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묵상

죄악된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생각지킴) 죄에 대해서- 하인리히 아놀드

주거시엔셩 2013. 2. 15. 00:08

 


Freedom From Sinful Thought
죄악된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생각
지킴
하인리히 아놀드(J. Heinrich Arnold) 지음
임종원 옮김/ 도서출판 진흥


독자들에게
아버지의 첫 번째 책 『생각 지킴』(Freedom
From Sinful Thought, 죄악된 생각으로부터의 자
유)이 출판된 지 벌써 2 0년이 지났지만, 나는 지
금도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비록 얇
은 책이었지만 아버지는 수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
여 이 책을 쓰셨다. 그때 나는 이미 2 년 전부터 아
버지의 사역을 돕고 있었는데, 이 책을 함께 만드
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돈
독해졌다.
아버지는 목사로서 특별한 어려움이나 갈등을 겪는
공동체 식구들을 상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언제나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아버지가 이 책을
쓰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이 그러한 싸움 끝에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것
을 보면서, 아버지는 여기에 분명한 해결책이 있다
는 확신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원고를 초안으로 ‘순전한 마음’이라는 주제
의 강의를 여러 차례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버
지에게 편지를 보내오는 등 전혀 뜻밖의 반응이 나
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드러내놓고 이야기
할 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새로운 신자나 젊은 신자
뿐만 아니라 성숙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폭넓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란 것을 분명히 알
게 되었다.
일단 책이 출판되자 독자들에게서 온 편지가 홍수
처럼 쏟아졌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책이 자신들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다거나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고 자살
하려던 마음을 돌이켰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
렇게 이 책은 별다른 요란을 떨지 않았는데도 해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8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러 해에 걸쳐서,
출판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 곧 각종 녹음테이프,
원고, 기록, 초안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
은 서신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개정판에서는 초
판에 더하여 이러한 자료들을 보충하고 재구성했
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강조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곧 그리스도만이 영적 싸움에
서 위로를, 죄악으로 상처 입은 영혼에 치유를, 죄
악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신다.
이 책은 누구나 이해할 만한 쉬운 말로 씌어졌을 뿐
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너무나 치열
한 영적 싸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더욱
이 이기심과 은밀한 죄,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기
도가 막히고, 하나님과 이웃을 자유롭고 온전한 마
음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오늘날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세상에 기쁨과 소망의 소식을 전해 준다.
1997년 8월에, 뉴욕 리프톤에서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Johann Christoph Arnold)

 

차례 CONTENTS
독자에게 5
서문 / 존 탈보트(John Michael Talbot) 9
1. 싸움(the struggle) 2 0
2. 유혹(temptation) 24
3. 자범죄(自犯罪, Deliberate Sin) 2 8
4. 의지(the will) 32
5. 암시의 힘(the power of suggestion) 3 6
6. 자기암시(autosuggestion) 3 9
7. 미혹(迷惑, Fascination) 44
8. 억압(suppression) 4 8
9. 믿음(faith) 52
10. 자기 포기(self-surrender) 57
11 . 자백(confession) 62
12 . 기도(prayer) 67
13 . 초연함(超然, detachment) 72
14 . 회개와 중생(repentance and rebirth) 79
15. 치유(healing) 87
16. 정화(淨化, purification) 95
17. 십자가(the cross) 1 02
18. 하나님 나라의 삶(living for the kingdom) 1 08

 

서문
존 탈보트(John Michael Talbot)
기독교 전통 안에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다스
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혜를 담은 책들이 많은
데, 그 중 하인리히 아놀드의 『생각 지킴』(Freedom
From Sinful Thought, 죄악된 생각으로부터의 자
유)은 아주 대표적인 책이다. 서방의 성 어거스틴
이나 동방의 수도사들과는 달리, 아놀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전통으로부터 온 죄와 유혹에 맞서
서 생생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통찰은 진솔
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
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넘
쳐난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
오는 생각들을 얕보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악한 영들도 이 생각을 통해서 우리 영혼에서
은밀한 싸움을 일으킨다. 그래서 1 5세기 주교인 막
시무스(Maximus)는 이렇게 경고한다. “행위보다
마음으로 죄를 짓기가 더 쉽기 때문에 그만큼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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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자체와 맞선 싸움보다는 마음속에 강하게 새
겨진 연상(聯想, image)과 싸우는 전투가 훨씬 더
어렵다.”
예수님은“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마
15:19)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너희의 보물이 있
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마 6:21 )고 말씀하
신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
게 은밀한 생각과 상상의 영역은 자신만의 보물창
고이다. 누구든 죄짓기를 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은
밀한 상상의 세계를 포기하려 들지도 않는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승패가 좌우되는 곳이 바로 생각의
영역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1-2)고 말한다. 바울은 행동의 변
화가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
해, 죄악된 생각들로부터의 자유가 선행되지 않고
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에 이를 수 없
다는 것이다.
죄악된 생각들에 대한 아놀드의 관심은 이처럼
변화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관
심은 완전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아니다. 우리는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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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 원하지 않는 연상이나 생각에 시달린다. 하지
만 아놀드도 분명히 말하듯이, 우리를 유혹하는 생
각 자체는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
하느냐이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
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들어온
악한 생각을 방치하고 키우느냐, 아니면 그것과 맞
붙어 싸워서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분투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죄의 저주를 깨뜨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
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을 의미 있게 하시는
분도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분투하는 목적이며 푯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
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시험과 유혹
과 염려의 한가운데서도… 우리 모두 여기 이 땅에
서 주님을 찬양합시다. 편안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
가 아니라 우리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유혹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영혼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싸움은 유쾌한 것이다. 싸움
에서 패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
이다. 더 나아가 아놀드가 강조하듯이, 우리는 “주
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
록 여전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전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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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남김없이 무조건적으로 주님께 드리게 된다.
…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용서와 정결함과
평안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형
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끌 것이다.”
죄악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어 누릴 수 있는 자
유는 놀라운 선물이다. 모든 독자가 이 책에 들어
있는 지혜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 하나님의 사
랑이라는 선물을 경험하면 좋겠다. 그분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좌절의 수렁에서 허우적거
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선물을 경험하기만 하
면, 온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라도 부러울 게 없다.
1997년 9월에, 아칸소 주 유레카 스프링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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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ohann Heinrich Arnold,
1913 -1982)가 6살일 때, 그의 부모인 에버하르드
와 에미는 베를린의 상류층 가정을 떠나 독일 중심
부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 자나츠(Sannerz)로 옮
겨 왔다. 거기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들은 사
도행전 2 장과 4 장, 그리고 산상수훈에 기초하여 모
든 소유를 통용하는 온전한 공동체에서 살기 시작
했다. 당시 유럽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이던 시
기였다. 이처럼 불안정했던 전후의 상황은 저명한
편집자요, 신학자요, 대중적인 연설가였던 그의 아
버지를 이런 믿음의 결단으로 내몰았고, 또한 수많
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경직된 사회 종교적인
인습에 맞서서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
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이 시기는 아
놀드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때였으며, 이 조그
만 공동체로 꾸준하게 모여드는 젊은 무정부주의
자, 부랑자, 교사, 예술가 및 자유사상가의 행렬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모두 의미 없는
기독교의 위선을 모조리 내던져 버렸으며,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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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자나츠에서 발견한 헌신의 삶과 기쁨에 끌
리게 되었다.
아놀드는 11 살이 되어서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브루더호프 곧 “형제들의 안식
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 공동체에 평생회
원으로 자신을 헌신하였다. 1 938년에 그는 “말씀
의 종”(목사)이 되기로 결단하였으며, 1 962년부
터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브루더호프 운동의 장로
로서 섬겼다.
