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일반적 이해와 예배의 역사적 발전
글쓴이 ; 주태근
1. 예배의 정의
기독교 예배의 특징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일은 예배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실재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최근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예배 의식이 출현하고 이에 따라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곤란을 느낄 정도로 예배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배 인도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를 섬길 때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할 입장에 서게 된다. 그 결정이 실제적일수록 예배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더 요청된다.
가. 예배라는 말의 의미
예배라는 말의 우리말의 뜻은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우리말의 뜻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서는 예배란 말이 사용되었던 형편과 시기에 따라서 표현의 차이가 약간은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나. 구약에서의 예배 의미
먼저 구약을 살펴보면 예배의 전체적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어휘를 사용한 것은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어휘 둘을 들 수 있는데 그 첫째가 “아바드”( )라는 히브리어이다. 이 말의 뜻은 ‘봉사’ 도는 “섬김”으로 나타내지고 있다. 두 번째 중요한 어휘는 “샤하아”( )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굴복하는 것” 도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써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다. 신약에서의 예배 의미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어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에 나타난 “프로스퀴네오”( )이다. 이 말은 존경의 표시로 ‘절하다“ 또는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지상의 통치자들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2)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던 말에 나타난 ”라트레이아“( )로서,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시키는 말인데 예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레이투르기아”( )는 예전의 의식(ritual)과 관계를 맺는 단어이다. 본래의 뜻은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라는 뜻으로 소국가였던 아테네를 위하여 수행되어졌던 일방적인 임무에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나 그 후 이 말은 기독교의 예전, 특히 성례전 의식이나 그 외 특수한 의식을 집례할 때 활용되었다. 그 때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졌다. 4) 영어에서 표현하는 worship이다. 사실상 우리의 ‘예배“란 말은 바로 이 worship에서 번역된 것이기에 그 영어에서 뜻하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worship이란 말은 앵글로색슨 어인 ”weorthscipe"에서 나온 것으로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의 듯을 가진 합성어이다. 이 말의 뜻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기 있는 자”이다. 이 말을 좀더 구체화시킨다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란 뜻이 된다.
라. 예배의 신학적 정의
폴 훈(Paul W. Hoon) 교수는 『예배의 통합』이란 저서에서 “예배의 정의는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예배의 의미 분석도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론 중심의 기독교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예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건에 기초를 둔 성육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훈 교수는 계속하여 “기독교 예배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피터 부르너(Peter Brunner)는 그의 저서 『예수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예배”라는 뜻의 독일어 “Gottesdienst"를 사용하고 있다. 즉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회중의 봉사로서의 예배“이다. 쟝 자크 폰 알멘(Jean-Jacques Von Allmen)교수도 그의 주저 『예배의 신학과 그 실제』에서 기독교 예배의 근거를 기독론에 두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배란 인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른 구속사의 과정을 새롭게 확인하고 집약하는 것이다. 안더힐(Evelyn Underhill)은 그의 연구서 『예배학』을 통하여 “예배는 그것이 어떠한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모든 공적인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은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예배’와는 달리 기독교 예배는 “분명한 게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 행동이며 초자연적 삶” 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이 플로로프스키(George Florovsky)교수에 의해 제시되었다. “기독교 예배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찬양과 경배의 행위이며, 이는 하나님의 포용하시는 사랑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친절하신 행위에 대한 감사의 인식을 내포한다.” 이러한 사상은 니시오티스(Nikos A Nissiotis)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그는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과 행동하심을 강조하였다. 즉 “예배는 일차적으로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행위이다.” 최근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배를 “하나님의 영화와 인간의 성화”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최근 카톨릭과 개신교 양측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예배를 “부활의 신비”로 설멸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부활의 신비’란 우리의 예배 가운데 현존하시고 역사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2. 교회가 존재하게 된 목적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어휘와 그 의미, 교회의 기본 성격과 그 임무, 예배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고 신앙과 예배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 교회라는 어휘와 그 의미
교회란 무엇일까? 성경 속에서 표현된 중요한 어휘들을 살펴보면, 구약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단어는 ‘카할’( )이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모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주로 시정이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일 때(창 49:6, 민 22:4)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했다. 이 단어는 70인역에 헬라어 ‘에클레시아’( )라는 말로 옮겨졌다.
또 하나의 어휘는 ‘에다’( )라는 말인데 이 어휘는 흩어진 상태 속에 있던 무리들을 가리킨 말로서 헬라어로는 ‘시나고게’( )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교 회중들을 가리킨 말이다.
이상의 단어들 가운데 교회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서 가장 적절한 말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이다. 이 말이 신약에서 사용되어질 때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었다. 첫째는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특수한 목적으로 모이는 경우(행 19:39), 둘째는 지역적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롬 16:5, 행 8:1), 셋째는 “그리스도의 교회”(롬 16:16, 갈 1:22)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었다. 넷째로는 종말론적인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교회의 의미는 신약 시대 특히 사도 시대에 와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만을 모아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불렀다.
