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역은이:최영찬(목사).
발췌한곳 http://www.biblenara.com
펌돌이,편집한이:라면맨.
제목: 기독교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과 대답.
서론.
오늘날 현대 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그 문제점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에직면하고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세상이 메말라가고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때에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곳이 없을정도다.
이때에 사람들이 문득 생각하는 것은 아무도 나의 문제점을 해결해주지않는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 는 의식의 팽배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실제의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횡설수설이지만 이런때 우리가 가장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진리는 있는가? 진리는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문제는 거짓인가 참인가?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것은 문제인가 문제가 아닌가? 나는 이것에대해 어떻게 인식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어떤것이 정말 올바른 생각이요 행동인가? 무엇이 나로하여금 진리로 이끌어 줄수있는가? 성경은 진리인가? 성경은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는 누구이며 나는 그에 대해 어떤 존재인가? 없다면 나의 삶은 어떤것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기독교는 무엇인가? 이단은 무엇인가? 선과악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어떻게 보면 문제같지도 않지만 실제로 인생에 있어 심각한 문제에 얽매여서 살고있는 우리들에겐 삶을 살고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또 의문을 계속 제기하면서 투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이때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목회와 성경공부 그리고 선교를 병행하시는 최영찬 목사님의 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을 신앙과 성경에 입각한 관점으로 시원스럽게 제공해주고 있다.
앞으로 그의 글은 업데이트 되어서 계속 이북으로 제공이 될것이다.
아무쪼록 독자여러분들이 이 이북으로 인해 인생과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에 대한 시원스런 해답이었으면 하는 바람 마지 않는다.
2003년 1월에 아르헨티나에서 라면맨이…^^;;v.
[1]과학시대에도 성경은 필요한가?.
한경직목사님의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를 인용.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4) * 과학 시대에 종교가 필요한가?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기독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은 과학 시대인데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종교시대가 지나가고 과학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과학을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면 되지 왜 종교가 필요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세계가 진보하면 온 세계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과학을 통해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과학은 유토피아를 가져다 주었는가?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러한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세계 1차 대전이 전 세계를 휩쓴 지 얼마가지 못해서 전 세계 인류는 또 다시 세계 2차 대전을 치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계는 피비린내 나는 참화를 겪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과학이 제일 발전된 나라에서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20세기는 피비린내 나는 세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질지 모르는 염려를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결과는,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 과학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지 못한다.
그러면 과학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과학은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불은 밥을 짓는 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데도 씁니다.
불은 올바르게 쓰면 매우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을 잘못 쓰면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옵니다.
불을 잘못 사용하면 집을 태우고, 사람의 묵숨을 빼앗아갑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쓰면 인류에게 매우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원자탄 수소탄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과학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썩고 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의 힘은 이러한 악한 근성을 바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바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종교가 해야 일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올바르게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 인간은 빵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은 경제 시대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지금도 많은 사람이 빵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나를 따라 오라. 그러면 내가 네게 빵을 주겠다"
.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옳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의식주"
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경제문제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과연 삶에 참된 만족을 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산 국가에서는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약속하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겠습니까? 민주주의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경제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보장하면서 경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은 그 삶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고 살까요?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끼고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람이 육신으로만 되어 있다면, 아마 동물처럼 밥만 먹고 옷만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면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은 육신으로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또 다른 불길, 즉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의식주가 풍부하다 해도 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텅 빈 느낌, 즉 공허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떡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람을 짐승처럼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은 짐승과는 다른 무엇이 육체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본질상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그것을 얻지 못하면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는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 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들어 공원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이 노인이 빌어먹는 노인인줄로 생각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고함을 쳤습니다.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
그러자 쇼펜하워는 눈을 번쩍 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서 왔냐구? 아! 이 사람아 내가 그걸 알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몰라서 이렇게 눈을 감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맞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 출관을 하려고 하는데 만주에 가 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아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아직도 그 말이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 후에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문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매우 등한시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 없이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은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 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은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종교 없이는 인간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2]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1.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주신 구원을 믿음(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밖의 모든 종교는 여러 가지 체험이나 선한 행위, 훈련 등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2.대표적인 예로,유대인들은 율법을 준행함으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회교인들은 성지순례 등 종교적인 의무 준수가 그들을 신앞에 나아가게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도들은 수련을 가르칩니다.
이 모두는 항상 인간이 아래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3.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사다리의 방향을 바꾸고 구원의 방법을 바꿉니다.
성경의 중심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한복음 3:16)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구원을 위해 스스로 어떤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빈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4.그래서 쉐퍼(Francis A.Schaeffer)는 "예수믿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 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쉬운 이유는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이유는 예수님께 자신을 잘 맡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대로 자기 소견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은혜를 통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오직 은혜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종교 개혁의 핵심속에서도 표현되었습니다(라브리).
[3]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요 3:16) 지금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예수교' 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 '장로교'니 '감리교'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맨 처음에 기독교를 무어라고 불렀을까요? * 기독교의 첫 이름 기독교는 맨 처음에는 그냥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성경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도 계시겠지만,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 신약이 기독교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펴보면 맨 처음에 나오는 네 권의 책은 전부 '복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리고 마가복음 1장 15절을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주님이 전한 말씀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기독교 메시지를
"복음"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말은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기쁜 소식', 또는
"좋은 뉴스(good new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기독교 메시지를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고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지식과 소식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소식이라고 하면 큰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뉴스는 누구든지 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TV나 라디오를 들을 때에 뉴스를 많이 듣습니다. 왜 우리가 신문을 사서 읽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문 안에 뉴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마는, 우리 민족은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를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로 죽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계에서는 연말이 되면 금년에는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는지 선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로 가장 큰 뉴스는 무엇이었을까요? 또는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는 무엇이었습니까? 징기스칸이 200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간 것이었을까요? 이 소식은 정말 대단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서양에서는 무엇이 가장 큰 뉴스였을까요? 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콜롬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신 대륙을 발견한 것이었을까요? 이러한 소식들은 물론 굉장한 뉴스거리에 속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국에서 가장 큰 뉴스는 무엇이었을까요?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사건이었을까요? 아니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것이었을까요? 아마 그 시대에 신문이 있었다면 이러한 사건들은 당연히 빅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뉴스라고 해서 모두 다 "
좋은 뉴스
"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은 큰 뉴스지만, 좋은 뉴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뉴스인 동시에 또한 제일 좋은 뉴스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한 좋은 뉴스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소식은 한국 민족에게는 좋은 뉴스입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일본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가 되지 못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큰 뉴스이면서, 또한 제일 기쁘고,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뉴스가 있을까요? 성경은 바로 이러한 뉴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제가 바로 이런 뉴스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우주 최대의 뉴스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크고 기쁜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들은 뉴스 중데 가장 좋은 뉴스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복음은 북태평양에 사는 에스키모인이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 그리고 백인이나 황인종 모두에게 다 기쁨을 주는 뉴스입니다. 그래서 처음 기독교를 전한 사람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그냥 복음, 즉 '좋은 뉴스'라고 소개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들이 전한 뉴스의 내용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좋은 뉴스를 간단하게 요약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자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제부터 이 말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은 첫째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고 그것을 다스리시며,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뉴스는 우주적인 뉴스입니다. 이것은 온 우주에 선포되어야 할 큰 뉴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나, 특별히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첫째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는 민족과 민족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은 슬픔이나 고통, 시기와 미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귀한 것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생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녀입니다. 아마 부모 중에 외아들을 둔 사람이 있디면, 그에게 있어서 그 아들처럼 귀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을 주셨다고 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고,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모든 민족들이 듣고 놀랄 만한 큰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식은 천지가 듣고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또한 성경은 "
누구든지 그(외아들)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
" 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예비해 주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만 알아도 여러분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종교이며,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며,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소식은 모든 인류가 갈구하고, 또 듣기는 원하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전하는 소식은 제일 크고 좋은 뉴스이며, 또 누구에게나 필요한 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기독교를 전한 사람들은 그 소식을 그냥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뉴스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앞에서 우리는 이 내용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4]성서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반대로 생각하면 대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만일 성경이 세상에 없었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 1. 세계 2대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없었겠지요. 이들은 모두 구약 성경의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2. 지금의 찬란한 유럽과 미국 문명이 없었겠지요. 이들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문명이니까요. 실제로 성경은 해적의 나라였던 영국을 세계 최고의 신사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3. 아마 역사의 기준(A.D-B.C로 구분하는)도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기준 역시 성경에 기록된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현대 역사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없었다면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대학교들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수많은 젊은 이들도 다른 대학에서 다른 교육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5. 이 외에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지만 여기에서 줄이겠습니다. 만일 님께서 성경이 없었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까?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신다면 성경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무슨뜻인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딤후 3:16).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감동
"이란 말은 헬라어 "떼오브뉴마토스"를 우리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호흡" 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은 "영감" 을 "Inspiration"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in" 과 "spirit" 의 합성어라고 말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불어넣어졌다는 의미와 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이란 말은 원래 '하나님의 호흡이나 숨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그를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생기를 불어오게 하여 그 뼈들을 큰 군대로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호흡, 또는 숨결은 이러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을 그들 안에 불어 놓어 그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오류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올바르게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성경은 사사롭게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언제든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벧전 1:21)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썼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저자의 인격과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도록 도우셨으며, 그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켲셨습니다. *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증거들 1) 성경의 통일성 1600년 이상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40여 명의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신구약 성경이 내용과 사상에 있어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다. 성경의 목적과 프로그램은 놀랄 정도로 하나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라는 것을 입증함. 2) 하나님에 대해 논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인식론을 제공함 성경은 인간(과학이나 기타 종교)이 제공할 수 없는 독특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있음. 이 것은 성경을 계시한 분이 성령임을 입증. 3) 성경적인 증거들 가. 주님의 증거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마 5:18)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요 10:35) 나. 바울의 증거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딤후 3:16) 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 "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라. 베드로 사도의 증거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을 상고함"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
"(벧전 1:21). [6]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 성경 전체의 핵심 요약
1. 자존하신 하나님(창 1:1)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홀로 존재해 오셨다.
