시며...받아 먹으라 - 떡을 떼어 건네는 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두터운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받아 먹으라'는 명령 문구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혜방(解放)과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바울과 누가는 여기에 '너희를 위한'이라는 수석어를 첨가시켰고 더불어 '이것을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눅 22:19; 고전 11:24)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로는 더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예수 자신을 기억하도록하며 또 그들을 위해 대속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를 기념하도록 가르치고 계신다. 이에 비해 마가와 마태는 그냥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만 말하면서 '떡'을 곧 죽게 될 예수의 몸과 나란히 연간시키고 있다. 이로써 앞에서 암시했듯이(19절)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그들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즉 떡이 여러 조각으로 떼어진 것처럼 예수의 몸도 찢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하나넘이 정해 주신 유월절 식사와 관련시키듯이, 메시야의 백성들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분의 권위로 제정된 성례와 연결시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이니라'(*, 에스티)는 말은 주어진 술어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계사(繫辭, 영어의 is에 해당)로서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진정 실제적 동질성을 언급한 것인지, 단지 상징적인 대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한 결과론적인 임재를 뜻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친히 화육(化肉)하신 분으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르치신 성체(聖體, 살과 피)를 근거한 성만찬을 통해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시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주의 말씀에 경청했던 그당시 제자들은 이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예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성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능히 알았을 것이다(요 6:53). 따라서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 예식일 수 없으며, 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차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희생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그들이 과거에 얻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성체를 기념하기만 한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the Pulilit Commentary). 한편 본문의 성만찬과 관련된 제견해들을 역사적 변천 과정을 따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성 경: [마26:2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이 유월절 식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잔'은 세번째 곧 '축복의 잔'이었을 것이다(17절 참조).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다시 추사하시고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에게 영광 돌리럽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 사용된 '사례하다'는 뜻인 원어 '유카리스테사스'(*)는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테오'(*)의 분사로서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 )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 저희에게 주시며 - 여기 '주시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도켄'(*)은 부정 과거형으로 단 1회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는 사례하신 후 단 한번만 잔을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잔을 받은 제자들은 그 잔을 받고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을 것이다.
? 다 이것을 마시라 - 마가는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이 본문을 '너희가 다 이것을 먹으라'고 명령한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더욱 이 장면을 생동감있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다'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떡을 먹은 사람이면 '모두' 잔을 마시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을 암시한 것이다.결국 이 말씀은 사제들만을 잔 마시는 행사에 참여시키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예전(禮典)의 그릇됨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실로 그들은 사도들에게 돌려진 잔은 오직 사제들만이 계승한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일반 신도들의 성찬 예식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살과 마찬가지로 주의 피는 우리 모든 신자의 신령한 음식이요 음료가 되어야 한다.

성 경: [마26:2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 죄용서를 얻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히 9:22)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20:28).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어 '에크퀸노메논'(*)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상징적임) 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 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렘 31:31-34; 슥 9:11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눅 22:19; 고 전 11:25).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 테스디아데케스)이란 말은 '둘'(*, 디아)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 티데미),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계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창 24:5-8; 히 8:6-13).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 24:5-8; 히 8:6-13),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內密)하게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6:29]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마시지 아니하리라 -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란 유대인들이 기도 중 포도주를 가리키는 통상적 표현이다(M. Berakoth 6:1).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월절 식사 중 마지막 네번째 잔을 마신 후(17절 참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마지막 잔을 들이키심으로써 구약 술법에 의한 유월절 식사가 최종 마감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 지상에서 오직 '고난의 잔'만을 남겨놓고 계신 것이며,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이 마감되고 새언약에 따른 성찬 예식이 새롭게 제정된 것이다. 한편 유월절 식사 중 잔을 네 번 마시는 것은 출 6:6, 7의 네 가지 약속에 대응된다. 따라서 예수가 성례 제정에서 말씀한 세번째 축복의 잔은 구속과 관계되는데 비해(출 6:6), 네번째 잔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 6:7)라는 약속에 대응되는 것이다(Lane, Dauble). 이제 예수께서는 이 네번째 잔을 드시며, 더 이상의 잔을 물리치심으로써 제자들의 관심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의 시각에 의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기쁨의 잔치'에로 돌리게 하신다.
?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 예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마감하시는 자리에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한 예식 곧 '그 나라'에서의 잔치를 고대(苦待)하고 계신다. 이 종말론적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 나라'(막 14:25)를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진정 이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나라이기도 하다(16:28; 눅 22:16, 18). 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성의 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질 영속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와 운명적 연대성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고 약속되는 바이다. 한편 본문의 '새 것'(*, 카이노스)이란 옛 것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지 단지 시간적으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 네오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벧후 3:13). 이는 아버지의 나라 곧 새하늘과 새 땅은 현세의 기존 질서와 차원을 달리하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단지 작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야의 축제에 다같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즉 첫번째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정착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 최후의 만찬도 앞으로 이루어질 나라에서의 구원과 삶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결코 실패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영광에의 진입로였다. 결국 그의 갈보리로의 행로(行路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3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저희가 찬미하고 - 이 찬미는 유월절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 노래하는 할렐(Hallel)의 후반부(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이다(17절 주석 참조). 이것은 보통 교송(交頌)으로 불려지는데, 이때 식사의 인도자이신 예수께서 찬송을 부르면 제자들이 '할렐루야'로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찬미 직전에 요 14장 강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 예수께 있어서 감람산은 묵상과 기도의 처소인 동시에 시련과 고통의 장소였다(눅 21:37 ;22:39). 그러나 주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승직의 찬미를 부르면서 이 형극(形棘)의 장소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원 형태에 따르면(출 12:22) 유월절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침까지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나아가신 이유는 원 율법을 어기셨다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전수 과정에서 많은 변천을 통해 통상적으로 바깥 출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나아가셨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6:3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때에 예수께서...이르시되 - 31-35절 부분은 평행 구절을 대비시켜 볼 때(막14:27-31; 눅 22:31-38; 요 13:36-38) 예수의 무리가 감람산으로 이동하시기 전(30절), '한'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 마태가 이 사건을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예수의 체포 장면이 다뤄져 있는 36-56절 앞에 수록한 것은 참으로 예수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또렷이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오늘밤에'라는 문구는 마태복음에 만 나오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특별히 '오늘밤'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임박한 운명의 시간을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의해 직역하면 '너희가 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걸려 넘어지다'는 뜻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13:21; 24:10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말로서 여기서는 '실족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께 일어날 사건과 연관하여 그들이 함정에 빠져들 것이라는 의미이다(Lenski). 실로 그들 11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실족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가룟 유다의 적극적 배신 행위에 대비되는 11제자들의 소극적 배신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56절).
? 기록된 바 -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 의한 슥 13:7의 자의적 해석구이다. 실제로 문자적 일치는 부족하지만 그 본래의 의도하는 내용은 그대로 담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배신 행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成就)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스가랴의 예언을 빌어온 것이다. 한편 9:36과 25:32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양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에서의 '양'은 제자들에게 한정된다.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됨으로해서, 곧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게 될지라도 그 근본에 있어서는 양자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예시한 부분이다. 그러나 스가랴 본문에 의거하건대 여기서 예수를 죽이는 궁극적인 동인은 '내가', 곧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소망적인 사실은, 스가랴 13장의 전후 문맥을 보면 참 목자가 해를 받음으로 대부분의 양떼가 사라져 버리나(슥 13:8, 9) 양떼의 3분지 1은 남아서 연단을 받은 후에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희망찬 메세지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팔고(48절), 버리고(56절), 부인함으로써(69-75절)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연단을 통과한 후 분연히 일어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만방에 담대하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행 2:14-36 ;4:10; 18:5, 28)

성 경: [마26:3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 이 말씀은 수난에 들어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활 예고이다. 실로 예수의 메시지의 근본 취지는 당신의 수난과 제자들의 배신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과정 이후에 있게 될 당신의 부활을 밝히는데 있었다. 진정 당신의 부활은 '흩어짐'을 '모음'으로, '배신'을 '회개와 충성'으로 바꿔 놓을 것이었다. 한편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은 '너희를 갈릴리로 인도하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리로다'(*, 프로앝소)는 말의 본래 뜻은 목자가 양을 '앞서서 인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프로앝소'라는 동사를 이처럼 적극적 행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전체 문맥상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이 동사를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즉 목자가 공격당하여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제자들이 상심(喪心)하여 예수를 유대 지경의 무덤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갈릴리의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앝소'를 그들 실망한 제자들이 갈릴리에 닿기 전에 부할하신 예수께서 '그들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Stonehouse).

성 경: [마26:33]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다 주를 버릴지리도 나는 언제든지 - 여기서 '언제든지'(*, 우데포테)는 원래 '결코 아니', '절대로 아니'라는 강한 부정의 뜻을 담고 있는 부사로서 '너희가 다' '오늘밤'에 버릴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에 대해 그것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결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다 넘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넘어지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자신에 찬 선언은 직선적이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비록 당시의 그의 심정이 진정한 충성심에 불타고 있었고 그것을 순수하게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그 배후(背後)에는 지나친 교만이 숨어있다. 그는 은연중 다른 제자들을 가볍게 보면서 '다른 제자들은 주를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소영웅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신앙적 절개는 인간의 의지력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 의하지 않고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어야 했다.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강해지는 비결인 것이다. 여하튼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는 예수의 중요한 질문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본문의 이 자신 만만했던 결심을 회고(恢古)했을 것이다.

성 경: [마26:3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유월 의식에 젖어있는 베드로의 자만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권위에 찬 선언이다. 실로 베드로의 변절(變節)은 바로 눈앞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 닭 울기전에 - 마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막 14:30) 되어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닭은 밤 12시30분경, 1시30분경, 2시30분경에 각각 우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Hans Kosmala). 따라서 새벽 12시부터 3시까지를 '닭우는 시간'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하튼 본문의 '닭 울기 전'이란 적어도 새벽 동이 트기 이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부정한 짐승에 속하는 닭 기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닭 울기 전'이라는 말은 이른 아침을 나타내기 위한 속담적 표현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기르는 닭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기르는 닭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고 이른 아침에 로마 경비병들의 당번 교환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을 확실히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편 베드로의 선언이 강한 만큼 예수께서도 '진실로' 네게 이른다는 강조적 표현으로 베드 로의 배반을 다시금 예언하신다. 더구나 하늘의 숫자인 '세 번'을 사용하여 베드로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부인을 예시한다. 이 예언은 69-75절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

성 경: [마26:3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 마가복음에서는 '힘 있게 말하되'라는 표현을 곁들여(14:31) 강한 결의를 거듭해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문은 '결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중부정 구문(*, 우 메)이 첨가되어 반대 의사를 더욱 크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초두에 아주 드문 경우의 가정법(*, 데이)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아직 예수의 죽음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자들도 동의한 바 베드로의 강력한 장담은 예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의중(意中)을 드러낸 것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화려하게 왕위에 등극(登極)하실 것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제자들의 완전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장래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고통이었고, 제자들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였다.

성 경: [마26:3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겟세마네 - 기드론 골짜기 너머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의 동쯤 벽으로부터 약 1.1Km 정도 떨어져있다. 이 '겟세마네'라는 지명은 아랍어 명칭로서 '기름 짜는 틀'(olipress)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감람산의 감람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자주 들른 곳이었다(눅 22:39; 요 18:1, 2). 이처럼 감람기름을 짜는 곳에서 예수께서는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해서 오늘날 그곳에는 '땀흘린 교회'(The Ch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 내가...기도할 동안에...여기 앉아 있으리 - 이때 예수의 정확한 장소 지정에 따라 여덟 제자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고 세 제자는 예수와 더욱 가까이 있게 되었으며 그들과 조금 떨어져 예수가 위치하여 속깊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꺼내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호소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26:3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막 14:33)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로 이 세 제자들은 예수께 가장 신임받던 자들로서 변화산에서도 예수의 영광을 목격했었다(17:1).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곳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민과 슬픔'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요, 고난의 증인으로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마지막 행적을 전해 주고 있다.
?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마가는 이 장면에 대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는 말로 그 감정의 폭을 더욱 심도 깊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고민하고'(*, 아데모네인)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이며(빌 2:26), '슬퍼하사'(*, 뤼페이스다이)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다(갈 3:13). 정녕 이 고통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27:46)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그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성 경: [마26:3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예수의 최후의 기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 70인역(LXX)에 의한 시 42:5을 인용한 문구이다. '마음'의 헬라어 '프쉬케'(*)는 '바람' 또는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특히 본문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즉 인간으로 비하하신(빌 2:5-8) 예수의 심적 갈등이 이 단어 속에 침통히 새겨져 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신적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그의 인성의 고통을 철두철미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죽게 되었으니 - 혹자는 본 구절을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구약중의 말투(사 38:1; 욘4:9)를 받아들여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Taylor, Hill).
?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나와 함께'라는 문구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인데 마태는 이를 '함께'라는 말과 더불어 부각시켜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보여 준다.즉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것이 주의 인간적인 고민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근심은 오직 혼자만 아는 근심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류 대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분명하게 보고 계셨다. 한편 예수께서 긴히 당부하신 바 '깨어있으라'(*, 그레고레이테)는 현재형 동사로서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으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警戒)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 경: [마26:3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막 11:25), 무릎 꿇어서 하는 기도(행 7:60;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 내 아버지여(*, 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 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 저주이건(시 11:6; 75:8;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 찬 요청을 하려고 왔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눅 22:43).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 응답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성 경: [마26:4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제자들에게 오사...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 예수는 당신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당부하셨던(38절) 세 제자에게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는 이 장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는 말을 첨가함으로(눅 22:45) 그들의 수면을 좀더 동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비록 베드로에게 향했지만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들 세 제자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16:15, 16).
? 너희가 나와 함께...깨어 있을수 없더냐 - 제자들은 얼마전 주와 함께 죽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맹세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기도조차 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그들은 육체와 감정이 모두 인내의 도(道)를 넘어서고 있는 터에 영적 긴장마저 헤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처럼 조그마한 당부마저 너희들이 감내할 수 없느냐는 투의 연민에 찬 질문을 그들에게 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야 하며 홀로 결정해야 하셨다.
? 한시 동안도 - 이는 문자적으로 정확히 한시간 동안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동안으로 보는 것이 좋다. 정녕 '깨어 있음로써' 오는 시점을 직시할 수 있고 '기독함로써' 그 시점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24:42절과 25:13에서 강조된 바 있다. 특히 오늘밤에 제자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조금 앞서의 예고(31절)는 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직 기도만이 다가오는 '시험'에서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늘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대같이 약한 우리의 뜻은 쉽게 꺾이고 말 것이다.

