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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요약본 (128쪽)

기독교 도서관

by 주거시엔셩 2015. 11. 21. 12:3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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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 강요" 요약
1. 신론(1): 제1권 1-2장(신인식론과 계시론)
2. 신론(2): 제1권 3-4장(신인식론과 계시론)
3. 신론(3): 제1권 5-6장(신인식론과 계시론)
4. 신론(4): 제1권 13장(삼위일체론)
5. 인간론: 제1권 15장(하나님의 형상론)
6. 그리스도론(1): 제2권 13장(성육신론)
7. 그리스도론(2): 제2권 15장(삼중직무론)
8. 그리스도론(3): 제2권 16장(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9. 칭의론: 제3권 14장(칭의의 시작과 발전)
10. 선택론: 제3권 21장(선택론의 필요성, 위험,선택의 과정)
11. 교회론: 제4권 1장(교회의 필요성, 표지)
12. 성례론: 제4권 14장(성례의 의미와 목적)
13. 종말론: 제3권 25장(부활과 영원한 복)
1. 신인식론과 계시론
(제1권 1장 - 2장)
제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
1.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
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 : 28) 하고 있
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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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러한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
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
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
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
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
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 왜
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을 빼
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
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
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
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
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
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
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
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래적인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
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타락하여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한도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오염된 것
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
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검으스레한 물
체를 볼 때 완전히 횐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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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영혼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만일 우리가 대낮
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
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
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도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은사를 평가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
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
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
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
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가장 사
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신기
하게 감동시켰던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역겨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
에 능력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
게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를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 당한다고, 성경
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8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
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들은 죽음
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혼비백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
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
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삿 13 : 22, 사 6 : 5,
겔 2 : 1, 1 : 28, 삿 6 : 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
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
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참조 욥 38 : 1이하). 그것은 아무 이유
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
티끌과 재"(창 18 : 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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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 : 13).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
면 안 되었거늘(사 6 : 10) 하물며 부패하고,(욥 13 : 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
(욥 7 : 5, 시 22 : 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
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
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
에서 어두워지게 된다는 것이다(사 2 : 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
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하고 다음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
한 순서일 것이다.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슨 목적에 이르
게 되는가?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는 경배이다
내가 알고있는 바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합당하며 우리에게 얼마
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religion) 또은 경건
(piety)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아담
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신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
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근본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다. 인
간성이 오늘날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
에게 화목시키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
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
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안에서(고후 4 : 6 참
조)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
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는 적당한 곳에서 다루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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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
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
을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그것을 다스리시며, 선으로 보존하시
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
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서 바라고, 그에게서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그에게 돌
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
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
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
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이 자
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
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
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다만 헛된 추측으로 장
난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의 본
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에피큐로스(Epicurus)
가 말한 것처럼, 세계를 돌보지 않고 다만 안일에 빠져 있는 그런 종류의 신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는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가 되는 이 지식으로 우리는 일체의 선을 하나님
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
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
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께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 등을 즉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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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
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
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
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
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
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더우기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선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
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主)와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취임을 경외하며, 그의 영
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는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심판장이시며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를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은 매우 무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한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
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신자에게 영
생의 상급을 주시고 경건치 못하며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
에 대한 공포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
반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몸서리나는 생각일 것이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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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하
나님을 경배하되 아무 뜻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
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화려한 허식으로 있는 곳마다 마
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2. 신인식론과 계시론
(제1권 3장 - 4장)
제3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성격
인간의 마음 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
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논란할 어떤 것도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
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
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
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
만적인 종족은 없다.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없이 지
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
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된다. 인간은 본의 아니게 다른
피조물을 자기 이상으로 높이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인간은 하
나님을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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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드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 사실은 신적 존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거를 명
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 증거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타고난 성격을 변경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사
실 이 타고난 성격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교만을 잊
어버리고 가장 열등한 것에 대해서 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게 될 때 변화되는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적 발명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순박한 민중들을 속박하기 위해 교활하고 교묘한 간
계로 종교를 창안해 내고, 이 하나님 예배를 만들어 낸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존
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속박시키기 위해, 교활한 사람들이 종교
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작해 내서 이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존경심을 일
으키며,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영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
교라는 명목으로 소박한 민중들을 교활하게 속인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고, 오늘날에도 적
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좋든 싫든 자기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항상 어렴풋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
(Gaius Caligula)보다 더 대담하고 방자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자 그 보다 더 비참
하게 떤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가 공공연히 멸시하던 하나
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또한 칼리굴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 : 36 참조). 이렇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
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
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오겠는가?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
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
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된
다. 가끔 이러한 공포는 잠시 동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
러나 그것은 즉시 돌아와서 새로운 공격을 취한다. 그들이 만일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나마 놓이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 술에 취했거나 흥분한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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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섭고 떨리는 꿈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자,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실제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
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
든 사람에게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신념은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골수에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사악
한 자들의 완고함 자체가 바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디아고라스(Diagoras)와 그
동료들은 모든 시대가 믿어 오던 종교들을 희롱하였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
는 하늘나라의 심판을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소적인 비웃음
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벌레가 쇠를 부식시키는 어떤 무엇보다
도 더 예리하게 그 속을 파먹고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잘못된 것들이 없어지며, 종교
심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며 개량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이제 뒤
에서도 곧 말하겠지만) 세상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없
애버리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파괴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
기 때문이다. 내가 다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열심히 만들어낸 마음의 그 완고함이 다 쇠약해지더라도 그들이 강하게 말
살하고자 했던 그 신의 인식은 도리어 무성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싹트고 있다
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은 학교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터득하며 많은 사
람이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잊어버리려고 할지라도 본성 그 자체가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우기 만약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
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철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
았던 것은 아니다. 영혼의 최고 행복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그리고 이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플
라톤(Platon)이 자주 가르친 것도 다만 그런 의미의 것이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이 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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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
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
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추구하게 된다.
제4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1. 미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우기 그것을 성숙하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
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 : 3 참조). 더우기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
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어
떻든 이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
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
때 어떤 사람들이 잘못으로 미신에 빠진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뜻은 그들의
단순함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
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한 것
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
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
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
한 방향으로 발을 내디든지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함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 : 22). 그는 또한 바로 앞 절에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롬 1 : 21)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
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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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공허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부언하였다. 그들의 어리석
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에서뿐만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
의 지식을 넘어 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
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 1, 53 : 1)라
고 말한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
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
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
미 부여받았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
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
에게서 그 본질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
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
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것을 운명에 맡기며, 인간
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
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마 13 : 14-15, 사 6 : 9-10,
시 17 : 10 참조).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 : 1)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
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하였다(시 10 :
11).
비록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의 능
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딤후 2 :
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식에서 몰아내고 천상에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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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
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
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맹목적
인 충동에 사로 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덕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미신에 대하여 버릇처럼 변명한 그 공허한
변론이 전복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
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
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 또는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또
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다고 입증하신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들은 멸시 또는 공공연
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에 알맞는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
면,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
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
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
: 8)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엡 2 : 12) 지낸 자들이
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외
인이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을 생
각하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
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
받을 우상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락
탄티우스(Lactantius)의 말과 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한다.
4.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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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할 수 없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그들
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
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
하는 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
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Statius)의 말은7 이런 종류의 무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 잘 들어맞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해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 심판대가 무너지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 이
러한 심정으로 그들은 심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신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
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그것
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
악으로 자신들을 부패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악에 악을 더하고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
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을 성령의 고비로 제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종교의 그
림자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런 혼란한 지식
과 종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직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그러나 위선자들(hypocrites)은 이러한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
이려고 한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
유하려고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것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 데 내맡
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신뢰한다. 마침내 그들은 그러한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을 얽어맴으로
써 한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이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
식시켜 마침내는 꺼지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앗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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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나
의 지금의 주장은 보다 더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들
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안할 때에는 익살스
럽게 하나님을 희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킨
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에게 엄습해 오면 그들은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
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
이 하나님께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
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3. 신인식론과 계시론
(제1권 5장 - 6장)
제5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1-10)
1. 하나님이 스스로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는 모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요 17 : 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
해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 : 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
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
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시편 기자는 또한 같은 곳에서 능란하게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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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
시며"(시 104 : 2-4)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위에
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
다(시 11 : 4). 더욱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
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
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히 11 : 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
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 : 2이
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
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
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
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 :
19-20).
2.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
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
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
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
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
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
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
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우리
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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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
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
다.
3. 인간이 신의 지혜로우심을 최고로 증명한다
따라서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
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
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
니하도다"(행 17 : 27)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
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
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
이여"(시 8 : 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
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
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
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
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교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실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다음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를 바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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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
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
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
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
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
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
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
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
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
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
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
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
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
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
"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
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
킨다.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
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
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우주에는 이러
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
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
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
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 부정한 방법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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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
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
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
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
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
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
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
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
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
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
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
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
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
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우기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
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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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壯觀)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
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발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 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
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
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
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
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
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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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되심을 창조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고찰 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셔
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
며, 우리의 신앙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시며, 또한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기
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적인 본
성을 증거해 주는 그 놀라운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우리가 이 은사를 풍부하게
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불합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
의 권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
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개짓 신호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
든 것을 뒤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
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욥기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나
는 여기서 이에 대하여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하여
우주 창조를 논할 때 더 적절하게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제
시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모습의 그 윤곽을 높게 추구하고, 낮게 추
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다같이 하나
님을 찾는 방법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
의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필연적으로 영
원하시며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물을 창조하시
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그 유일한 이유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히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
나도 없기 때문이다(시 145 : 9 참조).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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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
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
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
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
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
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
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
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
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바는 뜻이요, 그가 많
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
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긍휼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풍부한 기회를 주셨던
가! 곧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
를 나누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셔서 그
들의 행악을 산산이 부숴 버리지 않으셨는가!
