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랄프 윈터가 본 선교역사의 특징
<랄프 윈터의 선교역사 특징 - 요약>
1. 모달리티(양육 중심의 회중 교회 구조를 가진 교파와 지역 교회를 말함)와 소달리티(과업 중심적인 선교 구조를 가진 선교 단체나 지역별 단체들)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수십 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온 교회의 두 가지 기능적 구조를 설명한다.
2. 랄프 윈터는 4,000년간 성경의 역사를 통해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확장되어 옴을 총괄적으로 지적한다.
3. 그리스도가 오신 이래 다섯 차례의 400년 주기마다, 복음이 여러 지리적 지역들과 문화적 유역들에 점차 파고들어간 것을 지적한다.
4.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할 때에도 선교의 네 메카니즘을 통해서 복음은 확장되었다. 그것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오거나 혹 가는 것이다.
5. 하나님의 축복들은 전달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축복들은 빼앗길 수도 있다.
2. 1-3시대 상황과 선교
<요약>
1-3세기 세계정세의 주도권은 로마의 제국주의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국에 의해 세계가 재편되었는데, 비단길을 통해 주도권을 가진 세 나라의 중개무역상의 교류로 인해 로마에서 페르시아 중국까지의 교류가 증가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자발적인 선교가 시작되었고, 그 후 수많은 박해를 통해 세계로 흩어지면서 선교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바울의 3차례에 걸친 선교여행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는 로마와 중앙아시아의 복음화의 길을 열었다. 그 후 3세기(260년-300년 사이)에는 교회가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단체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고, 300년에는 교인 10만명의 양적 팽창을 이루게 된다. 지리적으로는 인도와 아프리카 이집트 까지 교회가 세워지고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비중이 큰 주된 종교로 등장하게 된다.
3. 초대교회의 선교전략과 유대교의 선교전략의 상관성
<요약>
유대인 시대 :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높임(BC 150 - AD 30)
유대주의는 지중해를 연안을 넘는 첫 번째 위대한 선교운동이었다.
예수님 시대, 4천만 이상의 유대인이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전체인구의 7%를 차지했었다. 그들은 150여 곳에 시나고그(유대의 회당)를 건립했었고, 이방인에게 다가가 그들을 개종 시키는 일에 매우 열정적이었고, 적극적이었었다. 역사상의 그 어떤 요소보다 유대인의 선교는 바울과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당시의 주요 지방과 도시에 걸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을 훈련시키는 일을 예비했다
4. 아르메니아의 기독교화 과정
c. 선교의 확장
① 그레고리(Gregory, wonder worker 213-)의 부흥운동과 티리다테스왕(Tiridates)의 회심으로 301년 기독교왕국이 되었다. 410년경 신약성경이 St. Mesrop Mashtots (362-440)의 노력으로 아르메니아어로 번역.
② 301년 기독교가 국교가 됨
③ 4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침략하여 Avarair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아르메니아인의 게릴라전의 항쟁이 계속되어 485년에 페르시아의 왕 Valash가 아르메니아의 종교의 자유와 자치를 허락
5. 에스에로인의 기독교화 과정
에스로에인의 기독교화 과정은 행2장 오순절 사건때 왔던 파르티아인들 가운데 있었을 이 왕국의 사람들과 성 토마스와 다대오라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다. 다대오는 에데사에서 히브리인들, 희랍인들, 시리아인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국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한때 기독교가 국교처럼 되었었고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벤, 페르시아 각지에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7. 11세기 중앙아 선교
< 요약 >
중앙아 유목민 선교: 11세기는 경교의 확장시대(중국과 달리 상당한 저변확대)
1. 천산북로-현 키르키즈의 이시크 쿨 호수 근처에서 발견된 610개의 네스토리안 비석은 9-14세기 중반에 살았던 네스토리안을 증거함
2. 천산남로-8세기에 캬슈카르에 상당수의 기독교인 존재하고 대주교구가 형성됨, 8-9세기 호탄에 교회 존재, 미란에도 기독교인 존재,
3. 투르판의 기독교 수도원- 투르판 기독교도의 대부분이 터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
4. 돈황-기독교 문헌 발견, 하서회랑에서도 네스토리우스 관련 문서 세 점 발견(12-13세기). 티벳- 기독교도 마니교와 함께 테벳에 들어왔음을 유추하게 된다.
