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신학교-제자양육번역도서

현대신학

주거시엔셩 2016. 9. 26. 18:16

현대신학 정홍열 교수님

3/8

이 과목을 통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이해하자.

그 시대 왜 그들은 그런 것을 주장하였는가?

전통과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주장을 폈나?

발제하는 것은 취소함.

강의 위주로 할 계획임.

교재: 20세기 신학사상1 - 김균진 -> 연세대학교출판부

-> 몰트만의 제일 제자다.

20세기 신학 - 스텐리 그렌츠, 로저 올슨 -> IVP

-> 복음주의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축을 가지고 20세기 신학을 관통하고 있다.

초월성을 강조하는 학자는 보수주의 학자

내재성을 강조한 학자는 인간중심적 관점을 추구하였다.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 김영한 저 -> 대한기독교출판사

-> H. Zahrnt "Die Sache mit Gott" (The Question of God)

현대인의 신학사상 -> 연세대학교

Morden Christian Thought -

-> 편저자의 주관적 생각을 줄이고 원 신학자의 생각을 잘 소개함.

-> 현대신학자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

현대신학해설 - 간하배 -> 개혁주의신학협회

최근신학연구 - 박 만 -> 나눔사

해방신학에서 생태계신학를 다루었다.

조직신학 속의 영성 -> 대한기독교서회

-> 영성이라는 주제를 신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했나?

-> 현대신학자들 가운데 4명의 학자들은 잘 다루었다.

현대신학의 주요논쟁...

* 현대신학책은 너무 많은데 내용은 비숫하므로 1,2권을 여러번 읽고 소화하는 것이 좋다.

* 한 신학자를 잘 공부하는 것이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 신학자가 각 주제별로 어떻게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 제일 좋은 사람은 칼 바르트다. 체계적으로 잘 진술한 학자다.

=> 신학하는 방법론과 인식론에서 있어서......

강의 내용 개관

-. 슐라이어마허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 문화개신교주의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 칼 바르트 -> 계시론, 말씀론, 예정론, 복음과 율법 등

-. 루돌프 불트만 -> 훌륭한 20세기의 성서신학자다.

30년동안 가르쳤는데 아직도 이 사람의 신학을 지금 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신학자들의 80%가 불트만의 제자다.

나중에는 제자들에 의해서 불트만의 신학을 극복했다고 하나.. 그래도 그의 제자다.

-. 디이트리히 본회퍼 -> 신학자들 중에서 이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가?

-. 폴 틸리히

-. 판넨베르크와 몰트만-> 불트만과 바르트가 가지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고 나온 신학자다.

-. 진화신학(떼이야르드 샤르댕) -> 예수회의 신부였고 지질학자였다.

진화론과 신학을 연결하려고 했다. 현대 카톨릭 신학자들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줌

-. 과정신학(화이트 헤드와 존 콥) -> 첨단신학이다.

-> 현대에 새로운 진리를 던지고 있다.

 과제물

현대 신학자들 중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연구하라

-> 10 point 160%

-> 본회퍼의 기독론..등

-> 5월경, 나중에 정확한 날짜는 통보

-> 한 주제의 책을 가지고 요약하면서 자신 나름대로 정리해도 된다.

선택한 책을 중심으로 각주를 달면 된다.

 강의 시작

현대의 범위를 어떻게 말할까?

인간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넓게 보면 -> 종교개혁

종교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말한다. 신앙(복음)에 의한 해방을 말한다.

좁게 보면 -> 계몽주의 이후(18세기 이후)

기독교 전통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더 좁게 보면 20세기 이후

왜 19세기부터 현대신학이 등장했나?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일까?

1. 과학의 혁명 - 코페르니쿠스, 갈리레이, 뉴턴 -> 천동설에서 지동설, 만유인력 등

과거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

2. 형이상학적 혁명(정신적 혁명) - 데카르트로 시작하는 인식론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은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verum est ens

truth is being

즉 옛날에는 실제는 실제였는데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의심해 보는 것이다.

-> 다 의심스러운데 회의하고 있는 나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 이 결과 신이 인간세상으로부터 축출되기 시작한다.

-> 이전에는 신은 당연히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 나의 존재가 우선시 되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2차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계몽주의 이후로 사람들의 사적(개인적)영역으로 축소된다.

-> 이전에는 기독교 신앙은 공식적인 것이었는데....

=> 어느 지역이 기독교이거나 카톨릭이거나 항상 시청과 교회가 중심이었다.

=> 교회의 권징이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 도시구성원에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될 정도로 축소되었다.

3. 수학과 역사가 키워드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

합리주의 정신이 깔려 있다.

자신의 진리를 설명하는데 수학적인 원리를 사용하였다.

하나님도 수학적인 원리로 설명한다.

4. 역사주의가 꽃피는 시절이다.

헤겔, 콩트, 다윈(진화론), 칼 막스

역사가 우선 관심의 대상이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키워드다.

로제타스톤(Rosetta Stone) : 영국 대형박물관 정문에 전시되고 있다)

-> 179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60km 정도에 떨어진 로제타에서 발견한 돌 파편이 다. 나폴레옹 군대가 발견하였는데, 이 파편에 윗단에는 이집트어로, 아랫단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즉 과거 고대문자를 인류가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전에는 고대인류역사를 알려면 오직 성경밖에 없었으나 이것이 해독되므 로 말미암아 성경과 동시대에 있던 시대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성경이 상대화 되었다는 말이고, 성경비평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애굽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밝히지는 사실이 생김.

진한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 verum guia factum (진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존재가 진리였는데 여기서는 인간이 진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하고, 실증할 수 있는 역사만 역사 고 실증되지 않으면 신화가 된다.

실증은 역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반복, 재현되었을 때 사실이 된다.

반복, 재현되지 않으면 사실이 아니라고 치부하였다.

성경에 나온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의 판단에 놓이게 되었다.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역사의 주체가 인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중요한 사상은 합리주의와 경건주의다.

 합리주의

모든 기독교의 교리를 인간이성의 법정에 서서 이성의 심판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모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성경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 중 진리성이 결여된 것은 과감하게 제외시킨다.

-> 결국 성경에서 이웃사랑만 남게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윤리를 강조한다.

오병이어: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내놓자 도시락을 숨겨두었던 어른들이 도시락을 내 놓았다는 것이다.

 경건주의

합리주의의 반작용을 나왔다.

종교개혁 -> 개신교 정통주의 -> 정통주의(시비를 잘 가린다.)

-> 칼빈이 하지 않은 말은 이단이야!

-> 정통주의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경건주의가 나온다.

=> 즉 머리에서 가슴으로 간 것이다.

-> 정통주의의 교리적 판단에 벗어나려는 시도로 자유주의가 나온 것이다.

경건주의는 생명력을 상실해서 화석화된 17세기의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 영적훈련을 부흥하기 위해서 성경연구을 위한 소그룹을 권장했다.

-> 이들은 성경에 대한 과학적 연구(자유주의)보다 경건훈련을 강조했다.

오늘날 큐티, 묵상이 이 경건주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신앙을 너무 개인의 경험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경건주의도 역시 신학적 근거를 소홀히 하면서 윤리적인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 그리고 분리주의로 치닫게된다. -> 경건주의의 한계다.

-> 너무 구별을 강조하다면 보니 분리주의자로 전락함.

-> 신비주의, 은둔주의, 현실도피주의가 된다.

-> 이 경건주의 요소가 현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슐라이어마허 등에게....

다음시간까지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알고 오십시오..

감정을 가지고 신앙을 설명하였다. -> 인간의 핵심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함.

3/15

슐은 현대신학의 아버지이다.

슐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 “기독교신앙”이라는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이후의 대작이라고 본다. 영어본만 있다.

책이 방대하고 글도 어려워 읽기가 어렵다.

이 사람으로부터 현대신학, 해석학, 교육학이 출발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대화가 28개인데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이후의 대작이다.

종교뿌리로는 개혁교회 신학자이다.