성 경: [마26:4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이는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 프뉴만)은 뒤이어 나오는 '육신'과 반대 개념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신의 형상, 곧 '영혼'과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사 31:3 롬 7:25). 진정 '육신'적 유혹과 충동은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유약성(柔弱性)이다. 여하튼 닥쳐올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어려움보다 훨씬 덜한 제자들의 어려움을 염려해 주셨던 것이다. 실로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육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는'길 뿐 다른 대안은 없다.

성 경: [마26:4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아버지의 원대로 -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39절) 내용이 유사하지만 분명 새로이 아뢰어진 것이다. 특히 이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는 달리 고난의 잔은 당신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의 인성(人性)의 갈등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즉, 철저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주기도문(6:10)과 표현이 일치한다. 헬라어 원문에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낸 것이며(빌2:8), 예수 공동체의 모든 기도의 모범과 근거가 된다. 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이 가르친 순종의 교훈을 가장 잘 실천한 모범을 보이셨다. 처음으로 창조된 인간이 살던 동산에서 '당신의 뜻이 아닌 나의 주장함으로써 낙원이 광야로 변하였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네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함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을 천국(天國)으로 바꾸셨고, 그 결과 고통의 갯세마네 행로는 영광으로의 문이 된 것이다.

성 경: [마26:4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졸음에 겨워 잠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눈이 피곤함일러라'는 헬라어로 과거 완료 수동태로 그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내려 감겨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게으름을 반영하고 있는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때의 상황을 좀더 세밀하게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 14:40)를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잠에 취한 상태가 얼마나 깊었으며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해 있었던가를 넌지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성 경: [마26:4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후 - '동일한 말씀'은 두번째 기도의 반복이었을 것이다(42절). 이때 예수께서 기도하신 예수에 대해 복음서들 간에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마태븍음에서는 예수께서 세번 기도하신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번의 기도는 (1) 예수의 기도의 간절성과 (2)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의 긴박감 및 (3) 예수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절대성과 적극성등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은연중 강조되고 있다.

성 경: [마26:4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이제는 자고 쉬라 - 본문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이 문구는 직설법으로 또는 명령법으로 번역될 수 있어서 그 해석도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1) 이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 주께서 체포당하시기 전까지 잠을 자둠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라는 권면으로 해석한다(A.L. William). 이례게 해석할 경우 다음 절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2) '나로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무한정 자고 쉬어도 상관치 않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녀희들의 주의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Bruce). (3) '기도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구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cneil). (4) '이 후에 자고 쉬라', 즉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른 때에 쉬라는 것이다(Knox). 이중 어떠한 견해만을 취하기는 힘들지만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즉 예수께서는 이 부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비꼬는 투의 풍자적(諷刺的)인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즉 수난의 시간이 가까왔고 기도하거나 닥쳐올 시험에 대비하여 힘을 얻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이제는 잠을 자도 무방한 것이다.
?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 예수의 갑작스런 이 선언은 완료 시상으로서 바로 그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 원수의 손에 잡히어 최악의 순간을 맞을 그 수난의 때가 이미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등불을 들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 겟세마네로 통하는 길을 따라 당신을 잡으러 접근하는 무리들의 험악한 발자욱소리를 멀리서부터 듣고 계셨을 것이다.
?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여기서 '죄인'은 배신과 고발의 첫 행위자인 가룟 유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 '죄인'은 산헤드린 공회원, 백성의 지도자, 일반 백성, 그리고 로마 행정 당국자들 모두를 내포한다. 더욱이 이 '죄인'은 미래적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형을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다.
?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복의 한 단면이었다.
?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노니 - 6절에서는 '때가 가까왔다'고 말하셨었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다.

성 경: [마26:4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복의 단 한면이었다.
?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45절에서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었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다.

성 경: [마26:4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말씀하실 때에 - 예수의 체포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대화를 막 끝마치는 것과 더불어 체포자들이 예수의 무리 모인 곳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 - 공관복음서 모두가 유다를 '열 둘 중에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막 14:43; 눅 22:47). 아마 이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유다의 별칭이거나 아니면 배신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불충(不忠)한 것인지를 드러내보이기 위한 표현인듯하다. 실로 '열 둘'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명예로운 대명사였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극히 저주스러운 대명사가 되었다. 마태는 유다가 언제 제자들 사이에서 빠져 나가 예수를 잡으려하는 자들과 어울렸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요한은 유다가 마지막 만찬 때에 떡조각을 받은 후 제자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요 13:30). 아마 유다가 대가를 받고 알려 주기로 한 것은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느 조용한 곳에서 예수를 체포할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로 어떤 곳을 자주 찾으시는지를 익히 알고 있던 유다는 그분이 유월절 식사 후 감람산 겟세마네로 가실 것을 알고 나가서 무리를 끌고 그 곳으로 왔던 것이다.
?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 이때 유다를 따라온 '큰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 곧 산헤드린의 서기관들과 평의원들이었다(21:23). 이와 더불어 녹 22:52에는 '성전의 군관들'로, 요 18:3에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로 되어 있다. 특히 요 18:3, 12에 사용된 군사용어로 미뤄볼 때 성전 경비대 및 기타 고용된 건달패 그리고 로마 군인들도 다수 있었던 것같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이때는 아직까지 로마군인들이 개입치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로마 병사들은 명절 기간의 치안 유지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산헤드린으로부터의 병사 파견 요청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음모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줬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내가 꾸었던 꿈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27:19). 한편 '검'은 로마 군인을, '몽치', 곧 곤봉은 유대인 성전 수비대의 사병들을 지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태는 '큰무리'라는 표현으로 예수를 잡으러온 사람들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때에 예수를 잡으러 파견된 자가 약 200명에 달했으며, 그 주위의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Lenski). 그리고 55, 56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께서 스스로 기꺼이 고난의 잔을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렇게 많은 무리는 사실 필요가 없었다.

성 경: [마26:4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예수를 파는 자가...군호를 짜 - 당시는 사진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거진 감람나무 사이의 어두운 밤이었므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찾아내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무리들과 신호를 맞추어 손쉽게 체포하도록 했다.
? 입맞추는 자 - 당시 유대인들에게 입맞춤이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인사법이었다(삼하 20:9). 정상적인 인사 형태인 입맞춤이 어둠 속에서 체포의 군호로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배신과 위선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말았다. 아마 이곳에 몰려온 무리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말을 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 맞춤에 의한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49절에서 다시 반복해 사용된 '입맞추다(*, 카타필레오)는 동사는 본절에서 사용된 '입맞추다'라는 동사와 어근은 같으나 형태가 약간 다르다. 즉 본절의 입맡춤은 단순한 인사로서의 한 형식을, 49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반복해서 거듭 입맞추다' 또는 '친밀하고도 뜨거운 포옹' 정도의 뜻이다. 여하튼 제자와 스승 사이에 있어서 제자가 먼저 스승에게 입맞추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입맞출 수 없는 이유는 제자와 스승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와의 사제(師弟) 관계가 최종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유다의 이 행동은 일종의 모욕적 행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장면은 다읫시대 요압이 아마사에게 입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를 찔러 죽인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삼하 20:9, 10). 바로 이러한 야누스(Janus)적인 성격이 사단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악인의 전형적 속성인데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파멸과 불의와 탐욕을 획책한다(고후 11:13-15).

성 경: [마26:4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 이는 통상적인 인사말이었는데, 여기서는 예수께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보다 따라온 무리들에게 확연히 들리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신호였다. 한편 마태복음 전체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여', 즉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경우는 본절과 25절에 두 곳 뿐인데 두 경우 모두 예수를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 의해서 불리어진다(25절 참조). 보통 제자들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은 '주님이여'이다.

성 경: [마26:5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친구여 - '친구'의 헬라어 '헤타이로(*)는 동의어 '필로스'(*)가 개인적 친분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직업적인 동료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따사서 그 말 속에는 적의나 반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배신자' 또는 '악한 자'로 비난하지 않으시고 정중한 예의로 인내하신다.
?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 이 말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고, 누가복음에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헬라어 표현인 '에프 호 파레이'(*)의 의미는 확실치가 않다. 새번역에는 '네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느냐 ? '라는 의문형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의문형보다는 오히려 생략적인 명령형으로 이해하고 있다(사실 원문에는 '행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어서 할 일이나 하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고있다. 즉 '네가 온 목적을 행하라'는 뜻이다. 한편 요 13:27에서는 예수께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라'(새번역)고 말씀하시는데, 의미는 일맥 상통한다. 결국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의연히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즉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服從)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 저희가...손을 대어 잡는지라 - 이때 성전 수비 대장 또는 로마의 하위급 장교의 명령에 의해 예수께서 결박당하셨을 것이다(요 18:12). 그리고 예수는 그 어느 죄인보다 더 손쉽게 그들이 결박에 응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마26:5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 -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치게 한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장본인은 바로 베드로였다(요 18:10). 더불어 요한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이 '말고'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혹자는(Robertson) 마태복음을 비롯하여 공관복음서가 베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A.D. 68년까지 생존했었던 베드로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베드로의 행동은 심리적으로 보아도 수긍이 간다. 예수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변절(變節)하리라는 경고를 들은 그로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폭력 행위를 말리고, 또 순순히 결박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충동적인 용기가 사그러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극히 감정적인 충성심의 표현은 사실상 주께서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가 참다운 충성심을 보여 줄 수 있기 위해서는 하직은 더 많은 연단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체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즉시 상황을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떨어진 귀를 원상 회복시켜 주었으므로 더이상의 문책(問責)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눅 22:51). 한편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검'을 휘둘렀던 점과 눅 22:49에서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우리'를 언급한 것을 근거로 제자들 모두가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열심당의 극좌파인 '시카리'파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10:34; 눅 12:49-51; 22:36).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인 듯하다. 오히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 예고가 있은 후부터 예수의 신변을 보존할 목적으로 단검을 준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성 경: [마26:5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 이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리라 - 52-5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평행구가 없다. 한편 계 13:10에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이 나오며, 창 9:6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하나의 격언구로 사용된 듯 하며 예수에 의해 영원한 진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와 흡사한 맥락에서 5:39 이하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적어도 이 말씀 속에는 생명예 대한 존엄 사상이 들어있는 바,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신성하며 그것을 해하는 자에게 징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意志)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단순한 평화주의에의 호소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한 것이지 내어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며 검의 사용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려 한다. 두 가지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나 본문의 직접적인 뜻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본문의 문맥상 검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근거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무력 앞에서의 무기력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몇 가지 저의는 (1) 칼을 사용함으로써 불의한 판결을 일삼는 사악한 집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며(Luther), (2) 칼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에 반하는 세상 국가들의 힘의 통치력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칼의 사용을 금하신 것이다.(요 18:36). 이와 함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해하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올라온 무리와 그 무리의 배후 세력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다. 즉 너희들이 '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고귀한 생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너희 자신들이 '검'앞에 거꾸러짐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성 경: [마26:5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 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성부께 대한 성자의 귀속이나 의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성부와 하나된 자이신 성자께서 마치 동맹군의 원조를 호소하듯 성부께 청원하는 것을 의미한다(the Pulpit Commentary).
?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 - '열 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의 수와 일치하고 열 두 지파의 수와도 일치하는 매우 의미깊은 슷자로서 성경 문학적으로 '완전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軍團)을 뜻하는데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틴에는 상당수의 로마군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이들은 주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일개 정규 군단은 보병 6100명, 말 726필 규모였다(Robertson). 따라서 ' 열 두 영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한다면 그 힘은 불과 몇백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께서 저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기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에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들을 쳐부술 것이었다. 이것은 왕하 6: 17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지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불병거(왕하 6:17), 스랍(사 6:1-3), 그룹(창 3:22-24), 천천 만만의 천사(단 7:10)의 통치권자로서 광야 시험 후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으며(4:1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천사의 도움을 받으셨다(눅 22:43). 다만 예수께서는 성경들에서 가리킨(54절) 바와 같이 아버지의 뜻 곧 인류 대속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혀 주신 것이다(히 1:14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마26:5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만일 그렇게 하면 - 베드로가 휘두른 '검'으로나 하늘 천군 천사의 도움을 빌어 저들에게 잡히지 아니하면, 즉 순간적인 인간의 충동대로 행동하면이라는 뜻이다(Bruce).
?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마태의 신학, 즉 예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의 경우,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예는 드물다. 그리고 마가 역시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막 14:49)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마태의 거듭되는 강조적 표헌(표현)보다는 그 강도가 약하다. 여하튼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당하는 배반과 체포, 그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은 결코 단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경륜)에 당신의 전 관심과 의지를 집중시키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은 예수의 수난과 관계된 구약의 여러 예언들로서 가룟유다의 배신(시 41:9), 은 삼십에 팔림(슥 11:12), 죄인들과 함께 못박힘(사 53:12), 수족이 찔리심(슥 12:10)등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에 대한 예언으로서 사 53: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기록듸어 있다.

