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요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 말씀이 - 원어상 '말씀(*,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성 경: [요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성 경: [요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만물이 - 원문상 '만물'(*,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성 경: [요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 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성 경: [요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 5:10-47;6:25-65;7:14-36;8:12-59;9:39-10:18,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성 경: [요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성 경: [요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성 경: [요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성 경: [요1: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에그노)는 '알다'(*,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성 경: [요1: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성 경: [요1: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성 경: [요1: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성 경: [요1: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플레로마'(*)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성 경: [요1: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요1: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 경: [요1: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성 경: [요1: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요1: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네가 엘리야냐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 (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요1: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성 경: [요1: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 주의 길을...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있는 용어 '카도스'(*,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성 경: [요1: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성 경: [요1: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성 경: [요1: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 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성 경: [요1:2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성 경: [요1:2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성 경: [요1:2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 보라 - 헬라어 '이데'(*)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 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 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성 경: [요1:3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 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 가리키는 '안드로포스'(*)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 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됨을 암시한다.
?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요1:3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 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성 경: [요1:3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성 경: [요1:3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 성령이 내려서...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 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 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성 경: [요1:3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성 경: [요1:3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사들]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성 경: [요1:3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성 경: [요1:3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성 경: [요1:3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는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 랍비여 - '랍비'(*)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성 경: [요1:3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 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 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성 경: [요1:4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요1:4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 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 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성 경: [요1:4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4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성 경: [요1:4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벳새다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 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성 경: [요1:4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성 경: [요1:4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성 경: [요1:4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성 경: [요1:4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요1:4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성 경: [요1:5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성 경: [요1:5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 5:24, 25;6:47).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요2:1]
?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 "사흘 되던 날" 이것은, 1:43에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지 기록한 것은, 그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레스틴에는 이 밖에 또 다른 "가나" 란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란 말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은 기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그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일 것을 표상(表象)한다.
성 경: [요2:2]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를 가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인 동시에 그의 긍휼이다. 성결은 격리(隔離)가 아니다(Sanctity is not singularity).
성 경: [요2:3]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당시에 "포도주"는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과즙으로 된 음료가 필요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마리아로서 그에게서 이적을 기대할 만 하였다.
성 경: [요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니다(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야의 공적 역사(公的役事)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주장하고 혈통적 모친 된 권세가 간섭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난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涯)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의 하실 바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것이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표현은 구약에도 많은데(삿 11:12; 삼하 16:10; 왕상 17:18; 왕하 3:13), 반드시 냉정한 어투는 아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도울 중보자(中保者)가 없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내 때"란 말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7:30, 8:20, 13:1, 17:1).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그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에 대하여 고데이 (Godet)는 해석하기를, 그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는 예루살렘에서야 될 일이고 가나에서 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가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메시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가? 11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 이른바, "내 때"는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중보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절대 완전하신 순종이다.
성 경: [요2:5]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이것을 보면, 그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그 모친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다.
성 경: [요2:6]
?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유대인의 가정에는, 연회할 때에 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돌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것은, 주로 식사 전후에 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 풍속은 성경이 제정한 것이므로, 진정한 종교적 의의와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 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기독교를 상징함)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두 세 통 드는 항아리"의 용량(用量)은, 약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 큰 항아리가 여섯이나 놓여 있었다.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그의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지적하려는 까닭이다.
성 경: [요2:7,8]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이제는 떠서"라는 말을, 샘물에서 "물을 길어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Westcott),확실치 않다. "연회장"은, 그 때 풍속에 연회의 손님들 중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바 없고, 다만 고요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성 경: [요2:9]
?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4절), 침묵하며 순종한 후 하인들더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5절).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다. 무조건 순종은 하나님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의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Wahrer Glaube schreibt Christus nicht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2) 변화의 원리(6-9).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다. 1733년부터 선교사들이 5년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 인상도 받지 못하던 에스키모족 중에서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겼다. 루터(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Evangelien Auslegung, 4,P.98).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성 경: [요2:10]
?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이 세상보다 선미(善美)한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좋은 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는 취할 수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술 인 것인 만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수 있다.(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않은,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설혹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취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그것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의 덕을 가르친다(갈 5:23). 금주(禁酒)를 규칙으로 가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이적이 문제될 것 없다. 한국인의 특수한 사정(술 취하기 잘 하는 한국인)으로 보아, 금주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 "절제"를 위한 것이다.
성 경: [요2:11]
?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리는 신령한 증표라는 뜻이다.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권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요2:12]
?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공중 성역(公衆聖役)에 헌신하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지체하시지 않게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요2:13]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여준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이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Das Evangelium fur die Priester)이라고 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74). 여기 "유월절"이란 말에 "유대인의"란 설명을 붙인 것은, 사도 요한의 상대한 독자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구원을 기념하면서 지킨 것이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다가 해방될 임시에,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여호와의 형벌이 내렸다. 그 때에 이스라엘 집만을 그 재앙에 들지 않게 하려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다(출 12:12-20, 13:2, 12).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이다(신 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성 경: [요2:14]
?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 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다(사 56:7; 렘 7:11).
성 경: [요2:15]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이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 경: [요2:16]
?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공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 경: [요2:17]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기억하더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인데,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이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요2:18,19]
?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이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다(마 26:61).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다(20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이다.
성 경: [요2:20]
?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요세보 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영적(靈的)으로 어두운 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해한다.
성 경: [요2:21]
?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다. 신약에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요2:22]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시 16:10 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이다.
성 경: [요2:23]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진다.
성 경: [요2:24,25]
?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된다(요일 4:1).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이다. 그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렘 17:9)
성 경: [요3: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Jeremias).
성 경: [요3: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the Anchor Bible).
? 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 경: [요3: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1)'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성 경: [요3: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성 경: [요3: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마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세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 경: [요3: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요3: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요3: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성 경: [요3: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이다.
성 경: [요3:1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지만 헬라어 본문에 `호'(*)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산헤드린의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선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3:1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2)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 아는 것...본 것 -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 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성 경: [요3:1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 견해가 무난하리라 짐작된다.
성 경: [요3:1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하늘에 올라간 자(*, 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 -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9-11)가 승천(昇天)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밀이다.
성 경: [요3:1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가에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속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성 경: [요3:1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구원론(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 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성 경: [요3:1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성 경: [요3:1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는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성 경: [요3:1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성 경: [요3:1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요3:2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가 사용되었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요3:2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성 경: [요3:2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성 경: [요3:2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성 경: [요3:2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성 경: [요3:2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성 경: [요3:2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성 경: [요3:2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성 경: [요3:2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성 경: [요3:2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성 경: [요3:3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그는 흥하여야...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14; 눅 3:18-20).
성 경: [요3:3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위로부터 오시는 이...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간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성 경: [요3:3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성 경: [요3:3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하나님을...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성 경: [요3:3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엠 4: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성 경: [요3:3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성 경: [요3:3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진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성 경: [요4:1,2]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남들과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종종 바리새교인들과 변론 하신 일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그들과 충돌하기를 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에 시기심을 발하였다. 예수님께서 실상 세례를 베푸신 일은 없었으나 소문이 잘못 퍼져서 그가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선전되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 사실대로 믿는 것보다 뜬 소문을 얼른 청취하여 쉬이 전한다.
성 경: [요4:3,4]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유대에서 갈릴로 가는 길은, 일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베뢰아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할 필요를 느끼셔서 그곳을 직접 통과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4:5]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 "수가"라는 곳은 세겜을 가리킨다고 하나, 유세비우스(Eusebius)이래로 이 두 지방은 각각 다른 곳으로 생각되어 왔다. "수가"는 오늘날의 아스카(Askar)라는 지방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 수 24:32; 창 33:19 참조.
성 경: [요4:6]
?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여기 이른바, "그대로"란 말은 피곤한 태도를 숨김 없이 그대로 나타내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그대로 나타내신 태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5). "제 육시"는 유대시간으로 말한 것인데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를 가리킨다.
성 경: [요4:7]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동기는, 그 자신의 갈증을 멈추시기 위함보다 그 여인의 영적 요구를 채워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청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청구는, 언제든지 우리를 유익하게 해 주시기 위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 경: [요4:8]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면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물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성 경: [요4:9]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알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그의 옷을 보고 알았는지, 혹은 그의 말을 듣고 알았는지 우리는 추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과는 달리 민족 차별의 기분이나 감정을 전연 가지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자로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른 민족을 형제시하심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스라엘 민족더러 그들 중에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동포와 같이 대우하라고 하셨다(레 19:34).
성 경: [요4:10]
?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을 가리키고,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란 말은 메시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샘에서 솟아는 "생수"로써 성령을 비유하셨다.
성 경: [요4:11]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靈的)으로 알아 듣지 못하고 오해하였다. 곧, 물 길을 그릇도 없고 그 우물은 깊은데 거기서 생수를 길어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어디 다른 우물에서 길어 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실상 그 지방에는 다른 우물이 없었다. 옛날에 야곱도 그 우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 경: [요4:12]
?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다고 하니, 그 여자는, 야곱보다 위대한 자가 아니고는 그런 더 좋은 물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생수"란 것을 이 세상의 음료수로 아는 착각에서 한 말이다.
성 경: [요4:13,14]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예수님은, 여기 물질적 생수와 영적 생수와의 구분을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란 말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을 다 함께 가리킨 것이니,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 곧,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란 말은 영적 기갈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생수로 비유한다(사 58:11). "솟아난다"는 말은 그 영적 생명이 무궁 무진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4:15]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 여자는 또 다시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늘 갈증 없이 생(生)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또한 물 길러 다니는 수고도 면하려 한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의 욕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영적 요구를 채우려 함보다 육적 요구를 채우려 하는데 급급하다.
성 경: [요4:16]
?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주인공 없는 환경에서 중대한 생명 문제 있는 말씀을 주시기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만 여자에게 전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취하므로(불법하게라도) 이세상 만족을 찾았다. 심지어 방금 예수님의 전도를 듣는 중에 생수란 것도 이 세상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먼저 그릇된 인생관이 깨어져야한다. 그 여자의 생활은 개편되어야 한다. 그 뒤에야 진정한 생수를 받을 만한 준비가 성립된다. 생수 곧 복음이라는 보화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야 사는 법이다(마 13:45-46).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6:63). 사마리아 여자의 육적사상은 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육적 심리에 대한 심판이었다.
성 경: [요4:17,18]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그 여자는 한 남편을 사귄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나 사귀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그 여자의 생활상을 지적하시면서 그 가슴을 뜨끔하게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다섯 남편이란 것을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한다. 곧, 사마리아 지방에는, 바벧론, 구다(Cuthah), 아와(Auva),하맛(Hamath), 스발와임(Sepharvaim)등 다섯 나라 사람들을 식민하였는데(왕하 17:24), 그 다섯 나라에서 들어온 이방 신(異邦神)이 역시 다섯이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은, 이교 사상(異敎思想)과 혼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그들의 종합 종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너무 상상적이다. 차라리 여기 이른 바 "남편"들은, 그 여자의 생활에 여러번 개가(改嫁)하게 된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된다.
성 경: [요4:19]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에 놀라 이제 겨우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여자는 중심에 있어서 이제부터 종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초자연(하나님)을 접촉하기 전에는 진정한 종교심과 영적 사색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예수님에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성 경: [요4:20,21]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여야 할 것을 본래부터 주장하여왔다(신 12:5, 16:2, 26:2). 사마리아 사람들은 게르심산에서 예배하여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을 게르심산에 세웠다(400 B.C). 그 뒤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미워하였다. 그 여자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약적 예배를 보여 주시므로 문제 해결을 주신다. 곧, 이제부터는, 게르심산이니 예루살렘이니 할 것 없고, 오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영적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란 말은 이 부분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약적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는 예배는 어떤 장소의 제재를 받는 외부적 예배가 아니고,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의식(意識)하고 부르면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성 경: [요4:22]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게서 남이니라 -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5경만 믿고 다른 선지서들을 버렸으니 만큼,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을 전부 가졌으니 만큼, 진정한 종교를 받았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보수하였고 메시야(그리스도)도 그들 중에서 나오실 것인 만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4:23]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4:25]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이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대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신 18:15-18에 있는 모세의 예언에 기준하여,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야를 대망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 5경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요4: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심리가 이제 진정한 종교로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메시야인신 것을 알려 주신다. 이 부분(1-26)의 의미를 좀 더 명백히 알기 위하여 앞에 있는 강해를 자세히 읽음이 좋다.
성 경: [요4:27]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 "제자들이 돌아왔다" 함은,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동네에 들어갔다 온 것을 말함이다(8절). 유대 랍비들의 예법대로는, 유대 남자가 거리에서 여자로 더불어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사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심이 이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에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았다.
성 경: [요4:28]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그때의 물동이는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것을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 여자는 그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중하였다. 그는 급히 동네에 들어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성 경: [요4:29]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알아 맞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 때문에 그를 믿었다. 그는 이제 그 사실에 대하여 증거한다.
성 경: [요4:31-34]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생각하셨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구속사업을 완성하심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이 귀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 근거가 되며,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라고 하였다(Dieses Einssein mit dem gottlichen Willen, das ihn dem gottlichen Wirken dienstbar macht, ist der Grund seines Lebens und der Quell seiner Kraft.-Der Evangelist Johannes, P.130).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수한 의미로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신자도 하나님의 일을 하므로 하늘의 생명력을 받는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이룰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요 6: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하다(엡 2:8; 벧전 1:7).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딤전 6: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으며, 히 12:4에는 말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는 믿음으로 남들을 위하여 행해야 될 선한 일들도 책임 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 죽은 믿음이다(약 2:17,26). 엡 2:10에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4:35]
?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속담으로서, 사람들이 추수 때를 고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일에 대하여는 미리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하여는 등한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적 추수의 때는 그때에 임박하였으니 만큼, 예수님은 화급히 일하셔야 될 것을 느끼고 일하셨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영적 추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영적 추수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 두었던 진리가 이제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성취된 진리, 곧,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영적 추수이다.
성 경: [요4:36]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삯도 받고"란 말씀은 그 아래 말씀이 해설한다. 곧, "삯"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받음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 영생에 들어가도록 인도함이다. 믿음에 순종하여 돌아오는 자들은 그 전도자에게 상급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복음으로 돌아온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빌 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살전 2:19).
성 경: [요4:37]
?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 심은자는 수고할 뿐이고 거두지는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수고에 해당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둔다"함은 제자들의 수고에 해당된다.
성 경: [요4:38]
? 이 귀절에 대하여는, 37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4:39]
?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여기 말한대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사(役事)때문에 생겼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역사를 누구에게 물어보신 일도 없이 아신 것은 (16-18),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 경: [요4:40]
?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 이것은, 마치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바울에게 한 말과 같다. 그 여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하였다(행 16:14-15). 전도자를 귀하게 아는 그들 자신도 귀하다.
성 경: [요4:41]
?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그들의 믿음은 점점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친히 예수님 자신을 보았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주"라고 한 것도 (42절) 퍽 자라난 믿음으로 한 말이다.
성 경: [요4:42]
?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 이것은, 남들의 증거에 의뢰함보다 자기들이 친히 예수님을 듣고 본 사실에 근거한 신앙을 말함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서기관의 그것과 달라서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신앙을 얻는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다(Godet).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 세상의 구주(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구주)이신 사실을 가르치셨다.
성 경: [요4:43]
?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로 가시며 - "이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기간을 말한다(40절).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의 도중 행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일에 이틀을 잡으신 것을 보아,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개하는 열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4:44]
?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가시는 동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 왜 그리로 가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다. (1) 고향이란 말은 유대를 가리켰거나(Keil),예루살렘을 가리켰다고 한다(Hoskyns). 그렇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유대나 예루살렘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아시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이겠다. (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은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다.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고,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Calvin,Lagrange). (3)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도 초지(初志)대로 관철하시기 위하여 그리로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Grosheide).
성 경: [요4:45]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의 하신 일(권능 있는 일)을 본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다(41절).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이다.
성 경: [요4:46]
?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왕의 신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 "그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에 관사(冠詞)가 있음을 보아 "외아들"을 의미한다(Grosheide).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갈 때에 지나게 되는 도시로서 거기 관리들과 세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성 경: [요4:47]
?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을 보니, 예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이 컸다.
성 경: [요4:4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저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
성 경: [요4:49]
?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왕의 신하의 신앙은 저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재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못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 취급하신다.
성 경: [요4:50]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예수님은, 그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 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아무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마디 말씀만 하시므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여기 "살았다"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동사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 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는 말이 요한 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예외의 의미(곧, 육신적 생명의 뜻)를 가진다는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도외시(度外視)될것은 아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써 영생에 관한 설교(11:25-26)의 기회를 삼으신 것이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곧, 4:46-53의 말씀은, 5장에 있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단이다. 요한 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귀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부딪혀 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주셨으니,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병(불신앙 병)을 고치시는 것을 위주한다.
성 경: [요4:51,52]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이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고해 보므로 그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시간과 일치한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한층 더 굳세어졌다. "제 칠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한 시 경이다.
성 경: [요4:53]
?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아비가 예수님을 믿음에 따라 그의 온 가족이 믿음은, 계약 원리(契約原理)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실현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 집의 대표자인 만큼,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 온 집을 축복하신다. 창 17:7; 시 105:8-10 참조.
성 경: [요4:54]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표적"이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2:11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으로써, 예수님은 자연계의 주님이신 사실을 나타내셨다. 여기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거리(距離)를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거리 관계로 못하시는 법이 없다.
성 경: [요5:1]
?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신 16:9-12). 칼빈(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성 경: [요5:2]
? <베데스다 연못>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느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성 경: [요5:3,4]
?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사본들(A,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는,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성 경: [요5:5]
?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신 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성 경: [요5:6]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곧,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5:7]
?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는다.
성 경: [요5:8,9]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저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성 경: [요5:10]
?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렘 17:21-22).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성 경: [요5:11]
?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한대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9:11; 행3:9-10 참조.
성 경: [요5:12]
?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 그 때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 9),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성 경: [요5:13]
?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성 경: [요5:14]
?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그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성 경: [요5:15,16]
?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그 병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동사(*)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그 자신은 그 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다.
성 경: [요5:17]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이다.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이 변론(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Asleep in Jesus, P.55).
성 경: [요5:18]
?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요 1:33-34). 그 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의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 격(神子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0:18, 12:49, 14:31, 15:10).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 복음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 격의 성립 원인은 아닌 것이다.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에 속한 일이다.
성 경: [요5:19]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바 "본다"는 말은 현재사로서 부자 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從屬的意志行爲)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 부자(父子)의 중복(重複)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성 경: [요5: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 (*)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킨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 3:17, 11:27).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이란 뜻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큰 일을 가리킨다.
성 경: [요5:21]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헬라 원어(*)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귀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자"(*)란 말, "일으켜"(*)란 말, "살리심"(*)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일으켜(*)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성 경: [요5:22]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이 귀절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성 경: [요5:23]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이 뜻은 하반절에 밝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24-29.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24-25),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리와(26-27), (3) 내세(來世)에 신자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28-29).
성 경: [요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 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汎神論思想)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성 경: [요5: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 때라"고 하신 말씀(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데벌키(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Mandean)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실제로 보여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Ginza Left 596,9)라고 한 말, (2)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Ginza Righe 12)라고 한 말, (3)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Ginza Right 12)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Mandean)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Mandean)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흑암의 신(神)이라 하였고, 예수님을 가리켜 거짓 메시야라고 하였으니(C.H. Dodd,The Fourth Gospel 1953, P.119).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섭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Mandean) 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성 경: [요5:26]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役事)를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요 1:4).