칼빈, 쯔빙글리 -> 슐 -> 바르트 순으로 이야기 한다.

중요한 학자인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멀어져 보인다.

-> “종교론”(최신한 역, 한들출판사)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 읽기 쉽지 않았다.

=>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는 부제가 있다.

당시에 기독교를 얕잡아 본 비판하는 이성주의적 지성인에게 기독교를 잘 설명하 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로 기독교를 설명했다.

신학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보수주의자는

C, Hodge ->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보편적인 진리체계를 연구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했다. => 신학의 절대성

슐라이어마허 -> 그의 시대에 그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보편적인 진리체 계를 설명해주는 것을 신학이라고 했다. => 신학의 적용성, 변증성을 강조

칼바르트 -> 그의 시대에 그의 교회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신 학이라고 했다. => 교회의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슐은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폐기되고 있는 기독교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해 준 사람이다.

-> 기독교 신앙을 이성이라는 집으로 짓지 않고 Das Geful(센스보다 더 심오한 감각) 으로 설명되어야지만 올바른 설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방법은 합리적이었다.

-> “기독교 신앙은 절대의존의 감각”

신앙은 지식, 동의, 신뢰가 필요하다.

->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슐 당시의 사람들은 신앙을 거의 지식, 인식으로만 제한해서 이해해 왔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 신앙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앙이 화석화되고 경직되었다.

어떤 초월적인 기적에 대해 믿지 못할 때는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겼다.

슐은 기독교 신앙은 무한한 하나님에게 유한한 인간이 절대적 감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의 관념철학이 헤겔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신학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슐

철학에서 비판하는 사람은 포에르바하 -> “인간은 느끼는 존재이다”(Sentio ergo sum)

=> 인간은 육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 무신론으로 갔다.

-> 헤겔이 철저하게 관념과 이성을 중시한 데 비해서 이 두사람은 감각을 중시했다.

1. 슐의 생애

Friedrich Dania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1768년에 Breslau 에 태어났고, 아버지가 육군 군목이셨다. 아버지는 개혁목사이면서 모 라비안 운동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추종자)이었다. 아버지는 슐이 기독교 전통(기적 등) 을 부인하는 것을 가슴아파했다.

고대희랍철학과 칸트를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해서 먼저 할례대학에서 공부했다.

주로 Halle 와 베를린(Berlin)을 왔다갔다 했다. 베를린 대학 창시자이다. 독일의 대학 들 안에 신학부를 생기도록 공헌 한 사람이다. 상아탑에 뿌리를 내리면서 인접학문과 대화를 하면서 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해 나갔다.

슐의 정신을 소개해보면 경건주의 와 낭만주의 전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 경건주의와 낭만주의가 조화되기가 어려우나, 합리주의가 없다면 가능하다.

가계로는 경건주의였고, 그의 시대 중 베를린에 합리주의에 대해 반발하는 낭만주 의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의 리더가 슐이 되었다.

-> 감정을 중시하는 것이 낭만주의와 어우러질 수 있었다.

-> 한 쪽으로는 경건주의 전통이 있고, 또 낭만주의 전통 하에서 기독교를 새로운 언 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초월성, 삼위일체, 성육신 등 당시 합리주의자들이 부정했던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합리주의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내재성과 신 앙의 주관적 경험을 강조했다. 기독교 토대 전부가 무너질 상황에서 가장 중 요한 것을 붙잡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신앙이 무엇이고, 구원, 죄, 하나님의 은혜 등 무엇인가를 자신의 새로운 언어로 붙잡고 설명하면서 주변적인 교리(삼위일체, 성육신 등)들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허물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래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기독교를 격렬하게 변호한 사람이었다.

1799년에 “종교론”이란 책을 출간한다.

->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된다.

-> 그러나 연애에 실패하고 1801년에 시골교회로 옮겼다가 1804년에 할례대학 교수로 초빙을 받는다. 1807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인명받 고 1810년 베를린대학에 초빙을 받고 죽을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게 된다.

1809년에 친구의 미망인과 결혼을 한다. 1834년 성 삼위일체 교회 예배 중 성찬식 도중에 임종한다.

2. 슐의 사상

## 종교론에 나오는 사상

슐의 당시에는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구시대의 유물로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종교란 합리적인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체험과 감정을 다루는 체계로 이해되었습니다. 1799년 그는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탐구합니다. (기독교를 종교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것에 칼바르트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슐의 종교론의 기본명제는 종교는 신조, 교리, 신학적 체계가 아니라 본질상 하나의 경험이요, 깨달음의 느낌이요, 감각이다(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새로운 시각에서 설명해 준 것이다).

->교수: 사실 기독교는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있는데 양자택일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안 타깝다. 신조는 개신교의 자랑이다.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 안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신조가 많을수록 교리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가 답을 할 수 있다.

-> 슐은 교리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험이 기독교의 엣센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종교는 도덕도 선행도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는 만유와의 조화된 느낌이다.”

-> 즉 종교는 각 사람들 속에서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다. => 슐처럼 인간을 세계 내의 존재로 인식했다. 슐 이전에는 없었다.

=> 이전에는 인간을 말할 때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인간이란 관점에서 말했다. 그런데 슐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인식하고 강조한 사람이 슐이다. 인간은 이세계와 조화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그동안은 창조의 관리자로 인간을 이해했으나 세계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인식은 없었다.

-> 경건한 사람의 체험이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이 무한자 안에서 무한자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모든 시간적인 존재들이 영원자 안에서 영원자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신 안에서의 삶이며,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 안에서 신을 소유하는 삶이다.

=>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슐은 쉽게 무한자, 영원자라는 사변적인 말로 표현한다. 사람을 유 한자, 시간 안의 존재로 설명한다.

“범재신론”, “만유재신론”이라고 표현한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나, 범재신론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보다 크시다.

-> 종교론에 나타나는 중요한 핵심사상

(1) 모든 존재가 신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종교의 본질적 성격이다.

(2) 모든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느낌, 감각이 종교본질의 중요한 요소이다.

--> 자기가 유한자임을 알기에 무한자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3) 모든 유한한 존재가 그 속에 존재하는 무한자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 성령의 내주하심, 즉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다.

참고: Arnold Gehlen “인간” -> 인간은 개방된 존재라는 키워드로 책을 썼다.

-> 인간은 결핍된 존재이기에 이 결핍을 통해서 미래를 열어간다.

=> 예: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없기에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나오는 사상을 요약해 줄 것이다.

3/22

지난강의 요약

슐의 종교의 이해-> 종교론에서 종교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종교는 초월적이고 비 과학적이다라고해서 멸시했다. 종교는 신조나 교리(기적으로 무장된... 부활, 성육신, 두 본성 등)등 고리타분한 것이다. 윤리, 도덕 체계이다라고 햇다.

슐이 주장하는 핵심은 초월적인 것을 지적 모험도 아니고, 윤리 도덕이 아니다. 그는 무엇에 대한 경험을 중시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 이 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겠느냐?

-> 유한자가 무한자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교감(느낌)이 종교의 핵심이다.

당시 합리주의, 계몽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종교를 잘 설명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결핍의 존재라고 누구나 얘기한다. 그 결핍이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에서 철학, 사회학, 종교학이 될 수 있다. 이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동원되었다고 슐은 주장한다. 그 종교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므로 이 한계를 넘어가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 이 내용은 모든 종교 현상학에 입장에서는 다 적용된다.

-> 종교현상학에는 계시가 없다. 아래로부터의 출발한 것이므로..

->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동되었다고 종교현상학자들은 주장한다.

슐은 신앙론에서 기독교적 신앙을 설명할 때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나온다.

오늘 강의시작

1799년에 종교론을 쓴다음에 1821-2년에 초판,

1830년에 Der Christliche Glaube

The Christ Faith

슐의 “유한....”이 특징은 모든 종교에 다 적용된다. 이런 메카니즘속에서 종교는 움직이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슐의 찾은 기독교의 특징 -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

1. 죄

2. 은혜

-> 기독교는 죄를 말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그의 책 1권에서는 죄를 다룬다. -> “자기 의식”이란 말을 죄와 함께 표현하고 있다.