2. 천지와 인간 창조(창 1:2-2:)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땅의 관리를 맡기셨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하셨다.
3. 인간의 타락(창 3:, 롬 5:12, 6:23)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미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만을 사랑하게 되었다. 4.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우리의 의를 위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죄인으로 선고되어 십자가형을 받으셨다.(고후 5:14-21).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오심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신 후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 나셨다.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첫 번째 부활하신 분)가 되셨다. 그 후에 주님은 승천하여 하나님이 계신 보좌의 우편으로 가셨으며, 이곳에서 지금까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주님은 이 땅에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 성도들을 의와 진리로 인도하고 계신다. 6. 재림과 완성(계 5:11-14) 언젠가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심판 받을 자들은 심판하시고, 믿는 성도들은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며, 이 때에 하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7. 심판과 영생 이때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때에 주님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들어가고,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행위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7]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은 성경원본만 해당합니까?. 1. 성경의 무오성의 범위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딤후 3:16, 벧후 1:21).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성경을 직접 기록한 원 저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오성은 이들이 직접 기록한 원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 사본(또는 번역본)과 오류 성경 무오성은 성경 사본이나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필사한 분들은 성경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본은 놀라울만큼 원본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본이 무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의 여러 사본을 비교하 종종 다음과 같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1) 중자 탈락: 중복해서 쓰여져야 할 글자, 음절, 단어를 한 번만 기록함 2) 중복 오사: 한 번만 써야 할 것을 두 번 기록함 3) 글자의 순서를 바꿈: 글자나 단어의 위치를 바꾸어 기록함 4) 합성: 두 개의 다른 단어를 하나로 결합시킴. 5) 나눔: 하나의 단어를 두 개로 나누어 씀. 6) 동음이의어: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바꾸어 기록함. 7) 비슷하게 보이는 글로 읽음: 예) 달렛과 레쉬와 같이 비슷한 글자 혼동. 8) 유사한 끝(호모에오텔류톤): 필경사의 눈이 하나의 끝에서 다음에 나오는 유사한 끝으로 넘어 가면서 중간 부분을 생략함. 9) 우연히 생략됨: 우연한 실수로 단어나 숫자가 생략됨. 10) 모음을 자음으로 잘못 읽는 경우: 알렙, 헤, 와우, 요드가 처음에는 자음으로만 사용 되었으나, 후대에 모음으로 사용되면서 혼동 됨.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미미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문맥을 바꿀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원본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본이 발견된 관계로 이들을 비교하면 쉽게 원본의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오는 원문 텍스트들은 사본의 내용이 다른 부분에는 각주를 달아 각 사본을 비교하여 원문의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번역 성경의 경우 주로 이러한 원문 텍스트를 참고로 해서 번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번역 성경 역시 오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문 성경을 다른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는 작업 자체가 여러 가지 한계성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정경을 결정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제 홈페이지에 있는 "1.성경 서론" 이라는 메뉴 안에 있는 "성경서론"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안에 보면 "3.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과정" 안에 정경 결정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경 결정은 이미 교회에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아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책들을 공개적으로 구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경 결정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소수의 책에 한정되었습니다(예-아가서-노골적인 성적 표현, 전도서-허무주의, 잠언-모순된 내용 포함). 결국 정경 결정은 이러한 소수의 책이 영감된 책(저자 솔로몬에 근거하여)이라는 것을 결정한 것에 지나지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정경을 결정할 때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구약 성경 1)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을 천명하고 있는가? 2) 책 속에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는 본문이 있는가? 3) 그 책이 성령께서 영감 시키셔서 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4) 기독인-예수님과 사도들이 그 책을 정경으로 인정해 주었는가?"
* 신약 성경 1) 사도들이나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기록한 책인가? 2) 그 내용이 복음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3) 모든 교회의 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책인가? 4) 성령의 인도를 받은 증거가 있는가? * 외경은 개신교와 유대인은 정경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경우 이러한 책을
"제 2정경"
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제1정경과 제2정경으로 구분한 것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이 책들은 확실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의 책들과는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들을 직접 읽어보시면 그 내용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신화나 전설 같은 내용 포함).
유대인 역시 구약 39권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카톨릭이 정한 외경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의 성경만이 개신교인과 카톨릭, 그리고 유대인들이 모두 정경을 인정한 책들입니다.
개신교의 경우
"외경"
은 신앙인들이 읽어서 도움이 되지만 정경에는 포함시킬 수 없는 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 기록해 주신 책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진 책들이며, 또한 그 책 안에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증거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 지도자들이 어느 것이 성경이고 아닌 지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8]성경에 (없음)이라고 표시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안타깝게도 원래 성경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기록한 성경 원본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그 동안 발견된 수많은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수많은 성경 사본들을 참고해서 원래 기록된 성경 원본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2.
그런데 여러 가지 사본을 비교하다 보면 같은 본문에 대해서 각 성경 사본의 내용이 다른 경우가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서 개역 성경의 (마 6:13) 후반부를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된 부분이 괄호 안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기록된 사본에는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오래된 사본(이 사본이 더 중요함)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성경은 이 내용이 일부 사본에는 있지만 다른 사본에는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괄호 안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3.
또한 성경을 읽다가 보면 질문하신 경우와 같이 (없음)이라고 표시된 구절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이러한 경우는 일부 사본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부 사본에 기록된 내용이 원래에는 없었던 내용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개역 성경의 경우 (마 23:14)을 보면 (없음)이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일부 사본에는 (마 23:14)부분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
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본의 내용을 비교적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러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마 23:14)이 원래 없었던 것을 후대에 일부 사본 기록자가 첨가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절을 그냥 생략하지 않고 (없음)이라고 표시함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부 사본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4.
이와 같이 성경 학자들은 성경 내용을 기록할 때에 괄호나, (없음), 또는 단어나 구절 아래에 난하주를 붙여서 사본 상의 문제가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본 상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여 성경 원본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돕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참고로 성경에 (없음)이라고 표시된 예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 17:21, 18:11, 23:14) (막 7:44,46, 11:26, 15:28) (눅 17;36, 23:17) (행 8:37, 15:34, 28:21) (롬 16:24) [9]헬라어 성경 본문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
1.
신약 성경 원본 기록과 그 보존 과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여러 사람의 글이 모인 것으로, 그 여러 글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저자들은 각기 교양과 신앙 경력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각기 성경을 쓸 때,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종이(파피루스 papyrus)와 붓과 잉크를 가지고 썼다.
그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이 성경의 일부분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 그들이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며, 종이나 붓이나 잉크는 값이 비싸고 귀한 것이어서, 특별한 각오와 결심이 없이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즉 더 비싼 가죽 종이(皮紙 parchment, vellum)를 용지로 사용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만큼 귀중한 글을 쓴다는 의식도 없었기에, 그 당시 보통 얻을 수 있는 용지인 파피루스(papyrus =paper)를 사용했던 것이다.
파피루스라는 종이는 애굽 나일 강 가나 습지(濕地)에서 많이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植物)의 내피를, 펴서, 가로 한 겹 세로 한 겹 놓고, 눌러서 말린 것으로, 그 지대의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흔히 사용하던 필기 용지였다.
긴 글을 쓸 때에는 보통 일 척(一 尺) 평방 가량의 것을 몇 개라도 이어서 긴 두루마리를 만들어, 거기에 쓰고, 그것을 두루마리로 말아서 수신인(受信人)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코이네(koine=?????) 헬라어라는 평범하고도 통속적인 사람의 말로 기록된 동시에, 그 시대의 가장 평범한 필기 용지인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기록됐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파피루스는 이른바 초지(草紙)여서, 그리고 한국이 자랑하는 한지(韓紙)와 같이 견고하고 지구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쉽게 끊어지고 꺽어지고 부스러지기가 쉬웠다.
가령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냈을 때의 일을 상상해 보자.
그 편지는 매 주일마다, 아니 매일 그 교회 회원들에게 읽혀졌을 것이고, 따라서 오래지 않아 그 편지는 때가 묻거나,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해서, 그것을 새 용지에 옮겨 써야 할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것을 옮겨 쓰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서, 원본과 차이가 없는 것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헬라어 문자가 대문자들만 있었고, 띄어쓰기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리고 활자판이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어서 같은 글자라도 모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 쓰는 사람이 원본을 100%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이 연약한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아무 손상도 받지 않고 그 원본이 고스란히 오늘까지 보존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시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온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편지를 베껴오도록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단계에서만 보더라도 원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필사본이 다르고, 빌립보 교회가 만든 필사본이 또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 27권의 글이 우선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의 필사본이 만들어져야만 했고, 원본들은 얼마 안 가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원본의 대를 잇는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점점 많아져서, 각 교회에서 원본 대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약 성경의 파피루스 필사본들이 신약 성경의 일부분 또는 몇 책이 함께 필사(筆寫)되어(어떤 것은 복음서만, 어떤 것은 바울서신만, 어떤 것은 사도행전만, 어떤 것은 계시록만, 어떤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역시 그 용지의 나약성과 보존 기술의 취약성 때문에, 아깝게도 거의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었다.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2세기 상반기(A.D.