8.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생활을 좌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
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
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
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 107 : 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절),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절),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
절),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절),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
절).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
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
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
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
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遺棄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절).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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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절),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
는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
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
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
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
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
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시 113 : 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
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 : 20 참조),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
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 : 19, 욥 5 : 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
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
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
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
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받
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
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지식이다. 왜냐하면 주님께
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
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
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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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
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
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
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
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행
17 : 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
고 먼저 고백하고(시 145 : 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
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45 : 5-6, 시 40 : 5 참조). 그
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
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
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
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
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
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
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
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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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
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
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선,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
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
을 탄식한 바 있지만(시 92 : 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
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시 40 : 12 참조). 그러나 이 논의는
후에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
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
11. 창조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
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
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 과연 몇이
나 있는가?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
만 있지 않은가?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
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
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
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
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
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
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 자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
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철학자가 얼마나 그들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하게 드
러내었던가! 가장 미련한 자처럼 행한 다는 철학자들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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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 역시 자신이 생각해 낸 둥
근 구체(球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 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하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다
른 사람들이야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통치
가 너무도 명백하게 섭리를 증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만사가 생각
없는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뒤죽박죽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허와 오류에 크게 기울어져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가장 탁월
한 사람에 대해서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데 그 광기가 지나친 천박한 자
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 되었다
온 세상을 채우고 뒤덮은 그 무한히 더러운 오류의 진창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은 미궁과 같아서 민족마다 여러 가지 허위에 각각 끌려갔
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뿐만 아니라 거의 각 사
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대하고 풍부한 샘에서 물이 분출되
어 나오는 것처럼 무진장한 신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
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 저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혼란의 와중에 빠지게 하는 미신의
목록을 구태여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끝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그 맹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미신에 대
하여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패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미개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
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
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들
은 모두가 다 허무한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토아 학파(Stoics)는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명칭을 끌어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것이 곧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사
상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각종의 제신
에 속아 점점 더 심한 오류에 끌려 들어가는 일만 없으면 공허한 것에 기울어지
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수법이다. 애굽인들의 신비주의적 신학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들 모두는 용의 주도하게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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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처음 볼 때에는 이에 속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치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패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극히 혼란한 다양성은 에피큐로스(Epicurearts) 학파와 그 외
경건을 경멸하는 자들을 대담하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
리도록 하였다. 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
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스스로
를 괴롭힌다고 주저 없이 추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아무 형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
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불경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적인 무지의 연막을 만
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똑같이 불일치를
일으킬 만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탐구하는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는 인
간이니 만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는 한층 더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
다는 점이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 폭군 히에로(Hiero)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
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
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
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
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
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행 17 : 23 참조).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 행위를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
에 집착하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에 빠지게 된다-한 분이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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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정말 그들은 마음에 그
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
며, 그들의 확신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
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0 : 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에베
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
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엡 2 : 12-13). 그리고 이 말은 한 국민에게
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주장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위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1 : 2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
이에 신으로 경배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
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 : 18,20). 확실히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
는 예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요 4 :
22).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익하며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비록 큰 죄악에 빠져 있지 않고 혹은, 공공연하게 우상 숭배
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공통적인 이해에 근거한 순수하고 공인된 종교
는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광란에 감염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라
고 한 바울의 주장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2 : 8). 그러나 가장 탁월
한 자가 오류라는 어둠 속에서 헤매인다고 하면 민중의 찌끼와 같은 존재들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
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항상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행 17 : 23 참조). 이
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
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요 4 : 22). 그리
고 가장 훌륭한 입법자들은 종교가 일반의 여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
면 소크라테스(Socrates)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명령한 아폴로
(Apollo)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를 멀리 초월하고 있는 것을
그들 자신의 권위로 정의할 수 있는 이 법칙은 어디서부터 인간에게 왔는가? 혹
은 인간적으로 전해진 신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조상들의 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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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중의 제정을 누가 그렇게 감수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
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
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
이 우리를 위해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 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는 못한다. 분명히 약간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
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 : 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바울이 여
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세계의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졌다고 말한 곳에서도(롬 1 : 19) 바울은 그러한 현현을 인
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변
명할 수 없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를 멀리서 찾아서는 안 된
다고 말하고(행 17 : 27),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접근의 결과가 무슨 유익이 있는
가를 가르쳤다. 곧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
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 : 16-17)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
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절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
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우리의 무능함이 죄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
하다 하더라도 그 우둔함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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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하더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
음의 변명들, 곧 잘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
물이 보여 준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리
고 비이성적인 피조물까지도 교훈을 주는데 정신 박약이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고 변명하는 것들이 당연히 용납되기라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
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
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을 즉시 부패케 하여
훌륭하고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태만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
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는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거
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성(神性)
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
들어 낸 꿈과 환상을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
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우리는 하나
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그릇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하여 그 사역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
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
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은 오직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부여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에게 배
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의식 아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
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 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
륭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
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
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다른 백성들처럼 하
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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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묶어 두시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곧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또는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
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거의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
나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
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하여 말없이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
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
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
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다른 족장들이 불신자와 구별짓게 하신 하나님
에 관한 그 깊은 지식에 도달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도움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도록 그들을 조명하여 준 그 특수
한 신앙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말씀을 통하여 이 두 지식에 다
같이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먼저 오게된다. 다음으로 죽은 영혼을 소
생시키는 다른 내적 지식이 여기에 더하여져서 이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창시자,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증보자의
위격을 가지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세계의 타락과
자연의 부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제책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3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양자로 삼으
신 언약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들을 항상 불신자에게서 성별(聖別)하였다는 일부
의 교리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왜냐하
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우주
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확실한 특징에 의하여 모든 허망한 잡신들의 무리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만은 논의를 할
것이다. 그 일련의 문제들을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구속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4 우리는 신약성경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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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목적은 미로에서 어떤 불확실한 신성(神性)을 찾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2.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나 환상으로 나타내셨는지 혹은 인간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다. 하여튼, 그들의 마음에 교리에 대
한 견고한 확실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5 왜냐하면 하나님
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인 견해를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진리가 계속적인 교훈을 통하여 대
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족장들에게 맡기셨던 그 말씀을,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엮으실 것을 결심하
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율법이 공포되었으며 그 후에 율법의 선지자들이 해
석자로서 또한 첨가되었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
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
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 : 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는 신앙
과 회개의 특수한 교리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과 많은 거짓 신들의 무리들과 혼
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
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이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의 관객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눈을 돌려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월등한 유익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흑암에서 태어난 자가 점점 더 둔감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
냐하면 자신의 한계를 잘 지켜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
람은 극소수요, 오히려 자신의 허망에 부풀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
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
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 확실히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
려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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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을 떠나면 우리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
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
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하늘의 교리가 망각으로
파멸되지 아니하고, 오류로 사라지지 아니하며,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
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
(形成)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가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성실하게 명
상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갈망한다면 이러한 올바른 길을 추구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하여 진실하게 또는 생생하게 묘사하
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
니라,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그 길에
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자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
울이 말한 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 : 16) 그 하나님의 광
채는 말씀의 실(絲)로 인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宮)
과 같은 것이라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 밖에서 벗어
나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름거리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더 낫다.8 그러므로 다윗은 순수한 종교가 번창하기 위하여는 이 지상에서
미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하였다.
(시 93 : 1, 96 : 10, 97 : 1, 99 : 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심에서 행사하시는 그러한
권능이란 의미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시는 교리
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경은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
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 : 1-2). 다윗은 이렇게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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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의 율법
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
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
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다윗은 여기서 또한 율법의 다른 유용성도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
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여
기서 예언자는 뇌성(3절), 바람, 소낙비, 회오리바람, 폭풍우 속에서 땅을 뒤흔들
고, 산들을 떨게 하며(6절), 백향목을 꺾으시는(5절) 하나님의 그 위엄있는 음성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마침내는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는 공중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불신자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다른 시편에서도 바다의 무서운 파도에 대해
서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 : 5).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을 향하여 그녀의 백성과 모든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예배를 드리되 유대
인만이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씀하신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요 4 :
22).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
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삼위일체론
(제1권 13장)
제13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
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
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
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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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
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
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
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
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
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
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다.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
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
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
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
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
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
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
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
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
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
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아무도 하나님께
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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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
시라"(히 1 : 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
로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
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라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
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
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
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
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
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히 1 : 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
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
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
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
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
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
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
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
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
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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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
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
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
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
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
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
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
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
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
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
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
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
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
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
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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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
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
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
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
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
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
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
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
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
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
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
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
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
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
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
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
운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
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
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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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
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
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
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
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
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條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
제들을 다루었던가?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
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
"(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
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
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
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14 그러나 제롬은 "본체" (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
(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
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
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
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고 그는 보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
시스" (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
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히포스타
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
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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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
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
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
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
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
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
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
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
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
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
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筆)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
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
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
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
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
심하게 하자.21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
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
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
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
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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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
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
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
"(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
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
셨으니"(요 1 : 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
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
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
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
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
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
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
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 올바르게
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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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
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
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
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
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
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
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 : 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
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
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
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
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
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 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
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
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
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
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
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
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
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
"(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
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 : 2) 그리고 은
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 : 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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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
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
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
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
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
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
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 : 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
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 : 32, 8 : 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 : 3, 히 11 : 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
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
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
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 : 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
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 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 : 26, 참조, 14 : 26). 그리
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 : 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
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
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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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
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
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
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
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
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
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
거하였으며(벧후 1 : 21, 참조, 벧전 1 : 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
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우기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
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
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
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
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
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
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 : 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
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
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
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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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
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
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
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
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
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
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
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 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
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즉 우리가 유
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
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
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
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
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
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
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
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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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
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 : 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
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 : 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
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
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
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 : 21, 욜 2 : 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
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
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
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
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 : 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
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
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5. 인간론
(제1권 15장)
제15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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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
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
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
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
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
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
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
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
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
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
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
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
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
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
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
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
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
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
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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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
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
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
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
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
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
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
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
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
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
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
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
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
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
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
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
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
하게 보여 준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
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
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
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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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
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
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경
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
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
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
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
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
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
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 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
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
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
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
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
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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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 2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
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
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
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
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
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
더(Osiander)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
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
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
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
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
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
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
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
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
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
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
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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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
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
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
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
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
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
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
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
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
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
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
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
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
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
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
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
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
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
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
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
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
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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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
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
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
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
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
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
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
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
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
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
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
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
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
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
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
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
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
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
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
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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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
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
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
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
고 해서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
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
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
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
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
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
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
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
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
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
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
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
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
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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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
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
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
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
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
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또한, 인간
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
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
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
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
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
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
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
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
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
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
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
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
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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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
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
으셨다.
