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글을 하나 남기려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중요한 문제들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이런 부분들을 잠시 언급해보고자 합니다.
1. 설교와 성경 해석에 대하여
한국교회에 복음이 부족하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변화가 부족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성경의 말씀이 제대로 해석되고 전달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에 중요한 가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들이 오래 교회를 다니면서도 말씀을 잘 모르며 또한 삶 속에 말씀을 적용하는 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이런 스타일의 설교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들어보았지요.
[여러분.. 가나 혼인 잔치에 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습니다. 이 여섯 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소망의 항아리입니다. 둘째.. 믿음의 항아리..]
물론 재미있는 착상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봐야겠지요.
여섯 개를 가지고 첫째, 둘째.. 하고 사용을 하고 싶다면 굳이 성경을 가지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40인의 도적은 무엇을 도둑질 한다는 것일까요? 첫째로.. 그들은 시간을 도둑질 합니다. 둘째로.. 그들의마음의 도둑입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바른 성경의 메시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이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예수님이 배안에서 주무시다가 풍랑이 일어났을 때 바람을 꾸짖어서 잔잔해진 내용인데.. 제목이 [저편으로 건너가자] 였습니다.
그거는 서문인데.. 왜 제목이 되지? 했는데.. 바로 그게 주 요지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저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저.. 먼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꿈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여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항상 저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주님의 말씀을 비전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역시 이것도 목회자 개인의 생각이지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적극적인 사고방식.. 류의 책을 읽고 성경을 적당히 갖다붙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이것 역시 성경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기는 한데.. 한 가지만 더 하지요.
흔히 많이 사용하는 메시지입니다. 기도원에는 흔히 표어같이 붙어있지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사58:6)
많이 설교를 하지요.. [여러분.. 금식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묶임이 있을 지라도.. 그 흉악한 결박은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금식을 기뻐한다는 말이 아니고 싫어하시는 금식도 있고 기뻐하시는 금식도 있는데 기뻐하시는 금식이란 어떤 것이다.. 하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흉악의 결박이 풀리는 것은 금식의 결과가 아니고 바른 금식의 조건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금식을 하면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메시지가 맞겠지요.
[여러분. 금식이라고 해서 그냥 굶고 있기만 하면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바른 행실이 동반되어야 금식이 가치가 있습니다. 주위에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아마 이런 식으로 가야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해석과 설교에 있어서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속사적 의미와 시대 배경에 대한 충분한 역사적 고찰.. 그리고 주석적 의미, 원어적 고찰, 심지어 영해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을까 싶습니다.
사실 그러한 것은 지적인 능력과 많이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적이고 인문학적인 면 말입니다. 또 그렇게 제대로 하려면 고생도 엄청 하겠지요.
그러므로 지적으로 다소 약하고 부족한 면이 있는 분들은 성경의 전달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치게 나무랄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성경의 부분적 해석에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삶의 중심에 성경적 가치관이 자리를 잡는, 그러한 체계가 한국 교회에 기본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고 밥 먹을 때 기도하고.. 그런 몇 가지 외에는 사고 방식,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죠.
그러한 성경 중심의 인생관, 가치관, 결혼관 등이 형성이 되어 있지 않고 교회에서 그것을 잘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열심히 하고 기도원 열심히 가고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간증도 하는데.. 구체적인 삶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성경의 원리가 개인 삶의 행동 철학으로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비한 체험도 하고 기분 좋은 경험도 하고.. 교회에서 아주 기분 좋은데.. 집에 가면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런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부흥회를 하고 집회를 하고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멋진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데 당시는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그 열정 사라지면 처음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지요.
자기 자신은 아주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데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어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영적인 경험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체험이야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것들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다만 그러한 경험들로 그치지 말고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듯이 그 마음 속에, 의식 속에 성경과 성경적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속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실제의 행동이 바뀌게 되는데.. 성경적 가치관, 성경적 사고가 그 안에 형성되지 않고 몸에 임하는 여러 즐거운 경험에만 몰두하다보면.. 당시는 재미있는데.. 그게 오래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더 강도가 센 체험을 구하게 되죠. 그건 별로 좋은 방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성경의 적용과 징계에 대하여
저는 성도의 삶이 변화되려면 성경 구절 하나 하나를 완전하게 실천하고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전하고 있는 사상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기본 방향이 잡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관련된 모임이 있는데.. 이 모임에는 징계가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잘못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무례하게 말한 것..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여성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짜증내는 것.. 자녀들이 버릇이 없게 키운다든지..남편도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지.. 하는 등의 문제가 생길 때 거기에 대한 징계를 받습니다. 대체로 한주일 정도 모임에 올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어둡고 불편한 분위기가 됩니다. 예배 가운데 기쁨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좋지 않은 상태를 처리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할 때 비인격적이거나 무례하게 모욕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부드럽게.. 한 가지.. 한 가지.. 잘못한 것의 중심 마음 상태, 주님이 중심에 있지 않은 것.. 이기심, 잘못된 동기..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눈이 부을 정도로 웁니다. 한 주일 정도 기도원에서 회개를 하기도 하고 집에서 반성과 회개를 하기도 합니다.
징계를 하는 동안 저는 식음을 전폐합니다. 가슴을 찢으면서 아파합니다.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복이 되어 모임에 오면 모두가 껴안고 울고 기뻐하고 행복의 도가니가 됩니다. 그건 정말 천국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울고 용서를 빌고 사랑을 고백하고 하는 일이 일상적입니다. 형제들은 마음 속에 음란한 상상을 했다고 고백하고 웁니다. 우리는 치유 기도를 해줍니다. 앞에 나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일도 흔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고 안아줍니다.