2권에서는 은혜를 다룬다.

-> 이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시각이며 세계관이다.

로마서도 죄로 시작한다.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느냐를 설명하고 있다.

죄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건져내는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 이 두가지가 기독교의 고유한 특징이다.

슐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떻게 죄를 말하고 있는가?

히브리인이 말하는 죄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의 일탈이다.

슐은 죄를 설명하기를

-> 하나님께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

우리 마음에 다른 것으로 꽉 차게 된다. 즉. 자기로 채우게 된다.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죄의 형태로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피조적 조건을 거부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고립”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고립을 소외라는 말로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도 죄를 인간의 교만으로 보았다. 뱀의 유혹도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했다. 죄적 본성을 유혹했다. 조직신학에서도 대표적인 말이 인간의 “교만”이다.

은혜가 어떤 방법으로 주어지는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셨다.

조직신학은 어떤 주제가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슐은 jx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가 기대된다.

은혜는 “하나님은 신(神) 의식을 상실하게 된 역사의 가운데에 jx을 하나님의 중보자로 보내셨다. jx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최상의 일체성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 jx를 완벽한 예로 설명한 것이다.

=> 예수님을 모범으로 보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다.

jx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지만 결국 구세주가 되신다. 구세주가 아닌 모범은 의미가 없다.

슐의 관심은 jx라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완벽히 의존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예를 보여주셨다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즉 모델을 잊어버린 사람에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존재를 소개하고, 예수를 통해서 얼마나 완벽하고 의존하고 일체되는 예를 보여주셔서 우리의 절대적 신앙의 본으로 보여주셨다.

-> 십자가 지기까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그 모습이 더 중요하게 슐에게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정리: 슐의 구원관

“기독교의 구속은 한 편으로는 인간이 절대의존의 감정을 거부하므로 자신의 참다운 본성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죄를 인식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신의식(하나님께 의존하는 생각)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고립과 소외상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경험이 구속이다. ..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통했다.

슐의 교회론 -> 중요하게 취급되나 삼위일체는 마지막에 부록(18p)에 간단히 언급한다.

-> 슐은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았다. 즉 합리적이지 않는 것(성육신 등)은 안 믿음

교회의 의미란

“교회의 본질 이해에 있지 않고 한 사람이 교회에 소속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험에 있다.”

이 경험은 인류의 계속되는 그리스도 경험이다.

-> 교회에 소속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이 중시한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냐?

-> 슐은 한편으로 전통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언어로 재생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오늘날 예배(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 슐은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가 제시하는 jx를 통한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을 갖게 되고,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의 자리로 나아간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 슐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고, 낮아지면서 얼마나 하나님과 조화롭게 살았느냐를 경험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jx의 사역(초월성)에는 관심없다.

=> 예수님의 초월성을 빼면 모범밖에 없다.

은혜에는

칭의 ->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심(우리 밖에서 이루지는 것이다. extra nos). “나”를

성화 -> “나”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성화다.

칭의에 대한 나의 응답이라고 본다.

-> 성화의 두 차원이 있다. <-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백미다.

성화에는 나의 응답이면서도,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 성령께서 나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주도권은 하나님이시나 나의 응답도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에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나로 하여금 사역하게 하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jx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오고 나도 응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끝부분이 조금 남았다고 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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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의 신학이 각론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예를 들어보겠다.

-> 인간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이라면 죄와 죽음이다.

죄와 죽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 교수님의 질문: 죽음이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 종말인가, 죄의 결과인가?

우리는 창3장이후의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의 결과인데

그러나 슐은 죽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 결과라고 이해한다. 슐이 타락의 이야기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슐이 인간과 하나님을 바라볼 때 키워드는 인간은 유한자이고 신은 무한자라는 것이다. 유한자는 무한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을 가진다.

그렇다면 인간이 유한자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특징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적 특징이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한자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시간적, 공간적은 것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죽음을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 인간이 타락하면서 변한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이 두려움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다면 죽음을 죄의 삯이 아닌, see you again! 이라고 편하게 죽었을 것이란 말이다.

죽음은 본래적인 속성인데 타락하게 되므로 죽음을 두렵게 경험하게 되었다.

--> * 슐의 오류다

우리의 시각:

아담은 타락 할 수 있는 영생이고,

부활체는 타락할 수 없는 영생이 다른 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이 무엇이냐?

->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셨나, 죽음자체를 이기셨나?

죽음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즉 예수님은 죽음 자체를 이기신 것이다.

## Albrecht Ritschl(1822-89)

알브레히트 리츨

리치는 한국말로 소개된 책이 없다.

-> 신학적 영향은 현대신학에 지대하다.

현대신학의 중요한 이의는 리츨이후의 신학자에게 많은영향을 주엇다.

-> 본회퍼, 니버, 종교사학파(월터 라우센부시)

키워드는 가치, 도덕, 윤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한다.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

칸트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충실하게 발전 적용시킨 사람이다.

리츨의 생애

1822년 베를린에서 출생, 아버지는 루터교 감독이었음.1839년(30세)에 본 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본-> 할례대학- 하이델베르크 -> 튀빙겐으로 옮긴다.

독일은 공립학교가 많기에 어디를 가도 상관없다. 단 노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된다. 그래서 대부분 3개의 학교를 돌아다닌다.-> 교수에 따라 가서 강의 들을 수 있다.

튀빙겐에서 F.C. Baur 이라는 사람을 만나 박사논문을 쓴다. “마르시온 복음과 정경 누가복음”이 논문 제목이었다. 바우르는 누가복음이 복음서 중 최초 복음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근거가 마르시온 복음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본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할 때 쓴 논문에서 리츨은 마가복음서가 최초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자기가 배웠던 튀빙겐 학파의 교수와 결별하게 된다.

-> 불트만도 제자들에 의해서 비판받는다. 바우르도 리츨로 인해 비판받은 것이다.

불트만의 제자들이 선생에게 직접 치고 받고 나와 신학이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한국정서에서는 어렵다. ㅠ ㅠ

옛날에는 두개의 전공을 가진 교수가 많았다. 신약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1859년에 본 대학의 교수가 되고, 1864년에 괴팅겐의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있는다.

리츨의 평생의 관심은 의인론과 화해론이다. 칭의론에 관한 장서를 썼다.

리츨의 사상

리츨을 이해하려면 임마누엘 칸트를 이해해야 한다 .

칸트에 대해

-> 리츨이 칸트로부터 두가지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첫째. 형이상학이나 이론적 사변이 하나님의 대한 타당한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둘째. 종교적 사상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이다.

이 두가지 사상이 칸트의 사상을 축약한 것이고 리츨의 사상이다.

신학을 사변적으로 말하고 신학을 도덕, 윤리, 가치로 풀어내겠다는 것이다.

슐은 감각과 경험으로 기독교를 풀어냈는 것과는 달리.........

박애, 인류애가 칸트와 리츨로부터 온 것이다.

칸트의 본심은 Ding an sich (물 자체) 물자체는 모르고 현상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도 사변적 신학자라고 보아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의 대부로 보기 보다는....

-> 그는 변증이라는 모티브가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풀어 줄 수 있을 까? 당시 모든 합리주의 사상가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무시하고 부정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알 수 없다, 즉 모른다고 남겨두자는 것이다.

=> 순수이성(형이상학)으로는 부정하고 버리기 이전에 모르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성(도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순수이성으로 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실천이성으로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뭐가 실천이성이냐“ 정, 언, 명 인간의 마음 속에는 도덕적인 명령이 있다는 것이다.

-> “너는 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양심의 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을 설명해 주는 필연적 요청으로서의 신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인간의 도덕적 의식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 Conscience / Conscientia

양심은 행동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를 보는 주체가 나의 행동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때 윤리도 있고 판단도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서의 종교는 인간의 실천이성의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칸트가 보는 예수는 윤리로서 완전한 자다.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이런 내용을 리츨이 수용해서 신학으로 표현하느냐?

