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12제자와 바울
Ⅰ. 서 론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을 중심으로 한 12사도들은 예수야말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의 압박의 손길은 그들에게 엄했다. 그들이 잇따라 순교자를 내면서도 추적을 피하며 실시한 전도는 오히려 지역을 넓혀갔으며 북쪽은 사마리아에서 시리아, 남쪽은 아프리카, 서쪽은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베소에 정착해서 만년까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아프리카 전도의 길을 열었으나, 다른 사도들은 순교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고난 중에서도 공동체생활을 영위하면서, 얼마 뒤 바울의 회심은 그들의 사역을 급속하게 가속시켜 지중해 각지에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해방시키고,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세계의 복음으로 비약시킨 것은 나중 사도(제자)되어 13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한 바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인정하신 12제자와는 달리 늦게 부름받은 바울의 제자됨(사도권)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약성경의 13권을 기록한 바울이 예수의 제자임을 인정할 수 없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논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예수의 12제자들의 형성과 12제자의 성경상의 기록들을 살펴본 후 공관복음에 나타난 제자상을 연구하고 12제자와는 다른 경로 즉 인간 예수의 사후(死後) 제자가 된 사도 바울의 제자화 과정을 비교하면서 나중 사도된 바울의 참제자됨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예수와 12제자
1. 12제자의 형성
1) 12제자의 부르심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12제자 부르신 이야기는 놀랍게도 간단하다. 현대 복음서 독자들은 대부분 제자들이 가난하고 못배웠다고 상상한다. 사실 1세기 갈릴리에서 어부들은 그들 사회의 실업가(實業家)들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하인을 고용'할 만큼 부자였다. 제자들은 웬만큼 '잘 교육받았다.' 갈릴리 지방의 아람 방언은 물론 사업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도 좀 사용했을 것이다. 한편 예수 자신이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초기 유대교의 사제 관계에서는 제자가 학파에 끼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고 나서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스승의 행위 양식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는 결여되어 있다. 예수를 따를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예수의 전도여행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가족 관계와 재산과 생업을 포기할 것을 요청 받았다(막 3:31-35; 10:28-30).
2) 12제자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
예수께 흔히 열두 제자라 불리는 제자가운데 더 가까운 제자의 무리가 있었다고 결론지을 만한 증거가 있다. 열두 제자의 이름이 변한다는 것, 특히 뒤에 거명된 제자들일수록 변한다는 사실(막 3:16-19; 마 10:2-4; 눅 6:14-16; 행 1:13)에서 초대교회가 열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약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성서를 필사하는 몇몇 사람들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으므로 부활 당시 단지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열둘이란 수를 택하신 것은 예수의 의도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수께서 열둘을 골라서 자신이 설립하려고 한 이스라엘의 진실한 또한 회복된 열두 지파의 핵심으로 삼으시려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낮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 것이다"(마 19:28; 눅 22:28-30). 열둘이란 수는 예수의 자기 이해에 관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까지 포함한 상징적 참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 열한 명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당연히 그 모임의 밖에 상위에 계셨다.
2. 공관복음에 나타난 제자상
1) 마가복음의 제자상
예수의 12제자들에 대한 제자(사도)됨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제자의 모습들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우선설에 근거하여 특별히 마가복음의 제자상은 오랫동안 관심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와 밀접히 연관된 자들이어다. 그들은 예수의 활동에 동참한 자들이요, 그의 위임을 받아 그의 활동을 이 땅에 더욱 널리 확대시켜야할 자들이며(막 3:13-19; 6:7),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계시를 받은 자들이다(막 4:10이하; 13:3이하). 그들이야말로 예수에게는 특별한 자들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를 대신할 자들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 자, 무지한 자(막 4:13; 6:52; 8:14-21; 9:32 등), 믿음이 없는 자들로(막 9:19, 4:40), 그리고 끝내는 예수를 부인하고 그를 버린 자들로 소개되고 있다(막 14:50; 14:66-72). 이런 점에서 그들은 당연히 책망과 지탄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마가가 보여주고 있는 제자상의 이런 양면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과거 18-19세기 학자들은 마가를 객관적인 역사가로 이해하였고, 이런 기록들은 인간이었던 제자들이 갖고 있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한 솔직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브레데(W. Wrede)는 마가의 제자상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의도에서 나온 교리적 설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은 그리스도 사건을 보다 분명히 이해시키고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기 위한 의도적인 고안으로 이해되었다.