성 경: [요5:27]
?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빌 2:7-10). (2) 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곧,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것(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란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이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란 말이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절)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수 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이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절), 인자(곧,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죄자(곧, 인간성으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성 경: [요5:28]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5: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성 경: [요5:30]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18).
성 경: [요5:31]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신다면, 그들은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상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8: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율적(自律的)으로는 그에게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 복음의 특색을 나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 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성 경: [요5:32]
?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 의견과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키지 않고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증거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 162).
성 경: [요5:33]
?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심문자들을 보낸 것은, 1:19-28에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표준이었다. 그는 진리 (眞理)대로 말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10:41-42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완료 동사로서, 과거에 행한 일의 결과가 아직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시형(時形)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도 아직 효과적이고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Grosheide).
성 경: [요5:34]
?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자증적(自證的)으로 진리이시며 빛이시다. 그의 참되심의 성립은 어두운 인간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빛은 그 자체의 증거로 알려질 뿐이고 어두움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밝히 비추고 있는 태양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촛불을 켤 필요는 없다. 태양은 그 자체를 자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목적은, 세례 요한의 증거 목적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만큼, 그것을 그들에게 기억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성 경: [요5:35]
?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비취는 등불"은 일시적으로 좁은 범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적당한 비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고, 온 세상을 비추신다.
성 경: [요5:36]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 "나의 하는 그 역사"는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 역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란 말은 그가 메시야로 오셨다는 뜻이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그 역사"란 말이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21-29절이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그 역사"란 말이 그런 특수한 일들만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5:37,38]
?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증거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퍅했다. 그들은 그 증거의 형태("형용")를 전연 모르는 자와 일반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그들이, 구약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처하며 그의 형용을 보았다고도 자처하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자처하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 경: [요5:39,40]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성 경: [요5:41-44]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다(41,43).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큼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성 경: [요5:45-47]
이 귀절들은, 다시 39-40절 말씀에 연속하여 구약 성경(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무식, 혹은 불신의 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구약을 배척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죄할 자는 구약 성경이다.
성 경: [요6:1]
?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란 말에 첨부한 것이다. 디베랴 바다라고 해야 당시 이방 사람들이 잘 알았다.
성 경: [요6:2]
?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 표적"이란 말(*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대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2:11을 참조하여라. 그러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이다.
성 경: [요6:3]
?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 데 앉아서 그 제자들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
성 경: [요6:4]
?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성 경: [요6:5]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큰 무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앞에 두고 당한 난제와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았다(왕하 4:42-43).
성 경: [요6:6]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 군중을 먹이실 대책을 벌써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신앙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아시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Grosheide). 이와 같은 시험은 신앙을 배양하는데 유익하다.
성 경: [요6:7]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성 경: [요6:8]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안드레의 말(9절)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성 경: [요6:9]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물고기"라고 한 것(*)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성 경: [요6:10]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성 경: [요6:11]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성 경: [요6:12,13]
?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 유대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성 경: [요6:14]
?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성 경: [요6:15]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성 경: [요6:16]
?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하였다(마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 그것을 성공으로 알고 안심한다.
성 경: [요6:17]
?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더 믿었어야 될 것이었다. 신32:11 참조.
성 경: [요6:18]
?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피드나 낮은 갈릴리 바다에는 사방 높은 언덕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동안 그 배로 찾아 오시지 않았으나,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같이, 환란중에 있는 교회도 마침내 주님의 권고로 말미암아 평안해진다.
성 경: [요6:19]
?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 )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 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막6:29; 마14:26).
성 경: [요6:20]
?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안전과 평안이 있다.
성 경: [요6:21]
?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14:33 참조).
성 경: [요6:22]
?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곧, 떡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바다 이 편(저희 있는 곳)에 계신 줄 알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만이 거기 한 척 밖에 없었던 배를 타고 건너갔고, 바다 이 편에 남아 계셨던 예수님은 아직 머물러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예수님도 거기 계시지 않은 사실을 그들은 발견하게 되었다(24절).
성 경: [요6:23]
?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 말씀은, 그 무리가 어떻게 바를 건너 가게 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배 한 척 밖에 없었으나, 그 뒤에 여럿이 왔으므로 그들이 그 배 편들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 알려진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아서도 이 사실에 대한 목격자였던 사도 요한이 이책을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요6:24]
?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이 말씀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는 못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지는 여부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Grosheide).
성 경: [요6:26]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 "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그 장차 말씀하시려는 사실의 중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그를 영적 메시야로 바로 안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떡을 위하여 따라 다녔던 것이다. 곧, 그들은,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떡 먹이신 그 이적에서 그리스도의 증표를 깨달음보다 물질적인 떡에 흥미를 가졌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적 만족을 위하는 때가 많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의 결과이다.
성 경: [요6:27]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성 경: [요6:28]
?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성 경: [요6:29]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성 경: [요6:30]
?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성 경: [요6:31]
?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성 경: [요6:3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요6:33]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 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성 경: [요6:34]
?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성 경: [요6: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성 경: [요6:36]
?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성 경: [요6:37-40]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 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신앙가요 과학자인 미카엘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곧,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한다"는 말씀을 맏고 세상을 떠난다고 고백하였다.
성 경: [요6:41,4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원망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위대(偉大)를 그의 인간성 때문에 의심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낸신 그의 지극한 사랑이다.
성 경: [요6:44]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못한 이유는, 그 실상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신 증표가 없는 까닭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으신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동시에, 그의 백성도 이끌어 그에게(그리스도에게)로 모으신다(호 11:4). 이끈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가리킨다(롬 8:9; 고전 3:16, 6:19, 12:3; 요일 3:24). 그 때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었음으로 여기서는 성령의 인도에 관한 말이 사용된지 않았다.
성 경: [요6:45]
?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선지자의 글"은 사 54:13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와 신학처지가 다른 버나드(Bernard)도 이 귀절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려면 진리를 배워야 되고, 한번 듣기만 해서는 신자가 되기 어렵다. 예정의 도리가 요한 복음에 있으나 이렇게 인간편의 책임있는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성 경: [요6:46]
?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윗절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로 한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 사자들로 말미암은 전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에게로 오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자 곧, 예수님 뿐이시다. "하나님에게서"란 문구의 "에게서"란 말(*)은 본래의 근원으로 부터 관계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말이다. "보았느니라."이 말의 헬라 원어(*)는, 보았고 또 그 본 결과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보셨고, 또 그 보신 사실이 그에게 계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1:18, 14:9; 마 11:27).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셨고, 또 그의 말씀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성 경: [요6:47,48]
?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믿는 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표현을 강력하게 하려는 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명료한 진리 표현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이 문구에 대하여는 3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6:49]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인 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한다.
성 경: [요6:50,51]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성 경: [요6:52]
?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
성 경: [요6:5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출 12:13),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ysys)란 신을 예배하는 제사에서는,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의 신을 상징하는 소의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므로 그들 자신이 신화(神化)한다고 믿었던 것이다(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pp. 281-282). 이런 사상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인 기독교와 반대된다.
성 경: [요6:5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이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말(*)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내세에는 몸의 부활까지 받는, 구원의 복락 전부를 가리킨다.
성 경: [요6:55]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성 경: [요6:56]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1) 주님의 계명을 지킴(요일 3:24), (2)주님을 본받음(요일 2:6), (3) 열매를 맺음(요 15:2), (4) 죄를 범치 아니함(요일 3:6), (5) 기도 응답을 받음(요 15:7), (6) 생명을 가졌음(요 6:57),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요일 2:28).(Bernard,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St. Jhon, p. 212)
성 경: [요6:57]
?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영원 자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받아 누린다.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 열매가 떡덩이로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다.
성 경: [요6:58]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은, 그 말씀을 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한다.
성 경: [요6:60]
?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가 있느냐 한대 - 그들이 듣기 어렵다는 부분은 어느 말씀이가? 그것은 58절 말씀이 대표한 사상, 곧,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그 말씀 뜻이 어렵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다(62절). 곧, 그가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사람들로 거듭 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여 살리신다는 뜻이다.
성 경: [요6:61]
?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만큼, 그 때 그들의 불평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벧전 2:7-8).
성 경: [요6:62]
?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여기 이른 바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키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시 살아 승천하심에 이르는 한 계단임), 그 때에는 그들이 더욱 예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2)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말씀이 피와 살로써 설명될 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승천하셔서 그의 속죄를 영적으로 이루시며 나타내실 때에는 더욱 깨닫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Westcott), (3)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때에 저희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는 내막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과 같은 속죄 신앙의 효과가 그의 승천하시는 때에 확실히 성립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볼 것 같으면"(*)이란 말은, 하필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심령의 눈으로 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앙을 육안(肉眼)으로 본 것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음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Er band den Glauben nicht an das Sehen, sondern an das Horen des Worts.-Schlatter, Der Evangelist Johannes, P.181).
성 경: [요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선언이다(Schlatter).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성 경: [요6:64]
?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제자들 중에 불신앙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시어 그들을 경성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알게 될 때에 경성하게 된다.
성 경: [요6:65]
?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의 주장이 저렇게 탁월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 예수님을 안믿는 원인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불충분하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작정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성 경: [요6:66]
? 제자 중에 많이 물러 가고 - 이 귀절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그들이 생명체와 교제를 끊었으니 만큼 그들의 생명은 떠났다"고 하였다. 고데이(Godet)는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역사(役事)의 비결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다. 곧, 이렇게 오합 군중(烏合群衆)은 일단 헤어질대로 헤어지고 소수(少數)만 남게 된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는 많은 군대보다 오히려 유력하였다.
성 경: [요6:67]
? 너희도 가려느냐 - 열 두 제자는, 외부적 관계로 볼 때에 언제든지 모두 다 예수님을 따를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외부적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시고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그들도 늘 경성하여 있을지언정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기 암시하신다.
성 경: [요6:68]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영생의 말씀"이란 것은 6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베드로는 언제나 모든 제자들 중에서 대표자 격으로 솔선하여 나서곤 하였다(13:6,24,36,18:10,20:3,21:3,7; 마 14:28).
성 경: [요6:69]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란 말은, 메시야의 성역을 위하여 성별하여 보내심이 된자란 뜻이다. 막 1:24; 눅 4:34; 사 43:14 참조.
성 경: [요6:70,7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주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 자신 있게 지나지 말아야 할 것을 암시하신다. 그가 택하신 열 두 사도 중에도 넘어질 자가 있다고, 그는 경고하신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이다.
성 경: [요7:1]
?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 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 다니신다는 말은, 제자들과 성역(聖役)하시고 계심을 가리킨다. 그는 때가 되기 전에 일부러 위험 중에 들어가시지 않은 것이다. 박해를 당할 때 구차스러이 면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일부러 박해를 청하여 받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성 경: [요7:2]
?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초막절"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에 거주한 사실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명절이다(레 23:34).
성 경: [요7:3]
?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 일설에,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보다 연로한 자들이었다고 하나(Bernard), 성경적이 아니다(눅 2:7). "제자들"이란 말은 12제자 밖에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은, 예수님에게 또 한 번 고통을 드린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명예주의자로 오해하고 저렇게 권면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형제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그의 형제들의 권면은, 마치 저 떡 먹은 무리가 그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것과 같고(6:15),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고 한 마귀의 시험과도 같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엄밀하게도 하나님 중심이었지만, 그 형제들은 이 세상주의로 행하였다.
성 경: [요7:4]
?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 이 말은 이 세상 처세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에서 취할 원리이다. 신본주의에서 행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대로 움직인다.
성 경: [요7:5]
?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 행 1:14을 보면, 그들이 후에 믿는 자들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현재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이른바 "믿지 아니함"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함을 말함이다. 신앙은 혈통 관계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엡 2:8).
성 경: [요7: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 여기 "내 때"란 말의 "때"(*)는, 여기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시간을 가리킨다(Grosheide). 이것은 주로 예수님의 수난 시기(受難時期)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시기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시키시는대로 하신 것이다(5:19,30). 그 이유는, 그는 아버지와 일체(一體)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인 만큼, 언제든지 그들의 원대로 행하는 그 때가 그들의 때이다. 그들은 굴레 벗은 송아지와 같아서 자율주의로 덤빈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겨와 같이 가벼운 것이다.
성 경: [요7:7]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이 세상은 타락하여 본질적으로 악해졌으므로 완전히 선하신 예수님과 정반대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미움을 당하신다(창 3:15). 그가 미움을 당하시는 사실이 도리어 그가 세상의 구주 되신 증표이다. 우리는, 그의 미움 받으신 사실을 보고 도리어 그를 진심으로 믿어야 된다.
성 경: [요7:8]
? 이 귀절에 대하여는 6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7:9]
?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그의 머무심은, 그 어떤 다른 힘이 변동시킬 수 없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밖에 다른 것이 없다.
성 경: [요7:10]
?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교훈하실 때에는 비밀히 하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하셨다(26,28,18:20).그런데, 그가 올라가실 때에 비밀히 하신 것은, 도중에 원수들의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는 때가 이르기 전에 그의 생명을 함부로 내버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성 경: [요7:11-13]
?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 명절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조심하였다. 그 이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옳은 의견도 공적으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리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한 잘못이다.
성 경: [요7:14]
?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이 명절 기간은 한 주간이었다(레 23:36). 이제 그 중간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을 것이다. 이 때에 그는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
성 경: [요7:15]
?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 여기서 "글"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문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갈 6:11),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나(딤후 3:15), 여기서는 학문을 가리킨다(W.Hendriksen).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의문은, 그의 교훈이 권위(權威)있기 때문이었다(마 7:28-29).
성 경: [요7:16]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만일 자기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라고 하셨더라면, 서기관들은 그를 가리켜 속이는 자라고 하였을지 모른다(Bernard).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교훈을 그대로 말한다고 하신다. 그는 나면서부터 아는 이라고 하기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말씀하시는 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하여, 또는 아버지의 뜻을 대언하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7:17]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다. 그 방법은, 사람의 지능(知能)을 첫째로 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말씀을 행하려고 하는 자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것인 줄 알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교훈을 알 수 있는 자는 지능의 인물이거나 혹은 통찰력의 소유자가 아니고, 그 말씀을 행하려는 자라고 하셨다. 영적 지식을 얻는 방법에는 이렇게 종교 윤리적인 것이 먼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론이 첫째가 아니고 순종이 첫째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좋은 학교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7:18]
?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즈안(Zahn)은, 여기 "스스로 말하는 자"란 것은 그 때의 불신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란 것은 예수님을 가리켰다고 하였다. 불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며 말하였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존중히 하는 듯하며 그것에 기준하여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그것을 자기들의 사욕을 위하여 그릇되이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율주의 자들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는 처지(보내심을 받은 처지)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시는 처지(보내심을 받은 처지) 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 대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참되고 그의 행동 원리에 불의가 없다.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명대로 순종하시니, 그 사실(보내심을 받은 사실) 앞에서 참되시고 또 불의함이 없다. 일반인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생활을 하는 자라면 비교적 참되고 불의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행하기 때문이다. 8:29,49-50,54,16:32 참조. 참되고 불의가 없는 생활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경건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및 그를 믿는 사람의 생활이다. 그러나 참되지 못하고 불의한 생활(불의로 진리를 막는 생활)은 모든 경건치 못한 자들의 것이다(롬 1:18).
성 경: [요7:19]
?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이 귀절부터 24절까지는, 윗절 끝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변증하신다. 곧, (1) 자기의 반대편인 유대인들 측에 불의가 있다는 것.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겨 가면서, 율법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죽이려고 하니, 그것이 불의하다. (2) 예수님께서 안식에 병자를 고치신 것(5장)은 율법을 어김이 아님. 만일 그것이 율법의 안식법을 어긴 것이라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그것이, 종교 의식으로서 혹은 사람을 위생적으로 돕는 자비의 일로서 허용된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자비의 일로서 허용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저것이 정죄되지 않는 한, 이것도 정죄되지 않는다(21-24).
성 경: [요7:20]
?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독한 미움을 품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희 마음 속에 숨은 악독을 몰랐다. 그들은, 도리어 그들의 악을 바로 지적하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지적하며,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모든 불신앙의 사람들은 무언 중에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욕하는 자들인 셈이다.
성 경: [요7: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 여기 "한 가지 일"이란 것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을 가리킨다(5:10). "괴이히 여긴다"함은, 그들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도리어 놀람을 가리킨다.
성 경: [요7:22]
?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 할례가 모세의 법(구약 율법)에 제정되어 있다. 그 만큼 그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실상 모세 이전 부조 시대(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부터 내려온 법이다(창 17:10,21:4; 행 7:8). 유대인은 부득이 하여 안식일에도 이 법을 지키는 일이 있었다. 곧, 그들은 난지 8일 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는데, 제 8일이 안식일에 해당하면 그것을 그 날에도 행한 것이었다(Rabbic Akiba).
성 경: [요7:23]
?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 여기 나타난 대조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1)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하나의 의식적 제도인 할례를 행한다면, 행치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으랴? (2) 할례는, 의식적(意識的) 의미로 그것을 받는 자의 한 지체에 축복이 된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은, 그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할례는, 그것을 받는 자의 한 지체를 위생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정도이지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 사람의 온 몸을 건강하게 하셨다고 한다. (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할례를 위생적 유익에 관계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 유익에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기를, "할례는 다만 그것을 받는 자에게만 영적 유익을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38년 된 병자의 온 몸을 고치신 일은 모든 시대를 통한 교회에 유익을 주는 계시이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p.516).
성 경: [요7:24]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외모로만 본다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죄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안식일에 할례 받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저것이 죄라면 이것도 죄이다. 이 문제는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성 경: [요7:25,26]
?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실은, 여기 예루살렘 사람의 증거로도 알려진다. 그러므로 20절의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한 군중의 변명은 무식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말씀하셔도 당국자들(유대의 지도자들)이 그를 잡지 못한 원인은, 때가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까닭이었다(30절).
성 경: [요7:27]
?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이것은, 예수님 나시기 전 중간 시대에 나온 계시 문학에 있는 사상인 듯하다. 계시 문학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난다", 혹은 "해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제 4 에스라 7:28,13:32).
성 경: [요7:28,29]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내력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편의 역사와 환경을 아는데 불과하였다. 그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계된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그(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그 앎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심이다. 하나님(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을 참으로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가 진정한(*)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실도 참되다는 뜻을 가진다(Grosheide). 그가 참으로 메시야이신 것 만큼, 사람들은 그를 절대로 믿어야 된다. "내가 그에게서 났고,"이 문구의 헬라 원어(*)는, "내가 그에게서 왔고"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에 "났고"라는 개념은 도무지 들어 있지 않다(Calvin). 이 문구의 강조점은, 그가 하나님을 아시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참되시다는 것이다.
성 경: [요7:30]
?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그는 많은 위험으로 포위되었으나 잡히우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아직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보호하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났다. 그는, 일반 신자들에게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을 가장 위험한 줄 알고 경계해야 된다.
성 경: [요7:31]
? 무리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가 있었던 반면에(30절), 그를 믿는 큰 무리도 일어났다(31절). 진리가 박해를 당할 때에 택한 백성들은 자던 잠을 깨어 진리편으로 오는 법이다. 어두운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와 오는 것처럼(롬 13:12), 죄악이 혹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의감이 일어나게 되면서 진리 편에 가담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 받을 믿음을 가지게 될 근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예택을 받은 사실에 달렸다. 6:37, 44 참조.
성 경: [요7:32]
?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 "수군거리는 것"은 윗절 하반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것이겠다. 그렇게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를 잡으려고 한다. 종교가들도 부패하면 저렇게 남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악독을 발한다. 좋은 것이 썩으면 더욱 괴악하여지는 법이다.
