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응어리를 풀라
▣ 저 자 크리스티 김
세계적 선교단체 YWAM(Youth With A Mission : 예수전도단)이 운영하는 열방대학(University of the Nations)에서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7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열방대학은 YWAM이 하와이 코나(Kona)와 우리나라 제주도 등지에 세운 국제적 기독교 교육기관으로서, 110개국 280개 지역에서 DTS(예수제자훈련학교)와 같은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크리스티 김 선교사는 전 세계에 위치한 열방대학 중에서 일부를 순회 강의하며, 하나님이 그녀에게 베풀어주신 영적 치유의 놀라운 은혜와 비밀을 나누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가 가능한 이중언어자이기에 해외 교포와 서구의 크리스천 사이에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해외 한인 유학생들의 수련회인 코스타(KOSTA : 유학생선교운동)의 인기 강사로서, '승리하는 영적 전쟁'과 '용서해야 산다'는 주제로 명강의를 펼치기도 한다. 14세에 유학길에 올라 미국 남가주대학을 졸업(심리학 전공)하고, 국제신학대학교와 탈봇신학대학교에서 상담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녀 자신도 하와이 코나에 있는 열방대학을 수료했으며 1996년부터 동 대학에서 내적 치유 교수로 섬기고 있다.
▣ Short Summary
국제예수전도단(YWAM) 열방대학 내적 치유 교수인 크리스티 김이 전하는 내면세계 치유와 영적 성숙의 삶.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원통함을 토하라’는 것. 즉 기도를 통해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라는 것인데, 무슨 말이든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해 하고픈 말을 기도로 몽땅 토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62편, 142편)을 근거 삼아, 다윗이 원수 같은 대적을 향해 속마음을 토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그 다음절에서 오히려 용서와 이해와 축복의 기도로 바뀌었음을 설명하며 토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우리의 원통함을 아시고 들으시는 하나님께 ‘토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시원케 하신다는 것. 그리고 깨끗해지고 새로워진 마음속에 다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와 기쁨과 용서를 담아주심으로써, 결국 우리를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마음속에 그런 치유의 과정이 없이 그냥 상처를 담고 지낸다면 사탄이 틈을 타서 우리를 다시 붙잡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토하는 기도와 용서의 선언은 사탄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에서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내적 치유의 과정과 원리를 명확하고 쉽게 설명할 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례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 차 례
1부 용서로 풀어야 산다
1장 영적 성숙의 출발점인 용서
2장 은혜 받은 자는 용서할 수 있다.
2부 기도로 풀어야 산다
3장 마음을 토하는 기도를 하라
4장 듣는 기도가 중요하다
5장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3부 대적함으로 풀어야 산다
6장 영적 전쟁에서 사탄의 전술전략
7장 영적 전쟁에서 필승의 무기
4부 변화로 풀어야 산다
8장 변화를 갈망하는 인생
9장 변화되지 못한 자의 내면세계
10장 하나님을 알아야 변화된다
1부 용서로 풀어야 산다
1. 영적 성숙의 출발점인 용서
결혼생활을 충실히 하는 듯 보이는 남편의 마음 속에 전 애인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있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과 상실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와 같은 패턴이 우리 신자들에게도 공공연히 나타납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잘 출석하고 봉사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을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성숙과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 오래 출석했어도 속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가 상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찢어진 마음을 다시 빚으사 생기를 불어넣어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변화가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가지 풍상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받은 대우들, 들어왔던 말들 중 특별히 상처가 되는 것은 성인이 되도록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하하거나 비교하는 말은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쓴 뿌리로 작용하여 우리의 삶을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며, 나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숙을 위해서는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당했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회복되면 그 아픔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겨집니다. 동시에 우리의 속사람 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노가 없어지고, 슬픔이 사라집니다.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서 자라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우리를 비난과 무관심 속에 양육했던 부모님을 마음 깊이 용서한 후에라야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 실망, 외로움, 슬픔, 답답함이 꽉 차 있을 경우, 문제는 그 상한 감정을 느끼기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픔을 다루려는 생각조차도 싫어합니다. 상한 마음을 다루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있어도 온갖 죄를 즐기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은밀히 짓는 죄는 결국 죄책감을 불러오며 이런 패턴은 악순환이 됩니다.