2) 마태복음의 제자상
마가복음에 이어 마태복음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곧 완전히 다른 제자의 모습을 보게된다. 마태복음의 경우 제자들은 더 이상 무지한 자들,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은 자들이다. 마태는 마가의 자료에 수정을 가함(마가복음 우선설에 근거하여)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 예로 마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13:1이하)를 소개하면서 제자들이 무지를 강조하고 있는 마가의 자료, 즉 "너희는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다른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는 구절을 생략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마태는 이 구절을 생략(혹은 삭제)해 버림으로서 제자들이 무지한, 깨달음이 없는 자라는 인상을 제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마가복음의 자료를 의식적으로 수정(마가복음 우선설에 근거하여)하여 가면서까지 제자들의 모습을 훌륭하게 소개하려고 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때 가능한 것은 마태는 마가와는 달리 예수께로부터 예수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칠 임무를 부여받은 제자들이(마 28:20) 그들이 전하고 가르쳐야할 메시지를 완전히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태의 이런 의도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가르쳐야할 합법적인 대표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 주어야할 필요성에서 생겨났을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누가복음의 제자상
제자들의 모습을 좀더 나은 빛 가운데 제시하려고 하는 마태의 관심은 누가복음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누가는 마태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의 명예에 손상이 되며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마가의 진실과 표현들을 과감히 제거 혹은 수정해 버림으로써 제자들을 예수의 훌륭한 동역자요 모든 믿는 자들의 모범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런 의도는 그가 그의 문헌 자료인 마가복음에 가하고 있는 손질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렇게 제자들을 좀더 훌륭하게 그리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일스(K.N. Giles)에 의하면 누가는 제자들을 모범적인 교회로 제시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이 각자 자신들을 제자들과 동일시하게 되기를 원했다고 본다. 그래서 누가는 삭제 혹은 수정이라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결국 누가도 예수가 살아계시던 30년대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설교에 알맞은 제자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Ⅲ. 예수와 바울
바울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예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의 제자됨에 대한 초대교회 일부 무리들의 의심과 거부는 상존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위험한 궁지에 처하는 것을 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면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1.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바울의 예수의 메시지 경험 여부
가룟 유다가 배신한 후 제자를 충원할 때 그 조건으로는 예수의 생애를 경험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요 사도된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예수의 삶과 복음을 접했는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필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가?
바울이 예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채 원시교회와 접촉을 가졌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회심이전 바울의 교회핍박은 그가 회심전에 적어도 헬라파 유대 기독교의 케뤼그마의 일부를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하며 바울의 회심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규명해 보려는 많은 시도가 있어왔다(행 26:14; 롬 7). 그리고 고후 5:16의 기사를 적용하면 바울은 예수에 관한 일상적 소문에 절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육체에 따라 아무도 알지 않았다고 말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각이나 청각에 의해서 오는 일반적 지식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반적 보도 자료에 무관심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후 5:16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바울에게 주어진 예수에 관한 보도에 대해서 바울이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답으로 고전 15:1-11을 지적하는데 바울은 전승에 무관심했는가? 그는 그 반대이다. 그는 전숭을 그의 전도설교의 토대로 삼고 있다. 리델보스 또한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한귀절(고후 5:16)이 바울이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 바울은 예수의 참 제자인가?
고린도의 일부 바울 반대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에 관해서, 성령에 관해서도 복음에 관해서 더욱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온전한 예수, 온전한 성령, 그리고 온전한 복음을 주고 있었다.
