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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신앙"

주거시엔셩 2015. 8. 13. 10:20

 

 

신학의 태동과 반응

기독교회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교적 진리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며 특수 학문인 신학을 낳았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의심을 배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신앙을 다 담아내지 못해 기독교회 내에서 종종 의문시 되었다. 심지어 ‘그노시마키’로 불리는 집단은 모든 학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행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단순하고 꾸밈없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의 관습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교령들과 명제들을 알려고 애를 많이 태우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가르쳤다. 신학에 대한 혐오는 중세 말엽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스콜라주의는 모든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인문주의는 스콜라주의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로마교의 스콜라주의에 대한 저항은 거의 잠잠한 적이 없었다. 18세기와 19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스콜라적 신학에 대해 온갖 비난을 쏟았다. 종교개혁도 초기에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재잘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했던 것처럼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칼빈 역시 신앙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신학을 거부했다. 재세례파와 메노파는 학문적 훈련을 원하지 않았고 메노 시몬스는 교회와 봉사자들의 학문 연구와 학식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17세기 개신교회 내에 스콜라적 신학 취급이 진척되자 사방에서 반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교리에서 삶으로, 신앙고백서에서 성경으로, 신학에서 종교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 현상은 철학의 반영지주의적 경향, 슐라이마허의 감정의 신학,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 등의 영향들에 의해 더욱 증대되었다.

헤르만 바빙크 시대의 교의학

헤르만 바빙크 시대의 교의학에 대한 혐오는 보편적이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말, 새로운 교리를 열렬히 기대하고, 신학 없는 종교, 교리 없는 삶을 갈망하며 실천적, 비 교리적 기독교를 위해 헌신한다. 교의학은 기독종교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왜곡시켰으며, 종교를 지적으로 증명되고 수용되어야 하는 교리로 바꾸었다. 또한 종교적 생활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차갑게 죽은 정통주의를 촉진시키며, 암묵적 신앙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로서의 종교를 학문과 마찰시켰고, 교양 있는 계층을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소외시켰다. 신학은 자주 자신의 목적을 지나쳐 ‘빈말만 되풀이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신학은 너무도 자주 이 땅에서의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이며 희미한 것’이라는 것을 잊었고 겸손, 부드러움, 단순함을 잃었다. 그러나 신학이 오용되었다는 이유로 신학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용은 사용을 폐지하지 않는다. 더구나 기독종교와 형이상학 사이의 분리는 정확하게 숙고되지도 않았고 실재적으로 실행될 수도 없다. 그 분리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일방적이고 불완전한 개념을 형성하도록 강요했다. 그 경향들은 거의 성경 전체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항상 단지 한 부분에 – 오로지 신약만, 혹은 복음서, 혹은 산상수훈,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본문에 – 되돌아갔을 뿐이다. 심지어 하르낙은(자신이 인정하는 것처럼) 신약의 사도 적, 보편적 가르침마저 예수의 복음으로 정확히 재현하지 못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일방적인 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의 교제와 인간과의 교제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단절되고 신학을 경멸함으로써, 자기 시대 문화와의 유대를 상실했고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신학의 소명

신앙 공동체와 세상, 교회와 학교, 종교와 학문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었다. 이에 대해 신학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것들을 서로 연관시키는 위대한 소명을 가진다. 신학의 정당성은 기독종교의 본질에 근거한다.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는 모든 인간에게 향한 것이며 온 세상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계시는 가장 심오한 사고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식과 나란히,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관시킨다. 그럼에도 계시는 학문적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등장한 것은 ‘생각하는 의식’이 깨어나면서부터였다. 계시의 사상들을 숙고하고 여러 가지 공격들을 방어하기 위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신학과 철학

학문적 신학은 철학의 도움으로 태어났다. 교부들은 교리의 형성과 발전에 철학을 사용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를 숙고하고 변호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철학만을 사용했다. 그들은 취사 선택적으로 작업했고, 플라톤의 것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든, 그 어떤 철학 체계도 이어 받지 않았다. 다만 헬라 철학의 도움으로 고유한 기독교적 철학을 산출했다. 또한 그들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하며 철학을 오로지 신학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했다. 신학에서의 철학의 사용은 실수가 아닌 확고하고도 선명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철학의 오용을 경계했었다. 기독교 철학은 결코 어떤 철학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진리로 인증하지 않았다. 신학은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철학을 견주어 보고 참되고 유용한 것만을 수용한 후, 사고 작용을 통해 학문적 신학에 도달했다.