5. 중국 북부-북경교외의 숭성원 유적은 당말에 소멸한 경교가 5대10국 시대에 북중국에서 다시금 교세를 회복하고 명맥을 유지하며 비단길 연변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했음을 알게된다. 중국과 중앙아사이에서 선교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소그드 상인이었음을 나타낸다.
6. 10세기후반 중국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경교 상인들이 국외로 이주하였고 서방으로 진출하였다. 11세기 중앙아와 중국 서부지역은 경교의 르네상스 지역이 되었다.
7. 케레이트족 선교(11세기 초): 케레이트족은 몽골리아 중앙부를 점거했던 큰 세력으로서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옹 칸은 징기스칸 출현 당시 이 부족의 군주이었고 기독교도였다.
8. 나이만족 선교: 알타이 산맥 동서에 걸쳐 분포되어있다. '나이만'은 몽골어로 8을 말하므로 여덟 개의 씨족 집단의 연합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종족적으로 몽골족은 아닌 것은 맞으나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종족이다.
9. 웅구트족(한문자료에서는 왕고, 旺古 王古 汪古; 옹고, 瓮古 雍古로 표기)선교: 터키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이며 기독교를 믿는 종족이다. 기독교가 이들에게 전파된 것은 9세기 후반 당나라에서 회창의 법난과 이어지는 기독교 박해로 피난처를 찾던 경교도들이 내몽골에 유입되면서부터 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과의 접촉도 웅구트족에 기독교가 확산된 계기도 된다. 그리하여 12세기 전반에 웅구트족 사이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된다.
8. 2세기 말경의 선교훈련의 특징
1. 세례: 기독교용인 전에는 순교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서약, 철저한 교육-순교자양성 훈련과정이었다.(터툴리안: 성례전을 의미했던 mysterion을 라틴어로 sacramentum으로 번역-로마의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에게 행하던 충성의 서약, 피세례자는 세례의 서약 :서쪽을 향하여 사탄을 부인하고 동쪽을 향하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 사탄의 군세와 단절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싸움에 임할 것을 결의 / 성도는 사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동, 세례는 증인으로서의 삶의 자격과 능력을 부여 받았다. 세례교육기간은 기독교적인 인격의 함양을 위한 시간,(세례교육 신청자모집-동기 철저탐문, 3년간 교육, 부활절 40일전 최종세례 대상자 정하기 위해 2차 정밀 검사/ 사죄의 체험, 부활의 능력, 영생의 확신)/ 흰 예복을 입은 신자들이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표증하는 엄숙한 예식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다. 입교자들이 세례수에 가까이 왔을 때 푸르른 나뭇잎 관은 생수와 함께 그들의 머리에 상징적으로 놓여진다.
2. 성만찬: 세례 시 했던 서약을 재확인/ 실재적 임재설 / 실탄 재충전시간
특징
1. Homeless,
2. Lack of family
3. Lack of possessions
4. Lack of protection
9 . 1~3세기 선교 신학 논쟁의 쟁점.
이 시대의 선교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예언의 성취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학이 선교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종말론적 선교신학은 성령론과 연합되어 이방인을 위한 선교로 이어졌다. 이방인을 위한 선교신학은 자연히 이방 문화와 종교에 충돌하면서 복음과 상반되지 않는 문화는 수용하고 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배격하는 선교신학의 기초를 세워 나갔다.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중요시 되면서 교회 내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신학의 특수성과 과 보편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10. 로마인의 서신에 나타난 초대교회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아우톨리구스에게 보내는 서책>과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
요약 :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랐으며 기독교적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에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계층과 모든 조건의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행해졌다. 그 당시 도심지들은 부도덕이 만연하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생활방식은 이방인들의 관심을 끌고 좋은 인식을 갖게 했다. 세례 받은 교인들은 죄 된 행동을 피하며 범한 죄는 고백하여야 했다. 결혼은 신성한 것으로 금욕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시민으로서 법률을 존중하고 황제에게는 충성하며 근면하고 모범적인 사람들로서 그들의 종교가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입증케 한다고 호교론자들은 말했다.