성 경: [요7:33,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 이것은,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역사하시는 기간이 길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는 하늘에 가실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그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가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을 해하려는 자들의 종국(終局)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여 찾는 신자들은 벌써 어느 정도 그 (예수)를 소유하고서, 더욱 풍부히 그를 소유하기 위하여 찾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찾음은 헛되지 않다. 이 세상의 우물에 물을 길러 가는 자는 물을 못 길어 올때가 있어도, 구원의 생수(예수)를 얻으려고 찾아 가는 자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찾아 만난다.
성 경: [요7:35,36]
?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유대인들은,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잘못 생각하기를,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란 말은, 헬라와 기타 외국에 분산하여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외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천하게 보았으며, 특히 이방인(헬라인)들을 멸시하였다(Bernard). 그러므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란 말은, 예수님의 권위를 업신여긴 말이다. 그들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신 무서운 말씀 앞에서도 두려워 회개할 줄 모르고, 오만한 태도로 그저 한 번 의문하고 지나간 것이다. 불신앙은, 이렇게 내세(來世)에 당할 일에 대하여 둔감(鈍感)하다.
성 경: [요7:37]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초막절은 한 주간이지만, 거기 하루를 더하여 8일 동안 지켰다(레 23:36; 민 29:35).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매일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행렬을 가지고 행렬을 지어 성전 문에 돌아와서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광야에 있을 때 바위에서 이적으로 솟아나온 물을 기념하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초막절 행사와 관련하여 영적 생수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권위는 마 11:28 말씀과 같다. 사 55:1 참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만이 인류의 갈증을 멈추어 주실 수 있음이 확실하다. 인간은 작은 자이지만, 그의 소망과 요구는 무한한 것으로야 채울 수 있다(전 3:11). 이 무한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인류의 갈증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는 사실은, 약 2,000년 동안의 진실한 기독 신자들의 경험이 증거한다.
성 경: [요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등이다.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성 경: [요7:39]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영광을 받음"에 관한 말씀은, 여기서는 특히 그의 승천을 가리킨 것이다. 14:26,16:7을 보면, 성령님의 강림은 그의 승천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뷕셀(Buchsel)은, 여기 "영광"이란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Theo., S.74). 슐라테르(Schlatter)는, 이 귀절들(37-39)에 있는 성령 관설은 그리스도의 말씀 운동, 곧, 신약 시대의 전도 운동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Theo., d. Apost., S. 152). 그러나 여기 이 말씀은 신자에게 대한 성령님의 내적 역사, 곧, 거듭 나게 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역사하셨으나, 신약 시대의 역사는 그 성격이 특이하다. 이 시대(오순절 때)에 임하신 성령은 강수와 같이 풍성하고, 교회 안에 유하시며 교회를 근거점으로 하고 일하신다(Grosheide, Hij in de gemeente woonte en uit de gemeente werkt.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535).
성 경: [요7:40-43]
?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어두어졌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서도 저렇게 견해가 달라졌다. "그 선지자"란 말은 모세가 예언한 바(신 18:15) 메시야 명칭이다. "다윗의 씨." 삼하 7:12 참조.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미 5:2 참조.
성 경: [요7:44]
?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그들은 진리를 신앙하므로 구원 받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그를 잡아 치우려고 한다. 그것은, 어두움이 빛을 물리쳐 보려는 어리석은 일이다.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리의 존재가 괴로운 것이 되어진다(계 11:10).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눌러 보려고도 하며, 잡아 치우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멸망을 자취함이다. 그들이 그 때에 그를 잡지 못한 원인은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성 경: [요7:45]
?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 여기 나타난 그들의 질문을 보아서,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해하려는 마음으로 불 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7:46]
?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 하속들(성전 경비원들)의 느낌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그 말씀은 권세 있는 자의 말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마 7:29). 그러므로 저 하속들도 압도되어 그를 잡지 못하였다.
성 경: [요7:47]
?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예수님을 잡으려던 하속들은, 그래도 그의 말씀 앞에 압도를 당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미혹된 자들이라고 한다. 그 만큼 바리새인들은 더욱 강퍅하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성 경: [요7:48]
?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Augustine)은 해석하기를, "그 때에 율법을 모르는 무리는 도리어 율법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율법을 가르치노라고 하는 자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그것은, 그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리라는 말씀(9:39)의 성취이다"라고 하였다(Catena Aura IV,P.279).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진리의 표준인 듯이 여기서 호언 장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시기로 인하여 발표된 역설(逆說)이다.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의 죄악에 미혹되었다. 그들의 이 말은 그 자리에서 모순된 것으로 탄로된다. 곧, 그들의 이 말 끝에, 그들중 하나인 니고데모가 그리스도 신앙의 방향으로 돌아온 표를 나타내었다(50-51). 여기에 따라서 그들의 호언 장담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 경: [요7:49]
?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켜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망단(妄斷)한다.
성 경: [요7:50,51]
?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 니고데모의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호언 장담한 내용, 곧,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 믿는 자가 없다는 주장(48절)을 수포화시켰다. 그 이유는, 니고데모는 관원이요 바리새인(3:1)이면서도 이 때에 예수님을 변호할 정도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이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또 한 가지 호언 장담, 곧, 자기들딴은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율법을 모르는 무리를 저주한 것도, 니고데모의 이 말 한 마디로 인하여 헛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남들을 율법 모르는 자들인 사실이, 니고데모의 이 말로 확증되었다. 그들은, 남들을 정죄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자신을 정죄한 셈이다. 신 1:16; 출 23:1-3 참조.
성 경: [요7:52]
?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그들이 니고데모를 업신 여기는 태도로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모순된 말이니, 율법과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식을 자증한 것 뿐이다. "상고하여 보라"는 것은 율법책(혹은 성경)을 상고하여 보란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도전적으로 자기들딴은 율법이나 성경의 권위자인 듯이 자처하며 남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그들 자신의 무식이 여기 이 말로 나타났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못하느니라"고 한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 9:1 참조.
성 경: [요7:53]
? 이 귀절은, 8장 초두에 취급된 사본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 경: [요8:1]
?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성 경: [요8:2]
?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성 경: [요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었는가?
성 경: [요8:5]
?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님을 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성 경: [요8:6]
?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성 경: [요8:7]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성 경: [요8:8]
?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성 경: [요8:9]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성 경: [요8:10]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요8:11]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성 경: [요8:12]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성 경: [요8:13,14]
?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성 경: [요8:15]
?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성 경: [요8:16]
?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8:17,18]
?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성 경: [요8:19]
?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者)시다(5:38, 14:7, 9; 마 11:27).
성 경: [요8:20]
?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 경: [요8:21]
?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성 경: [요8:22]
?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성 경: [요8:23]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성 경: [요8:24]
?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성 경: [요8:25]
?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8:26]
?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성 경: [요8:27]
?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 경: [요8:28]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다.
성 경: [요8:29]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성 경: [요8:30]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성 경: [요8:31]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성 경: [요8: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성 경: [요8:33]
?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성 경: [요8: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성 경: [요8:35-36]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 창고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말하기를, "나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성 경: [요8:37]
?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성 경: [요8:38]
?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성 경: [요8:39,40]
?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성 경: [요8:41,42]
?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
성 경: [요8:43]
?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성 경: [요8:45]
?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성 경: [요8:46]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성 경: [요8:47,48]
?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성 경: [요8:49-51]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성 경: [요8:52,53]
?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성 경: [요8:54-57]
?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다(C.K. 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 여기 "오십도 못 되었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의 독구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성 경: [요8:59]
?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성 경: [요9:1,2]
?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제자들의 물어본 말, 곧,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라고 한 것은, 한 번 생각할 만하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무슨 죄를 지었겠기에 "자기오니이까"(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대로, 사람이 나기 전에 그 영혼이 벌써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말은 진리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납득되실 수 없는 그릇된 말을 한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상으로 보아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이나 고통도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답변에서 그런 의미를 밝히신다.
성 경: [요9: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3절 말씀은, 마치 나면서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명사(*)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여 하셔야 될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는 때가 온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성 경: [요9:5-7]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예수님께서 이제 빛을 소유하지 못한 소경에게 눈을 밝히는 권능을 행하시기 위하여, 먼저 자기가 누구심을 알려 주신다. 여기 그의 알리는 말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신 것은, 영적 의미를 가진 넓은 범위에 속한다. 그는 소경을 고치시는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영생의 빛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이신 것을 먼저 알려 주신다. 실상 이 소경은, 자기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함보다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그에게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명백히 알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눈 뜨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것은, 혹설에 의학적 치료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 침은 안질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런 자연적 치료에 의하여 그 소경의 눈을 밝히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1) 그가 어떤 피조물을 가지시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함. (2) 진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비유하고, 침은 그의 말씀의 신성을 비유한다고 함. (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맨처음에 사람을 지으실때에 흙으로 하신 것 같이,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의미라고 함. 그러나 (4) 이것은, 그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소경은 본래 보지 못하여 매우 갑갑함을 느끼는데,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갑갑함을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게 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 받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왕하 5:10-14). 비켄하우젤(Wikenhauser)도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Nicht weil das Wasser des Teiches besonders heilkraftig ware, sondern um seinen Glauben auf die Probe zu stellen.-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7).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이란 것은, 히브리 원어 쉴로아크(*)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해명한 것과 같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실로암 못에 보내신 목적은, 그 소경의 눈을 예수님 자신이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을 관설하신 것은, 실상 그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를 반영시킴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교는 요란스러운 폭력이나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고요히 진리로 역사한다(왕상 19:12). 그러나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사야도 말하기를,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고 하였다(사 8:5-8).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실로암 물로 상징된 여호와의 종교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불신앙으로 놀란하였으니, 그것이 14-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참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었으며, 실로암 물로 상징되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성 안에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왕이 전쟁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팠던 것이다.
성 경: [요9:8,9]
?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이 소경이 그 이웃 사람에게만 잘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그 지방 모든 거민들에게도 걸인(乞人)으로 알려졌던것이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소경이 이제 눈을 떴으니, 그 이적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도 변론하면서 그 이적을 유쾌하게 믿지 아니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명백하게 나타나도 인간성은 거기에 대하여 희박하게(혹은 적게) 믿는 악한 근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그들의 의심은, 그 이적을 사실로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눈 뜬 소경에게 힐문할수록 그의 증언은 더욱 확실히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진리는 모든 반대와 시험을 겪을수록 더욱 빛난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John's Gospel, P.372).
?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이것은, 저 눈 뜬 소경이 그 받은 은혜에 대하여 증거한 제 일보(第一步)이다. 그는, 소경으로서 눈을 뜨게 된 큰 은혜를 받고, 그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자기(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심이다. (1)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가 그 사실을 증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계속될 수 없다. (2)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은혜 받은 사실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폐단도 있다. 이것이 역시 그 증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근심되게 하는 행동이 되어진다. 그러나 이 눈 뜬 소경은 최후까지 주님을 나타냈다. "내가 그로라"고 한 말도 그 자신을 자랑하는 의미가 아니고, 소경 되었던 자기 처지를 밝혀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요9:10-12]
?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고침 받은 소경은, 여기서 (1) 자기의 신념 그대로를 발표한다. 곧, 그는 자기의 개인적 체험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 이것은,그의 순수한 확신을 남들에게 알게 하여 주는 고백이다. (2) 그 뿐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순종의 열매가 얼마나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틀림 없이 효과를 가져왔다는 고백이다.
성 경: [요9:13-16]
? 이 부분의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랐으므로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고침받은 소경더러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라고 물은 것은,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는 말을 듣고자 함이었다. 저렇게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존중히 한다고 하면서 계명의 정신(사랑)은 알지 못하고, 외모를 따라 머리털을 쪼개는 듯한 기계적 해석에 흘러 번쇄주의에 빠졌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방해될 영업을 중지하라는 뜻이고, 무슨 동작이든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취할 수 있는 동작은 안식일에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주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선행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계명의 정신을 모르고, 안식일에는 사소한 동작이나 일까지 일체 할 수 없는 듯이 가르쳤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 고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의 의견 충돌을 각오하시고 진리를 행동으로 드러내신 처사이다. 진리는, 비진리로 더불어 충돌되는 기회에 도리어 그 빛을 나타내고 더욱 힘있게 전파된다.
성 경: [요9:17]
?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 바리새인은, 고침 받은 소경이 저희들의 마음에 맞는 대답을 할까 하여 또 다시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실이나 진리 그대로를 알고자 함보다, 자기들의 편벽된 고집을 그 어디서든지 통과시키려는 완강한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사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부패한 고집을 끝까지 애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간교한 계획은, 진리나 사실 앞에서 실패를 당하였다. 그 고침 받은 소경은 사실 그대로에 입각하여 대답하였는데, 그것이 그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고침 받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하였다. 물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기대하였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여러가지로 곤고(困苦)한 처지에 설 때마다 도리어 빛을 나타낸다.
성 경: [요9:18-21]
?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의 사건에 있어서 믿으려는 마음으로 질문하지않고, 어쨌든지 믿지 않으려는 악한 마음으로 거듭거듭 질문한다. 신자들은 믿으려는 목적으로 사실과 진리를 찾으나, 악도들은 어쨌든지 믿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끝까지 진리와 사실을 피하며 또 힐난한다.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의 부모에게서 저희의 불신앙을 지지하는 좋은 재료가 나타날까 하여 저렇게 질문하였던 것이다. 그 부모는 정직하게 그를 저희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이것은,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의 어두운 태도인 동시에, 진리 증거를 회피하는 겁약인 것이다. 그들이 저렇게 겁약하여진 이유는,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까닭이다. 그들은 저런 불의한 법을 무서워하였다. 진리와 경건을 떠나서 인간의 고집을 세우기 위한 법은 실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저렇게 두려워하였으니, 그들의 심령의 어두움과 생활의 부패가 이로써 추측된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출교권을 주신것은 교권자들로 하여금 영혼들의 목을 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집권자는 하나님 뿐이시고 사람들은 그의 사역자가 되는 것 뿐이다. 소위 감독이라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원대로 교권을 가지고 우뢰와 같이 덤빌려면 덤비라고 하여라. 그들의 공허한 소리는, 진리를 배우지 못하여 의심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 외에 아무도 두렵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Eerdmans Publishing Co. 1949, Vol. I,P.381).
성 경: [요9:24,25]
?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여기 "이에"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러므로"란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불신앙을 고집하기 위하여 이 때까지 이론하여 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번째 그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한 말은 진리를 말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판정한다. 이것은 그들이 저희의 구원 받지 못한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말이다. 실상은 저희들이 죄인이고 예수님은 절대의 의인(義人)이시건만, 그들은 이 사실을 거꾸로 인식하였다 사 5:20 참조. 이 원통한 사실에 대하여,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가득한 확신을 발표하려고 일정 풍자식(諷刺式)으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곧,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닌 사실을 그가 참으로 모른다는 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판단을 풍자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한 바,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이론보다도 실제적 사실에 호소하여 바리새인들의 이론을 사정 없이 꺾어 버림이다. 우리는 이론을 존중히 하여야 한다. 원칙상으로는 진정한 이론이라면, 거기에 기준하여 사실이 결론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참되지 않은 이론으로 사실을 매장하려는 일도 없지 않다. 그런 때에는, 이론보다도 사실이 계속적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여기서 그런 방법을 취하였다. 그는 사실을 그대로 주장하였다. 크로솨이데(F.W.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의 심리를 바로 파악하고 말하였다. 곧, "그가 '한 가지'를 안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상 그에게 있어서 한 가지이면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다. 곧, 그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82).
성 경: [요9:26-29]
?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바리새인들은 그 불신앙의 고집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이것은, 듣기 싫으리 만큼 역스러운 질문의 중복인 것이다. 그들은 담벽을 문이라고 할 만큼 어두워지고 강퍅해진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소경의 눈 뜬 놀라운 사실 앞에서 여지없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데 없는 질문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자의 신앙의 뱃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를 산산히 깨뜨릴 만큼, 날카롭게 사정 없는 풍자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꾸지람하는 방식으로 나오면서,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고 한 말이다. 신앙자는 어떤 때에 그 대적을 향하여 조롱하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것이 상대방의 영혼을 증오하는 악독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불신앙 사상 그것에 대하여 사정 보지 않는 심판의 철퇴(鐵槌)인 것이다. 저런 사정 없는 철퇴를 효과적으로 사용 할 수 있는 자는, 실상 상대방의 영혼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자이다. 신앙자의 속에는 악독이 없다.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수 없이 악독과 욕으로 저 소경 되었던 자를 대적한다. 불신앙자의 무기는 저렇게 불법과 악독인 것이다. 사람이 악독해지면 사상과 이론도 어두워진다. 그들은, 이론에 있어서 모순성을 띠었다. 곧, 그들 자신이 자칭 모세의 제자라고 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세의 제자가 못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제자였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 5:46에 말하기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였다.
성 경: [요9:30-33]
?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 소경 되었던 자는 이 점에 있어서도 자기의 굳센 신앙을 나타낸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이상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불신앙자에게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심리는, 천국과 맥(脈)을 통하고 있는 굳센 신념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론에 기준하여 그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겼다. (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한 자를 들으신다는 확신(31절). 이 사상에 대하여 버나드(Bernard)는 성경에서 여러 귀절들을 참조하였으니, 참고할 만하다. 욥 27:9; 시 66:18; 잠 1:28, 15:29, 28:9; 사 1:15, 59:2; 렘 11:11,14:12;겔 8:18; 미 3:4;슥 7:13;행 10:35. (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은 전연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셨으니, 어찌 그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확신(32-33).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의한 힘있는 논증이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자 한 사람의 신앙적 증거 앞에서 산산히 실패를 당하고,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를 출교하였다. 소경 되었던 자는 초신자(初信者)였다. 그러나 그의 올바른 신앙이 확신 있게 증거를 나타낼때에, 많은 바리새인들도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성 경: [요9:35-38]
?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주님은, 불법하게 출교 당한 신자를 가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곧,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시어, 그의 신앙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때까지 소경 되었던 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알 뿐이었다. 물론 그만한 신앙 지식에 강력한 신념이 함께 하였던 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좀 더 명백한 진리 지식이 필요하였다. 곧, 예수님을 인자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였다. "인자"란 말 뜻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런 친절한 주님의 계시 앞에서 그는 신앙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신앙은 무한히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부요(富饒)를 상대하고 있다. 확신의 소유자도 또 다시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기를 원해야 된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것을 원하였고, 또한 그 소원을 구체화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9:39-4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인류를 소경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의 육안은 어떤 짐승의 눈만도 못하다. 예를 들면, 매는 여러 십리 밖에 있는 작은 것도 밝히 본다고 한다. 사람의 눈의 표준은 심령의 눈이다. 심령의 눈은 하나님 보기를 목적한다. 심령이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소경임을 면치 못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잠 28:26). 인간은 이렇게 소경인데도 자기가 본다고 하며, 불행 가운데 아주 떨어진다. 요 9:41에,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자기들이 소경인 줄 알았더라면 주님을 믿었을 것이고, 따라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무죄한 자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이 아니라고 자처한다면, 죄를 더욱 범함이다. 그것은, 곧, 요일 1:8에 말한대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요일 1: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안니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이면서 소경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죄와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를 범함이다.
성 경: [요10: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이 말씀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양에게 관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도 하나님의 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 본문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 중에 저렇게 불행한 생활을 보내기 쉽다.
성 경: [요10:3-5]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이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문지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문지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당하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장에 많이 나온다. 4,5,27절을 참조하여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 듣는 사실을 비유한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이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 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들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정미롭게 전파할 뿐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행스텐벌키(Hengstenberg)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름을 각각 불러 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본위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된다. 그런 역사(役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힌다. 그것은 마침내 광범위에 미치는 구령 운동(救靈運動)도 성립시킨다. 설혹 그의 역사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소수의 열매로써도 만족한다. 비루마에 처음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Judson) 목사는 7년만에 세례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도 천하를 얻은 듯이 기쁨을 느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이란 말은, 그가 우리에 있는 양들을 인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갈 때에 양 한 마리라도 빼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표를 보인다. 곧, "다 내어 놓은 후에"란 것이 이 뜻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양 한 마리라도 등한히 여기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인도자는 소자 한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된다.