무조건 몸에 느낌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탐하는 ‘육신의 정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눈으로 보고 즐기면서 짓는 죄인 ‘안목의 정욕’,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기보다 자기 성취, 자기 자신을 나타내며 그것에 자기 정체성을 두는 ‘안목의 자랑’은 세상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죄책감과 수치심, 허무함을 주고 그로 인해 자기 증오와 원망에 빠지게 함으로써 외로움과 아픔과 분노를 느끼게 하며, 다시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의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므로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회개를 했더라도 여전히 죄책감을 마음에 품고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없으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회개 한 후에도 여전히 죄책감에 빠져 있다면 이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불신은 죄이며, 이런 믿음 없는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의 죄를 기억지 아니 하겠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다 아시지만 그 죄를 가지고 더 이상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삯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모두 지불되었으며, 모든 죄는 예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큰 복은 죄사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 죄사함의 확신이 있으면 눈빛부터 달라지고 변화가 시작됩니다. 용서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며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사단은 자꾸 의심을 불어넣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는 용서받았다! 잠잠할지어다!"라고 선포함으로 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이렇게 용서받음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2. 은혜 받은 자는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지 않은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영적으로 깨끗한 마음이란 용서하는 마음, 허물을 덮어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마음이 영적으로 깨끗한 마음이며 성숙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죄를 품게 되어 영적으로 더러워지며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게 됩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기도 중에 하나가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용서를 하면 틈이 없어지고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사탄은 용서 기도를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그러나 용서의 기도를 하고 그간의 죄를 회개할 때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던 사탄은 꼼짝없이 나가게 됩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두 유형의 사람을 닮는데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 나머지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용서하지 않고 거부하면서도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나는 저런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저런 사람은 용서 못해’라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사람에게 익숙해지게 됩니다.익숙함은 친근함으로 이어져서 편안한 느낌 때문에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Christianity is not just a religion, Christianity is a relationship" 즉,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 친밀한 관계,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슴으로 만나지 못하며, 영혼 깊은데서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합니다.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헌금하고.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행동을 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 깊은 데서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자꾸만 주님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속이 허탈하고, 어딘지 모르게 냉랭합니다. 뜨겁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하나의 종교적인 관습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 안에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뿐 아니라 닮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이란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온유하심과 자비로우심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희생적인 사량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회복되어야 할 부모 자식 관계, 회복되어야 할 고부 간의 관계, 형제들 사이의 관계, 성도들 관계. 친척과 친구들의 관계가 안타깝게도 회복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절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이해와 용서는 별개입니다. 어떤 분들은 상처 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용서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우리의 육적인 연약함을 알고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유혹에 이끌려 죄 짓는 우리에게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엄연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의 믿음과 고백을 통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건강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외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자꾸만 외롭습니다. 아무도 안 만나고. 누구와도 절교하고. 누구도 꼴 보기 싫습니다. 자꾸만 혼자가 됩니다.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면서 우울증에 빠집니다. 대인 기피증에 걸리고 혼자만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롭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고 더불어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외로움은 영적인 암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만 외롭게 됩니다.