성 경: [마26:5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강도'(*, 레스테스)라는 말은 조직적이고 폭압적인 강탈자라는 뜻 외에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혁명가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Josephus). 사실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이 겨우 몇몇의 동지를 규합해서 로마나 유대 당국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은밀한 곳에서 모의를 하는 흉기를 든 '강도'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늘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며, 그 가르침의 내용도 '사랑과 평화'였다. 물론 그분은 악한 세력에 대해서는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정화(정화)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타락한 무법자요 강도의 행동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흉악한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심으로((27:38) 로마와 유대 당국으로부터 끝까지 강도 취급을 당하고 마셨다.
? 날마다 - 이 문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신 기간이 공관복음이 말해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오랜기간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공생에 기간을 길게 잡고 있는 요한복음은 이같은 사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성전에 앉아 -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고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가운데 세 설교가 예수께서 앉아서 하신 설교이다(5:1; 13:1, 2; 2:3). 실로 마태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를 그가 '앉아' 가르쳤음을 말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 랍비들이 교훈을 베풀 때 대개 앉아서 하기 때문이다.
?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문구이다(1:22, 23; 2:15-18; 2:23; 13:34, 35; 21:3-5 등). 마태가 여기서 '선지자'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 스가랴나(슥 13:7)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4절). 그러나 '선지자의 글'이란 율법서와 성문서를 완전히 배제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모세와 다윗도 '선지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예언들을 베푼 자가 왕이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주로 예언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이로써 31절에서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35절) 주님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가 버렸다. 특별히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청년의 행적을 기록하여여(막 14:51, 52) 그때 제자들의 도피 행각이 얼마나 신속하고도 황급히 진행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하튼 이제 주님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침묵하시는 동행(同行)만을 기원하며 체포자들의 손에 끌려가게 되신 것이다(요 18:12, 13).

성 경: [마26:5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 1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i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 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 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원절, 장막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닌 가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5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으심]
?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 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 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2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e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테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님. 가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5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음]
?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 57-75절은 예수에 관한 장면과 베드로에 관한 장 면이 한번씩 번갈아 나오는 교체 편집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57절의 예수의 장면에 이어 베드로가 등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용기와(51절) 비겁(56,70절) 사이의 망설임 속에서, '멀찍이' 예수를 따랐다(Brngel). 한편 요 18:15, 16에는 베드로가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안뜰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여하튼 수제자로서 예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비록 처음은 도피했었지만,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 예수의 신변을 돌아보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 그 결국을 보려고...하속들과...앉았더라 - 베드로는 마당에 피워놓은 숯불에 둘러선 '하속들', 곧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의 시중들 틈에끼어 들어 예수에게 되어지는 '결국', 곧 심문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려고 하였다. 아마 이때 요한은 예수의 심문 장소에 좀더 접근(接近)해 있었음이 분명하다(요 18:16). 바로 그 요한이후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말씀을 남겠는데(요일 4:18), 이는 베드로의 안절부절한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해 주는 듯하다.

성 경: [마 26:5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음]
? 온 공회 - 이 공회가 불법적 공회였다는 견해와 법적으로 공회가 밤에야 열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 모임이 밝은 다음에 모일 정식 공회를 위한 예비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자의 견해에서 산헤드린은 세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도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전체 회원수는 72명이나 회의의 정족수는 23명이면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온 공회'는 모든사람이다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헤드린이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정족 인원이 모였을 뿐 아니라 그 회의의 핵심적(核心的) 인물들과(대제사장 등)이 모여 그 심문에 있어서 하나의 주체로서 관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이와 함께 후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한밤중에, 그것도 유월절 밤에 온 산헤드린 공회가 다 모였을 가능성은 없다. 랍비들의 법에 의하면 범인을 심문하는 것은 낮에 해야 하며 낮 동안에 끝내야 한다. 밤에 모인 그 모임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정식으로 의회를 소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차하게도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모여 예비 심문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중 두번째 견해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으나 첫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성 경: [마26:6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받으심]
?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 예수를 옭아매기 위하여 여러 거짓 증언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의 증언에는 일치된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태는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막 14:56)는 마가의 평행구를 축소하는 대신 마가에는 없는 '두 사람'의 증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이 두 증인들은 추측컨대 공회에 매수된 자였거나 아니면 윗 사람의 비유를 맞출 목적으로 증인의 자리에 선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마 26:6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수 있다 - 드디어 두 증인의 일치된 증거가 나왔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다. 분명히 이 언급은 예수의 생애의 사실들에 부합되게 보인다. 실로 예수께서는 성전을 실격시키고 삼 일 후에 자신의 부활할 것을 고지하신 바 있다(요 :19). 확실히 주님은 성전을 비난하고 그 건물의 무너짐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증인들은 성전을 정죄한 예수를 성전 파괴를 직접 감행할 범법자로 혼동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직접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가 이 성전을헐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일밖에는 없다(요 2:19-21). 더욱이 그 말씀의 참 뜻은 자신이 죽은 후 사흘만에 있을 그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지 옛 성전이 몰락한 후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예언을 한 것은 정녕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인들의 말은 순전히 오해에 의한 증언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두사람의 증거는 서로 일치하지 못함으로써(막 14:59) 그 증언의 신빙성마저 결여되고 있었다. 한편 렘 26:1-19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성전 멸망을 예고(豫告)한 것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성 경: [마26:6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대제장이 일어서서...아무 대답도 없느냐 - 예수께서는 법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러한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어떻게든 예수를 해하려고 하는 교활한 가야바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예수의 진술에서 무언가 또 다른 걸림돌을 찾아내려는 조급한 상태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저들의 비겁한 공작 (工作)은 예수의 위엄있는 침묵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한편 예수의 침묵하는 모습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라는 구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진정 때로는 거짓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거짓을 이기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진리는 거짓 증거에 대하여 굳이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그 진실성을 밝힐 뿐이다.

성 경: [마26:6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잠잠하시거늘(*, 에시오파)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예수의 침묵이 순간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진정 침묵의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그 무겁게 내리깔린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악한 산헤드린 회원들의 가슴마다에 웅변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거짓된 증언을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되었을 것이다.
?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 이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또는 판단하시고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맹세 형식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만의 독특한 것인데, 재판석에서 피고에게 서약시키는 형식이었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 이것은 예수께서 과연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어 왔었다(12:28-42; 16:1-4; 21:1-11, 14-16, 23). 그런데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책(罪責)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예수를 판 자는 가룟 유다였지만 율법의 교묘한 올가미와 교권주의자들의 사악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처형할 합법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마련한 자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이다. 실로 가야바는 이 적나라한 질문을 통해 율법적으로는 신성 모독의 범죄를 찾고자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여하튼 가야바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은 네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적 속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물음은 네가 이 세상을 구원할 사역을 지니고 온 메시야이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구약 시대 이래로 메시야를 대망해 온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결국 그 질문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64절).

성 경: [마26:6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네가 말하였느니라(*, 쉬 에이파스) - 예수의 이 대답은 마가복음 '에고 에이미'(*), 즉 '내가 그니라'는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약하다(14:62). 즉 '네가 말했다'는 예수의 말씀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긍정하는 말이다(25절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5:33-37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 '맹세하지 말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실행하신 것이다.
?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너희가 보리라 -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관한 가장 은밀한 신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비록 지금은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 당신의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변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변화산상에서 그 전조(前兆)를 보이신 바 있다(17:2-13). 진정 그 당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 이후에 전개될 영광스런 장면들을 선취적(先取的)으로 보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영광스런 광휘(光輝)의 장면, 곧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같은 선취적인 고백은 대제사장을 깊이 당황케 했을 것이며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진정 '네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는 볼 것이다'는 예수의 권위에 찬 응답은 그의 현재의 권위를 확인하고 장차 있을 그의 영원한 왕권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은 시 110:1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행위와 통치권을 전해받으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의 동격을 이루실 예수의 신적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단 7;13, 14)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실 예수의 최고의 자기 계시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사실상동일시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이전의 주장 만큼이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들에게 확실한 고소거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6:6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으심]
? 옷을 찢으며 -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로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한편 본문의 '옷'(*, 히마티아)은 겉옷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예복을 가리킬 것이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에는 속옷올 가리키는 '키토나스'(*)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이때 가야바는 속옷과 겉옷을 동시에 잡고 자기 목 부위에서 가슴이 노출될 만큼 찢어 내렸던 것 같다. 여하튼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에 직면했거나 의로운 분노의 한 표현으로 행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동이었다(왕하 1:37; 1 Macc 11:71). 특히 랍비들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율법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했을 때 법관은 일어나 옷을 찢도록 했다. 그리고 그 찢는 부분이나 길이 등의 세밀한 면까지 제시하고 있다.
?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에블라스페메센) -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께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가 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이제 신성 모독의 가장 중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레 24:16).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중한 범죄로 인정되었지만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성 경: [마26:6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생각이 어떠하뇨 - 대제사장 가야바는 귀중한 한 생명의 생사가 달린 시점에 정식 재판 과정을 거치는 신중함을 보이지 않고 마치 군중을 선동하듯이 분위기를 이끌므로써 거의 환호에 가까운 사형 판결을 이끌어 냈다. 아마 이때 산헤드린을 위시한 군중들은 만장 일치로 예수의 사형을 연호(연호)하였을 것이다(막 14:64).
? 사형에 해당하니라 - 오직 마태복음만이 사형 판결을 직접 화법으로 보도함으로써 그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소개한다. 그 대신에 마태복음에는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찬성하였다는 부분이 없다(막14:64). 한편 공의회의 사형 판결은 아마 신성 모독의 법조문에 해당하는 레 24:16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이 판결은 여러가지로 불법이었다. 사실 탈무드에 가르치기를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밖에도, 궐석(闕席) 판결을 하지 말 것, 다수의 동의가 아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 것, 사형 선고 받은 자는 판결 당일에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 원칙이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법규는 죄인에게 가급적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인데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그 선한 정신이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산헤드린 법 4:1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1)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 또 해지기 전에 끝마칠 것, (2)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는 심문의 날에 선고할 것이나, 유죄일 때는 다음날에 선고할 것이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이와 같은 법규를 어기고 예수의 심문을 유월절 절기와 안식일의 임박으로 인해 조급하게 행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심문한 당일에 선고를 내리고 당일에 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아니다. 악한 통치자와 타락한 종교와 의식이 없는 백성들이 만날 때는 항상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

성 경: [마 26:6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사 50:6의 예언, 곧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메시지가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불법 판결이 끝나자 주위에 기다리고 있던 하속들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와 조롱을 일삼은 것이다(막 14:65). 정녕 그들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최악의 수치를 예수께 안겨준 것이다. 여기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더할 수 없는 모욕이다(민 12:14; 욥 30:10).
? 주먹으로 치고...손바닥으로 때리며 - 도무지 반격할 수 없는 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은 더더욱 야만적이다. 한편 누가는 이때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구타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웠다고 증언하고 있다(눅 22:64). 이와 함께 본문의 '손바닥으로 때리며'(*, 에르라피산)는 '몽둥이로 때리다' 뜻하는 '라피스 마'(*)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 당시 하속들은 손바닥 뿐 아니라 몽둥이로도 예수를 심하게 구타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신성 모독자를 구타한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적 무지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성 경: [마 26:6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 여기서 마태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은 상호보충적이다. 즉 각 기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포함하고있다. 그중 마가와 누가는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의 눈을 가리고 나서 그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도륵 강요하며 조롱했다고 한다(막 14:65 ; 눅 22:64). 한편 마태는 눈을 가리웠다는 말을 생략하는 대신 그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야'라고 불렀으며, 눈을 가리운 채 구타한 후 '너를 친 자가 누구냐'는 조롱조의 질문을 함으로써 메시야의 신적 통찰력과 능력을 보이라고 빈정거렸다고 한다. 사실 유대인의 그리스도(메시야)관은 불의를 정복하고 각종 능력을 행사하며 민중을 압도하는 어떤 탁월함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보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침묵(침묵)으로 일관하는 자가 그리스도 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여기서 '선지자 노릇 하라'는 말은 장래의 일을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지식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즉 메시야라고 하면 비록 눈이 가리워져 있어도 자기를 친 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다.

성 경: [마 26:6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번 부인]
?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 이 구절은 본래 58절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연결해보면 자연스럽다. 다시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다.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궁 내로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전 수비대의 경비에 의해 예수가 심문받고 계신 궁전의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궁궐이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궁전 안 마당에 앉아 산헤드린의 판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 한 비자가...가로되 -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한 비자'(a servant girl, NIV)는 베드로를 궁내로 들어가게 한 여자 문지기임을 알 수 있다(요 18:16, 17). 그 여자 문지기는 아마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막 14:67)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한다. 결국 이 두 표현(나사렛, 갈릴리)은 지리적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심히 멸시적인 용어이다(요 :46). 여하튼 그 '비자'는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자 그가 심히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자기와 안면이 있는 요한과 그가 함께 궁내로 들어왔음을 보아 적어도 그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는 추론을 하게 된 듯하다.