나) 교회의 기본 성격과 그 임무
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특수한 성격들은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며 어디에서도 모방하거나 반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토록 교회가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그 기본 성격들이란 도대체 어떤 걸들인가
1) 교회의 특수성
(1)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니케아 신조(325년), 제1스위스 신앙 고백(1536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648년) 등에 나타난 교회의 설명은 한결같이 교회란 그리스도님의 피로 친히 제정하 시고 조직하신 그리스도님의 왕국이고(마 3:47), 하나님의 집이며, 또 가족(행 2:47)이라 고 말하고 있다.
(2) 교회는 유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교회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란 세계 어디에 존재하든지 한 교회로서의 공동체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오직 한 그리스 도님의 지체로서 동일한 대상과 성격과 방향을 가지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기존적 자세 이다.
(3) 교회는 거룩한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교회’라고 불림을 받은 모든 무리들은 완전히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오 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거룩하신 속성을 본받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훈련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속성을 지속시켜 주고 배양시켜 나가게 하 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예배를 통한 성례전과 말씀이다.
(4) 교회는 사도적 전승을 계속해야 한다.
순수한 교회란 그리스도님과 그 사도들로부터 역사적인 전승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로서의 가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전승의 주요 골자는 어떤 조직이나 형 태보다는 예배와 교리의 기본적인 즐기와 형태가 역사적인 전승에서 이탈되지 않아야 한다.
2) 교회의 기본 임무
교회의 기본 임무를 ‘사명’이라고 규정지을 때 여러 각도에서 언급될 수 있다. 구원받 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들 은 실로 많고도 크다.
(1)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이다.
(2) 교회는 섬김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
(3) 교회는 코이노니아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4) 교회의 사명 중에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이상과 같이 교회가 존재하여야 될 목적을 교회의 특수성과 그 임무에서 찾아 보았다. 교회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배의 완전성이 실현되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로서 교회의 존재가치를 알리게 된다.
다.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혁 교회의 중심적인 신앙 지침서였던 제2스위스 신앙고백은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를 예배의 공동체로 규정하는데, “교회란 그리스도님을 통하여 주어진 은혜의 동차자들이 말씀과 성령님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하여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예배하는 무리들의 공동체”라고 명시하고 있다.
교회가 예배의 공동체로서 존속하고 계속적으로 발전해 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은 주로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에딘버러에서 개최되었던 신앙과 직제 연구를 위한 ‘제2차 모임“이라고 하겠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성찬 성례전을 예배의 핵심으로 여기는 예배공동체이다.
여기에 속한 대표적인 교회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를 둘 수 있다. 정교 회는 철저한 제사의식이 뿌리내린 성찬성례전이 예전의 전부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형 태는 카톨릭에서도 동일성을 지니고 있으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5년)에서 설교에 대 한 중요성을 인정하고 설교를 예전에서 행하도록 함으로써 예전의 형태에 새로운 변화 를 가져 왔다. 그리고 이 부류에 속하는 교회로는 감독교회 또는 성공회 등이다. 그러 나 이 교회는 루터교회와 함께 어느 교회보다 예배에서 설교와 성례전의 균형을 잘 이 루고 있는 교회이다.
2) 설교 중심의 예배를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이다.
여기에 속한 교회는 장로교를 중심한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감리교, 회중교회, 성결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를 들게 된다. 이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기독교의 기본진리가 구심 점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성경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오 늘의 언어로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일이 예배 공동체를 살찌게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찬상례는 일년에 2회 또는 4회 정도로 거행하면서 성례전과 말씀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3) 성령님을 모시고 그 역사 하심에 따르는 예배 전통의 교회
이 전통에 속한 많은 교회들의 예배는 전통적인 예전이나 그 예전의 형태에 대한 관심 보다는 예배의 현장에 임재하셔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들 은 성령님에 의하여 심령이 새로워지는 회심 또는 변화에 초점을 두는 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4)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가?
가장 이상적인 예배하는 공동체는 앞에서 열거한 세 가지의 요소를 모두 수용하는 예배 를 드리는 일이다. 비록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에 따라 어렵다 하더라도 예배에서 초대교회와 같이 말씀과 성찬 성례전이 균형을 이루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존 하는 겸허한 자세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라. 신앙과 예배
예배자들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섬기는 신에 대한 불경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전의 형태가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하더라도 그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참여자의 깊은 신앙이 없이는 한낱 불당의 장식처럼 보이게 되며, 아무리 유창한 말씀의 선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일종의 종교 강연에 지나지 않는다. 예배의 핵심은 신앙이다(존 윌리암스). 예배란 언제나 신앙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다(로버트 레이번) 예배와 신앙은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 없는 신앙이란 자기 수양에 불과한 것이며 신앙이 없는 예배란 아무 의미를 가져올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3. 예배의 역사적 발전
예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지속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한 예배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사건으로서 인류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의 예배가 교회 역사에서 djejg게 지속되었고 발전되었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 구약시대
1) 모세 이전 시대의 예배
모세 이전 시대라 함은 유대교의 가장 원시적인 시기로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부터 모세가 부름을 받기 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의 예배 형태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을 띠고 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에 이르러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제단을 쌓은 일과 함께,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의 심성을 따라 응답하셨다(창4:3). 이것은 피조물들의 본능적인 예배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아담 때부터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계승했던 행위로 보게 된다. 그리고 야훼 종교의 예배 발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별된 민족의 시조로 불림을 받을 때부터 더욱 뚜렷이 그 윤곽을 나타낸바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든지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제단을 쌓았다. 이러한 의식은 이삭, 야곱에게 계승되었다. 이들의 예배는 예언적이며 제사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언적 요소와 인간들이 응답하는 제사적 요소가 이루어 졌다.