6. 성육신론
(제2권 13장)
제13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해서 칼빈은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
1.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임에 대한 증명함
그리스도의 신성은 분명하고 확고한 증언에 의해서 다른 곳에서 증명했다. 따라
서 내 생각이 잘못이 아니라면,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보의 직책을 완수하셨
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의 인간성이 진실였다는 것을 옛날에 마니교도들과 마
르키온파는 부정했다. 마르키온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지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
다고 공상했고, 마니교도는 그리스도는 천상적 육신을 받으셨다고 공상했다. 그
러나 이 양자를 반박하는 강력한 성구가 많다. 왜냐하면 천상적인 후손이나 유령
같은 사람을 인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을 인해서 복이 있으리라
고 약속하신 것이다(창 12 : 3, 17 : 2, 7, 18 : 18, 22 : 18, 26 : 4). 또 영원한
보좌는 공중(空中)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과 그의 육신의 소
생에게 약속되었다(시 45 : 6, 132 : 11). 따라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1 : 1).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
었으나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해석한 대로 "육신으로
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롬 1 : 3). 같은 사도가 다른 구절에서 그
리스도는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롬 9 : 5). 그렇기 때문에 주 자신도 "사
람"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자주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자기가 참으로 사람의 씨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시
려는 뜻이다. 성령이 이 명백한 사실을 자주 선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쓰며 아주 부지런히 또 단순하게 표현하셨는데, 이 일을 감히 기만으로 더럽히는
파렴치한 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더우기 증언을 더 많이 수집하려
면 그것은 곧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
게 하셨다"(갈 4 : 4)고 하는 바울의 발언이다. 그리스도가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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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느끼며 그밖에 우리의 본성에 있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셨다는 것은 수
많은 증거가 있다. 이 많은 증언 중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신념을 확립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천사들에 관심이 없어
서 그들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히 2 : 16),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와 같
이 "헐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며"(히 2 : 14), 또, 우리는 그와 인연이 있는 덕택으로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신다(참조, 히 2 : 11). 또, "그는‥‥‥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도다. 이
는‥‥‥자비하고 충성된 중보가 되려 하심이라"(히 2 : 17 의역),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 : 15). 기타 무수
한 구절들이있다. 우리가 조금 앞에서 언급한 것도 이 점에 해당한다. 즉, 세상
죄는 우리의 육신을 입은 이가 대속해야 했다고, 바울이 분명히 단언한다(롬 8 :
3) 확실히 이런 근거에서, 아버지가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모두 우리 것이 된
다. 그리스도는 머리시며,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로 자란다(엡 4 : 16). 참으로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기 위하여"(요 1 : 16)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그(그리스
도)에게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요 3 : 34)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우연한 선물에 의해서 그 본질이 더 풍부하게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
석은 모순된 이야기일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다른 곳에서 "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신가(요 17 : 19).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반대자들은 자기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을 제시하지만, 그들은
그 구절들을 심히 곡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입증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
들은 너절한 궤변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되었
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빌 2 : 7-8) 바울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을 근거
로 삼아,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환상(幻像)
을 입으셨다고 공상한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말하는 의도를 전혀 무시한다. 바
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몸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성을 빛내셔도 당연했을 것이지만, 일개의 미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으로서 나타나셨다고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받아 우리에게 복종을 권면하려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직접 자기
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자진해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으며, 이런 비천한 처지에 만
족해서 자기의 신성이 육신의 휘장으로 가리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참조, 빌 2 :
5-7).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처신하셨
는가를 가르친다. 문맥 전체를 보아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워 참으로 인간
적인 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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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빌 2 : 8) 잠시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비치지
않고 사람의 형상만이 낮고 천한 처지로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리스도께서는‥‥‥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벧전 3 : 1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성을 쓰고 연약하셨던 것이 아
니라면 무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약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단언한다(고후 13 : 4). 그리스도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신 후에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는 명백한 말씀이 있다.
그가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받은 사람이 아
니고서는 이런 말이 해당될 수 없다.
마니는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난 둘째 아담이며 하늘에 속한다"고 한 말을(고전
15 : 47-48)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의 몸은 공기(空氣)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늘에 속한 본질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리를 살리는 그 영적인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의 육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정통파 교리는 도리어 이 구절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면, 바울의 주장은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할 것이요,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바울의 강렬한 주장은(고전 15 : 12-20 요약) 무의미할 것이다. 고대의 마니교도
들과 현대의 그 제자들이 어떤 궤변으로 (이 증명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미한 말을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셨다는 의미에서만 "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 이것은 비열한 도피다. 히브리말로 참사람을 "
인자"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국어의 이 용법
을 보존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또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 없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시편 제8편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
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
까"(시 8 : 4, 히 2 : 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는 죽
을 운명의 부친에게서 직접 나신 것이 아니지만, 그의 근본은 아담에게서 유래했
다. 그렇지 많다면 내가 이미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심
은" 그 자녀들을 자기에게 모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히 2 :
14)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똑같은 본성을
나눈 동지와 동참자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도 한다(히 2 : 11상). 이 말씀
에 곧 이어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므로(히 2 :
11하), 문맥으로 보아 그 뜻은 본성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
서 신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했으니, 이렇게 존귀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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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은총으로 낮고 부끄러운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한다(히 2 : 11
하). 그뿐 아니라,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리라는 그들의
항의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헐육에서 나지 않고(참조, 요 1 : 13), 믿
음을 통하여 영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육신만으로는 형제 관계가
유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영예를 사도는 신자들에게 국한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같은 원천에서 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
컨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사이에 끼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맏아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서투른 논쟁을 일으키려 한다. "형제 중
의 맏아들"이 되시려면(롬 8 : 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에 아담에게서 나셨을 것이
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연령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예의 정도와 숭고한 권능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고(히 2 : 16) 인간의 본성을 취하
셨다고 하며, 그가 인류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는 의미로 이렇게 지껄이지만, 이것
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려 주신 영예를 더욱 높
이려고 우리와 천사를 비교하며, 우리를 천사들보나 더 귀히 여기셨다고 한다.
모세의 증언을 -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증언을(창 3 : 15) -
신 중히 고려한다면, 이 논쟁은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뿐 아
니라, 인류전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를 얻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기리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셨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
도는 여자가 절망에 압도되지 않도록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과 참된 인간성. 3-4)
3.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불합리한 생각을 폭로함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와 다윗 몸의 소생이라고 하는 증언들을 우리의 논적
들이 풍유라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사악한 짓이다. "씨"라는 말을 풍유로 쓴 것
이었다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구속자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뿐이라
고, 즉 그리스도뿐이라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에(갈 3 : 16),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미리 약속되었다가 드디어 자기의 때가 되어 나타
나셨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롬 1 : 3). 바울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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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기 전에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제 9장에서는 그를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따
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롬 9 : 5). 그런데, 만일 그가
참으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신 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그 태중의 아이"라고(눅
1 : 42)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네 몸의 소생이 너의 보좌에 길이
있으리라"고 한 약속은(참조, 시 132 : 11 의역 ; 삼하 7 : 12 ; 행 2 : 30) 무슨
뜻인가?