11. 4-5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선교 상황
지중해는 로마는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니시비스, 아비아베네, 복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칙령이 있다. 순교자, 로마주교를 비롯한 수천명의 변절자, 기독교인들이 재산 몰수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밀란 칙령은 종교관용이 이루어진다. 374년 훈족이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습격한다. 알란족은 훈에 흡수되고 동고트족은 서고트로 이동한다. 서고트 일부는 로마 경내로 진입한다. 로마황제는 고트인의 소요를 박기 위해 378년 전쟁하였으나 병력의 2/3를 일고 자신도 피살됨. 평화협정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작되었다. 동로마 분리되었다. 대로마 침공은 동로마를 위협하고 서로마와 친선관계를 형성하였다. 406년 서로마를 게르만족의 공격에서 보호했다. 434년 아틸라(유럽인에게 신의재앙으로 불리어짐)가 왕이되어 비잔틴과 평화협정한다. 451년 452년 북이탈리와 고울지방 정복나선다. 453년 아틸라는 죽고 내분으로 와해된다. 헝가리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것 외에는 주변 나라에 흡수된다. 476년 고트족 장군 오도아케르 로마점령한다. 476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북부 고울 지방 점령, 496년 알레마니 족 정복, 497년 기독교로 개종, 505 알레마니족 흡수, 507년 서고트족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울 확보 493년 동고트 족은 훈의 지배하에 있었다. 데오도릭왕은 비잔틴 황제 제노의 간청으로 로마점령하고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왕국 세웠다. 536년 비잔틴의 로마 점령, 546년 동고트족 반란 점령, 552년 비잔틴 재점령, 라벤나에서 로마 통치하였다. 568년 롬바르드 왕국이 로마 점령하고 프랑크 왕국에 점령된다. 서아시아는 왕조의 권력 투쟁이 있고 기독교 박해와 관용이 반복 되어 지다 483년 기독교 관용 칙령이 내려진다. 491년 네스토리안 기독교가 페르시아교회를 주도하면서 아르메니아 교회의 칼케돈회의 거부한다. 420년-570년 헤프탈족, 굽타왕조에서는 Hunas로 어떤 역사가에게는 White Huns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를 신봉하지 않고 자신교적 신앙형태를 가짐 552년 신흥 세력 돌궐과 갈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남아시아는 굽타왕조시대이고 중앙 아시아는 몽골계 선비족이 세력장악 시대이며 5호 16국이다. 동아시아는 혼돈의 시기였다. 중국 진나라 시대였으며 5호 16국이었다. 남북조 시대에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가 중국에 정착되었다.
12.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원인과 상황
(핵심 요약)
게르만족의 선교는 훈족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대이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훈족의 침략으로 압박을 받게 된 게르만족은 기독교 제국인 로마를 침공하여 마침내 로마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라틴 제국은 비록 무너졌지만, 게르만족으로 바뀌어진 새로운 기독교 제국이 형성되어 그 동안 지중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선교의 범위를 유럽 전체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13.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독교 박해 상황
일련의 공격 중에, 페르시아는 비잔틴 로마를 지중해까지 몰아냈다. 페르시아는 607년 에뎃사를 취하였고, 611년 안디옥을 점령했다. 침략자 포카스가 같은 해 쫓겨났고, 새로운 황제 헤라클라우스가 평화를 제안하고 마우리스의 살인자를 처형할 때까지, 페르시아는 평화를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615년 페르시아 군대는 기독교도들로부터 자신들의 거룩한 도시를 되찾으려는 데 열망하는 유대인 자원자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수천명-바르 헤브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9만 명 -을 살육했고, 교회들을 불살랐으며, 콘스탄틴 대제 당시에 황후에 의해 세워진 “진짜 십자가”를 획득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비잔틴의 승리에 대해 너무 격분한 코스로에스는 자신의 왕궁에 있는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취급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총대주교에게 충성하고 있는 교회의 재산을 압수했다. 테오파네스는 샤가 기독교인들을 네스토리안으로 개종하라고 명했으며, 네스토리안 역시 이 박해 속에서 목숨이 붙어 있지 못했다고 덧붙여 기록하였다.