성 경: [마 26:7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수의 말씀 곧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씀과 연관지어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이다. 진정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장면에 직면한 베드로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공개적으로,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예수와 자신의 관계성을 부인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은 마치 공식적인 법정에서의 선서와 유사한 형태이다(M.Scebuoth 8:3).
? 네 말하는 것이 무엇언지 알지 못하겠노라 - 결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베드로는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한다. 이처럼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거짓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이자 기독교 교회의 반석이라고 할 만한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실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될 장면인 것이다. 한편 이 베드로의 치욕스러운 자기 부정적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였을 수 있다. 베드로는 매사에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유약함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간구할 수 있다.

성 경: [마26:7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앞문까지 나아가니 - 여기서 '앞문'은 가야바 궁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불빛이 그곳까지 잘 미치지 못하는 출구였을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아마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른 비자가...말하되 - 두번째 부인(否認)은 '다른 여종' 앞에서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이 같은 '여종' 앞에서 진행된 듯한 암시를 준다(막 14:69). 요한복음에는 '여종' 앞에서 부인한 적이 없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 부인한 것 가운데 맨 처음만 '여종' 앞에서 했을 뿐 나머지 두번은 다른 사람(남자) 앞에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이 여러 사람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되어진 뒤에 되어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여하튼 베드로는 불가의 밝은 곳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도 괴로운 질문을 피하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와중에 자정이 지났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렸다고 전하고 있다(막 14:30).

성 경: [마26:7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 여기서 '맹세'(oath)는 어떤 자기 진실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선언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으로서(Robertson), 이는 베드로 자신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주(詛呪)내리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떤 거룩한 것에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5:33, 34; 23:16-22). 어쨌든 베드로는 첫번째 부인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다.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는 경멸적 표현으로 부인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성 경: [마26:7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조금 후에 -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눅 22:59). 이 시간동안 예수는 공회에서 사형 언도와 하속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나신 후 안 뜰을 바라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송된 듯하며, 어쨌든 거듭되는 위험의 증대와 부인 가운데서도 아직 예수의 신상이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는 베드로의 인간미가 엿보인다.
? 곁에 섰던 사람들 -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이 무리 중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전한다(요 18:26). 아마 그 친척은 불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예수와 한 통속인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말고의 일로 조금은 흥분된 감정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 진실로 그 당이라 -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가 된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추측에서 확신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그의 말투는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감출 수 없게 한다.
?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북부 갈릴리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대지방의 말과 현저하게 달라서 금방 구별될 수 있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벳 중 '알렵'(*), '헤트'(*), '아인'(*)같은 후두 문자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으며 '쉰'(*)을 '타우'(*)로, '베트'(*)를 '페'(*)로 발음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atary). 베드로는 '내가 그 사람을' 할때 '사람'의 '이쉬'(*) 발음을 '아투'(*)로 발음하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사 시대 때 있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여 자기의 출신지를 나타냄으로써 죽임을 당했던 예가 있다(삿 12:6).

성 경: [마26:7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저주하며 맹세하여 - 처음에는 부인, 다음에는 맹세로 부인, 그 다음에는 저주로 부인한다. 이는 죄악과 위선의 가속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베드로의 반(反) 고백들은 예수의 결정적인 고백에 맞서 있다. 즉 예수의 진실한 고백은 사형을 초래했으나, 반면에 베드로의 세 차례 거짓 고백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 정녕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신성 모독의 중한 죄악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16:25).
? 닭이 곧 울더라 -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린다. 새벽이 되기 전 그 밤동안 닭은 두번 울어댔다(막 14:72). 한편 이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의 혼란스럽고 완악해진 마음을 돌이켜 참회의 눈물로 변화시킨 일종의 신선한 경종이었다.

성 경: [마 26:7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실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다.
?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로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행 :2:14). 한편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7: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에게로 이송]
? 새벽에 - 본장 초두에 제시된 '새벽에'의 원문 '프로이아스 데'(*)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른) 아침에' 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해가 떠오른 후에야 비로소 공식 회의를 열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이미 지난 밤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예수의 사형을 결의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해가 떠오른 때'를 기다려 그 결의안올 정식 회의에 상정한 것을 묘사한 문구이다(눅 22 : 66). 실로 이것은 자신들의 불법을 위장하기 위한 합법적인 노력이었다.
? 예수를 죽이려고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는 없는 문구로서 마태는 26:59, 즉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마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에 관한 소송을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심중에 있는 주된 소송 이유는 예수로 인해 자기를의 종교, 사회적인 각종 기득권을 잃게될 위험성 때문이었지만 저들이 내세우는 형식상의 이유는 예수께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26:65,66). 그러나 신성 모독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로서 그 당시 각 피지배 지역 주민들의 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로마의 한 행정관인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결정적인 사형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메시야의 왕권을 공소(公訴)의 주제로 삼아 예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내리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행 17 : 5-4).
? 함께 의논하고(*, 쉼불리온 에라본). - 이 말은 함께 숙의적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기 보다 어떤 '결의안을 통과시키다'라는 라틴어법적 표현과 유사하다(Consillium Ca-pere). 결국 재차 산헤드린 공의회로 모인 그들이이미 제 1차 야간 회의에서 결안된 예수의 사형 선고를 합법적 절차에 따라 새롭게 인준해 준 것이었다.

성 경: [마27: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리도에게로 이송]
? 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결박'은 두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부터 결박당하셨던 것 같으며(26 : 57) 재판과정 동안 풀렸다가 재차 포박당하신 듯하다.
? 총독 빌라도 - '총독'으로 번역된 '헤게모니'(*)는 지도자, 총독권자, 또는 통치권자를 뜻하는 일반적인 칭호이다(10 : 18). 이 직분의 더 특별한 명칭은 '총독', '행정 장관'이란 뜻의 '에피트로포스'(*)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전자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한편 그들은 가이사에게 직접고소하지 않고도 식민지인의 생사 여탈권(生死 與奪勸)을 가질만큼 권한이 컸다. 여하튼 사태는 '빌라도'라는 이름 앞에 '총독'이라 명칭을 덧붙여서 빌라도가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빌라도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관할한 여섯번째 총독으로서 디베리오(Tiberius) 황제로부터 A.D. 26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하고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신의 수하에 있는 유대인 관리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매우 외골수적인 지배자였던 것 같다 (Jos.Antiq.XVIII,35,55-62;Wars II,169-177). 또한 그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고르반) 돈을 훔쳐 수도가 설비로 유용(流用)했으뗘, 이에 에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었다(눅 13 : 1). 그런데 복음서에 제시된 그의 인물됨이 위와는 크게 대조되는, 그야말로 심약하고 기회적 주의적인 성경으로 묘사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제시하곤 한다. 이에 대해 '훼넌'(Hoehner, Ch-ronological, Aspects , pp. 104-105)는 빌라도가 그 당시 곧. A.D. 33년에 예수를 처형할 시점에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신임을 잃고 있었으며, 자신의 구원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인 세아누수(Sejanus, A.D. 31.10. 19 사망)가 죽음으로써 그가 상당히 위추된 상태였으므로,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그가 이 예수 처형건에 대해 연약한 모습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견해는 연대기적 차원에서 성경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전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빌라도의 고도의 정치술에 의한 후기 생존의 한 방법으로 이렇게 유익한 모습을 보였였다 보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A.D. 33년까지의 빌라도의 행정은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A.D. 36년에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프랑스 지방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한다. 어쨌든 예수 처형당시 빌라도는 가이사랴에 자기 관저가 있었으나 유월절 등과 같은 큰 명절 때는 예루살렘에 입경하여 그곳 치안을 관할하곤 했다. 아마 그당시 빌라도는 자기 아내와 함께 안토니아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때 산헤드린의 공식 회의에서 예수를 사형 선고한 후에 곧장 이곳 빌라도의 처소로 끌고 온 것은 비록 그들이 자의적으로 사행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사형 집행권은 오직 총독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법에 따르면(1:1;7:2) 예루살렘 멸망(A.D.70)약 400여년 전에 집행권 유대의 자치적 권한에서부터 로마 정부 당국으로 이양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선 때는 금요일 아침, 곧 유대력 니산월 14일 아침이다.

성 경: [마27: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때에(*, 토테) -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 때에', '그다음에', '그리고나서' 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산헤드린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제소(提訴)된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의 정죄됨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이돈)란 '쳐다보다', '조심하다', '주목하다'는 뜻의 원어 '오라오'(*)의 제 2과거행 분사이다. 이는 결국 유다가 예수의 재판 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문구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로 번역된 공동번역과 새번역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유다는 아마 예수께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 전 과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보인다.
? 스스로 뉘우쳐 -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는 마음과 삶의 전적인 번화(*, 메타노이아)를 뜻하는 '메타노에인'(*)보다는 상당히 약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고 단순히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앞에서의 죄 청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인간적 후회의 차원에서만 바꾸는 것이다. 여하튼 '뉘우치기'까지 하는 유다의 마음의 상태를 보건대 그는 예수께서 설마 사형에 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렇게본다면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긴 것은 돈을 탐하였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수를 배반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악한 일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을수도 있다는 점에서 꼭 전자의 입장이 옳다고만 볼 수도 없다. 유다의 배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 은 삼십을...도로 갖다 주며 - 26:1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유다는 악한 자기 행위의 결과요 침묵하고 있는 증인이라 볼 수 있는 은 삼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되돌려 주어 양심의 가책을 가볍게 하고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의 무죄함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환불(還拂)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 행위의 결과만을 씻어버림으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이 한 부류, 곧 산헤드린의 회원들임을 암시하기 위해 두 단어를 묶은 하나의 관사(*, 토이스)만을 사용하였다(21:23)

성 경: [마27: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 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이다.
?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마27: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 나오스)가 성전 구내 전체를 뜻하는지, 이방인의 뜰과 막연히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sanctuary)를 뜻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나 대체적으로 후자를 택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다면 이때 유다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양으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한 채 성소 뜰로 뛰어들어 열린 성전문으로 은 삼십이 든 주머니를 던져 넣었을 것이다.
? 물러가서 - 마치 단말마(斷末魔)의 그것처럼 필사적으로 자기 절망감을 극복하려 했던 유다는 성소에서 뛰쳐나와 곧장 힌놈 골짜기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The Pulipit Commentary).
? 스스로 목매어 죽을지라 - 그러나 본문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8). 이는 양 기사간의 모순을 드러내기 보다 조화로운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가룟 유다는 자살 장소로 가파른 바위 언덕 위로 올라가 그곳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는데, 후에 그 무게를 이기지못해 그 가지가 부러짐으로 해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어 갔을 것이다(행 1:18,19 주석 참조). 한편 '목 매어 죽은' 사건은 이곳 외에 70인역(LXX)의 삼하 17-23에서 나온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어떤 학자들은(B,F, Meyer, McNeile) 다윗을 배신한 친구인 아히도벨과 다욋의 자손을 배신한 가룟유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해 마태가 의도적으로 본 장면을 첨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가 이같은 비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두 배신자를 비교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Moo, Use of O.T. pp.189-91). 결국 유다는 끌내 멸망에 이르는 자기 길로 가고 말았다(행 1:25).

성 경: [마27: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이것은 피 값이라 -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인한 것이다.
?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 돈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 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바나스'(*)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14;15:1-9;23:23).