그런데 그들은 마태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무용한 이론으로 궤변
을 떨고 있다. 마태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선조를 기록했다
(마 1 : 16). 그러나 그는 당시에 잘 알려진 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즉 마리아
가 요셉과 같은 가문에서 났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
는 것을 밝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가는 이 점을 더욱 역설하는 의미
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은 전 인류에 공통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의 선조인 아담에게서 나셨다고 한다(눅 3 : 38). 족보
를 볼 때에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서만 다윗의 후손이심
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새 마르키온파는 자기들의 오
류를 감추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는 무에서 육체를 취하셨다는 생각을 증명하
기 위해서 -여자에게는 "씨"가 없다고 거만한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연의 원칙을 전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며, 그들이 제출하는 이유도 허무한 것이어서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과 의학에 속한 문제들을 논하지 않고,
그들이 성경에서 끌어 오는 항의만을 논박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론과 여호야다
가 유다 족속에서 처를 취하였은즉(출 6 : 23 ; 대하 22 : 11), 만일 여자에게 생
산하는 씨가 있다면 지파 간의 차이에 혼란이 생겼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관해서 혈통을 따질 때에는 남자측의 혈통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남성의 우선적 지위는 여자의 씨가 생식 행동에 참가한
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해결책은 모든 족보에 적용된다.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할 때에는 남자
들의 이름만을 기록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여자는 "남자" 가운데 든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성은 항
상 남자의 성을 따르기 때문에 여자는 남편의 아이를 낳는다고 말한다. 자녀의
귀천은 부친의 신분에 따라 정한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우위(優位)가 인정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그와 반대로 "후손은 태(胎)를 따른다"고 법률가들은 말한다. 이
것을 보면 어머니의 씨에서 자식이 난다고 추론해야 될 것이다. 어머니를 "생산
자"라고 하는 것이 옛날부터 모든 민족에 공통한 말이다. 이것은 외숙과 질녀의
결혼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법과도 일치한다. 이런 법이 옳은 것은 근친(近親) 결
혼이 되겠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만 다르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가 결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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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수동적인 힘을 돌린다는 것을 나
는 인정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고 나는 대
답한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여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났
다고 하기 때문이다(갈 4 : 4).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염치도 버리고 방
자하게 묻는다. 그리스도는 처녀의 경도씨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냐고. 나는 그
가 어머니의 피와 결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곧 추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라고.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할 때에(마 1 : 5) 유사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서 처
녀 마리아를 그리스도가 통과한 수로(水路)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놀라운 생산방법과 보통 방
법을 구별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요셉이
야곱에게서 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한다. 마태
가 하는 말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생각으로, 마태는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한 가지 일만으
로 만족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마리아가 요셉의 친척(이고 따라서 다윗의 족속)
이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인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4. 참된 인간이나 죄가 없으시고, 참된 인간인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를 누르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유치한
훼방이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후손이 된다면, 아담의 후손은 예외 없이 죄 아
래 있다고 하는 일반 원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글에 있는 비교는 이 곤란을
곧 제거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
나니‥‥‥그와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느니라"고한다(롬 5 :
12,18, 15 의역). 이와 일치하는 다른 비교도 있다. "첫째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 속한 자연인이요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으니 천상적이라"(고전 15 : 47
의역).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고, 같은 뜻을 가르친다(롬 8 : 3,4). 이와 같이 사도
는 그리스도와 보통 인간을 훌륭히 구별하고,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치하게 지껄인다.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
도 없고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불결하지
않고 남자의 씨만 불결한 것이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나셨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던 생산과 같은 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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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오염이 없는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지 확실한 사실
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촉
구할 때에는 그의 참인간성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순결하시
다고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도(19
절) 신성에 대해서 하는 말씀일 수 없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전염이 없었다
고 하지만, 아담의 씨에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식
그 자체는 불결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에서 생긴 우발(偶發)적인
성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회복할 사명을 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부패를 면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불합리하지 않느
냐고 우리에게 지적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는 지
상적인 신체라는 좁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철면피다! 무한한 본질을 가진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더
라도, 우리는 그가 그 속에 갇혀 계셨다고는 공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일
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시지
않고서 자의(自意)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시에, 맨 처음부터 하신 것과 똑같이, 끊임없이 우주에 편만하셨다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의 삼중직무론
(제2권 15장)
제15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
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
직을 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3중의 구원 활동 : 첫째, 예언적 사명. 1-2)
1. 이 교리를 이해할 필요성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에 대한 성구들
어거스틴의 바른 논술과 같이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지만, 신자들
과 공통된 근거가이 없고, 이것은 교회에만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심사 숙
고할 때에, 우리는 이단자들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만 찾아볼 뿐이고, 그가 실제는
그들 사이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하나님의 아들, 세계의
구속자"라는 말을 교황주의자들이 드높이 외치지만, 그들은 이름만 허망한 구실
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의 권능과 존엄성을 빼앗으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 : 19).
그러므로 믿음이 구원의 확고한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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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해야 할 원칙이 있다. 즉, 아버지께서 그리스
도에게 임명하신 직책에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
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알더라도 그 목적과 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면, 그 아는 것이 무가치할 것이다. 교황파주의자들도 이 이름들을 쓰지만, 이 칭
호들이 각각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흥미도 없고 효과도 없
이 사용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연달아 보
내시며, 구원을 위해서 충분하고 유용한 교리도 알려 주셨지만, 경건자들의 마음
에는 항상 메시야가 와야만 이해의 완전한 광명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가
득했었다. 진정한 종교를 깨달은 일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이 기대가
침투했었다는 것은 "메시야가‥‥‥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한
여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요 4 : 25). 또 이것은 유대인들의 경솔한 억측이 아
니라, 분명한 계시에서 배운 믿음이었다. 이사야의 말은 특히 유명하다. "내가 그
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 : 4).
다른 곳에서 이사야는 그를 "지혜가 위대한 사자(使者) 또는 해석자"라고 불렀다
(사 9 : 6, 28 : 29 ; 렘 32 : 19의 융합).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복음의 교훈의
완전함을 찬양해서 우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
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히 1 : 1), 다음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첨부하는 것이다(히 1 : 2). 그러나 예언자들
의 공통된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 기간에 신자들은 저
정상적인 혜택을 빼앗겼다고 탄식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
도 다시 없으며‥‥‥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시 74 :
9).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림이 멀지 않게 되었을 때에 "이상(異象)과 예언자가 응
할" 기한을 다니엘에게 지정하셨다(단 9 : 24). 그 뜻은 거기서 언급하는 예언이
권위 있게 확립될 뿐 아니라, 모든 계시의 최고의 완성이 가까웠으므로, 얼마 동
안 예언자가 없더라도 신자들이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사명의 의미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이 세 가지 직책에 관계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
다.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과 왕뿐 아니라, 예언자도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
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야"라는 존칭은 약속된 중보자
에게도 주셨다. 다른 데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특히 그의 왕권에 관해서
또 그 왕권 때문에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예언
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무
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자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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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될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날을 전파하여"(사
61 : 1-2. 참조, 눅 4 : 18).
그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총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임명된 것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직분을 가
진 다른 교사들과 그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
다. 즉,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받으셔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끼워 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하늘
에서 우뢰같이 들려 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고 하신 말씀은(마 17 : 5. 참조, 마 3 : 17) 모든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 각별한
특권으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 확
산되어, "너희 아들들이 예언하며 너희 딸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는(욜 2
: 28 의역) 요엘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
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며(고전 1 : 30), 다른 곳에서 "그의 안에 지식과 총명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할 때에(골 2 : 3 의역), 그는 조금 다른 뜻을 생
각한다. 즉,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
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이
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내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귀한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한다
(고전 2 : 2 의역). 복음의 단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의 태도는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
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
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왕으로서의 사명-그 영적 성격. 3-5)
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이제부터 왕권을 논하겠다. 이 문제를 말할 때에 먼저 그것은 본질상 영적 성격
을 가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
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원성은 다니엘서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며(단 2 : 44),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백성의 구원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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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33). 그러나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
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개인 교인에 관한 것이
다. 시편에 있는 말씀은 첫째 종류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나의 거룩
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시 89 : 35-37).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겠다고 여기서 확실히 약속하신다. 이 예언의 진
정한 성취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죽은 직후에 나라의 대부분
에 대한 권위가 붕괴되고, 한 사사로운 개인에게로 넘어가서, 다윗 가문에 수치
를 주었기 때문이다(왕상 12장). 그 후에 권위는 더욱더 쇠퇴하여 드디어 슬프고
부끄러운 멸망이 되었다(왕하 24장).
이사야가 "그의 세대중에 누가 말하였으리오"라고 외치는 것도(사 53 : 8) 같은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
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업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
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 다윗은 원수들이 대담하게 하나님
과 그 기름부으신 자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웃으면서, "군왕들과 백
성이 헛되이 분노하도다‥‥‥하늘에 계신 자가 강하여 그들의 공격을 넉넉히 분쇄
하리라"고 한다(시 2 : 2, 4). 이와 같이, 그는 교회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신자
들에게 다짐하며, 교회가 압박을 받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다른
데서 다윗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한다(시 110 : 1). 아무리 많은 강적들이 교회를 전복할 음
모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영원한 왕으로 임명하신 그 확고 부동한
결정을 전복시킬 힘은 그들에게 없다고, 다윗은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멋은 모두 이 세상과 시간에 속했으며 참으로 순식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들어올리기 위해서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언명하신다(요 18 : 36). 간단히 말하
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이 말
에서 용기를 걷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시대에 이 은
총이 완전히 결실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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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 힘과 효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투쟁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어
렵고 가련하다는 사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된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
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
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
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결하는 풍부한 오락-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의 생활
에 있다. 이 세상에서 한 국민이 번영하며 평안하려면, 한 쪽으로는 모든 재물이
풍부하며 국내가 평온해야 하며, 또 한 쪽으로는 외적에 대한 방위 태세가 강해
야 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풍부히 주시며, 영적 원수들의 모든 공격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로 백성의 방위력을 강화하신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내외 양면으로 통치하실
때에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
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없는 것이며, 이 처음 받는 결실에 의해서 우리는 완
전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
면 우리는 같은 성령의 힘을 믿고,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
에서 항상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파에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볼 수 있게 임
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눅 17 : 20,21).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왕이라고 공언하시
고, 자기 아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농담 삼아 그의 표적을 보자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각각 자기의 양심을 들여다 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성
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롬 14 : 17).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땅에 붙은 일에 마음이 너무 쏠린 사람들이 미련한 영화를 꿈꾸지 못하게 하시
려는 뜻이었다. 간단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가르친다. 그 나라는 지상적이거나 육적인 것이어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
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영생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과 기한(飢寒)과 멸시와 비난과 그 밖의 괴로움이 있는 이
세상을 참고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자-즉, 우리 임금
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하게 버려 두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며, 드디
어 우리는 싸움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아 개선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자기
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모두 우리와 나누시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지금 그
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대한 미(美)로 장식하시며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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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
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영적인 본질 : 그리스도와 성부의 주권
그러므로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쓰는 것은 기름이나 향기로운 연고가 아니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
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이다(사
11 : 2). 이것이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시편이 선언하는
그 "즐거움의 기름"이다(시 45 : 7). 왕이 이와 같이 출중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
두 가난하고 굶주릴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가 풍부하게 되신 것은 자
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풍성한 것을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며(요 3 : 34),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하려든 것이라고 한다(요
1 : 16). 이 원천에서 바울이 말하는 풍성한 은혜가 흘러나온다. "우리 각 사람에
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 : 7). 이 발언들은 그리스
도의 나라는 성령에 있고 지상적인 쾌락이나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한 말을 충분히 확인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참가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려
야 한다.
이 거룩한 기름부음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세례 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즉,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그의 위에 와서 머물렀다 (요 1 : 32 ; 눅 3 :
22). 성령과 그 은사를 "기름부음"이라고 부르는 것은(요일 2 : 20, 27) 새로운 일
이 아니며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방법은 이것뿐이
기 때문이다. 특히 하늘 생명에 관해서는, 성령이 주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그 생명력이 한 방울도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
에게 심히 필요한 하늘 보화가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신자들은
왕의 힘을 받아 불굴의 자세를 견지하며, 왕의 영적 보화가 그들에게 풍부하다.