열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그때, 그때 그러면서 자꾸 과거에 머물게 됩니다. 과거에 머물면 현실을 놓칩니다. 과거에 머물면 미래를 놓칩니다. 그렇게 현실과 미래를 놓치면서 자꾸만 퇴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면 과거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를 되새김질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또 쉽게 상처를 입힙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문제 삼아 가며 상처를 받습니다. 공격적인 성격의 사람은 눈만 조금 마주쳐도 왜 째려보느냐며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또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죄를 쉽게 짓습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아프기 때문에 무언가 기분 좋아지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하는 말이 다릅니다. 마음 속에 원망이 가득하다면 우리 속에서는 계속 원망의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그 사랑을 더욱 절실히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롬 12:19, 20). 당신이 용서해야 할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선으로 악을 갚을 때 우리는 승리합니다.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복수하겠다고 그러면 우리는 묶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나 잘못되었습니다. 복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첫째, 용서는 결단입니다. 어떤 분들은 용서라는 감정에 중점을 두고 용서하기를 거부합니다만 용서는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루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감정에 치우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 이 고백은 위선이나 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용서는 누구보다 용서하는 이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냥 용서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억울함과 원통함 속에 지내게 됩니다. 반대로 용서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둘째, 용서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한 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용서하는 과정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뿐이겠습니까?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죽을 때까지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용서하기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용서할 때 상처의 껍질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갈 것입니다. 결국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하는 날이 찾아오고 설령 생각은 날지언정 아픔이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용서하여 상한 마음이 치유되면 더 이상 그 상처의 기억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해하기 원하시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화목케 되길 거부한다면 그의 그러한 선택 또한 용납해야 합니다. 또한 용서했다고 그 사람을 즉시 신뢰하거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했을지라도 그런 사람을 다시 대할 경우에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 잘못된 기준을 주장하거나 불필요한 의무감을 떠안아 본인도 상처받고 상대로 하여금 또 다시 죄의 길에 빠지도록 길을 열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는 은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누구에게 어떠한 상처를 받았더라도 주님의 선하심과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하셨다는 것을 진정 깨닫고, 믿고. 감사한다면 당신의 삶 가운데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죄사함에 관한 깨달음과 감사가 없거나 있더라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합니다. 요셉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그의 삶을 본받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때 복을 받습니다. 마귀는 패배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더욱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응어리와 상처가 하나씩 치유되면 우리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첫째, 지적인 측면에서 머리도 맑아지고 더욱 총명해집니다. 둘째. 정서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셋째. 의지력도 건전하게 강화되어 사양해야 할 상황(예를 들면 죄의 유혹, 부적절한 부탁이나 강요)에서 적절하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예’나 '아니요’라고 분명히 답변하여 얼버무리거나 불의한 타협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질병이 없어지고 건강해집니다. 다섯째. 영적으로 맑고 깨끗하며 성숙해집니다.
2부 기도로 풀어야 산다
3. 마음을 토하는 기도를 하라
마음에 있는 것을 꺼내어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남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그 마음을 토로하십시오. "하나님 제 남편을 죽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고상하고 유창한 기도, 반질반질하게 기름을 칠한 것 같은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기도를 듣고 감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하나님은 분명히 마음을 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1~2)
누군가를 정말 미워해서, 정말 원수 같은 어떤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그의 마누라가 과부가 되게 해주고, 그 아이들은 고아가 되게 해주시고, 빌어먹게 해주시옵소서. 그 집안의 씨를 말려주십시오." 성경에 바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10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왔지만 다윗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미 마음에 있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냈습니다. 이미 퍼부었고 쏟아냈기 때문에 원통함을 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마음을 토하고 주님을 피난처로 삼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포장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폼 잡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간혹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님.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죽이고 싶다는 기도를 했다가 그 기도가 응답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뱉는 기도를 들으시고 무식하게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합당하게 선하고 지혜롭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토하는 내용을 품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십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의 유익
첫째,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둘째, 하나님과 친해집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토할 때. 하나님께 친밀함을 느끼게 됩니다. 셋째, 형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형식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나아갑니다. 예수께서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용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껏 토하면 응어리가 풀리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기도가 바뀝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같은 시편인데도 앞뒤가 너무나 달라집니다. 앞 절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재앙을 한탄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껏 마음을 토하니까 기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토하면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영적인 주파수가 주님 앞에 더욱 명확히 맞춰집니다.