2) 모세 이후의 시대
예배학적인 차원에서 모세를 예배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율법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님 명령으로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의 예전의 절차는 지금껏 이방 종교로 인해 오염되었던 예배의 형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해 주었다. 모세 시대에 제정되었던
성전 예배는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 극치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들어 예배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십계명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모시었다. (2)진설병과 황금 등대를 비롯한 기구들로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3)찬송과 함께 수금, 나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4)예배의 참례자들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드르의 예배 행위는 음악, 축송, 춤, 기도, 행렬, 단순한 설교 도는 강화, 선조들에 대한 회상, 고백 등을 하면서 함께 거룩한 식사를 나누는 순서들을 가졌다.
3) 예언자들의 개혁 운동
세속 종교의 물결 속에 침수되어 버린 야훼 종교의 내용과 의식은 민족의 죄와 직결도니 문제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가운데 허물어져 간 예전과 신앙의 본질을 되살려야 한다는 결의를 보이면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1)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이다. 그는 이방신 바알과 관련되었던 지방 성소와 제단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생활과 인도주의를 겸손히 서약하며 성전의 재건과 예전의 회복을 이루었다. (2) 예레미야가 행한 종교 개혁 운동이다. 그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도 개인의 책임성과 그들 심령의 변화가 시급함을 주장하며 내재적 종교로서의 개혁을 외롭게 부르짖었던 것이다. (3) 에스겔의 개혁 운동이다. 그는 예레미야처럼 성전의 예전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니고 성소의 예배와 영적 정화를 병행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4) 포로 후기의 유대교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마지막 귀환을 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 법전의 발전과 함께 예언의 전승과 제사 의식을 새롭게 다듬고 거룩한 공동체의 출발을 주도해 나갔다. 포로기간 중 새로이 등장한 회당에배의 강조점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 이었다. 말씀 전에 모두가 일어서서 축원 또는 기도를 했고 말씀이 봉독되는 시간도 역시 일어서서 지극한 경외심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전 제사 대신 새벽, 아침, 정오에 드리는 기도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가정까지도 예배드리는 성소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예배 활동에 직접 동참하게 되었다. 그 외에 구약의 예배를 말함에 있어서 시편은 대부분 포로 생활 중에서 성전 예배를 그리워하면서 부른 찬송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도 절기의 공중 예배시 불렀던 것, 즐거운 축일에 불렀던 것 등등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시편은 예배시 부르던 찬송이며 또한 기도이다.
나. 신약시대
1) 예수님의 사역과 예배
예수님의 관심은 어떤 의식적인 예배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회개운동을 일으켰고,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함“을 강조 하였다. 가장 중요한 예배의 분야는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제정된 성례전이다. 세례와 성찬을 지칭하는 이 성레전은 구약의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2) 사도들의 사역과 예배
예수님의 승천 이후 그분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배를 통하여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교회 예배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1)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예배와 활동을 본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교회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2) 회당을 중심으로 한 예배와 그들의 활동이 뚜렷하다. 이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도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도 전도와 예배의 처소로 계속 사용해 왔다. 그러나 사도들의 예배 활동이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예배 예전의 정립이 무척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는 구체적 행위로서의 예배가 아닌 병행되는 비예전적 행위의 형태를 지속해 가고 있었다.
3) 초대교회
초대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연히 그리스도님을 증거 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생명이 결속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졌던 성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지내 오면서 자연적으로 그들의 예배 내용의 전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이었다. 그리고 모든 핵심적인 순서도 말씀과 성찬에 집중되었고 그리스도님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재확인하는 데 역점을 둔 예배분위기를 형성해 나갔다.
4) 중세교회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껏 개인 가정이나 동굴들을 찾아 소집단으로 모이던 기독교인들이 지상에서 햇볕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대형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교회의 형태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예배의 집전을 맡은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 역시 점차 확장 되어 갔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로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 갔다. 그러나 380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작용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예배의 현장은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들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은 수많은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과 교창을 양산하게 되었다. 특히 주님의 만찬은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 제사 제도로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결국 예배 양식으로 인한 심각한 대립으로 1054년에 동방과 서방이 분열되었다. 서방 교회는 16세기경에 예배 의식의 심각한 문제점을 노정 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성찬에서의 화체설, 예배 참석의 등한히 여김, 성경과 예전은 모두 라틴어러 기록되었고, 면죄부의 판매, 회중은 참여자라기 보다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된 하나의 연극을 구경하는 방관자로 퇴보하게 되었다.