따라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 후에‥‥‥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고 한 바울의 발언은(고전 15 : 24)
우리가 말한 이 영원성을 손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들 자신도‥‥‥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5 : 28). 저 완전한 영광 안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현재와 같지 않으리라
고 바울은 말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아들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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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 우리를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며 보호하시며 도우신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헤매는 그 짧은 기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
에 서 계시며,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굳게 결합하게 하시는 것
이다.
또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를 아버지의
대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이 대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가진 분이
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이를테면 간접적으로 통치하며 보호
하기로 정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엡 1 : 20-23).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하나님 아버
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 9-11). 이런 말로 바울은 또 그리스도의
나라와 현재 질서를 칭찬하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연약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때에는 교회를 수호하는 그리스도의 임무가 완수될 것
이므로, 하나님 이 친히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리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같
은 이유로 성경은 보통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주권을 행사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
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으나(참조, 고전 8 : 5),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
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
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8 : 6). 이런 근거에서 이 분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자기는 교회의
왕과 입법자라고(사 33 : 22) 선언하신 이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권능을 "아버지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아들이 시종 여
일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배하신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는 무슨
까닭에 중보의 위격을 취하셨는가? 그가 아버지의 품과 무한한 영광을 두고 내
려오신 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종할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열성을 다하여 복종해야 한다. 그
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또 공손히 복종하는 경건자들을 위하여 왕과 목자
의 임무를 겸행하신다. 그러나 그는 저희 모든 자들을 질그릇 같이 부술 철장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리는 듣는다(시 2 : 9). 또 "그는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는 말씀도 듣는다(시
110 : 6). 우리는 현대에서 이런 일의 예를 몇 개 보지만, 완전한 증명은 최후 심
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 심판은 또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조치라고 보는 것
이 마땅할 것이다.
(3. 제사장직으로서의 사명 : 화해와 중보 6)
6.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그 목적과 효험을 간단히 말하겠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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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순결하고 흠없으신 중보자로서 자기의 성결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키시려
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가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
며, 또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에 대하여 노하신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
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
해서 속죄가 그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직책을 다하려고 그리스도가
제물을 가지고 나오셔야 했다. 율법하에서 제사장이 피를 들지 않고 성소에 들어
가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히 9 : 7) 이것은 제사장이 신자들의 대언자로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죄를 대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
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게 하려는 뜻이었다(레 16 : 2-3). 사도는 히브
리서 7장부터 거의 10장 끝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길게 논한다. 그의 주장을 요
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
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한다(히 9 :
22). 하나님께서는 "변치 아니하실" 엄숙한 행세로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시 110 : 4. 참조, 히 5 : 6, 7 : 1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 말씀으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아시는 것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
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효험과 혜택을 얻으
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영원한 중재자시며, 그의 호소에 의해서 우리는 호의를 얻는다. 기
도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경건자들의 양심의 평화도 여기서 생긴다. 그들은 아
버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심하고 의지하며, 중보자를 통해서 성별된 것은 모
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율법하에서는 동물을 제물
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서 한 분이 제
사장과 제물을 겸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에 합당한 것이
달리 없으며, 독생자를 하나님에게 드릴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행동하시는 것은 영원한 화해 원칙에 의해서 아버지
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며 친절하게 되시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위
대한 직책에서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시려는 뜻이다(계 1 : 6). 우리 자신은 오염
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
유를 하나님에게 바치며, 자유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
양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하며 향기롭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저희
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신 뜻은 이것이다(요 17 : 19), 우
리는 원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우리
를 아버지 앞에 성별하셨으므로, 오직 그의 성결이 몸에 가득히 배어 순결하고
정결한 자로서 심지어 거룩한 자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듯이, 성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때문이다(단 9 : 24). 우리는 이 기름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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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 당시에 사용된 그림자 같은 기름 부음과의 대조에 주의해야 한다. 마치 천
사가 "그림자를 흩어버리면 참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리라"고 말한 것
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
물로 바치노라고 한 자들의 조작은 더욱 가증하다. 교황파는 매일 이 짓을 시도
하며,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노라고 생각한다.
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제2권 16장)
제16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
는가?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6.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도 독특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의견뿐 아니라, 하
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신 21 : 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
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또 율법
에서 희미하게 예시된 일이었다. 그런데 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속죄 제물을 "
아슈모트" 라고 불렀다. 이것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맡아 쓰고
가는 속죄 염소와 같다는 것을 알리셨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 제물에서 상
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으로서(사 53 : 10), 곧 선
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내주셨다. 그 제물 위에 이를테
면 우리의 오점과 벌을 던져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증언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
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
이니라"고 가르친다(고후 5 : 21).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
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롬 8 : 3) 같은 뜻
인 듯하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 제물로서 죽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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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그의 희생으로 모든 배상을 치른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
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말뜻이 여기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사 53 : 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
하다. 즉, 더러운 불의를 깨끗이 하려는 사람이 책임 전가에 의해서 그 불의를
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박히신 십자가가 이 일을 상징한다는 것은 사도의 증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
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
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 :
13-14, 신 21 : 23).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다"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벧전 2 : 24).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
을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죄에서 무죄 방면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수치가 가득하던 십자가가 개선하는 전차로
변한 듯이, 자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승리를 웅장하게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십
자가에 못박으시고‥‥‥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골
2 : 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
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히 9 : 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
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
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
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
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배상이 되었을 뿐 아니
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 : 26, 딛 3 : 5, 계
1 : 5).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사도신경에는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묻히시며"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아래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
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히 2 : 9) 하는 사도의 말도 이런 뜻이다. 그리스도께
서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죽음
으로 우리를 구출해서 확실히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즉, 그가 이를테면 죽음이 자기를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죽음의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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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연못에 자기가 빠져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불원에 삼켜 버렸
을 그 죽음을 자기가 삼키시려는 생각이었다(참조, "죽음을 삼키심"은 벧전 3 :
22의 불가타역에 있음).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
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
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
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히 2 : 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장사지낸 바 된것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
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
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롬 6 :
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롬 6 : 4),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
가에 못박혔으며"(갈 2 : 19, 6 : 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골
3 : 3). 이런 발언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범을 나타내 보이라고 우리에
게 권면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용하고 무효한 것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내포된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한
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묶여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교리에 대한 설명. 8-12)
8. "지옥에 내려 가사"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
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어귀가 교회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은 때도 있
는 것 같다. 그러나 교리의 요점을 설명할 때에는 이 어귀를 보존해야 한다. 매
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적
어도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어귀를 생략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이 어귀는 얼
마 후에 삽입되었고, 교회 내에서 즉시 통용되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관례가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표현이 모든 경건자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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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만은 확실하다.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
만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
하지 않다. 도리어 이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
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신조가 우리의 구속 전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명백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
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신조에 아무 새로운 말
이 없고,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의 뜻에 대
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은 "무덤"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를 그들에게 찬성
하지 않도록 설복한다. 그 자체로서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분명하고
쉬운 말로 표명한 다음에, 그것을 밝히기보다 도리어 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되풀
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짓이었겠는가! 같은 문맥에서 같은 일을 위해서
두 가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후자는 전자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가 장사한 바 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될 것인가? 둘째로, 우리 믿음의 중요한 점들을 적절
하고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글에 이런 쓸데없는 반복 문구가 잠입할 수 있었
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 사람이라면 곧 내게
찬성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 그리스도는 음부 세계에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해석이 달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들
에게 내려가서 이미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해방하
셨다고 한다.
이 해석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편에서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
장을 꺽으셨다"라는 말씀을(시 107 : 16) 인용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
로, 스가랴의 "그가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다(슥 9 : 11 의역).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리라
는 예언이며, 스가랴는 백성이 당한 바벨론의 비극을 깊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비
교하는 동시에, 교회 전체의 구원은 낮고 깊은 곳에서 석방되는 것이라고 가르친
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럭저럭하는 중에 그곳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해서 "
림보"라는이름까지 붙였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저술가들이 반복했고, 지금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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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사람이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
들의 영혼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
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 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 : 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
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영
혼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
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자들과 불신자들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양자를 무
차별적으로 혼동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그
리스도의 죽음을 알았다고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10. "음부에 내려가심"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
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육체의 죽음뿐이
었다면, 그 죽음에는 효험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천벌을 받으며, 그 진노를 진정시키며, 그 공정한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실 필요
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직
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다. 조금 전에 인용한 예언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
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
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다(사 53 : 5). 예언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가 악
인들을 대신해서 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
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벌을 받으셨다-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 : 24). 그러므로 그
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인
들에게 가하신 죽음을 그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 뒤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순서가 이렇게 뒤집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너절하고 가소로운 반대를 하는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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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즉,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에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
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
사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므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
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한 것
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되었
다고 한다(벧전 1 : 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
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롬 4 : 25)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그 뜻을 바꿔 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
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의가 소생하며 회복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이 싸움에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어 주
실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덕택
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
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 : 4) 그 때에 그가 드디어 하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
고, 이 권능은 그의 신성(神性)을 분명히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도 바울은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같은 뜻으로 가르친다(고후 13 :
4).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성을 논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즉시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
을 알려 하여"라고 첨부한다(빌 3 : 10). 이와 긴밀히 일치하는 것이 베드로의 발
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 : 21). 그리스도의 죽음
에 의해 지탱되는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부활에서 나타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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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부활"이란 말에 대해서도 부분
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이 표현법이 적용된다. 즉, 죽음과 별도로 부활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심으로써 승리자의 상을 타셨으므
로 -즉, 부활과 생명이 있게 하셨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
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고(고전 15 :
17) 주장하는 것은 바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가 일으키는 공포심
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한 후에, 더욱 역설하는 의미로, 확실히 죽
으신 이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의 중보로서 하나임 앞에 나타나신다고 첨부한
다(롬 8 : 34).