리츨에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본성(신성과 인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형이상학적 논쟁을 불필요하다. 이런 논쟁을 해왔기에 기독교가 공격을 받는다는 여겼다.

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 신앙을 윤리차원을 축소시킨 것이 안타깝다.

이처럼 모든 자유주의 특징은 축소주의, 환원주의로 설명하려고 한다. -> 즉 작은 부분으로 기독교를 축소시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리츨의 도덕은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체계로서의 도덕을 말한다.

-> 기독교 사회윤리가 리츨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니버 등).

윤리는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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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4월26일

본 강의을 들어가기전에

리츨하면 생각나는 것.

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인 것을 발견한 것이 1900년초반이었다.

-> 요한에스 바이스, 슈바이처 등에 의해 발견됨

최고의 선이 실현된 하나님나라를 말하는데, 이들(요한, 슈바이쳐)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 리츨은 이 세상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불가능한 가능성”

-> 불가능한 일이나 가능성을 보면서 추진하고 추구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임무라고 보았다.

2. 사회참여의 원조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였다.

3.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적 존재증명에서

-. 가치론적 증명법

우리 인간은 가치적 판단을 한다. 진, 선, 미에 대한 판단을 한다. 이 판단에는 절대적인 기준과 있고, 상대적인 것이 이 기준에 발현된다.

가장 완벽한 최고의 진, 선, 미가 있을 때 이 판단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가장 완벽한 가치이시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신을 설명할 때 summum bonum(최고의 선) 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 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가치적 판단을 실현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가치체계의 실현의 수단으로 바꾸어놓았다.

가치체계와 만나지 않은 신학은 무의미하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 두 본성 등은 쓸모없는 것이다. 무의미하다.

-> 우리가 선을 실천하는 것,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 과학과 종교를 양분하여 종교는 윤리를 실천하고, 과학은 합리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체계로 축소시켰다. 긍정적인 면은 윤리 실천을 강조했다.

이 기준에서 기독교를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 구원, 하나님 등에 대해 설명한다 .

-> 조직신학은 언제나 키워드가 있어서 각론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리츨은 “윤리(도덕)”로 설명했다. => 이렇게 일관성이 있어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 누가 읽어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리츨은 훌륭한 학자다.

그러나 리츨이 올바른 기독교를 설명했냐? 아니다.

리츨의 사상

기독교 일차적인 관심은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것에 있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에 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 이런 질문은 전형적 루터적 질문형태이다. “어떻게 의롭지 않은 자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 루터의 칭의론을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리츨은 답을 루터와 다른 답을 얻었다. 루터는 답을 하나님의 은혜로 찾았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은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나오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나오는 것이므로 반쪽짜리다.

리츨은 윤리에서 찾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가치를 인식하는 전제가 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장이다.

-> 절대정신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라고 헤겔의 말를 페러디 한거쇼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 jx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안에서 발견된다는 집단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래서 jx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최상의 역사적 신뢰이다. _.

리츨은 jx를 안다는 것은 그의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x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셨고, 동시에 그 사랑이라는 가치를 인간의 최상의 이상으로 제시하셨다.

-> 여기서 리츨이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는 사랑이라고 한다.

왜 jx가 신인가? - 예수님의 신성은?

리츨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인간에게 최상의 도덕적 가치들과 이상들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신성을 우리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의 가치판단을 우리가 인정했기에 신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jx의 위대한 사상은 인간에게서 화해와 의인을 이룩하였다.

-> 여기서 의인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이신칭의 ->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하여 주신 것이다.

이신득의 -> 아르메니안에서 즐겨쓴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habitus? 체득된 본성이란 뜻인데 이것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스콜라에서 구원론을 말할 때 칭의이후에 우리 마음속에 habitus?(합이투스)가 생기는데 우리의 변화되어 나가는 본질이 있느냐 없느냐가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스콜라철학은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안에 내적으로 칭의 받는 요소를 없애버렸다.

->모든 인간은 자기애를 제일의 가치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으나 예수님과 직면하게 되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임을 배우게 된다. => 이 때 자기애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는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구원받은 자들이 함께 사랑을 추구해 나가는 곳인 교회는 예수님에게 그 기원을 두며 예수님의 가치를 창조하는 공동체로서 구원을 받아드린 사람들의 공동체다. 교회의 최종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사랑으로 고무된 행동을 통해 이룩된 인류 공동체다.

교회의 사명은 인류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데 있다.

-> 사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아지고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판단과 사회속에서 그것의 완성을 추구하는 체계로서 등장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 현대신학에 제일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바르트, 불트만에 더 강하게 연구할 것이다.

로제타 스톤에서 고대문자가 발견되면서 성경이 상대적인 기준을 바뀌어졌다.

역사는 검증가능한 실증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리츨도 이 주제에 대해 답변을 해야 했다. 왜, 주변의 학자들이 이것에 관해 말을 많이 하니까

리츨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지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성경에 가치판단들이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독교 창시자인 예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역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세족식은 어느날 밤, 어디에서 하셨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를 가르치므로 윤리적인 것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리츨은 성서 비평학을 지지했다.

예수님이 누구셨으며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행동하였느냐를 결정함에 있어서 성서를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예수님의생애를 더 완전하게 밝혀주는데 공헌할 것이다.

-> 리츨은 어떤 주제가 오더라도 자기의 일관된 주관적 주장으로 흡수해 나갔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 인격적으로 현존함에 따라 예수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 예수가 추구했던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자신의 이기적 주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능력입니다.

=>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고,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사랑도 이웃사라에 함몰되고 만다.

==>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에 대해 말하지 않고, 모범으로서의 예수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계몽주의로 서로 결별하였으나 200년 후에야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에 대해서 노코멘트하고 편하게 지냈다.

리츨에서는 이것이 더 강조되고 있다.

일단은 종교와 과학이 인간의 삶에 요긴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 과학은 실제에 대해서 탐구하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능 력이 없다. 반대로 실제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종교의 과제이 다.

=>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여 주어서 서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각자의 역할을 완성하기위해 서로에게 의존할 필요가 있다.

리츨에 의해 20세기에 사회복음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 인종, 빈곤, 인권, 평화 등 모든 인류적인 문제들의 해답을 리츨로부터 얻게 된다.

-> 후에 사회윤리가 발전하게 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도덕적 인간와 비도덕적 사회” 라는 책을 읽어봐라.. 라이놀드 니버 저(리츨의 영향받음)

-> 한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려고 해도 구조악 속에서는 선하게 살 수 없다.

다음시간에는 칼바르트를 합니다.

교수님은 칼 바르트를 통해 조직신학의 틀을 세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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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

1886-1968

60년도에 한국에도 왔다가 갔음.

70년대 이후부터 바르트의 신학이 소개되었다.

70-80년대에는 바르트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이 많이 나왔다.

-> 아직까지도 그의 사상이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저서

-. 교회 교의학

4회 2권인가 3권까지 나온 것이다. 종말론을 못쓰고 죽었다.

쓴 것만 가지고 다루려고 해도 방대한 분량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나 자유주의 신학자 누구도 바르트를 걸쳐야 한다.

->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있다. .

-. 로마서 2판 -> 신학의 큰 전환점인 책이다.

-> 절마다 주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 신학의 인사이드를 펼친 것이다.

마치 자기의 신학 성명서와 같은 책이다.

-> 자유주의를 확인 사살한 책이라고 한다.

-. 칼바르트의 전기 - 에바르트 부시가 쓴 책이다.

-. 칼바르트의 전기 - 한스 울...

-.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 성서안의 새로운 세계 시리즈... 1916년에 바르트가 쓴 것이다.

-> 원문제목을 직역하면 “성경 안에 있는 이상하고 새로운 세계”

자기가 자유주의 신학자에게 배워서 목회하려고 했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와 성경 공부를 할 때 옛날에 느낀 성경이 아닌 새로운 성경으로 다가왔다.

