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기독교 역사 및 몽골 일반 개관
발제자 : 김봉춘
몽골이라는 나라가 한국에 특히 한국 교회에 각인 된 것은 불과 20년이 안되는 일이며 그리 길지 않는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몽골(교회)에 쏟은 ‘디아코니아’는 선교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몽골의 기독교 전래 역사와 현대까지의 기독교 전래 과정을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향후 선교방향을 설정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2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기술해 보고자 한다.
1.페레스트로이카
현대 몽골선교의 문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로부터 시작된다. 러시아의 개혁, 개방과 더불어 구소련의 영향하에 있던 공산국가들이 자연적으로 개방정책을 택하였고 이와 더불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으며 기독교 역시 이 시기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2. 몽골선교와 한국인
몽골의 개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몽골에 들어 온 한인은 대사관 외에 선교사였다. 유학생 신분으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한몽관계사, 문화, 역사, 언어 등의 다양한 부분을 연구하며 선교사로서의 자리를 잡아간다. 몽골은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역사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선교사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더군다나 한국 교회에 맞춤형 선교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예컨대, 근거리 동인종, 구 공산권, 알타이 언어권, 한류, 개척 선교지 등은 한국 교회의 선교취향에 적합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몽골 역시 아시아에서 가장 친근하고 발전모델로 삼을 나라로 한국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수용 정서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3.몽골에 유입된 기독교 전래 역사
몽골 선교가 흔히 ‘기독교의 흔적이 없는 나라’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6세기에 경교(네스토리안)가 전래되었으며 이는 당나라시절에 중국 몽골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경주 불국사에까지 유물이 남아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1625년 경에 중국의 심서성에서 한 인부가 집을 짓느라고 땅을 파던 중에 돌비석을 발견하고는 기이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척한 결과 한문과 시리아어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비석을 보호하려고 근처의 한 절(금승사)로 옮겨 보호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비석이다. 중국의 권위있는 학자들이 경교비를 연구한 결과 비문은 당나라 때 서법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을 밝혀냈다. 경교비는 당 덕종 2년(781년)에 경정이 비문을 쓰고 여수함이 글씨를 썼다. 경정은 당시 총 주교로 30여권의 경서를 번역하였으며 또 불교의 승려들과 불경을 번역하기도 한 학자였다.
6세기를 거치면서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부족은 투르크(돌궐)족이다. 현재 신강 지역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도 투르크족 계열이다.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족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지역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는 635년 아라본(알로펜) 선교사에 의해 처음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들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중국은 당 태종이 동복 형제를 죽이고 왕에 즉위한 즈음(627년)이다.
몽골족은 1206년 헨티지역의 다달지역에서 당시 여러부족을 점령하고 나라 이름을 ‘몽골제국-Ikh Mongol Uls' 이라고 국명을 정한다. 몽골의 13세기는 몽골 최대의 시대였다. 칭기스칸, 쿠빌라이로 대표되는 시대이며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점령하여 칭기스칸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을 점령한 왕으로 기록된다. 또한 13세기에는 궁정에까지 예배처소가 있었음이 당시 몽골을 방문했던 마르크폴로, 카르피니, 루브룩, 등 많은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다.