4. 듣는 기도가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마음을 토하고 기도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들으십시오. 듣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갈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줄 모르고 들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는 듣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열한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둘째,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잘 배우고, 공부하십시오. 성경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알면 못할 소리가 없습니다. 사탄도 예수님께 부분적으로 성 경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아는 성도들이 쉽게 이단에 빠집니다. 성경 말씀을 모르면 잘못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뭔가 들었다면 다시 한번 주님께 나아가서 기도해보십시오.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신 겁니까? 주님! 이것을 확증해주옵소서."
넷째,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섯째, 생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데 어떤 생각이 막 떠오르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여섯째, 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책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책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해 영적으로 좋은 책들을 쓰게 하시고 그 책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일곱째, 영화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십계〉, 〈벤허〉와 같은 영화는 좋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좋은 영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잘 분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덟째, 만물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님은 이렇게 너무나 섬세하신 분입니다. 저는 그 신비를 생각할 때마다 “오! 주여. 주님은 너무너무 기가 막힙니다. 주께서 저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십니다.”라고 감탄합니다. 만물을 보십시오.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솜씨를 보시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홉째, 예배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열째, 기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작은 틀에 집어넣은 채 우리의 인간적이고 타산적인 수준에서만 믿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말씀 안에 기록된 수많은 이적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열한째, 찬양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양 중에 임하십니다. 찬양은 주님을 선포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창의력이 풍부하시기 때문에 더욱 다양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우리 생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둘째,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자 한다면 교만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깨끗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넷째, 전심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은 분명히 “마음을 다하여.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말씀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여섯째, 주님의 말씀 앞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듣기만 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째, 주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3부 사단을 대적함으로 풀어야 산다
6. 영적 전쟁에서 사탄의 전술 전략
무지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초신자로서 마귀에 대해서 모르고 살았습니다. 마귀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마귀에 관하여 배우고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악한 생각을 주입하는 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사탄이 넣어주는 생각의 죄의 생각입니다. 음란한 생각, 훔치는 생각, 속이는 생각, 거짓된 생각, 추한 생각, 더러운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추하고 더러운 생각, 남자 분들의 경우에는 음란하고 야한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이럴 때에 대체로 누구를 미워하게 됩니까? 바로 자기 지신을 미워합니다. 이러한 자기 증오는 또 하나의 함정이 되고 맙니다. 사탄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묘합니다. 그런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생각을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교통 정리하는 경찰을 보십시오. 그 경찰이 아무리 체구가 작더라도 호루라기를 불면서 손을 내밀면 모든 차들이 멈춥니다. 왜냐하면 모든 차들이 그 신호에 따르도록 그 경찰에게 법적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귀를 제압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해오는지 다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탄은 우리에게 나쁜 생각을 주입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두려운 생각을 넣어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지 않으시며 오직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담후 1:7)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두려움의 생각과 죄의 생각을 넣어줍니다.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넣어줍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실까?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하나님이 널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너에게 이런 일이 있느냐?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은 듣는 것이나 보는 것에 큰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로 아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욥은 욥기 42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겁니다. 모른다는 대답을 할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둘째, 사탄은 사람을 통해 우리를 훼방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와 가까이 지내는지 심각하게 평가해봐야 합니다. 혹시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가운데 죄 짓자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죄 짓기를 즐겨 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관계를 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건함을 사모하는 자들과 어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통해 잘못된 유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잘못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분들은 흔히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도 초신자 때 잘못하면 여호와의 증인이 될 뻔했습니다.
셋째, 사탄은 우리를 직접 공격하며 훼방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직접 공격하여 질병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사탄이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탄이 주는 질병도 있습니다. 욥이 바로 그랬습니다. 욥은 온몸에 악창이 나고 고름이 흘러서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었습니다. 사탄이 준 것이었습니다.
