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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자와 기독교 - 道可道,非常道 (유소충)

주거시엔셩 2016. 1. 30. 19:22

노자와 기독교 - 道可道,非常道

 

 

노자와 기독교 를 비교 연구한 원고를 「중국을주께로」에 연재하는 것을 약속한 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유는 세 가지 였다. 첫째, 나는 중국인 목사이기에 한글로 문장을 쓴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노자 애호가이지,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노자라는 책은 수많은 판본은 물론 학자들 마다의 해석에 대한 이견(異見)이 많은 책이기 때문이다. 연재에 앞서 그 접근 방법을 밝혀 둠으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것은 학술적이거나 문학적 접근이 아닌 선교적 접근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물론 주관적 입장도 배제 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노자를 성경과 대비하여 중국문화의 두 추를 이루고 있는 ‘도(道)’와 ‘유(儒)’ 사상에 훈도(薰陶)를 받은 중화민족에게 복음을 제시하려는 것이 연구의 근본 목적이요 동기였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성경과 노자 두 책 사이를 오가며 사색과 기도로 얻은 깨달음을 한 단락씩 정리하는 이 과정이 중국문화의 기독교적 이해를 도모하며 중국선교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자 그는 누구인가?


노자(老子)의 “老”는 인생의 노련함과 학식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며 사실상 노자 본인의 이름도, 책 이름도 아니다. 편의상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노자(老子)라고 말할 뿐이다. 노자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초(楚)나라 고현(苦縣)의 여향(厉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며, 주(東周)나라의 태사(太史-궁정의 기록관) 또는 수장실(守藏室)의 관리였다고 한다. 주 나라가 덕에 대한 경멸풍조가 만연한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을 지날 때 관령(官令)인 윤희(尹喜)의 간청으로 “도(道)”와 “덕(德)”에 대한 글을 남긴것이 노자의 도덕경의 유래가 되었다.

 

노자가 말하는 “道”는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도”는 유가(儒家)에서 가르치는 인륜적(人倫的)인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공자는“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라고 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은 자는 저녁에 죽음이 그를 찾아 온다 하여도 여한은 없다”는 뜻으로, 생명보다 귀한 “도”의 무한한 가치를 강조 하였다. 또한 구도자(求道者)로서 도를 찾고 행하고 가르치며, 나아가 “도”의 구현을 위해 “知行合一(지행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수신양성(修身養性)의 노력이 필요 하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도의 실재(實在)를 주장하였으나 육신과 사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아있다.


  오천 여 자(字)로 된 노자의 도덕경의 첫머리는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라는 여섯 자로 시작한다. 짤막한 문장 속에 노자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 번 언급되는 “道” 중에 첫 번째와 세 번째 “道”는 명사(名詞)로 “道”의 “본체(本體)”를 말하며, 두 번째 “道”는 동사(動詞)로 “말하다”의 뜻이다. 이를 번역하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道’라면 그것은 항존적 ‘道’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不可道) 형이상학적인 도의 초월성(超越性)과 무한성(無限性), 자연무위성(自然無爲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전제로 노자는 “道”를 “常道”와 “非常道”로 구별하여 우리의 사유(思惟)를 한층 더 높이 끌어 올린다.  우리는 만물이 변화무상(變化無常)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道”이다. “道”에 의해 천지가 시작되었고(天地之始), 천지는 또한 만물을 낳은 어머니(萬物之母)가 되었다. “道”는 본질적으로는 ‘무명(無名)’이나, 현상적으로는 ‘유명(有名)’이다. ‘허무(虛無)’와 ‘실재(實有)’ 양자(兩者)는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고(同出而異名), 이를 가리켜 현(玄)이라 하는데 ‘최고의 현(玄之又玄)’이다. 곧 우주만물의 근원(衆妙之門)인 “道”를 가리킨 것이다. “道”는 아무런 형상도 이름도 없으며(吾不知其名),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寂兮寥兮), 절대적이고(獨立不改) 불가사의 한 것이다. 


  노자는 ‘크고 심오하다’는 의미에서 “道”의 근본 지향에 대해 현묘(玄妙)에 붙이는 지혜를 보였으나 역시 영적인 방황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되지 못했다.   
 
노자와 기독교


이상과 같이 공자와 노자의 “도관(道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으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더 깊은 부분은 여러분의 지혜에 맡기며, 여기서는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노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도가와 유가사상에 뿌리가 깊은 중국인들을 이해하고, 영혼구원을 위한 효과적인 복음적 제시와 접근방법이 되었으면 한다.


  성경의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道)이 계시니라, 이 말씀(道)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道)은 곧 하나님이시니라(太初有道, 道與神同在, 道就是神)’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어서 1장 2-4절에서는 ‘그(道)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道)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道)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道)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고 말한다.


  하나님은 “道”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도성인신(道成人身)”의 구주이시며, 어두움의 빛이시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이를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ㆍ말씀(道)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ㆍ저희를 진리(道)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道)은 진리니이다(요 17:17).


 ㆍ그는(道)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ㆍ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ㆍ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永生之道)”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ㆍ…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ㆍ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ㆍ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ㆍ하나님의 말씀(道)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중국영혼들에게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道)을 믿고 행하는 자는 현묘(玄妙)함의 참여자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재(實在)와 세상 속에서의 무아(無我)의 영적생명의 고지에 서게 될 줄로 믿는다.    
                   
유소충│영등포중화교회 담임ㆍ세계선교신학원 교수ㆍ중국선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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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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