인간이 만난 하나님에서 하나님이 만나 인간으로 새롭게 만났다.

=> 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 있다.

바르트는 어떤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변화를 시도했기에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에게 좋은 평은 못 받았다.

Barthian 학파를 남겼다. 누구냐?라고 지명하기는 어려워도...

->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사상도 바르트에서 나왔다.

스위스 사람으로 칼빈의 후예이며 장로교 출신이다.

공헌: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자에게 신학은 대학의 학문이었다. 신학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현장인 상아탑의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이성의 게임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바르트는 이 신학을 교회의 학문으로 옮겨온 것이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대학의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학문이어야 한다. 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목을 “교회 교의학”(Kirchl Dogmatic, 이라고 했다.

1886년에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출생. 독일어권 도시였다.

아버지는 신학교 교수였고, 개혁교회의 보수적 신앙속에서 자람.

1902년에 입교전날 밤에 신학자가 되려고 결심함. 스위스의 Bern, Berlin, Tubingen, Marbing 학교에서 리츨과 헤르만의 영향을 받는다. 1911년 스위스의 자편위릴(Safenwill)이라는 광산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이 때 별명이 “빨갱이 목사”였다.

이 사람은 변신이 화려했다.

친구인 투나이선(E, Thurneisen)이라는 목사와 교제하였는데, 성경공부, 편지 등을 왕래했다. 이 때 성경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열렸다. “성경안에 있는 이상하고 새로운 세계”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자기가 존경했던 신학교 교수들이 전쟁 지지선언을 한다. 이들이 가르친 신학이 깨닫고 전향을 한다. “로마서 주석 1판(1919)”을 썼다.

자유주의자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었다고 한다.

재판때는 초판의 내용을 다 바꾸어서 출판했는데, 이 것이 신학자들의 논쟁 거리가 되었다.

시골목사가 아니라 잠재력이 있는 신학자임을 알려준 계기 된다. 이것으로 인해 독일대학에 청빙을 받는다. 괴팅헨에서 불렀는데, 가서 교수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강의 배정에서 교양선택에서 1, 2과목만 배정되었다. 고참 자유주의 교수들이 왕따를 시킨 것이다.

마지막 본 대학에서 1934년 Barmen 신학선언(히틀러 반대 신학자들이 주동된 것이다.)의 초안을 잡았다. 초안 위원이 있었는데 바르트 혼자서 단숨에 썼다고 한다. 독일에서 추방당한다1935). 바젤에 가서 교수로 생애 마친다. 20세기의 신학 중심이 바젤(바르트)과 마브르(불트만)가 되었다. 이 때 신학생들이 수천명씩 몰렸다.

바르트가 신학노선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 키에르케고르, -> 루터, -> 칼빈, -> 바울 -> 예레미야

신학의 정의 : 신학은 인간학이 아니라 신에 관한 학문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학문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과 과제 :

칼빈의 재해석. ->바르트가 말한 신학의 진수를 보면 칼빈의 신학을 오늘 어떻게 재해석 하느냐이다. 바르트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에게 나쁘게 평가된 이유 다. 칼빈의 논리를 자기 식으로 적용했다.

1. 하나님의 말씀론(계시론)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론으로 시작하는데. 이것 자체가 정통으로의 복귀였다. 이전의 자유주의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았다.

3가지 형태를 주장한다.

1) 계시된 말씀(예수 그리스도)

2) 기록된 말씀(성경)

3) 선포된 말씀(설교)

-> 똑같은 말씀인데 진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계 시가 아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면 성경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되려면 말씀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 보수주의자는 “-- 말씀이다”. 이지, “---된다”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선포된 말씀도 유한한 인간의 말로 기록되었기에 계시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인간의 말이기에 성경도 오류가 있을 수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지, 무너뜨리는지는 모른다.

-> 칼빈의 성령의 내적 조명에 근거한 것이다. 칼빈도 성령의 내적 조명이 있어야 하나 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조명을 예수 그리스도로 바꾼 것이다.

=> 바르트는 칼빈의 주장을 자기 식으로 말 한 것이다.

혹자는 바르트만큼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 없지만 또 바르트 만큼 성 경의 권위를 해쳤다고 욕먹는 사람도 없다.

-> 신학의 학문성을 새롭게 정의 내린 것이다. 이전에는 이성적, 과학적, 실증적으로 맞 을 때 신학의 학문성을 인정했으나, 신학 고유의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 신학의 학문성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이 따랐다.

바르트가 성서비평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바르트는 축자영감을 전제로 성경을 인용하고 썼는데, 그가 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르트는 성서비평학을 인정하되, 성서비평학보다는 축자영감설을 더 선호하겠다고 했다.

바르트는 성경의 무오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오하다라는 것이다.

-> “유오한 인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은 역사 지리 자연 과학 등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도 오류와 모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증언이 그 유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개개인에게 말씀하시고 개개인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바르트의 말...

-> 이전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에 대해 반박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오류를 인정했다고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성경의 자증성을 강조한다.

-> 성경의 권위는 어떤 합리적 논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인간의 판단과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라는 것이다. ==> 이런 아이디어는 창조과학회에서 고려해야 한다.

-> 과학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뉴턴의 우주론에서 아이슈타인의 우주론이 바뀌었다.

=> 과학의 가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성경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론: 바르트는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책인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최고의 방식으로 알려지신(계시되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 이말은 양면성이 있다. 성경을 하나의 책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허물은 것 같으면서 세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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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출판 -> “사도신경 연구” 정홍열 대한기독교서회

조직신학의 출발점이 사도신경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요리문답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 성경을 많이 알아도 교리를 모르면 이단에 빠질 수 있다.

 바르트의 선택론

-> 칼바르트의 신학가운데 제일 하이라이트다.

-> 교회교의학의 Ⅱ/2 부분이다.

-> 바르트는 모든 신학을 말할 때 칼빈과 대화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선택론 = 예정론

-> 바르트가 선택하면 선택하는 주체와 객체가 있을 거 아니냐?

=> 주체는 하나님이고, 객체는 사람이다 -> 칼빈의 주장(선택과 유기 - 이중예정론)

==>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지 예정론을 제안했다.

=> 칼바르트는 이중예정론에게 나타난 은혜와 폭군의 하나님의 모순된 모습을 해결할 수 있을까? 주된 관심을 가졌다.

==> Christocentric Theology -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선택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도 이중예정으로 쓰나 칼빈과는 다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중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버림받을 자를 위해 미리 버림받으신 것이고 동시에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을 자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버림받을 자와 선택받을 자들이 예수 안에서 버림받고 선택받았다.

이미 예수 안에서 심판을 받았기에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 선택받았다. 바르트는 스스로는 “만인구원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방향은 제시했다.

만인화해설과 만인구원설을 바르트는 구별한다. 즉 자기는 만인화해설은 말했으나 만인구원설은 말하지 않았다. -> 화해된 사실을 알면 화해되는데, 만인구원설은 우리가 응답에 관계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 제한 속죄설

마치 나치가 졌는데, 숨어서 살고 잇는 사람에게 나치가 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나오도록 하는 것이라고

신앙이라는 주제를 탈락시키겠다고

%% 바르트의 예저은 선택의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고, 이중예정은 복음을 받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 “이 사실은 믿기만 하면”이란 소리는 안했다.

창조보다 구원이 먼저다.

바르트는 우리를 위하시는 은혜의 하나님만 말한다.

Deus pro nobis

God for us

오직 구원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는 우리만 그리고 있다

-> 믿거나 말거나 우리의 반응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구속이 크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 예수님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고 오직 구원만 있는 것이다.