14. 3-6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3-6세기의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동아시아의 문화권형성의 시발점이 되었던 한왕조가 3세기 초에 무너진다. 혼란과 분열의 시기인 삼국시대를 거쳐 중국최초의 통일국가인 진이 3세기에 등장하지만 이내 분열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 화약이 발명되고, 4세기에는 철기시대가 시작되며 중국은 주변의 국가와 민족들에게 즉, 동아시아의 정세에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은 분열한다. 진의 혼란시기를 틈탄 흉노족의 독립(유연)과 이어서 진이 멸망(유연의 아들, 유총)하고, 북방 민족들, 즉 흉노, 선비, 갈, 저, 강의 다섯 민족이 중국대륙에 16개국을 세운다. 5호 16국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5세기에 선비족이 중국의 북부를 통일하며 5호16국의 시대가 끝나고, 중국은 다시 남북조로 나누어진다. 동아시아는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다. 6세기말, 수의 문제에 의해 중국의 분열은 종지부를 찍는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비단길을 통해 서역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4세기) 불교는 빠른 속도로 중국에서 융성하여지고 정착한다.
498 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520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하의 말라바(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 훈족(Huns), 터크족(Turks), 위구르족 (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523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14,000명의
아랍 기독교인들이 학살(Duh-Nuwas)
540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549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White Huns) 주교를 파송
15. 그루지아의 기독교화 과정
그루지아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1세기에 그루지아인들은 복음을 공유했고 복음을 전하려는 사도들이 많이 간곳이기도하다. 사도 안드레는 가나안인 시몬과 함께 서그루지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돌로매와 다대오는 동그루지아에 복음을 전했다.
처음 니케아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집회는 4세기 중반에 기독교가 퍼짐과 동그루지아에 처음 나타난 교회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루지아교회는 점점 정교회의 길을 간다.
짧은요약
-고대 이후로 이 유태인들은 그루지아 유태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그루지아의 문화에 통합되어 있으나 아직도 뚜렷한 자신들만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그루지아 정교회가 그루지아의 문화와 민족주의를 유지하는 지속적인 요인이었다.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는 회교 종족 그룹들에 둘러싸여 있다. 독립 이래로 몇몇 정교 지도자들은 비정교 기독교인들의 교회개척과 공식적인 복음전도를 제한하려고 애써 왔다.
16. 밀란 칙령의 선교적 의미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리키니우스 황제와 밀라노에서 회견했을 때 발표한 칙령.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처음 공인하고, 오랫동안 계속된 그리스도교 탄압에 종지부를 찍은 획기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문제에 관한 부분은 속주(屬州) 장관 앞으로 보낸 서한(書翰) 형식으로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는 물론, 박해 중에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등도 정하여졌다.
17. 선교사 울필라스에 대해
주후 311년 울필라스는 비 신앙적 분위기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고트족이었고 아버지는 갑바도기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그 당시의 선교는 제국 팽창의 선봉으로 보았기에 그의 선교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울필라스는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살고 있었던 로마제국 밖의 야만인인 고트 부족을 위해 사역을 하였다. 울필라스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띠고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고, 여기서 희랍어와 라틴어 성경을 니코미디아의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에게 배우며 신앙적 영향을 받았고, 고트족 군인들을 위해 성경을 읽어주는 사역을 맡았다. 유세비우스는 당시 대부분의 다른 비잔틴 감독들처럼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에 울필라스 역시 그런 이단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 고트족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전도와 개종에 주력하였고 40여 년 동안 성공적인 복음사역을 했다. 주후 348년 고트족 추장 아타나릭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 하므로 고트족 기독교인들은 안전한 로마의 영토로 옮겨졌고, 나중에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사로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울필라스의 가장 훌륭한 사역은 그때까지 문자도 없던 그들 부족의 언어에 알파베트까지 고안하여 고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고트족과 반달족은 그들이 유럽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중에 이 성경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고트왕의 사자로서 콘스탄티노플에 가 있을 때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비록 그들의 교리는 불완전하였으나 그들의 신앙과 헌신은 대단했다. 따라서 울필라스는 초기의 위대한 선교사중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 페트릭의 회심과 아일랜드 선교과정
요약 :
“주께서 내 불신앙을 깨닫게 하셔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전심으로 내 하나님이신 주께 돌아오게 하셨다”라고 고백하였듯이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회심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돌아가라는 환상을 본 그는 아일랜드에서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으며 패트릭의 헌신과 열정으로 아일랜드는 유럽의 복음화에 앞장을 섰으며 이에 유럽학자들도 성경중심의 선교 열정을 갖게 되었으며 복음화와 경건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또한 해박한 성경 지식과 성령으로 무장한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은 순교를 무릅쓰고 스코틀랜드, 영국, 고올 지방, 네덜란드, 독일, 북부 이탈리아 등으로 나아가 위대한 선교적 업적을 쌓았다. 아일랜드는 어두운 중세시대에 하나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19. 클로비스의 회심이 지니는 선교적 의미
그는 로마인이 아닌 이방인 왕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카톨릭교도가 된 것이다. 클로비스의 회심을 통해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초대 교회와는 또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서양 중세 문화의 출발점이 바로 '클로비스의 세례(회심)' 인 것이다.