넷째, 사탄은 매스컴을 통하여 우리를 공격합니다. 사탄은 텔레비전과 영화 같은 매스컴을 통해 공격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십니까?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십니까? 사탄은 영화 장면을 통해 공격합니다. 눈과 귀는 우리 영혼의 문(門) 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보는 것에 대단히 치중합니다. 2002년도 겨울, 미국에서 십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팔렸던 컴퓨터 게임은 여자를 때리면 접수가 올라가고 성폭행하면 더 많은 접수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게임 내용도 모른 채 인기 있는 게임이라고 해서 십대 자녀들에게 사준 것입니다. 포르노 때문에 너무나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인 노리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죄는 자꾸만 좀더 큰 자극을 요구합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테드 번디라는 남자가 20여명이 넘는 여자들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젊은 여성을 강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테드 번디는 사형당하기 직전, 정부에 기막힌 호소를 하고 죽었습니다. 어떤 호소인지 아시겠습니까? "포르노가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는 나 같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이다. 나는 포르노를 통해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성적인 노리개로 보였을 뿐이다. 제발 정부는 포르노를 없애는 데 진력해 달라. 나만 사형시키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남성들이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제발 이 사회에서 포르노를 없애 달라."
· 포르노가 나쁜 이유
① 사랑과 결혼의 헌신 없이 하는 성행위로 추락할 수 있다.
② 하나님이 만드신 선물을 추하게 만든다.
③ 이기적인 행동을 조장한다.
④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여성을 성적인 노리개로 비하한다.
⑤ 부부만의 은밀함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⑥ 부부관계가 멀어진다.
⑦ 범죄를 유발한다(포르노가 증가하면 성범죄도 증가한다).
⑧ 음란한 영에 묶이게 된다.
⑨ 영혼이 더렵혀진다.
⑩ 기도가 잘 안 된다.
다섯째, 사탄은 우상과 미신을 통해 우리를 공격합니다. 집사님이나 권사님들 중에도 손금을 보고 생명줄이 길다느니 짧다느니 결혼을 몇 번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 것은 우리의 삶과 전혀 무관합니다. 우리의 삶은 손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부적 같은 신적인 물건 외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정산하고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탄에게 훼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입니다. 마치 사단의 해코지를 자초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예수를 믿은 다음 마술책을 다 태워버리는 기록이 나오는데, 초대 교인들은 이렇게 과감히 순종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대가를 지불하는 과감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7. 영적 전쟁에서 필승의 무기
· 첫째 무기 - 예수님의 이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는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느 여성이 인신매매를 당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어도 감시가 너무 심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강제로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져야 했기 때문에 날마다 강간당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곳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나중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끔찍하게 이 자매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었습니다. 아이도 낳고 겉보기에는 평온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듯했지만 이 자매의 마음속에는 증오와 분노가 뜨겁게 끓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납치했던 남자들에게 바보같이 끌려가서 온갖 수모를 겪은 자기 자신에게, 억지로 성관계를 가졌던 수많은 남자들에게 그녀는 분노했습니다. 심지어 남편과 이혼하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일어나서 작은 말다툼을 벌이다가도 당장 이혼하자고 고함을 질러대기 일쑤였습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자 아이 역시 너무나 미워졌습니다. 급기야 아이를 모질게 대하고 감정에 치우쳐 손을 대는 일까지 잦아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자신이 미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먼저 자매를 납치했던 남자들과 성관계를 요구한 뭇 남성들을 용서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와 남편에게 아픔을 주었던 일에 관해 용서를 구하자고 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기 바지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하더니 곧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며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저를 노려보고 두 손을 들어 할퀴려는 자세로 다가왔습니다. 그 때 단둘이 상담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도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싸움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즉시 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그리고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용서 기도를 마치세요! 주님께 용서기 도 드리세요.“ 그러자 자매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며 방바닥에 엎드리더니 뒹굴었습니다. 아픔을 고백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다시금 저는 용서 기도를 하자고 청했습니다. 결국 용서 기도를 하면서 입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다 나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자매는 소리내어 토했고 저는 자매의 배에다 손을 대고 계속 명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다 나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나가!"