성 경: [요10:6]
?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는 구약에도 많이 있다. 시 23편, 79:13,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 경: [요10: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Sahidic) 사본에는 "목자"(*)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성 경: [요10:8]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나보다 먼저"(*)란 말에 대하여는 사본상 차이가 있다. 곧, 몇몇 사본(* ,A,B,D,L,W)이 우리 본문과 같이 이 문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본(*)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원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본들의 증거가 강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이다. (2) 이것은,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 "먼저"라는 헬라 원어가 그런 뜻으로 요한 복음에 많이 나와 있다(11:55, 12:1, 13:1, 19, 17:5, 2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해석을 합당하게 여기는 이유로서 그 아래 나온 에이신(* ),곧, "이요"로 번역된 동사가 현재사라는 것을 들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한다.
성 경: [요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한다(신28:6;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성 경: [요10:10]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신다(시23편; 히13:20-21).
성 경: [요10:11-13]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 경: [요10:14,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여기 목자와 양이 서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함인가? 예수님이 그의 백성(양)을 아신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뜻이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 성품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를 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성립된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하고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 자율적인 지식이 아니다. 마11:27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양이 목자를 안다는 지식이 노시스(Gnosis)의 실존 각성(Seinsverstandnis, Existenzverstandnis)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와 같은 지식은 노시스 신미 문건에서 왔을 터인데, 그 지식은, 아는 자와 알리운 자가 서로 일체로 관련된 사실을 결정함이다. 그런 지식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고(nicht ein rationales, theoretisches Erkennen),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실존적으로 결정함이다"라고 하였다(ein Innerwerden, in seiner ganzen Existenz bestimmt ist.-Johannes Evangelium, p.290). 그는, 요한 복음의 이 부분 사상이 분명히 노시스를 배경하고 있다고 한다(Der gnostische Hintergrund dieser Gedankenbildung ist unverkennbar - Johannes Evangelium, p. 285).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양과 목자 사이의 지식은 그런 빌려온 것(Lehnsatz)이 아니다. 요한 복음의 구속자(목자)는 노시스 문헌의 그것과 다르다. (1) 사도들이 전파한 그리스도는 명백한 역사적 인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고, 노시스(만데안 문학)에서 말한 구속자는 전사 시대(前史時代)의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2) 사도들이 전파한 구속자(救贖者)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구속자요, 노시스에서 말한 구속자는 이원론적인 우주 세력들과 싸운 상상적인 전쟁 영웅이다.
성 경: [요10:16]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이것은 이방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예언되었다.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는 말씀이 이 귀절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 뱅겔(Bengel)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자도 한 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 지적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성 경: [요10:17,18]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영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도 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순연히 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 뿐이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을 의미한다.
성 경: [요10:19-21]
?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성 경: [요10:22,23]
?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 "수전절"은, 유다의 매코비가 성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그것을 기념하는 절일을 정했는데, 그것을 말함이다( .매코비 4:51, .메코비 10:5-8). 이날은 12월 25일이다. "솔로몬 행각"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시설한 현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12월이 우기(雨期)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때에 솔로몬 행각에 다니신 듯하다.
성 경: [요10:24]
?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 주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直說)하심보다, 흔히 비유적으로 하시고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때 민중의 메시야 관념이 그릇되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더러 그의 메시야이신 여부를 "밝히 말하시오"라고 한다.
성 경: [요10:2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메시야격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1) 그의 말씀의 증거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음.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들이 등한히 해도 언제나 살아 역사(役事)한다. 그의 말씀을 오해하고 선전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계속 살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 24:35에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요 8:51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위 있고 진실하다. (2) 예수님의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함. 예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기독교에서 그 이적 요소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는 이적으로 된 종교인데 거기서 이적을 제외하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돌 집에서 돌을 모두 다 뽑아 버리고 남은 데서 살아 보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은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실과 구속적인 사랑을 그 성립 요소로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께서 이런 권능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사 29:18, 35:5-6), 그것이, 과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사적 이적이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음은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는 죄악이다.
성 경: [요10:26]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벧젠 1:2). 곧, 그가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게 된 것이다. "양"이란 말은 택한 백성을 비유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증거들은 많이 나타났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완전하게 나타났다. 기독교는 이렇게 가장 믿을만하게 된 유일하고도 진정한 종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 말라 죽는 자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영생의 복을 받도록 택함이 되지 못한 자들이다.
성 경: [요10:27]
이 귀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다.
성 경: [요10:28,29]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원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그들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딤후 1:21).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놓여 있어도 근심할 것 없다. 악한 것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다.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사상을 재음미한다. "주노니"라는 말(*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111).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문구(*)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Godet,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 의미가 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이 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리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소유니만큼, 만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oschriften, p. 112).
성 경: [요10: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성 경: [요10:31,32]
?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경건하다고 하며,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말씀(신 13:5)을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악행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답변하신다. 그 답변은, 유대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이니, 곧, 그들이 너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몰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전하고 철저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보여준다. 곧,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 "너희에게 보였거늘"이란 말씀들이다. (1) "아버지께로 말미암아"란 말은, 그의 하신 선(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불신앙은 현저하다. (2) 그 뿐 아니라, 그 선한 일이 한 가지만 아니고 여러가지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3) 또 그 뿐 아니라, 그런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으되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보였거늘"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중 앞에서 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으되, 그들은 강팍하여 아직도 믿지 않았다.
성 경: [요10:33]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는 저렇게 두텁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듯이 자처한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는 듯이, 예수님의 발표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말씀을 책잡아 그것이 "참람"한 말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진리와 시실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정죄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 행동이다.
성 경: [요10:34-3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여기 "율법"이란 말은 시 82:6을 가리킨다. 시편을 왜 율법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처음부분에 있는 것만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책 이름을 "율법"이라고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 12:34, 15:25; 롬 3:19; 고전 14:21 참조 시 82:6에는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재판장들이 신(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 자신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함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신격(神格)이나 신자격(神子格) 주장의 정당성을 이 시구에 두셨다. 그것은 얼른 보아 예수님도 순 인간으로서 신의 시키시는 일을 맡은 의미의 하나님 아들이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Ontological Sonship)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구에 근거한 예수님의 논증의 귀결은, 추론의 등위적 이론(等位的理論=Analogical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 결론(a 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들도 신의 시키심을 받은 자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神)이 아니로되 그들을 "신들"이라, 또는 "자존자의 아들들"(시 82:6)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결론이다.
성 경: [요10:37,38]
?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여기 "내 아버지의 일"이란 말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적 행하신 사실을 저 불신앙자들 앞에 도전적으로 내세우신다. 그것은, 그 이적들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천하가 공인한 사실을 지적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떤 한 구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대중이 주목하는 공석에서 되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강퍅한 교권자들이 끈질기게 책잡으려는 무서운 눈초리 앞에서 성립된 일들이다. "그 일은 믿으라."이것은, 그의 행하신 이적들이 초자연적이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표적인 사실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기관(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부요(富嶢)를 충만히 전달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하나님) 안에" 계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 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부요에서 모든 것을 가져오심을 가리킨다(Godet). 예수님의 이적은, 저렇게 땅에 계시면서 하늘에 계시는 (3:13) 오묘를 보여준다. 그것은 내세(來世)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바빙크(Bavinck)는 말하기를,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거기 의(義)가 거한다. 그 때에는 이적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다(Geref. Dog. Uitgave van J.H Kok Te Kampen 1928, Vol I, p.311).
성 경: [요10:39]
?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원수들이 그를 해하지 못하였다.
성 경: [요10:40,41]
?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떠나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다. 그곳은 물론 적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세례 요한의 이적(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치 않았음)을 본 까닭이 아니고 그의 증거한 말(그의 메시야 증거)이 참된 까닭이었다. 말의 진실성은 이렇게 귀하다.
성 경: [요11:1]
?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 여기서 화제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의 단축형이라고 한다.
성 경: [요11:2]
?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 12:1-8 참조.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사람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한다.
성 경: [요11:3]
?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청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신다. 특별히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기뻐하신다.
성 경: [요11:4]
?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성 경: [요11:5]
?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저 하심이었다(4 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특수한 이적을 행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11:6]
?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히 오심을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지체이다.
성 경: [요11:7,8]
?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예수님께서 천천히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올리셨으므로, 인제는 그들이 거정 없이 위험 지대인 유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Bengel).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겁을 낸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은 유대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8:59, 10:31 참조
성 경: [요11:9]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할 때에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신변을 위험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남아 있으므로 그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기회를 식별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그것을 식별하셨다. 그는 헤롯의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고도 말씀하시기를, "가서 저 여유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하셨다(눅 13:32-33)
성 경: [요11:10]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칼빈(Calvin)은, 윗절(9 절)의 "낮에 다닌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혹은 그의 명령)대로 다님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말씀에 관게 없는 환경과 사정을 가리킨 것이겠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심사(心思)에 따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인간은 실족할 수 밖에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 안에는 참다운 빛(진리)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밖에서(하나님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된다(Grosheide). 예수님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인 만큼, 밤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연 없으셨다.
성 경: [요11:11]
?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1:12,13]
?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제자들의 오해는, 결국 모든 죄인들의 습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준다(Grosheide).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도, 잠들었다는 말이 보통 수면을 의미하지 않는 사실을, 그들은 왜 몰랐던가? 보통 수면이면 다른 사람들도 깨울 수 있지 않았으랴? 하필 예수님이 그것을 깨워야 될까?(Greijdanus).
성 경: [요11:14]
?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나사로의 죽은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하셨다(11 절). 그러나 이제는, 그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고로 밝히 해석하여 주신다. 처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를 사용하여 보도록 하셔서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명확히 그 말씀의 뜻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수확이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주시기는 하되,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노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 경: [요11:15]
?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신대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그 질병에거 건지시지 않았으므로 그가 죽었으니, 이제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하는 광경이 미구(未久)에 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부절히 자라나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난관은, 신앙이 새로이 장성할 기회이다. 신앙은 되어가는 것이고 된것이 아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 되어있는 기독자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He who is Christian is not a Christian).
성 경: [요11:16]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연단(鍊鍛)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力說)하셨는데(15절 해석 참조), 그는 그 말씀 끝에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곧,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한 유대 땅(7-8절 참조)으로 같이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불신앙은 디두모(쌍동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마의 근성이다. 이때에 도마가 죽기로 작정하는 영웅주의는 가졌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당할 줄 알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신대로(9 절)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비록,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웠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9,15)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저렇게 현실의 얕은 곳에서 잘못 움직였다. 우리는 생각하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까! 아버지가 먼 곳에 갔을 때 그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주님을 잊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 아버지를 못보는 대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보는데, 어찌 그 말씀을 잊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예사로이 한다. 분주하여 잊어버리고, 평안하여 잊어버리고, 곤난하여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성 경: [요11:17]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트만(Bultmann)의 이 학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 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성 경: [요11:18]
?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성 경: [요11:19]
?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Calvin).
성 경: [요11:20]
?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성 경: [요11:21,22]
?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성 경: [요11:23,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끝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그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성 경: [요11:25,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27]
?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39 절).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빌 2:7을 참조하여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다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 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고로 여러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신 32:10-12).
성 경: [요11:28-30]
?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畏)한 증표이다(Calvin).
성 경: [요11:31]
?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뻔 하였다.
성 경: [요11:32]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성 경: [요11:33]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헬라 원어(*)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體恤)의 슬픔이었을 것이다(Calvin). 이 말을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셨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의 신성이 노하셨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성 경: [요11:34-38]
?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눅 19:41).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성 경: [요11:3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44절 참조).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異蹟役事)에 수종들므로, 그들은 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萬代)에 전파될 수 밖에 없다.
성 경: [요11:40]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Grosheide).
성 경: [요11:41,42]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계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 없는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끊임 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둘러 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기도로 발표하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기를 원하셔서 그 어느 기회에라도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성 경: [요11:43]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그는, 진리이시며 공명 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큰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롬 4:17; 요 5:28 참조. 어떤 재미 있는 말이 있다. 곧,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란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요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이것은, 그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그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의 진실성을 살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친히 이루시고도 그 일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주신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그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존귀한 덕이다.
성 경: [요11:45,46]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가지를 말한다.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47,48]
?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는 내막이 나타났다.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염려였다.
성 경: [요11:49]
?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그 해"라고 밝힌 것이다(Jos. Antiq. 18, 2, 2).
성 경: [요11:50]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성 경: [요11:51,52]
?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예언을 하였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으로 이용된다는 뜻이다.
성 경: [요11:53,54]
?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구주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행동은 괴이하다. 그 행동은, 착한 일일수록 반대하는 마귀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미를 아시고 깊은 광야의 한동네로 피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때가 이르기 전에 잡히는 것을 면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순종하셨다.
성 경: [요11:55]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갔더니 - 이것은 유월절 전의 결례(潔禮)를 가리킨다. 그것은, 머리를 깎거나 옷을 빠는 정도의 것이었다. 창 35:2; 출 19:10,11; 수 3:5; 대하 30:17; 행 21:24,26 참조.
성 경: [요11:56,57]
?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 예수님에게 대한 민중의 논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힐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냉정한 태도로 논단한 것 뿐이다.
성 경: [요12:1]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실을 다시 관설한다.
성 경: [요12:2]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마 26:7; 막 14:3), 그 연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상상하기를,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곧,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가리킨다. 눅10:40 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그보다도 주님의 진리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자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를 보는 자마다 주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다.
성 경: [요12:3]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성 경: [요12:4]
?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아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요12:5]
?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는,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곧, 마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 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 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하의 몇 만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성 경: [요12:6]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성 경: [요12:7]
?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 여자로 하여금 지금 향유 붓고 남은것을 보관시켜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이를 두게 하라"란 말(*)은,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하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뜻을 지적한다. 곧,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기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 한 일은 그 한 때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 된 후에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가가. 13-14).
성 경: [요12:8]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 의 말씀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지시하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따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너희들이라"고 하신 셈이라고 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성 경: [요12:9-11]
?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 중에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온 자들도 있었다(11:46). 이렇게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베다니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많았다(11:45).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의 절정이다.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이적의 목격자들이 많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시키신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이적을 어떤 캄캄한 모퉁이에 감추시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대중이 친히 목격한 사실이며, 또 그들이 믿은 진리이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참으로 악독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여, 그를 다시 죽여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적인 반면에, 그를 다시 죽이려고 한 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이 들은 서로 정반대이다. 대제사장들의 이 행동은 시기심의 극단이요, 잔인성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강팍한 행동이며, 대중 인기를 탐하여 날뛰는 괴악한 명예주의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극악한 원수들이 대적한 이 진리(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극치(極致)이시다.
성 경: [요12:12]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온 나그네들이었다. 칼빈(Calvin)은 이 사실에서 영적 교훈을 찾아 본다. 곧,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관습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종교적 열심은 식어졌고 외식(外飾)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온 나그네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대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하게 되었다.
성 경: [요12:13]
?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다.
성 경: [요12:14,15]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행동 설교이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바리새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런 무의식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 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징적 행동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징한 것이로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Grosheide). 우리 본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9의 말씀이다.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실 터인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야가 장차 오실 소망)중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 경: [요12:16]
?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9의 성취하였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모르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 동안에 파란 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는 과정이 단순치 않은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고개를 넘은 뒤에 비로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시 119:71에 말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17,18]
?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곧, 그들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들은 까닭이었다. 그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 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17 절).
성 경: [요12:19]
?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 때의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지적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예언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20-32).
성 경: [요12:20]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체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요12:21]
?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그런데,그들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성 경: [요12: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성 경: [요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및느니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가리킨 비유인데, 사 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그를 따르는 자들(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
성 경: [요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 기록된 희생의 원리는, 일반 사회에도 적용되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지켜야 할 원리를 보여주신다. 곧,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하는 신령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만큼(24 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따르지 말고(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그만 따라가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한 자기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에는, 이어서 그를 믿기(따르기) 위한 우리의 희생을 권고하시곤 하셨다(마 16:21-26; 눅 9:20-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24 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그에게 맡기고 그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듯이 주님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이렇게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용이하게 그렇게 되는 길이 있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함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푹 적시움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26]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12:27]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가 왔나이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당하실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相)을 맛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
성 경: [요12:28]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곧,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성 경: [요12:29]
?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 그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의 말씀(28 절)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늘의 소리가 역시 그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그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었다고 하였다(행9:7). 그 때의 군중은 저렇게 심령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딴 것으로 오해한다(Calvin).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그것을 뜻 있는 말로는 안 셈이다. 그것을 보니, 그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니 만큼, 그것이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인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요12:30]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곧,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그리스도 죽으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것"이란 말씀은, 그 뜻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이 귀절 말씀이 그런 뜻을 가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성 경: [요12:31]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는 처분되고(1:29),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계 21:5). 곧, 예수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포함함)을 여기 진술 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은 사단을 의미한다. 눅 10:18 참조.
성 경: [요12:32,33]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3:14).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 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다. 6:44 참조.
성 경: [요12:34]
?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나 -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시 110:4; 사 9:6; 단 7:14등에 근거하여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은 몰랐던 것이다.
성 경: [요12: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알아야 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그 현재 밖에 없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다 해 가지고 이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그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 다음에도 잘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햐여 있다.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그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귀절과 다음 귀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행 20:24에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 주의로 살아야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내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36]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성 경: [요12:37]
?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나 - 요한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1:5, 10-11 참조.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주시는 표적(곧, 증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들 자신에게 죄책이 돌아갈 것 밖에 없다.
성 경: [요12:38]
? 이는 선지자 아시아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니이까 하였더라 - 이 말씀은, 사 53:1의 인용이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팔"이란 것은 주님의 능력(곧, 사람의 마음 눈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때에 별로 많지 못하였다.
성 경: [요12:39]
?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은혜가 많을술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 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우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2:40]
?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이사야서에 있는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사 6:10).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되는대로 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있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용과 같이 되는) 죄책은 저희 자신들에게 있었다.
성 경: [요12:41]
?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성 경: [요12:42,43]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여기 "관원"들은, 산헤드린공의회의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세상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신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 "그러나"란 말과 "에도"란 말이 이 사실을 역설(力說)하며 지적한다. 그들이 그 믿은 바를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던 원인이, 진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고 도덕력의 부족이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더욱 약해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신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육적 이유로 강하지 못하면, 그는 강해질 방향을 등지고 약해 가는 방향으로 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계속하여 약해진다. 그것은, 사람이 경사진 어름판에서 미끄러져 내림과 같다. 그러면 그 때에 믿는 관원들이 왜 저렇게 약하여졌던가?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욱 사랑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니, 곧 존재자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즉, 본래 없던 자요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없앨려면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칭찬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찾아야 된다(Hengstenberg).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사람의 박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짐승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탐하면 명예의 종이 됨. 이런 사람은 혹시 의(義)를 행하다가도 명예를 위하여 얼른 중단한다. 명예주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 중에서 명예주의에 속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고 버리신다. 무디(Mody)가 하나님께 사용된 이유도 그가 언제나 자기를 감추었으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데 있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인 트레이(Torray)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단에도 될 수 있는대로 남들을 내세웠다고 한다.