성 경: [마27: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의논한 후 - 구체적인 토론을 한 것이기 보다 신속하게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을 암시한다(1절). 그들의 믿음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가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행1:18). 분명 그 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여도 그 돈의 원(原) 주인은 유다이었으므로, 사실상 슈다가 산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Roberton). 한편 이밭의 소재지는 점토지대인 예루살렘 남쪽, 곧 힌놈 골짜기 맞은편에 있다고 전해지며, '악한 회의의 언덕'( the Hill of Evil Counsel) 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더이상 토기 굽는 장소로서 효율 가치가 없어진 불모지(不毛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매우 싼 가격으로 쉽게 이곳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신속히 하게 된것은 아마도 벌써부터 '나그네의 묘지'에 대한 필요성올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일로 인해 즉 11:12, 13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란 이방인들이 아니라 타 지방에 사는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나그네의 묘지'란 그들이 명절 등의 일로 예루살렘에 입경했다가 죽는 경우 묻어 주는 묘지를 말한다. 한편 이곳은 한편 이곳은 현재에도 가난한 예루살렘 주민이나 치욕스런 자들의 뼈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성 경: [마27:8]
주제1: [매시아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오늘날까지 - 이 한정적 표현은 본서가 기록된 그 시점에 이르기 까지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 말은 본서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화되어 버린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미 기록되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자살 사건과 본서 기록 시점과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 피밭 - 마태복음에 의하면 '피밭'이라는 이름은 피값을 주고 그 땅을 산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피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다고 한다(행 1:18, 19). 그래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땅을 '아겔다마', 곧 '피의 땅'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즉 만약 유다가 제사장들이 산 밭에서 죽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마태복음과 사도행진의 이야기는 일치되는 것이다. 아마 제사장들은 반드시 바로 그 날은 아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아마 예수의 부활이 있을 일요일로 여겨짐<Carson>) 밭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또 극심한 후회로 절망에 잠겨 있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라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삼은 그 밭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나가서 즉시 자살했다면 그 시기는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사기 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다면 앞의 이야기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7:9,1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맡씀이 이루었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마태의 문구이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 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만큼 대부분이 슥 11:12, 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렘 32:6ff. 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 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여하튼 '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32:8-14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선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언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 foot;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 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 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하였다는 학설이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2:23;막 1:2, 3). 실로 마태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예수께서 사형(死刑)에 이르는 이모든 과정(은 30에 팔리우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이 사들여진 일 등)이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즉 스가랴서에 기술된 예언이 목적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목자되신 여호와께 삯은 삼십 은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것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예언이 예수의 팔리우는 사건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27:1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며 - 이 문구는 2절에 연결하여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태가 자기만의 독특한 기사인 유다의 사망 이야기를 2절과 11절 사이에 삽입시킴으로써 이같은 시간적 중단이 생겼다. 본문 이하부터 계속해서 '빌라도'라는 이름대신 '총독'이라는 직책명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15. 19, 21절)예수의 사형이 정치적 문제에 따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때 빌라도의 심문은 총독 관저(praetorium)에서 진행되었다.
? 유대인의 왕 - 당시 로마의 재판 과정은 먼저 집행관이 원고측의 고소 이유를 듣고 피고에게 몇 마디 질문을 한 뒤 피고의 자기 변론을 듣는 과정을 필요에 따라 몇번 거듭하다가 배심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판결을 내렸으며, 그렇게 확정된 판결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집행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고발 내용(아마 세금 문제에 관해 언급하신 것을 예수에게 불리하게 적용시키는 것과 함께 그가 열심당(theZealot)과 같이 반역을 꾀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죄목이었을 것이다. 눅 23:2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께 본문의 내용으로 질문하였던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점령군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의 범죄의 정치적 성격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여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의 관심은 '예수가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가했는가' 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편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2:2에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사용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역사적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의 명예에도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이라는 확신 아래 세워진 기독교 신앙의 서장(序章)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문제는 이미 본서 초두에서부터 부각되어 왔던 주제이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메시야가 곧 유익하고 정당한 우리의 주이신 것이다(N.A. Dahl, The CrucifiedMessiah, pp. 10-36)
? 네 말이 옳도다(*, 쉬 레게이스). -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로서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긍정적 답변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26:25, 64 등에서 이미 긍정하신바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세상의 구세주로서의 메시야 됨을 긍정한 것이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왕됨을 긍정한 것은 아니다. 물른 이때 빌라도는 과연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수께서 지니신 왕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8:34-37에 자세히 정의되어 있다.

성 경: [마27:1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고소를 당하되 - 마가복음에는 고소하는 이들이 대제사장들로만 국한되는더 반해 마태는 '장로들'을 첨가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가 '장로들'을 첨가한 것은 백성의 대표들이 예수를 고소한 일에 분명히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26:65,66 에서는 산헤드린이 사형 판결을 내린 이유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유대법에 의해서는 성립되지만 로마법에 의해서는 유죄 판결의 이유가 안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저들이 예수를 고소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고소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눅 23:2 에 의하면 고소 내용이 예상했던 대로 정치적인 죄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절 참조).
?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 이 시야가 예언한 바 있는 '고난받는 종'(사 53:7)의 침묵을 연상시켜 준다. 예수께서는 앞서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서도 침묵을 지키셨다(26:62, 63). 그리고 이후 요19:9에서도 마지막(세번째) 침묵을 지키셨다. 사실 저들의 고소 내용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신 진실 말고는 모두 거짓 고소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침묵으로써 저들의 허위에 찬 거짓 고소를 부정하실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마27:1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저희가 너를 쳐서...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 한 두마디의 거짓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고소 앞에서도 예수는 흔들리지 않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가 분명 무죄(無罪)함을 직감했고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반감을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께 자기 변호의 기회를 준 것이다.

성 경: [마27:1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신 동시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서 경이감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다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 그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성 경: [마27:1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명절을 당하면...죄수 하나를 - 명절에 죄수를 풀어 주는 전례가 역사적으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관습이 유대인을 무마하기 위한로마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다고 한다(Gro-tius) (2) 로마와 헬라에서는황제의 생일이나 명절에 죄수들을 석방했던 관습이 있었는데, 공적 축일(祝日)에 로마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석방한 것은 빌라도 이전 시대부터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Braune). (3) 유대인의 풍속에 관한 고대 문서(M, Pesahim)에는 '그들은 그들이 감옥에서 석방해 주고자 하는 자를 대신하여 유월절 앙을 죽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유대 지방에서 매년 유월절에 대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 앞의설명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복음서 연구가의 브랜스콤(B.H. Breanscomb)은 그 전례에 대해 '여기 설명된 것과 같은 그런 전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유월절 절기에 로마의 총독들이 정규적으로 죄수 한명을 석방했으며, 또 그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무리들이 개인을 지명했다는 관례는 전혀 아무런 확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로마 통치의 정신과 방법에 전혀 모순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로마 제국의 행정관은 아직 정죄되지 않은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이미 정죄된 죄인을 용서해 줄 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문의 풍속의 기원이 보호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유대 지역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Moule, Idiom Book, p 59).

성 경: [마27:1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의 바리바리 하는 유명한 죄수 - 하위 그룹에 속하는 헬라어 사본들(아도스사본. 8-9세기경)과 시리아역, 그리고 고대 교부들의 문헌들에서는 '바라바'를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에 '예수'라는 이름이 삭제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시 되면서 '예수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명칭이 생략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이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즉 마태는 17절에서 바라바라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문구로 '예수 바바라'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오늘날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형편이다. 한편 '바라바'(Barabbas)라는 말의 의미는 '바르 아바'(bar Abba) 곧 '아바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랍비의 아들'(Ewald), 또는 '마귀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적 그리스도를 뜻한다고도 한다(Theophylact). 이와는 반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련되고, 바로 그것에서 하나님 거룩한 섭리의 일면을 발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Olshausen).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 중에 어느 것을 단정적으로 주장하기란 사실 힘들다. 한편 본문의 '유명한'(*, 에피세모스)이란 '탁월한', '눈에 띄는'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특혀 '악명(惡名)높은'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실 바라바는 평범한 죄수는 아니었다(막 15:7;)눅 23:19;요 18:40). 즉 그는 단순한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적어도 사행에 처해질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아마 반란 음모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울 당시 유대 전역에도 게릴라에 의한 반란과 유혈사태가 빈번하였었다(Jos.Antiq. XVIII, 3-10,3-10,60-62;눅 13:1). 아마 바라바도 그러한 유혈 사태에 관련되었을 것이며, 거기에다가 반도덕적 악행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에게 있어서 그는 악명 높은 강도로서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영웅'적 행동을 한 자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성 경: [마27:1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가 물어 - 마가복음과는 달리 전례대로 해주기를 구하는 무리의 요구가 본문에는 빠져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막 15:9)고 묻고 있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요구하기를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사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종교적 열성이 강한 유대 백성이라면 적어도 선한 선생으로 이해되었던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무모한 살인의 책임을 회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맞은 양 이렇게 다급히 백성들에게 물었으며, 이 방법으로 산헤드린의 악한 계책(計策)을 깨뜨려 버리려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빌라도가 선택을 요구한 '저희'는 예수를 고소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특사로 사면될 죄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빌라도가 의견을 물었던 무리들이었다(막15:8).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군중들은 혁명 투사였던 '예수 바라바'의 이름을 외치면서(8, 9세경의 아도스 사본이 신빙성이 있다면 그의 사면을 요구하였을 것이고, 이때 빌라도는 이 외침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잘못 알아듣고(왜냐하면 빌라도는 내심으로 바라바보다는 예수를 석방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라고 군중들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Lane, Mark P. 554).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한편 본문의 '그리스도라 하는(불리우는) 예수'란 표현은 예수의 신적 존재를 무시하고 경시하여 부르는 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마27:1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이는 저가 ...앎이러라 - 여기서 '앎이러라'(*, 에데이)는 말은 제 2과거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충분히 납득한 상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즉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 결함이 있음과 그들의 불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가 스며 있음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는 21:15, 16;21:45 에서도 이미 보여진 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나 능력과 언행이 저들의 위선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저들의 종교, 사회상의 고유한 권위를 상당히 침범하였기 때 문에 그들의 마음에 생겨났을 것이다. 빌라도의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저의(底意)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실로 사람이 알지 못한 채 죄를 짓는다면 그 실수 한 가지만 책망 받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지었다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거스렸다는 사실까지도 아울러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잘못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마27:1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 요 19:13에서처럼 마태는 빌라도가 총독 관저 앞에 마련된 돌로 만든 단상, 곧 재판석에 앉았다고 기록한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알은 것은 유대인들의 선택(17절)을 귀담아 듣고 그에 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이 빌라도의 태도는 그의 제도적 권위와 그의 실제적 무능력 사이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 그 아내가..가로되 -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은 '프로클라 클라우디아'(Procula Claudia)였는데, 유대교에 귀의했을뿐 아니라(외경 니고데모 복음서 2장), 그리이스와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그녀를 심지어 성자(聖者)의한 사람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여하튼 A.D. 21년에 로마상원 의회에는 어떤 지방 행정관도 그의 아내를 부임지까지 동반할 수 없다는 법이 제안되었었다(Tarcitus, Annals III.33-35). 그러나 그 제안은 아직 입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의 부인이 그와 함께 총독 관저에 머물러 있었던것 같다.
? 저 옳은 사람(*, 토 디카이오 에케이노) - 여기서 '옳다'는 말은 '전혀 무흠하다'(innocent)라는 뜻으로 결국 이 말은 거룩한 예언자나 메시야에게만 국한되어 표현되는 유대인의 관용어이다. 따라서 그 아내는 예수의 절대 무죄성과 함께 예수의 신적 속성을 어느정도 이해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꿈에서 얻어낸 신령한 지식이었다.
? 꿈에...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 그녀는 초자연적인 한 꿈 때문에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로도 상당히 고통당했다고 실토했다. 한편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상기시킨다(1, 2장). 사실 꿈에 대한 강조는 마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마태에게 있어서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다(1:20;2:12,13,19,22) 어쨌든 그녀의 꿈이 신적 계시로 이해되든 아니면 단순한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염려한 심리적 갈등에 의한 마음의 표상이었든지간에 마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돌이킬 수없는 책임과 예수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데 있다.

성 경: [마27:2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대제사장과 장로들이...권하여 - 산헤드린은 빌라도가 확신에 찬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서 때마침 찾아온 아내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성들을 충동하는데 성공한다. 특별히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일치된 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에 관사 (*, 호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들 각자가 군중들 틈에서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사주(使嗾)를 매우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음을 간접 시사한다.
? 예수를 멸하자. -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로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그들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다.

성 경: [마27:2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둘 중에 누구를 - 마가복음과는 달리 본서에서는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다시 한번 결정을 묻는다. 그러나 백성의 대답은 단호히 산헤드린의 결정을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이때 내심으로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는 빌라도는 가능한한 분위기를 예수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성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인것은 이해할만하다. 즉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의 문제 앞에 그들은 로마 총독의 의도보다는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의도를 찬성했을 것이다. 식민지의 억압받는 상황에서 점령군 사령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밉지만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이(Jos., Antiq. ,XVIII269-272). 더구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면서 선동(煽動)했다면 순진한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예수의 사형을 지지했을 것이다. 훗날 베드로는 이같은 군중 심리에 의한 어리석고도 불의한 결정에 대해 통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행 3:14,15).

성 경: [마27:2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그러면...내가 어떻게 하랴 - 빌라도는 비록 유대 백성들이 산헤드린의 충동질에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또 한번 예수의 석방도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런 질문올 덧붙인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는 예수에게 십자가형이 아닌 좀더 가벼운 형벌이 요구되기를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태도는 매우 무책임하고 결단성이 없는 것으로 재판의 판결에 있어서 고유한 판결권을 가진 그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양심적 소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판결권을 백성들에게 이양하고 있다.
? 십자가에 못박혀야 - 이 외침의 주동자는 물론 산헤드린 공회원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무리'들은 적극적 동조자로서 예수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사실 그들 중에 최소한 몇몇은 바로 며칠 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찬미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21:9). 한편 이 십자가 처형 요구는 곧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단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32-4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가장 불명예스러운 난동으로 처형할 것, 곧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형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실로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무감각과 자기 파괴적 열광으로 그들 자신의 메시야를로마의 십자가로 제거(除去)한 것이다.

성 경: [마27:2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누가복음에는 '무슨 악한 일을 했는가 ? 나는그 죽일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라'(눅 23:14-16)고 기록되어 있어, 가능하면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하지 않으려는 빌라도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1-16 에서도 예수를 용서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이 잘 묘사되고 있다. 요컨대 빌라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그가 상식과 선의를 갖추고 있는 행정관이기는하지만 정의에 서서 소신껏 행동치 않는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소신없는 태도는 오히려 군중들의 주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즉 자신들의 주장에 결국 빌라도가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군중들은 흥분과 열광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사5:7).