바울이 초대교회로부터 사도권에 대하여 의심받은 것은 첫째, 바울은 최초의 12사도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 둘째,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사도라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 셋째, 교회에 대한 가장 난폭한 박해자 즉 한때 가장 앞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의 회심은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간 그리스인들을 잡기 위하여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고전 15:8; 행 9:17; 16:16). 바울은 그 현현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 가운데 하나 사람으로 생각한다(고전 15:5-11). 그리스도의 나타남은 다른 말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계시한 것이었다.
다메섹 체험이라는 객관적이고 외적인 사건은 바울 존재의 중심부에 영혼을 뒤흔드는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고후 4:6; 갈 1:6). 즉 그리스도의 원수였던 자가 그의 종이 된 것이다. 바울은 고후 5:17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바울의 다메섹 경험은 단지 바울의 사적인 회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사실 종종 주목되고 있듯, 바울은 그것을 회심보다는 사도로 임명된 것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하여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던 바울이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고전 15:8; 9:1). 특별히 이방의 사도로서 부르심에 대한 동일한 사상이 행 9:15과 갈 1:16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남에 대한 바울의 묘사에도 충분히 나타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이방선교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 참으로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의 현현과 일치하는가에 대해서는 종종 의문이 제기되었다. P. Gaechter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이 갈 1:16; 고전 15:9과 행 26:16-18에서 그리스도의 현현과 그의 사도로서의 임명을 결합시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발전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아무튼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말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사실이나 예수의 생애의 세부적인 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놀랄 만큼 적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흔히 바울은 예수에 관한 두 가지 사실, 즉 죽음과 부활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고전 11:23에서 그는 사소한 것조차 언급을 하고, 그것이 발생한 때를 '그가 배신자에 의해 넘겨지던 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윤곽이란 예수는 거처가 없이 선을 행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설교와 모범에 대한 언급이 적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 복음서의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은 예수에 관해서 그가 서신을 쓰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한 그 언급의 부수적 특징은 바울이 서신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의 참제자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다면 그때에 바울이 예수의 참제자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울의 생활의 총화였고 실체였던 거룩한 주님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예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일치성
신학자 덴니(Denney)는 바울과 복음서의 예수를 비교해 보면 양자사이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 서신의 그리스도가 닮았다는 그 유사성은 때때로 바울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인식에 의거한다기 보다는 복음서가 바울에 의존한다는 가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바울을 예수와 비교하려면, 바울적 요소를 복음서에서 먼저 분리시켜야만 한다고들 말한다.
한편 자유주의자 바우어(Baur)에 의하면 갈 2:7-9에서 바울과 베드로는 기껏해야 단지 가협정을 수립하는 데에 그쳤다고 본다. 진실로 그들은 원리상 뿌리깊은 차이에 의해서 분리되고 있다고 보면서 고대 카톨릭 교회가 바울 한사람만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베드로 한사람을 취하지도 않고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를 함께 받아들여 교회의 기초를 그 위에 어찌 세울 수 있었겠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 브루스(Bruce)는 바울이 기록한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이해에 대하여 분명하였으며, 예수의 제자(사도)들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서의 베드로 장모의 치유(막 1:30)와 바울의 게바 결혼 사실의 언급의 일치를 볼 수 있다(고전 9:5). 예수의 말씀들은 실제로 인용하지 않은 곳에서도 바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의 실질적인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롬 12:1-7; 15:1, 3 등). 간단히 말하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신약 특히 네 복음서에 나와 있는 내용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인간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울과의 비교 결과에는 다만 모순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자세하게 연구해 보면 일치점을 알 수 있다. 예수와 바울과의 일치는 근대 자연주의적 비평에 의해서 인정된 복음서의 예수에 관한 설명의 모든 요소 요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동일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부성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도 예수와 마찬가지였다. 셋째로,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제시하는 점에서 예수와 동일하다.
Ⅴ. 결론
논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예수의 12제자들의 형성과 12제자의 성경상에 기록들을 살펴본 후 공관복음에 나타난 제자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2제자와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제자가 된 사도 바울의 제자화 과정을 비교하면서 12사도와 바울의 참 제자됨을 살펴보았다. 주님의 12제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도의 반열에 오른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객관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아울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제자된 자의 원리인 이신득의(以信 義)의 원리를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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