이러한 징계가 있기 때문에 모임 가운데 엄청난 기쁨이 있습니다. 계속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눈물 후에는 웃음과 폭소.. 놀라운 후련함과 행복감이 있습니다. 서로 껴안고 고백하고.. 얼마나 행복해하는 지 모릅니다. 모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끝나고 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도무지 가려고 하지를 않아서 헤어지는 데 한참 고생합니다.
이들은 평소에 저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장난치고 놀고.. 아이들도 내 머리위에 뛰어올라가고.. 올라타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남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잘못이 있을 때 부름을 받게 되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얼어버립니다. 사랑으로.. 아주 부드럽고 천천히 이야기를 해도.. 심장이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살기 위한 수술의 과정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중심으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집사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암과 같은 악을 버려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나도 울고 그들도 울고 우리 모두는 1주일의 헤어짐을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올 수 없는 한 주일동안을 무척 안타까와하고 그리워하며 보냅니다.
그렇게 다시 회복되어서 만날 때 그 기쁨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심령의 후련함과 행복감은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이런 과정을 계속 겪으며 사람들은 전에 눌려 있던 죄에서 점차 자유를 얻어가며 옛날의 삶에 비해서 지금은 천국이라고 다들 말합니다. 지금이 자기 평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 인줄 정말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죄를 처리한 결과입니다.
더러 기질적인 잘못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변명을 하고 미적거리다가 징계 기간이 더 질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가 싫다고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은 그들에게 놀라운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대충 하는 회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잘못했다고 입으로는 말해도 속에는 여전히 답답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회개가 이루어지면 가슴이 청량제가 들어간 것처럼 기쁘고 얼마나 행복하고 천국 같은 지 모릅니다.
저의 메시지는 구원중심의 메시지가 아니고 성화 중심의 메시지입니다. 저는 즉각적인 성결보다는 점진적인 성결을 믿습니다. 영으로 순간적인 성결의 은혜를 입었어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성화되고 나아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구원파가 말하는 것처럼 한 번의 회개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씻어야 합니다.
저는 죄에 대해서 많이 가르칩니다. 아주 상세하게 하나 하나 말합니다. 거짓말, 음란, 더러운 상상, 미워한 것, 분노한 것, 이기심, 자기가 기분이 나쁘다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우울하게 있는 것.. 위선, 비방, 게으름, 지나친 자책, 자기 연민, 자기 애.. 등 수백 종류의 죄에 대해서 하나 하나 어떻게 그것이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하며 그 근원의 중심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루고 처리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이 징계는 바로 성경을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가정에 대한 성경의 기본 원칙을 보면 첫째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남편을 세우기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무례하게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다든지 짜증을 낸다든지.. 하면 바로 징계입니다. 회개하기 전까지 모임에 올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상처를 주거나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가정을 위한 두 번째 법칙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떠나서 독립하는 것입니다.
만일 남편이 부모를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마구 괴롭히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보호하지 못한다면 남편에게 책임을 묻게 됩니다. 물론 하려고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징계가 아니고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네 번째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징계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항상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자녀들을 자주 안아주고 축복해주고.. 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징계도 동시에 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고집이 시작되는 돌 정도부터 징계를 시작하게 합니다. 제 멋대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 나쁜 것을 가르치고 야단을 친 후에 우는 것을 안아주고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눈이 말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되는지.. 정말 천사와 같습니다. 이 징계를 받고 자란 아이들과 세상의 다른 보통 아이들을 보면 누가 보아도 차이가 납니다. 너무 맑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정들은 천국이 되어 갑니다.
모임에 와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모임이 끝난 후에 아내가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당신에게 함부로 대했다고.. 울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남편들도 놀라서 같이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불신자 남편들도 아내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 놀라곤 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임에서 너무나 얼굴이 빛나고 기쁨이 임하고 삶이 아름답게 되니까 남편도 놀라서 같이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보편적으로 임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원칙을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도록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흔히 일어나는 것은 남편과 아내의 포옹.. 사랑의 고백.. 용서입니다. 부부가 서로 붙들고 통곡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붙잡고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하고.. 아이들도 울고.. 엄마, 아빠 사랑한다고.. 그런 일은 흔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천국이 되어져 갑니다. 그 공간에는 주님의 임재가 충만합니다.
저와 가까워지게 될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집에서 티브이가 없어집니다. 우리 집에도 티브이가 없습니다. 컴퓨터 모니터가 있으니까 보려고 마음먹으면 볼 수야 있지요. 회원들은 차츰 티브이를 없앱니다. 티브이 보는 시간에 기도합니다.
나는 티브이를 없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거실에서는 치우라고 합니다. 한 가정의 중앙에 예수님이 아닌 티브이를 모셔두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실 중앙에 성경책을 펴놓고 찬양 오디오를 놓고 항상 집에서 찬송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집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우리 가정은 천국적인 삶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카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단 제 이름이 들어가는 모든 공간에서 천국과 같은 빛의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는 비난과 불평과 험담이나 다른 교회나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하면 몇 번의 경고 후에 강퇴 당합니다. 강퇴 당한 분들은 서운해합니다. 시샵들은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하지만 운영 방침을 이해해달라고 말합니다.
다른 카페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인데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글을 삭제합니다. 이유를 설명하고.. 그 글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들어있어서 스스로 더 눌리게 되고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되니 삭제하겠다고 이해해달라고 설명을 하고 삭제합니다.
대부분 납득을 하지만 앙금이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소연하고 그런 것이야 괜찮겠지요. 그러나 분노하고 미워하고 판단하고.. 함부로 남을 가르치고 잘난 척 하고.. 그런 내용은 정화를 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에게는 정말 죄송할 뿐입니다. 다만 신앙관에 조금 차이가 있으니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각자 맞는 곳에서 잘 믿자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천국을 사모합니다. 사후 천국도 사모하지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천국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것은 주를 높이고 죄를 버리면 가능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성경의 원리를 가정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 적용하도록 가르칩니다. 직장에서, 대인관계에서, 장사를 할 때, 이성 교제, 옷차림, 연애의 원칙, 심지어 성에 대한 것까지도.. 말씀이 가르치는 원칙을 가르치고 적용합니다.