아놀드가 돌보던 무리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교
회와는 많이 달랐고, 그는 말씀에 대한 판에 박힌
통찰을 가진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어떤 공식적인 신
학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내외적인 평안을 위하여 사람들을 깊이
돌보는 진정한 “영적 안내자”(Seelsorger)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최고의 우
선순위를 두고 형제와 자매들을 섬겼다. 그들은 노
동과 여가, 공동 식사, 업무 회의 그리고 예배 시간
가운데 자기들의 일상적인 삶을 서로 나누었다.
아놀드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에서든 영적인 삶
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담당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저술한 모든 작품에 흐르는 눈에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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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중심적인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중
심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이
다. 그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주장하는 바는, 그
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았거나 회개와 사랑
을 전하는 그분의 메시지에 직면하지 않았다면 살
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
이 없다는 것이다.
아놀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믿음은 그에게 죄
와 맞서는 비범한 용기를 주었다. 그는 복음서의 요
구에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
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있는 악과 맞서 싸
운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에게 있는 악의
문제와 맞서 싸웠으며, 이 싸움은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적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이것
은 그로 하여금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비난을
듣게도 하였지만 그는 교회의 영광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토록 냉담하고
무관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때로는 그가 아주 날카롭게 회개를 요청할 수 있
었던 것도 역시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
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깊은 곳까지도 찔러 쪼개도
록 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반복적으로 이를 거
부하면서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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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
으로 우리를 찌르도록 요청해야 한다.”며 매우 강
력하게 회개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에 무관
심 할 수 없다는 그의 곧은 심지로 인해 가능했다.
그러나 아놀드는 이와 같은 강한 면모와 함께 회개
를 요청하시는 것과 동일한 열정과 끈기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본받는 풍성한 사랑과 용서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장로로서 아놀드는 매일
홍수 같이 쏟아지는 편지의 내용을 읽고 또 읽고 기
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
며, 그래서 그가 보낸 답장은 겸손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상담하고, 위로하고,
훈계하며, 심지어 따끔하게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
나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비난하
거나 경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비록 수많은 사람들
이 해마다 그에게 나아왔지만, 죄악으로 가득한 그
들의 편견 혹은 개인적인 거룩함을 초월하여, 그는
언제나 그들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만들어 그리스
도께로 나아가게 하였다.
아놀드는 자신이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주 그는 문제
가 되는 사안을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말하거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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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가운데 그것을 묵상해 보아야겠다고 말했다. 그
렇게 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느끼곤 했다. 성경의 난해한 구절이나 명백한 모순,
혹은 신비로운 본문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
을 받으면, 그는 이렇게 답변하기도 했다. “이 말
씀에 대하여 아주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저도 그것
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그 말씀은 그냥 하
나님께 맡겨 둡시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에게 밝히
드러날 겁니다.” 그리고 그는 해석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폭넓게 읽고 전체
적인 맥락을 훤히 꿰뚫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교
양을 마음을 다루는 교양으로, 자신의 지식을 인간
의 영혼을 다루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길에 대한 자
신의 이해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
으로 거듭나게 만든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놀드가 경청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형제와 자매들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였으며, 친구들과 낯선 사람과 비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리고 무
엇보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였다. “저는 형제애
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 깊은
곳에서 귀를 기울여 듣기 원합니다. 저는 제때 예수
님께 죄를 자백하기 원합니다. 저는 영적으로 가난
해지기 원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보내는 곳이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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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든지 순종하여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
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원합니다.”
아놀드의 저작에는 더 광범위하게 고려해야
할 측면들이 많이 있다. 그는 아버지인 에버하르
트 아놀드, 독일 목회자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와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의 ‘하나님 나
라를 현재의 실재로 보는 시각’과 마이스터 에크
하르트(Meister Eckhardt)로부터 절대적인 영향
을 받았다. 에르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신비적인 세
계를 추구하는 아놀드 자신의 경향에 나타나고 있
다. 여기에는 아놀드가 그들의 책을 많이 읽어 자주
언급하였던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Dietrich von
Hildebrand), 프리드리히 폰 가게른(Friedrich von
Gagern) 및 찰스 보두앵(Charles Baudouin)이 포함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아놀드의 메시지에 무시할
수 없는 이상의 폭을 더해 주었다. 그 이상이란 일
상적인 삶의 시시한 일로부터 우리의 눈을 들어 흔
히 무시되는 더 커다란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예수님의 원대한 비전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조그만 일상 너머로 눈을 돌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선물이 되겠는가!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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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야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분에게 우리의 조그만 세계와 자기중심적
인 자세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적어도 그분에게로 거두어들여야 하는
대 추수, 곧 다가오는 미래의 세대들을 포함하여 모
든 열방과 민족을 추수하는 일에 대한 도전을 받도
록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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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움
(the struggle)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씩 죄악된 생
각이라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끊
임없이 원하지도 않는 그런 감정이나 연상에 사로
잡히는 사람에게 여간 고통스런 문제가 아니다. 모
든 생각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
러므로 그것이 악한 생각이라면 저주나 다름없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악한 욕망이나 생각으로 고통
당할 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게 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결심이
자동적으로 그들을 죄와의 싸움에서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정말 지겨울 정도로 꽁
무니를 쫓아다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질투, 원한,
불신과 같은 모습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적
상상, 증오, 신성 모독, 심지어 살인 충동과 같은 모
습으로 늘 따라다닌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
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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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아신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
서를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사악한 생각은 마음
에서 나온다.”는 것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
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단순한 말씀
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원치 않는 생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
은 그 사실을 고백하길 두려워한다. 또한 그들은 자
신만이 그런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
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두 번 이상 마귀에게 굴복
하는 경험을 한다. 마귀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악의 세력으로 각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
을 공격한다. 일단 마귀가 우리 마음에서 한 자리
라도 차지하게 되면, 악은 거기에 뿌리를 내려 우
리의 언어생활을 사로잡고, 그것이 행동으로 발전
하게 만든다.
1920년대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나는
유대인을 증오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우리 동
네 건너편의 가스트하우스(Gasthaus) 마을은 정도
가 심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반유대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태도
에 완강히 반대하셨다. “현재 그것은 단지 악한 말
에 지나지 않지만 반드시 악한 행동으로 이어질 것
이다. 저 사람들은 언젠가 말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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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머지않아 아버지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자주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
기 때문에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감찰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런 상
상에 사로잡혀 갈대처럼 흔들릴 때에도, 우리의 본
심은 악한 생각으로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
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알고 계신다. 그래도 이 사실
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면, 13 세기 신비주의자
였던 에크하르트(Eckhart)의 말에서 위로를 얻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서 타오르
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목말라해야 한다. 아직도 이
런 갈망이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갈망
을 목말라하라.” 그렇다. 순전함에 대한 갈망은 아
무리 미미하고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출발점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악한 생각을 즐기는 것과 거기
에 맞서 싸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상담한 사람 중 어떤 이는 원치 않는 생각과 욕망에
너무나 끈질기게 괴롭힘을 당한 나머지 지구 끝까
지라도 도망쳐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마
음의 평안과 순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대
가라도 기꺼이 지불하려고 했다.
이런 결단도 훌륭한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우
23
리 자신의 힘으로는 자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선과 악의 싸움은 단지 마음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롬 7:23 )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
럼 죄와 성령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차원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승리를 약속하
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요구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실체에 대해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이러한 싸움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
가지이다. 오히려 이 책은 죄의 실체를 알고, 죄의
엄청난 무게로부터 자유롭기를 정직하게 갈망하며,
마음의 정결함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다.