칭기스칸은 조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톨루니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톨루니의 부인인 소르칵타니에게서 네 손주를 얻었다. 믕케, 훌레구, 쿠빌라이(1260-94), 믕허가 그들이다. 칭기스칸의 가계를 보면, 조치(Jochi), 차가타이(Chagatai), 오고타이(Ogetai), 툴루이(Tolui)의 네 아들이 있는데 톨루이의 부인인 소르칵타니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르칵타니는 몽골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각각 탁월한 역할을 감당한 세 명의 기독교도 자매 중 1인이었다. 첫째인 이바카-베키(Ibaca-beki)는 칭기스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벡툴미쉬(Bektutmish)는 칭기스의 장남인 조치(Jochi)의 정실이 되었다. 그러나 칭기스의 넷째 아들인 톨루이와 결혼한 소르칵다니는 세 명의 제국 왕자들인 몽골 대 칸의 황제, 중국의 황제, 그리고 페르시아의 황제의 기독교도 모친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4대와 5대 대칸이 되고 훌라구는 서아시아 원정을 주도하여 후일 일 칸국의 창시자가 된다. 어쨎든 남편의 사망 이후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던 톨루이 가문이 결국 믕허의 즉위로 대권을 장악하기까지 그녀의 역할은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을 놓고 생각할 때, 기독교도였던 그녀가 자식들에게 끼친 영향 역시 심대했고 믕허, 쿠빌라이, 훌라구 등이 모두 기독교를 적극 보호하거나 적어도 관대한 정책을 취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소르칵타니는 1252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믕허, 쿠빌라의 모친로서의 그녀의 명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몽골인들의 후대에 전승되었다. 1251년 카라호름을 방문한 수도사 루브룩이 남긴 보고에 의하면 그녀의 막내 아들인 아릭 부케는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당시 궁정의 상황(플라노의 카르피니신부)에 의하면 궁정에서 예배가 드려졌다고 한다. 믕허가 몽골의 왕위에 오르고 쿠빌라이에게 고려침공을 명한다. (한.몽관계) 믕허가 남송 공격하던 중 사망하자 쿠빌라이가 집권하고 국명을 ‘원-Ikh Yuan Mongol Uls’으로 개명한다.
중국 남부와 인도북부까지 정벌하는 등 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는 중에 내부 분열과 1338년에 대두한 명나라 주원장에 의해 1368년에 멸망하게 된다.
4.이슬람의 유입
카스피해와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입된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은 왕족인 조치를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몽골의 서부지역인 바양을기 지역과 울란바타르의 날라이흐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터어키 선교사들에 의해 활동하고 있다. 이슬람의 유입이 경교의 쇠퇴와 연관되어 있다. 즉, 경교가 그 맥을 잇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네스토리안들이 급격히 쇠퇴하게 된 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돌발적인 흑사병의 확산이다. 이 흑사병은 중국의 운남성과 동남아 북부 일부 지역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몽골군이 이 지역을 공격한 후 초원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이 균을 묻힌 채 몽골 초원지대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의 쥐나 타르박 등 지하에 서식하는 설치류들 사이에 퍼져있던 균들이 몽골 군대나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주기적으로 중앙아시아,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네스토리안의 묘비를 분석해 보면 많은 네스토리안들이 흑사병으로 죽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흑사병은 네스토리안만이 아닌 모든 중앙 아시아인들을 몰살시켰다. 두 번째 이유는 급작스러운 급진적 이슬람의 확산이다. 몽골 제국의 후예 중 러시아, 킵차크 지역에 있던 조치의 가문과 이란,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훌레구 가문은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 확산되기 시작한 이슬람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기존의 이슬람과는 달랐다. 그 이전에는 이슬람권 내에서도 유대교나 기독교를 자기들의 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이교도들에게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지나고 몽골 침입을 겪고 난 무렵의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해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동에서 몽골을 계승한 티무르는 제국을 건설할 당시 자신의 정권의 이슬람권에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수의 네스토리안들을 포함한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바그다드에 선교 본부를 두고 있던 네스토리우스교 총주교는 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산악지대인 모술 일대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선교 본부와 동방 지역의 여타 네스토리우스 주교구와의 통신이 단절되게 되고 더 이상의 선교사나 사제들의 파견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세 번째 이유는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시리아어에 기초해서 예배를 집례하고 신앙을 전수해 왔다. 마치 라틴어에 의해 천주교 미사가 드려지고 아랍어로 이슬람의 신학과 의례가 유지되어 왔던 것과 같다. 중세 시기에는 ‘성스러운’ 언어로만 종교 교육과 의례가 진행되어 왔다.