저의 목적은 성경이 우리의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삽니다. 그러면 영혼이 충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충만한 천국의 기쁨을 너무나 많이 누립니다.
집회를 할 때 마다 감격에 통곡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란 힘듭니다.
제가 모임을 인도할 때 너무나 많이 울고 심지어 심방에 가서 [이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선포하며 찬송할 때도 얼마나 많이 우는지.. 저는 많은 경우 우는 사람을 말리고 일부러 웃기기도 하면서 절제를 시켜야 합니다.
저는 교회의 문턱이 너무 낮은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좁은 교회, 좁은 기독교가 이상입니다. 좁은 기독교에 대해서, 죄의 처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룬 책을 쓸 예정입니다.
사실 죄 문제는 3,4 년 전에 어느 정도 정리해두었습니다. 내년에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내용을 들으면 저의 신앙 방향을 공감을 하는 이들도 있겠고 너무 율법적이고 엄하다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에게 함부로 오지 못하게 일부러 까다롭게 합니다. 웬만하면 다른 길로 가라고 자꾸 권합니다. 모임도, 카페도 별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좋아합니다. 같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무덤덤한 사람들은 나는 놔두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든지, 그게 싫으면 가야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좁은 기독교를 사랑합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이 오려면 숫자가 적어도 주님을 갈망하는 소수의 신자가 있다면.. 그들로 인하여 진정한 부흥이 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구원, 거듭남, 갈망.. 사모함. 성결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 이런 것을 사모할 때 진정한 부흥이 옵니다. 숫자만 많아지고 건물 크고 시설 좋은 데로 성도들이 수평이동 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아무나 오게.. 분명히 그게 있습니다. 근데 또 좁은 길, 좁은 문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 받아주셨는데 부자 청년에게는 아주 요구하셨습니다. 돈 많고 출세한 사람이 오겠다는데 아주 까다롭게 지킬 수 없는 것을 요구하셔서 결국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쉬운 복음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편만성과 편협성.. 두 가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교적 깊지 않은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향해서 그물을 던집니다. 어떤 이들은 좁고 좁은 기독교를 전합니다.
그러면 저는 어느 쪽이냐구요? 책을 쓰는 면에서 초기에 일단 읽기 편한 책을 씁니다. 그러나 저의 중심은 강력하고 강력한 복음입니다. 목숨을 거는 복음입니다. 저는 어설픈 믿음을 싫어합니다. 기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그런 시집이 있죠. 내용은 안 읽어봤지만.. 그런데 저는 그런 복음이 좋습니다. 저는 메시지를 전할 때 [예수에게 미쳐서 죽어버려라] 고 전합니다. [예수에게, 복음에게 미치자!] 그렇게 말합니다.
집회를 인도할 때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예수! 예수! 예수!] 하고 마구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심장을 찢고 몸이 찢겨서 죽으시고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교양 있게 믿을 거냐고.. 우리도 같이 예수위해 죽자고, 돌아버리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서 기도할 때 항상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항상 기도할 때 가슴을 뜯으면서 온 열정을 다해 피를 토하듯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다들 미친 사람들처럼 믿습니다.
깊은 밤에 기도하면서 나는 주님을 실제적으로 느낍니다. 그 모습을 느낍니다. 우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시기도 합니다. 그 찬란함과 기쁨과 평강의 물결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감격하고 울고 행복합니다.
나는 사역자들은 아름답고 풍성한 사역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도 많이 공부해야 하지만 기도도 많이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충만을 기도를 통해서 많이 받아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날마다.. 밤마다.. 세 시간.. 네 시간.. 울면서 간구하며 [주님.. 나를 사용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때 아름다운 역사들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을 맑게 씻어줍니다.
나는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둔감한 것을 봅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도 화를 내고도 더러운 상상을 하고도 눈으로 범죄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죄를 짓고도 무례하고도 악을 행하고도.. 그 까짓것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이 다 그런 걸.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죄에 둔감하면 기도해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찬송을 해도 그저 밋밋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좋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느낄 때 주님을 가까이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찬양을 해도 그 영광의 임재가 옵니다. 천국의 영광이 가까이 오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항상 기도하고 예배할 때마다 감격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울고 사모할 때 놀라운 주님의 임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나는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 영광의 기쁨은 너무나 커서 나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티끌만한.. 털끝만한 죄도 싫어하게 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주 사소한 것을 잘못해서 양심에 찔림을 얻으면 자기 전에는 꼭 와서 죄송하다고 고백하고 사죄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의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결한 기쁨이 마음에 충만합니다. 돈이 주는 물질이 주는 만족이 아닌 심령에 천국의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과 은총을 깊이 누리면 누릴수록 세상의 문화들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티브이의 소음이 너무나 듣기 싫고 괴롭습니다. 세상 음악소리는 정말 답답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맑은 상태로 있다가 죄를 지으면 어찌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아들 주원이에게 거칠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들도 아빠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지만 아빠도 아들에게 지킬 예의가 있습니다. 그 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지적을 한 것이지만 그 날은 사랑으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한참 후에 가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러니까 아빠가 힘들 잖니.. 아빠가 다른 뜻은 없단다. 상처 받지 않았지?]
[아이고.. 아빠. 괜찮아요.. 내가 애인가요..]
방으로 왔는데 여전히 미칠 것 같았습니다. 대충 때우는 것으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가서 말했습니다.