이 책의 주제인 죄악된 생각은 그리 유쾌한 주제
는 아니다. 하지만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수많은 사
람들이 이 문제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
었다. 이 조그만 책이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십
자가의 자유를 맛보게 한다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24
2. 유혹
(temptation)
어디까지가 유혹이고 어디에서부터 죄를 짓는
단계일까?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유혹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앙갚음하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용서한다면 아직 죄를 범한 것
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털지 못하고 원한
을 품고 살아간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란한 생각이 들었을 때 이를 거부한다면 죄를 짓
는 것이 아니지만, 가령 성인용 잡지를 사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그런 생각을 자발적으로 좇는다면
당연히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제는 유혹을 받았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
느냐에 달려 있다. 마르틴 루터는 악한 생각을 머리
위에서 맴도는 새로 비유한 적이 있다. 새들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
조차도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천사로 가장해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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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성경 말씀을 인
용하면서 주님을 유혹했다. 세 번째 유혹에 주님은
사탄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는 이렇게 말씀하셨
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
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하였다!”
사탄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고는 예수님
을 떠났다. 그 후에 천사가 그에게 내려와 주님의
시종을 들었다(마 4 :10-11 ).
한때 예수님께서 평범한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내게는 신성 모독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진 않으셨지만 유혹을 받
으셨다. 이 사실은 우선 자신의 내면에서 영적인 삶
을 살아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심각한 유혹과 싸
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도 매우 중요하
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
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
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실상 주께서는 천사들을 도
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와주십니
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자매들과 같아
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
26
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속하
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
하셨으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
다”(히 2 :14 -18, 표준새번역-이하 생략).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리기를 간절히 원하
고 있다. 그래서 그는 4 장 1 5절에서도 이를 되풀이
하여 전하고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
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
다”(히 4 :15).
예수님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생
애 가운데 가장 격렬한 싸움터였던 겟세마네에서조
차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으
셨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둠의
세력과 겨루셨으며, 주님의 마음을 유혹하는 악한
영들의 온 군대와 대결하셨다. 주님은 끝까지 하나
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셨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어둠의 세력과 맞서는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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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은 일평생 내내 지속될 것이다. 이는 심히 끔찍
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우
리를 괴롭히는 악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
미한다. 우리의 대적은 단순히 생각, 감정 혹은 연
상 정도가 아니라, 악한 영들 곧 바울이 말했듯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엡
6:12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유혹이 찾아왔을 때에는 그때마다 하나님
의 응답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이
유는 없다.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
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
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
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
십니다”(고전 1 0:13 ).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싸
우신 것만큼 필사적인 싸움을 겪어야 할 사람은 없
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
기 위해서 유혹을 포함해 모든 인간의 무거운 짐을
단번에 짊어지셨다.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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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범죄
(自犯罪, Deliberate Sin)
원하지 않는 생각이나 연상으로 괴로움을 당하
는 것과 그런 생각을 의도적으로 좇는 것은 전혀 별
개의 문제다. 누군가 폭력적인 영화나 음란 잡지에
서 얻는 쾌락을 맛보려는 의도로 그것들을 본다면,
이는 유혹과 싸우는 것이 전혀 아니다. 아마도 사람
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악한 생각을 자발적으로 즐기는 순간, 미처 의
식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는 어둠의 세력에 농락당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라거나 “그냥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는 거
잖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은 결과를 낳는
다.”는 말처럼 구체적인 현실이 되며, 더구나 그
생각이 악한 것이라면 더욱 쉽게 악한 행동으로 발
전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
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
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 1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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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청소와 같은 끔찍한 사건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자라난 악의 열매이다. 가령,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Holocaust)과 같은 특정 민족
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나 이것과 다른 다양한 형
태의 박해는 말할 것도 없이 온갖 편견과 중상이 수
세기에 걸쳐 자라나 열매를 맺은 결과다. 1 960년대
미국 대도시를 휩쓸었던 폭동들도 마찬가지로 수백
년 간 지속된 인종 차별이 폭발한 결과이다. 폭력적
인 성범죄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는 범인들이 범
행 전에 본 유해 음란물과 범죄 사이에 밀접한 관계
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모방 범죄들은 가장 잔
인한 범행이 마음과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을 명백하게 증명한다.
청소년기에 나는 ‘평범하고 착한 성품’의 순
박한 독일 사람들이 나치즘의 발흥으로 악한 영에
사로잡혀 거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
록 이런 악에 저항하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많이 있
었지만, 대다수는 기꺼이 그 악에 굴복해서 유대인
대학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소극적인
침묵과 무관심을 보이면서 다른 방식으로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것은 그 나라를 지배했던 몇 사람의 문
제가 아니라, 사악한 어둠의 세력에 자발적으로 굴
복한 수백만의 사람들에 관련된 문제였다.
30
물론 의도적인 죄는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
난다. 목사로서 내가 특별하게 관심을 가졌던 영역
가운데 하나는 사교(邪敎, occult)이다. 나는 여기
에 빠진 많은 사람들과 자주 상담해 보았다. 사람
들은 흔히 이를 일종의 새로운 학문이나 철학쯤으
로 여겨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건강
반지를 끼는 것, 점술을 행하는것, 또는 죽은 영혼
과 교류하는 등과 같은 미신적인 행습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심령술이 아무 해가 없어 보이고 또한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악한 영의 세력
에 사로잡힐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단
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
지 못한다.
악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들은
악의 근원을 밝히고 사탄의 비밀스런 정체를 파헤
치려고 한다.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그것이 과연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심스럽
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살인,
간음 또는 그 외의 다른 죄악들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는 것같다.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실험이라는 미명하에
악을 장난삼아 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른바 악의
31
논리를 이해하려 든다. 또한 언제든 어두움의 세력
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악과 놀아나는 과
정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악의 세
력에 단단히 사로잡히게 된다.
우유부단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고, 마
음의 고삐를 늦추어 둔 채 죄에게 굴복하면서 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온전한 영
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마귀는 지속적으로 우리
를 지배하려고 든다. 여기에는 단지 사교만이 아니
라,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질투, 미움, 성적 탐욕,
지배욕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말한다. 삶 가운데 간섭
하시는 하나님을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마음속
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통
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끊어 버리
는 것이다.
우리는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반드시 연민
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예수님도 “상한 갈대
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다.”(마 12 :20)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
령을 근심케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도 역시 분명하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탄
과 마귀들을 정복하신 완전한 승리자이시다! 그리
고 그분은 우리에게 이 싸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적
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32
4. 의지
(the will)
유혹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내면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악의 구름을 걷어내고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
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가? 권투 경기나 길거리에서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이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싸움에서는 의지력이 승패와 아무런 상
관이 없다.
이처럼 의지력만으로는 인간의 죄성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의지는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나 여기
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 이래저래 왜
곡되어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한
독일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특히 내면의 싸움에서
의지는 마치 마비된 것처럼 전혀 소용이 없을 수 있
다. 사실, 의지는 그토록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
한 생각에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이를 현실로 나타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
을 할 수도 있다. 프랑스 심리학자인 찰스 보두앵
(Charles Baudouin)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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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이 마음에 강요될 때, 여기에 맞서기 위해 이
루어지는 온갖 의식적인 노력은,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치달아 그 생각을 한층 심화시
킨다. ...결과적으로 그런 지배적인 생각이 더욱 강화된
다.”
이 문제를 깊이 인식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
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
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롬 7:15-17).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
는 본질적인 갈망인 양심을 의지와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지는 유혹에 맞서 상상과 욕망을 억제
하려고 하지만, 양심(초기 퀘이커 교도들은 이를 내면
의 빛(inner light)이라 불렀다)은 우리를 진정한 마
음의 순전함으로 이끈다. 양심은 그리스도께서 거
하시는 영혼의 가장 깊숙한 장소로 인도한다. 그래
서 양심이 마음을 강하게 다스리면, 어떤 유혹이 와
34
도 이겨낼 수 있다.