울고, 소리 지르고. 뒹굴고, 토하고…. 그 자매는 한참 후에야 드러누운 자세로 긴 한숨을 쉬더니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자매는 지쳐 보였지만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제게 돌리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귀신이 내 안에 있어서 그동안 그렇게 남편과 아이에게 못되게 굴었군요. 내가 왜 그렇게 좋은 남편을 자꾸만 미워하고 이혼하자고 다그쳤는지 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제 마음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샘솟고 있습니다. 오늘 집에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겠어요." 그 자매의 마음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였지 단순히 인간적인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 둘째 무기 - 하나님의 말씀
‘너는 못 생겼다. 그 꼴로 생겨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그때 우리는 말씀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기록하였으되, 주께서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시도다."(시편 139:14참조).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선포하시면서 사탄과 싸우셨습니다(마태복음 4장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으로 싸우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합니까?
· 셋째 무기 - 주님의 보혈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2:11). 한번은 강의를 마치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간사님 중에 한 분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으니 와서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짐을 싸다가 멈추고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는 방에 가기 전에 먼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옵소서. 주님, 저를 주님의 보혈로 보호하여주옵소서. 이제 싸우러 갑니다. 승리를 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대적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혈의 능력을 덧입는 것이 중요합니다.
· 넷째 무기 - 하나님의 전신갑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어떻게 입습니까? 첫째, 믿음으로 입습니다. 둘째, 행함으로 입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투구란 영적으로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을 지키는 삶을 말합니다. 의의 흉배란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된 우리는 의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의인다운 행함이란 거짓과 부정부패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속임수를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는 그 성령의 검을 손에 들고 읽고. 듣고. 암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신을 신고 전도자적 삶을 살기 바랍니다.
· 다섯째 무기 - 찬양과 기도
찬양과 기도 역시 우리의 무기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찬양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부 변화로 풀어야 산다
8장 변화를 갈망하는 인생
나는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한 번밖에 못 사는 이 세상, 재미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할 것이고, 기분 좋은 것이라면 뭐든지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 세상이 전부라면 마음껏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죄다 느껴보고, 보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보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다 하면서 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자꾸만 알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자꾸만 알아가면 그분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게 되며. 우리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심령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9. 변화되지 못한 자의 내면 세계
저는 열방대학의 훈련을 통해 내면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 훈련을 받고 변화되기 전에도 저는 신학원에 다니며 제자를 양육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진정한 변화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정보와 내용을 전할 수는 있었지만 삶에서 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진정한 변화를 받지 못한. 내면세계가 변화되지 못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소위 ‘잘 믿는’ 크리스천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형식’입니다. 저 역시 바로 이 형식에 매여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큐티(QT)를 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의무적으로 억지로 숙제하듯이 읽었습니다. 졸릴 때는 짜증을 내면서 읽습니다. 도표를 따라 찾아 읽고 또 씁니다. 적용할 것을 쓰고, 기도 내용을 쓰고, 다 마치면 어떻게 합니까? 성경책을 덮으면서 “아! 다했다”고 합니다. 하루의 숙제를 마친 것입니다.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입니다. 갖은 폼을 다 잡아도 그것은 껍데기이고 형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습을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둘째, 다분히 감정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집회나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순간 뜨겁고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약 2주면 푹 가라앉아 버립니다.
셋째, 애정 결핍의 모습이 있습니다. 애정 결핍 상태의 사람은 누군가의 인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역자란 하나님께 사랑을 공급받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넘쳐흘러서 성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메마른 가슴으로 설교해놓고 성도들한테서 사랑을 구하느라 헐떡이는 격입니다.