[주원아.. 아빠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아이고.. 아빠.. 아니에요..]
[야.. 이 녀석아.. 지금 미치겠다.. 빨리 용서한다고 해라..]
[예.. 아빠.. 용서할께요..]
[휴.. 살았다.. 고맙다..]
나는 내 방으로 와서 말합니다.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죄짓고는 못살겠네..]
아내가 옆에 있다가 우스워서 죽을려고 합니다.
3. 말씀을 적용하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사실 이 부분을 말하고 싶었으니까 조금만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해야 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몇 장 몇 절.. 이렇게 정확하게 외워서 하지 않더라도 아무튼 말씀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말씀의 전달 도구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도 말씀과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감동을 따라 전했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가라.] 하면 갔습니다. [아이고.. 거기 사람도 없는데 광야에 뭐 하러 가요?] 하지 않았습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할 때 [아이고.. 저는 말 알레르기가 있어요..] 하지 않고 그냥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복음 전달의 방법입니다. 상담의 방법입니다. 치유의 방법입니다. 전도에도, 상담에도 치유에도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진리라고 해서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기 맘대로 아무 때나 전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괜히 싸우기만 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청년 시절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때였습니다.
한 자매가 속을 썩였습니다. 말씀을 서로 나누는 시간에 자꾸 잘난 척을 했습니다. 이 자매가 무슨 말을 하면 분위기가 싸.. 해졌습니다. [내 친구가 저에게 그래요.. 얘.. 너는 너무 완벽해.. 너는 사람이 아니야.. 너는 천사니?]
분명히 이 자매의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똑똑하고 말씀도 잘 가르치는 데다가 자존심이 세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속이 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가 이쁘지 않았습니다. 모임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속으로 어떡할까.. 고민하면서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기도해라] 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3일 정도 되었는데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녀가 불쌍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제 됐다] 고 말씀하시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이제 제가 그녀를 만나도 될까요? 제가 그녀에게 전화할까요?]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전화하지 마라. 네가 먼저 전화하면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까지 기다려라.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하도록 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습니다. 밤이 되자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을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힘들다고.. 마음도 답답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문제가 그녀의 교만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약해서 직접적으로 찌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남에게 맞는 것에는 둔감했습니다. 하지만 남을 치는 것은 고통스러워서 견디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교만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 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그 때에 비로소 그녀는 이야기의 주제가 자신의 교만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말하기를 자기의 가슴에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문제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헤어질 때 90도 각도로 절을 하고 갔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 하지 않고 내가 직접 권면했다면 아마 싸우거나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교만을 버리라는 것은 성경의 말씀입니다.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성령의 감동을 따라 인도를 따라 전했기 때문에 열매를 맺었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목회할 때 어느 날 너무나 피곤하고 힘든 날이었습니다. 안면이 있는 어느 부부의 집을 방문해야 한다는 주의 영의 감동이 왔습니다.
나는 [오.. 주님.. 너무 피곤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금 가야한다고 재촉이 심해졌습니다.
[내일 갈게요.. 지금 너무 힘들어요.] 했습니다.
[내일 안 된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속이 상해서 투덜거리며 일어났습니다.
[아우.. 정말 힘이 드는데..]
구시렁거리면서 억지로 그 집에 갔습니다. 내가 왜 갔는지 몰랐으니까 할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무심코 낙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낙태는 살인이라고..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 같다고..
특히 3개월 정도가 되면 아기가 엄마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품기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서 극도의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나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나는 그녀가 임신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 3개월 째였습니다. 그녀는 초신자였습니다. 믿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획하지 않은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낙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막상 병원에 가려고 하자 망설이는 마음이 들어서 우물쭈물 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내가 들이닥쳐서 낙태는 살인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아이가 3개월 때가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마구 하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부부는 놀랐습니다.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낙태를 취소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집안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날 밤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무서운 일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낙태는 죄이며 살인과 같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메시지이며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한 도구는 주의 감동이었습니다. 주의 감동을 따라 말씀이 전달될 때 그것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나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할 때 외에도 설교를 할 때도, 또는 개인적인 상담이나 치유를 할 때도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를 받아서 전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떤 아름다운 여 집사님이 상담을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녀와 상담을 위해 사무실로 들어가고 아내는 옆 방에서 중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기 상담받고 싶은 고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함께 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님께 마음을 집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영이 말씀하시는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고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고민은 자매님의 진정한 고민이 아닌 것 같군요.]
그녀도 대답했습니다.
[예.. 맞아요. 사실은 다른 게 있어요..]
그녀는 다른 고민을 말했습니다. 다시 주의 영이 말씀하시는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그녀의 고민이 아니다]
나도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자매님의 진정한 고민이 아닌 것 같아요.]
[예 맞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의 영은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이제는 없어요. 다 말했어요.]
[그게 다 인가요?]
[예..]
하지만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그녀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나는 그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정말 문제가 끝났나요..]
[예.. 감사해요..]
고민하다가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성폭행을 당하신 적이 없나요..]
그녀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니에요..]
[아주 어린 나이에.. 가까운 친척에게.. 자매님..]
그녀는 화를 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런 적 없어요.]
[자매님.. 지금 주의 영이 가까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자매님이 도움 받기를 원하시면 그분이 임하셔서 자매님의 심령을 치유하실 거에요..]
[아니에요.. 그런 일 없어요..]
그녀는 도움을 원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자. 그럼 기도하고 마칩시다..]
그리고 저는 [주님..] 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서워.. 무서워.. 오빠.. 오빠.. 살려줘.. 엉엉.. 엉엉..]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뒹굴며 악을 썼습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계속 울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그녀는 조용해 졌습니다. 나는 계속 울면서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네가 고통당하는 것보다 내 가슴이 더 찢어지게 아팠다. 내 딸아.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네 고통을 안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하리라.. 너를 새롭게 하리라..]