G. C. Berkouwer "하나님의 승리“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선택을 위해 선택된 인간으로 버림받은 인간이며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 때문에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다. 이것이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켰다는 사실에서 증거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택을 기독론적으로 구성해 새로운 이중예정을 열므로 예정론의 객관화를 시도한 것은 공헌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각 개인의 실존적인 감사의 고백으로 표현되었던 즉, 신앙 경험의 결과로 선택된 예정 또는 선택론은 신학논의에서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 누가 선택받고 유기될 것인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중예정론은 기계적 예정론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역사이전으로까지 확장시킨 것이 예정론이다. 감사를 통해서 회고하다보니 이중예정론이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속에서 작정하셨다고 한다. 이런 신앙의 비밀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바르트처럼 예정론을 이해하면 질문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중예정론에 담겨져 있는 비밀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칼바르트의 신학 밀러 신학사상 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 바르트의 창조론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할 때의 목표가 이성과 양심과 역사와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 자연계시 - 이성, 과학, 양심 등이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는 수단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신학을 연구했다. 특별한 것이 없이 일반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

-> 이런 식으로 신학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첫째는 종교비판이지만 나아가서 자연계시를 철저히 비판하고, 하나님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이시라고 주장했다. jx을 떠나 나타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 jx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한다.

-> 나중에 판넬베르크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안에서도 나타난다고 반박하고 나타났다.

3권1에서 창조론을 썼다. 자연계시를 신학에서 부정하는 입장이 바르트였다.

-> 에밀부르너처럼 자연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인(no)라고 부르짖는다고 했다.

->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조론을 쓰는 바르트를 보고 자살골을 넣는 선수로 비유했다.

-> 700여페이지의 창조론을 내 놓았다.

창조론의 키(key)문장

1.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은혜의 언약(계약)의 외적 근거를 마련해 주며 이 은혜의 언약은 창조의 내적근거를 마련해 준다.

-> 이 문장에서 은혜의 언약을 “구원”을 바꾸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 그리스도에 집중을 해서 구원론을 펼쳤는데 이 이론으로 창조론을 어떻게 쓸까?

창조는 구속의 외적근거(무대)다. 구원은 내적 근거(비밀, 핵심)이다.

구원과 창조는 서로 필요한 의존적인 존재인데, 그래도 구원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창조론을 말해도 jx를 놓치 않았다. 즉 바르트는 jx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참고: 폰라드의 구속사신학은 창조보다 구속을 먼저 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경험은 출애굽이다. 이런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후에 창조주 하나님에게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도 구원자 하나님을 알고, 나중에 창조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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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에 대한 책을 정하셔서 8장 정도는 요약하고, 2장 정도는 평가나 견해를 써라.

-> 한 사람이 전부 쓴 책.... 「종교론」

-> 기말고사 때까지

-> 책 소개하여 까페에 올려주시기로 함.

 복음과 율법

복음주의 신학총서 시리즈 - 전경희 저, 제2권

-> 은총의 선택 및 복음과 율법 89-110p

이 시리즈의 특징은 좋은 자료를 소개차원에서는 좋으나, 번역은 안 좋다.

마틴 루터의 신학방법론, 성경해석의 원리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틀로 움직여진다.

율법의 사용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다.

-> usus legis

1) 시민적(정치적) 사용

2) 신학적 사용(죄의 고발)

3) 제3사용 -루터에게 제 3사용이 있느냐로 논쟁이 있었으나 없다는 결론이 지배적이다.

-> 그러나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의 책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서 우리나라는 율법의 제3사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제3사용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율법이 주는 용도다.

-> 구원이후에 율법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성화로서 의미가 있다.

=> 칼빈과 멜랑히톤은 성화를 염두에 두고 제 3사용을 말한 것이다.

-> 정통 루터교는 율법과 복음만 이야기 하나 장로교(칼빈)은 율법과 복음 그리고 또 율법을 이야기 한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기위해 율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 순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 율법이 죄를 고백하게 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복음으로 먼저 구원받고 율법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예: 삭개오의 회심과정

사도바울도 율법으로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먼저 주님을 만났다.

-> 루터교는 뒤에 나오는 율법이 로고스가 아니라 권면의 말이라는 것이다.

참고: 성경에 나오는 율법의 개념을 분명히 규정할 수 없다. 때로는 계명과도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indicative - 복음을 소개하는 내용

imperative - 실천과 윤리인데 율법과 관련이 있다.

개신교의 윤리는 조건적 윤리가 아니라 감사의 윤리인데...

율법과 복음으로 주장하든, 복음과 율법으로 주장하든 각 소속 교파의 주장이 다르다.

칼 바르트의 죄론

-> 바르트의 죄론을 화해론을 집어 넣어서 죄를 설명하는 방법이

죄의 1특징을 교만인데, 왜 교만이 죄냐? 종이신 주님 - 주님이 우리의 종이 되심, 화해를 위해서 낮아지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셨는데 우리는 높아지는 것은 죄다.

모든 신학자들이 원죄의 내용을 교만으로 설명한다.

=> 바르트는 모든 설명에서 주님으로 설명하고, 칼빈의 신학을 재해석하는 차원이다.

-> 바르트의 죄론은 쓰리만(교만, 태만-게으름, 기만)이다.

태만은 인간됨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타인과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태만을 죄로 설명해낸다.

-> 기만 -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된 증거를 거짓이라고 여기는 마음

부활과 승천를 통해서 입증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거부하는 것이 기만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요약본이 두가지가 있다.

-> 칼바르트의 신학 입문, 신옥수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속의 영성”.. 대한기독서회..

불트만(Rudolf Bultmann)

20세기 신학에서 성서신학에서 태산과 같은 존재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다.

이 사람을 모르면 신약신학이 말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평생을 Marburg 대학에서 가르쳤다. - 인종과 국경을 초월에서 전세계에서 몰려들었다.

-> 한국에서는 허혁박사가 가서 배웠다.

-> 독일의 신학교수 중 80%가 불트만의 제자였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헬라어로 암송한다.

다음세대는 이 사람의 제자들이 풍미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특별한 대가가 안 나온다.

-> 도톨리 키재기식으로 평준화 되었다.

갈5장에 바울이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두가지로 설명했다.

카타 싸르카 - 육에 따라 사는 삶

카타 퓨뉴마 - 영에 따라 사는 삶

-> 불트만을 이것을 성서신학적으로 설명했다.

육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삶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으로 연구하는 삶으로 적용했다.

=> 이런 해석학적 제안은 어떤 반향을 일으키겠는가?

불트만 이전까지 연구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것을 종지부를 찍었다. 하나님의 말씀중심의 신학으로 신정통주의에 초기에는 편집한다.

모든 자유주의신학자는 어떤 부분에서는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건전한 동기도 있다.

불트만은 그동안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에 대해 공격한 것이다.

->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성경은 오직 신앙의 그리스도만 전할 뿐이다.

=> 이 얘기도 불트만의 제자들에 의해서 뒤집어진다.

1년에 한번씩 불트만 학파를 모아 세미나를 했는데 1953년에 불트만의 제자 중 E. Kasemann 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 -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아야만하고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역사적 예수는 예수가 단지 있었다고 얘기하고 다음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 안다고 했지만...

그의 제자는 케리그마의 예수만 이야기하는 것은 편협한 작업이다라고 했다.

-> 그리스도의 신앙은 초대교회의 신앙과 선포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선포의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다.

=>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신앙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라고 했다. 즉 제자들이 본 예수를 신앙고백으로 표현한 것을 성경에 소개했다고 한다.

케제만은 예수 자신의 말씀과 사역도 함께 포함된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가 대립적이 아니라 따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 있다(상호 얽혀 있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를 케리그마 예수의 관점에서 봐야 하고, 케리그마 예수는 역사적 예수에 뿌리를 박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불트만의 제자들에 의해서 완결되었다.

불트만에서 “비신화화론”(Entmythologisierung)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신화의 옷을 입고 있다.

-> 우주론은 3층구조 우주론으로 되어있다. 하늘 - 땅 - 지옥(음부)가 있다고 한다.

=>이런 틀 속에서 jx의 삶과 사역이 들어있다고 했다.