이 두 의지 사이의 싸움을 살펴볼 때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도대체 이런 원하지도 않
는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유일한 정답은 우
리의 마음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가 종종 악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탄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그리 건전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
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든 사고와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의
의지력만으로 악한 생각을 극복할 수 없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겸손하게 우리의
힘만으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단순히 의지력만으로 악과 대항
하려 한다면, 악은 쉽사리 우리에게 승리를 거둘 것
이다. 보두앵의 동료인 에밀 큐(Emil Coue)의 말을
빌리면, “의지와 상상이 싸울 경우 예외 없이 의지
가 패배한다.” 하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주
님을 향해 부르짖는 갈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안에서 악은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우
리가 깊고 굳은 의지를 신뢰하며, “예수님, 내 뜻
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순전
함이 저의 부정함보다 승(勝)하며, 주님의 자비로
저의 시기심을 고쳐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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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심을 물리쳐 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그
러면 모든 악은 점차로 잠잠케 된다.
우리가 신실하지 않을 때조차 예수님은 우리에
게 전적으로 신실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또 예
수님은 저 멀리 닿지 못하는 곳에 계신 구주가 아
니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인간적인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실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
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의 안에서 약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
을 대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여 보고,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
지 못합니까? 모르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나
는 여러분이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
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
러내려고 함이 아니라,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게 하려
고 함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우
리가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
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
다”(고후 13 :4-9).
36
5. 암시의 힘
(the power of suggestion)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의
서재에서 아주 낡고 바랜 보두앵의 『암시와 자기
암시』라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악한 생각과 관련
된 전반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자주 이 책을 들
춰보았다. 보두앵에 따르면, 암시란 외부로부터 무
의식 속에 들어온 감정이나 연상으로 말미암아 어
떤 생각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자극하는 힘이라고
간략하게 정의된다.
즐거움이나 고통, 혹은 어떤 감정에 대한 생각
을 하고 있다 보면 실제로 마음이 즐거워지거나 고
통스러워지는 그런 감정에 이르게 된다. …따듯함
을 연상시키는 태양을 바라만 보아도 온기가 실제
로 느껴지는 것 같고, 반대로 눈이나 바깥에서 온도
계의 낮은 눈금을 보기만 해도 춥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암시(suggestion)는 우리의 삶에 날마다 끊임없
37
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누
구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일하는 가
운데 서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날
마다 읽고 보는 책, 신문, 잡지, TV프로나 영화, 그
리고 홍수 처럼 쏟아지는 상업광고와 같은 무생물
체를 통해 더욱 교모하게 강력한 암시를 받는다.
물론 암시에는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
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다. 다만 원하지 않는 악한
생각과 싸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암시는 양심의
소리를 거스르도록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좀더 넓은 차
원에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낙태나 동성애처럼 뜨
거운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에 대해 현대인들이 취
하는 입장에서 암시의 부정적인 힘을 확실히 알게
된다. 이는 또한 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에서
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너무나 강하게 그
런 부정적인 느낌을 받아서 흔히 이런 주제들에 대
해서 객관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전문가들이나
매체에서 말하는 대로 주관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
기보다는 각자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세
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이 시대를 풍미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은 끔
찍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모습에서 가장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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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의 패션이나 문학, 예
술, 음악을 통하여 창조주로부터의 내면적인 분리
와 분열을 표출하고, 인간의 저급한 본능을 부추기
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좀더 깊숙한 차원에서 살펴
본다면, 이런 시대정신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정부
와 기업의 부패, 가족과 인간관계의 붕괴, 학교 제
도의 해체, 대중 매체와 의료계와 법조계에 만연한
부패,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수많은 교회에
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영적 공황과 위선이다.
이 모든 시대정신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
하다. 주님은 이 세대의 영을 “사탄의 영,” “형
제를 송사하는 자,” 또한 “태초부터 살인하는
자”라고 폭로하시며 단호하게 정죄하신다. 그러
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도
록 촉구하신다. “이처럼 소란스럽고 첨예하게 분
열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어디에
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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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기암시
(autosuggestion)
암시와는 대조적으로 자기암시(autosuggestion)
는 “외부의 영향력에 반응하여 내부로부터
상상력이라는 반사적인 힘을 내보내는 것”(보두
앵)이다.
자기암시는 긍정적인 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만약 나쁜 이미지를 건전한 이미지로 대체하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
지만 내 경험상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악한 생각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로 그런 생
각을 더욱 촉발시키고 전면에 등장하게 만든다. 이
것도 역시 자기암시이다. 이런 식으로 의지와는 달
리, 우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내적인
긴장 상태로 스스로를 내몰아, 하나님을 향한 시선
을 놓칠 뿐만 아니라 이런 싸움을 헤치고 나가겠다
는 결단력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암시는 또한 삶의 다른 영역에도 막대한 영
향을 끼친다. 가령,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 도랑
이나 벽과는 반대편으로 달리려고 의식적으로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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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애를 써도 결국 도랑에 빠지거나 벽에 부딪치고
말았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봉
변을 당하지 않으려고 우리의 의지로 온갖 애를 쓰
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자기암
시를 함으로써 결국 넘어지고 만다(혹은 지나친 집
중 탓일까?).
보두앵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 글에서 나름대로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며, 원하지 않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몰아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려우며 실패
하기 쉬운지 밝히고 있다.
누구나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흔히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의식
적으로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당혹감만 더해
간다. 그럴수록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암시
를 걸게 되고, 그러면 기억은 더욱 갈피를 못 잡게
된다. 다시 그 이름을 기억하려고 머리를 쥐어짜면
짤수록 기억은 자꾸만 더 아련해진다. 여기서 우리
는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이름이 더욱 아득해지는 독
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생각해 내려는 노력을 거
듭할수록 기억은 더욱 혼탁한 흙탕물로 변하고, 밑
바닥의 진흙을 더욱 헤집어 놓는 꼴이 되어 결과적
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조금 전만 해도 그
이름이 입에서 맴돌았는데 이제는 아예 사라져 버
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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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우선 위에
서 언급한 기억 상실과 그에 따르는 짜증과 좌절이
여러 번 거듭해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즉시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실제로도 기억력이 더 약해지게
된다. 이런 기억 상실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
게 되고, 그로 인해 기억을 못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미숙한 생각의 씨앗은 우
리의 관심에서 잊혀진 한참 후에도 무의식 가운데
남아 계속 작용을 한다. 마음속에 자꾸만 떠올라 누
구나 한두 번쯤 시달리게 되는 원하지 않는 환상,
특히 성적 환상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
다. 대개 그런 환상은 처음에는 아주 잠깐 우리의
주의를 끌었던 연상이 점점 무의식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
의 이야기가 적절할 것 같다. 야곱은 기도 가운데
마음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집중함으로써 너무나 놀
라운 꿈을 축복으로 받을 수 있었다.