천주교회가 마틴 루터의 가장 큰 죄목으로 지적한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 그 자체보다는 그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말씀 자체가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적 생활은 말씀 그 자체보다는 전통과 의례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회의 존속과 성장은 해당의 ‘성스러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사제 집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특히 동방에서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경우 시리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제 그룹이 이란, 이라크, 또는 시리아 지역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파견되지 않으면 교회의 유지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흑사병에 의해 사제들이 몰살되고 또 이슬람의 성장으로 인해 선교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자 자연히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원나라가 붕괴한 뒤 북방으로 쫓겨난 몽골인들과 함께 있었던 기독교도들은 15세기 초 영락제의 집요한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고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진 채 혼란에 빠지고 그 마지막 군주인 테구스 테무르가 1388년에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5.라마교(티벳불교)의 유입
몽골의 사실상의 맹주인 알탄칸(순의왕)은 1558년 청해원정에서 1천명의 라마승려를 사로잡았는데 이는 몽골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지금의 내몽골의 수도 허흐호트에 ‘귀화성’을 지었다. 그는 티벳의 ‘아싱라마’ 승려로부터 윤회사상과 만트라를 배웠다. 쿠빌라이가 ‘팍파’를 초청했듯이 티벳에서 소남가초를 초청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가초의 이름에 ‘가초(바다)’를 몽골어로 번역한 ‘달라이’와 스승을 뜻하는 티벳트어의 ‘라마’를 합성한 칭호이다. 이와 같이 달라이 라마 칭호는 소남가쵸에서 시작되었다. 1586년에는 하라호름에 에르덴조(에르덴-보배, 조-존귀한(jo bo의 티벳어/부처를 모신 절) 사원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108개의 탑이 15m간격으로 세워졌다.
이에 앞서 현재의 몽골글자(cyrillic alphabet)는 1930년대 러시아에서 유입되어 사용하게 된 것이며 몽골문자는 티벳의 라마인 팍파(국사(國師)1239~1280)에 의해 1269년 만들어 졌다.
6. 명. 청시대의 몽골
누르하치의 후금은 1634년 릭단칸의 사망으로 원이 망함과 동시에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여진인과 몽골인의 대칸 자격인 복트세첸카 칸을 즉위시켰다. 1689년 청조와 러시아간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말미암아 브리야트 몽골을 포함은 북부 지대가 러시아에 합병된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몽골인들의 잔재를 없애고 몽골인들의 연합을 막기 위해 몽골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부족간 왕래금지, 지역간 결혼금지, 장남의 결혼금지, 장남 이외 아들 승려화 등이 그것이다. 자연히 몽골족은 주변부족이 되어 쇄약해진다.
7. 독립국가
1911년에 이르러 복트한의 주도로 몽골민족은 만주족(청)에서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1921년에는 수흐바타르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의해 주권을 되찾았고 1924년에 러시아의 도움으로 몽골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1950년대 중소 우호시대에는 중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도 몽골에 대해 경제적으로 많은 원조를 했다. 그렇지만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이데올로기 대립이 발생하자 몽골은 일관되게 소련을 지지한다. 중국과 소련이 무력적 대립관계에 접어 들면서 소련 군대는 몽골에 주둔하게 되고 몽골은 소련의 대중국 전략기지로 변하고 몽골과 중국은 사실상 국교가 단절되고 만다. 1962년에 소련은 코메콘(소련과 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하고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에 가입하여 몽골은 사회주의 분업의 한 축으로 편입되고 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경제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소련은 1980년대까지 몽골 인민공화국에 대해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8. 동서 문화의 통로로서의 종교유입
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여 인력을 교류시켰으며 무역통로를 확장시켰다. 이 결과 자연적으로 문화와 종교의 전파가 이루어진다. 역참과 교통로가 개척되었고 이를 따라 인간집단의 이동이 도미노현상처럼 이루어졌다.
첫 번째로 몽골 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동서 간에 대대적인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몽골 원정군에 참가한 전사들은 신천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반면에 정복지의 유능한 인재와 장인들은 몽골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킵차크 초원 출신의 킵차크, 아스, 캉글리 등 유목민을 새로운 군단으로 조직하여 자신에게 직속하는 친위군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윈난 지역을 개발하는 데도 중앙 아시아의 무슬림이나 위구르인을 대거 참여시켰다.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몽골 군대의 진격을 피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하면서 11세기 이후 계속된 이 지역의 투르크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두번째로, 몽골 제국의 출현함으로써 동서 두 세계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촉진되었다. 제국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이 정비되고 교통로의 안전이 확보되면서 여행자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과 서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중국 동남부의 항구도시와 페르시아 만의 서아시아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가 활발하게 활성화 되었으며 이른바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순환교통로가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위구르 상인과 무슬림 상인들이 대규모 상업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몽골 제국의 이룩한 세계적 규모의 경제발전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한반도와 일본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대규모 경제권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과 물건 문화와 정보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업 뿐 아니라 종교인의 왕래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 로마 교황 인토겐티우스 4세의 사절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라코룸을 방문한(1245~1247)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사절로 역시 몽골을 방문한 같은 교단의 수도사 루브룩, 북경에 카톨릭 교회를 연 몬테코르비노신부, 그리고 수 백 명이 훨씬 넘는 일본 유학승이 원나라를 방문했다. 모로코 태생의 이븐 바투타가 각지에 살고 있는 무슬림의 도움을 얻어 중동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를 거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로마의 평화’가 제 1세기에 사도들의 사역을 위해 길을 준비해 주었던 것과 같이 13세기 ‘몽골의 평화’는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아시아를 횡단하여 세계의 절반에 대한 가톨릭 선교에 문을 열어 주었다.