바울에 의해서 지중해에 전파된 그리스도교가 로마 문화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면, 중세의 유럽 역시 '클로비스의 회심'으로 인해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클로비스의 회심으로 인한 게르만족의 개종은 이천 년의 교회사에서 갖는 중요한 새 출발의 의미라고 말 할 수 있겠다.
20. 이슬람이 기독교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유
▶ 기독교인의 분리와 적대감/ 유순함과 전투력 상실/ 종교가 형식화/ 복음전도 실패
▶ 기독교는 종족 종교로 전락했고 복음 전도는 피상적
▶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 다수족의 종교가 안되었다.
▶ 정교일치-동로마제국 (from 이교욱 교수님 교재)
21. 6-8세기 선교상황
** 세계 상황 **
^*^ 게르만족: 클로비스왕이 프랑크 왕국 통일 한 후 732년 북상하는 이슬람을 카알 마르텔이 격퇴 한 후 서로마교황의 협력으로 피핀의 등장으로 카롤링 왕조가 등장했고, 그 아들 샤를마뉴대제 때 모든 게르만왕국이 정벌하여 법과 질서, 문명, 기독교가 뿌리내림.
^*^비잔틴 제국(동로마):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탈환하고, 반달족으로부터 북 아프리카을 탈환하여 동로마제국의 영토을 확장했고 페르시아인과도 싸워 이겨 동로마를 지켰다.
^*^아바르족의 침입: 552년 돌궐에 패한 유연은 서쪽으로 가서 유럽에서 정착했다. 비잔틴제국과 협력하여 발칸반도를 위협하는 훈족과 슬라브족을 점령하여 광대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796년에 내분과 프랑크과 불가리아의 연합공격으로 멸망했다.
^*^사산조 페르시아: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안디옥을 쟁취하고 주변 민족들을 몰아냈다. 투르크족의 침입과 비잔틴 로마에 의해 패배한 후 시민전쟁이 일어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흑해에서 아프리카 사막까지, 로데스 섬요새에서 인디아까지의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622년에 로마황제가 터키족인 카자르 군대와 연합하여 페르시아를 공격하였고, 급격히 쇠약하여 무슬림의 침공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슬람: 정통칼리프 시대에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였다. 또 시리아전역, 예루살렘, 페르시아의 전역을 점령하였다. 751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치고 비단길로 진출하였으며, 756년에는 우마위야조가 세워져서 동서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수나라: 양제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였고, 서역에의 길로 열었으나 고구려 원정 실패와 국내의 여러 문제로 멸망했고, 이연이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나라를 세우고 왕실의 기초를 확고히 했다. 아들 이세민이 국내를 통일하고 동돌궐, 토욕혼, 토번, 고창, 서돌궐, 서연타를 정복하여 북변, 서변, 서역이 당의 영토가 되었다. 말년에 고구려 원정실패로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인디아: 굽타왕조가 헤프탈 훈족에게 멸망된 후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552년에 돌궐족은 유연을 격퇴하고 오르콘 강 근방으로 본거지를 옮겨 돌궐제국을 세웠다. 북은 시베리아, 남은 중국, 동은 만주, 서는 페르시아에 접하는 큰 세력이 되었으나 581년 이후 내분으로 동돌궐,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동돌궐은 당에 의해 쇠퇴하였다가 다시 일어났으나 결국 8세기에 쇠하여 망했다. 서돌궐은 다시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카자리아 :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터키 국가로 유대교를 국교로 한 유일한 비유대인 국가로 기독교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완충지대을 하였다.