보두앵의 글은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 마
음을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이 말로 인하여 독자들이 더 불안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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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자기 염려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분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연약함에 정직
하게 직면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 점검하는 사람
은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자기 판단은 반드시 우리를 죄에서 자유
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이루
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 이런 믿음 없
이 자신에게 몰두한다면, 자칫 모든 동기를 의심하
게 되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소망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깊숙한 영적 침체에 빠져들
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나의 설명
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었거나 불완전할지라도, 자기
암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책임감을 강조하려는 것
이다. 이런 책임감으로 무장할 때, 마귀가 공격하는
내면의 약점을 보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해질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유혹과 싸우는 데에만 총
력을 기울인다면, 그런 싸움을 초월하는 영역을 바
라볼 힘도, 다른 이들을 사랑할 여력도 남지 않게
된다. 해결책은 단 한 가지뿐이다. 곧 우리가 가진
온갖 근심과 염려로부터 돌아서서 예수님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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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는 두려
움과 자기 염려 속에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을 구하는 자에
게 소망과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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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혹
(迷惑, Fascination)
어떤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뜻
대로 되지 않아 좌절감을 경험했던 적이 누구나 한
두 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머리 속에서 계속해서
맴도는 노랫가락이나 그리 나쁘지 않은 이미지라
할지라도, 우리를 엄습하는 좌절감은 적지 않다. 그
러나 이런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우리는 심각
한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이
나 질투심이 문제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배신감과
원한의 감정으로 고통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수시로 찾아오는 음란한 연상과 생각 때문에 골머
리를 앓기도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어
떤 부정적인 생각에 대해 너무 근심을 한다거나, 다
른 반대적인 생각에 집중함으로써 악한 생각을 극
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희망은, 오히려 우리를 감정
적인 혼란이라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이다. 실제로 나는 악한 생각을 몰아내기 위
45
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의지적
으로 자신을 강하게 몰아치는 사람들이 때때로 저
주나 살인과 같은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아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경험상 두 가
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우리가 결코 홀로 싸우고 있
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잊어버리는데, 특히 내면의 영적 싸움이 치열하고
장기화 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오랜 동안의 상
담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곧 우리의
싸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보편적인 것이
며, 고통당하는 사람이 신뢰하는 목회자나 배우자,
영적 멘토, 가까운 친구와 교제하고 나누는 일을 통
해 적어도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돌파구가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
신하는 것이다. 일단 두려움과 의심의 영에 굴복하
면,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보두앵
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곧이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져서 그런 악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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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암시
는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되면, 사
실상 이제는 어떤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도 전혀 모르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암시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악한 속임수 앞에서 거의 마비된 느낌이나 무
력감을 경험하는 것은 마귀에 사로잡힌 상태와 아
주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악령에 사로
잡힌 경우일 수도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우리가 악한 영에게
포위된 것처럼 느껴질 때에 악한 영이 우리를 완전
히 장악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
서는 사람이 악의 세력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는 상
태를 귀신들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오늘날에도 이런 상태에 빠진 사
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으로 모든 현
상을 설명하려는 분위기에서 귀신에 사로잡힌다는
개념은 쉽사리 무시된다. 의학적으로 모든 병에 이
름을 붙이고, 어떤 병이든 치료책이 있는 것처럼 보
이게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신 의학으로도 아
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가끔
예수님이 오늘날 환자들로 넘쳐나는 정신병원을 방
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 볼 때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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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귀
신 들렸다고 말씀하실까?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인간적인 도움의 손길을 벗어나 자유 주시
는 예수님의 손길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가?
결론적으로, 악한 영에 사로잡혔든지 아니면 단
지 유혹의 단계에서 그것들을 좇고 있든지 간에, 동
일한 진리가 적용된다. 곧 오직 주님만이 성령의 능
력을 통하여 모든 영혼의 어두움과 슬픔과 두려움
을 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진리는 우리에게 미혹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냉정한 판단과 회피가 아닌
특별한 인내와 동정으로 도와야 함을 깨닫게 하며,
영적 싸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분의 손에 우리 내적 삶의 운전대를 내
어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죄를 분류하는 것이 아닌, 신약성
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궤계 즉, 어둠의 주관자가 실
제 존재하는 세력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 승리를 약속하신 주님
의 놀라운 말씀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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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억압
(suppression)
어떤 악한 생각은 쉽게 떨쳐 버리거나 간단한 기
도로 물리칠 수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내쫓기가 아
주 힘들다. 그처럼 악한 생각이 우리를 지겹도록 쫓
아다니며 괴롭히는 경우에,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
은 흔히 억압(suppression)으로 나타난다. 즉, 그런
생각을 재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 속으로 반
대되는 생각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이트와 다른 무수한 학자들이 보여 준 것처럼,
억압된 생각은 언제든지 새로이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마치 뚜껑을 닫은 빈 병을 물 속으로 집어넣
었다가 놓으면, 금방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빈 병을 가지고 계속 설명을 하자면,
유일한 대안은 얼른 그것을 건져내 물 밖으로 내던
지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억압
된 생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은 거기에 정면으로 맞서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프로이트의 문제 해결 방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다. 그는 억압된 생각을 따라 행동하면서 긴장을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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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두앵은 다른 은유를 사용하여 억압의 효과를
설명한다.
시냇물에 떨어진 나뭇잎이 있다고 하자(혹은 우
리가 의도적으로 시냇물에 떨어뜨린 나뭇잎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시내가 갑자기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바깥으로 흘러나
온다. 이때 그 나뭇잎도 함께 따라 나오기 마련인
데, 이는 동굴 속에서도 시냇물은 변함없이 나뭇
잎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비록 외부에서는 이 과정
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속에 저절로 찾아온(혹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주입한) 어떤 생각은
장·단기에 걸쳐 무의식 속에서 발전된 이후에 나
름대로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여기서 시냇물과 나뭇잎은 내면의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 우리가 마음에 긍정적인 연상이나 생각
을 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 안에 남아 어떤 작용을
일으킨 후에 다시금 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나
타나게 된다. 우리가 악한 생각이나 연상에게 마음
의 방을 한 칸이라도 내어주게 되면, 이와 동일한
일이 그대로 벌어진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오랫동
안 잠복되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제 모습을 드
50
러내고, 이전과는 달리 내면의 영적인 삶에 큰 영향
력을 미치기 시작한다.
상담 사역을 하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
다. 그들은 악한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이와 같은
두려움 가운데 살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
을 끊임없이 억압하였다. 이 가엾은 몇몇 사람들은
내적으로 너무나 고조된 긴장 상태에서 살았기 때
문에, 유혹적인 생각이 들기만 해도 정신적인 공황
에 빠지곤 하였다. 곧 그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에 빠져 살아가고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 빠져
있다면, 누구라도 제정신으로 남아 있기가 거의 불
가능하다. 그는 곧 노이로제(신경과민)에 걸리게
되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오
히려 그를 정신분열증과 같은 더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이에 따르는 환청과 환영을 뿌리치려고
애쓰지만 더욱 집요한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자연
계로부터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그러한 사람의
내적인 삶은 바람을 과도하게 불어넣은 풍선과 같
다. 결국 그것은 갑지기 터지면서 한꺼번에 억압된
사고와 감정들을 격렬하게 토해내며 요동을 친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그 어떤 내적
인 싸움에서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51
라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
러므로 먼저 우리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내적으
로 잠잠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히 파
악해야 한다. 그리고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
도 그러한 갈망에 새로이 초점을 맞추려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주기를 원하
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돕기를
원한다는 믿음에 의심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이 진
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
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또한 우리는 다른 감정을 불
어넣어 원하지 않는 감정에 맞서려는 노력이 쓸데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에 안식을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
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
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
다."(롬 8:26-27)
52
9. 믿음
(faith)
내적인 고통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을 믿
는 믿음이다. 이 말이 너무나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믿음은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고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은혜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일
종의 신비로서 감히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
는 대상이 아니다. 그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
게, 믿음은 거리가 먼 이야기이거나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믿음은 의지의 결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
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찾으면
찾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믿음은 이성, 이론, 신학 체계 혹은
지적인 설명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믿음은 그런 것
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마리아는 자신을 찾아온 하
나님의 천사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
만, 그 대신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순종하였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주
님의 여종입니다.” 이 얼마나 단순한 믿음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믿음을
53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으며,
‘여기 내가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있다.’는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
들은 또한 두려움과 염려로 자주 의심하며 주저함
으로 그분께 나아간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갈망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분에게 자신을
온전히 열기를 주저하고 꺼리는 마음도 있다. 그러
나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맡기는 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언제
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파스칼은 『팡세』(Pensees)
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주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도 나를 찾
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
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음
을 겸손히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비록 우리가 의식
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서
벌써 일하고 계신다.