성 경: [마27:2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아무 효험도 없이 - 이는 빌라도의 완전한 굴복을 뜻한다.
?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나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타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지금 군중들이 마치 폭도로 변할 듯한 장면을 확연히 관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더이상 지체할수 없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란'은 로마의 지방 행정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로서 이 일이 로마 정부에 전달되면 자기 신상에 크나큰 해가 되었다. 따라서 어떠한 생을 치러서라도 민란을 사전에 예방해야만 했다.
? 물을 가져다가...손을 씻으며 - 이 문구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다. 한편 신명기 21:6,7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살해되었을 때 그 부근에 있는 성(城)의 장로들은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은 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했다. 그리고 시편 26:6과 73:13은 이 법이 거의 금언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처럼 무죄의 표시로 손을 씻는 행위는 철저히 유대적인 것으로서, 몇해 동안 유대를 통괄하던 빌라도에게는 익숙한 풍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유대 풍습을 따름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유대인들을 은연 중에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손을 씻고 난 후, 손바닥을 마주침으로써 자신의 결백과 무흠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빌라도는 행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자기가 최총 결정권자였음에도 뷸구하고 이 간단한 상징 행위를 통해 자기 무죄를 선언하는 대신 모인 무리들에게 그 죄책을 전가(imputation)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온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역사는 오늘도 그의 죄책을 묻고 있다(사도신경 中).
? 이 사람의 죄에 대혀여 - 사본(시내, 레기우스 등)에 따라 본문을 '이의인(*, 디카이온)의 피에 대하여'로 읽기도 했다. 적어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는 분명 자기 아내가 전해 준 말(9절)을 신중히 기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의 비겁한 행동은 공의의 관점에서 더욱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했다.
?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빌라도는 의식적(손씻음)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 사법적으로도 자기의 죄책을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양심의 법,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영영히 그 허물을 단죄받을 것이다.

성 경: [마27:2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백성이 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 이같은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용적 어구로서(출 20:5;삼하 1:16;3:28; 행18:6),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심지어 자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백성'을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려면 '모든 백성'(*, 파스 호 라오스)이라고 번역함이 옳다.'모든 백성'이 법적 양식에 따라서 예수의 회가 부당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자기의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완고한 태도가 들어있다. 한편 마태는 15:32; 17:14 등에 사용했던 '무리들'(*, 라오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백성'(*, 라오스)이라고 함으로써 단순한 군중이 아닌 하나님의 친 백성이 그런 말을 했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한편 무죄한 메시야의 죄를 흘리게 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한 저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의 끔찍한 최후를 겪어야 했으며, 이후에 끝없는 유랑 생활, 그리고 2차 셰계 대전을 전후한 20세기에는 유대인 600만명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참극(慘劇)을 당해야 했다.

성 경: [마27:2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바라바는...놓아주고 - 빌라도는 군중들의 위압적 호소에 굴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었다. 본문은 특히 이 인물의 운명의 극명한 대조가 부각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본래적인 초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고난받고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 채찍질하고 십자가에...넘겨 주니라 - 예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율법에 있어서 매질은 40대로 제한되어 있으나(신 25:3; 고후 11:24) 로마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힘이 있는대로 때리고 싶을 때까지 때렸다. 특히 매질에 사용되던 채찍은 유대인들처럼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갈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뼈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손잡이가 짧은 형태의 것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후 기둥에 꽁꽁 묶여졌다. 매질이 얼마나 심하였든지 그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죄인의 몸에서는 회가 분수같이 뿜어 나도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내장(內藏)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한다(Josep-hus, war II 612; VI,304) 심지어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매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앞서 힘을 빼는 데 사용되곤 하였다. 예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뼈질을 당하셨다(눅 23:16,22;요 19:1-5). 따라서 판결이 내려진 뒤에는 반복되지 않았다. 만일 매질이 반복되었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여하튼 빌라도는 몇 마디 더 심문한 뒤에(요 19:1-16)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념겨 주었다(16절)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사 53:6,12).

성 경: [마27:2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총독의 군병들이 - 빌라도는 자기 수하에 있는 로마 출신 군사들에게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할 것올 명령하였다. 따라서 '총독의 군병들'은 이후부터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모멸적언 조롱을 하게 된다(막15:16-20;요 19:2,3). 이는 이사야 예언의 온전한 성취였다(사 53:3).
? 관정 - 헬라어로 '프라이토리온'(*)으로 불리워지며 라틴어 '프레토리옴'(Preatorium)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본래 장군의 본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총독의 공식 거주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 총독의 본거지는 가이사랴였지만 파종 명절의 치안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할 때는 특별 거주지가 마련되었었다. 예수 당시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예루살렘 특별 거주지를 안토니아 요새에 정하고 있었고, 로마 군대를 그곳에 함께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공동번역 성서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총독 관저'로 번역하고 었다.
? 온 군대 -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로 '스페이라'(*)인데 26:53.54에 언급된 '영'(*, 레기온)을 10등분한 한 부대이며, 천부장의 지휘 아래있는 3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부대이다. 이 '군대'가 소집된 것은 무죄한 죄수이신예수를 놀이삼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주위에 모여 예수의 왕권을 마음껏 놀리고 조롱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책임자 빌라도의 묵허(黙許)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빌라도의 죄책은 더욱 가중된다 하겠다.

성 경: [마27:2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홍포를 입히며 - 사실 예수께서는 26절에서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옷을 벗기웠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계속 옷올 벗기는 데 이곳까지 끌려와 희롱당하셨는지, 아니면 채찍 후 그 입던 옷을 다시 입으신 후 여기서 다시 옷을 벗어왔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예수는 걸레처럼 찢기어진 당신의 어깨 위에 '홍포'를 걸치게 된것이다. 여기 '홍포'(*, 클라뮈스)는 아마도 로마의 군인들이나 시장관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또였을 것이다(28절). 그런데 이 홍포의 색상에 대해 '진흥색'이라 한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자색 옷'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색'으로 된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Macc 10:20, 62;11:58;14:43,44) 군인들은 옷을 착용했다는 점에서 예수가 입은 '홍포'는 군병들의 망또였던 것으로 추적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군병들이 예수께 입힌 옷은 헤롯왕의 옷장에서 버려졌던 븜은 왕의 의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Elsner). 어찌되었든 여기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께 왕을 상징(象徵)하는 옷으로 갈아 입힌 후 그분을 조롱하려 했다는 점이다.

성 경: [마27:2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당시 면류관을 엮어 - 당시 사용되던 동전에 보면 디베우스가이사(TiberiusCaesar)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새겨져 있는데, 그 면류관 위에는 빛나는 못들이 달려 있었다. 군인들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의 머리 위에 씌웠다. 이 가시나무에 관해서는 야자나무나 아칸더스(acanthus)나무, 또는 아랍의 나바(naba)나 나브카(nabka)심지어 선인장 종류나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여하튼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쉽게 자라는 팔레스틴에서 흔한 종류의 것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그들이 가시관을 씌운 원래 목적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고난의 왕관을 혜수께 씌웠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시에 의해 찢어진 예수의 머리에는 검붉은 핏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렸음에 분명하다.
? 갈대를 그 오른손에 - 동전에 새겨긴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홀(笏)이 쥐어져 있는데, 로마 군병들은 이것을 모방하여 예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다. 이 '갈대'는 등나무 종류의 평범한 풀이나 줄기가 꿋꼿한 갈대였음이 분명하다.
? 무릎을 꿇고 - 마가복음에서는 '예배하다'를 뜻하는 '푸로스퀴네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마태는그 단어 대신 단순히 '무릎 꿇다'는 뜻인 '고뉘페테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의미상동일하게 언급됨이 마땅하다. 즉 군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군주인 '가이사'에게 경배하듯 예수를 경배하며 심히 우롱했던 것이다.
?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이는 '가이사 만세'라는 로마인들의 황제에 대한 찬사의 외침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이를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하찮은 로마군병들에게 치욕스러운 조롱을 당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저들의 조롱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시사해 주고 있다. 군인들은 조롱의 차원에서 예수께 황제에게 대한 모든 예를 갖춤으로써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께 경배하리라'는 시 22:27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군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진리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면류관을 쓰시고, 흘을 들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동시에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진리의 선포인 것이다.

성 경: [마27:3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침 뱉고...머리를 치더라 - 로마 군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로 입맞추는 대신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서 그에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왕을 위하여 목숨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결과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는 더 깊이 그분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어갔을 것이며 얼굴은 더욱 검붉게 물들어 갔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치더라'는 말은 어쩌면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접(待接)이었는지 모른다. 한편 마태는 조롱과 육체적 학대를 구별하여 먼저 조롱한후에 학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마27:3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희롱을 다한 후 -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 완료의 시제를 의미하는 부정과거형로 씌어졌다. 따라서 마태는 그 어간에 되어진 세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생략했음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그 회롱과 학대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 군병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마음껏 푼 정도로 예수는 육체적으로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요한의 중언(요19:4-6)에 따르면 이때 빌라도는 다시 한번 예수의 석방을 해 노력한 흔적이 발견된다.
? 그는 옷을 입혀 - 대개 옷을 벗기은 채로 형장을 향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비웃음과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너무 많은 매질올 이미 당했기 때문에 더 매질을 당하게 되면 아예 죽게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신경을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삼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예수께서 다시 입으신 '옷'(*, 히마티온)은 주로 겉옷을 뜻하지만 군병들이 제비뽑은 사건에(시 22:18;요 19:23) 비춰볼 때 분명 속옷까지 포함한 표현일 것이다.
? 십자기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리라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대 시간으로 '제 3시', 곧 오늘날의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본문은 아직 오전 9시가 되기전의 일이라 본다. 여하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서부터 로마 당국의 사형 언도에이르기까지 예수에 대한 판결은 밤새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기야 아침에 르러 십자가형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대인의 습관을 좆아 그 사형 집행은 성문밖에서 이뤄졌는데(민 15:35, 36;행 7:58; 히 13:11, 12), 이때 예수는 관례를 따라 자신이질 십자가를 친히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 형장으로의 이동은 원래 죄수처형을 전담했던 부총독이 맡아야 했으나 그 부총독(Li-ctor)이 빌라도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말탄 백부장이 형장 이동을 진두 지휘(陳頭指揮)하였으며, 네 명의 군병들이(요 19:17,23) 예수의 신변 호위를 했고 그 뒤에 군병들이 따라 나섰다고 전한다(Lange, The pulpit Commen-tary).

성 경: [마27:3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나가다가 -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15:20, 21) '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왕상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요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히 13:13).
?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것 같다(행 11:22;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때에 (막15:21;롬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 '억지로'(*, 엥가류산) -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증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측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 '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서 본문상'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원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마27:3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골고다 즉 해골의 곳 - '골고다'라는 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의 '길갈타' 또는 '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Jerome, Hieronymus)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Bengel, Cyril, De Wetty)도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Calvary)는 고든(Gordon)이라는 한 장군에 의해 명명되었으나 아람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보리'라는말은 원뜻과 조화되는데 그 이유는 '갈보리'가 '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않다. 아무튼 가장 가능성 있게 생각되는 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 '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29절),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절)에 위치한 오늘날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 외에도 모든 장군이 주장하는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 경: [마27:3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에 달리심]
? 쓸개 탄 포도주 - 이는 시편 69:21을 반영하고 있으며 48절에서 비슷한 구절이 다시 반복된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물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차이는 아람어의 '물약'(morah)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담'(marrah)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이 중언하는 '쓸개 탄 포도주'란 말이 구약 시편에 더 가깝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 콜레)란 진짜 '쓸개'나 '담즙'을 뜻하기 보다 쓴 맛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carson, Lenski). 그리고 '포도주'는 매우 센 독주(毒酒)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취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1)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인 동시에 (2) 술로 인해 거의 마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독한 포도주를 최후의 순간에 이른 자에게 제공된 것은 잠 31:6, 7의 교횬에 근거한 관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더불어 이때 예수께 드려지는 포도주는 예루살렘의 어느 부유한 여인의 자발적인 헌납에 의해 자비의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Li-ghtfoot).
?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우크 에델랜)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사(固辭)하셨음을 보여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지닌채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가 제공하는 아주 세미한 고통조차도 친히 감수하시며 인성(人性)으로서 당하셔야 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잔'을(20:22;요18:11)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셨다. 한편으로는 이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27:3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에 달리심]
? 예수를 십자기에 못박은 후에 -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었던 형벌이다(Jos.,Judoll,1).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1) 먼저 공식적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한다. (2) 형장으로 행하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행인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게 한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긴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세워둔 십자가 위에 죄수를 끌어 올려 못박는 경우도 있음). (5) 그런 상태로 계속 버려두어 죄수로 하여금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이때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야 숨이 끊긴다). 이때 각종 야수(野獸)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뜯어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6) 어느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인 외상(外傷)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물론 이때 외관상 죽은 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한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거나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박혀 달리신 예이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 그들이 유대인들의 규정(M. Sanhedrin 6:3)에 따라 허리 아랫 부분을 가리는 옷을 예수에게 걸쳐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Crux decussata) 또는 T자형(Cruxcommi-ssa), + 자형(Crux immissa)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형임이 분명하다(37절). 죄인이 십자가에 달리는 높이는 몇 십 센티에서 단 몇 센티까지 다앙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달리셨던 것 같다(48절:요19:29).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 21:22,23) '나무 위에 달린 저주받은 자'(갈3:13)로서 최후의 순간을 맞으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참혹의 현장을 단순히 한 분사 구문('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으로 취급하고 오히려 뒤이어지는 군병들의 제비뽑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은 그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어도 그 당시 사람이면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기자(記者)가 더이상 떨리는 붓끝으로 예수의 참혹한 절규를 추적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뿐이다.
?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뽑았을 것이며, 이것은 요 19:23, 24에 기록되 있는 바처럼 시22: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 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함으로써 (막 15:25) 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성 경: [마27:3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거기 앉아 지키더라 - 마가복음 평행구인 막 15:25의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를 생략하고 마태는 그 자리에 이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저들이 지키는 까닭은 못 박힌 자의 고통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누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이다.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하다.