그뿐 아니라,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그의 십자가에 참가하는 데 달렸다고 우
리가 이미35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거기 부합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합하여 접붙임이 된 것을 그
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
는 말한다(롬 6 : 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골 3 : 3) 우리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어야 한다는 증명을 얻
어낸다(참조, 골 3 : 5).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근거
로, 우리는 지상의 일이 아니라 위에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다(골 3 :
1-2). 이런 말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라고
권고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하여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
다.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셋째 혜택도 받는다. 즉, 그의 부활이 실증하는 일종의 보
증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 : 12-26에서 자세히 논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 주의해
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을 겪으셨고, 그가 죽을 인간으로서
입으셨던 그 육신으로 영생 불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4. "하늘에 오르사"
부활과 승천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지상
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영광과 권능을 더욱 완전히
나타내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나라를 창건하신 것은 비로소 승천하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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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리스도는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엡 4 : 10). 거기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훌륭
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심으
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다. 지상에 우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
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요 7 :
37),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믿는 자들에게 계시
지 아니하시더라"고 첨부했다(요 7 : 39 의역). 주께서도 친히 이 점을 제자들에
게 확인하셔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 : 7). 그는 육신
으로 계시지 않는 문제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요 14 : 18-19, 16 : 14).
사실, 그들은 그때에 더욱 확실한 체험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위
와 권능은 신자들을 축복 가운데 살며 기쁨으로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셨으며, 얼마나 그의 큰 권능을 발
휘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며 원수들을 흩으셨는가를 안다. 그러므로 승천하심으
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게 하셨지만(행 1 : 9), 그것은 아직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
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뜻이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일을 세상 끝까
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
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
급되었다. 나는 내 말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점을 설명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가, 그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는 순수한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에 따라 육체적 임재로
이 일을 하려 하셨다. 그가 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데서 어거스틴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는, 그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 : 20) 실현될 것이다. 말씀이 취하신 육신에 의해
서는, 처녀에게서 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며 십자
가에서 내리워 세마포로 싸여 무덤에 눕히며 부활로 나타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 : 11) 실현되었다.
왜? 그는 40일 동안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이 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승천하셨고(행 1 : 3, 9) 여기는 더 계
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막 16 : 19). 그러
나 그의 숭엄성의 임재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기 계신다(참조, 히 1 : 3).
그러므로 숭엄성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임재에 관해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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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말씀이(마 26 : 11) 바르다. 교회는 육신의 임재로는 그리스도를 며칠 동안
모셨고 지금은 믿음으로 모시며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5.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결과적으로 곧 이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는
임금들이 정사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기 옆에 앉히는 데서 왔다. 그와 같이, 하나
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
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되셨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시며, 위임된 정권을 엄숙히 장악
하셨으며, 일단 차지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내려오실 때까지 통치를 계속
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해석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
리스도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 :
20-21. 참조, 빌 2 : 9), 또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고전 15 : 27),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 : 22). 이것으로 저 "앉아 계시
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숭엄성을 우러러보아
경탄하며, 그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
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르치려고 사도들은 자주 이 일을 회상해서, 만사는 그
리스도의 결정에 위임되었다고 했다(행 2 : 30-36, 3 : 21, 4장, 히 1 : 8). 그러므
로 이 말은 그의 축복된 처지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행 7 : 55)
중요한 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된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의 숭엄한
권위였기 때문이다. "앉아 계시다"는 것은 하늘 심판대에서 주재하고 계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미래에 다시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는 이를테면 비천한 육신 밑에 숨겨졌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가 저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눈에 보이는 임재(臨在)를 심
사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
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행 1 : 11, 마 24 : 30). 그리고 그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숭엄성과 영생 불사의 광채와 신성(神性)의 무한한 권능과 함께 일단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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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천사들을 데리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날에 저리
로부터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 25 : 31-33). 생사간에 아
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
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 4 : 16-17).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저술가들 중
에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는 물론 안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설명은 평이하고 분명하므로 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 신경은 분명히 보통 사람이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뜻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한 바울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히
9 : 27). 최후 심판 때에 아직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은 겪
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할 변화는 죽음과 같을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불러도 부
적당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는 것
은 확실하다(고전 15 : 51).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죽을 운명의 생명이 "순
식간에" 사라지며 삼켜 버리고, 새로운 본성으로 직접 변화하리라는 것이다(고전
15 : 52). 이렇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에 호출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바르다. "그
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전 4 : 16-17). 그런데
이 표현은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설교와(행 10 : 42)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엄명에서(딤후 4 : 1) 따온 것 같다.
9. 칭의론
(제3권 14장)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
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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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
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
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
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
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 : 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 : 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 : 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 : 1, 롬 3
: 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 : 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 : 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
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
이다(갈 5 : 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
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
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
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
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
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
키시며(요 5 : 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 : 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
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
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 : 4-5). 다른 곳에서는 아브
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
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 : 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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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 : 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
는 의미에서(롬 11 : 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
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 : 8-9 참조) 증명
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
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
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
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
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
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
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
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
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 : 9) 인
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
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 : 4-5,7)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는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
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
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이 주어지
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는 다른 구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롬 11 : 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 : 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
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인가?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 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
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
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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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모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
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
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
로 의지하사"(사 59 : 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다른 예
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
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 2 : 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
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
시는 원수들이-또 그들의 행위가-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는가?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
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한다(롬 5 : 10, 골 1 :
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
인가?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이 아니라고(요일 4 : 10) 성실하게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
해서 똑같은 뜻을 가르치셨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 : 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
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
을 받는다고 생각한다.7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
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
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
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6 : 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벧
전 1 : 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
을 받는다면, 이 정결(淨潔)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
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
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
1 : 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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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틀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 둘째 종류와 셋째 종류가 포함된다. 이 두 종
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
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
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중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
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
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한
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 "제사장에게 율법
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
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
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
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
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 : 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일평생 악하게 산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
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
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
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
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
름을 제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 이
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르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
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신다. 부정한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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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備)하였
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
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 1 : 13-16, 58 : 1-5 참
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신다. 율
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
서 가르치신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노엽게 할 것이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
기" 때문이다(잠 15 : 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9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
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
다(창 4 : 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
고 지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신다. 예레
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 5 : 3)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
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
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다(행 15 : 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
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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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넷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
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
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
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바꿔 말하
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
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
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
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
고 한다(전 7 : 21, 왕상 8 : 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
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競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
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욥 25 : 5). 성자
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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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겔 18
: 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 2
: 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
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
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
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
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
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
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
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
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
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
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
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
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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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
언하신다(롬 4 : 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
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
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
(엡 2 : 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 2 : 4) 예언자
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
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 : 2, 31
: 1, 롬 4 : 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
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 : 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
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
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
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
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
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엡 2 : 8-9).
17.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
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人)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質料人)은 그리
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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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
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
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
라"(롬 3 : 23-24, 엡 1 : 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
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롬 3 : 24). 우리의 의를 실현하
기 위한 질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롬 3 : 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
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
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 3 : 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
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 1
: 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
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
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
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
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8.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
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
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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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
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
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
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즉, 그 행위가 하나
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
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
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
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
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
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 : 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9.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
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
이나(잠 14 : 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
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
고 하는 사실은(창 24 : 40, 왕하 20 : 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
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
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
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
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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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 : 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
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
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
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 : 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
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
고 이유를 말한다(롬 8 : 37).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 : 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 : 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
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
는 것은 하나 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
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
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
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
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
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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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
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動力人)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
인(質料人)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
적인(目的人)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면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
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
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
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
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 : 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 6 : 23) 가르치
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
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
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
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 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
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
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
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
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
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10. 선택론
(제3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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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이것이 가져오는 이로운 결과 : 호기심의 위험성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며, 전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또는 같은 정도로 환영받는 것은 아니
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매우 놀랄만큼 깊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
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많은 사람이 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 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스스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음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깊은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진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
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
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
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
위를 일체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하신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는다면,
꼭 알아야 할 다음의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한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
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
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롬 11 : 5-6
참조). 오직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명백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것
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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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바울은 분명하게, 백성 중에서
남은 일부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 한해서, 하나
님이 다만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그 구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실 수 없으므로 보상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문을 닫고 아무도 이 교리를 맛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꼭 같이 해한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
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 또 그리스
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공포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무수한 위
험과 함정과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
서 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신다(요 10 :
28-29).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끊
임없는 공포심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세 가지 은혜를 모르고,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우리 사이
에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준다.
이 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지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드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피조물 사이에서 발견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놀랍게
도 복된 예정의 품속에 그리고 또 가련한 정죄받은 대중 속에 교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서론으로서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종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 그대로 버려 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각처
에 있고, 그 중에는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
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의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겠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께
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
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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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 제시하셨다.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신 범위 내에서 계시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 예정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
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 주께서 그의 위대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
하셨을 때에(요 16 : 12), 그 분께서는 조금도 원망을 품으시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계속해서 전진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끝날이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께 대해서 알아도 좋은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주에 대해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주
는 빛은 주의 말씀뿐이다. 만일 이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곧 모든 경
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바른 길을 벗어나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끄러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점을 명
심해야 하는데, 즉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
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 12 : 24 참조) 또는 어
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자. 여기에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이8 있기 때문이다. 알려고 갈망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심
지어 치명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차라리 자진해서 묻지 않는 것이 좋다. 경
박한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에는,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는 생각으로 억
제하는 것이 종을 것이다. 즉, 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은 것과 같이, 호기
심으로 영광을 탐구하는 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25 : 27 참조). 이
오만 무례한 행동은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뿐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단념해야 한
다.