물론 믿음은 우리를 급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
는다. 우리의 대적은 언제나 기회를 엿보면서 약점
을 들추어 넘어뜨릴 사람을 찾고 있다. 그리스도께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마음을 드리는 것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그분 앞에 단지 우리의 죄
나 짐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분
54
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께서 약속하시는 완전한 내적인 자유와 평안을 결
코 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축복은 순종을 요구한다.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
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분
노를 산다”(요 3 :36).
흔히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런 도움
도 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무의식적인 자기
암시에 스스로 걸려든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
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
요.”(요 6:54)라고 말씀하셨을 때, 비록 그분을 가
까이에서 따랐던 사람들조차도, 이 말씀에 순종하
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분 곁을 떠났
다. 그러나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
나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 우리
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
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 6:67-
69)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5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피의 상징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즉, 우리는 새로운 가르침이나 교리를
통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
해 정결해 진다. 그분은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
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
이다”(요 6:35).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
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
다”(요 6:47).
무엇보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해 보이고 어려울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
게 영원토록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약속에 대한 요
한의 묘사이다.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
어서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
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
7:37-38).
우리는 예수님과 떨어져서 평안을 찾을 수 없다.
예수님 당시, 그의 말을 따르기 힘들어 떠나갔던 수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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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이 소용돌이치는 어두움의 시간을 보낼
때에조차 예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신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
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
신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사
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주님, 우리를 도
우소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살,
주님의 영,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필요합니다. 모든
만물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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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기 포기
(self-surrender)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
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야 한
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
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우리를 이끄는 길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지시할 수 없다. 다
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모든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능력이 약한 데
서 온전하게 된다”(고후 12 :9).
『헤르마스의 목자들』(The Shepherd)이라는
고대 사본에서, 초대 그리스도인 헤르마스는 우리
에게 모든 인간적인 능력을 내던져야 한다는 필요
성을 역설하는 생생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 건축 중에 있는 거대한 대리석
성전으로 묘사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을 성전을 짓기 위한 건축용 벽돌에 비유한다. 여기
서 쓸모 있게 보이는 벽돌들은 숙련된 석공에 의해
적절한 모양으로 다듬어져 사용된다. 그런데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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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들은 버려지게 된다. 나에게 이 그림은 아주
단순하지만 심오한 의미를 던져 준다. 곧 하나님은
오직 그분의 목적에 맞게 기꺼이 다듬어지기를 소
망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분의 필요를 섬기고자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을 사
용하신다.
그렇다면 진정한 포기란 무엇인가? 사람은 더
힘센 사람에게, 군대는 더 강한 군대에게 굴복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께
굴복할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
기 때문에 그분께 굴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가
운데 어떤 것도 온전한 포기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
님의 선하심을 맛볼 때, 오직 그분만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에만, 기꺼이, 무조건적으로, 그리
고 사랑으로 그분께 마음과 뜻과 영을 다해 굴복할
수 있다.
어느날,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방법 즉, 자신의 힘
을 어떻게 완전히 내려놓고, 무력화시키며, 제거하
여 내던져야 하는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
운 일이다. ...그것은 쉽사리 얻어지지 않으며, 단 한
번의 커다란 결단을 통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
로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셔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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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가 인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기점이고
은혜의 근원이다. 결국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가 우리의 능력을 포기하는 만큼 우리안에서 일하
시며, 우리를 통해 거룩한 일을 성취하신다.
자연히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
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초청하는 일이다. 그
러나 이 말이 우리의 초청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거나 어떤 일도 행하기를 원치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
으로 자신에게 우리 삶을 내어놓기를 기다리고 계
신다는 뜻이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
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 :20).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전능하신 분
이라면, 왜 사람들에게 자기 뜻을 억지로 관철시키
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온전
히 준비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
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시며 그
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시기도 하지만, 사람들에
게 자기의 선한 의도를 억지로 강요하시는 분이 절
대 아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녀에게 자신의 선한 의도를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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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강요하거나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그 아이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 여길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은 누
구에게든지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선
하심 가운데로 나아가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것인
가?”라는 중대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확신하건대, 우리가 이 책에서 밝힌 자신과의 싸
움 때문에 이러한 자기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
기포기는 우리를 유혹하는 강력한 힘과 맞서 싸울
때 가능해 진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너무나 힘겹게 싸워
야 했기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기까지 하
였다. 악의 세력이 온 사방에서 그분을 에워쌌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함을 지켜내셨다. 그분의 자세
는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
시오.”(마 2 6:39)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이런 자
세를 본받아야 한다.
예상치 못한 비극이나 죽음, 고통이나 갑작스런
이별 같은 최악의 상황은 대개 우리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삶 가운데 발생한다. 죄악된
생각과 맞서서 싸우는 싸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런저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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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들 때쯤 우리는 새로운 공격을 받을 수도 있
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일한 해답은 예수님께 완전
히 순복하는 데 있다.
누구나 힘겨운 시기를 거치기 마련이며, 어떤 사
람에게는 이 싸움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을 오르
는 일처럼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
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
니다”(계 21 :1).
62
11 . 자백
(confession)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2 -24 절에서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면 어둠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한 마음을
품고 그분의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선,
내면의 눈이 정결한지,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한 수
치심으로 내면의 눈이 흐려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
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숨겨진 죄의 짐을 지고 있
다면, 결단코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곧 눈이 성치 못하게 되어 온몸이 어둡게 된다.
자백(confession)이란, 아주 단순하게 정의하면,
누군가에게 우리의 죄 짐을 내려놓아 그 죄의 세력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를 실행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보두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너
무나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이를
쉽사리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연이어 지
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불행을 자초하고 있
63
음이 사실이기에,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철저하게 정직한 태도로 임하는 것
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십시오.”(약
5:16)라는 명백한 충고를 듣고서도, 오늘날 수많
은 그리스도인들은 자백의 필요성에 의문을 갖는
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너무 ‘가톨릭적인’ 개념
이라고 무시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비밀
스럽고 인격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분
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이는 아주 어리석은 주장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히 4 :13 ). 단순히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
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서로 고백하
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의 세력으
로부터 완전히 벗어 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짐이, 대개의 경우에서
처럼, 특정한 의식적인 죄를 포함하고 있다면, 이것
들은 남김없이 반드시 고백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보두앵이 권면하는 “철저한 정직함”은 필수적이
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정결한 양심이
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더 넓
64
은 영역에서 악의 공격을 받고 거기에 굴복하거나
부적절하게 반응하여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러한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역시 그것
도 고백해야 한다. 이 말은 무의식 속에 있는 아주
조그만 일들까지 모두 파헤치라는 뜻이 아니다. 오
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잘
못된 것을 지적해 주실 때, 우리 또한 인정하며 용
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백의 목적은
자기 염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해방을 누리
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발견하
기 원한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완벽하게 한데 얽혀 있다.