나도 그녀도 엄청나게 많이 울었습니다.
한 참 후에 일어난 그녀의 얼굴은 색깔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힘이 빠졌지만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고 3일에 한 번 씩 몰래 집 앞에 김치를 해서 놓아두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집 문 앞에 김치 통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대낮에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단칸방에 월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굶지 않고 간신히 살 정도 였기 때문에 김치 걱정을 하지 않고 살게 된 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사정으로 그 곳을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에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녀에게 감사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의 영의 임재가 있고 그 영의 감동으로 사역할 때 거기에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보다 상담의 지식보다 나는 기도로 사람을 돕기 원합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하고 치유하기 원합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비라고 욕을 먹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나는 나름대로는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의 방식대로 나는 나대로 주님이 각 자 부름에 따라 사용하실 것입니다.
4.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인도하는 예배
말씀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용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말씀이 틀리면 감동이 있어도 영양가가 없지만.. 바른 메시지가 성령의 감동 안에서 전달되면 그것은 엄청난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나타난 회개의 역사와 부흥은 그가 전하는 말씀 그 자체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메시지가 말씀의 중심 사상에 부합되었지만.. 또한 그가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동반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과 성령이 같이 임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능력과 감동이 같이 할 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달할 때만 아니라 금요 철야 등 기도 집회에서 기도와 찬양을 인도하는 중에도 인도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인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내 경우는 영이 예민함으로 사람의 안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 느낌, 영의 움직임에 민감합니다. 사람의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그대로 보이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마음 속에 사람이 기분나빠하면 그 기운이 느껴져서 많이 피곤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멀리 있어도 그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어느 정도 열렸는지 발전했는지.. 가슴에 어둠이 있는지, 빛이 어느 정도 있는지..머리에 어둠이 있는지.. 빛이 있는지.. 그것을 대충 보고 느끼게 됩니다.
어떤 모임이나 집회에 갔을 때 전체의 영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에서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전체적인 평균적인 영의 상태를 느낍니다. 그러면 찬양을 인도해도, 그리고 멘트를 해도 거기에 맞추어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집회에 많은 이들이 마음 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있는 것을 내 영이 느낍니다.
그러면 치유 찬양을 드리면서 중간 중간에 멘트를 하게 됩니다.
[왜 걱정하세요..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그렇게 염려가 많습니까..]
그러면 눈물 바다가 됩니다. 그 멘트의 메시지가 그의 현재 상태에 도움이 되는 말이며 메시지에서 흘러나오는 영이 그의 심령을 만지고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영이 분노.. 억울함 등의 상태가 느껴지면 그에 관계된 말씀을 선포하고 찬양도 그와 관련된 것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사람의 영의 상태와 메시지 들이 일치하면 사람은 시원함을 얻게 됩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그것은 그 책안에서 흐르는 영이 자기가 좋아하는 영적 상태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각자의 영이나 사명이 틀리기 때문에 선호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숭이 생각에 바나나가 너무 맛있다고 사자에게 주면 사자는 그게 뭐가 맛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하나도 안 될 것입니다. 원숭이는 사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회에 너무나 낙담해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왔다고 합시다. 감동을 잘 받는 사역자는 자기의 영으로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강단에서 말할 것입니다.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죽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메시지는 그 어떤 메시지보다 그 사람에게 충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안면이 있는 부인을 만났습니다.
보자 마자 문제가 아주 심각해서 그 부인의 하는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고 말했습니다. 죽지 말라고요.. 왜 그러느냐고요.. 이대로 있으면 2-3 개월 안에 죽을 지 모른다고요..
여인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나보고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다고 하고 대화를 하니 자기의 여러 사정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해서 그녀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자기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동생도 집안도 다 신자였지만.. 그녀는 전혀 믿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감동과 인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쁘거나 신비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님도 사마리아 여인을 그렇게 도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역자는 예배를 인도할 때 오직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동과 영을 따라 집회를 인도하고 메시지를 전하면 성도들은 저 목사님이 나의 구체적인 상황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하고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꼭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같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주 신령하고 대단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많은 사역자들이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고 감동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그 신호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도함으로 보낼 때 우리의 영감은 날마다 충만해지고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에 점점 더 익숙해지게 됩니다.
영성이란 누가 전세를 낸 것이 아닙니다. 사모하고 기도한다면 모든 사역자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십니다.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전달하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도 같이 임하시게 됩니다.
예배에 지루함이 있는 것은 영의 흐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에 대해서 책을 오랜 시간 읽으면 환자가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도구로 환부를 건드려서 시원하거나 아프거나 하면 졸 수가 없습니다. 영의 흐름이 있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이 전달되면 고통이 있고 시원함이 있습니다.
말씀과 영이 성도의 심령을 만지면 거기는 졸 시간이 없습니다. 지루함이 없습니다. 심령에 불이 붙고 뜨겁고 시원하고 아프고 온갖 난리가 나는데 졸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영이 흐르는 감동의 예배는 10시간을 드려도 너무나 사로잡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저는 7시간 정도 집회를 여러번 해보았는데 참석자들이 다들 7분 같다고 한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한 집회를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보혈과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씀을 중단해야 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설교를 하다가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너는 항상 네가 혼자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같이 있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메시지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몰랐지만 우리 교회에 그 때 처음 나온 어떤 자매가 그 순간부터 예배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어쩌면 설교 중에 갑자기 이러한 감동이 오면 난처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예배의 흐름도 끊어지지 않고 감동을 지나치지도 않을 수 있을 까요?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설교 중에 이러한 감동이 오면 그대로 성령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도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며 이런 식으로 하면 혼란스럽게 느낄 수 있는 이들이 많은 곳이라면 비슷한 메시지를 설교 중에 해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외롭고 항상 혼자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위에 사람은 많은 데 왜 나는 혼자일까.. 이러한 생각에 잡힌 적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설교의 형식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이런 감동을 받습니다. 본인들이 무시해서 그렇지 대부분 다 말씀과 감동을 받습니다. 설교를 하는 중에 갑자기 준비하지도 않은 예화가 떠오르고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순종하다보면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점점 더 주님이 감동을 많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항상 말씀 안에서 주를 부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생활 습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여러 모양으로 아무쪼록..