몽골에 대한 가톨릭이 첫 선교로부터 1368년의 몽골 왕조의 몰락까지의 1세기와 4반세기(약125년) 어간에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무역과 문화 교류를 위한 아시아 횡단 간선도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몽골 페르시아를 통한 구 비단길에 의해서든지, 혹은 몽골 러시아를 횡단하는 두 개의 북부 길이든지, 혹은 인도 주위의 해상로를 통해서든지 간에 극동은 이전보다는 유럽에 더 가까이 있게 되었다.
9. 몽골 제국 시대의 카톨릭 선교사들
당시 로마교회에는 두 선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는데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Domimicans)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원주의에 대한 새로운 차원으로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교와 선교를 분명히 강조하는 가난과 구제를 서약한 걸식 수도회들로 불리웠다. 이들은 선교사와 전도자들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두가지의 사명이 주어졌는데, 하나는 정치적인 것으로 침입자들에 의한 기독교 국가의 침입을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으로 그들이 개종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1242년에서 1342년 어간의 100년 간에, 7차에서 8차의 다른 가톨릭 선교단들이 파견되어 아시아를 횡단하는 길고도 힘든 여행을 해야만 했다.
1) 플라노 카르피니(Giovannida Plano Carpini/1245~1247)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란체스카 선교회의 플라노 칼피니(Giovannida Plano Carpini)신부를 몽골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칼피니는 앗시시의 프란시스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서방 유럽의 수도회를 초기에 조직한 사람이다. 칼피니 신부는 당시 63세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국서를 가지고 프랑스 리앙을 떠나 몽골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2) 몬테코르비노(John of Montecorvino/1291~1328)
몬테고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은 아시아에 도착한 최초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였다. 그가 북경에 도착한 때는 쿠빌라이가 사망한 직후인 1294년이었다. 당시 그에 대한 네스토리안들의 태도는 당시 이단성 시비와 종교적 라이벌로 여겨지던 로마 가톨릭이 몽골 땅을 밟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요한 신부가 몽골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몽골 기독교 역사에 큰 획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 일어 났는데, 몽골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경교도였던 온굿의 왕 조오지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때, 몽골의 경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요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으며 그의 선교 초기 5년은 매우 힘겹고 불행한 기간이었다. 1299년 그는 북경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고 조오지는 그를 위하여 ‘왕실의 장엄함의 수준으로’그 교회를 짓게 했다. 1305년이 되어서야 그가 6천명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다. 또 그는 두 번째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다른 부속 건물들을 이용하여 첫 번째 교회 성가대의 반수에 해당되는 소년들을 위한 또 하나의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다. 이 교회는 황제 티무르의 문으로부터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가까운 거리(only a stone throw)’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한의 성공에 대한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그것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충분했고 1307년 교황 클레멘트 5세는 그를 북경의 대감독으로 임명했고 또 총대주교의 권위에 해당되는 모든 극동지역의 감독으로 임명했다. 중국인들에게 가톨릭과 경교는 모두 이방종교로 취급되었는데 경교는 몽골에, 그리고 가톨릭은 유럽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영세를 받았으나 영세 이후에 그들은 바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였다.