불트만의 관심은 이런 우주론이 현대인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히려 걸림돌이 되므로 이런 옷을 입고 있는 내용들을 벗겨서 메시지의 원래 내용을 찾아가자는 것이 비신화화론이다.

=> 성경에 나오는 모든 초월적 사건은 부정되고 meaning만 실존적 철학하에서 찾아나가게 된다. 현대인에게는 아무도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나왔다.

예: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바카스신을 능가하는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요한이 썼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학적으로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불트만은 성서적 표상을 직접적,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회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경의 신화론적 표상을 수용할 수 없다.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고 실존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라고 했다. 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불트만은 예수님에 대해 십자가가 중요하지 부활이 아니다. 부활은 신화이므로.. 이 부활은 본래적 자아를 발견한 승리정도로 이해했다.

-> 대신 십자가에 대한 해석을 중시했다. 결단과 본래적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 본래적 자아가 심판받고 본래적 자아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에게는 골고다보다 게세마네가 중요하다. 이 곳에서 예수님은 참 자기를 발견하 고 결단했기 때문이다. 골고다는 그것을 도장찍은 정도로 생각했다.

불트만 신학의 약점은 실존적인 것을 강조하다보니 역사의식에 대한 무감각을 낳게 된다.

다음시간에는.....

판넬베르크와 몰트만은 불트만이 해결못했거나, 다루지 않은 것을 다루었다.

실존주의은 여기(here), 지금(now)를 주장하다보니 역사의 지평이 망각되었는데,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알리시고 계시하신다고 알고 다룬 사람들이다.

5/24

 본 회퍼

“나를 따르라”, -> 산상수훈을 해석한 책

“옥중서간” -> 히틀러 암살음모로 인해 감옥에서 쓴 책(기억을 더듬어서 쓴 것)

판넬베르크(판) - Wolfhart Pannenberg

1928년에 출생, 아직 생존하고 있음.

독일의 격동기에 출생한 것이다. 중산층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필요한 교육을 잘 받았다.

1950년에 스위스의 바젤(Basel) 대학에 가서 칼 바르트에게 신학을 배우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 신학을 일반 보편 학문에 전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 바르트에게 배운 중요한 신학적 내용

1) 신학자로서 신학적 책임을 감당하는 바르트의 인간됨에 감명을 받음

2) 계시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 jx를 통해서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계시를 통해서 신학을 연 구했다. 이 계시를 어디에서 찾느냐에서는 바르트는 jx를 통해서 찾았으나, 판넬베 르크은 보편역사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3) 이 계시 개념이 필연적으로 jx와 연결되어야 하는 점을 배우게 된다.

-> 바르트와 차이점은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신학은 선택된 학문으로써 신학고유의 학 문성(신학을 일반학문과 다른 고유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을 강조하였다. 다시말 하면 신학은 계몽주의에서는 학문으로서 위치를 잃어버렸다. 평가절하된 것이다. 이런 상태 속에서 신학은 일반학문으로 보지 말고 고유한 학문으로 볼 때 신학의 학문성으로 볼 수 있다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보편학문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복 구한 것이다.

판넬베르크은 바르트의 이 주장을 신학의 영역을 제한시켜서 이해했다고 보았다. 신학도 보편학문과 같이 보편진리를 기초로 한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51년에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대학으로 옮기면서 폰 라드(G. Von Rad - 구약)와 캠펜하우젠(H, Campenhausen- 신약), 칼 레위(Karl Lowit - 역사를 가지고 철학을 한 사람)을 만난다.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바르트에게는 계시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 폰 라드에게 배운 내용

1) 신학이란 하나의 역사해석이다.

->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신학이다.

=> 판넬베르크는 역사를 이스라엘의 역사로 제한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역사로 확장 하여 이 인류의 보편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는 것이다. -> 헤겔의 역사 이야기와 같다. ==> 보편사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 친구들이 영향을 줌(그룹스터디 멤버들)

세계적인 스타로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책으로 등장한 것이다.

->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로 한글제목이 정해짐..

-> 이 책을 쓸 때 신학자들이 불트만이 실존만 이야기하는데 식상한 시기였다. 그래서 보편사,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원했던 시기였다.

-> 이 책을 계기로 4명의 공동저자 중 3명이 교수로 청빙을 받았음.

판넬베르크 학파가 이 때 등장했다.

판넬베르크의 조직신학 1, 2, 3권을 보라.

신학사상의 주요내용

1. 보편학문으로서의 신학

-> 그는 철저한 이성의 사람이다. 그는 신학이 이성의 지평위에서 타 학문과 떳떳이 대 결하고, 나아가서는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학문이 되게 하고자 치열한 노 력을 경주한다.

-> 그에 의하면 신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신학의 보편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 창조신학 에서 말한 것과 같다. 창조신학은 보편적 신학이다.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판넬베르크는 창조신학이라는 말은 안하지만 창조주인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왜 보편적인 학문을 포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 판넬베르크는 과거 개신교신학의 오류가 신학의 보편성을 포기한데 있다고 본다.

왜 포기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오직 성경을 주장했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보편성을 포기한 것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오직 성경만 강조하므로 일반학문으로부터 유리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오직 성경을 강조했기에 자신을 그들을 극복했다고 한다.

2. 역사로서의 계시

판넬베르크은 성경에 집중을 했던 개신교 정통주의가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 게 되었다.

참고: 정통주의 특징은 교리, 정통중시.... 객관적인 특징으로 강조한다.

신학이 역사라는 소재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인식하고 새롭게 제안하였던 것이다. 다 성경을 소재로 했는데...

판넬베르크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은 신의 출현과 같은 직접적인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역사적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형태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계시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공개된다.

-> 신앙이 먼저냐 이성이 먼저냐에서 이성을 강조한다.

그 근거를 어떻게 예수의 제자들이 회심을 하게 되었느냐? 질문으로 풀었다.

=>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한 후에 지난 날의 모든 역사가 다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 부활이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사건이다.

=> 부활을 제자들이 어떻게 경험했느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던 것이다.

판넬베르크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회심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온다는 것이 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신앙이 신비스러운 지적 모험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 아래로부터의 신학방법(알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가운데서도 막16장에서 나온 것처럼 스릴이 있다.

-> 여인이 본 것은 빈 무덤은 보지 않고, 천사를 보았다. 그 천사가 전해주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방법으로 부활을 알려주신 것이 다.

 역사의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계시하고 있는 것은 계시의 점진성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판넬베르크의 종말론

->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선취와 예기

선취: 미리 앞서서 취하는 것과, 예기: 기다린다는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역사의 한 시점인 jx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것을 취급하지 못하면 판넬베르크의 신학이 헛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취와 예기를 말한다.

십자가를 전제로 한 부활을 의미한다. jx의 가장 중요한 역사다.

-> 부활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완전한 존재, 완성된 존재, 특별히 영화롭게 완성 된 존재를 의미한다.

->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셨다는 것은 마지막에 나타날 완전한 계시를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다. 완전한 계시를 선취하여 주시고, 그것을 본 우리는 예기한다는 것이다.

4. 신앙과 이성

1961년에 출판한 “신앙과 이성”이라는 책을 보고 1962년에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라는 사람이 역사로서의 계시와 사상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판넬베르크를 비난한다.

요지: 계시란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신앙의 모범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이기에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판넬베르크는 간과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1963년 “통찰과 신앙”이라는 논문에서 판넬베르크는 알트하우스처럼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신앙이 지적인 모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은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신앙이 미신이나 맹신으로 전락되고 만다.

판넬베르크은 신앙이 이성적인 통찰을 통해 참된 지식이 될 때 신앙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 이것을 역사이성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넬베르크에 있어서 신앙은 계시 인식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인식의 결과다. 옛날에는 계시를 알기 위한 전제조건이 신앙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다음시간에는 본 회퍼에 대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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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신학은 한국어로 많이 번역되어 있다.

독일 Breslau에서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의사로서 상류층의 사람이었다.