^*^토번: 당 태종의 공격을 받았으나 회복하여 청해지방을 점령하고, 안서 4진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사천, 감숙에도 진출했다. 9세기이후 차츰 쇠하였다.
**선교상황**
6-8세기는 특히 아일랜드인들에 의해 유럽 전 지역에 기독교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서유럽뿐만 아니라 중부유럽까지 이루어진 선교로 유색인종이 많았던 과거와는 달리 백인들의 비율을 49%까지 증가시켰다. 초창기에 예루살렘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전파로 유색인종이 많았으나 이슬람의 확장과 유럽의 복음화, 그리고 선교지역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되면서 전체 기독교 인구는 줄었으나 백인의 비율은 높아졌다.
22. 경교가 지니는 선교적 의미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us)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지배하고 있었고,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신라에 경교가 전파된 흔적이 발견된다. 기원 7세기에 기독교의 한 파인 경교(景敎)가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이 경교를 네스토리우스교라고도 합니다.
비록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지만 네스토리우스파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지나친 국가 의존적 자세와 현지화(세속화) 그리고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토착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토착화란 인적 자원의 확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이 고금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교의 주안점이라 할 것이다.
23. 켈트교회의 선교
-700 B.C 유럽전역에 퍼짐. 갈리아지역, 갈라디아지역의 기독교인이 켈트족으로 보인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의 통치에 있는 영국에 존재.
-페트릭 선교이후 아일랜드교회는 철저히 복음적이고 선교적이었다.
-선교교회로서 해박한 성경지식과 성령의 능력이 공존했다.
-수도원학교가 교회의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대륙을 향해 선교하기 시작했다.
-6-8세기에 아일랜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진보한 나라였고 영국과 대륙의 학자들이 몰려왔다.
-아일랜드 교회는 이들에게 교육을 맡겼고 서유럽의 학문의 등불이 되었다.
-이들의 선교의 대상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 베네룩스 3국의 프리즐랜드족, 고울지방, 네덜란드. 독일, 북부 이탈리아등이었다.
-이들의 선교사는 “방랑적 아일랜드의 성자”로 불렸으며 북해에서 롬바르드 평원과 라인강에서 영국 국경까지 선교지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학문의 불을 밝히고 위대한 학자를 배출했으며 지역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660년경 잉글랜드는 거의 켈트교회화 되었다.
24. 교황 그레고리 1세에게서 시작된 로마카톨릭의 선교정책
***로마 교회는 그레고리로 인하여 모든 교회에 교황의 권위가 세워졌으며, 전 유럽으로 기독교가 확장되었다. 그레고리는 교회 규칙을 쇄신하고 조직을 체계화하여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여 로마교회를 세우고 견고케 하였다. 수도사들과 교직자들의 부패를 개혁을 통하여 척결하려고 하였으며, 교회의 순수함과 정결함을 회복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선교 전략가로서 로마교회의 주도하에 선교를 하게 함으로 신학과 영성에 있어 통일성을 가져오게 했고, 토착화를 하게 함으로 통전적인 선교를 하도록 하였다. 그레고리는 로마 교회를 제도적, 영적으로 갱신함으로 로마 교회가 유럽 선교를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며, 광의적으로 볼 때 그레고리는 선교사적 사명을 감당한 인물이었다.
25. 선교사 보니페이스의 생애와 선교
(요약)
영국 데본셔의 출생인 보니페이스는 베네딕트 수도승으로 중세 초기 중부 유럽에서뿐 아니라 전 선교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로 평가된다. 교회와 신조를 중요시 하였고 교황권위로 교회를 세우고 722년 독일의 감독으로 임명 받았다. 독일 라인 지역을 평생 전도하고 성공을 거두었다. 토르신을 상징하는 떡갈나무 사건을 계기로 수천명이 집단 개종을 하게 되고, 선교를 위한 수도원을 세워 토착민 훈련과 여성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초신자 교육에 기여하였다. 741마인즈 대주교로 임명되고 73세 프리시아 선교도중 살해 되었다. 로마교황주의에 철저하여 교회회의를 통하여 기강을 세우고 로마교회의 충성을 강화하였다.