5) 종교 개혁과 그 이후의 예배
개혁가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면서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각각 다른 예배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전에의 새로운 개혁 운동은 크게 세 부류의 경향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1)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의 기수들이 취한 경향이다. 이들은 예배 의식을 개혁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세력으로 카톨릭 라틴어 미사에 독일어 사용과 함께 독일어 찬송을 부르는 의식의 변화만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예배는 카톨릭과 거리감이 없는 예전 의식이라 할 것이다.
(2) 쯔빙글리, 칼빈,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이 취한 예배의 형태이다. 카톨릭 교회의 우상적이며 미신적인 경향에 대하여 “마술적인 주술”이라 혹평을 가하면서 성경에 입각한 초기 교회 예배 형태의 복귀를 부르짖었다. 쯔빙글리의 경우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매주 드리되 성례만을 위한 예배는 연 4회로 국한 시켰다. 칼빈의 경우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 성례전도
매주 갖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주장이 적용된 교회들이 개혁교회와 같은 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3) 급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던 재침례파를 비롯하여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 같은 자유 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루터나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와 관련된 교회 개혁을 부정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을 추구 하였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예전 등은 외면하고 성경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개혁가들의 예배 의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결론이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는, 예배 의식의 전승을 철저히 지키면서 모국어의 활용 속에 회중의 이해와 참여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 예배 형태와 그 의식의 회복을 시행하면서 설교 중심의 예배를 시도하는 노력을 가지고 있었다.
6) 종교 개혁 이후의 예배 인식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에 대한 특별한 변동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은 청교도의 정신을 그대로 지속시키며 탈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신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차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별히 미국의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과 서부개척기의 집회 중심의 예배는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예배마저 상실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듯 예배에 대한 가벼운 이해와 무관심은 새로운 선교지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한 피선교지역의 교회에 예전이 없는 집회 중신의 교회를 이식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장에는 예배의 역사나 전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교육이 완전히 부재한 현상을 가져 왔다. 또한 설교만이 전부라는 가르침이 예배의 모두로 알고 한 세기를 지내게 되었다. 결국 예전의식의 존엄성이 경시된 교회들로 정착되고, 예배 현장에는 예배의 토착화라는 미명아래 비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7) 현대교회
사실상 피선교국들의 교회들이 19세기 후반에 크게 팽창했던 선교열에 의하여 복음을 수용하고 그들이 전해 준 대로 예배 의식을 받아 진행하는 동안, 미국 내의 교회에는 예배에 대한 새로운 복고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찰스 베어드의 ‘장로교 예배 의식“이란 책의 발간, 1857년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예배 의식을 담은 예식서의 발간, 독일 교회에서의 예배 복고 운동, 장로교, 감리교, 그리스도의 교회, 침례교회에 이르기까지 교단별 예식서의 개정, 초대 교회들이 갖고 있던 예배의 기본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각각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모임에서 카톨릭은 지금까지의 그들의 미사에 라틴어로 국한되어 있던 것을 과감히 탈피하고 미사로 드리는 사람들의 모국어로 대체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이 새롭게 일어난 예배에의 관심은 드디어 예배 복고 운동으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각 교회마다 예배 의식을 돌아보게 되고 예배당 안의 구조를 살피며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의 예전을 되찾으려는 현대 교회들의 경향은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존엄성을 인식시켜 주었으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는 예배의 의식 속에 구체화된 회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세계로 확산되면서 단순히 ’듣는‘ 예배만이 아닌 ’드리는‘ 예배도 겸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깨닫고 이를 힘써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4. 종교개혁자들에 따른 예배의 차이점(신학과 내용)
가. 개혁가들의 공통적 쟁점들
(1) 로마 교회가 성찬성례전만을 고집하는 미사를 반대하는데 개혁가들은 노선을 함께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는 말씀이 없는 성찬성례전으로서 그 양태가 문제점을 가져오고 있다.
(2) 로마 교회가 주장하고 지키고 있던 성찬의 화체설에 대하여 개혁가들은 한결 같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로마 교회는 미사 가운데 행해진 성찬에서 그 성물이 그리스도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성체가 되며 그리스도님께서 바로 그 성물에 자동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교리를 신봉하고 있다. 그 결과 미사의 참여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믿음을 소홀히 하는 문제를 몰고 왔다.
(3)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 된 미사를 한결같이 지적하고 나섰다. 이 같은 의식은 마슬적 연기에 불과 하다고 공격하면서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예배의 필요성을 강조 하였다.
(4) 모든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집례되어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었다. 회중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로 집례되는 예배예전은 회중들의 동참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 왔었다.
(5) 하나님과 예배자들의 중간 존재로 군림한 사제의 위치를 부정하는데 뜻을 같이 했었다.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로 활동한 사제들은 그리스도님의 대행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맹종을 초구 하는 일에 모든 개혁자들이 하나같이 결속되었다.