125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P52가 있고, 오늘까지 발견된 9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제2세기의 것이 한두 개(P90 ,P98) 더 있고, 나머지는 제3세기로부터 제8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교회가 이렇게 파피루스 사본을 성경으로 읽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필사본이 만들어지면서 낡은 것은 자연히 사라져간 것이다.
현존하는 90여 개의 신약 성경 파피루스 사본들이 내용에 있어서 꼭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소간의 차이와 불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필사자인 인간들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의 실수와 때로는 고의적 변개(變改)로 인해서 성경은 초창기부터 원본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비록 사소한 것이지만)전달되어 온 것이다.
2.
대문자 사본(Uncials)과 소문자 사본(Minuscules) 성경의 귀중성을 깨닫는 교회들은 파피루스 사본들의 나약함과 지구성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구성이 있고 견고한 가죽 종이로 파피루스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제4세기부터는 가죽으로 된 용지를 사용하여 성경을 필사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의 지구성과 편리함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300개나 되니, 그 수효로 보아서도 98개에 불과하는 파피루스 신약 사본보다 훨씬 지구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문자 사본은 용지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좀체로 그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대문자를 가지고 썼기 때문에 단위 지면에 기재되는 내용이 비교적 적으므로 비경제적이었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대문자 사본의 수가 적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계속 파피루스 사본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에서는(아마도 부유한 교회) 대문자 가죽 사본을 사용하였다.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사본이 공존하는 시대가 제 7세기 내지 제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수가 점점 늘고, 성경을 필요로 하는 교회나 수도원이나 개인들이 급격히 많아졌기 때문에, 소문자와 필기체가 고안되었고, 가죽 종이를 사용하되, 많은 내용을 빠른 시간에 필사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그 시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450년에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즉 제9세기 이래 15세기 중엽까지, 많은 소문자 사본이 만들어졌고, 특이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는 많은 소문자 사본들이 필사되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방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이 대거 필사(筆寫)되어, 비슷한 종류의 사본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800여 개의 소문자 사본들은 제9세기 이후의 것들로서, 원본으로부터 따진다면 몇 십대 후손인 사본들을 필사한 것들이며, 서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뿐 아니라, 고대 사본들과 비교한다면 많은 변개(變改)가 있음을 볼 수 있다.
3.
성경일표(聖經日課表 Lectionaries)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배의식도 발전하였고, 성경을 균형 있게 봉독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부분을 매일 또는 매 주일로 나누어 읽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루하루 읽어야 할 성경 부분들을 일별(日別)로, 또는 주일별(主日別)로 나누어 기록한 것을
"성경일과표"
(聖經日課表 Lectionary)라고 한다.
예컨대 대강절(待降節 Advent) 첫 주일에 사2:1-5; 시122; 롬13:11-14; 마24:36-44를 읽기로 하고 그것들을 한 종이에 모아서 필사본을 만든다.
이런 일과표가 역시 사본의 일종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과표도 약 2,000개가 남아 있어서 원문 비평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들도 역시 그 각자가 필사되던 시대와 장소에 있던 사본들을 전사(轉寫)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대본(臺本)의 경향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4.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church fathers 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사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역시 그가 사용한 사본의 필사본으로서,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에 일조(一助)가 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장소와 시대를 반영하며, 그 지대에 유포됐던 사본들의 성격을 보여주거나 암시해 줄 수 있다.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서 실수로 잘못 전사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5.
고대 역본들(Ancient Versions) 성경이 처음에는 원어로 유포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신자들의 모국어 또는 상용어(常用語)로 번역되는 일이 생겼다.
구약 성경이 기원전 3세기부터 애굽의 알렉잔드리아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기원전 6세기부터 구약 성경이 아람어로 옮겨져 타르굼(Targum)이 생긴 것도 그 예이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 전역에 퍼져 나가면서, 자연히 성경이 각 지방의 언어로 번역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선은 선교사들이 각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즉 그들에게 복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코이네 헬라어보다도, 더 친숙하고, 더 알아듣기 쉬운 지방말로 성경을 옮겼던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시리아(Syria)에서 시리아어 번역이 시도되었고, 다음은 라틴어, 그리고 이집트의 콥틱어로 번역되었다.
그 뒤를 이어 고트(Gothic)역, 아르메니아역(Armenian), 죠지아역(Georgian), 에티오피아역(Ethiopic), 고대 슬라브역(The Old Slavonic), 아라비아역(Arabic) 등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런 고대 역본들은 역시 그 번역이 이루어진 시대와 장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사본들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된 것이므로, 그 역본들을 검토하면 그 배후에 있는 사본들의 성격과 경향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고대 역본들은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에 많은 도움을 준다.
6.
신약 성경 사본들의 지방적 경향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 각 지방으로 번져 나갈 때, 자연히 신약 성경도 사본이 되어 각 지방에서 읽혀졌다.
교회가 왕성하여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경의 수요(需要)도 늘었을 것이고, 따라서 사본을 만드는 일도 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발전사(發展史)를 개관할 때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북 아프리카(칼테지), 로마, 마게도니아(콘스탄티노플), 소아시아(에베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대별(大別)할 수 있으며, 교회 활동이 그런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고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지방에서 만들어져 사용되던 사본들도 자연히 그 지방에 어울리는 성격을 지니게 됐다고 보인다.
초창기부터 원본 성경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지방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되는 것은 필사자들이 다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필사자의 실수나 고의적 변개에 의해서, 사본들이 예외없이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 것들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어느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소위 다수 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해서 절대 다수의 신약 사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비잔틴 계통의 사본들도 서로 어느 하나도 꼭 같지를 않은 것이 사실이어서, 어느 하나는 원본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필사한 사본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조금씩은 다 원본에서부터 이탈되고 달라졌다고 말해야 양심적이다.
다만 그 많은 사본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며, 경향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것들을 분류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본문 비평가들의 결론이다.
최근의 결론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약 사본의 본문형태(text-type)가 네 가지로 크게 나누인다는 것이다.
(1)애굽 형(알렉잔드리아 형), (2)서방 형(Wester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3)(전부터 일컬어) 가이사랴 형이라고 하는 것, (4)비잔틴 형(Byzantine) 등이다.
엘돈 제이 엡(Eldon Jay Epp)은 다른 기호를 가지고 그것들을 나타낸다.
즉 (1)A-텍스트(
"수락된"
"accepted"
= Byzantine), (2)B-텍스트(Codex B =P75 -B, 혹은 이집트 형), (3)C-텍스트(B와 D 중간 =P45 -Codex W(종전의 가이사랴 형), (4)D-텍스트(Codex D, 혹은 서방 형
"western"
)로 분류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A-텍스트(Byzantine)는 제4세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고대 파피루스 사본이나 대문자 사본이 하나도 없다.
즉 제4세기 이전에 필사된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 중 A-텍스트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세 타입의 텍스트들(B, C, D 텍스트)은 A.D.
200년 경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파피루스 사본들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1) 거의 초기부터 신약 성경 사본이 지방에 따라서 특이한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고, 대별하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2) 그리고 B, C, D 형의 본문이 A형의 본문보다 먼저 생겨난 것이라는 것, 즉 A 형의 본문은 연대적으로 가장 뒤에 형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 네 가지 형의 본문들 중 어느 하나, 즉 A형은, 일부 무비판적인 맹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원본으로부터 조금도 변개된 것이 없이 순정(純正)하게 남아 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원본에서 이탈했고, 그 변개의 도수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변개가 심한가, 그리고 변개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원본에 가까운 본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성경의 원본을 보존하실 능력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본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일부 맹신자들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당신의 말씀을 무흠하게 보존하셨을 것이고,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 Majority Text)가 바로 그것이라고 억지를 쓴다.
아무런 근거나 증거도 없는 거짓말을 가지고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 사본은 필사자들의 각별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원본으로부터 다소간의 변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5,500여 개의 신약 사본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서로 다르며, 따라서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대로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는 필사자들이기에, 일부러 어떤 부분을 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실수로 빠뜨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원문 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짧은 읽기(reading)가 긴 읽기보다 우수하다"
이다.
그리고 난해한 부분은 필사자나 독자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바꾸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읽기가 쉬운 읽기보다 우수하다"
는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그리고 사본은 그 대 수(代 數)가 늘수록 점점 더 원본으로부터 멀어지고 변개가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본의 연대를 무시할 수 없다.
즉 오래된 사본일수록 가치가 더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평 원칙들을 적용하며 검토한 결과 알렉산드리아 형, 즉 애굽 형(Neutral text, ?, B, Sahidic, Boharic 등)의 본문이 가장 권위가 있다는 것이 정평이다.
Western text와 Caesarean text도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면서 상당한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지만, 제4세기 이후에 생겨난 비잔틴 텍스트(Byzantine text)는 가장 많은 변개와 첨가를 가지고 있어서, 최악의 사본군(寫本群)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10] 헬라어 성경 본문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2).
없음 [11]성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 성경공부를 진행하게 될 최영찬 목사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이 시간에는 본격적인 성경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성경공부 과정을 개설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성경 공부 과정은 1) 평신도들에게 2) 성경 전체를 3) 연대기적으로 개관하기 위해서 개설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평신도, 성경 전체, 그리고 연대기적 개관이라는 말입니다.
1.
대상: 평신도 첫째로 이 성경 공부는 평신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공부는 신학교와 같이 전문적인 성경 지식을 제공하기 위한 과정은 아닙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학교에서 교수들을 통해서 진행하는 것이 더 효과 적일 것입니다.
이 과정은 성경 공부할 수 있는 자료를 스스로 구할 수 없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전체적으로 개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2.
범위: 성경 전체 둘째로 이 성경 공부는 성경 전체를 공부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 책 한 권을 선택해서 한 절, 한 절을 깊이 분석해 가면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어서 좋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성경 전체를 텍스트로 해서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을 집어 나가는 방법입니다.