이번에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좁은 기독교가 내 꿈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는 다시 정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좁은 기독교가 아니고 넓은 기독교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까다롭게 하지 않고 넓은 문을 제시합니다. 제자를 키우는 것과 다릅니다.
한 때 시간 여유가 있었을 때 바둑 사이트 몇 곳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바둑 사이트에 쉬러 왔는데 손이 근질 거렸습니다. 바둑도 두었지만..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예수 복음 글 쓰면 완전히 난도질 당합니다. 실제로 그런 싸움을 하는 이들 많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막무가내로 복음을 설명하는 이들이 있고 안티들이 저주를 퍼붓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일단 온유하고 친절하게 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변호하는 것은 더 많은 돌이 날아오게 할 뿐입니다. 하나의 변호가 있으면 열 개의 비방이 있습니다. 변호는 어렵습니다. 만일 하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말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나는 바둑 사이트에서 글을 썼습니다. 나의 일이 목사라고 밝히고 글을 썼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직업을 가지셨군요..] 처음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느낌을 주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항상 목표는 마지막은 예수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직접적으로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쓰지 않았습니다. 성경말씀으로 도배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읽기 쉽고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고 싶었습니다.
글은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글을 쓸 때마다 최고의 추천과 베스트 글에 올랐습니다. 수많은 덧글이 달렸습니다.
몇 개의 글이 계속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상도 받았습니다. 나는 바둑을 잘 둡니다. 어릴 적 거듭나지 않았을 때 학교를 관두고 프로기사를 하려고 연구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바둑 실력이 프로급입니다. 바둑사이트에서 9단입니다.
그러므로 바둑이야기를 하면서 인생 이야기를 합니다. 바둑의 원리를 적용해서 인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적 색채를 살짝 덧칠합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바둑 사이트에서는 바둑에 대한 글이 인기를 끌 것은 당연합니다.
곧 팬들이 많아졌습니다. 스토커 비슷한 이들이 생겼습니다. 쪽지와 인사 안부.. 친구 초청.. 등 책을 쓸 때와 똑같아 졌습니다.
나의 조용한 삶이 책을 쓰면서 요란해졌습니다. 새벽.. 밤 할 것 없이 수 많은 전화, 상담 요청, 방문 요청.. 끊임없는 메일.. 메일에 답이 없는 것에 대한 분노.. 독촉..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지쳐서 메일을 닫고 전화도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쉬려고 바둑 사이트에 갔는데 똑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내 글 보는 재미에 바둑 사이트에 온다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안티기독교적인 글을 수시로 쓰는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 철학, 문학, 문화 비판 등 온갖 평론을 쓰는 이들이 내 팬이 되었습니다. 반기독교인인데 나의 팬이 되겠다고 합니다. 점점 예수를 믿고 싶다는 쪽지들이 날아왔습니다.
나는 일체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내가 목사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에 신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상담을 조금 해주다가 나는 도망갔습니다. 모든 사이트 다 탈퇴했습니다. 아디도 없앴습니다.
내가 미쳤지.. 잠간 쉬러 갔다가 이게 무슨 짓이람.. 영혼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가 해야할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도 못쓰고 기도 시간도 엄청 뺏기고.. 아주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지혜스럽게 조심스럽게 잘 하면 안티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도 복음이 많은 반응과 열매를 얻을 수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때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이 말을 하고 때로는 저 말을 합니다. 때로는 자유자의 모습을 때로는 율법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떨 때는 약한 자가 되고 어떨 때는 강한 자가 됩니다. 그것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속에는 오직 예수에 미치자는 뜨거운 외침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그것을 누르고 상대방의 수준에 맞추어서 대합니다. 그 사람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그 사람의 파고들 약점이 어디인지를 봅니다. 이 사람은 정에 약한지.. 논리에 약한지.. 상처가 있는지.. 눌려 있는지.. 그것을 분별하고 그들이 먹을 수 그들에게 맞는 처방을 줍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통찰력.. 그리고 여러 모습으로 변신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직..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내 마음 속의 중심은 뜨겁고 불타오릅니다. 예수를 전하고 싶고 피 묻은 복음에 대해서 울부짖고 싶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아닌 곳에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지 못하면 그 영혼이 열릴 수 없고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혼은 마음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닫으면 영혼이 눈뜨지 못하므로 복음에 대한 아무런 깨달음이 올 수 없습니다.
긴장하면 마음이 닫힙니다. 릴렉스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을 열기 위해서 농담도 해야 하고 장난도 쳐야하고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해야 합니다. 성령의 지혜를 구하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웃으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웃기는 목사를 유치하게 보면 안 됩니다. 필요할 때는 유치하게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깊은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웃겨서 마음을 연 다음에 결국 마음을 열어서 헌금 많이 하게 시키고 주의 종님 모시십시오.. 하면 그것은 별로 아닙니다.
하지만 웃고 마음이 열리고 처음에는 별 희한한 것으로 접근을 했는데..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치찬란한 신파조 이야기로 접근을 했는데.. 나중에 점점 가면 갈수록 예수의 형상을 가르치고 생명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최종 목표입니다.