나. 분열을 초래한 개혁가들의 독자적 주장들
개혁가들은 예배의 형태와 성찬에 대한 해석 문제에 대하여 서로의 견해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루터교와 성공회의 전통은 고대 예배의 상당한 부분들을 그대로 간직 하였으나, 쯔빙글리파와 재세례파는 과거와 현저하게 결별 하였으며 개혁교회는 그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1. 루터
루터는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가장 주저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쓴 “미사전례”에 보면, 루터의 새 형식의 예배는 라틴어를 포함하여 기타 여러 가지 과거 예배 요소들을 그대로 갖고 있는 로마미사의 축소판 정도 옅다. 두 번째 발간한 “독일미사”에서는 변화의 폭을 훨씬 넓혔는데, 그것은 보다 개혁적인 그의 추종자들을 제지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보인다. 루터는 설교와 성경봉독을 예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약에 나타난 성만찬에서의 제자개념을 되찾아 보려고 노력했으며, 미사 도중에 교리를 소리내어 말하는 것과 미사를 각 지방의 언어로 진행하는 것, 성만찬을 매일 모든 교회에서 기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새로운 찬송들을 각 지방의 언어로 부를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것이 예배의식의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부분이다. 그는 특정한 날에는 라틴 미사를 드릴 것을 주장했으며, 예복, 등, 제단, 성체용기, 그림, 십자가상, 종 등을 바꾸지 않고 계속 사용하였다. 오늘의 개혁교회의 안목으로 볼 때는 카톨릭 미사의 보존이라는 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 그대로이다.
2. 쯔빙글리
루터계와 전폭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측으로서 미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본정신을 갖고 개신교의 새로운 예배를 주장했다. 쯔빙글리는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신조나 예전을 부정해 버리는 극단적 개혁의 주도자로서 등장 했다. 그는 예배에서 음악을 모두 배제하고 시편의 교송으로 대체했으며, 봉헌의 기도나 중보의 기도마저 사용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매주일 가졌던 성찬을 폐지하고 1년에 4번 집례토록 했으며 그 의미도 기념적 성찬으로 제한시키는 예배의 내용을 주장하여 그의 교회에서 직접 실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 방향은 눈에 보이는 예전의 형식이나 경건의 태도를 경시하고 오직 성령님을 통한 믿음의 성장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안의 십자가를 포함한 모든 상징물들을 철거하면서 교회의 상징마저 거부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3. 스트라스부르그 : 개혁된 예배에 관한 일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난 곳은 스트라스부르그였다. 루터파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도 퍼지고 있었으나 이곳 개혁자들은 상당히 독립적 이었다. 미사에 대한 첫 번째 개혁안이 1524년 디볼트 쉬바르츠에 의해 만들어 졌다. 그 안은 급진적이지 않던 것이 나중에 루터의 개혁안보다 훨씬 더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것으로 발전 된다. 제안의 내용을 보면 예복, 무릎을 꿇음, 사제의 손씻기, 기타 예배의식 등은 그대로 두고 있다. 그러나 미사를 희생적인 것으로 지칭하는 모든 것과 성자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원을 없애 버리고, 미사곡을 소리내어 부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바꾸도록 하였다. 마틴 부처는 쯔빙글리의 강조점과 루터즈의를 결합하여 “스트라스부르크 예전”을 발전 시켰다. 부처는 예배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축소 시켰다. 대부분의 화창과 답창들이 제거됨으로써 예배의 교송적인 성격이 사라지게 되었다. 부처 이후 에배의식에 관한 용어들은 새로운 용어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미사를 주의 만찬 또는 성스러운 식탁으로, 사제 대신에 목사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시편과 찬송을 불렀고, 성구집 낭독은 없어졌으며, 설교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성만찬 성례전은 공동예배의 규범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교구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거행하게 되었다. 대성당에서는 지금까지도 매주 행한다. 성찬식이 없이 예배가 진행되는 경우 성만찬과 관계되는 의식을 빼고 성만찬적인 의미부여를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이 형태가 개혁교회의 주일 아침예배를 위한 기초의 하나가 되었다.
4. 칼빈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 예배 의식을 대단히 만족해 하였다. 그 이유는 근대 교회에서 행해졌다고 그가 믿는 공동예배에 관한 그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예배의식을 일부 수정하여 예배의식에 관한 책을 1542년에 발간 하였다. 그가 수정하여 만든 예배의식은 스트라스부르그 예배의식을 야간 병행시킨 정도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죄상소멸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빼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대신 넣은 점이다. 그의 예배의식은 의식적인 행사, 창화의 단구, 한두 번의 응답, 성가대가 하는 수차레의 응답송, 수차레의 성구집 낭송 등을 제외시키고, 봉헌기도 만큼이나 짧게 하도록 하는 등 기도의 종류와 수를 줄이고, 예배의식의 기본적 요소를 모두 살리면서 짧고 간단한 에배의식을 만들 수 있었다. 칼빈은 설교 중심의 예배만이 아닌 성만찬이 한께 이루어지는 예배를 원하였다. 그는 성만찬이 매주 마다 행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칼빈은 성만찬이 없는 예배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봉헌과 성만찬 자체를 없앤 것이므로 완전한 예배
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틴 부처와 존 칼빈 그리고 존 낙스는 루터와 즈빙글리와 제세레파의 교회들이 보인 양극적 주장에 대해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개혁가들이다.