이 공부의 장점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성경 각 부분을 깊이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을 균형 있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성경 전체를 개관하는 작업을 통해서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하고 나서, 성경 각 부분을 심도 있게 공부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각 권을 선택해서 깊이 연구하는 성경 공부는 이미 개 교회에서 많이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실시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재 이러한 성경 공부 교재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교재 중에는 크로스웨이나, 베델 성경 공부, 그리고 트리니티 성경 공부 교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재들은 외국 교재를 번역한 것으로 국내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좋은 열매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교재 중에는 한국 장로교 통합 측 교회에서 만든 TBC성경 공부 교재와, C.C.C.리더 훈련으로 개설된 제자들 성경 공부 과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재들은 모두 독특한 특징과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효과적으로 성경 전체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공부 과정들은 교육에 열심 있는 일부 교회나, 일부 대형 교회에서만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이러한 과정에 참석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개설된 교회라고 해도 이 과정에 참석하려면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야되기 때문에 시간이 바쁜 직장인이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이 과정에 참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인터넷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성경 공부 과정을 개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
방법: 연대기적 사건 개관 셋째로 이 과정은 성경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개관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 과정을 진행할 때에 연대기적 즉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진행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 방법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호세아서가 시가서 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호세아서를 시편 뒤에서 다루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열왕기나 역대기와 함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했던 역사적 배경과 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왜 유익한지는 이 과정을 공부해 나가면서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과정은 성경책을 현미경으로 분석하듯이 자세히 다루는 과정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경치를 바라보듯이 성경 전체를 개관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 성경 공부 과정에서 평신도들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도록 성경 전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개관 작업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6하 원칙(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에 의해서 재구성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각 사건을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사건을 6하원칙에 의해서 재구성해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한 방법입니다.
성경의 각 사건을 언제(시간), 어디에서(장소) 일어났으며, 그 사건에 나오는 등장 인물(누가)이 누구이고, 어떤 사건이(무엇을) 일어나서, 어떻게 진행되었고, 또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왜-메시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는 일은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이 성경공부 과정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성경공부 과정은 성경 전체를 공부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셋째 이 성경공부 과정은 연대기적으로 성경사건을 개관하는 과정입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이 과정은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이 기간은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빠짐없이 이 과정을 들으신다면 여러분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고, 중간에 힘들어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인터넷 성경공부 사이트(biblenara.com)에
"독자의 난"
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네티즌들이 평소에 성경에 관해 궁금했던 내용을 질문하고 답변해 드리는 곳입니다.
그 곳에 얼마 전에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정경으로 결정되었는지 가르쳐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읽고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읽은 글은
"성경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권력자인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자기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성경을 만들었다"
고 주장하는 글이었습니다.
그 분은 실제로 자기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성경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
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어떻게 성경이 기록되고,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6개의 단계를 거쳐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저는 오늘 첫 번째 단계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1) 계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단계는
"계시"
의 과정입니다.
"계시"
라는 말은 연극에서 막을 여는 것처럼
"숨겨졌던 것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
을 말합니다.
연극에서 막이 오르기 전까지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막이 오르게 되면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연극과 같이 처음에 하나님에 대한 일도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그 막을 열어서 자신과,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
라고 부릅니다.
가.
계시의 종류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방법은 2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일반 계시"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신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특별 계시"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신 일반 계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
일반 계시 가) 종교 본능(하나님을 아는 지식)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심, 또는 종교 본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1:19)에서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밝히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밝히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고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본성 안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만이 가진 영적인 통찰력이며, 종교심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을 찾고 섬기거나, 또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들은 신을 찾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과 가장 닮았다고 하는 원숭이가 사원을 짓고, 신에게 제사하거나 기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에는 항상 종교가 있습니다.
문명 사회에도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도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종교가 있고, 서양에도 종교가 있으며, 또 아프리카에도 종교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종교가 있었고, 지금도 종교가 있으며, 앞으로도 인간 사회에는 종교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괴뢰군에게 붙잡혀서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삼각산 골짜기에 숨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유엔군 비행기들이 편대를 지어와서 그들에게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쏘아댔습니다.
그때에 그 청년이 숨어서 보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공산당원들과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모두 나무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고칠 수 없는 종교라는 병에 걸려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심을 부여하셨습니다.
나) 도덕성(양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능력)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법, 즉 도덕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2;14-1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행할 때에,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고, 때로는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롬 2:14-15)."
사도 바울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처음부터 일정한 법이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자기 안에 있는 법을 따라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을 양심, 또는 도덕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과 간음, 그리고 도둑질을 금지하고, 또한 거짓 증언이나 이웃의 것을 탐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양심이 율법과 같이 선명하게 선악을 구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며,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이러한 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은밀하게 음란한 행동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즉시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고발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면 또 한쪽에서는 우리가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하고 우리의 행위를 변명합니다.
이러한 정죄와 변호가 반복되면서 우리 마음은 우리 행동이 옳았는지, 아니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일정한 법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은 다른 짐승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원숭이가 죄를 짓고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인간의 도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양심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양심이 사람들이 태어난 후에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양심 가운데 후천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에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천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의 법칙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울은 이 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롬 2:12-15).
하나님은 자연계에 자연법칙을 주셨듯이, 사람들 안에 도덕적인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양심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양심을 거역하기 때문에, 양심이 불 도장을 맞은 피부처럼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일부가 마비되는 경우는 있지만, 양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양심이 선하다고 판단하는 일을 할 때에 기쁨을 느끼고, 양심이 악하다고 판단하는 일을 할 때에는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종교성, 도덕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 우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알려줌 * 우주를 만드신 분(인과의 법칙) 또한 하나님은 사람들의 안 뿐만 아니라 바깥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롬 1:2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속성들을 그의 만드신 만물을 통해 알리셨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물을 통해 알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사람들이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우주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첫째로 이 우주는 누군가 이 우주를 만든 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과의 법칙"
을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는 그 일이 있게 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바로 이 인과의 법칙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세상이 인과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과학자는 실험을 통해서 일정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는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와서 점점 그 힘을 잃고 있습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이 우주가 어느 순간에 이루어진 큰 폭발로 인해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빅뱅 이론"
이라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지구나 태양계, 또는 우주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구의 연령을 매우 길게 잡고 있지만, 우주가 일정한 시각에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도 원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무지한 주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절대의 신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증거는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수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무한대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나누면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영으로 나누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나누거나, 만을 영으로 나누거나 모두 무한대입니다).
* 우주의 구조와 질서 또한 이 우주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자세히 살펴보면 일정한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하늘을 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망원경을 통해서 그 별들을 자세히 보면, 그 별들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 안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행성들이 있습니다.
이 행성들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또한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행성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정한 궤도와 속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라고 부르는 별무리를 이루고, 이러한 별무리들이 모여서 우리가 보는 대 우주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땅에도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비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 가면 물이 많이 있습니다.
햇빛이 내리쪼이면 바다의 물은 수증기로 변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수증기는 공중에서 찬바람을 만나 다시 비가 되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 비는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청소해 줍니다.
이 비는 공기의 온도를 내려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또 땅에 있는 먼지를 청소해 줍니다.
이 비는 산에 떨어져서 나무에 열매를 맺게 하고, 들에 떨어져 풀과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이 빗물은 시내와 강물을 통해 모여서 다시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바닷물은 소금을 가지고 더러워진 물을 다시 소독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여 우리가 사는 곳의 온도를 조절하고, 열매를 맺게 하여, 청결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 몸 역시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 유전자 암호를 해독해서 인간 복제 문제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동안 우연히 생물이 생기고, 그것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세포 안에 있는 유전자 안에 인간의 모든 삶을 좌우하는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를 찾아내서 여러 가지 유전적인 질병을 치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전자의 규칙은 너무나 정교해서 조금만 잘못 되어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교한 유전 정보를 사람들의 세포 안에 넣어 주신 분은 정말 크고 위대하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선택할 이론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이 우주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모르겠다"
고 포기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며,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시 19: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
시편 기자의 노래와 같이 하늘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으며,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솜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영원하신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3) 특별 계시(성경)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계시, 즉
"일반 계시"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본성 안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도덕성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밖에 있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특별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
특별계시
"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에 대해서 반응했을까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을 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고의로 왜곡시켰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1(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으며,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한하고 전능하신 창조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시켜 하나님을 사람들과 비슷하거나,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모두 이러한 신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인정하여, 그 분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짐승 모양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미련한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롬 1:21(하))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하게 되고, 미련해져서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졌습니다.