3) 루브룩 윌리암(William of Rubruck/ 1253~1255)
1253년, 프랑스 왕은 친선사절로 프란체스코회의 루브룩(Guillaume de Rubrouck) 신부 일행을 몽골에 파견하였다. 프랑스 왕은 몽골에 루브룩 신부를 사절단장으로 하여 바르톨메(Bartholomew)신부, 예물 운송관 고셋(Gosset),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콜라라고 하는 노복(奴僕) 한 명을 사서 네 명이 몽골로 들어 왔다. 루브룩 일행은 믕허(헌종)를 알현하는데, 마치 대미사 집전하듯이 루브룩 신부는 제의를 입고 손에는 프랑스 왕이 몽골 황제에게 보내는 성경을 들고, 바르톨메 신부는 미사 견본과 십자가를 들고 고셋은 흰옷을 입고 손에는 향로를 들고 일렬로 헌종의 장막에 들어가 성가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얼마 후에는 경교 사제의 허락을 얻어 경교 교당에서 자유롭게 미사를 드리고 영세까지 베풀었다. 또 루브룩은 당시 믕허의 궁정에서 벌어진 종교토론회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믕허칸은 기독교, 회교, 마니교, 불교, 도교가 피 정복지의 종교였음으로 정복자로서의 자부심으로 종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썼다. 믕허칸은 궁정에서 각자의 종교의 우월성을 토론을 통해 변증하도록 하였고 루브룩은 신존재증명, 악의 출처, 부활, 삼위일체 등에 대해 변론을 하였다. 루브룩이 떠난 이후에 불교와 도교 사이의 논쟁은 격렬하여 1255년, 1256년, 1258년에 회의가 열렸는데 결국 쿠빌라이 즉위(1260)와 함께 티벳 출신의 승려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임명하고 1270년에는 다시 그를 제사(帝師)로 임명함으로써 불교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4) 마르코폴로 (Marco Polo/1254-1324)
마르코 폴로는 선교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동방견문록」은 당시 몽골과 중국의 기독교 상황, 사회상황을 서양에 소개한 책으로 중요한 역사의 기록인 점이 가치가 있다. 마르코 폴로와 그의 부친 니콜로 폴로, 숙부 마페오 폴로 세 사람이 교황의 국서를 가지고 1271년 여행을 떠나 4년 후 원 세조의 궁정에 영접되었다. 마르코 폴로 일가는 그 곳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7년 만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의 동방견문록은 당시 몽골의 상황과 기독교 자취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10. 18세기 이후 19세기말까지의 개신교 선교
근대 몽골 선교역사는 주로 유럽 선교사들에 의한 도전이었다. 아래는 기록에 남아 있는 선교사들의 목록이다. 특히 이들중에 LMS출신 선교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도 LMS 파송 선교사였다.
1)1815년에 슈미드(I.J.Schmidt)-브리야트 몽골인,[kalmuck language]마태복음 번역
2)1817년에는 스웨덴으로부터 코넬리우스 라함(Kornelius Rahmn) 사역
3)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스탠리 브라스(E.Stallybrass)부부
4)스완(Swan)은 브리야트-몽골(Buriat-Mongol) 성경을 완역
5)1870년 런던선교회(LMS)는 제임스 길모어(James Gilmour)
6)1895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선교사 연맹(Scandimavian Alliance Missionari)
7)1896년 노르웨이 선교사 내스태가드(Naestegard) 형제-울란바타르
8)1924년 이후 공산화와 더불어 모든 기독교 잔재의 청산 및 축출
11. 20세기에서 현대 개방 이후의 개신교 선교(~2010년까지)
몽골 현대선교에 한국교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의 문이 열리고 선교적 인프라가 개척되었으며 현재 3만5천-4만명에 이르는 기독교인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1)1991년 개방과 더불어 선교단체 입국
2)1992년 국립대학교와 외국어대학교에 한국어학과 개설
2)1993년 교회개척시작
3)1995년 연합신학교(UBTC) 개교(인터뎁, 다니엘램, 성경연구원)
4)1999년 몽골 복음주의 협의회(MEA) 발족
5)2000년 몽골어 성경 신구약 완역본 출간/ 몽골어 성경
6)2002년 몽골인 목사 첫 안수식(27명)-현재 안수자 130명
7)2006년 한인선교사 몽골선교 15주년
8) 2011년 한인선교사 몽골선교 20주년
12. 시기별 구분
이 시기별 구분은 초기 접근 단계, 인프라 구축 단계, 현지인 지도자 성장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제 1 기 개척시기(1991-1995)-접근 및 개척단계
몽골의 개방과 더불어 세계적인 선교단체들이 구 공산권 선교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몽골선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한몽수교(1990.3.10)와 더불어 한국인 선교사가 대거 입국하였다. 몽골은 한국인들의 선교적 구미가 당기는 민족이다. 그 이유는 우선, 근거리 동인종이다. 한국과 가깝고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 역시 동족 언어인 알타이어권이므로 비교적 언어습득의 스트레스가 적다는 것이며,구 공산권에 위치한 개척 선교지역이라는 장점은 한국 개신교계의 관심을 쉽게 당기는 요건이 된 것이다. 당시 입국한 한국인 선교사는 대부분 ‘박쉬’가 되어 현지인을 사회적 제자와 신앙적 제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학교마다 한국어 학과, 혹은 한국어 강좌가 설립되었으며 한국인(선교사)은 거의 대부분 박쉬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다. 이 과정에 현지인들과의 관계설정이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접근과 개척의 토대가 마련 된 것이다.