성 경: [요12:44-46]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은 그가 바라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 경: [요12:47-50]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어떻게 큰 것을 가리킨다. (1)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데 세상 끝날에 그 말씀이 심판한다고 하시며(47-48), (2)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49절), (3) 그 말씀이 영생을 주는 것이니 만큼, 그 말씀을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신다(50 절). 요 6:63 참조
성 경: [요13:1-3]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가지 동기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 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하여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 일어난 곳에 가장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식사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복음은 그렇게 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성 경: [요13:4,5]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3:6]
?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베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다(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취급하면서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난하실 일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16:22).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황송(惶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 그것을 감격하여 받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성 경: [요13:7]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성 경: [요13:8]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성 경: [요13:9]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베드로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 뿐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성 경: [요13:10]
? 이미 목욕하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성 경: [요13:11]
?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나타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 깨끗지 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성 경: [요13:12-15]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성 경: [요13:18]
?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곧, 구속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 참여할 자들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복이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말씀하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성 경: [요13:19]
?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게 되며, (2) 그 성취된 사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활실성도 믿어진다. "내가 그 인줄"(*)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중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는 뜻이다(Grosheide).
성 경: [요13: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성 경: [요13:2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 경: [요13:22]
?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제자들이(유다를 제외하고는)강퍅하지 않은 증표이다.
성 경: [요13:23]
?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 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한다(Westcott).
성 경: [요13:24,25]
?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킨 것인데, 이제 베드로가 그더러 주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때에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한다.
성 경: [요13:26,27]
?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다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성 경: [요13:28,29]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성 경: [요13:30]
?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러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캄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앞길도 영원히 캄캄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요13:31]
? 지금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여기서 "인자"란 말(*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게 한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다음 절에, "영광을 주시리니"(* )라고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을 보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보셨다.
?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안에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
성 경: [요13:32]
?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인하여"란 말(* )은, 하나님 계신 곳을 가리킨다. 17:5에서는, 이 뜻이 "아버지와 함께"(*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하심을 가리킨다(6:62, 17:5, 20:17;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당분간 나누이게 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 그 뜻이다.
성 경: [요13:33]
?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성 경: [요13:34]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성 경: [요13:36-38]
?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14:1]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말씀(13:33)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들더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의 이와 같은 권면은, 이 아래 여러가지 이유를 가진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또 예수님 자신을 그 만큼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고 믿으라는 뜻이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며 일체로 본다(5:24, 10:30, 14:9, 12:44).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심은, 그가 일찌기 그들에 주신 내세훈(來世訓)(12:26, 13:36)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음 절 하반에, 일찌기 주셨던 그의 내세훈이 다시 관설된다. 거기 있는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14:2]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쨔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 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성 경: [요14:4]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일찌기 자기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말씀하셨다(8:19; 10:1, 7,9,37,38, 12:26, 44,45,49,50; 마 11:27, 28). 다음 귀절(6 절)은 그 곳을 명백히 가리켜 말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인고로 그들은 편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길 되시는 주님 자신은, 그 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큰 고생을 당하셨다.
성 경: [요14:5]
?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요한 복음에는, 특별히 도마가 충성스러우면서도 둔한 제자로 나타났다. 도마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천당을 가리키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지각이 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 때문에 진리를 밝혀지곤 하였다(Barrett).
성 경: [요14: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성 경: [요14:7]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런 영적 지식에 부족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란 말은, 이제 멀지 않아 곧 실현될 일, 곧, 그의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부터 시작될 완전한 계시(啓示)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시기, 곧,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됨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장 확신 있는 지식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보았느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의 글에는 이 방면 기록이 적지 않다. 19:35에도 말하기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고 하였고, 요일 1:1-3에도 말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에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14:8]
?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은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타산적이다. 그는, 영(靈)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감각적으로 보기 원하였다.
성 경: [요14: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벴겔(Bengel)은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영혼 자체를 볼 수 없으나, 그것이 몸을 도구로 하여 행하는 바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관한 일체의 생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1:15)"라고 하였다(Gnomon 2, Edinburgh, p. 433).
성 경: [요14:10]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여기 이른 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 분의 도덕적 연합(행위로써 연합)도 의미하였으니, 고데이(Godet)의 말한 바와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 '나는 아버지 안에'란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를 겸허(謙虛) 시킴이고, '아버지는 내 안에'란 말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겸허에 모든 능력과 지혜를 전달하심이다"라고 하였다(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Zondervan, p. 274).
성 경: [요14:11]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성 경: [요14: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이 부분(14-17장)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임종유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이며(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사도들에게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20).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들은 미래의 이 큰 일들을 위한 준비였다. 신바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땅 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과 승천하신 뒤에 그의 하시는 일과으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은 외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비유로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계시라고 할 수 있다(16:25-28).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만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저렇게 큰 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성 경: [요14:13]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독립된 것인가? 혹은 그것의 연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즈안(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취한다. (2)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와 버나드(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간주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또한"(*)이란 헬라원어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함이고,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함이다.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다.
성 경: [요14:14]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이것은, 윗절에 말씀하신 약속을 거듭 말씀하여 고조하는 것 뿐이다.
성 경: [요14: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여기서 예수님은, 사도들더러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신자가 그의 계명을 지킴이 곧, 그를 사랑함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것이, 16절 이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 보고저 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렌스키(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계명"이란 것을 기도하라는 부탁과 같이 생각하여 윗말과 연락시타다다.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 보혜사 약속과 관련시킨다. 곧, 그는 생각하기를,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 약속된 성령의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연락시키면서도 위의 버나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아랫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운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 이 약속 성취는 인간의 주관적 조건에 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약속 성취를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기다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함에 대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도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 속하는 란텔파(rANTERS)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성 경: [요14: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혜사"란 말(*)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성 경: [요14:17]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에 대한 설명 계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만 무엇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이유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하신 말씀이 의미한 바이다.
성 경: [요14:18,19]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성 경: [요14:20]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는 여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 복된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롬 6:3-11; 엡 2:4-6; 골3:3-4). (3) 신자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살전 4:14,16). (6)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 이 연합은 영원하며, 죽음도 그것을 파괴 시키지 못한다.
성 경: [요14:21]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의 계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모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것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마 22:37-40).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심보다 더욱 근거 깊이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심이다.
성 경: [요14:22]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그의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성 경: [요14: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의 말씀을 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지킨다 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이르러서 더욱 완전히 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거한다(Godet).
성 경: [요14:24]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14:25]
?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이것은, 그가 이때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다음 절(26절)에 나와 있다. 곧, 그의 별세 후에 보내실 성령님을 통하여 하실 말씀은 더욱 자세하고 많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성 경: [요14:26]
?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교훈을 되살려 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님의 전날 교훈을 사도들의 기억에 되살려 깨닫게 하시는 운동이다.
성 경: [요14:27]
? 이 말씀이 윗절까지 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인사라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그는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그것과 다른 특성은, 그 가장 위험한 때에도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Barrett)
성 경: [요14:28]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엿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과 오신다고 하신 것은 그가 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13:33-36, 14:2, 3, 12, 18-19, 21, 23 참조. 그런데 그를 사랑하신 자라면 그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며(히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까닭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하시지 않은 고로 아버지보다 낮음을 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 계신 것 만큼, 그 역사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말함이다.
성 경: [요14:29-31]
? 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예수님께서 사단으로 말미암아 해를 받으시게 되는 목적이 이러하니, 곧,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순종하시는 마음으로 고난 받으신다는 것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수난은, 사단의 뜻을 이루어 주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죽으라는 것과 부활하는 것-10:17-18)을 가심으로 이루시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성 경: [요15:1-2]
?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듬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슴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성 경: [요15:3]
?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성 경: [요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성 경: [요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성 경: [요15:8]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성 경: [요15:9]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성 경: [요15:10]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성 경: [요15: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성 경: [요15: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끼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하였다(요일 3:22, 5:2).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파(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성 경: [요15: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성 경: [요15:14]
?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요15:15]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성 경: [요15:16]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성 경: [요15:17]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18-27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들에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성 경: [요15:18]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성 경: [요15:19]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성 경: [요15:20]
?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성 경: [요15:21,22]
?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증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성 경: [요15:23,24]
?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도덕적 반역이다.
성 경: [요15:25]
?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았던 것이다.
성 경: [요15:26,27]
?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성 경: [요16:1]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혹자는 '이것'이 예수가 지상 사역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교훈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H.R. Reynol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15:20-25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eyer, Godet, Barrett, Lindars). 그리고 버나드(Bernard)는 핍박 외에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은 '핍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 27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내용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은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타우타'(*)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복수로서 두 가지 이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버나드(Bernard)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15:11에도 나오지만 본 구절에서는 부정문이 뒤이어 진술된다. 15:11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이 강조되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진술된 반면 본 구절은 '핍박'이 강조된 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실족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넘어뜨리다'를 의미하는데 본서에서는 본절과 6:21에만 언급되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즉 '배교'(背敎)를 의미한다(C.K. Barrett). 그렇지만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마태복음에서는 '배교'(마 11:6;26:31)뿐 아니라 '죄를 범하는 것'(마 5:29)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징계인 '출회'(혹은 출교)와 사형을 염두에 두고 계신(2절)것 같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체포될 때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들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박해를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그와 같은 박해를 만날 때 그의 말씀을 기억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성 경: [요16:2]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 하였으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9:22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였다. 즉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시대의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사장 정보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적인 고난이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으며 주후 90년경에는 람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 II)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도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9:22 주석을 참조하라. 때가
? 이르면 - '때'로 번역된 '호라'(*)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 '호라'는 본서에서 관사와 함께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1)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4;7:6, 8, 30;8:20) (2) 이미 성취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2:23, 27;13:1;16:32;17:1). 두 가지 때의 관계를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본절의 '때'는 예수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있게 될 제자들 및 성도들의 순교의 '때', 박해의 '때'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이 관사를 생략한 것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때와 구분함과 동시에 박해가 어느 시대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들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으로 (1) 출회시키는 일과 (2)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열광적인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다(행 26:9-12). 그리고 영국에서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그외에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도 이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맹신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그들이 그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 경: [요16:3]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본 구절은 5:21의 반복으로 예수는 2절에 기록된 광신적인 핍박자들의 열심이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에게 계시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고백했다(갈 1:13, 14). 이 무지는 이성적인 지식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데서 기인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아집 및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행 3:17;고전 2:8). 어느 시대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성경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종교적 독선과 편견으로 인해 형제를 핍박하는 무지에 빠질 수 있다.
성 경: [요16:4]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이 말을 이른 것은...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예수께서는 종종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이른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2:22;13:19;16:1 ). 특히 13:19에서는 이 표현이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지만 본절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있을 제자들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은 앞날에 닥칠 자신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로부터 직접 들은 후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큰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14:26) 그들은 핍박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 '처음부터'(*, 여스 아르케스)란 표현은 '아프 아르케스'(*)와 같은 의미로 예수의 공생애 시작 또는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시점을 의미한다(H. R. Reynolds). 그런데 그때부터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있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그가 행하시는 일들뿐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핍박을 목격했으므로(11:8) 구태여 그러한 핍박에 대해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2) 예수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핍박의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으므로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제자들이 핍박의 대상이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을 때가 많았으며(14:8, 9)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14:5). 처음부터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 경: [요16:5]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는 14: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 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2), 본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간다'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이 말은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에로테세'(*)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요16:6]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도리어...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만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했으나(15:11),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찼다. 그들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14:18).
성 경: [요16:7]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실상을...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 해 알레데이아)이란 말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롬 9:1). 그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구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도 약화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 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는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성 경: [요16:8]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26의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절에서의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는 '엘렝코'(*)의 미래형이다. '엘렝코'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행 2:36, 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을 의미한다.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또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이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죄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
성 경: [요16:9]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죄에...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죄'(*, 하마르티아)는 '빗나감',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다.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이는 15: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백히 선포되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야로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했다(1:11).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15:25)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 상통한다.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1:12)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18)고 말씀하셨다. 8:24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성 경: [요16:10]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의에 대하여라 함은 - '의'(*, 디카이오쉬네)는 본서에서 본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본문에서 그 개념은 '죄'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C.K. Barrett),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의'는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 관계에 의하여 나온 말로 예수의 무죄를 의미한다. (2) 세상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되신 하나님의 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의'로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롬 10:3) 오히려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행 7:2).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의 심판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 더 확증된다. 특히 죄와 의가 재판의 상황에서 셈어의 동의어로 해석된다면 '죄책'과 '무죄함'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B. Lindars). 한편 예수께서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나님의 의'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 스스로 세워놓은 의의 규범이 불완전함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사람들이 완전한 의를 따라 살도록 책망하신다.
성 경: [요16:11]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죄와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리스도의 '무죄'와,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세상 임금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12:31;14:30).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 6:12)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단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마 8:29;막 1:24;3:11;눅 4:41;행 19:15)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셨다(히 2:14).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셨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한편 '심판을 받았다'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 예수에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5:27).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이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될 승리를 내다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5:24) 승리가 확정되어 있으므로 심판도 확정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성 경: [요16:12]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 바스타조)는 문자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옳긴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행 15;10;갈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마 16:6-12, 21-23;17:17;막 16:14).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떤 것이다(18:15-27;막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행 1:8).
성 경: [요16:13]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진리의 성령 - 혹자는 이 표현에 대해 성령이 진리를 가져와서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도 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14:17 주석을 참조하라.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사본에 따라 두 가지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1) '엔 테 알레데아'(*):시내산 사본(*)과 베자 사본(*)을 비롯한 몇몇 대문자 사본(L, W, * )과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구절을 '진리의 전 영역 안에서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하거나(C.K. 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으로 해석한다(Farrar, Fenton). (2) '에이스 텐 알레데미안'(*):몇몇 대문자 사본 (L, W, * )과 많은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바실(Basil) 그리고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도 이 독법을 지지한다.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는 헬라 고전 문학에서처럼 '에이스'가 항상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 구절을 '성령의 활동하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잘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Dela Potterie). 그리고 모리스(L. Morris)도 이 독법을 지지하면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고 본 구절을 해석한다. 여기서 어떤 독법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관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포치(Porch)의 진술대로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15:26).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편 '인도하다'(*, 호데게오)는 70인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갈구하는데 사용되었다(시 5:8;27:11;107:14;143:10).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출 13:17;수 24:3). 이처럼 '호데게오'는 '인도하다'는 의미와 '가르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Kittel) 본절에서도 '가르치다'란 의미를 취할 수 있으나 이 단어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에이스'와 잘 조화가 되지 않으므로 '인도하다'가 적당하다.
? 자의로 말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8:26;12:49;14:10).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슴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한다.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할 모든 말씀은 다 드러내셨다(4:25).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 장래 일을...알리시리라 - '장래일'(*, 타 에르코메나)은 문자적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에서 본다면 '장래 일'은 곧 닥칠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보면 '장래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앙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 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눅 7:1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기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성 경: [요16:14]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8절),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13절) 소개되었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앞에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의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심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다(눅 9:58).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의 의미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로 연결되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뒷받침된다(15절 주석 참조). 즉 이러한 부활에 대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고 또 앞으로도 드러내실 것이다. 요컨대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의 복음은 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6).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임을 나타낸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어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기초하며 또 예수의 사역의 결실을 맺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성 경: [요16:15]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보혜사 성령의 의무]
?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3:35;5:20). 삼위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고(엡 1:3-5;벧전 1:2) (2)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엡 1:7)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엡 1:8, 9;벧전 1:12).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바탕으로한 '장래 일'(13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일'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가 계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 경: [요16:16]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의문]
? 조금 있으면 - 16절과 19절 사이에서만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 사용되었다. '조금'은 본장에서는 시간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1) 일차적으로 이 단어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2) 상징적으로는 긴 시간의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는 자기의 공생애 기간이 약 3년정도였지만 자신이 이 땅에 있는 기간을 '잠시'라고 말씀하셨다(12:35). 이에 따라 후반절에 나오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상징적으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는 사역 초기에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7:6, 8, 30;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정된 '때'가 아직 남았음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바로 전후에는 여러번 '때가 왔다'(12:23;13:1;16:32;17: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의 임박성을 드러내셨다. 따라서 잡히시는 그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부활 사건의 임박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사실 7:33에서도 '조금'이라는 말이 언급되었지만 '에티'(*)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보다 덜 긴박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 나를 보지 못하겠고 - '못하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부정어 '우케티'(*)는 '더 이상은...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앞으로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시 보게 된다는 하반절과 모순을 일으키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심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예수는 여러번 이 세상을 떠나심을 시사했다(8:21, 22;13:3, 33, 36;14:4, 5, 28;16:5, 10).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므로 제자달이 예수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나를 보리라 - '보리라'의 헬라어 '와세스데'(*)는 본서에서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것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1:51). 그러나 이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가시적인 것을 본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L. Morris). 그런데 본절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영적인 실재'를 의미하는지 가시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적인 실재로서 제자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성령은 만나게 됨을 가리키지만 가시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됨을 가리킨다. 예수는 앞부분까지 성령 강림및 그의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치셨으므로 본절이 성령과 전혀 관계 없는 설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다시 본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오심 두 가지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사건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제자들이 눈으로 목도하고 체험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는 내용에서 어느 하나도 제외될 수 없다.
성 경: [요16:17]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의문]
?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무슨 말씀이뇨 - 예수가 7:33에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의문을 가진 바 있다(7:35). 아직 영적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제자들이 예수가 세상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아버니께로 가신다는 예수의 말씀 자체가 난해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난해함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적 메시야관 곧 메시야가 오시면 영원히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예수가 떠나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실지라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난해한 문제 앞에서 스승이신 예수에게 묻지 못하고 서로에게 물음으로써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인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든지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스승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했든지, 그들의 행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소경과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서로 의논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6:18]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의문]
본절과 17절의 의문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17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말씀 전부와 연관이 있지만 본절은 그 내용중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에 국한되어 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16절에서 두 번 반복된 것을 가리키는데 제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세한 것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 알지 못하노라 - '알다'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다'(*)는 경험적 지식을 의미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인 지식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두 동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으므로 본절에서 그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성 경: [요16:19]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 요한은 제자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예수가 '들으셨다'(*, 아쿠오)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셨다'고 표현하여 예수의 신적인 통찰력을 강조했다. 한편 18절과는 달리 '알다'라는 동사가 '기노스코'(*)로 언급되었다. 여기서도 요한은 그 동사가 지닌 독특한 의미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17절에 사용된 '오이다'와 반복을 피하기 위해 '기노스코'를 사용했다.
성 경: [요16:20]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진실로 진실로 - 이에 대해서는 6:47 주석을 참조하라.
?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 '애통하다'(*, 드레네오)라는 동사는 본서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으나 공관복음서에서는 몇 번 사용되었다(마 11:17;눅 7:32). 이 말은 또는 '애곡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울다'(*, 크라이오)와 비슷하게 사용된다. 여기서는 '울다'와 함께 사용되어 예수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를 따랐던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와 나눈 대화를 기술했던 누가는 그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눅 24:17). 이 슬픈 빛은 그 두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슬픔에 잠겨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죽음 후 제자들이 크게 슬퍼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각자 본래의 곳으로 흩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신 후 그의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그들에게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예수는 '슬픔'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 예수의 말씀은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처음에 슬픔의 원인이 되나 나중에는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L. Morris).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에게는 수치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예수와 일시적인 이별로 인한 슬픔을 주지만 결국에는 기쁨으로 변하여 영광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Calvin)은 십자가를 복음의 결실을 위하여 저희들이 감수해야 할 슬픔이라고 설명하였다.