26. 6-8세기 유럽선교의 특징인 수도원운동
6세기에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부흥이 페르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다. 수도원 운동은 카스카르의 아브라함(491-586)이 주도 하였는데, 그는 니스비스 학교의 베이트 아브라함에게서 공부한 후 락미드 왕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이집트 수도원에서 이집트 수도사들의 금욕적인 규율과 엄격한 생활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환후 니스비스 근처의 산간에서 이즈라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의 규칙을 성경의 권위들과 교부들의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엄격한 기도와 예배를 고집하며 사랑 가운데 관대하고 하나되는데 전력을 다한다로 정하여 운영하면서 수도원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27. 6-8세기 아시아교회 선교특징
<위의 내용을 논술식으로 정리하면>
A. 선교구조는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Monastic Bible Training Schools) 즉 성경학교의 성격을 가진 수도원으로 복음전파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공동체의 아이들 교육과 청소년의 훈련, 그리고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므로 선교사 성경학교라고 불리웠으며 페르시아교회의 삶을 대표했다. 과목은 신학과 성경(시편) 이었고, 수도원의 규율에 따라 22개 학칙을 중심으로 입학한 사람은 세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독신을 서약하고, 모든 재산을 형제들의 공동체에 양도해야 하는 학칙도 있었다. 교육은 무료였고, 방학 중 노동 등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였다. 6세기 니시비스의 학교는 1000명이 넘었고, 7세기 중반에는 정점에 도달했다.
B. 선교의 원동력은 이주와 박해였는데 동로마 황제의 박해로 인해 네스토리우스(단성론자) 추종자와 칼케돈 추종자들은 대거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원시 아시아교회와 연합했다. 또 페르시아 황제의 박해로 변방선교가 계속 진행되었다.
C. 선교의 방식은 교육을 통해서, 교회와 수도원을 통해서, 선교대주교단을 통해서 했다.
선교사들은 가는 곳(투르크, 위구르, 몽골, 만주족)마다 문자를 소개하며 문맹자들을 교육 했다. 또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했으며, 경교확산을 마련한 총대주교 디모데 1세는 교회의 내적운영은 총대주교의 뜻에 따라 선거대주교단에게 맡기고, 교회 외적사역은 페르시아 모교회가 독립 운영하는 선교대주교단이 하게 했다.
28. 바이킹의 이동이 지니는 선교적 의미
노르만족은 '북방인'이라는 뜻으로 이동하지 않은 북게르만 계통을 '바이킹'이라고도 한다. 장신에 금발이고 피부는 백색의 파란 눈이 특징이다. 혹독한 추위와 험한 자연에 시달리던 그들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영국과 유럽 등지로 침략하였다. 그들은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능하고 모험심이 강하여 빠른 배로 물이 있는 곳이며 바람같이 나타나 약탈하고 점령하였다. 그들은 3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덴마크계- 프랑크, 잉글랜드로 향하고 수장은 '롤로'이다.
노르웨이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일부는 북아메리카에 진출한 흔적을 남겼다.
스웨덴계- 러시아에 상륙하여 수장 '류리크'가 노브고로트 공국을 건설하였다.
일부는 지중해로 진출하여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우고, 신성로마 프리드리히 2세(1215-1250)에게 상속하였으나, 황제가 죽고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29. 십자군 전쟁의 과정과 선교적 평가
십자군 전쟁(1096-1291)은 1096년부터 8번의 전쟁과 소년 십자군 운동-200년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행
십자군 전쟁의 기본적 동기는 무슬림을 선교하려는 것보다 이슬람 치하의 교회와 기독교인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에서 개종자도 나타나면서 12세기 중엽에는 개종이 십자군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와중에 무슬림에 대한 강제 개종도 자주 나타난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 레오 9세에게 파문당한 후 분열의 치유를 위한 것이 십자군 운동의 또 하나의 동기도 되었으나 서방교회의 동로마 약탈 등으로 동서 교회가 하나 되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선교적으로 실패였다고 볼 수 있다. 성지는 다시 이슬람에게 넘어갔고, 대량학살 등으로 이슬람에 대한 선교가 지금까지 닫히게 했다.