3. 둘째 위험성 : 선택의 교리에 대해 걱정스런 침묵하는 것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
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심히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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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
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지성
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
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 것
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
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
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
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
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
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다. 그들이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
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라고 하는(잠 25 : 2)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
으로 보아서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
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침착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
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
게 속하였나니"(신 29 : 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도록, 모세는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또 그는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
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
한을 받는다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겨야 할 것이다. 완악한 인간은, 하
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위(位)가 있다고 들었을 때에 못지 않게 교만
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5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
에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는다.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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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한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
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
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정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
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
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
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 게다가 이
점에 있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생각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적당한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
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
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
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
지지 않도록 하면서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
다.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
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
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
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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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설을 묻어버린다.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한
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앞에 항상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미래나 과거가 아
니라 모든 것이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
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서는 모든 것을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
주전체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
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
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
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
는 것을 밝히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 : 8-9). 그 구별하신 것은 모
든 사람이 밝히 알 수 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나무와도 같은 아브라
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
다. 다만 모세가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우수한 것은 오직 하
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
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
이라고 한다(신 4 : 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
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신 7 : 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 : 14- 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
되었으므로(신 7 : 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
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신 23 : 5). 신
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
화로다"(시 47 : 4)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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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
상 자신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
다고 책망하신다(출 32 : 9, 신 9 : 6 참조). 예언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
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
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다(암 3 : 2).
여하간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연결시키려는 사람
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한 백성을 총애하신 것
을 보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 사람들까지도 총애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
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를 할 것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서 모
욕의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
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
야 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 원칙을
상기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 : 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
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구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
려는 것이다.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
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고 한다(시 105 : 6). 하
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그렇
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시 105 :
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리와 일치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 44 : 3) 그런데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포함
한 비밀한 선별을 의미한다는데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사무엘
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 : 22)라고 백성들에게 소
망을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택
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 :
4)라고 하면서 무장을 갖춘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서, 첫째 해방과 둘째 해방,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은혜로 확인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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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
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 14 : 1). 예언자는 미래를 묘사
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보였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
인데, 그것은 그 순간에는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부동하
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여(사
41 : 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
속됨을 역설한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
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한다(슥 2 : 12). 마치 하나님께서 혹
심한 징벌로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중단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
자체는 여전히 침범할 수 없다.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이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 성질을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
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이-거의 모두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다. 하나
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똑같은 일례이다. 이 일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
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 : 67-68)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이 변경을 통해서 밝히 드러낸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된 지위에서 제
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시편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
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 : 20)라고 언
급되어 있다. 두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
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
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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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거
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충하고 불경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 1 : 2-3, 롬 9 : 13)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
지께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 즉, 거룩한 뿌8??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
보다 낮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그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
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 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 밖에 해
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저 독특한 후손으로 인정된다
(롬 9 : 7-8, 갈 3 : 16이하 참조). 선택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였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그러
므로, 선택의 효과가 나타나며 참으로 영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올라가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
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
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서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
지,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고(롬 9 :
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말 1 : 2) 하신 말씀
은 이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예언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
을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
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바울이 관심을 갖는데(롬 9
: 27, 11 : 5, 사 10 : 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하여 사라지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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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
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
만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
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했지만(신 32 : 9, 왕상 8 : 51, 시 28 : 9,
33 : 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
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
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신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
해서도 하나님의 신실은 배제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롬 11 : 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
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
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공통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주신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
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
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갈 4 : 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말은 반드시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이 영
적 후손들에게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
으로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구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선택 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
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
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걱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흠하면
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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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
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
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다. 그런 공상은 말
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검토하겠다.
11. 교회론
(제4권 1장)
제1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體)가 되는 진정한 교회 : 우리는 이 교회와 연
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체가 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1. 교회의 필요성
먼저 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
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향상시키려면 무지하고
게으르고 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을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
(엡 4 : 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
를 주셨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
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돈독 하는데 매우 유익한 보조 수단임을 느낀
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적절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
다.
따라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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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일이 교황 제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그 부패한 상태를 경건한 독자
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선 교회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
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
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
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막 10 : 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
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율법 하에서 이렇게 했을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의 증거와 같다(갈 4 : 26).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조의 이 항목은 또한 어느 정도 외면적인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는 각각 하
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대개 이 구절을 빼놓았지만 그것
은 옳지 않은데, 그 구절은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성
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그리스도
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
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사람의 사유재산이 허락되는데, 이는 사람들 사
이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산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행 4 : 32) 신조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 : 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라
는 것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애로 묶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들이 받는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일에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근거는 자기가 교회의 지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
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의 조직
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동요되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똑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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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둘째, 교회는 영원 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끝
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욜 2 : 32, 옵 1 : 17),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 : 5).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며 우리를 하
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란 말 자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
고 확신할 때, 신자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우리의 소망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런 교
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눈으로 분명히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교회를 여전히 존중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
는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
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
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
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 : 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
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와(사 37 : 32)
요엘이(욜 2 : 32) 말한 것과 같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호적에 기록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겔 13 : 9). 그와는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향상하
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한다(사 56 : 5, 시 87 : 6
참조). 그러므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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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106 : 4-5)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의 양떼에 제한시킨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
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보이는 교회 :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표지. 7-9)
7.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앞에서 논한
것으로 이미 명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
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
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모든 사람을 가
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성직을 보
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잠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기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언제나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
고 믿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나중 말한 것,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며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표지를 지니고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버려서는 안 된다 : 분
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지과 권위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지키는 것을 우리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결정했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반드시 결실이 있으며 또 반
드시 성공을 거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즉시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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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말씀이 거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효과
가 나타난다. 어쨌든, 복음 선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례를 경시하지 않
는 곳에서는 우선 교회의 형태가 보이며, 그것은 속임수도 아니요 모호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멸시하거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 그 지도를 반대하거
나 그 징계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그 교리를 버리고 그 단결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심히 중요시하시므로, 교회
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
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 주께서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
시므로 그것이 침범을 당할 때에는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 것으로 믿으신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 3 : 15) 부르는 것은 중
요한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
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는 교회의 봉사와 수고에 의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스스로 한 가족의 아버지
이심을 보이고자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자
기의 신부와(엡 5 : 27) "그의 몸이니‥‥‥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엡
1 : 23)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평범한 찬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욱 이러한 악한 분리를 회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복시키려고 전력을 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맞아 분쇄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우리가
모독적인 불충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을(엡 5 : 23-32
참조) 피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상상할 수도 없다.
(교회가 완전치 못한 거룩으로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
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
하므로 교회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하지 않은 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
국 교회는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옳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
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
니라"(엡 5 : 25-27). 그러나 주께서 주름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가 않다. 그러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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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
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
을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 : 1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
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사 35 : 8, 52 : 1 참조)라고 예언하였
다. 모든 교회 회원이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
나 그들은 거룩과 완전한 순결을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순결을 그들에게 인정하신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 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
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은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롬 9 : 23이하)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이 일은 확실한 약속으로 다짐하셨다. 예컨데,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
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
대에 세우리라 하였다"(시 89 : 3-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 : 13-14) 그리고 "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렘31 : 35-36) 등이 그것이다.
12. 성례론
(제4권 14장)
제14장:성례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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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
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식
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
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
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 1 : 9)라고 되어 있다. 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 : 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 1 : 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
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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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제는 반드시 선행
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
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
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
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
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
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
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
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
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
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
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
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
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
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아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
였다. 그들은 신부가 축성경( 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교리에 관한 것을 조금도 얻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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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라틴어로 말했다. 후케는 미신이 팽
창해서,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쉰 소리로 속삭여야만 축성이 잘된다고 믿게
되었다.
성례의 말씀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훨씬 다르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
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
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말씀 자체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롬 10 : 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하였
으며(행 15 : 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 : 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 : 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게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
임이 확실하다."5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우리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 사도들이 따라서 행한 일 그리고 비교적 순결
하던 교회가 지킨 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어떤 표징을 주실 때에 그 표징과 교훈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교훈이 없으면 우리의 감각 기관은 단순히 표징만을
볼뿐이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
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단순하지 않은 미묘한 내용이 없는 딜레마로 우리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
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
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
라고 한다. 여기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정부 문서나 그 밖의 공문
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가치
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반대자들은 이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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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인"이라고
(롬 4 : 11) 부르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
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성례는 이 약속에 인을 친다
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약속들 자체를 보면 모두 서로 확
인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에 적당하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
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성례와 문서에
찍는 인장은 다르다고 하는 반대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가지가 다 이 세상
물질로 된 것이므로, 성례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인을 찍어 확인하
기에 불충분하며 인장은 보통 무상한 일에 관한 군주들의 법령에 찍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반대론은 구별한다. 그러나 신자는 눈으로 성례를 볼 때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명상에 의해서(내가 비유적으로 암시한) 여
러 단계를 밟아 성례 안에 감취어 있는 숭고한 신비를 향해서 올라간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 "언약"(창 6 : 18, 9 : 9, 17 : 2)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
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겠다. 돼지를 잡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
고 해서 그 잡는 행위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돼지는 아무 내면적 또는 고상
한 신비가 없이 잡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손을 서로 잡게 되는 때가
많은데, 바른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생각
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
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
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어린아이들의 손
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미련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
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
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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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
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
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
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
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
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
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
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
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
는 일 즉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즉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
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
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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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씨"라고 부르셨다(마 13 : 3-23, 눅 8 : 5-15). 황폐해지고 버려 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
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 : 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 : 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
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
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
다고 한다(고전 3 : 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
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
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
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
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
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
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
: 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
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
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
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 : 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
했다(엡 2 : 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19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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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
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
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
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
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
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
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
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
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
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3.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
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군
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
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
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
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
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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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
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
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
(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
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
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
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 : 16, 겔 37 : 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
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
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
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
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
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포도주
나 기름이나 다른 액체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
리 많이 부어도 흘러 없어질 뿐이다. 그릇 밖에는 온통 묻을지언정 그릇 속은 텅
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대인들이 성례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기
록한 것에 있어서 비슷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성례에는 숨
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
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
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
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
나 언약의 비준을 전하는 담보물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성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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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사자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
지 않고, 다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성례는 담보
물과 표이므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확증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
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의 임재에 의하여 하나
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집행할 때에 결실이 없고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표징으로 약속하며 표현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신다. 표징은 그 창시
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여기서의 유일
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그들이 말하는) 그의 고유한 능력으로 행동하시는가 그
렇지 않으면 그의 일을 외적인 상징들에 맡겨 버리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든, 그 도구가 그의 최초의 활동에 아무
런 손상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에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
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
용을 지켜서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 안에 있듯이 물
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즉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
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 점을 현명
하게 경고한다.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성결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
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
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
시키는 것. 18-20)
18. 광의의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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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
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
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 : 9,
3 : 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 : 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
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
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생명
나무는 나무였고 무지개는 무지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가 새
겨진 후에는 새로운 형태가 생겼고 전과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허
망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
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
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 멸망치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
떤 이론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우롱하려고 저렇게 많은 색깔은 맞은편 구
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이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
기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
하지 못하는 그 우매함을 우리는 비웃는다.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
런 기념의 뜻을 인치신다면 이 모든 자연물은 우리에게 성물이 될 것이다. 은 덩
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은 덩
어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관인이 찍힐 때에 은전이 되며 새로운 평가
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건에 말씀으로 표를 하셔
서 단순한 자연물이던 것이 성물이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둘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연기 나는 풀무 속에 있는
빛을 보이셨다(창 15 : 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양털은 이슬에 젖
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시며 또 그와 반대로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
털은 마르게 하셨다(삿 6 : 37-40). 히스기야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일영
표에 있는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 : 9-11, 사 38 : 8).