성 경: [요16:21]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해산(解産)하는 여인에 비유하셨다. 해산하는 여인이 주는 일반적인 의미는 출산의 고통 뒤에는 아기가 태어난 것으로 인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본 구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아이를 낳으면'이란 구절과 같이 '호탄'(*, whenever)과 연결된 부정의 시상절(indefinite temporal clause)로서 '해산할 때마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고통 후에 따르는 기쁨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구약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가 지닌 의미를 살펴본다면 본절에서 예수가 이 비유를 사용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좀더 깊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종종 슬픔과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에 비유하였다(사 26:17-19;66:7-14;렘 4:31;6:24;호 13:13-15).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사 13:6) 후기 유대교는 이 수난기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위한 해산의 고통이라고 교리화시켰다(C.K. Barrett). 에수는 이러한 구약의 예언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적용하여 종말론적인 언어로 묘사하심으로써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부활의 사건을 미리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 - 본문이 구약의 메시야적 종말론 사상을 전제하고 있지만 태어난 '아이'를 사 9:6에 나오는 '한 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C.K. Barrett). 오히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제자들의 고통과 함께 탄생할 새로운 이스라엘(L. Morris) 곧 교회를 의미한다.
성 경: [요16:22]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 이는 16절과 19절에서 사용된 '나를 보리라'에 암시된 부활의 사상과(16절 주석 참조) 관계되어 있다. 즉 16절과 19절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것에 예수의 부활뿐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이중적 의미로 암시되어 있으며 본절에서는 예수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보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는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나타내실 것을 미리 알리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저들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 마음이 기쁠 것이요 - 성도가 얻는 마음의 기쁨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한 후:다윗은 숱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다(시 16:8-11;21:1, 6;33:21;35:9). 그리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고 기뻐했으며(합 3:18),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기버할 것을 권했다(사 66:10, 14). (2)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의 삶에 있어서 두드러진 점은 기쁨이 충만했다는 사실이다(행 2:46).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 사랑 다음으로 '희락' 곧 '기쁨'을 언급했다(갈 5:22). 이 기쁨은 모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나타나는 영원한 기쁨이다. 본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기쁨은 두 가지 종류의 기쁨 모두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기쁨을 얻게 되었으며(눅 24:52),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들의 기쁨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이 말은 제자들이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잠시 체험하는 일시적인 기쁨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말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 후 더욱 심화된 기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L. Morris). 한편 '빼앗다'란 동사가 사본에 따라 세 가지로 각거 달리 기록되었다. (1) '아페레이'(*):이 표현은 유일하게 W사본에서만 언급되었다. 이 말은 '없애버리다'란 의미로 본 구절의 의미를 매우 강화시킨다. 그러나 이 말은 필사자가 '들어올리다' 또는 '제거하다'를 의미하는 '아이레이'(*)를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닌 '아페레이'로 잘못 보고 필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아레이'(*):이 말은 '아이로'(*)의 미래형으로 몇몇 사본(B, D)의 지지를 받는다. 본절이 시제상 미래를 나타내므로 그런면으로 보면 이 단어가 적합하다는 주장이 많다. (3) '아이레이'(*):현재형으로 가장 많은 사본의 지지를 얻고 있다. 본절이 미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형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거나 미래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겠다(마 26:18;27:63;막 9:31;눅 3:9). 따라서 본절에서는 (3)의 동사가 가장 적합하다.
성 경: [요16:23]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그 날에는 - 헬라어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마지막 날', '시대의 종말'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엇다(막 13:17, 19). 그러나 본절에서 이 구절은 부활 이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봄이 바람직하다(L. Morris). '그날'은 19절의 '조금 있으면'이라는 단어와 같이 유동적 의미를 지녔다고 볼 때 '성령이 오시면'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다.
?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헬라어 '에로타오'(*)라는 동사는 16절과 30절에서 (1) '질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단어는 후기 헬라어에 있어서 (2) '복 주시길 구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서에서는 '무엇을 요청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4:31, 40, 47;14:16). 만약 (2)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본절의 의미는 후반부와 연결되어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아버지께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의 의미로 변하게 된다(C.K. Barrett). 이렇게 되면 본절은 27절과 연결되어 구절 전체가 간구에 관한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들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26절)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에게 간구한다(27절)는 것을 설명하심으로써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이름을 가지고 성부께 직접 기도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1)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구하다'(*, 아이테오)라는 동사를 수반하는 후반부와 별개의 문장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고별 설교 가운데서 계속 의문을 가졌다(13:6, 25;14:5, 22;16:17, 18). 모리스(L. Morris)는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본 구절 다음에 오는 '진실로 진실로'란 용어가 주제의 전환을 암시하므로 하반절의 기도에 관한 내용과 본 구절은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따르면 본 구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하의 근거로 (2)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1) 요한은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야 할 경우에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여 중복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2) 하반절의 '아버지께 구하는'이란 표현은 제자들이 직접 기도해야 할 대상을 밝혀주는 의미를 지닌다. (3) '진실로 진실로'란 예수의 언어 습관은 반드시 주제가 바뀌어질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강조하며 확증하실 때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4) '그날'은 미래적인 날로서 성령이 오셔서 활동하시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직접 질문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므로 구태여 이 사실을 밝히실 필요가 없었다.
?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 본 구절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26절; 15:16)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16도 본 구절과 같은 어순을 지니고 있지만 개역 성경은 각기 어순을 바꾸어서 번역하여 '내 이름'이란 용어가 '구하는 것'과 '주시는 것' 모두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그의 이름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
성 경: [요16:24]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
?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요16:25]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이것을 비사로..일렀거니와 - '비사'(比辭)로 번역된 '파로이미아'(*)는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본서에서 '비유'으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로이미아'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거나 난해한 말, 또는 상징적인 말의 형태를 가리킨다. 한편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1) 21절에 언급된 해산하는 여인에 관한 비유. (2) 14:1에서 본장 24절까지 말씀하신 것으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사들. (3) 지금까지 예수가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모든 것. 혹자는 '이것'을 세 가지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K. Barrett). 그러나 세번째의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말씀하시는 시점과 장소가 12:36을 기점으로 구분되므로 '이것'이 12:36이전에 말씀하신 것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추정은 '이것'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복수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두번째의 추정이 가장 적당하다.
? 때가 이르면...밝히 이르리라 - '밝힌다'는 동사는 10:24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예수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던 곳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서 예수는 숨기는 것과 밝히는 것을 그 이유를 깨닫는 집단과 그것을 깨닫지 못한 집단을 대조시켜 설명하시지 않고 '때'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하신다. 본절에서는 비유의 깊은 뜻에 대한 이해의 유무가 마가의 기록처럼(막 4:11) 제자이냐 아니면 막연한 집단이냐에 따라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그 계시를 밝히시는 때에 의하여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 따라 구분된다. 즉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모든 무리들(제자들 포함)과 부활을 경험한 무리들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비밀을 밝히 알리시는 '때'는 직접적으로 부활 이후 곧 성령의 오시는 때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지상 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오시는 때에 가서야 성부에 관한 것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성 경: [요16:26]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너희를 위하여..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성령을 통해서 비밀을 밝히 알게 되면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능력이 생길 것이다(23절).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실제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로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14:16이나 17:9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메이어(Meyer)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16과 17:9에서 예수가 언급하신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의 기도를 의미하므로 본절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신 이후에는 제자들의 기도 능력이 성숙하여져서 중보 기도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오히려 더 큰 모순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도 예수가 성부 앞에서 대언자로 성도를 위해 활동하신다(요일 2:1)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8:34과 히 9:24-26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성령의 오심 이전이나 이후나 계속되고 있음을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모리스(Morris)는 예수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후 문맥에서 이미 강조한 기도의 기본 원칙에 근거하여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성되었으므로 그 희생의 공로는 지속적이다. 무릎을 굻고 아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무에 의해 성도들의 기도는 보좌 앞에 상달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중보 기도는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된다. 그러나 세상에 게신 동안에는 보좌를 향해 예수가 친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17장). 따라서 본절은 성령이 오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에 의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27절은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나가서 설명해 준다.
성 경: [요16:27]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아버지께서 친히...사랑하심이니라 - 본 구절에서 '친히'(*, 아우토스)라는 말이 보통의 경우와 같이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자의적인' 또는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C.K. Barrett, Field). 본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인 것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장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설득에 의하여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랑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자의(自意)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다(요일 4:19).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했다. '없는 자들을 부르셔서 있는 자들로 만드시고, 딱딱한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 경: [요16:28]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아버지께로...왔고...아버지께로 가노라 - 요한은 본서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의 신성과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비밀과(1:1-14) 아들을 통한 구속 사역을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처럼 본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오고 가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밝히셨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 곧 세상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그러한 메시야로 삼으려는 자들의 의도가 전혀 소용없음도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심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확실한 조건이요 신호이다.
성 경: [요16:29]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제자들이 말하되...아니하시니 -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비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10:6) 예수 역시 비사로 말씀하신 후에 그날에 가셔야 제자들이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23, 25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며 특히 25절과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보인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밝히 드러날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신앙 고백을(27, 28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말씀하시는 비사의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다(C.K. Barrett). (2) 제자들은 의혹의 안개가 다 걷혀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Bernard, Lindars). 단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비사로 말씀하지 않았으며 또한 쉽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렵게 생각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표현(비유 또는 비사)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들 자체에 대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L. Morris). (3)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단지 어떠한 느낌에 의하여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제자들은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에 대한 아주 미비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Calvin). (4) 25절에서 약속한 '그때'가 제자들에게는 성취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므로 이 당시 제자들은 모든 의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H.R. Reynolds). 그러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이후에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마 28:17) 25절에서 약속한 것들이 이 시점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5) 제자들은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있어서 예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세심하게 들으면서 예기치 못했던 깨달음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자발적이면서도 만장 일치적인 고백이 그들의 입술에서 튀어 나왔다(Godet). 그런데 31, 33절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밝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체포되던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감추어진 비밀에 대하여 조금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포함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성 경: [요16:30]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의 고백]
? 지금에야...아나이다 -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이시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를 안다고 고백한다. 예수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신다(2:24, 25).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19절)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제자들은 이같은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은 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본절과 29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마 26:33).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마 26:41). 그들은 스승 앞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해는 아직 불완전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32절의 말씀은 예수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요16:31]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예수는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고(詳考)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30절)과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32절) 사이에 본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본절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를 제시한다. (1) 혹자는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이해하여 '이제는 너희가 믿는도다'로 재번역한다(Bernard, Godet, Meyer).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McClymont)는 것으로 지금까지 무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이 정도라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여겨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反語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즉 본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절을 이와 유사한 13:38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3: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요16:32]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너희가...흩어지고 - '흩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르피스데테'(*)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헤치느니라'로 번역함). 본절에서 예수는 슥 13:7에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 그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다(마 26:56).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다(마 26:33, 34).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되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그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성 경: [요16:33]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예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13:19;14:29).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15:11).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14:4). (4)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장)로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25절과 16:1 주석을 참조하라.
?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다들이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신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이다(14:27).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22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갈 5:22)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다.
? 담대하라 - 제자들이 담대(膽大)해야 할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이다(마 5:12).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단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12:31;14:30).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기었노라'(*, 니카오)란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서신서에서도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요일 2:13, 14;4:4;5:4, 5).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이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왕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셨으며(롬 5:12, 14;딤후 1:10)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고백할 수 있었다.
성 경: [요17: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예수 자신을 위한 간구]
? 이 말씀을 하시고 -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告別)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이 말씀'(*, 타우타)은 13-16장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지시하며 보다 가깝게는 16:33에 나타난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 한편 혹자는 본장 기도가 13:30, 31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R. Bultmann), 고별 설교 뒤에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을 구태여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친구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C.K. Barrett).
? 눈을 들어 -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드릴 때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시 121:1;겔 33:25;단 4:34)였으며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L. Morris). 예수는 11: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이는 공간적인 개념에서의 '위쪽'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의 위쪽을 가리키며 결국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 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는 막 14:36에서와 같이 아람어 '아바'(*)를 전제로 한 말이다(G. Dalman). 이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장에서 예수는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데(5, 11, 21, 24, 25절)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때'란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막 14:41).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7:30;8:20).
?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8:50).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 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L. Morris). 한편 '영광'(*, 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7:39;12:16, 23;13:31, 32 등).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부의 영광에 고정(固定)되어 있다(12:28).
성 경: [요17: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예수 자신을 위한 간구]
?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15:1-10)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를 의미한다는 견해(Barnard). '판'(*)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28)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 파세스 사르코스)과도 구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6:35, 37, 44, 45, 65).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 파세스 사르코스)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L. Morris).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3:35, 36). 예수는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5:27)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마 28:18-20).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요17: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예수 자신을 위한 간구]
?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성 경: [요17: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예수 자신을 위한 간구]
? 아버지께서...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 예수는 아직 그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하였노라고 고백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이미 승리를 보증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 말씀은 타당하다. 이는 시간적인 성취의 의미보다는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는 차원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일'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가 행하신 모든 교훈과 사역이며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일'과 '생명을 주는 일'로 요약된다(H.R. Reynolds). 한편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보내신 자' 또는 '일을 맡겨 주신 자'로 등장한다(3:35;4:34;5:36 등).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상의 질서를 나타냄과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10:30)을 동시에 강조한다(L. Morris). 한편 '이루어'(*, 텔레이오사스)는 뒤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19:30)라는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에 단 한번도 주저하는 일이 없으신 예수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C.K. Barrett).
성 경: [요17: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예수 자신을 위한 간구]
? 창세 전에...영화롭게 하옵소서 - 본서의 기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1:2) 기록했으며 또한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본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하는 동시에 지금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첫번째 '함께'라는 말은 성육신 이전 상태로서의 하늘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며(Lenski) 두번째 '함께'는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얻게 될 영광을 지시한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계셨던(1:1;8:58;16:28) 아들의 신성과 영광은 성육신을 통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 비하(卑下)되었다. 그는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서 완전한 인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성 경: [요17: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12:28)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버지의 일(4절)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인물 전체를 대변하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께서 나타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품성, 인격, 능력, 구속 사역, 은혜, 사랑 등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예수 자신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세상 앞에 현현(Manifestation)되어졌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신적 존재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R. Bultmann).
?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이미 그들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Beza, Calvin). (2)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들은 옛 언약의 체제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갈리킨다고 보는 견해. 이 중 하나를 확증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우나 문맥상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써 유지된다. 사실 본서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며(8:55),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8:51;14:23) 또는 '계명들'(*, 엔톨라스, 14:15, 21;15:10)을 지키도록 명령받았다. 한편 예수는 자신의 말이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 자신의 말을 지키는 자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리라고 하셨다(14:23, 24).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율법(*, 노모스)이나 구약의 계명들(*, 엔톨레)을 준수했다는 의미보다 본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1장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를 영접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요17: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지금 저희는...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 예수는 자신의 구체적인 선교 사역이 아버지에게 의존(依存)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을 앞절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본절은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말씀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란 단지 예수의 말씀'(*, 레마타, 8절)이나 '이적'등 사역에 필요한 요소들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이다(Lenski). 반면에 제자들이 '알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다알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L. Morris). 한편 '지금'(*, 뉜)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예수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성 경: [요17: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내게 주신 말씀들을...받고...아오며...믿었사옵나이다 - 헬라어 원문에서 본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여기서 '말씀'은 입술로써 이야기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개개의 말씀들을 지칭한다(3:34). 이는 말로써 전달한 사상을 뜻하고 '로고스'(6, 14절)와 구분된다. 본서에서 '로고스'는 말이라는 의미 보다는 '예수의 인격'과 관계되어 더 많이 사용되었다(6절 주석 참조). 한편 본절 속에는 다섯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나온다. 먼저, 두 개는 예수께 관한 것이며 나머지 세 개는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1) '나오다'와 '보내다'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과거로 사용되었다(Lenski). 반면에 (2) 나머지 세 개 즉 '받았다', '믿었다' 등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암시한다. 제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고서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 대한 이해와 지식으로 성장해 갔으며 그 앎(16:30)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났다. 물론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시간적 순서를 엄격히 규정(規程)하기란 쉽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 이 두 표현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순서에 관계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6:69). 본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말씀을 받음으로 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1:12).
성 경: [요17: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 본절에서 예수께서 위하여 간구하는 대상을 제자들에게만 제한시키셨다고 해서 세상을 위하여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L. Morris).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은 밀접한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Lenski), 예수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유지시키신다. 특히 '비옵나니'의 헬라어 '에로탄'(*)은 종속 관계에서 사용하는 '아이테인'(*)과는 달리 대개 동등한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신적 신분을 시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요 3:16) 궁극적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대상이다. 본장 속에서도 예수는 세상이 '믿을 것'(21절)과 세상이 '알게 될 것'(23절)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의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셨다'(1:29). 그는 세상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눅 23:34). 세상은 제자들과 달리 하나님과 대립적(對立的)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기도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필연적이며, 세상을 위한 기도는 더 이상 세상이 '세상적'이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회개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L. Morris, C.K. Barrett). 예수는 세상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외쳐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먼저 기도한다.
성 경: [요17: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내 것이온데 - 모든 피조물은 모두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는 말씀은 피조물 중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Luther).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증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의 말씀'(7, 8절)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2절), '그에게 속한 제자들'(6, 9절) 뿐만 아니라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지녔던 신적인 존재와 영광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Lenski, Luther).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신성도 예수의 것이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무이한 부자 관계로서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中保) 사역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롬 8:34).
? 내가 저희로...영광을 받았나이다 -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여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완료형은 제자들의 복종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음을 시사함과 아울러(6, 8절) 장차 제자들의 신앙 고백과 복음 사역을 통해 영광받으시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외관상 제자들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달리 특출한 신앙을 보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제자들의 장래에 대한 예수의 신뢰와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 완료형 시제의 사용을 저자가 보다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하나(C.K. Barrett) 그다지 합당하다고는 보기 힘들다.
성 경: [요17: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자연히 예수의 관심은 황량한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게 닥칠 위험에 집중되었다. 본절의 기도 내용은 특별히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승천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할 수 있다. 예수는 부활 승천 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계속 보호 인도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죽음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막간(幕間)에는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제자들을 맡기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Godet).
? 거룩하신 아버지여 - 세상의 죄악과 대조를 이루는 '거룩하다'라는 단어가 아버지의 칭호에 붙여졌다. '거룩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본질은 모든 죄와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한 아버지에게 죄악 가운데 남겨두는 제자들의 보전을 간구하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Lenski). 또한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성별을 요구하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서 세상과 성별되기를 바라는 예수의 간구를 담고 있다.
? 아버지의 이름으로...보전하사 - 헬라어 '테레오'(*)는 '조심스럽게 돌보다', '굳게 붙들다', '보호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본장에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6절)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제자들을 보전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악이며 그 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 특히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과 뜻을 가리킨다. 이후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복음 사역의 능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행 4:10-12).
? 우리과 같이...하나가 되게 - 아버지의 이름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저희를 성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가 되는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다. 예수는 고별 설교 속에서도 연합과 하나됨을 계속 강조하셨으며(13:34, 35;15:13). 본장 기도 속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21, 22, 23절). '하나가 되게'라는 표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자. (1) '하나가 되게'가 아니라 '하나로 계속 있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L. Morris, Lenski). 제자들은 이미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신 이름에 의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계속 하나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2) 제자들은 독립된 여러 개개인들로서가 아니라 연합된 하나(as a unity)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Barrett). (3)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성별되고 보호받아야 함을 뜻한다는 견해. 이중 세번째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나머지 두 견해도 보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성 경: [요17: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 지상에 계셨을 '때'를 언급하신 것은 그의 사역이 완성 단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사역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되어 있었음을 고백하며 이를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보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H.R. Reynolds). 한편 본절에서 '보전하다'(*, 에테룬)와 '지키었나이다'(*, 에퓌랖사)가 나란히 언급되었다. 전자는 6, 11절 등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나 후자는 본절과 12:25에서만 나온다. 후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러나 두 단어는 '보전'과 '보호'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동의적으로 반복되었으므로 서로의 위치가 바뀐다 해도 별다른 의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 이 말은 명백히 가룟 유다를 지칭한다. '멸망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아폴뤼오'(*)는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전한 파멸 또는 저주를 의미한다(3:16;롬 2:12;고전 8:11). 살후 2:3에서 이 단어는 예수 재림 전에 일어나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을 칭할 때 사용되었다.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종국적 운명이 멸망에 처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의 인격 자체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L. Morris). 유다는 엄연히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따라 멸망의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따라서 유다의 반역은 예언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Calvin).