신학의 실재적인 ‘내적 인식의 원리’와 주체

신학의 실재적인 ‘내적 인식의 원리’는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사유와 기독교적 합리성이다. 신앙은 스스로를 인식하며 확신하는 것이다. 신앙은 계시에 기초하고 지식을 포함하며,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적 의미의 ‘안다’라는 실천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자들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제도적 교회로서의 교회의 산물도 아니다. 신학의 주체는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다. 신학은 기독교적 사고의 열매다.

신앙과 신학의 구별

신앙과 신학의 구별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시에 둘 사이의 내적 연관성도 확고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통해 지식으로”라는 격언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다. 그는 둘 사이의 관계를 잉태와 출생, 노동과 품삯의 관계로 생각했다. 신앙과 신학은 신앙의 기본적 성향과 행위, 주입된 신학과 획득된 신학으로 구별된다. 신앙은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찬성이나 신학은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 그 지식은 진리들의 존재에 연관된다. 신학은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고 오랜 수고와 훈련에 의해 정신에 새겨졌다. 또한 수집된 신학적 토론을 통한 신학적 원리로부터 나온 결론들에 대한 지식이다.

교리와 삶, 신앙

교리와 삶은 가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벌어졌다. 머리와 가슴이 우선권 쟁탈전을 벌였다. 신학과 종교는 서로 대치 상태에 이르렀다. 수년 동안 들린 외침은 “종교란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하며 종교적 삶을 위한 종교적 개념들의 가치들을 더 바르게 인식하게 되었다. 로마교에 있어서 신앙이란 여러 가지로 계시 된 조항들과 셀 수 없는 진리들에 대한 동의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수효가 늘어났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신앙을, 특별한 중심 대상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특수한 신앙으로 이해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관계이다. 종교개혁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으로 수적 계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앙과 신학의 관계(일치와 공통점)

신앙과 신학 사이에는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 대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공통점과 일치가 있다. 학문으로서의 신학 역시 신앙의 토대 위에 수립된다. 신앙은 신학에 사고의 재료를 제공한다. 신학은 신앙에 의해 내용을 가진다. 신학이 신앙을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 신학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다. 신앙은 신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신앙은 신학의 영역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해야만 하는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한다. 신앙은 신학자로 하여금 그가 연구해야 할 진리 아래와 진리 안에 있게 한다. 신앙은 신학을 신앙의 고유한 대상에 묶고 관찰의 대상과 관계를 맺게 한다. 그럼에도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과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그러나 신학은 전적으로 자신이 간파하고자 추구하는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 신학은 자신의 대상과 결속하면 할수록, 메마른 스콜라주의와 공허한 수사학으로 변질될 위험이 적어진다. 신학은 신앙을 통해 개념이 아닌 내용에 관한 것과 현실 세계 종교에 관한 학문, 사실의 신학이 된다.

신앙과 신학의 차이

신앙과 신학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 신학이 신앙의 학문으로 머무는 까닭은 신앙이 자신의 내용을 이끌어 내는 동일한 원리에 의해 계속 유지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으로서 신앙 지식에 속하는 동일한 종교적 성격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 둘(참된 지식과 신앙)은 상호 간에 쉽게 교체될 수 있었다. 신학이 윤리학을 포함한 교의학과 거의 실재적으로 동일한 개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은 오늘날 모든 학과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신학은 오늘날 평범한 신자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많은 학문들의 군집을 포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사실에 머무르는 반면, 신학은 사상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신앙은 ‘ ̴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반면, 신학은 ‘왜, 어떻게’를 묻는다. 그리고 신앙은 항상 개인적인 것으로, 대상을 인간 자신과 연관시키고, 교리들의 종교적 취지에 직접적인 관심을 가진다. 반면 신학은 대상을 객관화하며, 진리 자체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를 살핀다. 또한 진리의 통일성과 내적 연관성을 추적하며 하나의 체계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중점 대상에 집중하지만 신학은 전반적인 범주까지 확대하여 연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신학은 ‘차이’에 관계없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신앙은 신학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신학은 신앙의 분리주의를 방지한다.