넷째,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비성경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부정적인 생각을 말씀을 통해 치유해주셨습니다. 하루는 시편 139편 말씀을 읽다가 제 자신을 향한 자기 증오와 외모에 대한 증오가 치유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시각이 바뀝니다.
다섯째, 불건전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죄가 스며듭니다. 교인들을 상담하다보면 불건전한 관계에 대한 경위가 밝혀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이러한 죄악된 관계를 은밀히 즐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면 죄악된 관계를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쓸데없는 집착을 버릴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이런 나쁜 습관에는 교회 중직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흥청망청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별난 노래 다 부르며 스트레스 푸는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기 전에 폭식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울적하면 먹고, 외로우면 먹었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습니다만 그것은 공허함을, 외로움을 먹는 것으로 채우려 했던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저는 영화를 무분별하게 봤습니다. 개중에 도박이나 포르노 같은 나쁜 습관에 얽매인 분들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주님을 닮아가지 않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그런 죄를 즐기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며, 닮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나쁜 습관이 자리 잡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신체적 질환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속에 담고 살아갑니다. 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미워할 때, 그 마음 자체가 다루어지지 않을 경우 질병으로 이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마음에 원망이 가득 차 있습니까? 그분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집니다.
여덟째, 불건전한 생각이 망상으로 발전하고 자꾸만 상상의 날개를 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음란한 생각까지 품게 되면서 밤낮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후회와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은 현실을 놓칩니다. 과거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소중합니다.
아홉째, 마귀에게 틈을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 귀신들렸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서 귀신이 틈을 탈 수 있는 요소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았거나 분노를 품은 일도 이에 해당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6~27).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선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 앞에 아뢰십시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요소를 용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 다음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하십시오. 그러면 귀신이 쉽게 떠나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또,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나쁜 습관이 있다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부분은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0. 하나님을 알아야 변화된다
우리 역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 받고 새로워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안다고 할 때는 그에 대한 정보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 있고 교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말은 '야다'(yada)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는 정보를 가지고 얘기하는 정도의 '안다'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의 의미는 만나고 경험하는 친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확신이 있는 신앙을 갖게 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저 역시 한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율법주의 아래서 하나님에 대해 알았습니다.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슴이 공허했습니다. 머리는 꽉 찼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허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생활이 지겨워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 때는 지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 만남을 갖게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때 신앙생활은 지겨운 것이 아니라 즐거워집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정보성 신앙이 아니라 심령 깊은 데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귀한 신앙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까?
첫째,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친구끼리 더욱 친해지고 서로 잘 알아가려면 시간을 같이 보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기 쉽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친구로 대한다는 것은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늘 주님과 같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주님과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십시오. 주님과 같이 있어보십시오.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꼭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 중심의 태도를 내려놓은 그날부터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에 깨달음이 있든 없든 주님 한 분만을 사모하며 그분 발 앞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가 마냥 좋아서 그저 엄마와 같이 있고 싶어서 다가오듯, 연인들이 꼭 무언가를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함께 있는 것 자체를 행복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영혼의 연인이신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꼭 무엇인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함께하고 싶은 만남입니다.
둘째,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주님,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원해요. 제 마음 깊은 데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기 원해요." 이렇게 고백해보십시오.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진정한 마음을 드릴 때 저는 마음이 진짜 흥분됩니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드리고, 성경을 암송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열매일 뿐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몸만 와서 앉아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뿌듯해지고 기쁩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셋째,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당신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으면 당신은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인처럼 주님께 기쁨으로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수 있습니다.(눅 6:38)
넷째, 봉사하고 구제하며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봉사하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공부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공부를 잘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삽시다. 우리 자신만 위해서 살지 맙시다. 축복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나라의 많은 엄마들이 내 자식. 내 새끼만 잘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이 내 자식, 내 새끼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다른 집 아이들도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잘되고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제자됨의 표시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려라."(요 13:34~35)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됐습니다. 병들어 있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같이 말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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