" 둘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적 계시를 고의로 거부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8)에서 "
사람들이 고의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계시를 거부하고 신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신을 없앤 후에, 그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들을 타락한 상태로 방임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양심이 정죄하는 비정상적인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정욕과 쾌락을 좆아 온갖 음란과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롬 1:28).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을 향해 하늘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왜곡된 계시를 바로 잡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을 통해 인류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 중에서 일부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과 그 뜻, 그리고 인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특별 계시" 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계시를 글로 기록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계시를 글로 기록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성경"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6단계 중에서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계시" 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주에 계속해서 제 2단계부터 제 6단계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샬롬! <성경이 주어진 단계들> 1. 하나님: 계시와 영감--2.성경 원본--3.성경사본--4.정경화작업--5.각나라 번역성경들 2. 성경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과정(2) 우리는 지금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손에 전달되게 되었는지" 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첫 번째 단계인 "계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의 본성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종교심"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의 법을 새겨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짐승에게는 없고 오직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자연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성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속성과 그 뜻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종교심과 양심, 그리고 자연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고의로 왜곡하고 거부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타락한 상태로 방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총명이 어두워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이나 짐승의 모양으로 바꾸어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좆는 대신 정욕과 쾌락을 좆아 온갖 불법을 자행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 중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바로 이러한 "특별 계시" 를 기록한 책입니다. 둘째 단계: 영감 자 이제 우리는 첫 번째 단계를 마치고, 두 번째 단계인 "성령의 영감" 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옛적에"라는 말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 즉 "구약시대" 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선지자", "또는 "대언 자"
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꿈이나 환상, 그리고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모든 날 마지막"
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후, 즉
"신약 시대"
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친히 아들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경이라면,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은 신약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 내용을 기록해서 보존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계시를 기록할 때에 자신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특별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성령의 영감"
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고 말하였으며, 사도 베드로 역시 (벧후 1:21)에서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
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고 증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
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떼오프뉴스토스"
란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이란 말과
"영"
이란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경우
"영"
이란 단어는 동시에
"바람"
이나
"호흡"
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넣어진 책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이 계시를 기록할 때에 성령의 호흡을 통해 오류가 없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를 '영감', 즉
"Inspiration"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성령의 숨결을 통해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비록 사람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성령)으로부터 나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저자의 인격과 지식, 그리고 그의 모든 경험을 사용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각 책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문체와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고 오류 없이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약 1600년에 걸쳐서 수십 명의 손을 통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목적과 프로그램에 있어서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 5:18)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라"
고 하셨고, (요10:35)에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단계: 성경원본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단계를 마치고 세 번째 단계인
"성경원본"
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했습니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을 말린 후에 얇게 펴서 만들었으며, 파피루스는 애굽의 나일 강에서 자라는 식물을 얇게 잘라서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주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일부분(창 31:47, 단 2:4-7:28, 스 4:8-6, 18, 7:12-26)은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당시 국제어였던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직접 쓴 이러한 책들을 가리켜
"성경 원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경 원본이 오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 39권은 약 25-30명의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주전 1500년에서 주전 400년까지의 약 1,000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약 8-9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50년에서 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이 모두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성경 원본들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넷째 단계: 성경사본 이제 우리는 세 번째 단계를 마치고, 네 번째 단계인
"성경사본"
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의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원본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성경의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원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 원본을 베낀 성경 사본을 참고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원본을 가져가신 대신에 그 원본을 베낀 수많은 사본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원본을 가져가심으로 인간이 만든 책이 신격화되지 않도록 조치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거룩한 책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사본들은 그 내용이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사본들은 베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로 인해 그 내용이 일부분 변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변화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본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들을 비교해보면 원본의 내용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성경사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사해 사본입니다.
이 사본은 1947년 사해 근처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사본들이 B.C.
3-2세기경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해 사본에는 이사야, 하박국, 신명기, 사무엘, 예레미야, 소 선지서, 출애굽기, 민수기 시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 원본은 원래 자음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음으로만 기록을 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 7-10세기경에 맛소라(전통이란 뜻)라는 유대인 전통학자들이 성경 내용을 정확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모음 부호를 만들어서 성경에 첨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경본문을 MT(맛소라 본문)이라고 부릅니다(500-1000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맛소라 성경'은 1099년에 Ben Asher이란 사람이 기록한 것인데, 그는 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기록된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레닌그라드 사본"
입니다(B).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성경들은 대부분 이 레닌그라드 사본의 본문 비평 자료인BHK(Biblia Hebraica Kittel; 1937)와,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rcia; 1977)를 기초로 해서 만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동 번역 성경도 이 BHK를 기초로 해서 번역한 것이며, 개신교 개역 성경은 BHS를 기초로 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다섯째 단계: 정경화 과정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4가지 단계, 즉 계시, 영감, 성경원본, 그리고 성경사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섯 번째 단계인
"정경화 작업"
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다섯 번째 단계는 왜 교회가 수많은 책들 중에서 66권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왜 교회가 수많은 책 중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순서는 우리말 성경의 순서와 많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세 부분, 즉 율법과 선지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책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들을 율법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모세를 통해 기록된 순간부터 즉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았었습니다.
(신 31:24-26)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후에 레위인들에게
"그 기록들을 언약궤 곁에 두어 증거가 되게 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도 이 율법 책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기록한 율법 책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수 1:8).
이 다섯 권의 책은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인 주전 1000년경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시아 왕 18년인 주전 621년에 제사장들은 성전을 보수하다가 이 율법 책을 다시 발견하였습니다(왕하 22장).
이때에 요시야 왕은 이 율법 책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그 안에 기록한 대로 지켜 행했습니다(왕하 23:3).
주전 586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전 536년에 다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율법 책을 매우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에스라는 주전 400년경에 고국에 돌아온 후에 무너진 유대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 이 율법 책들을 다섯 권으로 묶고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율법서 다음에 나오는 책은 선지서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경우 선지서는 우리 성경과는 달리 전선지서와 후 선지서로 나뉘어 있습니다.
전선지서는 우리가 역사서로 취급하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그리고 열왕기서와 같은 책들이며, 후 선지서는 우리가 선지서로 분류하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소선지서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역사서를 선지서로 분류한 것은 여호수아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선지자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전선지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부터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기록될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호수아나 사무엘서는 저자의 이름 때문에 귀중한 책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열왕기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유명한 선지자의 행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가 다른 선지자들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책을 귀중한 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후기 선지서로 분류되는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 그리고 하박국과 같은 책들은 이스라엘이 포로가 된 후에 귀중한 책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선지자의 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번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였을 때에 그는 유대인들에게도 헬라 문화를 주입하려 했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들의 정경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주전 250-175년경에는 이러한 선지서들이 수집되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선지서 뒤에 나오는 책들은
"성문서"
, 즉
"거룩한 문서들"
로 알려진 책들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성문서들은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시가서라고 부르는 욥기, 시편, 잠언서이며, 둘째는 특별한 절기 때에 읽혀졌던 다섯권의 책들, 즉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유월절에 읽었고, 룻기는 오순절에, 애가는 예루살렘 멸망의 날에, 전도서는 초막절에, 그리고 에스더는 부림절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책들은 바벨론 포로 때부터 다시 고국에 귀환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다니엘서, 에스라-느헤미야서, 그리고 역대기입니다.
우리 나라 구약 성경은 메시아의 오심을 예견하는 말라기가 가장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구약 성경은 잃었던 다윗의 전통을 다시 수립하는 역대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거룩한 문서에 포함된 이유는 다양합니다.
시편과 룻기는 다윗과 연결되어 있으며, 잠언, 전도서, 아가는 솔로몬과 연결되어 있고, 애가는 예레미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욥과 다니엘은 자체적으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았고, 에스라-느헤미야와 역대기도 저자인 에스라로 인해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책들의 대부분은 주전 550년 이후에 수집되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175-165년경에 수리아 왕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헬라화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성경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그들이 사용해 온 거룩한 문서들을 보존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주전 150년경에는
"성문서"
로 분류되는 책들이 정경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정경에 관한 논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논의된 정경성 문제는 주로 에스더, 전도서, 아가서, 잠언, 그리고 에스겔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에스더가 문제가 된 것은 그 책 안에 하나님이란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회의주의와 쾌락주의에 대한 암시가 있다고 생각되었고, 아가서는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어서 정경 체택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또한 잠언에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내용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에스겔은 모세 오경의 내용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70년에 로마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때에 기독교가 일어나 유대 종교를 크게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전과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경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정경을 선정하는 일이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90년에 얌니야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우리가 가진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체택하였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이 책들을 정경으로 선택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을 천명하고 있는가? 둘째, 그 책 속에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는 본문이 있는가? 셋째, 기독인: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 책을 정경으로 인정해 주었는가?
" 넷째, 그 책이 성령께서 영감 시키셔서 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 신약 성경의 기록과 정경화 과정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 성경 39권이 어떻게 정경으로 체택되었는 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 27권은 어떻게 정경으로 채택되었을까요? 주님이 세상을 떠나신 때는 30년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약 20여 년 동안 제자들은 말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성경이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50년이 넘어서면서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주님의 증언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교회의 여러 가지 상황도 기록된 증언을 필요로 했습니다. 최초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후에 각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기 위해서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즉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고린도서를 썼습니다. 그는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에 스페인 선교를 계획하면서 로마서를 썼고, 후에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잠시 놓였다가 체포되었는데, 이 기간에 바울은 목회 지침서인 디도서와 디모데서를 썼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서신들은 약 50년에서 64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때에 야고보 사도는 형식화된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70년이 넘어서면서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는 박해받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베드로의 증언을 기초로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베드로는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 베드로서를 썼습니다. 그 후에 마태는 유대인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누가도 직접 자료를 조사하여 누가복음을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헌정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서들은 약 70년부터 9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요한 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마태, 마가, 누가가 빠뜨린 주님에 대한 기록들을 보충했으며, 요한1,2,3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가 끝날 무렵에 사도 요한은 기독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밧모 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요한은 성령의 지시를 받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위해 요한 계시록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1세기가 끝날 무렵에 신약 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책으로 읽혀진 것은 이것들 외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이 되게 되었을까요? 약 140년경에 말시온이라는 사람은 최초로 신약 성경 중에서 정경을 확정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정한 정경은 지나치게 영지주의 색채를 띠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책들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지도자들은 "
어떤 것을 성경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
"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오리겐(254년 사망)은 각 지역 교회를 순회하면서 어떤 책들이 거룩한 문서로 인정하고 사용하고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조사 결과 거룩한 책으로 인정되고 있는 책들을 두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4복음서와 바울의 13서신, 벧전, 요일, 사도행전, 계시록은 모든 교회에서 아무런 이의 없이 거룩한 책으로 인정되고 읽혀지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히브리서, 벧후, 요2-3서, 야고보서, 유다서, 바나바서, 허마스의 목자, 디다케, 히브리인의 복음서 등은 거룩한 책으로 인정하는 일에 다소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후에 정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유세비우스(170-340)도 정경에 대해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사해 본 결과 오리겐 시대에 다소 논란이 있던 책 중에서 야고보서, 벧후, 요한 2-3서가 이미 거룩한 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나바서, 디다케, 히브리인의 복음서 등은 아예 정경에서 배제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303-311년에 로마를 통치했던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기독교를 크게 박해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박해 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안이 성경을 압수하고 불태우게 되자, 기독교인들은 정경을 결정하는 일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시릴(315-386)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신약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26권을 "
거룩한 책
"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가 360년에 열린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있던 아다나시우스는 최초로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 성경 27권을 기독교 경전으로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393년 레기우스 종교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이러한 추천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때에 카르타고 종교 회의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
우리가 정한 66권의 정경 외에는 어느 것도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읽힐 수 없다.