? 성경을 응하게 함 -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 의사에 따라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이 예언된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바 있는(13:18) 시 41:9을 가리킨다. 혹자는 시 55:12-15 등의 말씀을 추가하기도 한다(Lenski, C.K. Barrett 등). 또한 사 57:12과 같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유다에게 적용한다 할지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성 경: [요17: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지금...내가 세상에서 -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남겨 놓는 시점에 있다(Lenski).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11절에 이어 예수는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상의 사역 가운데서 제자들을 보호하셨던 때(12절 상반절)와 떠나가시는 때 사이의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셨다.
? 이 말을 하옵는 것은 - 바렛(Barrett)에 의하면 '이 말'은 14:1-16:33의 고별 설교도 포함한다고 한다. 이 해석의 근거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의 헬라어가 사용된 15:11로서, 그곳에서는 그동안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들을 포함하여 '이 말'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옵는 것'이란 표현이 미완료 과거형이라면 고별 설교도 포함될 수 있으나 현재형이므로 '이 말'은 단순히 1-12절까지의 기도 내용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 이 표현은 고별 설교(15:11;16:22, 24)에서도 언급되었다. 그 설교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보호에 따른 기쁨이다. 예수가 잠시 제자들과 이별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하며, 성령의 강림으로 제자들은 영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므로 그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확실히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고별 설교에 있어서 기쁨의 근거다. 본절에서도 역시 같은 차원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11;16:22,2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7: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메시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 Morris). 이 '말씀'은 예수가 성부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가 여러번 자신을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표현할 때 이미 암시되었다. 한편 '주었다'(*, 데도카)는 '위임하다', '위탁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마 25:15;막 12:9) 제자들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17절)을 위임받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데도카'는 완료형으로서 제자들이 이미 받은 말씀과 연관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제자들에게 그동안 예수가 가르치신 내용들에 대한 것이다.
?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 제자들이 미움을 받을 것을 대화식(對話式)으로 말씀하실(15:18, 19) 때와는 달리 기도 가운데서 제자들의 고난을 위해 기도하심은 자기에게 소간 자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 본 구절을 혹자는 '(내가 세상적이지 않음같이) 저희도 세상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했다(Berkley). 그런데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대로 번역한다면 '(내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듯이) 저희도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습니다'로 해석된다. 이 말은 출신이나 소속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도 자신과 동일한 출신과 소속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치신다. 제자들이 이러한 신분을 소유하게 된 근거는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1:13) 또한 영으로 거듭났다는데(3:3-8) 있다(C.K. Barrett).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에 의하여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15:19) 예수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다.
성 경: [요17: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 예수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는 세상에 머물러 계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에게 위임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여전히 세상 안에(in the world) 있어야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나 예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다. 혹자는 예수의 이와 같은 표현이 당시의 종말론적 기대 즉 예수 재림시에 있게 될 휴거(repture)에 대한(살전 4:17) 사상을 수정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Bultmann, Barrett). 그러나 이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강조된 것은 종말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바렛(Barrett)은 본 구절의 표현이 성도와 세상의 분리를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본서를 당시의 이단(異端)인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했으며 또한 본절이 세상과 엄격한 분리를 반대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아무튼 고전 5: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세상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성도들이 그렇게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 - 이 말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간구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구속이 있을 것에 대한 기도를 의미한다(Bernard) '악에'의 헬라어 '에크 투 포네루'(*)에서 '포네루'가 남성도 되고 중성도 되므로 본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남성: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악한 자에게 넘어간 가룟 유다의 사례와(요 13:27;눅 22:3) 예수의 고별 설교 가운데 언급된 이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기사(12:31; 14:30; 16:11) 같은 부분을 근거 구절로 삼는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의 서신서에 언급된 '포네론'(*) 또는 '포네루'(*), (요일 2:13, 14;3:12)가 의미상 '악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 본 구절도 '남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Meyer, Lenski, Barrett, Morris, Macgregor, Davey). 공동 번역이 이 견해를 취한다. (2) 중성:이렇게 해석하는 자들은 세상에 실제로 악이 있다는 것과 또한 세상 자체가 악하는 것(요일 5:19)을 들어 악의 세력(power)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Luther, Calvin, Hengstenberg, Godet). 개역 성경도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혹자는 악이 이세상에 존재하는 무신론적 경향성이라고 주장한다(Reynolds). 그러나 본 구절이 '남성'이나 '중성' 어느 것으로 해석될지라도 의미상 큰 차이가 없다. 한편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레세스'(*)로 '지키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 전체를 헬라어 본문에 따라 번역하면 '악(한 자)에게서 보호하시기 위함'이 된다. 개역 성경은 헬라어 본문에 없는 '빠지지 않게'라는 말을 첨가시켜 '보전하다'라는 말을 강조시키고 있으나 본 구절에 사용된 전치사 '에크'가 '~에서 벗어나(밖으로)'를 의미하므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성 경: [요17: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14절에 언급된 말씀이 어순만 바뀌어서 반복되고 있다. 즉 두 절에서 '우크 에 이신'(*)와 '여 투 코스무'(*)의 순서가 뒤바뀌어졌다(개역 성경은 변화가 없음). 14절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로 서술되었지만 본절은 악으로부터 보전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 경: [요17: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성별'(consecration)에 대한 것으로 세상과 분리(分離)된 삶을 의미한다. '거룩하게 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하기아조'(*)는 '깨끗하게 하다'를 뜻을 가진 '카다리조'(*)와 다른 측면에서 사용된다(Reynolds, Bernard)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깨끗함(purification)을 받았다(15:3). 물론 그들이 깨끗함을 받은 것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분리된 삶을 의미하는 '성별'과는 다르다. 이미 깨끗하게 된 제자들은 진리 안에서(*, 엔 테 알레데이아) 깨끗게 된 그 신분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지금 제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성부께 간구하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예수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16절) 그 자신과 같은 거룩함이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한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를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되었으며(렘 1:5)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다'(출 28:41).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세상에 보냄을 받으심 같이(10:36)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파송하실 때에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진리'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매개체이며(요 8:32) 거룩하게 하는 실행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16:13)이시다(Bernard).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가 지상 사역동안 선포하셨던 것이며 성령은 그 선포된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신다.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본절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시만이 성별을 가능케 한다(L. Morris).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생각하시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동질(同質)의 진리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예수에 의하여 선포되어 현실 가운데서 '진리'로 나타나신다(Reynolds). 한편 본절에서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앞의 '진리'와 구별시키기 위함이다. 즉 상반절의 '진리'와 구별시키기 위함이다. 즉 상반절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그 말씀이 '참되심'을 의미한다.
성 경: [요17: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보내었고 - 제자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강조법으로 사용된 '나를'(*, 에메)과 '나도'(*, 카고)가 '보내심'의 상관 관계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즉 예수가 성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아 세상에 오심같이 자신도 역시 제자들에게 서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성부에게서 받은 사명을 제자들도 수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자들 스스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을 때에야 제자들은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 특히 혹자는 본 구절 가운데서 '보내신 것같이'가 방법에 있어서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유사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두번 반복된 '보내다'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펨포'(*)와는 달리 어떤 사명을 부여해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내신 것같이'는 사명을 주는 방법에서 뿐 아니라 보내시는 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 두번 언급된 '보내다'는 헬라어 본문에서 둘 다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즉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아 보냄을 받아 활동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미 이전에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것처럼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순된 진술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에게 사도적(使徒的) 임무를 부여하셨다(마 10:5;막 3:14). 그렇지만 이 임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20:21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시 현재형을 사용하시어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과거에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도적 임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더 나아가서 제자들이 이 후에 그 사명에 따른 삶을 살게 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한 예로 다윗은 왕으로서 인정되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실제로 왕으로서의 임무를 시작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삼상 16:13;삼하 2:7).
? 세상에 - 예수는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은 사역의 장소를 지칭하여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하셨다.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립(對立)된 영역을 뜻하며(8:23;18:36) 어떤 때에는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인격체로 묘사되기도 한다(14:27). 이처럼 요한은 '세상'을 주로 그리스도와 대립된 것으로 설명한다(1:29;요일 4:4;5:4, 5,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다(3:16). 이런 점에서 예수는 이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계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시고(13:34;15:12, 13), 기도에서도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이지만(13:1) 제자들이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사명도 함께 강조되고 있다. 이 사명에 따라 세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룩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초대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파송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는 동일한 사명을 갖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Reynolds, C.K. Barrett, 케세만).
성 경: [요17: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제자들을 위한 간구]
?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 예수는 10:36에서 자신이 성부에 의해 거룩하게 되심을 언급하셨으나 본 구절에서는 자기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여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70인역(LXX)에서 '거룩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조'(*)는 다음 두 경우에 사용되었다. (1) 제사 임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을 성별하는 경우에 사용하였으며(출 28:41;29, 1, 21) (2) 또 하나는 희생 제물에 대한 성별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출 28:38;민 18:9). 본절에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가졌는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그 예식을 집행하는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거룩하게 하심은 갈보리의 언덕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혹자는 예수께서 '내가 내 자신을 아버지께 거룩하게 하여 드린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구약의 희생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다(Lenski). 그러나 그는 자의적인 죽음과 속죄적 죽음으로서의 거룩하게 하심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 바렛(Barrett)은 '위하여'(*, 휘페르)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막 14:24)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막 1:45) 등과 같은 성만찬적인 용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예수의 거룩하게 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15:13) 자의적인 대속적 죽음이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자아 성화'(自我聖化)의 비밀이라고 설명했 다(Luthi, L. Morris).
?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 -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의 죄를 씻는 일차적인 목적에 머물지 않고 '히나'(*)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을 제시한다. 그 목적은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거룩은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의 성결은 아버지의 은사에(17절)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살후 1:12) 자신의 사역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한편 본 구절에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는 달리 관사(冠詞)가 없다. 이를 전치사 '엔'(*)과 함께 부사적 용법으로 해석한다면 그 뜻은 '진실로'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의 의미가 상반절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는 17절 상반절의 '진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관사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과는 다른 방법, 즉 예수에 의해 선포된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요17: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이 사람들만 - 이 말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사람들로서 예수의 열 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바렛(Barrett)은 이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룟 유다는 제외시켰다. 그런데 본장의 기도가 만찬에서 행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18:1을 볼 때 만찬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만찬 후 곧바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저희 말을 인하여 - '말'(*, 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 전체를 드러내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Bernard).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에 의하여 전달된 메시지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본질적으로 '진리'이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원문상 진리 '안에서'(19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성도들의 믿음은 제자들의 말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의 믿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에서 기인하듯이 그들의 보내심을 받음(18절)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지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미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진술했다. 이처럼 교회의 기초(基礎)는 말씀이며, 이 말씀이 전파될 때 교회는 형성된다.
? 믿는 사람들 - '믿는 사람들'은 현재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미래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Turner, Bernard). 미래적 의미를 현재 분사로 나타내는 용법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어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이 말은 '믿게 될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들은 미래형으로 번역했다(KJV, Scoffield Bible, Jerusalem Bible, MLB, NIV, LB).
성 경: [요17: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아버지께서 내 안에...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 본절에는 '히나'(*)가 이끄는 세 가지의 목적절이 나온다. 이 세 목적절은 모두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에 연결된다. 본문은 그중 첫번째 '히나'절로서 성도 공동체의 연합을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어 그의 일을 하시며(14:10) 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두분은 하나로 존재하고 일하신다(10:30).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듯이(11절) 저들의 증거를 통해 얻게 될 사람들, 즉 교회 역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다(C.K. Barrett). 그러나 하나됨이 의미가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듯이 교회내의 각 지체들도 나름대로의 다양한 특성을 지니는 가운데 통일성(統一性)을 띠는 것이다(15:1-8;고전 12:12, 13).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는 질적 측면에서 엄연히 구분된다.
?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는 두번째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어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 안에'(*, 엔 헤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역으로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들 안에와서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점을 시사한다(14:23).
? 세상으로...믿게 하옵소서 - '히나'(*)가 이끄는 세번째 목적절은 앞의 두 목적절의 결과로 등장한다. 성도 공동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시는 내용이다. 물론 이는 세상 전체가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15:20, 22, 24). 다만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비록 불신 가운데 있지만 장차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될 자들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의 하나됨은 성도들의 배후에서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능력과 모든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성도들은 예수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풍성한 은혜와 연합(聯合)한 증거들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 경: [요17: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내게 주신 영광을 - 예수의 영광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영광(5절)과 지상의 모든 사역을 다 마친 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들을 모두 포함한다. 특히 예수는 마지막 설교(16:14 주석 참조)와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십자가와 영광을 분명하게 연결시키셨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이 행하는 모든 사역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십자가를 통해 그 영광의 역설적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 제자들 역시 아들의 영광을 소유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영광이요 영원히 사랑 가운데 거하는 축복이다(딤후 2:12;계 20:4).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 속에서 나타났듯이 제자들의 영광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가운데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믿음안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순종과 겸손과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도들의 십자가이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제자됨의 사명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Barclay). 따라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획득한 영광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나타낼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24절).
성 경: [요17: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21절의 문장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21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내주하는 것 속에 제자들도 함께 거한다는 논조(論調)로 전개되지만, 본절은 보다 수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과 아버지의 상호 연합을 위한 중보적 매개체로서의 아들을 설명하면서(Lagrange) 세상 가운데서 사랑을 나타내야 할 제자들의 온전한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L. Morris).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또한 아버지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14:6).
?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 이 구절은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2절)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자들이 세상에 드러내어야 할 온전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온전함'(*, 테텔레이오메노이)은 '수행하다', '완성하다'(4:34;5:36;17:4) 등의 의미이며 성경 말씀의 '성취'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19:28). 제자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일체(一體)의 수중에로 지향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온전함을 이루라는 것은 하나가 되기까지 온전히 장성하라는 뜻이며 또한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종적인 연합과 완성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것이지만 교회는 그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C.K. Barrett).
?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 - 여기서 '알게'는 21절의 '믿게'와 동의어가 아님이 분명하다. '알게'라는 말은 믿음에 이르는 것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인정까지 포함한다.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을 보면, 설령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감탄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려는 계획과 연결된다(빌 2:10). 한편,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을 보내심이 불가분적 관계에 있음과 같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 역시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基礎)할 때에만 가능하다.
성 경: [요17: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 '나 있는 곳'이란 이 세상의 어느 곳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다. 예수는 앞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13:33)고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후에는 따라 오리라'(13:36)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결국 미래의 시점을 염두에 둔 것이며, 종말론적인 소망에 관한 것이다(C.K. Barrett). 예수께서 세상에 더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고(11절) 말씀하심으로 임박한 십자가의 수난과 영광을 예고하신 바 있다. 이제 제자들을 당신이 계신 곳에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 뒤에 있을 영광에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L. Morris).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미 영광에 참예하였으나(22절)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보좌에 앉으신(계 3:21)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 창세 전부터...내게 주신 나의 영광 - 22절에서 '영광'은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과 주로 연관된 것임에 반해(22절 주석 참조) 본절은 미래에 회복될 영광에 강조점을 둔다. 이 영광은 그가 창세 전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의미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을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성도들은 지금은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으나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보게 될 것이다(계 22:4).
성 경: [요17: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의로우신 아버지여 - 요한은 형용사 '의로운'(*, 디카이오스)을 하나님에게만 사용하고 있다(C.K. Barrett). 이 칭호는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신구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사항이다(렘 12:1;시 116:5;119:137;롬 3:36;요일 1:9;계 16:5). 이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불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는 칭호이며, 주님은 아버지의 의로우심을 선포하심으로 아버지에 대하여 무지한 가운데 있는 불의한 세상을 단호히 정죄(情罪)하고 있다.
? 세상이...알지 못하여도 - 세상의 무지는 두 가지로 지적되는데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예수는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낸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또한 세상의 믿음을 위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23절). 본문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나 세상은 아들을 거부함으로 여전히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제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재된 지식이다.
성 경: [요17: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주제2: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간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본성을 의미하며 아들의 지상 사역 가운데서 가장 확연히 나타났다(6절 주석 참조). 아들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알게 하리니'는 장래의 사건을 암시하는데 혹자는 바로 이후에 있을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L. Morris) 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경이 증거할 사역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Reynolds, C.K. Barrett). 우리는 본문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 - 본절 마지막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마무리하는 내용이다. 이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고 말씀하신 마지막 설교의 끝 부분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한 제자들이 장래에 알게 될(상반절 주석 참조)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마 28:20).
성 경: [요18: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 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 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말한다. '시내'로 번역된 '케이마르로스'(*)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 '동산'(*,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14:32;눅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들'을 의미하는 '코리온'(*)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라는 말로 보아서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제한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한다.
?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제자를 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성 경: [요18: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 '늘 하시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즉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요18: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 사람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 오클로스)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 죽게한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속(下屬)들(*,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마 26:47;막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 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14일)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이 본절에 더적합한 것 같다.
성 경: [요18: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부여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스'(*) 대신 '이돈'(*, '깨닫다')을 사용해야 한다고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지와 관련된 용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했다는 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알다')와 구별이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판타 타 에르코메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
?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성 경: [요18: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 나조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19:19), 그리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1:45,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내가...이다'(*,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3:14) 간결하면서도 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예수를 체포케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성 경: [요18: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에고 에이미 호온)라는 출 3:14의 70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성 경: [요18: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성 경: [요18: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막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성 경: [요18: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체포되신 예수]
?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킨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요18: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잘려진 말고의 귀]
?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 '바요나 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42;21: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센'(*)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요18: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잘려진 말고의 귀]
?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 표현 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마 16:21-23).
성 경: [요18: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 선 예수]
?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점은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해당하는 본절의 헬라어 '킬리아르코스'(*)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 지휘관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견해와 같이 단순히 'Captain'이라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 '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 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 두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온 자가 '천부장'인지 직급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란의 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시켰으므로 '천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 잡아 결박하여 - '잡아'(*,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란 말로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묶는다'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것은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체포 현장을 묘사함과 동시에 11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단호한 모습과 함께 예수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성취를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성 경: [요18: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 선 예수]
?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나 요한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안나스는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장을 맡았었다면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적이었으나 로마의 지매가 시작된후 대제사장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자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자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 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언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람으로 짐작된다.
? 그 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있는데 '그 해'라는 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역사적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C.K. Barett).
성 경: [요18: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 앞에서 선 예수]
?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 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11:51, 52).
성 경: [요18: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19:38)이나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저자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요한 자신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Lenski, Robertson)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 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어 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 암시해준다.
?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여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여기서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는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형제'를 뜻할 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제사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제사장과 관련된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아울렌)이 울타리 안의 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 장소 안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서 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가 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뜰'이라고 진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성 경: [요18: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왔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내부의 사정을 그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3) 들어가기 힘든 그곳에 베드로도 확실히 들어갔음을 밝히기 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아 여기서는 첫번째 추정이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성 경: [요18: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는 비슷한 표현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 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여종이라는 점이다. 하찮고도 연약한 여종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13:37).