30. 성 프란시스가 선교에 끼친 영향
프란시스의 수도단의 특징은 `탁발'과 `거리전도'였다.
프란시스는 거지들 처럼, 또 거지가 되어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경제기반을 든든히 한 수도단이 되며, 걸식(탁발)을 하면서 지극한 겸손을 배우는 이중장치를 마련하여 철저하게 세속과 결벽하는 운동을 시도하였고 거리 전도를 하였다.
또한 프란시스는 무슬림에게 비폭력으로 다가간 선구자였다. 당시 약 200년간이나 계속된 십자군전쟁 등 정치적인 이유로 회교권선교가 극히 미미해졌고 오히려 회교권과의 대화가 단절되었던 때에 그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가야만 선교가 가능함을 강조하며 1219년 이집트의 술탄(왕/Malik-al-Kamil)앞에까지 가서 전도함으로 회교도도 기독교인으로의 개종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의 수도회는 인도, 페르시아, 몽골 등의 무슬림 선교에 파송된다.
31. 레이몬드 룰의 생애와 선교의 특징
(요약)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의 부유한 카톨릭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30대 초반까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30대 초반에 깊은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회개하고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 특별히 해외선교의 사명을 깨달은 그는 사라센 회교 전도에 대하여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아랍어를 배우고 가족을 위한 약간의 돈을 남기고는 모두 구제하는 등 선교적 삶을 준비하게 된다. 회교도 선교가 일차적인 목표였지만 유대인에 대한 선교에도 힘을 쏟았던 레이몬드 룰은 매우 바쁜 생활가운데서 75세의 나이로 북부 아프리카로 선교지를 옮겼고, 80세가 넘은 나이에는 선교하는 그의 발걸음을 튀니지로 옮기는 삶을 살았다. 선교 자체의 삶을 살던 그는 1315년 6월 30일 돌에 맞아서 순교하게 된다. 룰의 인생과 사역은 교회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대에도 기독교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이야기인 동시에 변증적이고 교육적이며 복음적인 그의 탁월한 선교전략을 통하여 강퍅한 회교도들이 열매맺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꼭 써야 하는 내용은 바로 그의 선교전략이 변증적, 교육적, 복음적이었음을 쓰셔야 합니다.
32. 9-12세기의 시대상황과 선교상황
시대상황
유럽에 있던 로마제국을 대치할 부족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닌 것은 프랑크족으로서 이들은 11세기 동안 지속된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 처음에는 메로빙 왕조가 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왕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카롤링거 왕조가 계승하여 그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샤를마뉴(샤를대제)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되자 바이킹족이 9세기 이후에 유럽의 수로를 따라 깊숙이까지 침략했다 그 결과로 바이킹 왕국들이 노르망디와 지중해의 시실리에 왕국을 세웠다 이 시기에 바이킹족은 카스피해와 흑해는 물론이고 북미에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선교상황
중세시대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중앙유럽 지역에서의 아일랜드에 의한 선교로 시작되었다 로마로부터 시작된 선교사역은 7세기 잉글랜드의 동부지역에 이르렀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바이킹족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그들의 근거지인 스칸디나비아로 돌아가 10세기와 11세기에 융성해졌다 바이킹족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슬라브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로 러시아는 10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잉글랜드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로마에서 추방된 부족들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그 땅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패트릭의 추종자들은 스코틀랜드를 지나 아일랜드로 들어갔고 로마에서 비롯된 선교는 잉글랜드의 동쪽을 통해서 그 땅에 뿌리를 내렸다 두 가지 유형의 기독교 신앙에 접하자 휘트비회의(주후 663년)는 개종한 부족들만이 로마의 기독교와 일치된 것이라고 결정했다
아일랜드를 개종시키려는 패트릭의 시도는 성공적 이었다 그의 사역은 이오나수도원을 세울 정도로 진취적인 선교정신을 낳았는데, 이 수도원에서 보다 많은 선교활동이 비롯되었다 콜롬바는 스코틀랜드에, 메이슨은 잉글랜드에, 콜롬바누스는 중앙유럽에 복음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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