" 그리고 그 이후로 이 성경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때에 교회가 정경을 선택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도들이나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기록한 책인가? 2) 그 내용이 복음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3) 모든 교회의 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책인가? 4) 성령의 인도를 받은 증거가 있는가? 여섯째 단계: 번역 성경 우리는 그 동안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5가지 과정, 즉 계시, 영감, 성경원본, 성경사본, 그리고 정경화 과정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번역 성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처음에 히브리어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 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포로가 되어 각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히브리어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언어에 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1) 헬라어 성경(70인 역) 가장 먼저 번역된 성경은 헬라어 성경이었습니다. 주전 3세기경(250-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의 장로(학자)들이 모여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에게 '70인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헬라어는 당시에 "
전 세계가 사용하던 언어
"였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일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성경으로 인해 헬라어를 사용하는 모든 나라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주님께서 열어 준비해 주신 귀중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3세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이 복음과 함께 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2) 아람어 탈굼 역과 수리아 역 페시타 그 후에 구약 성경은 아람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에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점차적으로 히브리어를 잊고 그 지역에서 사용되던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페르시아와 그 종족들이 사용하던 주된 의사 소통의 매개체였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정치와 상업부분에서 국제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후세들을 위해 예배 시간에 읽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탈굼(targum)이라는 아람어 번역 성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시리아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 역시 '페시타'(Peshitta)라고 부르는 시리아 역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3) 라틴어 역본들 그 후에 번역된 언어는 라틴어였습니다. 첫 번째 라틴어 역 성경은 이탈라 역본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2세기에 편집되어 200년경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히브리어 구야 성경에서 직접 번역하지 않고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경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두 번째 라틴어 번역 성경으로 제롬의 불가타(Vulgata), 또는 벌게이트 역이 탄생했습니다. 282년에 교황 다마스커스는 제롬에게 70인 역 성경을 참고해서 첫 번째 라틴어 번역 성경인 이탈라 역을 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롬은 이 명령을 받고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390-404년에 걸쳐서 번역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 라틴어 성경은 "
벌게이트(
"대중적인"
이란 뜻) 역
"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된 '벌게이트 번역 성경"
은 그 후 약 1,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에서 공식적인 경전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4) 종교 개혁 시대 이후 그러나 이러한 라틴어 성경의 독주 시대는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을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성경과 다른 결정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전통보다는 성경을 더 높은 권위에 두어야 하나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카톨릭은 거룩한 책인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다른 말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므로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들은 성경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가 성경과 다른 일을 결정해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각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그 후에 직접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에 쿠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한 후에 가장 먼저 성경책을 출판했습니다.
이러한 인쇄술의 발달은 수많은 번역 성경을 만들 수 잇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많은 영어 번역성경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특히 제임스 왕의 명에 의해 1611년에 완성된 흠정역(KJV)이 유명했습니다.
이 성경은 영어문헌의 표준작품이며, 기독교 기도 문장의 보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후 복음의 전 세계로 확장되어 나가면서 성경은 급속하게 각 나라 말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5) 한국 개역 성경의 유래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성경은 피터스(A.
A.
Pieters)가 번역한 '시편촬요'였습니다.
그 후 1882년에는 존 로스가 누가복음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900년에 신약을 모두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을 모두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신구약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이 성경은 1938년에 다시 한 번 개역이 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에 이 성경은 '한글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서 다시 한 번 부분적으로 개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원어성경이 아닌 영어성경(흠정역)과 한문 성경을 기초로 해서 번역되었으며, 또한 자국인이 아닌 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레닌그라드 비평 자료인 BHK를 기초로 해서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성서공회는 1971년에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977년에는 구약과 외경을 완역하여
"공동번역성경"
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외경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공동번역성경"
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대한성서공회는 다시 개신교 단독으로 원문의 내용에 근거해서 충실한 번역 성경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에 '표준 새번역 성경'이 출판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교단은 이 성경에 여러 가지 번역과 신학 문제가 있다고 해서 사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므로 대한성서공회는 내용을 더욱 보완하여 2000년에 다시
"개역성경 개정판"
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이 성경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각 교단들이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이미 이 성경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과 오늘에 걸쳐서
"성경이 우리 손에 주어지게 된 6개의 과정"
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은 계시와 영감, 성경 원본과 그것을 베낀 성경 사본, 그리고 정경화 작업과 번역 성경이란 6개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이 책을 기록하게 하셨고, 또 수많은 외압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 성경이 우리의 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말씀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의 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경 공부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 다시 만날 때까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평안히 지내시기를 원합니다.
샬롬!
"이 율법 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 1:8) [12]성경은 정말 오류가 없는것인가?.
Q.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질문들을 많이 보다보니 분명히 성경이 그 당대의 가치관이나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읽기로는 고린도서에 여자들이 나와서 앞에서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새도 독같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 해야 하나요? 이것은 정말 도리어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발언권을 허락하시고 이전의 거의 카스트 제도와 가까웠던 유대사회의 대변혁을 일으키신 주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아닐런지요? 즉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금지된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많은 여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로 인식하던 유대사회에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으로 모든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고 말하시던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정말로 뚱딴지 같이 예수님의 그 공로사역을 완전히 무시하듯이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수 없고 그리고 행위가 가미되어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에 보면 개미가 감독자가 없이도 그렇게 자기 일을 잘 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개미사회같이 잘 조직된 계급 사회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미가 두령이 없이도 일을 열심히 한다는 그 말씀은 아무리 봐도 당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잠언기자의 세계관을 보여주는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떠케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의 무오류라는것에 대해서 어떠케 생각해야 할까여? 정말 그렇게 무오류한 것인지 무언가 그 영감은 받았지만 분명히 그 당대의 가치관에 구속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정말 궁금하고요, 저의 생각에는 짧은소견이지만 그런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허락하신 것이 아닐런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 가운데서 성경을 작성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 전체적인 개관을 보여주신것이 아닐까여? 그러니까 즉 창세기의 그런 어려운 말들이나 요한계시록의 그 어렵고 모호한 말들은 다 그런 영감안에서 본 비전들을 기자들이 적은것이 아닐 까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구하나하나가 오류가 없는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뜻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러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그 무오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에는 오류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운영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A=답변) 1.
하나님의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메시지가 주어지는 수단이나 방법은 항상 그 시대의 상황에 알맞게 전달됩니다.
이것은 그 메시지를 받는 수신인들에 그 당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수쳔년 전의 사람들에게 양자역학이나 블랙 홀 이야기를 하면 전혀 알아들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 문화라는 포장을 뜯고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시대에 적용이 되는 보편적인 진리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보편적인 원리들을 찾아서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가지고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한 일에 대해서!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한 내용은 고린도서가 아니라 (딤전 2:12)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아시는 대로 바울이 말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전해준 목회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바울이 죽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의 원칙과 기타 목회에서 명심하거나 참고할 만한 일들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목회자에게 긴요한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님이 지적하신
"교회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여자들을 다음과 같이 대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외적 단장보다 선행과 내적인 단장을 더욱 강조할 것(딤전 2:9-10) 2)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게 할 것(딤전 2:11).
3) 가르치는 일(설교권)과 남자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을 허락하지 말고조용하게 할 것(2:12)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자 성도들의 순종과 침묵을 요구한 것은 말 많은 여자들로 인해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재 목회 현장에서도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일(설교하는 일)과 남자를 다스리는 일을 금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교회에서 설교와 행정을 담당하는 일은 여자에게 주어진 경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 목사 제도와 안수 문제가 제기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현재도 이 문제에서 각 교단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면, 2000년 전에 이러한 일이 금지된 것은 당연한 일일 일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가 설교와 행정권을 갖는 것이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 후에 남자로부터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딤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남자(이쉬)로부터 나왔다는 뜻을 가진 여자(이솨)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창조 원리에 근거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설교와 행정권을 남자가 담당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사탄의 유혹을 먼저 받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 2:14).
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유혹을 받기가 더 쉽기 때문에 바울은 설교권과 행정권을 여자보다는 남자가 갖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여성 목사들이 안수를 받기도 하고, 여성들이 권한이 교회에서 많이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훌륭하게 교회를 인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매우 적은 수에 달하고 대부분의 교회는 여전히 남자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드보라와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성(발락?)을 선두에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믿음이 없어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부득불 자신이 그와 함께 동행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발락은 그 날 모든 영광을 무명의 한 여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여성이 영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 자신도 이러한 일이 정상적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소수의 교회가 여성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예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특수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바울 만큼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강조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의 서신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바울은 그녀들을 자기의 동역자로 인정을 했고, 또 어느 경우에는 남자보다 여인을 앞세우기도 했습니다(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3.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 이것은 예수를 믿은 성도들이 입으로만 읻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믿음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현대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저 역시 이러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는 전혀 믿는 사람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 저는
"저 사람이 정말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역시 중생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왔을 때에 그에게
"네가 다시 나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는 유대인의 존경받는 선생이었지만, 그는 성령을 통해 태어나지 않았으며, 주님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고 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은 입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이 수반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가 정말 믿는 것인지 아닌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겟지요! 4.