성 경: [행27:3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 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 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막 15:26; 눈 23:38; 요 19:19 조). 그중 요한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 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뻬앗고, 옷을 벗기운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성 경: [마27:3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 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막 15:26; 눅 23:38; 요 19:19). 그 중요한 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뻬앗고, 옷을 벗기은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성 경: [마27:3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 십자가형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분명히 목격할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역설적으로나마 '십자 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시편 22:7에 언급된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쪽거리고 머리를 혼들며 빈정댑니다'(공동 번역)의 반영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사형언도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주민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혼드는' 것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었다(시 109:25; 애 22:15). 여하튼 유대인들은 다시 산헤드린 재판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26:67,68) 사악한 장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잔인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더욱이 그들은 예수를 모욕하여(*, 에불라스페문). - 즉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여'(blasphemabant. Vulgate) 돌이킬 수 없는 참람한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9:3;12:31;26:65).

성 경: [마27:4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그것을 지으려 했던 자여'가 된다. 이는 조 26:61에서 이미 비난한 바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 당시 비난하는 무리들은 적어도 산헤드린에 동조했던 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예수의이 말씀은 성전을 문자 그대로 헐고 다시 3일만에 복원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2:19-22).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는 이미 가야바의 질문(26:63) 중에 물어진 것인 동시에 시험자 사단의 질문이기도(4:3, 6)했다. 이처럼 지나가는 행인을 통하여 사단은 여전히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고통을 회피(回避)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Lohmeyer;16:21-23). 실로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쉽게 접근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미혹하려드는 것이 사단의 속성이다(벧전 5:8).
?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릇된 메시야관에 짙게 물들어 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요구였다. 즉 그들은 적어도 메시야라면 각종 이적과 영웅적 활동을 전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26:5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자기 희생을 통한 만인 구원에의 길을 지금 가고자 하신 것이다(16:23).

성 경: [마27:4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처음에는 로마 군인들이(37절), 그 다음에는 군중들이(39, 40절), 그리고 이제는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나선다. 이로 보건대 산헤드린은 이제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라는 그들의 요구는 40절에 나온 행인들의 사단적 요구와 일치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믿기 위해 이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대변자로서 예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의혹과 또 그런 자를 처형시킨 승리감에 도취되어 또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같은 자신에 찬 요구를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는 저들의 비난은 결코 조롱받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이방인에 의해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불려진데 대한 유대인들의 대구적(對句的) 비난이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 속에 언약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비난은 자신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격이 되었다.
? 우리가 믿겠노라 - 물론 거짓과 악의에 찬 약속이다.

성 경: [마27:4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 39절에 인용했던 시편 22:7에 이어 본절에서는 그 다음절인 시편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를 그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치 못한 채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기뻐하시면'(*, 델로)이란 말은 70역(LXX)에 따른 번역으로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세세한 데까지 돌보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하튼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때 그것이 그가 메시야로써 동시에 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모든 일을 성사시켜주실 것인데 그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가 단지 자신을 메시야로 가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단정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시련, 곧 하나님의 버리심과 마음이 젖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써 예수가 메시야되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현존(現存)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7:4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함께...못박힌 강도들도...욕하더라 - 주위를 둘러싼 모든 군중들이 적어도 한 마디씩은 예수를 비난한 것을 보고 있던 강도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에 그들마저도 예수를 희롱하게 되었을 것이다(Robertson). 이러한 가능성은 '욕하더라'(*, 오네이디존)는 말이 미완료 시상으로서 뒤늦게나마 이제 막 그 일을 시작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왜 보고에 의하면 이렇게 비난했던 두 강도중 하나가('데스마이', 38절) 잠시후 예수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거룩하심과 또한 끝까지 인내하심에 강한 감동(感動)을 받아 멸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받게 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눅 23:39-43).

성 경: [마27:4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제 육 시로부터...제 구 시까지 - 본문의 '제 6시', '제 9시'는 유대인의 시간 단위로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제 6시'는 오늘날의 정오(낮 12시)를, '제 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오전 9시경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막 15:25) 오후 3기경까지 근 6시간여 동안 찢어지는 듯한 육쳬적 고통과 더불어 어둠보다 더 짙은 영적, 정신적 고뇌(46절)를 맛보시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계셨다.
?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제 6시에서 제 9시까지 약 3시간 동안의 '어두움'은 마치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출 10:21-23). 따라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리는 표적이었음이 분명하다(암 8:9, 10). 한편 이때의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 '온 땅'이란 의미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D.A.Carson) '온 땅에'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 파산 텐 겐'(*)이 온 지구(the earth)전체를 뜻하기보다, 국한된 지역으로서의 모든 '땅'(the land)을 의미한다고 보아 '유대 지경 전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 땅에 임한 어두움은 예수의 죽음과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과 연관을 지닌 출 10:22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다', 결국 이 기록은 본문의 '온 땅'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이때의 어두움에 대하여 사막의 열풍에 의한 천기 조건의 이상으로 발생한 우연 발생적이고도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단지 '일식' 현상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날은 음력 보름이 다 된 시간이었으므로 천문학적 상식로 월식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일식(日蝕)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법칙상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찬송가의 시구처럼 영혼의 신령한 태양되시는 예수께서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 세계의 태양이 밝은 빛을 잃어서(눅 23:44) 캄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들도 도출해낼 수 있다.(1)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26:24; 사5:30). (2)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임. (3) 전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응(롬 8:22) 등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7:4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블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듯, 예수께서는 더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번째 말씀에 해당하며(요 19:28-30강해 '가상 칠언' 참조),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리'(*)를 그대로 음역하여 '엘리(*)'엘레이(*)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이것을 '나의 하나님'(*, 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로 표기하고 있다(막 15:34). 그 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를 '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으로(*, 헤 뒤스나미무; 이는 히브리어 ,'헬리'의 뜻임) 번역하여('나의 능력이며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틔 당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쏨하셨기 때문에 '엘'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엘리야'를 부르는 듯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가 '헬리'로 잘못 들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1)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빌 2:6-8),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증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서 영, 육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이상 그를, 철저히 포기하고 그에게 무간섭하셔야 했다는 점, (5) 하나님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랑(요 3:16)등이다.
? 나의 하나님(*, 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있다(Lenski).
? 어찌하여(*, 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과 된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이다. 이는 분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결함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의 직임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잔'(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같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를 자신의 온 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요 19:26) (4)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요 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성 경: [마27:4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으나(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Theophy - 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면 '엘리'의 정확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 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왕하 2:9-12)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서 '엘리엘리...'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옐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역은 이를 '*,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야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리...'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 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아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성 경: [마27:4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요 19:28)는 맡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시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69:21)을 다시 한번(34절)더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 생물의 뼈대 같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 와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 경: [마27:4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그 남은 사람들이...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혼자 내버려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 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막 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있다 (요 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엘리야가 와서...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 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하며 이같은 조롱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 본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 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껴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성 경: [마27:5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7번째 말씀(눅 23:46;요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눙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요 10:17, 18).
? 영혼이 떠나시다(*, 페켄 토 프뉴마). -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뜻하는 '프뉴마'(*)의 떠남으로 표기한 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 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성 경: [마27:5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성소 휘장이...찢어진 둘이 되고 - 성소에는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와 성소(the Holy Place)를 나누는 휘장과, 성소와 안뜰(the court)을 나누는 휘장이 각각 있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이 단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둘 모두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바깥 휘장이 찢어져 나간 것은 어쩌면 성전의 임박한 멸망을 암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안쪽 휘장이 찢어진 사실이다. 이 안쪽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1년에 단 1회만 열렸다(히 9:7). 혹자에 따르면 이 휘장은 높이 55규빗(1규빗=약 45.6cm), 너비 16규빗 크기의 문에 드리워졌었는데, 그것은 바벧론 제(製)로서 고급 린넨(linen)의 직물에 갖가지 색을 입혔으며, 또한 그 위에 아름답게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았다고 한다.(Josephus, Wars V 5.4). 실로 이같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일임)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를 의미하는 지성소를 드리우고 있던 휘장은 분명 하나님과 인간의 죄로 인한 단절과 불완전한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짐은 (1)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 20).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 혈통적 선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옛 언약의 신비가 벗겨지는 동시에 구속의 온전반 성취를 이루게 되었음을 상징한다(5;17-20;히 6:19;9:6). 이와 함께 (3) 유대교와 유대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전의 멸망을 상징한다. 물론 이 멸망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패망을 의미한다기 보다 차라리 '믿음이 온 후'에는 '믿음이 오기 전'의 모든 것이 멸망케 된다는 신학적 의미에서의 멸망이다.
? 땅이 진동하여 비위가 터지고 - 이것은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성전 휘장이 찢어짐과 동시에 땅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진정 백부장의 탄성(54절)과 함깨 이 모든 사건은 예수의 죽음직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D.Wenham, 'Resurrection' pp. 42-46). 아마도 마태는 지진 그 자체를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왕상 19:11;사 29:6; 렘 10:10;겔:18). 좀더 발전적으로, 이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은 당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인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시 18:7;사5:25; 욜 2:10)를 뜻한다. 즉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에게는 새 언약과 새 창조의 하나님으로서의 임재를, 끝까지 불선하는 자에계는 진노와 영원한 심판의 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한다. 한편 성전이 서있는 지반은 지질학상으로 결함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 그곳에 모슬렘 사원이서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번 지진에 의해 손상을 입어 왔다고 한다(D.Baly, The Geography of the Bible. p 25;Cyril.Cateches. Cateches. 13권 33).

성 경: [마27:5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무덤들이 열리며 - 이 구절 역시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앞부분에서의 지진의 결과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팔레스틴의 무덤들이 대개 천연 동굴이나 아니면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조동굴에 시체를 안치(安置)하고 그 출구에 큰돌을 굴려놓아 봉함으로써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게 한 사실에 비춰 생각할 수 있다.
?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 마태복음에만 기륵되어 있는 본문은 수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적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실로 이 사건은 메시야가 오실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9:25;22:23)이 현실화한 것인 동시에 예수 재림 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이 사건은 53절 증언하는 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강조하고자 했던 마태의 저작 의도에 따라 이곳에 옮겨져 기록된것 같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 사건 이전에도 몇번의 기사가 소개되었는데(왕상 17장: 왕하 4:32-35; 마9장 눅 7장; 요 11장) 이 모두는 한결같이 자연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이었다. 본 부활 사건을 두고 학자들 중에는 썩지도 아니하고다시 죽지도 아니한 영체(spiritual body)를 입고 부활한 사건(고전 15:53)으로 보기도 하며, 앞서의 부활 사건과 같이 단지 육체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소생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활이 다시 땅위에 살게 하려는 것이기 보다는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을 중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영화(榮華)의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죽었던 자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 부활 후 무덤에서 나온 것은 (1)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승리가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는 생명력 넘치는 영향력을 상징한다(고전 15:55-57). (2) 예수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생생히 중거한다(고전 15:23). (3)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상징한다(엡 4:8,9). 한편 본문의 '성도들'(*, 하기오이)은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 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함)이라고 보기도 한다(벧후 3:4).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서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사 4:3; 단 7:18; Tobit 8:15;1 Enoch 38:4, 5)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성도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생존시 메시야를 대망하던 자들로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 소망하는 바가 성취된 자들이라 보는 것이 좋을 둣하다. 만일 부활한 성도가 이러한 사람들이라면 예수 이전에 살던 사람들 역시 예수 이후의 사람들과 같이 예수의 승리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부활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27:5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 여기서 '부활'(*, 에게르신)이란 말은 특수 동사로서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을 부활시켰음'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능동태로 취급하여 '예수 자신이 부활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볼 때(고전 15:23)'예수의 부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影響力)에 의거해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성도의 부활장면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이 사실을 이곳에 앞당겨 왔던 것이다. 한편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4:5)에 들어가 행하였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 현상 중인이 되었다는 점이다(겔 37:12). 그리고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폭발적으로 이방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전까지 여전히 성도(Holy City) 예루살렘은 복음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행 1:8).