튀빙겐 대학에 입학, 베를린 대학, 27년에는 Sanctorum Communio,

23세에신학박사학위를 받음, 1930년에 “행위와 존재” 교수자격 취득논문(Habilitation)을 통과함. 베를린 대학 강사를 하고, 33년에 반 히틀러 운동을 하였다. 1937년에 “나를 따르라”(Nachfolge)는 책이 출판됨.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함. 독일로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독일로 돌아감. 1943년에 정치적 투쟁으로 하다가 교수직 박탈, 1945년 4월 9일에 처형됨. 같은 날 그의 매형, 형 등 4가족이 사형을 당한다.

본회퍼의 삶에 대해서 박봉남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책을 씀 - 본 회퍼의 연구집

-> 본회퍼의 여동생의 남편인 E. Bethge 가 본회퍼의 전기를 쓴 것을 번역한 것이다.

본회퍼의 사상

“성도들의 친교” 박사논문

-> 교회론을 다룬 논문이다.

->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의 사회학적 친교 속에서 수용하는 공동체로 이해한다.

=> 트뤨치의 교회론과 바르트의 교회론에 영향을 받음

=> 트뤨치(Ernst Troeltsch)는 종교사학파의 중요한 인물이다. 교회를 몇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사회학적 관점에서 나누었다. 소종파의 모델, 신비주의 모델, 교회의 모델이 있다고 하였다. 본회퍼는 트뤨치로부터 사회학적 시야를 보고, 바르트로부터 말씀을 사건으로 일어나는 현장으로 교회를 보게 된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다”

본회퍼는

-> 교회는 본질적이고 가시적이다.

->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현상인 동시에 역사적 요인으로 인해 영향받는 사회 적 현상이다.

-> 교회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는 교회를 사회나 제도로 보기보다는 공동체와 친교의 관점 에서 파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 로마카톨릭적 의미의 사회와 제도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33년도 베를린에서 강의한 강의안을 기초로 출판한 것이다.

두가지 잘못된 그리스도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1. 어떻게 그리스도가 동시에 하나님이면서 인간일 수 있는가?

2.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신 그리스도라는 진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느냐?

-> 위의 두 질문은 잘못되었다.

-> 하나님이시오 인간이신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즉 나에게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 이것의 답은 그리스도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존재로서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시다라는 것이다.

==> 이러한 인격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는 중심에 있는 존재라고 한다.

===> 중심에 있는 존재는 중보자라는 말이다.

1) 그리스도는 인간의 존재의 중심이다.

본회퍼는 확끈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기독교는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옛사람과 새사람의 중심에 있다.

2)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에 있다.

타락으로 인한 죄의 역사 한가운데서 약속과 성취의 중간으로 서 계신다.

3) 자연의 중심에 계신다.

-> 모든 피조물의 해방자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신학에서 자연으로부터 관심을 갖게 한 신학자는 슐라이에르마허로다. 그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에게만 관심을 가졌는데....

“나를 따르라”에 대해서

-> 이 책은 본회퍼가 33년에 강의했던 그리스도론을 실천적으로 윤리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학문적 그리스도론에서 실천적 그리스도론으로 전환되는 책이다.

->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가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그는 어떻게 도우시는가?

->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차지하고 있다.

=> 이것은 바르트의 영향이다.

-> 본회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1) 신앙이란 무엇인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교회활동의 참여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만이 복종하며 복종하는 자만이 믿는 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 -> 본회퍼의 철저한 주장이다.

=>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보장은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뿐이지 그 외는 없다.

=> 대부분의 학자는 신앙은 모험이라고 하는데 본회퍼는 보장이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이 있어야 한다.

따름이 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3)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아무 힘없이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이고 정복이고, 옛 세상의 질서에 대한 혁명이다.

=> 본회퍼는 고난이란 의미를 씹고 또 씹으면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 이전에는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실 수 없다고 했는데 본회퍼는

==>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해도 성부는 고난당할 수 없다고 신조들에 기술되어 있 다. Apathy(무정하다) - 성부는 희노애락이 없다는 것이다. aseity(하나님의 자족성) 에 금이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적 신관이었다.

아들이 고통당하면 그 아버지도 고통당하고, 자식이 울부짖으면 긍휼을 베풀어 도와 준다는 것이다. 성부가 직접 찔리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임

==> 이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몰트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등

본회퍼의 윤리

본회퍼는 직접적 행위와 반성적 행위를 구분한다.

-> 직접적 행위에는 믿음과 삶이 해당되고, 반성적 행위에는 신학적 성찰이 해당이 된다.

본회퍼는 윤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리 및 규범 윤리학을 거부한다.

-> 원리 및 규범 윤리학은 선과 악을 미리 정한 후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 러나 본회퍼는 이것이 추상적인 윤리로서 현실과 괴리된다고 비판한다. 본회퍼에 따 르면 그리스도는 보편적 원리나 추상적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철학자 처럼 보편타당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있도 록, 그리고 나의 행동이 지금 이웃을 도와주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래서 본회퍼는 언제나 구체적 현실에 관심을 가진다.

철저하게 이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현실이 그리스도안에서 세계의 현실로 실현되기를 추구했다. => 이원론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윤리학에서 나온다. 초월적 세계만 바라보게 되면 이 세상의 윤리를 포기하게 되고 책임도 없어진다.

본회퍼가 주장하는 것은 구체적인 필요한 윤리를 강조한다.

-> 미친 버스기사가 차를 몰 때 목회자의 사명이 죽은 자를 장례치루느냐? 아니면 버스 기사를 끌러내려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버스기사는 히틀러를 지칭한다. 본회퍼는 버스기사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쉬었음....

“세속도시” - 하비 콕스가 쓴 책이다. ==> 꼭 읽어봐라.

성숙한 세계와 기독교의 비 종교적 해석

이세상이 점점 성숙해 진다고 생각했고, 이것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책이냐하는 문제에서 이때 비종교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본회퍼의 대안이었다.

1951년 “저항과 복종”(“옥중서간”)이 그가 죽은 후에 나온 책이다.

-> 이 책에서 세속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 세속속의 인간과 기독교가 적절히 만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고민한다.

-> 여기서 본회퍼는 기독교는 본래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본래 누구이냐?에 대해 질문한 다.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종교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독교는 무엇이 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로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 삶이 비종교 화, 세속화 즉 종교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 세속화된 세계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진 자율화된 인간, 자율적 이성에 맡겨진 세계를 말한다.

=> 본회퍼의 대답은 기독교는 하나님 없이 비 신화화된 세계, 즉 종교없는 세계를 거부하지 말아야 하고, 자율적 이성의 능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을 인정해야만 한다.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으로 => 종교적 치장을 떠나서 내 전체가 하나님 앞에 전체로 나간다.

본회퍼는 여기서 일반종교의 신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 일반종교의 신은 Deus ex machina (기계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과 상충된다.

input 했을 때 output 하는 것이 기계신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기계신이 아니 다. 우리의 필요에 만족만 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 인간의 빈틈을 메워주는 자로 하나님을 여기면 안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간의 한계상황이나 내면적 상황, 사적영역에 제한시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세속주의라고 한다. 세속화된 방법주의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한계상황에서만 유효하다는 인식을 주게 된다.

-> 본회퍼가 염려하는 것은 이런 트랙을 좇는다면 과학화되고 세속화되면 하나님을 찾는 영역이 점점 축소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제한된 영역으로 가둔다는 것이다.

-> 기독교는 ......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곳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한계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약함에서가 아니라 힘(능력)에서, 죽음과 죄책에서가 아니라 삶과 행복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의 주님으로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그리스도교를 세우러 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 오셨다. 기독교는 종교라고 하는 제한된 영역이 아닌 전 세계의 현실 영역안에 있다.

-> 비종교적 기독교는 기독교적 개념들의 비종교적 해석을 말한다.

=> 세상 한 가운데서의 기독교를 말한다는 것이다.

-> 성경적 개념의 의미와 힘을 종교적 틀이 아닌 세속 한 가운데서 삶의 실천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 이는 종교의 하나님(기계신) 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