이런 일들은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역시 성례였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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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
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연합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
야 한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들을 위해서 경건을 위한 일정한 행사를 제정하셨다. 그 후에 사탄이
이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
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비밀 종교에 입교시키는 의식과 그 밖의 타락
한 의식들이 생겼다. 이런 의식들은 오류와 미신이 가득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종
교를 고백할 때에는 외형적인 표징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표징이
나타내야 할 진리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회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성한 상징들 곧 진정한 경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의
그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지 않는 상징들을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성한 상징들은 무지개나 나무와 같이 단순한 표징이 아닌 의
식이다. 혹은 여기서 주어진 표징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 표징들
은, 우리가 위에서 주께서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쪽
에는 고백의 표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
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
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
리 사이에 상호 협약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식들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
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는 이런 성례를 의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
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키신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13. 종말론
(제3권 25장)
제25장: 최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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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부활에 대한 교리 주장 1-4)
1.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말 4 : 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
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 1 : 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 5 : 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 2 :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 : 6), 이것
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
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
을 바라며(롬 8 : 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히 11 : 1), 이 육신
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이다(고후 5 : 6). 그
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
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한다(골 3 : 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
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딛 2 :
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
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
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 : 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
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 : 4-5). 그러므
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
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마 6 : 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물
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빌 3 : 14) 어려운 일은 없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
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
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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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동기를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 플
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
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
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
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
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고 말하였다.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빌 3 : 8), 자기도 모
든 것을 잊어버리고(빌 3 : 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
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빌 3 : 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한다(롬 8 : 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
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
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다(롬 8 : 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가
(롬 8 : 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
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
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롬 8 : 23 참조). 우리의 부
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히 10 : 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
이‥‥‥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 : 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3. 바라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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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
증은 정당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
요"(고전 15 : 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 :
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
여 있으며(고전 15 : 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롬
8 : 36, 시 44 : 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 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
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
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신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
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
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
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
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
으면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 4
: 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
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 : 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쥐어 떼는 것이 될 것이다. 따
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한다(고전 15 : 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
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
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
고 한다(시 16 : 10, 행 2 : 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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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 1 : 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
리라고 한다(빌 3 : 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 3 : 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
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한다(롬 8 :
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한
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
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요 11 : 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
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
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
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한다(고전 15 : 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
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
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는가?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
시지 않았는가?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
시지 않았는가?6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
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
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
인들이 한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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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
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이 지켰지만(마 27 : 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눅 24 : 3, 마 28 : 6,11, 27 : 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 28 : 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
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
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는가?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다(마 28 : 6, 눅 24 : 6 참조). 하늘 광
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육신 부활에 대한 근거이다
부활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
다. 바울은 간단하게 이 점을 가르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
라"(빌 3 : 21).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며, 우리의
지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기적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해서 어떤 자연 현상을 상상
하는 것은 가장 부적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계에서 증거를 빌려, 부
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
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 : 36). 씨를 뿌리면, 썩은 것으로부터 곡식이 돋아
나므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기적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실은 그다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
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장차 올 부활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신념에 고무되어 이렇게 부르짖
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 : 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
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한다(시 68 : 20). 욥은 사람이라기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
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즉,
그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
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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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라"(욥 19 : 25-27),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부활에 적용되는 것으
로 설명할 수 없는 듯이 교묘하게 왜곡하지만, 그들은 논박하려는 점을 도리어
확인한다. 거룩한 사람들은 곤란을 당할 때에 무엇보다도 부활의 비유에서 위안
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스겔에 있는 구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유
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에,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
이 붙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겔 37 : 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
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이는 신
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구원에 대해서도 부활이 그 모형이 되는 것
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음성이 생명을 준다고 가르치신 후에, 유대인들
이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음과 같이 첨가하셨다. "이를 기이
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 :
28-29)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전투 중에도 개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에게 내세
를 약속하신 분은 우리가 맡긴 것을 지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1 : 12).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고, 의로우신 심판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딤후 4 : 8).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
통은 우리에게 미리 내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천사들
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
며, 부당한 핍박을 받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은(살후 1 : 6-8) 하나
님의 본성에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곧 그 다음에 첨
가하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
을 받으시며 모든 복음을 믿는 자로부터 기이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
: 10).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
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
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
고 주장하였다.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때에 다소간 언
급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
를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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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는다. 그 결과, 몸
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된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탁월하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 : 14). 그러나 바울은 일
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
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 5 : 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 : 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
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 : 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
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
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 12 : 23) 모든 의심을 일
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
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
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 23 :
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
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23 :
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벧전2 : 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행 7 : 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
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
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15 그러나 모
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 12 : 32 참조), 한편에서
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
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인가? 장소
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이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
"(눅 16 : 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
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한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즉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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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즉,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이
다(유 1 : 6).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
나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
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
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
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 7 : 1) 명령하므
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
으려 함이라"고(고후 5 : 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 : 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살전 5 : 23).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
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 : 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고전 6 :
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 2 : 8), 몸을 제물로 드리라
고 하시지 않는가?(롬 12 : 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
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
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 6 : 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
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한다(고전 15 : 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
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인가?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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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
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
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
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롬
14 : 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
49 : 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사 45 : 23, 롬 14 : 11) 말씀을 인용하
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 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단 12 : 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하나
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
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명백한 이유가 나타난다. 죽음이 인간의 티끌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것
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회복은 그 죽기 시작한 육체에 속한다. 바울이
부활을 주장했을 때 아덴 사람들이 웃은 것을 보면(행 17 : 32), 그가 어떤 전도
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웃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
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 : 28). 만일 우리가 현재 입
고 있는 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의 다른 말씀도 이와 꼭 같이 분명하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
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 : 28-29) 우리는 영혼들이 무덤 속에서 쉬고 있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할 것인가? 오히려 그의 명령이 있을 때
몸이 그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된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리겠는
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요 2 : 19). 그
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다. 속죄 제물로 바친 몸이 소멸되고 새
로운 몸이 대치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 15 : 12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
도의 부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현저한 예를 보아서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무덤에서 나왔다"고 한다(마 27 : 52-53 참조). 이 일이 우리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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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부활의 전조 또는 보증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일은 이미 에녹과 엘
리야에게 있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부활의 후보자"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몸과 영혼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영접
되었기 때문이다.
9. 불신자의 부활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즉 무슨 권리로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는가?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가 아
닌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
을 안다(롬 5 : 12, 고전 15 : 22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으
로서 오셨다(요 11 : 25). 그는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하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는
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자들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을 완악하고 눈이
어두운 자들이 얻는다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확고 부동
한 사실이 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
이며(요 5 : 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마
25 : 32). 나의 대답은, 우리가 여기 해당하는 일들을 일상 경험에서 보기 때문에,
이 일을 신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전세계
의 유업을 빼앗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통 음식도 먹
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것은(마5 : 45) 현세 생활에 있어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끊임없이 풍성
하게 베푸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속한 것이 악인들에게도 풍부하게 베풀어
진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소유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구실이 없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악인들은 놀라운 증거
에 의해서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하는 일이 많고,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훨
씬 능가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체험은 그들에게 더욱 엄중한 정죄가 된다.
덧없는 지상의 혜택에 의해서 부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항의하는 사
람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처음 단절되었을 때에 그
들은 마귀의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
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하여 중간 상태가 마련되었고, 그들은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악인이 우연히 부활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주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그것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심판
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
들은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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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한 입장을 지키며, 바울이 벨릭스(Felix) 앞에서, 의로운 사
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
백을(행 24 : 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
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信經)에서
도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 부
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예언은(사 25 : 8, 호 13 : 14, 고전 15 :
54-55) 그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은 옳
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 쌓여 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
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 13 : 12
참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요한은 말했다(요일 3 : 2).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
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
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
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
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성경이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컨대, "아
브람아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 : 1)고 하신다. 다윗의 말이 이
와 부합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
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
름답도다"(시 16 : 5-6). 다른 구절에서도 "나는‥‥‥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 : 15)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벧후 1 : 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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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
을" 얻으시겠기 때문이다(살후 1 : 10).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권능과 의
를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아니, 자신을 그들에게 푸셔서 즐기게 하
시며,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모든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과도한 욕망의 유혹을 느낀다. 이런 상태에서 무가치하고 유해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난다.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
이다. 둘째 종류의 질문들은 더욱 다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
은 위험한 사변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런 질문을 유해하다고 부른
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
든 성도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기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똑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날에(살전 2 :
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살전 2 : 20) 한 바울의 말이나, "너
희도‥‥‥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마 19 : 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
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
들을 장식하시리란 것을 안 바울은, 자기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
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 : 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직무가 존귀하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 그에 대한 결실은 하늘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셨다(마 19 : 21 참조).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
리라"고 하였다(단 12 : 3). 자세히 연구해보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날
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딤후1 : 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
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마 19 : 29) 하신 약
속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 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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