성 경: [마27:5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의 증인들]
?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문의 신앙고백을 백부장 혼자하는데(막15:53) 반해 본서에서는 백부장 외에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같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마가복옴에서는 백부장이 예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하는데, 본서에서는 '지진과 그 되는 일', 즉 흑암과 지진과 예수의 부르짖음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고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의 처형이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고 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이 가담한 그 범죄에 대한 하늘의 진노였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두려움'(*, 에포베데산)은 단순한 공포심 이상의 것으로 아마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면에서 혼히 발견되는 일종의 종교적 두려움 같은 것임에 분명하다(사 6:5). 한 전설에 따르면 이러한 경건한 두려움에 휩싸였던 본문의 '백부장'은 '론지누스'(Longinus)이며 (외경 베드로 복음서에는 '페트로니우스'<Petronius> 예수의 죽으심을 친히 목격했던 그 십자가 아래서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누구에 의하면 백부장을 위시한 군병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아마 누가에 의한 고백은 예수를 죄인으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판결이 정녕 잘못된 것으로서 예수는 무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記述)된것 같다. 어쨌든 그 당시 백부장과 군병들은 죽어가신 예수에 대해 그분은 과연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백한것이 분명하다. 실로 그들의 고백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그것은 약속의 메시야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가장 분명히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혹자는 '아들'(*, 휘오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는 점을들어 단순한 영웅적 인물 정도로 고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 호칭은 메시야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고백한 '진실로'(*, 알레도스)라는 강조적 표현에서 더욱 확신 할 수 있다. 분명 이 부사는 유대인들이 조롱한 내용(3:5-13;15:21-28;27:39-44)과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의 입술에서 이같은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이방 선교의 신호탄인 동시에, 십자가의 효능이 즉시 발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27:5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예수를 섬기며...좇아온 많은 여자 - 마태는 또 한 부류의 십자가의 산 중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인습으로 볼때 천한 신분에 속했던 몇몇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무덤을 맨 처음 찾아간 여인도 있었다. 특히 마태가 그 여인들의 이름과 행적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낮고 췬한 자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고전 1:27-31). 한편,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온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들과 예수의 쓸 것을 돕고 또 천국복음을 듣기 위해 예수를 따라다니곤 했다(눅 8:2, 3). 실로 예수께 대한 그들의 헌신적 노력과 사랑은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것이였다. 진정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이다(요일 4:18). 예수가 체포되자 죽기까지 예수를 쫓겠다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달아났고(26:57), 특히 가장 열심있는 자로 자처(自處)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否認)하고 말았다(26:69-75). 그런 와중에 갈릴리 전도 사역 때부터 예수의 쓸 것을 돕기 위해 예수를 따라 다니던(눅8:2, 3) 여인들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旅程)에 동참했으며. 또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음을 극복하고 처절한 예수의 최후를 타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실로 그 여인들은 예수께 대한 숨은 봉사자들이었으며 예수의 생(生)과 사(死)의 조용한 증인들이었다.
? 멀리서 바라보고 -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십자가 현장 주변에 접근하기가 용이(容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마27:5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의 증인들]
예수의 최후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로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천한 신분으로 간주함)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 광경이라 볼 수있다(고전 1:29-31). 한편 이 네 여인들의 프로필(profile)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성 경: [마27:5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저물었을 때 -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신 21:22, 23에 명한 바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屍身)은 밤새도록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바로 다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 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아 놓는 것이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容認)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 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역(大逆)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 아리마대 부자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리 - 여기서 '아리마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대개 '리다'(Lydda)나 '라마다임'(Ramathaim;삼상 1:1)으로 간주한다. 한편 마가(막 15:43)와 누가(눅 23:50,51)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要職)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그가 '의로은 사람'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마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식적(義識的)으로 밝힌다. 사마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9-12의 예언을 상기(想起)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 추종자라 한다(13:52;28:19). 비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隱密)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성 경: [마27:5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요 19:38) 요셉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그 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문의 '가서'(*, 프로설돈)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貫澈)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요 18:28).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儀式的)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진정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느 것보다 예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둔다.
? 예수의 시체를 달라 -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용감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한다(막 15:43). 실로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요셉이 이같은 간청을 한 때는 아마 요 19:311에서 보듯이 일단의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접견(接見)하고 난 직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形場)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막 15:44, 45)시체를 내어주었다.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절 참조).

성 경: [마27:5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아 뉘운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어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일, 씻는 일, 몰약을 썩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요셉 혼자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다.
? 정한 세마포로 싸서 - 여기 '정한 세마포'란 질 좋고 깨끗한 아마(linen)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정한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요한복음에 의하면 일찍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한다(요 19:39).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 경: [마27:6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 59절의 '정한'이라는 단어와 '자기의 새 무덤', 그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安置)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행 2:27). 실로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처였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The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된다(Parrot). 그곳은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깎은 무덤들을 쉽게 만수 있는 장소이다. 요셉은 모든 것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진정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形言)할 수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실로 이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이다.

성 경: [마27:6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킨다(56절 주석 참조). 실로 이 두 여인들은 예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듸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을 길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하여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藏事)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진정 예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M.Roshha-Shanah, 1:8)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매장 장소에 두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두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3:1; 히 10:28). 이 증거와 기록은 모든 가현설(Docetism)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성 경: [마27:6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예비일 다음 날 - 이 날은 안식일을 뜻한다. 그런데 왜 그냥 안식일이라 하지않고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1) 마태가 안식일이라는 말 대신에 '예비일 다음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25:57 에서 생략한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이다(Bonnard, Hill, 막 15:42 참조). (마태가 '예비일 다음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안식일(the last day of week)과 유월절 기간 중의 안식일(a feast-Sabbath)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안식일이 유월절 중의 안식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썼다(D.a.Carson)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예비일'을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스큐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안식일 가리켜 '파라큐에' 의 다음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나 세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 서로 반목(反目)과 질시의 대상인 양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는데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 18:28에 의하면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에는 궁전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않는다. 아마 그때는 그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의 눈을 피하며 하나둘씩 빌라도의 관정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의 부활 문제를 대두시킨 것은 부활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22:23) 사두개인 출신들인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부활 교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마27:6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하되 - 여기서 '주여'(*, 퀴리에)란 총독에 대한 정중한 어법에 불과하다. 한편 '저 유혹하던 자'이란 유대 군중들이 고대했던 바, 예수가 해방자요 정치적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제(前提)로 한 말로서 진정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기 때문에 '유혹하는 자'(deceiver)로 농락당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초대교회 당시에까지 지속되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던 사람'이라고 악선전(惡宣傳)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께서 사사로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고난과 부활 대한 예고(12:40;16:21;17:23:30:19)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그들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제자들은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버렸는 데 반해 적대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완전히 와해(瓦解)시켜 놓고도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공포 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가 기억하노니(*, 엠네스데멘). - 이 말은 기동적(起動的)부정과거 직설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뜻은 '지금 막 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의미이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즐기다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체가 장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혹시 부활을 조직하여 거짓을 유포(流布)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돌연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을(12:40)것이다.

성 경: [마27:6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그러므로 분부하여 - 당시 유대인은 로마 제국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 보존을 간청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을 인정받은 성전 수비대가 따로 있었지만 그 활동 범위는 성전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이다.
?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 여기서 '사흘까지'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평소에 자주 예언하시기를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16:21;17:23;20:19)고 하셨으니 만일 사흘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한갖 사기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動員)하여 예수 부활을 저지(沮止)함으로써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인간적 장애를 초월하시고 부활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부활의 도(道)와 하나님의 권능,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고전 15:12-28).
? 그의 제자들이...시체를 도적질하여 - 이는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도무지 생각조차하기 힘든 억측이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죽음으로 끝난 예수께 대해 깊은 회의(懷疑)와 절망에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모두 숨어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예수의 부활로 인한 소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또 자신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체 도난을 예방하기 위해 조급히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예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 여기서 먼저 '유혹'(*, 프라네)이란 63절'유혹하던 자'란 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로서 타인을 적극직으로 미혹하는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실로 유대 지도자를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함으로써 '첫번째 사기'를 쳤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로써 '두번째 사기'를 칠 것으로 믿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덤 파수(把守)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선동(煽動)보다 친히 부활함으로써 백성에게 끼칠 영향력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성 경: [마27:6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에케테쿠스토디안). -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현재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지키라'고 해석한다(Roberrson, Lenski). 그러나 이에 비해 혹자는(D.A, Carson). 무덤을 지킨 자들이 대제사장들에게만 보내하고 빌라도에게는 보고 하지 않는 28:11 에 근거하여 본문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그같은 주장의 연장으로 본문에 나오는 '파숫군'은 로마 군인들이기 보다 오히려 레위인으로 구성된 성전수비대원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빌라도의 대답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의 허락이 아니라 냉소적인 말로 '너희들은 그 예수가 살아있을 때 두려워하더니 지금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구나 그렇게도 두려우면 너희들 힘으로 지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여라'의 의미로 해석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으나 본문을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명령법적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란 말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목적하는바 무덤 수비를 위해 자신의 부하 곧 로마 군인들을 활용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파숫군'(*, 쿠스토디아)은 '네 명으로 구성된 군인'(러시어로 Custodia)이라는 뜻으로 유대 성전 수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병으로 이뤄진 보초대, 경비대를 가리킨다(행 12:4). 어찌되었든 저들의 말대로 사람들이나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왜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마 저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를 탁월한 예언자정도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위협할 때 저들은 지체없이 제거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완전히 반역(反逆)하는 경우이다.
? 힘대로 굳게 하라(*, 이스팔리사스데 호스 이다테). - 이를 직역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스스로 그것을 튼튼히 지키라'이다. 즉 온갖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의 권위롤 확실히 세우는 동시에 더이상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골머리를 앓지 않기 위한 처방(處方)을 내린 것이다.

성 경: [마27:6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과]
?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印封)하고 - 본문은 마치 '왕과 대신들은 사자 우리의 문을 막은 돌에 봉인을 하여 아무도 다니엘을 건져 내지 못하게 하였더(단6:17)는 다니엘의 체험을 연상케 한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다니엘이 갇혀있던 사자굴에서 무사히 나온 것을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시다가 그것을 뚫고 나와 부활하신 것에 대한 모형(模型) 또는 비유로 생각했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은 서둘러 무덤 봉쇄(封鎖)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출구를 막은 다밧줄로 그 돌과 무덤 출구 양쪽에 동여맨 후, 밧줄의 중심부와 돌과 무덤벽 사이에 얽혀 있는 밧줄에 초나 흙으로 밀봉(密封)했다. 따라서 만약 출구에 조그마한 이상이 있더라도 이 인봉이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의 헛소문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용이했다. 실로 로마 제국의 추악한 정권의 인준(認儁) 하에 유대인들의 치밀한 간개(諫疥)로 포장, 인봉된 꾸밈이었지만 모든 노력은 얼마 후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식 후 첫날 동시에 밝은 기운이 이는 동시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구속하라는 무대에서 제거해 버리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부활의 항거(抗拒)할 수 없는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의 비웃음(시 2:4)을 사고 말았다.

성 경: [마28:1]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 눅 24:1; 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즉 `해 돋는 때에'로 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눅 24:1에서도 `오르드루'(*), 즉 `새벽'으로 되어 있어 그 시각은 마가복음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피포스코'는 분명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새벽, 먼동이 트는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활 사건이 안식일이 완전히 끝난 그 다음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아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는(27:61) 두 여인이 무덤을 찾아 왔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 동안에는 멀리 걷고자 아니했을 것이므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간에는 무덤을 찾은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앞의 도표에서 보여지는 바 무덤을 방문했던 여자들의 명단이 복음서 간에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서 메이어(Meyer)같은 학자는 이 기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랑게(Lang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덤을 방문한 것은 2회에 걸쳐 있었는데, 일차 방문자는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세 여인들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세 여인 중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를 `다른 마리아'로 표현하고, 살로메를 생략하였다. 요한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곧 이차 방문자들이 었었는데 누가복음의 `여자들'은 이차로 무덤을 찾은 사람들이다. 랑게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 주고자 하는바가 구체적인 인명이나 숫자가 아니라 예수의 빈무덤을 분명히 목격한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임을 생각한다면 복음서들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각 복음서마다 무덤 방문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마가와 누가는 유대인의 관습 중 시체에 향료를 발라 냄새를 제거하려 했던 것, 특히 마가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직후에 향품(香品)을 구입했던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마태와 요한은 산 사람을 생매장했을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장사한 지 삼일후 그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유대인의 전승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설도 있다(Thomas R.W Longstaff, The Women at the Tomb: Matthew 28:1 Reexamined). 어쨌든 예수의 무덤을 보고 그분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여인들의 예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그분이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변함없다. 이 초월한 사랑은 결국 예수 부활의 최초 증인이라는 영광스런 경험을 낳게 한다. 한편 예수의 부활로 인해 그녀들이 준비한 향품은 쓸모없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향유 도유로 인해 당신의 장례 절차를 마쳐두고 계셨던 것이다.

성 경: [마28:2]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큰 지진'과 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 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 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혼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사'(1:20-23; 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자연적 기사라는 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하리라고 생각된다.
?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 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게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성 경: [마28:3]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 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희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 10:6; 계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있는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 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성 경: [마28:4]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하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은 `흔들다'는 뜻의 `세이오'(*)의 제 1과거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 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마28:5]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 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롭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 경: [마28:6]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미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 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웠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 3:21).

성 경: [마28:7]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신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 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장; 요 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딩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 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 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 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성 경: [마28:8]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 경: [마28:9]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여인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 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태'(*)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성 경: [마28:10]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여인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절).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은 `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 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 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마태는 무엇때문에 갈릴리의 부활 현현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마태복음 전체를 꿰뚫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메시야는 천대(賤待)받는지역에서 나와(2:23) 그 천대받는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4:15, 16).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도 무시당했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1,5-7절; 27:55, 56). 둘째,이방의 갈릴리(4:15)는 마태복음에서 이방 선교라는 차원높은 주제와 잘 조화된다는 것이다(1:1; 2:1-12; 4:15,16; 8:5-13; 10:18; 12:21; 13:17;15:21-28; 24:14).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절).

성 경: [마28:11]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여자들이 갈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 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 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숫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슷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했어야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성 경: [마28:12]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하고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8:13]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성 경: [마28:14]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28:15]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성 경: [마28:16]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 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 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이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성 경: [마28:17]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 24:10,11; 요 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 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 `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라'(*, 호이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 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 <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生時)와 변화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 `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경배함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18절의 말씀으로 그러한 주저하는 마음을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건드리(Gundry)는 말하기를 17-20절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의심을 쫓아낼 수 있다(심지어 부활 현현조차 의심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마태의 근본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18절은 17절이 아니라 19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18절이 17절의 의심을 쫓아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Dunn,Jesus p.124).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본문이 눅 9장이나 요 21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 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 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성 경: [마28:18]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28:19]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 세례를 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Beasley-Murray, Baptism pp.90-92).

성 경: [마28:20]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 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 - 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 `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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