5. 제세레파
예전에 대하여 거부감을 일으켰던 계열로서 콘라드 그레벨과 토마스 뮌처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예배 의식들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공중예배의 필요성까지 거부하였다. 그들은 교회 생활이란 그날 그날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과 수난의 길을 걷는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최우선적인 강조점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상고하고 말씀에 따라 교훈을 명상토록 하는 습관을 형성시켜 주었다. 이들은 개혁가들의 예배가 초대교회의 순결성을 상실했다고 규정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계시에 의존한 예배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극히 비공식적인 주님의 만찬을 가졌던 것이 예배의 전부였다. 즉 그들은 비예전적인 신앙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5. 기독교 예배의 신학
가.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하여 예배의 중심을 형성하게 되었는가를 살핀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는 교회를 현실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함으로써 그리스도사건의 이러한 측면들을 재현 시킨다.
1.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사역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는 타락의 우주적인 차원을 인식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는 성육신의 사건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그의 전 피조물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이로써 그의 전 피조물이 당하던 사망의 속박을 소멸시켰다.
창조주는 파괴된 그의 피조계 안에 들어가심으로써 죽음을 통하여 그 파괴자를 파멸시키 시고 그의 피조계의 재창조를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의 사역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성령에 의하여 구속사역을 찬양하 고 감사하면서 아버지를 예배한다는 점에서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을 이룬다.
2.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의 의미
그리스도의 사건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일 뿐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예배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며, 역사적인 한 사건을 되돌아보는 문제도 아니다. 오 히려 예배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의 경험 속에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져다주는 행동이다. 이러한 예배이해는 세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그리스도사건의 반복 : 반복하다는 말은 단순히 “요약하다” 또는 “되풀이하다”를 의 미한다. 예배에는 교회의 구원의 근거를 이루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요약하는 요소가 있 다. 예배에서 우리는 복음이야기를 되풀이 한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성취한 그리스도사건을 되새기며 아들의 성취된 사역을 통하여 아버지께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 이처럼 기독교 예배의 특성은 그리스도사건을 재 진술하는 데에 있다.
2) 교회의 현실화 : 예배가 교회를 현실화 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주장에 근거한다. 하 나는, 그리스도가 교회에 현존함을 나타내는 모든 물리적인 표지가 명백하며, 또 하나 는, 이 표지들은 그것들이 대표하는 영적인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스 도에 대한 물리적인 표지들(사람들, 직무, 은사, 말씀, 성례전)이 명백하다는 것은 그리 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몸 안의 각양 은사들과 행위들을 통하 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유기적인 기능을 지칭한다. 또한 이 표지들은 그것들 이 대표하는 영적인 실재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를 창 조하시되, 그것이 영적인 실재들을 표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게끔 창조하셨 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를 현실화시키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인 교 회에게 나타나시는 수단이 된다.
3) 하나님 나라의 대망 : 예배는 그리스도사건과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 인 개념, 곧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에 대한 희망은 무시되지 못한다. 교회는 예배를 통 하여 장차 올 시대와의 관계를 표현하며 지금 이 세상에서, 즉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긴 장 및 약속과 성취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 수 있는 힘을 예배로부터 이끌어 낸다.
나. 극화의 신학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느냐에 대한 이해이다. 예배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곧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관계를 극화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1. 극화의 정의
예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재 진술하고 극화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인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사건을 극화하는 것이다. 극화의 원리는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배는 사건의 극화이기에 역사적인 만남에 뿌리를 둔다. 성경의 예배는 역사 지향성을 가진다. 이스라엘 예배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행동들이다. 역사 지향성은 또한 신약의 예배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유래한다.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재 진술하며 성찬을 통하여 그 사건을 극화한다.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역사 지향성은 예배가 역사적인 사건을 재창조하고 재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예배의 주된 관심사는 단순한 사건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있다. 예배는 한편으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응답을 강조한다.
2. 낭송을 통한 극화
구약과 신약의 예배를 검토해 보면 극화가 적어도 세 가지 방식, 곧 신앙고백과 찬송 및 설교 등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1) 신앙고백 : 신앙고백의 목적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요약적인 진술로 압축하는 데에 있 다(신 26:5-9). 이 진술의 강조 점은 역사적이어서 이스라엘의 형성기를 요약하고 있 다. 이러한 유사한 신앙 고백적 진술들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고전 15:3-4, 딤전 3:16). 후기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4세기경에는 신앙고백문들이 예배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하였다. 신앙고백의 낭송을 통하여 신자는 간략한 형태
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사건들을 증거 하였다(사도신경).