신학 연구에서의 이성의 임무

신학은 실재적인 삶, 신앙 공동체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서며 신학의 내적 원리를 신앙 자체가 아닌 믿는 사고 작용에 둔다. 따라서 신학 연구에서 이성의 임무는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야 한다. 또한 신앙과 이성을, 서로 생사를 걸고 씨름하는 두 개의 독립적인 힘으로 여기는 견해는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 태도로서의 신앙은 이성과 나란히 혹은 이성을 초월한 기관이나 능력이 아니라, 이성 자체의 성향과 습성이다. 이성, 혹은 사고 작용은 분명코 신학의 근원이나 원리가 아니다. 이성은 그 어떤 학문의 근원도 아니며, 형식적 학문의 근원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다. 신앙은 인간적 의식의 한 행동으로 강요가 아니며 인간 지성의 자연스런 습성이다. 즉, 신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닌 정신의 온전함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연구와 숙고를 면제하지 않고, 오히려 촉구한다. 특히 신학 연구를 위해 훈련 된 사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임무를 지닌다.

1) 재료 발견에 도움을 줌: 성경은 신학의 원리이다. 신학, 특히 교의학의 재료는 성경 전체에 걸쳐 흩어져 있다. 마치 금광에서 금이 채취되듯이, 반드시 모든 정신적 힘을 쏟아 신앙의 진리를 성경으로부터 채취해야 한다. 이렇듯 사고 작용은 신학적 자료들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획득한 자료를 사고함으로 작업: 성경 전체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많은 자료들 위에 수립 되고 성경이 관련 주제들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우리 언어로 짧게 요약한 교리들은 ‘신앙의 결론들’이다. 지적일 뿐만 아니라 추론적, 논변 적 학문인 신학은 숙고, 비교, 판단, 요약하여 획득한 진리로부터 다른 진리들을 도출한다.

3) 모든 진리들을 요약하여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는 임무: 하나의 체계가 모든 학문의 최상이듯 신학도 계시 가운데 감추어진 통일된 체계를 발견해야 한다. 신학 최고의 바람은 진리의 통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체계이다.

결코 이해하거나 꿰뚫을 수 없는 신비들과 연관된 신학

지식이 비록 신학에서 획득될 수 있다 할지라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안다, 통찰하다, 이해하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안다’는 존재와 사실에 연관되고 ‘통찰하다’는 성격과 ‘무엇’에 연관되고, ‘이해하다’는 내적 가능성과 사물의 ‘어떻게’에 연관된다. 기독교 신학은 통찰하고 경탄하되, 결코 이해하거나 꿰뚫을 수 없는 신비들과 항상 연관된다. 하나님 나라는 숨겨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관한 보편적인(이교도를 포함한) 하나님의 작정과 수행방식까지 숨겨졌다. 신적 신비들은 자기 자신의 속성에 의해 피조 된 지성까지 초월하기에, 심지어 계시로 전달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순례 길을 걸어가는 한, 믿음 자체의 베일과 어두움에 싸여 있다. 신자는 그 신비들을 자신의 사고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느낀다. 그 결과 그의 신앙은 경탄으로 옮아가고, 그의 지식은 경배로 마치며, 그의 고백은 찬송과 감사의 노래로 종결된다. 신학이 목적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이런 속성이다. 그 지식은 단지 사실을 ‘안다, 이해한다.’가 아닌 영광스러운 ‘통찰 지식’의 생명이며 영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