저의 경우는 내적인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외적인 스타일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지하철 사랑의 편지에 내 글이 여러 개 실렸습니다. 이 편지의 취지도 자연스럽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서 전하자는 것입니다. 나도 그 취지를 좋아합니다. 부탁을 받고 살아가는 짧은 이야기들을 썼습니다.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국방부에서 계절마다 발행하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자가 있습니다. 10만부 정도 발행한다고 하는데 모든 병사들에게 한 사람에게 하나씩 종교를 권하는 목적으로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있는 것이 군 사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자를 내는데 한번 책자가 나올 때 저자가 3명입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에서 한명씩 선정해서 글을 쓰게 하는데 주로 국내 대표적인 작가들이 쓴다고 합니다.
제가 집필을 의뢰받고 개신교 쪽에서 쓰게 되었는데 여기는 거의 수필류입니다. 이런 데에 직접적으로 자기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 쓰는 작가는 없습니다. 일상의 삶에 대해서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실제로 국방부 군종실에서 가급적이면 종교적인 색채 없이 수필류의 자연스러운 글을 써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여러 편의 글을 썼는데 그 때 주로 쓴 내용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라]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책은 그다지 영적인 깊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외롭고 지친 사람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이것은 좁은 기독교가 아닌 넓은 기독교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본질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 책이 아니고 아무쪼록 여러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 하는 의미가 많은 것이었지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니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19-22)
바둑사이트에서 글을 썼습니다. 복음과 상관없는 그저 인생관 수준의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미국에서 사업하시는 어떤 분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충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책을 150만원 어치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팬들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왕복 비행기 값과 호텔에서 한 달 정도 쉴 수 있는 비용을 지불할 테니 쉬시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놀랐습니다. 글 몇 편에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나는 비행기 여행은 꿈도 못 꿉니다. 혼자서는 서울의 지리도 잘 몰라서 아내 없이는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평소에 아내 없이 혼자 다니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지리도 모르고 체력도 많이 약합니다. 하여튼 가지는 못했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얕은 수준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래도 기쁨은 있었습니다. 약간의 즐거움도 재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근원적인 기쁨을 얻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는 것은 세상에 감추어진 보화.. 예수를,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의 심장을 전하는 것입니다. 101 가지 이야기.. 이런 류의 이야기가 감동 점수 5정도 된다면 예수 심장.. 예수 생명.. 이런 이야기는 감동 1000입니다. 이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예수의 심장, 예수의 마음을 이야기하다가 설교하면서 울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숨을 쉬기도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울
때 모두들 다 같이 예수를 부르며 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 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0,21)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내가 예수로 산다.. 내가 예수로 산다.. 예수로 죽는다. 언제나.. 항상.. 자나.. 깨나.. 길을 걸으나.. 집에 있으나... 전철 안에 있으나.. 나는 예수로 살고 예수로 호흡하고 예수로 죽는다..
이것은 나의 인생 철학이고 좌우명이고 삶의 가치이며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이야기를 하고 섬기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관계, 만남.. 그것이 내게는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를 말하고 예수를 높이고 예수를 찬양하고 예수에게 미치고.. 오직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6. 균형.. 조화.. 역할.. 사명..
저는 오직 예수.. 오직 생명.. 오직 주님.. 이 기독교가 인간의 장기로 표현하자면 [심장의 기독교] 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수의 심장.. 예수의 마음.. 그 심장.. 주님의 심장을 알고 그 심장을 추구하는 기독교..
모임에서 이런 말 하면 쓰러지고 울고 난리가 납니다. 오직 예수.. 심장.. 그 말씀에 모두가 다 녹아지고 녹아집니다. 다들 [평생.. 평생.. 이 말씀 듣고 싶었어요..] 하면서 웁니다.
[나는 예수가 필요하다! 나는 예수에게 미친다! 우리는 예수가 필요하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이렇게 외칠 때 모두가 난장판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광신자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께 사랑을 고백하고 경배하고 자신을 드립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저는 이 심장의 기독교가 너무 좋습니다. 아.. 내가 바울처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의 꿈입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온 몸에는 심장만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장의 기독교가 있다면 손의 기독교도 있을 것이고 머리의 기독교, 발의 기독교, 눈의 기독교.. 등등 많은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머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심장이 발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심장이라면.. 그것은 안에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외부에 드러나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발이 가만히 고요히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해서 무릎에게 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입이 해야 합니다.
약간씩은 다른 것을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지은이를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효율적입니다.
외부에 있는 기관은 강한 것이 좋으며 내부에 있는 기관은 부드러운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천편일률적인 성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이들은 그 지으신 이의 맡겨주신 용도에 맞게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내부 기관이 외부 기관에게 강퍅하다고 할 수 없으며 외부기관이 내부기관을 약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부는 외부에 생명을 공급해야 하며 외부는 내부를 보호해야 합니다. 추위로 인하여 옷으로 몸을 보호하듯이 외부는 내면을 보호해야 합니다.
내면은 보이지 않지만 외부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부위들은 드러나야 하며 어떤 부위는 숨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몸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효율성과 관련이 있으며 생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외부기관이 속으로 들어가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으며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부기관이 바깥으로 노출되면 그 생명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내부적인 기독교와 외형적인 기독교가 같이 필요합니다. 외적사역과 내적사역은 부르심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의식과 성향이 우리와 다를 때 우리의 의식과 성향을 강요할 수 없으며 우리의 것으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죄가 아닌 것에는 말입니다.