(2) 찬 송 : 구약의 시편을 통한 예배자를 위하여 시편 기자의 경험을 재창조하는 효과 를 가져온다. 신약의 찬송 안에도 이와 유사하다. 이 찬송들은 기독교 신앙을 형성시 킨 사건들을 상세히 이야기 한다(빌 2:6-11).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 이외의 찬송들 역시 하나님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한 사건을 극화하며 그 사건을 우리 의 경험 속에 현재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3) 설교 : 가장 좋은 설교는 낭송의 형태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를 재창조하고 과거를 현재에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전체는 구약 설교의 훌륭한 표본이다 (신 1:5-8). 초기 교회의 설교들은 설교를 통한 낭송의 훌륭한 표본들이다(행 2:22-24, 36).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낭송을 통한 극화의 위치와 의미를 회복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3. 드라마를 통한 극화
낭송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압축하고 개괄하지만 드라마는 가시적이고 유형적이며 구체적인 상징들을 통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개괄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역사적인 사건을 재창조하고 그 의미를 예배자에게 선포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극화한다.
(1) 극적인 재현을 통한 극화 : 성찬예식들은 드라마를 통한 재현이었으며 시내산에서의 비준 행위와 같이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재현하였다. 구약에서 드라마를 통한 재현의 가장 현저한 예는 유월절이다(신 6:20-23).
(2) 극적인 재현을 통한 신약의 극화 : 신약의 예배제도는 구약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기 때문에 극화의 요소가 그렇게 분명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찬, 또 는 주의 만찬에서 극화의 요소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3) 극화로서의 예배의 성격 : 예배는 전문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극적인 요소들에 의하여 특징 지워지며 드라마와 평행 되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대하 5;11-14). 예배는 드라마의 모든 외적인 요소들, 곧 각 본, 감독과 배우들, 대사와 음악과 행동들, 만나는 시간, 공간의 활용 등을 포함한다. 예배는 그리스도사건을 극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각본이 있을 수 있다. 매주 새롭고 창의적인 예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 에서는 모두가 연극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따라서 청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배 드라마의 두 번째 요소, 즉 예배는 드라마의 외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속도, 감정, 감각 등과 관계 있다. 예배의 외적이고 내적인 요소들은 예배의 활동성과 역동성을 위하여 적절하게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형식과 표지의 신학
예배는 극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사건을 극화하고 그 사건에 응답할 때에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을 포함하게 된다. 형식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의 표지들과 상징들도 포함한다.
1. 형식의 신학
(1) 창 조 : 첫째로, 기독교는 창조의 선함이 하나님의 상상력과 행동의 산물이요, 창조 주를 반영하는 창의적인 작업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창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창조주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적인 창조개념은 영적인 실재가 물질적인 표현을
통하여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관점의 가장 현저 한 위험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예배공동체에 임하시는 예수의 현존의 표시로서 빵과 포도주의 가치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2) 계 시 :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 한 신학적인 근거는 계시의 교회에서 발견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연계의 피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신다. 셋째로, 하나님은 예배제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3) 성육신 : 성육신 교리는 형식의 신학의 핵심에 속한다. 영원한 말씀이 성육신을 통하 여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요 1:14).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영적인 실재가 지상의 형 식을 통하여 알려질 수 있다는 원리를 영원토록 확증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그의 아 들의 몸)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 결과 물질의 창조(몸을 포함하여)가 예배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말씀과 예식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 믿음 안에서 찬양과 감사로써 응답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 여 예배는 형식과 표지들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몸을 입고 있고, 물질계 안에서 살 며, 언어와 상징을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무형적이고 무질서하고 표지 없는 예배는 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표지에 의하여 유형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이다.
라. 표지의 신학
표지들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해 주는 언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표지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의 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한 가지를 이해한다.” 언어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로, 일상적 언어이다. 둘째로, 학문적 언어이다. 셋째로, 시적 언어이다. 이 언어에서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직관 등을 이끌어 내기 위해 상징들을 사용한다. 상징들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상징은 본질적으로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의 상징은 초자연적인 실재를 나타낸다. 상징들은 예배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이 요구된다. 불신자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세주 예수에 대한 신앙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킨다.
마. 질서의 신학(말씀)
말씀의 예배는 세 가지의 주요 측면들, 곧 회중의 준비, 하나님의 말씀, 회중의 응답 등을 포괄한다.
1. 회중 스스로의 예배준비
교회가 공중예배를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 가 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1) 침 묵 : 침묵은 두려움과 관계가 있다. 침묵은 내면적인 것과 명상, 준비, 개방성 등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침묵은 초자연적이고 성례전적인 성격을 가진 엄숙한 종 교의식이다. 영적인 교제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뿐 아니라 그와 하나되는 수준 에 도달하기 위한 내적인 긴장이다.
(2) 행 렬 : 행렬은 삶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보통 무엇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 한다. 예로서 구약의 예배는 노래와 큰 소리나는 악기 및 춤 등을 수반한 공교한
행렬의 특징을 갖고 있다. 4세기 이후에 교회가 행렬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고 있다.
(3) 영 접 : 영접은 행렬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만남이라 는 공식적인 행위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자들이 영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4) 기 원 : 기원하다라는 단어는 부탁하거나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예배의 경우에 회중의 구성원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사회자의 대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기를 요청한다. 기원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그리고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아버지를 예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5) 하나님의 영광의 시인 : 일단 회중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누구신 지를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영광송으로 알려져 있다.