우리가 양심의 소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우리의 믿음은 좌초(坐礁)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애당초 우리는 정결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도가 믿
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은 정결하지 않다고 단언한
이유이다. 믿음 없는 양심은 정결함을 유지하게 하
는 어떤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신뢰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죄를
자백하면, 이러한 죄고백을 통해 새로운 유대 관계
가 형성된다. 사복음서에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곳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이처럼 예수님은 공동체
의 유대를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실제로 그분은 두
65
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연합하여 모인 곳에서 그
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공
동 노동, 공동 식사, 공동 기도를 하는 형태이든지,
친구나 부부들이 독서나 묵상 모임을 가지는 형태
이든지 상관없이, 이러한 연합은 공동체를 의미한
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제를 통해 우리는 죄
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안전하게 보
호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확보하게 된다는 사실
이다. 홀로 고립된 마음은 커다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고백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사람들은 상당액의 돈까지 지불하면서 정신과 의사
를 찾아가 자기들의 고통과 죄의 문제를 털어놓는
다. 그러면 이 정신과 의사들은 온갖 치료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이 잠잠해지도록
돕는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죄에 대한 어떤 양심의
가책 없이, 단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쏟
아 버리는 것에 불과하므로 고백을 통한 어떤 효과
도 얻을 수 없다.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정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우리가 죄로부터 돌아서서
선을 행하려고 헌신할 때, 자백은 기쁨이 된다. 죄
를 숨기려고 했던 가면을 벗어 던질 때, 은폐의 마
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즉각적으로 변화를 경
66
험하는 사람들을 봐 왔다. 그 사람들은 죄가 신체적
으로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다는
심한 스트레스 가운데 나를 찾아왔으나, 일단 가슴
에 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고 거기에서 빠져
나와 해방을 경험하였다.
본회퍼(Bonhoeffer)는 이런 변화를 멋지게 묘
사하면서 그것이 단지 감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원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가운데
그 노인은 한 형제의 목전에서 고통스럽고 수치스
런 모습으로 죽어간다. 이런 식의 굴욕은 너무나 힘
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피하려고
꾀를 부린다. 그러나 한 형제의 눈앞에서 스스로 이
런 깊은 정신적, 신체적 굴욕의 고통에 처하는 가운
데, 우리는 자신의 피난처요, 구원이신 예수님의 십
자가를 경험하게 된다. 그 노인은 죽지만, 그는 하
나님안에서 진정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 이제 우리
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67
12 . 기도
(prayer)
마태복음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은
영적인 싸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기도를
권면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에베소서
6장은 가장 깊이 있게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
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
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
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
오.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무
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
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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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가지십시오. 온갖 기도와 간구로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또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
며,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엡 6:10-18)
또 다른 중요한 본문은 마태복음 6장 1 -18절
인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
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
다.”(6절)라고 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
다 항상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가 우리의 사생활보
다는 오히려 겸손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경
건을 뽐내지 않도록, 그리고 이방인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면서 길게 기도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
하신다(5, 7절).
이처럼 기운을 북돋우는 말씀들에도 불구하고,
죄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에게 의
미 있는 기도 생활이란 여전히 그림의 떡이 될 수 있
다. 수년 전에 내가 한번 상담한 적이 있는 어떤 사
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특정한 죄와의 싸움에서 벗
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몇 시간씩
69
열정적으로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기도가 아무 소
용없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
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반항심이 어떤 것이든 거기
에서 자유롭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였다. 그
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절
망하게 되었으며, 그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적인 동요만 키우는 것 같
았다.
어떻게 이 사람이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경우
마다 상황이 다소 다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일반적
인 진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곧 우리의 기도
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반응하지 않
으시는 하나님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불
신앙의 문제는 아닌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한다. 자
기암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우
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그것은 우리가 더 열심
히 몸부림칠수록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무기
력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침몰시킨다. 여기서 해답
은 그런 몸부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이다.
우리는 자주 특별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원하시는 것을 그분께 아뢰기보다는 자기가 원
하는 것만을 구한다. 대개 사람들은 “마음이 가
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다.”(마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신비스런
70
지혜를 잊어버린다. 심령의 가난함이란 비움과 잠
잠함, 정직과 겸손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경이 곤두
선 긴장 상태나 뒤엉킨 감정으로 인한 동요 상태와
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위하여 ‘억지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곤
고(困苦)한 죄인으로서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적인 상태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런 내면의 모습을 그럴싸하게 꾸미려
고 애쓰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애써서 자신을 꾸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
님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스
스로 상상하려는 노력과,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경건
한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잘 귀
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신다는 기대는 부질없는 짓
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
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
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 4 :6-7)
하나님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
제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다니엘은 이스라
71
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
지만, 3 주 동안이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런 다음
에 한 천사가 환상 가운데 나타나 그에게 이렇게 말
하였다.
그가 내게 말하였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이 일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
여지기로 결심한 그 첫날부터, 하나님은 네가 간구하는
말을 들으셨다. 네가 간구하는 말에 응답하려고 내가 왔
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천사장이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막았다. 내가 페르시아에 홀로 남아 있었으므로, 천
사장 가운데 하나인 미가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 내
가 마지막 때에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깨닫게 해주려
고 왔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이
다”(단 1 0:12 -14 ).
비록 천사들이 그에게 응답을 가져 올 때 어둠의
권세들이 방해를 했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
를 처음부터 듣고 계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
에서 승리한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둠의 세력
들은 활동하고 있다. 다니엘의 기도처럼, 우리도 대
개 곧바로 응답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
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이것을 굳게 믿
고 나아가자.
72
13 . 초연함
(超然, detachment)
한창 싸움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을 느낄 때, 그것은 여
전히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재하신다는 증거이
다. (심지어 우리가 이런 싸움을 통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또한 이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
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따를 만한 여력이 우리
에게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 한 우리는 지속적
으로 그 싸움을 싸워 나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
싸움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계신다. 이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린아이처
럼 믿는다면, 어둠에서 자유와 빛 가운데로 인도하
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
다. 그러나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아우성치고 있는 다른 여러 소리들을 헤치고, 어떻
73
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데 필요한 내적인 고
요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가 지으신 시(詩) 가운데 이 질문을
다루면서 나름대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쓴 작품이
하나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향한 애타
는 갈망을 토로함으로써 그분을 평온함 가운데 기
다릴 수 있었다. 이런 평온함을 13 세기 독일의 신비
주의자 에크하르트는 “초연함”(detachment)이
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날
마다 꼭 필요한 것이다. 초연함이란 그날의 모든 긴
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일, 여가,
개인적인 삶에 대한 염려로부터 온갖 뉴스와 스포
츠,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골칫거리들로부터 내일
에 대한 염려 때문에 생기는 산만함으로부터 벗어
나는 것이다. 초연함이란 잠잠히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의 일하심을 깨닫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다루기 힘든 생각”조차
도 굴복시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
이 다른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전해지게 된
다. 이것은 물질주의, 부도덕, 악의로부터 속임수,
불신, 증오로부터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온갖 미혹
의 영으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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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다시 한번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자
들에게 악한 영이 우리를 공격할 명분을 흔히 이곳
에서 찾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를 명
심하고 있다면,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초연함
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해진다. 우리 마
음속에 들어오도록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
든, 그것은 밤새도록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진정한 초연함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이것을 근심과 염려
의 구실을 삼아서는 안 된다. 사실상 이런 싸움을
통해 우리를 수렁에 빠뜨려 전혀 선한 것을 맛보지
못하게 만드는 지름길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
는 사람들을 많이 상담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바
라보는 데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항상 긴장하고 있
으며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한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에크하르트(Eckhardt)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오로지 이것만이 완전하고 참된 의
지이며, 자기 의지가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
게 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를 가장 완전하게 만드는
75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조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 순간, 그녀
가 취했던 어떤 행동도 그녀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자기
의지를 포기하자 그 시간부터 진정으로 영원한 말
씀의 어머니가 되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낯선 뜻을 품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
으실 것이다. 오직 자신의 뜻을 품은 사람에게만 하
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스
스로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내적인 초
연함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
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마치
거대한 산이 가벼운 산들바람에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명예로운 일이든, 불명예스런 일이든, 비방을 당하
는 경우이든 한결같이 함께하신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향한 굶주림
과 목마름이 아주 강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는 너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면서 다른 것
에는 전혀 소망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그에
게 명령하신 것만을 소원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 가
76
운데 이런 기쁨을 누린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나든 상관없이 혹은 아무 일조차 일어나지 않더
라도, 마치 우리가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하
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다
른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에 합당한 것
을 얻게 된다. 곧 그들은 언제나 비참하고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며 상처를 입힌다. 그들은 온
갖 방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우리
는 밤낮으로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
서!”라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그런데 정말로 하
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오히려 심하게 화를 내거
나 상당히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뜻이 하나
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으로 자리 잡게 된
다면, 얼마나 더 멋진 일이겠는가!