지체와 기질과 사명이라는 것은 누가 탁월한가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가장 옳은가의 문제도 아니며 서로 자기 역할을 따라 지체를 섬겨야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나대로 좋고, 당신은 당신대로 아름답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악은 버려야 하고 대적해야 하는 것이지만 서로 다른 것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아까 초기에 말씀 드렸지만.. 교회에 성경적인 바른 가르침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르치는 이가 지혜와 깨달음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를 받은 자들이 그들을 기도하고 도우며 중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타락하고 넘어진 이들도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한몸입니다. 교회에서 한 사람이 잘못되면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이 욕먹고 비웃음 당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내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팔이 아픈데.. 눈이 나는 상관 없어.. 해도 여전히 아픕니다.
신앙에는 균형과 조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조화되어야 하며 말씀의 깨달음과 말씀을 전달하는 적용으로서의 성령의 감동과의 조화도 필요할 것입니다. 감동은 있는데 메시지가 없고 메시지는 있는 데 감동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냉냉해질 것입니다.
사명과 관심사와 역할은 다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가치관에 긍지를 가집니다. 저의 신앙 방식에 긍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저와 같이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마음을 털끝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역할과 방향과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갈망은 중보사역입니다.
저는 은둔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꿈꾸던 것은 산 속에 초막을 짓고 오직 하루 24시간을 기도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세상의 모든 필요들을 위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 평생을 혼자서 작은 굴에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신학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되고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은둔적인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알려질 줄 알았더라면.. 과연 내가 글을 시작하였을까.. 싶은 마음입니다.
그동안 저는 많이 지쳤습니다.
은둔적 성향의 사람이 바깥에 다니다보니 정말 힘들게 되었습니다.
카페를 운영하고 사람들을 돌보려면 사소한 것들로 너무 많이 진이 빠지게 됩니다. 사소한 것들로 인해서 계속 기도의 전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고 그 문제로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잠시 중단하고 한동안 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나의 사모하는 사역인 중보하는 것.. 기도하는 것.. 거기에 몰입하는 것..
이제 그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길.. 나의 시작은 다양합니다.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의 길.. 이것만이 나의 목적입니다. 오직 사람들을 사로잡아 예수께 환장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것이 내 삶의 목적입니다.
오직 모든 무릎을 예수께 엎드리게 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방법이 틀릴 수도 있고 돌아서 갈 때도 있지만 오직 내 살아 존재하는 목적은 예수입니다..
웃으면서 부르는 이름도 예수이고 울면서 부르는 이름도 예수입니다. 내가 죽어가면서 부르는 이름도 예수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 내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이 말을 읽으며 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 주님으로 살고 주님으로 죽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다 다들 웁니다.
죽는 게 뭘까요? 그까짓 게 뭡니까? 오직 예수만 있으면 돼요.. 오직 그게 내 목적입니다.
내 삶의 위기 때마다 주님은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아내가 죽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살며 가난이 뭔지 전혀 모르고 편히 살다가 거지같은 사람인 나와 결혼해서 아내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지하에서 십 여년 살다가 천식이 위급해져서 숨이 거의 끊어져 가곤 했습니다.
그녀는 많은 고생을 했지만 나는 그녀가 이십 년동안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같이 있어서 항상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가여웠습니다.
어느 날 위기가 왔습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주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남은 삶은 오직.. 주님만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라고 시켰습니다. 아내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헐떡 거렸습니다.
얼마 후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아내가 생생해졌습니다. 눈에 힘이 생겼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후에 나는 알았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어느 정도 보고 느끼지만..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중에.. 그 때의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그 지하 교회에.. 주님이 서 계셨습니다.
주님이 바로 곁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만져주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감격으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기도에 몰두하면서 나는 영계의 많은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엄청나게 큰 건물만한 황금빛 여우 두 마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과 동물들을 보내며 나를 죽이고 교회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년에 내가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젊은이들과 집사님들은 금식하고 철야하며 나를 살려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한달 간의 전쟁 끝에 나는 회복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중보기도팀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점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본인들의 영적 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며 교회에 부흥과 회복이 임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나는 담대하게 하지 못합니다. 나에 대해서 강하지만.. 환경의 파도 속에서 강하지만.. 다른 이들을 다룰 때 나는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집사님.. 미안해요..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이 죄를 버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못박는 거에요..]
나는 울면서 말합니다. [집사님을 징계하면 나는 마음이 편한줄 알아요? 형제.. 자매야.. 너희들을 징계하면 나는 편안하게 이불 덮고 밥 먹고 사는 줄 아니? 나도 미칠 것 같아.. 하루종일 너희를 생각해..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회개는 잘 하고 있을까.. 넘어지면 안 되는데..주님.. 도와주세요.. 엉엉엉..]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내가 얼마나 죄를 증오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지를.. 모두가 엎드러져 주님.. 순결하게 살게요.. 주님..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이것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징계할 때도 나는 웁니다. 얘들아..
아빠는 너희들을 너무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지만.. 아빠는 죄가.. 죽음보다 싫단다..
애들아.. 죄를 버려야 해. 애들아.. 제발.
죄를 버려야 해..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건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거야..
너희들이 죄를 버릴 수 있다면.. 아빠는 죽어도 좋아..
우리 집에서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통곡합니다.
그리고 회개가 끝나고 심령이 회복되면 우리는 춤을 춥니다.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뛰고 놉니다.
죄가 사라지면 천국이 임합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누리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나는 이 심장의 기독교, 순결한 기독교, 거룩과 영광의 기독교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독교인지, 주님의 심장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과 영광의 세계인지.. 그 감격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기독교가 온 땅에 가득하도록 기도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는 이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기도와 책 쓰기에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모하는 에수의 심장, 예수의 마음,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갈망과 기도를 쉬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간절히,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을 사모하며 그 영에 사로잡혀서 사십시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사로잡는 그 날까지,
이 나라, 이 땅에 주의 임재와 영광과 부흥이 오는 그 날까지
결단코 기도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진정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을 소유한 사람들이 됩시다.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들과의 만남과 사랑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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