(잠 6:6-8)에 나오는 개미 문제 (잠 6:6-8)에서 지혜자는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개미를 보면서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지혜자는 개미가 주어진 본능을 따라 먹을 것을 여름과 추수 때에 모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서 여름과 추수 때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생과도 같은 긴 시간입니다.
이러한 긴 시간을 개미는 본능을 따라 공동체를 위해 쉬지 않고 겨울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노아가 120년 동안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방주를 예비한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지혜자는 개미가 인간이 받은 탁월한 은사를 받지 못했음에도 이러한 삶을 사는 것에 더욱 감탄을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잘못 하면 그들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있고, 그들을 잡아 처리하는 경찰이나 군대도 있으며, 그들을 통치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영원을 위해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사용할 줄을 모르고 낭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개미는 이러한 은사를 받지 않고도 훌륭하게 긴 시간을 미래를 위해 준비합니다.
개미의 경우 존재하는 계급은 수캐미, 여왕개미, 병정 개미, 일개미 정도입니다.
수캐미와 여왕 개미는 날개가 있는 데, 수캐미는 주로 여왕 개미와 교배를 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여왕 개미는 수많은 수캐미와 교배를 하고 정자를 보관한 후에(이것을 결혼 비행이라고 부름), 날개를 떼어내고 작은 집에 들어가서 새끼를 낳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영 개미가 낳은 개미 중에서 날개가 없는 개미는
"일개미"
가 됩니다. 그리고 머리가 단단하고 큰 소수의 병정 개미가 있는데, 이들은 적을 막고 단단한 물건을 부수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개미 사회는 사법기관(재판관)이나, 경찰력, 또는 통치자가 없습니다(우리 말 성경에 두령, 간역자, 주권자로 번역된 말은 재판관, 경찰(군대)력, 통치자를 의미함). 그들은 단지 모게사회와 같이 일개미들을 낳은 여왕 개미를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을 할 뿐입니다.
이러한 개미의 집단은 인간에 비해 열악한 집단체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노아와 같이 공동체를 위해 부지런히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인간 세계의 훌륭한 모든 제도(입법, 사법, 행정)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지혜자가 게으른 자에게 가서 이러한 개미의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성경 무오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성경 기자들이 기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글자가 무오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들이 가진 경험, 사상, 생각 등을 모두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전해주시려는 구원의 계획과 뜻을 오류없이 전달해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20년이 넘게 매일 성경을 연구해왔지만, 아직까지 성경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 그 본문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했습니다. 저 역시 때로 성경을 연구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그 본문이 이해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혹시 있을 때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부분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을 기록한 분들이 너무나 (성령 안에서) 신실한 분이었으며, 또 그들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13]성경이 요약된 자료가 있는 곳은 가르쳐 주십시오!
* 제 홈페이지에 있는 성경개관이나 서론 자료, 또는 아래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이영제 목사의 성경연구(http://kcm.co.kr/bible/bible.html)
2. sscc의 성경탐험 (http://www.sscc.co.kr/bible.htm)
3. 성경맥잡기 강좌
http://onnuritv.com/web2/seminar/bible_study/bible_study_0616_next.htm
[15]왜 지금은 새로운 성경이 나타날수없나요?.
Q. 신약성경이 끝나고 사실상 거의 2000년 가량 새로운 성경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이가 약 400년 정도 있었을 때에 우리는 그 시기를 암흑의 시기라고 들었습니다. 현재의 성경이 더 이상 추가가 필요없는 완성이고 우리는 단지 예수의 재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요? 시대가 흐르고 문화도 변하고 상식도 조금씩 변하는데 우리는 너무 오래된 진리속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요. 성경시대에는 하나님도 주인과 하인를 사실상 인정하여 계급주의를 남기셨지만, 요즘에는 필요없는 내용이겠지요. 설사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으로 인해 우리는 속히올(2000년 가까이 오지않는 그 속히 올날)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몰라도 그 과정속에 누군가 계속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성경도 계속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 의견에 리플 부탁드립니다
A.
* 성경을 현대에 적용하는 문제는 현대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매우 길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핵심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신약 성경의 경우 성경을 결정할 때에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1) 사도들이나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기록한 책인가?
2) 그 내용이 복음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3) 모든 교회의 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책인가?
4) 성령의 인도를 받은 증거가 있는가?
교회는 성경을 기록하는 권위를 1) 주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과(바울은 직접 계시를 받음), 2)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마가, 누가 등)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만든 종교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해 준 성경을 기독교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앙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의 계시를 사도 이후에도 계속 열어 놓는 경우에는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나와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렇게 됨녀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이단들이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성경과 다른 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교회는 큰 혼란을 겪었으며, 교회의 회의를 통해서 그들을 분별해 왔습니다. 만일 지금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떤 것이 진짜 성경인지 구별하는 문제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단이 일어나도 어떤 것이 이단인지 판단할 기준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2. 카톨릭의 경우에는 제 1정경(신구약 66권)과 제 2정경(외경-읽으면 신앙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도 제 1정경과 제 2정경은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의 경우에 이 성경을 각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교황(사제단 회의)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경우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역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사도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카톨릭의 경우에는 교황의 결정과 지시는 성경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학적, 사회적인 탁월한 식견을 가진 지도자들이 성경을 각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 사회와 나라에서 문제가생기면 이러한 지도자들이 충분한 토론과 회의를 거쳐서 그 문제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대처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것을 교황이 발표한 후에 전 세계의 카톨릭 교회들이 그 결정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의 경우 성경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일이 통일성 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카톨릭의 교황이 중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를 목격한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권위를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66권에 한정하고, 교황이나 교회의 결정 역시 이러한 성경의 권위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배운 사도들에게만 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인정하고, 그 이후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 성경을 따라 교회를 인도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의 경우에는 교회의 결정이나 지도자의 권위보다 신구약 66권의 권위를 더 높게 인정합니다. 이러한 개신교의 경우에는 중세 시대와 같이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그릇된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에는 카톨릭의 교황처럼 성경을 현대에 적용하는 일을 주도할 지도자가 없습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을 각 교단의 총회의 지도자들과 각 신학교의 교수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각 교단에 따라 성경에 관한 적용이 다른 입장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개교회의 목회자에게 대부분의 목양을 맡기고 있는 개신교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사회에 대한 안목이 좁을 경우에 성경을 현대에 적용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교회를 붙들어 주시고 계시며, 또한 각 교단의 총회 지도자들과 신학교의 교수들이 성경을 현대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크게 결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 이 문제는 복잡해서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간상 여기에서 답변을 그치겠습니다. 참고로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시면 구약과 신약이 정경으로 결정되게 된 간략한 과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http://idbsi.net/q&a/Q110.htm)
[16]신구약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Q.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언어이며, 헬라어는 그리이스어로 알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사용된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관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헬라어가 사용된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A.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용하던 언어가 히브리어였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당시의 세계 공용어가 헬라어였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하면서 각 나라에 헬라 문화를 퍼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던 각 나라에는 헬라 문화가 침투하게 되었으며, 후에는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오늘날의 영어와 같이). 그리고 그 후에 다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는 데, 헬라 문화의 영향은 계속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던 사도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시대였으며, 이때에 국제 공용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사도들은 이방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서, 서신들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책은 마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정도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방인 세계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도 당시 상황에서 자연스럽고 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Q. 안녕하세요 목사님 ! 초기에 일본과 중국에 들어간 기독교와 다르게 한국에는 처음부터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시간이 흘러 한국의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일부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극단주의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근본주의 신학을 선물해준 미국과캐나다의 교회도 이젠 시류를 인정하며 자유주의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합리적인 이야기는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럴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성경무오설를 문자적으로 긍정하시는지요 아니면 의미적으로 찬성하시는지요 매우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멈추라고 했지만 사실은 지구가 공전을 멈춘것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성경이 문자적 과학적으로의 잘못이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오류(그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서)입니다. 하지만 문자적 오류는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북부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전국민의 90%이상이 노아의 방주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노르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국가의 대부분은 기독교내지는 카톨릭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다 이단 집단이고 이단 교회들인가요? 우리나라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믿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성경무오설에 대한 입장이 궁금합니다. 참고문헌보다는 목사님의 개인적인 믿음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A.
1. 성경관의 유형들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박중은 교수는 "21세기의 성경관"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성경관이며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물론 성경에 사탄의 말, 뱀의 말, 거짓 예언자의 말, 우상숭배자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입니다. 그들은 성경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사랑, 자유, 평등 등)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유대 종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저급한 도덕윤리나, 편협한 종교관, 종교에 대한 독선적인 태도, 그리고 과학적인 오류들도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종교 발전 역사를 시대별로 잘 연구해서, 이러한 오류를 제거하고 성경 안에 포함된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러한 성경관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성경은 원래 히브리 종교의 고대 문서지만,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각 사람의 체험을 통해서 나타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정통주의자들은 개인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는 경험"을 중요시합니다.
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급진주의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성경은 다만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고서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은 과거에 인간이 실패한 역사적 교훈을 살펴서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도와주는 참고서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록된 성경 본문보다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들이 불의와 맞서 싸우는 "실천"을 성경 본문"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실천"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한국에서 초기 민중신학을 주장하던 서남동이나 안병무 교수가 주장했던 입장입니다.