(6) 죄인임의 인정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2.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1) 성경봉독 :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시내산에서의 공중예배를 소 급된다. 성경을 강조하는 경향은 성전에서 회당으로, 그리고 기독교 예배 안으로 전 해 내려 왔다.
(2) 응 답 : 교회는 또한 성경낭독에 대하여 서론적인 말과 응답을 사용함으로써 성 경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이 표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 한 내적인 확신을 표현하는 방식들이다.
(3) 설 교 : 예배에서 설교는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창조, 성육신, 죽음, 부활, 종말)을 선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적용시키는 시 간이다.
3. 하나님께 대한 회중의 응답
(1) 음악의 제사 :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예배의 음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한 다. 이것은 음악 제사의 요점이다.
(2) 헌금의 제사 : 구약에서의 십일조가 하나님의 명령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 서는 헌금이나 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 으로 여겨진다.
(3) 신앙의 제사 : 예배 중에 신앙고백을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은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를 극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데에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고백은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증거가 되고 아들을 통하여 이 신앙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된다.
(4) 기도의 제사 : ‘회중의 기도’는 초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갖고 있던 유기체적인 이해에서 유래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식의 기도는 5세기에 이르 러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중세 때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5) 평화의 입맞춤 : 평화의 입맞춤은 하나님과의 평화 및 서로간의 평화를 표현하는 동작이다. 초기의 기록을 보면 그것들은 성찬이 시작되기 전, 곧 말씀 예전의 마지 막에 배열 되었다.
바. 질서의 신학(성찬)
1. 서론적인 질문들
(1) 성체성사인가 아니면 주의 만찬인가?
신약은 성체성사와 주의 만찬이라는 두 용어를 다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20에서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의 만찬이 적절하다고 보는 견해는 교 회가 당시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것을 재연하고 기억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확신에 근 거한다. 성체성사(Eucharist)라는 말은 바울의 고리도 전서 14:16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인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감사를 드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2) 성찬의 본질
성찬을 묘사하는 세 가지의 중요한 신약 어휘는 기억(remembrance)과 친교 (communion) 및 제사(offering)이다. 제사로서의 성찬에 대한 개념은 자신을 아버지께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 뿌리박고 있다. 이 개념은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여 발전 되었다(히 7:-10: 참조).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빵과 포도주의 제사를 예 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의 예전연구의 결과 성찬을 “찬양과 감사의 제사”(히 13:15-16)로 본다.
(3) 성찬의 순서
심약의 기록은 예수께서 ① 떡을 취하시고, ② 그것에 대하여 감사(성체성사)를 드린 다음, ③ 그것을 떼시고, ④ 그것을 몇 마디의 말씀과 더불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⑤ 잔을 가지시고 ⑥ 축사(성체성사)하신 다음 ⑦ 몇 마디의 말씀과 더불어 그것을 제자들에게 건네 주셨다. 현존하는 교회의 초기 예전들을 보면 이것을 사중 적 인 행동으로 압축되어 있다. ① 취하시고 ② 축사하시고 ③ 떼시고 ④ 주시는 것 등의 사중 적인 행동으로 요약 된다(눅 24:30).
2. 극화된 그리스도의 사역
(1) 그가 취하심 : 성찬의 첫 부분은 주로 말없이 하는 행동이다. 평화의 입맞춤이 있은 후 집례자는 하나님께 드려지기로 되어 있는 빵과 포도주를 취한다. 이것은 예배공동 체 전체의 참여를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한 행동이다.
(2) 그가 축사하심 :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복기도는 고대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진 관행이었다. 축사에 속하는 부분은 서론적인 대화, 머리말, 상투스(Sanctus) 및 상 투스 이후의 기도라고 명명되는 감사기도의 주요 부분 등을 포함한다.
(3) 그가 떼심 : 유대 적인 배경에서 볼 때 떡을 떼는 것은 본래 나누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떡을 떼는 행위는 몇몇 의미 를 간직하게 되었다. 즉 초기에는 교회일치와 관계가 있었다. 3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의 찟긴 몸과 교회를 위한 그의 죽음의 상징으로 대체된 듯 하다.
(4) 그가 주심 : 가장 초기의 전승을 보면 예수의 이 전통(마 26;26-27)이 교회 안에서 전 해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집례자는 빵과 잔을 각 사람에게 주고 예수의 말씀을 그대 로 말하거나 그것을 쉽게 풀어서 말했다. 바로 이 지점(고전 10:16)에서 제사와 기억이 친교, 곧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신비적인 교제가 되는 것이다.
(5) 성체 강복식 : 성체 강복식은 축복의 선포이다.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부여 된 이론적인 축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9민 6:22-27). 신약에서 아론 적인 축복과 평 행 하는 것은 사도 적인 축복이다(고후 13:13, 13:11). 구약의 축복과 신약의 축복의 차 이점은 후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의 축복기도에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그의 종들을 통하여 전달된다. 그리하여 축복
기도는 항상 기독교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 왔다.
(6) 폐회송 : 예배는 기도와 성체 강복식 및 폐회송 등으로 끝난다. 폐회는 곧 “밖으로 나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폐회는 커다란 기쁨과 넘치는 찬양의 특징을 가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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