2)제 2기 충원시기(1996-2000)-인프라 구축 및 연합
몽골선교는 한국인만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서양선교사 역시 조직과 경험을 바탕으로 접근하였으며 초기 선교에 연합의 필요성에 대한 상호 교감이 이루어져 교회, 기관 등의 시작을 연합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기간에 동서양 연합으로 설립된 대표적인 기관은 몽골연합신학교(UBTC/1995년 9월)와 세계복음주의 협의회(WEA) 산하, 몽골 복음주의 협의회(MEA), 몽골성서공회 등을 들 수 있다. 또 후임선교사와 선임선교사들간의 사역의 공유가 시작되었다. 타지역과는 달리 몽골은 개별사역과 연합사역이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인력의 공유가 이루어진다. 한 선교사가 두어기관 사역을 맡게 되며 이 과정에 현지인 동역자 역시 달란트별로 여러 사역에 협력자로 서게 된다. 선교사의 숫자, 신자의 숫자, 교회의 수가 혁혁한 확장이 이루어진 기간이다. 아쉬운 단점은 확장에는 유념하였지만 심화에는 소홀하였다는 것, 그리고 인력 및 지도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기관의 확장에 더 투자하였다는 것, 영성보다는 기능에 더 관심을 두었다는 것 등 전형적인 한국선교의 양상이 몽골에도 역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3) 제 3기: 다변화 시기(2001년 -2010년) -자생력
급격히 숫적 성장을 이룬 몽골 기독교계의 과제는 시장경제체제와 더불어 야기되는 경제적 충당이다. 몽골 교계의 요구는 재정적 지원이며 해외 교계의 요구는 자립이다. 이 두 과제로 인해 이 시기에 현지인이 리더쉽을 가지고 운영하는 기관 및 교회가 많이 생겼으며 갈등과 분열, 폐쇄, 이양 등의 문제들이 생겼다. 과제는 성숙한 자생력을 위한 현지기관(교회)과 해외 후원기관(교회)간의 조율이 필요하다. 기독교 기관과 교회가 재정 확보에 따라 사역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는 등 앞의 제2기에 설립된 교회와 기관이 운영난까지 생기게 되었다. 개인적 역량(인맥 및 언어)이 되는 지도자는 해외교회와 연결하여 재정후원을 받아내지만 그렇지 못한 지도자는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선교사가 사역에 관여하는 기관 및 교회는 비교적 운영되고 있지만 선교사나 후원이 없는 기관 및 교회는 존폐의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재정적 후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지인의 안목과 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선재정 후사역의 기능적 관점에는 바라보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기능의 문제가 아닌 영적 신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2010년-)- 지도력 이양 및 자립
소풍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웠어도 비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면 모든 계획은 취소된다. 불과 1년도 안되어 몽골 정부에 의한 외국인 관리법이 섬세하여 졌으며 비자법이 강화되었다. 중국인 관광객의 대거 추방, 한국인 사업자, 선교사들이 비자법 위반으로 추방되는 사례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몽골은 종교비자를 발급한 것이 불과 2년 전 부터이다. 그 전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창의적으로 비자를 발급받고 입국하여 사역하여 왔다. 그러다보니 최근 비자 이외의 활동자로 지목받고 강제추방 받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몽골영토에서 떠나는 것(5년간 입국금지)은 몽골사역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사역지를 떠나면 사역하던 교회와 기관은 급격한 변화가 뒤따른다. 즉, 선교사 다음의 지도력 문제, 재산권의 문제, 사역의 지속성 문제 등 가장 기본적으로는 현지에 남은 사역의 중단 및 폐쇄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일부 선교사는 현재, 비자청의 경고로 교회활동을 전면에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의 맥을 끊기지 않고, 현지 기독교의 자생적 성장을 위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첫째, 리더쉽 양성에 집중해야 한다. 이미 기존에 복음을 접한 현지인들이 신자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현지에 영향력을 공급하는 지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도자 양성의 단계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교단 내에서의 현지인 신학자 및 목회자 양성, 교사 및 지도력 양성과정, 교회간의 네트웍 형성 등의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리더쉽 이양의 절차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재산권, 지도력 등에 있어서 분쟁의 소지를 사전에 없애는 방안이 필요하다. 