2. 성경의 권위:계시와 영감
저는 복음주의 입장이 가진 성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복음주의의 성경관은 "계시"와 "영감"이라는 두 가지 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1) 계시
계시(Revelation)란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온 용어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기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계시성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두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은…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벧후 1:20-21).”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느니라(암 3:7).”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렘 1:4; 호 1:1 등)...."
이러한 구절들은 모두 성경의 기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절은 성경에 무수하게 많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계시 방법
성경에서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첫째는 인류, 또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이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역사서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구원에 대한 풍부한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둘째는 설교나 기나 여러 가지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영감(Inspiration)
둘째로 "성경의 귄위"에 대해 이해하려면 "영감"(Inspiration)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을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려면 그것은 정확한 사상과 분명한 언어로써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성경이 오류와 모순 투성이이며, 부정확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면, 성경의 권위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며, 허물을 고치고, 의로 교육하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딤후 3:16).”
여기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감동" 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데오푸뉴스토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하나님에 의해 호흡이 불어넣어진 것"(God-breathed)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록된 성경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이 불어 넣어진 살아있는 음성"(viva vox Dei)이라고 말했습니다(히 4:12; 엡 6:17 참조).
물론 성경 중에서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것은 일부분이고(출 31:18; 신 9:10; 출 32:16; 34:1 참조), 나머지 대부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출 17:14; 신 31:9; 수 24:26; 렘 36:4; 눅 1:1-4 등). 그러므로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인간 기자의 실수나 한정된 능력으로 인해 성경에는 많은 오류나 모순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사본들 뿐이며, 이러한 사본들은 여러 가지 필사상의 오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본의 경우는 어떨까요? 원본도 많은 오류가 있을까요? 친필 원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이라도 교리를 바꿀 만큼 심각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친필 원본에 큰 오류나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을 말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의 손을 통해 기록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록을 오류나 모순으로부터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인간 기자가 하나님의 뜻을 오류없이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 언어적 영감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인간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의 사상과 언어와 표현력을 모두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기록될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언사(또는 언어)영감설(Verbal Inspiration)이라고 말합니다.
2) 유기적 영감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 무의식 상태에서 기계처럼 받아쓰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따라서 인간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들의 신앙 인격과, 성격, 장점, 그리고 특징등을 모두 사용해서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완전 영감설
마지막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내용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 인간 기자의 생각이 많이 들어갔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전해주고 있으며,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모든 성경이 영감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완전영감설(Plenary Inspir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영감설은 1) 언어적, 2) 유기적 3) 완전영감설(Verbal-Organic-Plenary Inspiration:VOP Inspir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주의 성경관은 성경이 보편적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는 자유주의 성경관이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며 역사적 오류와 모순이 있으나, 개인의 체험을 통해 말씀하실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신정통주의 성경관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3. 성경의 오류와 모순 문제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 이후 자유주의 성서신학은 "역사비평적인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을 도입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일반 고대 종교 문서와 꼭같은 기준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고등비평작업). 그들은 성경이 사상사적으로 고대 히브리종교의 진화의 산물이며, 따라서 성경에도 사상적-역사적-과학적-지리적-연대기적인 오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종교사학파).
그 후에 이를 극복해보려는 신정통주의 성서연구가 1945년 이후부터 성서신학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으나, 1960년대에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성경의 귄위”는 크게 위축 또는 약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 다시 일어난 신자유주의 신학(케뤼그마 신학-폰 라트와 불트만 신학)이 다시 일어나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성경이 과학이나 역사 교과서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요 20:31 등). 그들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난제"이지 "증명된 오류"로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 "모순”이나 "오류”가 있다고 하지 않고, "난제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 과학적, 지리적, 연대기적인 차이들 역시 그들에게는 "오류”가 아니라 "난제"에 속합니다. 그들은 21세기 사람들이 가진 판단과 지식이 성경의 오류를 판정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4.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형제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여호수아 때에 해가 늦도록 지지 않았다는 사건을 "과학적인 오류"라고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앞에서 말한 자유주의 입장에 선 성경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성경관을 가진 사람들은 "홍해를 건넌 사건"이나, "5병2어 사건", "예수께서 바다를 걸으신 사건" 등은 모두 신화이며 실재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해를 잠시 멈추거나 늦추시고, 바다를 걷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저 자신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에 이러한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여호수아 사건보다 지금 주변에서 내 자신에게 일어난느 일에 더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몸안에 있는 주먹만한 심장이 지구보다 더 긴 실핏줄에 쉴 새 없이 피를 공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창조하실 때에 이 엄청난 실핏줄에 날마다 피를 공급하기 위해 겨우 주먹만한 심장을 하나 달아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은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십년 동안 아무 사고 없이(사고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 엄청난 일을 잘도 해내고 있습니다. 사실 복잡하기로 말하면 우리의 뇌신경도 우주만큼이나 복잡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복잡한 뇌신경 세포를 통해서 뇌가 우리의 몸 각지체에 전달하는 명령을 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몸 안에는 우주처럼 얽힌 신경망을 통해서 쉴 새 없이 신호가 오고 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호는 오류 없이 자기의 길을 따라 전달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지금 아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때에 해를 좀 늦추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살아 있는 제 몸을 통해서 날마다 그보다 더 큰 기적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입니다.
"해리림머"(Harry Rimmer)는 몇 명의 천문학자들이 컴퓨터를 통해서 시간을 계산한 결과 역사의 시간에서 하루가 빠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연구소의 "피커링"(Pickering)은 이 하루가 빠진 이유를 성경에서(여호수아서, 또는 히스기야 때에 해가 15도 물러선 것 등) 발견했다는 보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예일 대학의 "토튼"(Totten)도 이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보고했습니다(참고-버나드 램 저, "The Chiristian View Science and Scripture(기독교적 과학관과 성경), Grand Rapids; Eerdmans, 1954, p.154).
사실 형제님이 여호수아 때의 사건을 무조건 오류라고 단정한 것은 신중한 발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 우주의 역사를 조사해서 그러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성급하게 "과학적 오류"라고 단정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석하기 조금 어려운 "난제"로 뷴류하고 있습니다.
5. 이야기가 길어지고 시간이 없어서 답변은 여기에서 줄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앞에서 밝힌 "복음주의의 입장의 성경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를 지지하는 것은 이러한 성경관이 다음에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관"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경(구약)에 대한 태도>
1. 주님은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예언하고 있으며, 자신은 이를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구약 성경 전체가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부분이 하나로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 26:54,56)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눅 24:44)
2.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이 모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성경은 폐하지 못하리니..."(요 10:35)
3. 주님은 구약 성경을 있는 그대로 신뢰했으며, 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신 8:3 인용)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4. 주님은 구약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
"모세와 시편과 선지자들이 말한 바..."(눅 24:44)
[18]성경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Question.
하루 세장씩 정해놓고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년여 끝에 간신히 일독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방법을 바꿔서 정하는바 없이 틈나는대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맹숭맹숭하고 집중도 안되고 소설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너무 율법적인건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답변 부탁드립니다....그리고 우찌무라 간조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Answer.
1.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몇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성경을 보시기 전에 우리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법의 기이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2) 성경을 읽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안에서 오늘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서 그 말씀을 오늘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찾을 때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 본문이 내게 가르쳐 주는 새로운 진리는 무엇인가?(교훈)
* 본문이 내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책망)
* 본문은 내게 어떻게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는가?(바르게 함)
* 본문은 내게 어떻게 주님 안에서 자라가라고 지시하고 있는가?
3)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되는 참고 자료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래의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성경 1독 자료(http://idbsi.net/bibread.htm)
* 구약핵심 성경공부(http://www.biblenara.com/sub/3_1_main.htm)
* 신약핵심 성경공부(http://idbsi.net/free2-1.htm)
* 인터넷 성경개관(fgtv)) (http://www.fgtv.com/fgtv/B_5/WB_53.htm)
2. 우찌무라 간조에 대해서는 아래 웹페이지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juginews.co.kr/1453/contents/hangdong/hangdong1453-1.htm)
[19]때로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에 구약성경과 다른 이유는?
Question.
이런 좋은 사이트를 운영하시는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늘에서 주의 영광 위해 일하시는 것에 대해 귀한 결과와 보람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신약에 보면 구약에 대한 인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인용이 구약에서의 내용과는 다른 듯 합니다. 어떤 기준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것입니까? 아울러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1.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구절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신약에서 인용한 구약 성경 구절들을 구약의 본문과 자세하게 대조해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법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부분 미미한 것이지만, 때로는 큰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신약의 인용 구절과 구약의 본문이 다른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3. 구약의 본문과 신약의 인용이 다른 이유들
1) 신약의 저자들이 더 정확한 본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경우
구약 성경의 원본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원본을 베낀 사본들입니다. 때로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에 인용된 사본보다 더 정확한 원문을 보존한 사본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신약의 저자들은 더 정확한 사본을 따라 구약의 구절을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신약의 저자들은 때로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서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아람어역본(탈굼)이나, 헬라어 번역본(칠십인경)에서 본문을 인용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탈굼이나 70인경의 본문이 히브리 맛소라 사본과 차이점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3) 때로 신약 저작자들은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구약본문을 해석하고,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원문의 어법을 바꾼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구약 본분의 본질적인 의미는 바꾸지 않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며,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본문을 풀어서 인용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형의 목적은 구약 본문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4. 도움이 될만한 책
에드워드 뵐 저, "구약 속의 그리스도", 권호덕 역, 한국 로고스연구원.(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구약의 구절들을 제시해 가면서 설명하고 있음).
2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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