? 너도...하나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는 의미로 여종의 질문을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많은 사람의 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성 경: [요18: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했다. 그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은 매우 오래된 말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는데 이 때문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등장시킨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 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성 경: [요18: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대제사장 -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해의 공식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며(13절) 예수가 붙잡혀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는 본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라고 한다(Godet, Westcott). 이러한 해석은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 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 앞에서 의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 안나스에 의한 예비심문을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가야바에 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전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의 인격 곧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제자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규합하여 무력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주석 참조). (2) 예수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인 사상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요18: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드러내어 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예수는 제자에 관한 것은 대답하시지 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예수는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 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안나스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 세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공개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회당과 성전 -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7:14;8:20에 언급된다.
?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 회원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성 경: [요18: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예수는 안나스가 질문을 통하여 포착하고자 의도한 어떤 내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스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구체적인 물증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있는 예수는 안나스의 교활한 음모에 일침을 가하면서 증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 예수의 이 요구는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수를 심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성 경: [요18: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 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라피스마'(*)의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 때리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로 뺨을 맞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랍비적인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 예수의 뺨을 친것은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요18: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 그것은 안나스의 침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 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 정당한 발언을 한 것일 뿐이었다.
성 경: [요18: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안나스의 심문]
?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 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를 강조했다. 아마 요한은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
성 경: [요18: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거듭되는 베드로의 부인]
? 사람들이 묻되...아니라 하니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 두번째 질문자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눅 22:54-62). 이에 비해 요한은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까지 했다(마 26:72). 모든 인류를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지(마 26:33, 35) 저버리는 베드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성 경: [요18: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거듭되는 베드로의 부인]
?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 따라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 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자 자신이 말고의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 압박해 왔다. 이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더 강하게 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성 경: [요18:2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베드로가 또 부인하다]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26:74).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전한다(마 26:75;막 14:72;눅 22:62).
성 경: [요18:2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쓴다(마 26:57-66;막 14:53-64;눅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 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 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행 23:33).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 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 4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법함으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행 10:28).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때까지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마 26:17-30;막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데 혹자는 이 차이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잔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 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 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14에서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범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 경: [요18:2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 요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장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맡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특히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범을 인정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28절) 다소 뜻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어야 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심문을 시작했다.
?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절차를 좇아 먼저 고발자에게 피고의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성 경: [요18:3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카코포이오스'(*)를, 나머지 대문자 사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코코포이온'(*)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어느 독법이 정확한지 결정지을 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이다')의 미완료 과거형이 사용되었으므로 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 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결정한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로마 법정은 식민지 국민의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그것이 전혀 구체성이 없는 '행악자'라는 죄목이었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행악자'라고 고발하는 이 장면에서 '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끝내 계시를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계시를 눌러 이길 수도 없다(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속적으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을 사용했다. 이 표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꾀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성 경: [요18:3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만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성 경: [요18:3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마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행을 선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마 20:19).
성 경: [요18:3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다시 관정에 들어가 -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기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 갔다 하며(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 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공관복음서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저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하는 자라고 고발하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번째 고소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가르쳐 왔던 영적 왕에 대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 질문의 요지는 예수가 무력으로 유대를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왕이냐는 것이다.
성 경: [요18:3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진실한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이 말이 대망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교적 의미로 빌라도에게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것이다.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하겠다.
성 경: [요18:3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심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빌라도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 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 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떠밀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재판을 이끌어간 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성 경: [요18:3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라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 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빌라도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하더라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 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 내 종들이 싸워 - 예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니 않는 것임을 설명하는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데 유대인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 경: [요18:3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운데 '내 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럴 경우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더 타당할 것이다. 혹자는 이 빌라도의 질문이 '그래도 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 주장하지만(Morris) 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은 '네 말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롬1:4). 그래서 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48편). 그리고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택함을 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고백했다(삿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되신다(고전 15:25).
?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6:28). 이것은 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 본 구절 바로 앞에 진술된 '이를 위하여'(*,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4:6).
?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은 잘 조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 경: [요18:3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소문]
? 진리가 무엇이냐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가 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본 구절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 회의주의(Scep-ticism)에서 비롯된 질문이다(Godet). 그들은 이상주의적이고 사변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후 예수의 대답을 듣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2)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적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 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공정한 재판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실대로 유대인들에게 전했다.
성 경: [요18:3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빌라도는 그렇게 하지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 함으로써 우유 부단한 그의 성격을 노출시켰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8).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유대인의 왕을...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수도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성 경: [요18:4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수난]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바라바라 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성 경: [요19:1]
?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 빌라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채찍질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하게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여 보려고 꾀한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의 나약하고 야비한 수단이다. 이 채찍질은 로마 형법에 의한 것인데, 외국인들이나 종들에게 주는 형벌이다. 이런 형벌을 할 때에는 죄수를 벌거벗겨서 기둥 같은데 매고 채찍으로 마구 때린 것이다. 이렇게 매 맞는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 53:5에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매를 맞으신 것은 아무런 법적 정죄 없이 당하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불법 취급을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에게 하늘의 의(義)를 입혀 주신 것이다.
성 경: [요19:2]
?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 (1) 가시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나(창 3:18), 그가 가시 면류관을 쓰시게 된 것은, 그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받으신다는 표이다. 그가 이러한 고통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신 이유는, 인류가 사상적(思想的)으로 많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2) 군병들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왕이심을 조롱함이니, 참된 왕을 부인하는 악행의 극단이다. (3) 빌라도가 군병들의 이 행동을 허락해 둔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불의한 수단이요, 나약하고 비루한 타협이다. 진리는 진리로만 세워지고, 불의한 수단이나 나약한 타협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 자색 옷을 입히고 - "자색(紫色)옷"은 왕이 입은 옷인데, 이런 옷을 예수님께 입히는 것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조롱하는 악행이다. 마태 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었다고 한다(마 27:29). 그것은,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게 하여 그를 조롱함이다. 그리고 다시 마태 복음에는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기록이 있으니, 곧,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밸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에 치더라"고 하였다(마 27:29-30). 그들이 예수님에게 "평안할지어다"하고 거짓되이 인사한 끝에 때렸으니, 이것은 극악한 조롱이다. 거짓된 인사도 큰 조롱인데, 그런 인사를 하면서 때린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행이다.
성 경: [요19:3]
?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다. 그런데 그가, 군병들로 말미암아 왕권에 대한 조롱을 당하셨다. 그것은, 참되신 왕이 도리어 가짜 왕 취급을 당하심이다. 그것은, 가장 가슴 아픈 멸시와 천대였던 것이다.
성 경: [요19:4,5]
? 빌라도는, 매 맞아 비참한 모양을 이루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 거리로 보여 주었다. 4 절에 "보라"는 말(* )이 있고, 5 절에도 "보라"고 한 말이 있다. 예수님을 때린 것도 그에게 대한 극단의 모욕인데, 그렇게 모욕 당하신 그의 모습을 구경 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극단적 모욕의 이중인 것이다. 빌라도가, 매 맞아 상처 입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시킨 목적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동정을 얻어서 진리를 세우려는 모순이요, 이 세상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모순이다. 이렇게 빌라도는 나약한 타협을 문제 해결의 최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 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빌라도의 그릇된 사상을 책망하심이다.
성 경: [요19:6]
?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지독한 미움을 표시한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므로 문제 해결을 보려던 빌라도의 악한 타협주의는, 이렇게 그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리를 위한다는 자가 비진리와 타협하면, 언제나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무너뜨린다.
?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 이 말도 빌라도가 결단의 취지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말로써 한 번 더 나약의 태도를 나타낸 것 뿐이다. 그것은, 다음 귀절에 유대인들의 태도가 빌라도의 약점을 알고 굳세어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성 경: [요19:7]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빌라도에게 대한 그들의 협박이다. 그들은 이제 빌라도의 나약함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법이 있다" 함은, 하나님을 훼방한 자나 거짓 선지자를 죽일 수 있는 종교적 법이었다(레 24:16; 신 18:20).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이렇게 악한 죄인으로 여겼다. 이 때에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히 컸을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그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사 1:12-14 참조.
성 경: [요19:8]
?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 이 말씀은, 빌라도가 이 재판에 있어서 무리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의리대로 결단하지 못하는 약한 태도를 지적한다. 빌라도는 이 재판에 있어서 줄곧,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이 귀절은 말한다. 그가 더욱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유대인들의 태도가 강경하여 재판건에 그를 의뢰하지 않을 듯한 기세를 보인 까닭이며(7절 상반), 또 (2)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는 유대인들의 말(7절 하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의 그릇된 종교적 관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어떤 신(神)에 대한 칭호인 줄로 짐작은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는 일도 그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판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예수님에게 가서 심문한 것이다.
성 경: [요19:9]
? 너는 어디로서냐 -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내력을 물음이다. 곧,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말("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알아 보려는 질문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진실한 질문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벌써 빌라도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바 있는데(18:33-37), 또 다시 질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불신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시지 않았다. 10-11 - 이 두 귀절은, 최고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빌라도의 인본주의와,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신본주의를 대조시킨다.
성 경: [요19:10]
?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빌라도는 이 말로써 자기의 무식과 교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간인 자기가 최후 단안을 내릴 수 있는 권세의 소유자라고 자처한다. 그것은, 모든 권세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다. 이런 무식은 그에게 교만을 낳아 주었다. 언제나 교만은 무식의 아들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겸손해지는 법이다.
성 경: [요19:1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빌라도는 사람만 보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정치적 권세도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빌라도의 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는 뜻이라고 함(Calvin). (2)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빌라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잘못 사용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그 죄는, 받은 권세 없이, 또는 예수님을 잡도록 강요된 일도 없이 행동한 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보다는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였다(Pilatus Missbraucht die ihm gegebene Macht und das ist Schuld; sie ist geringer als did Schuld dessen, der ohne * handelte, den also nichts notigte, sich an Jesus Zu vergreifen.- Der Evangelist Johannes, p. 345).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 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은 더 크다. 이 해석이 더 유력하다. 이 말씀을 보면, 부패한 시대에 옳지 않은 교역자들이 정권에 붙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함이, 무엇보다 큰 죄악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19:12]
?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공포심에 끌려서 그를 넣으려고 다시 애쓴 것이다. 빌라도는, 한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것이다.
성 경: [요19:13]
? 빌라도가...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 "박석"은 "돌로 깔은 곳"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 때 유대인들이 쓰던 말로는 가바다(* )라고 하는데 언덕을 의미한다. 이곳은 아마도 돌을 깔아 놓은 높은 장소를 가리킨 듯하다.
성 경: [요19:14]
?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 여기 이른바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은, 얼른 보면 모순된 듯하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벌써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문제될 듯하다. 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참 유월절"의 준비일 곧, "참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 되는 날이라는 뜻이라 하고(Grosheide), (2)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곧, 금요일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Lenski). 이 둘째 해석이 옳다(마 27:62; 막 15:42; 눅 23:54). "때는 제 육시라." 이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시각이다. 막 14:25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을 "제 삼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 받으신 시간을 "제 육시"라고 하였다. 여기 이 두사건에 있어서 시간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요한은 로마의 시간 계산법대로 말한 것이다. 로마의 시간 계산법(오늘날 우리의 시간 계산법과 같음)대로 오전 6시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요 19:14-16)(마 27:1-2 참조), 골고다까지 끌려 가시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눅 23:26-31). 그 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오전 9시 였다. 오전 9시는 유대의 시간 계산법대로 "제 삼시"이다(막 14:25).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최후 판결을 받으신 시간을 말하였고,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을 말하였으니, 그 두 기록이 시간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성 경: [요19:15]
?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 "저희"란 말은 일반 유대인들, 곧, 군중을 가리킨 것이다(12절). 군중은 저렇게 대제사장들이나 기타 종교 지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선한 일들을 본 적도 있었으련만, 그들은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렇게 부화 뇌동하여 대제사장들의 시키는대로 악하게 움직인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은 간교하게도 저렇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사랑하여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이사를 미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가장 미워하는 것 만큼, 다른 미운 사람들은 모두 다 저희에게 한편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도의(道義)나 양심이 없는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진리나 도덕의 일정한표준이 없다.
성 경: [요19:16]
?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 빌라도는, 자기로서 책임 지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책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 경: [요19:17-37]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말한다. (1)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나아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운 것은, 예수님의 괴로움을 위로하는 효과를 못 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불행한 자로 알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행한 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른 나무(자기 죄로 인하여 망할 수 밖에 없는 악인)가 아니었고 "푸는 나무"였다. 그는, 생명 나무 곧, 의로우신 중보자(中保者) 되시는 주님이시다(눅 23:28, 31). (2) "해골이라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두드러진 언덕이었으며, 큰 길가에 있어서 행인들이 익히 보며 지나던 곳이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높은 데서 전파되어야 하겠고, 큰 길 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히 감추일 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러내어 선포될 일이었다. (3) 또 다시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이 두 강도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것도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악한 죄인처럼 취급 받으신 사건이다(눅 23:33). (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그의 옷을 벗기었다(23-24). 그것은 그에게 큰 수치를 끼침이었다. 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은 의(義)의 옷을 입게 하신다.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시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다(막 27:34). 그가 그것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가장 중요한 속죄 제물을 드리는 그 시간에 최후까지 깨어 있고자 하신 까닭이었다. 그 시간은 중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때니 만큼, 마취제로 취함이 되어서는 안될 때였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당하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다 받으시려고 깨어 계시기 원하셨다. (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그의 죽으심이 높이 들리시어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저주의 죽으심을 의미한다. 구약에 말한대로 나무에 달려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다(신 21:23). 그가 우리를 대신하셔서 저주를 받으신고로 우리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된다. (7) 마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안이 여섯 시간이었는데(막 15:25, 34, 37).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다(막 15:33; 마 27:45). 그것은 인류의 대표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다. 빛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선물로 주신 것이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다. 그런데, 이제 빛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의 진노로 충만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영원한 진노는 없어졌다.
성 경: [요20: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미아)은 '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 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를 바르는 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의 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성 경: [요20: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마 28:2-7; 막 16:5-7; 눅 24:4-7)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관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 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으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성 경: [요20: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베드로와...무덤으로 갈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9절). 여기서 '갈새'(*,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 초문의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몰랐을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은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덤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성 경: [요20: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에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을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성 경: [요20: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구푸려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 세마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킨다(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帳)(출 26:1), 귀족의 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성 경: [요20: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성 경: [요20: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그메논'(*)은 '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 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현에서 '딴'(*,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능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20: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을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동사를 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 제자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성 경: [요20: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아들]
? 저희는 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성 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 눅 24:44-47 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성 경: [요20:1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눅 24:12).
성 경: [요20:1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하라.
성 경: [요20:1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막 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 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요20:1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눅 24:5, 6).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성 경: [요20:1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전 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요20:1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 동산지기. -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성 경: [요20:1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마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말씀을 연상시킨다.
?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뜻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17절)
성 경: [요20:1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법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이다. 그러나 불트만(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 말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에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트'(*,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두려워 말라')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되는 경우에만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행동화된 이후이건 혹 행동화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 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의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
성 경: [요20:1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대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4:8-11).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성 경: [요20:1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계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골 2:16). 그들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들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 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 서서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눅 24:38-36)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록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을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있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 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는 '평화', '화평', '복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때(삼상 1:17;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14:27) 이해된다. 아마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성 경: [요20:2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혼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39, 40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20:2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아버지께서...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34; 5:36, 38;6:57;7:29;8:42;11:42;17:3,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혹자는 13: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繼)된다.
성 경: [요20:2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테'(*)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 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성 경: [요20:2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 2:6, 10). 본절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이끌려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즉 사도들에게는 복음 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요20:2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이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뜻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고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적인'의 뜻인 것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 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현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성 경: [요20:2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 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은 '혼적','표'(print, 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 '위치'를 뜻하는 '토폰'(*)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성 경: [요20:2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다(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성 경: [요20:2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고전 6:6;14:22과 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 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성 경: [요20:2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 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신 분이다(17:5).
성 경: [요20:2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성 경: [요20:3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본서의 기록 목적]
?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록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행 4:30).
성 경: [요20:3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본서의 기록 목적]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를 소개할 때(1: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49), 그리고 예수 자신이(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현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18:36).
?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 경: [요2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그 후에 - 이는 20:26-29에 이어지는 사건을 도입하는 문구로서, 구체적이고 정확한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20:26-29의 현현 이후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고 본다(Tenney).
?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발해주고 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6:1), '긴네렛 바다'(민 34:11),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눅 5:1)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 나타내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하면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20:16, 17), 두번째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20:19-23)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20:26-29), 그리고 지금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소재가 물고기라는 점에서 눅 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Harnack, Bernard)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기글 잡지 못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계속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눅 5장에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보도된다.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나 여기에 오는 이야기는 지상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성 경: [요2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함께 있더니 -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J. Haubleiter). 또한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20:19 주석 참조). (2)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3)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다(마28:10, 16주석참조).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며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한 점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성 경: [요2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 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고 이 이야기가 복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穩全)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Sanders). 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며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 성공을 거둔 것과(6절)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도적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하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장 좋은 시간이 밤이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Barrett).
성 경: [요2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인데,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프로이'(*)의 용법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자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눅 24:16의 상황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 바닷가에 서셨으나 - 여기에는 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요2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얘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며(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Lenski).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9절).
? 고기가 있느냐...없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가 결합된 것으로 '떡과 함께 먹는 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니까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성 경: [요2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한 추측은 본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 뎌시오스)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여퀴에인)는 말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6:44;12: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응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수 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 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성 경: [요2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5절 주석참조).
성 경: [요2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오십 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6절)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은 '플로이온'(*)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Robertson).
성 경: [요2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15절 주석 참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151-19절).
성 경: [요21: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L. Morris). (2)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6:1-13),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요21: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사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어거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본다(Hieron).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눅 5:6).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요21: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조반을...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의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이 바로 그 첫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한 듯이 보인다(Godet).
성 경: [요21: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릉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과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11절의 '큰 고기'(*,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성 경: [요21: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물고기 153마리를 낚음]
? 세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20:15-17;19,20;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메데테스)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신약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바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에 관한 기사들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 경: [요21: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기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성 경: [요21: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구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 경: [요21: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모든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만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성 경: [요21: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이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 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 I 35), 이레니우스( ,79) 그리고 키푸리안(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성 경: [요21: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 12: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 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분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 나를 따르라 - 본문은 13: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12:25, 26;막8:34, 35)
성 경: [요21: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베드로의 호기심]
? 베드로가 돌이켜...따르는 것을 보니 -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서 베드로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7절;20:2-8). 이 제자가 예수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이 암시된 것이라고 한다(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유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기 전에 베드로가 이미 행동을 나타낸 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them)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절은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성 경: [요21: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베드로의 호기심]
? 이 사람은 어떻게...되겠삽나이까 -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학자들은 요한에 대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베드로는 자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도 당연히 순교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Godet).
성 경: [요21: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베드로의 호기심]
? 내가 올 때까지...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요한도 자신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조적 명령문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너'(*, 쉬)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절에서는 두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종국(終局)에 의해 그들의 비중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 경: [요21: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베드로의 호기심]
? 형제들에게...죽지 아니하겠다 - 본절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형제들'이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행1:15, 16). 예수의 말씀은 요한이 당신의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만큼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16:27, 28;행 1:11;고전 115:51;살전4:15;계2:16;3:11). 렌스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살아있다는 전설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성 경: [요21: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맺음말]
? 이 사람이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자로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였던 제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거하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있음을 시사한다.
? 우리는...참인줄 아노라 -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책임을 졌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것일뿐 어떤 증거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에베소의 장로들'이라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거를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을 공동체 의식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 경: [요21: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현현(顯現)]
주제2: [맺음말]
?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부족할 줄 아노라 - 요한은 20:30에 이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번역)는 표현은 확실히 모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고도 수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저자인 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 것,(2)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Lenski)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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