즉, 재산권의 경우에는 본국 교회나 기관 혹은 파송단체와 연계한 절차인데 현지의 법적 자문을 통해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지도력 이양의 절차 역시 개별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 보다는 현지 선교부에 의해 일정한 절차를 밟으면 더 공식적이며 합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현지 선교부가 현지인 지도자의 양육, 임명, 해임 등을 관리하는 기구적 역할을 하는 단계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지인 지도력간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이룰 수 있으며 인사 및 재정에 관한 투명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사역의 창의성인데 이는 선교사가 맡아 하던 사역들을 현지인들에게 이양하면서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사역의 연계성이 사라지게 되고 방향없는 사역으로 흘러가는 경우를 방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단 선교부 안에서 사역자 계속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의 전략의 연합적 운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3.향후 과제
해외 교회가 영원히 몽골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서로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결국 몽골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합당한 방안을 몽골교회가 먼저 수립해야 할 것이며 해외 교회는 타당한 절차를 통해 몽골교회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연합이며 내부적으로는 인력, 재정, 사역의 자립이 주된 과제라 할 수 잇다. 특히 자립은 몽골교회가 자부심을 가진 기독교회로 또한 영향력을 주는 선교적 교회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절차이다.
1)인력의 자립
선교의 대상은 사람이다.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선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열매라고 볼 수 있다. 한국 현대선교의 많은 양상에서 볼 수 있었던 부작용은 무리하게 앞서간 부동산(건물,토지 등) 투자에 있었다. 영적 신뢰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부동산을 구입하여 현지인 이름으로 등기하는 경우의 위험성의 예들은 여러 나라에서 본 사례들이다. 선교사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 정진해야 할 것이며 한국 교회 역시 무리한 부동산 확보 보다는 파송된 선교사가 사람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도록 관심과 후원과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2)재정의 자립
최근에 많은 선교학자들이 한국교회의 성장 원인을 말하면서 초기 한국교회가 재정적으로 선교사들로부터 자립하였던 점을 들고 있다. 연보, 성미, 날연보 등의 재정적 자립의 기틀을 가졌기에 현재의 한국교회와 같은 성장과 열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나친 긍휼심은 대상으로 하여금 지나친 의존심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욕마저 생길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선교지의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틀과 방안을 함께 연구하고 제공하는 성숙한 선교적 틀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3)사역의 자립
현지에 사람이 세워지고 재정이 자립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역의 자립이 되지 않으면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 교회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복음의 목적이 무엇인가? 등을 통한 실제적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선교사와 파송단체는 협력해야 할 것이다. 지속적인 학업, 연구, 목회 등의 경험을 나눠주며 격려하는 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몽골교회는 350여개이며 교인의 숫자가 4만명으로 통계를 두기도 하지만 이는 조사기관마다 ‘교회’로 보는 기준이 다르고 교회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기준을 가진 통계가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적지 않은 교회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으며 여름캠프형 교회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정의 부족이 아니라 ‘인력’의 부재이며 ‘사역’의 비자립을 뜻한다.
향후 몽골 교회가 건강하고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현재의 신학교육, 지도자들의 목회적 사명, 교회개척 및 설립에 관한 방향설정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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