이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에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렸다면, 물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서까지 회복되기를 원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치
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
리에게 어떤 일이 좋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면, 당연
히 상황이 호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라
77
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될 때,
우리가 어떤 병에 걸리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름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의 친구가 죽었을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뜻을 순전하고 온전한 마
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면 애
타는 목마름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주님,
당신께서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뜻을 저에게 보여
주소서. 그리고 제게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허
락하소서!”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진실한 삶
에 부응하여 이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 사람에게
놀라운 부요함과 모든 온전함으로 채우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초연함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언가를 그분께 드릴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
다. 하나님은 우리의 바라봄, 금식, 혹은 기도보다
초연함을 더 간절히 원하신다. 간단히 말해, 하나
님은 초연함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곧 우리는 그분께 고요한 마음을 드려야
한다.
심각한 유혹으로 인하여 여전히 혼란스러워하
며 초연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은 결
단코 빈 공간으로 남아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을 제거하든지 간
78
에, 우리는 무언가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
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모두 내다버릴 뿐만 아
니라 오직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내적인 눈과 귀를
향하도록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더 많이
바깥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잊어버릴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쉽게 하나님의 치유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빌립보서 기자는 이렇게 충고한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
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
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을, 이 모
든 것을 여러분은 골똘히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은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
니다(빌 4 :8-9).
영혼이 이와 같은 평안을 찾아내어 더는 내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악한 영의 세력에 예속되지 않을
때, 어떤 세력이나 심지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나
친 열망으로 인한 부담감에 대해서조차도 사로잡
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음성, 곧 성령께서 말씀하
실 수 있다.
79
14 . 회개와 중생
(repentance and rebirth)
지금까지 앞장에서 우리는 자기 포기, 자백, 기
도 및 초연함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이제 이러한 주
제들은 잠시 제쳐두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죄와 완전히 단
절하여 ‘거듭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
엇을 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에 따르면,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 죄를 인
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주 깊고 진정
한 통회함을 통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단절
해야 한다. 오늘날 회개는 수많은 신자들 사이에서
그리 환영 받는 개념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회
개에 직면할 때 주저하게 된다. 누구도 자신을 죄인
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라는 소리를 듣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지만 4 복음
서는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께서 성도가 아니라 죄
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스도께로 나아
가는 길은 인간적인 선행이 아니라 겸손과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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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말할 때, 그가 단지 경건한 체하기 위하
여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는 진
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였으며, 수많은 신자들을 순교하게 만든 장
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예루살
렘에 있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
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성령을 받을 만한 가치
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
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
며, 스스로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라고 자처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실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 각자
도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가장
신뢰받던 제자인 베드로조차도 자신의 죄성을 인
정할 만큼 충분히 낮아지게 되었다. 예수님을 부인
한 후에 그분이 잡히시자, 그는 밖으로 나가 비통
한 눈물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의 죄
악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길
이 전혀 없다.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회개는 엄청난 투쟁을
81
동반한다. 하지만 영혼의 방황으로 가장 어둡고 고
통스런 몸부림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에서도, 비
록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
께서 그 길을 가셨다는 사실에서 평안을 얻는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
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
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경
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
을 얻었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
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
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히 5:7-10).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죄와 그토록 격렬한 싸
움을 벌이면서 온갖 부르짖음과 수없는 눈물을 올
려 드렸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지금
까지 아무도 그분과 같은 싸움을 싸운 사람은 없다.
아무도…. 마귀는 다름 아닌 바로 그분의 마음을 원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
구보다도 훨씬 더 치열한 싸움을 싸우셨기 때문에,
82
우리의 모든 고통과 싸움을 이해하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싸움
을 싸워야 하며, 이것이 바로 그분을 따르고자 하
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
던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
하신 이유이다.
회개는 자책(self-torment)을 의미하지 않는
다. 회개는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뒤엎는 것이며,
실제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마치 우리의 삶에 바탕을 이루는 전반적인 기초를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
러나 심지어 그럴 때조차도 우리는 소망 없는 자처
럼 암울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
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자비와 연민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
의 목표는 마음에서 하나님에 반하는 것을 모두 없
애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하여 그분이 우리를 정결
하게 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도록 해야 한
다. 다시 말해,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시도록 해야 한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놀라운 선물
이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
로 변하고, 모든 정서와 생각과 감정이 변한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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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겉모습이 완전히 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그 영혼에 아주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슬프
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와 중생의 개념에
반발한다. 비록 이런 개념에 반발하지는 않지만, 어
떤 사람들은 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한
축복을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삶 가운데 죄
를 깨달을 수도 있고, 어느 수준까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해마다 부질없는 싸움을 지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점차 덫에 걸려든다고 생
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아주 자
연스럽고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한 부분이라
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여기에 스스로 굴복
하고 만다.
한편으로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동정
심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핑계에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너무
나 흉악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생
각한다면, 내가 은혜를 훼방하고 성령께서 마음속
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꼴이다. 이는 부활
의 승리를 의심하면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구체적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은 단
호히 거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곧 그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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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
기셨다(요일 2 :2).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성
령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떤 영혼이든지 하
나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이것을 들으신다. 그리
스도께서 자신을 중보자라고 부르시는 데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다. 곧 어느 누구도 죄인을 향해 그분
만큼 많은 연민과 사랑을 보여 주지 못했으며, 그분
은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
이다.”(마 7:8)라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은 모
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뒤에
숨어서 “전 너무 연약해요.”라거나 “저는 변화
받고 싶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명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중생과 새로운 생명의 비밀은 은혜
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중생이라
는 것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중생이란 옛사람이 새사람
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합리적인 설명도 해
주지 않으셨다. 단지 그분은 “네가 거듭나야 하리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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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믿어야 한다.
은혜란 그분께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신비스러운 선물이다. 은혜
는 중생의 핵심이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 준다. 그것은 우리의 장점이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도
저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주
어지는 선물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
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우
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엡 1 :6-7).
더 나아가 바울은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선언이다.
감히 누가 스스로 몸의 행실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
겠는가? 하지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아주 간
단하다. 곧 우리가 성령의 권능에 마음 문을 열고,
회개한 다음,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려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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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께로 나아갑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
더라도, 오직 주님께로만 나아갑니다.”라고 말하
면서, 우리의 전 존재를 통하여 그분께 전부 드릴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록 죽는 날까지도 특별한 연약
함 때문에 여전히 싸우고 있을지 모르지만, 비로소
우리는 죄가 우리 안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확
신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
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
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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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치유
(healing)
죄와 맞서 싸우는 싸움에서, 흔히 우리가 악에 대
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지금까지 살펴보았
다. 우리가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행하려고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암시와 자기암시의 영향력
은 이 싸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우리의 결심을 약하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여 철저한 무력감에 빠지도록 내던진
다. 독일어에서 ‘가이스테스크랑크’(geisteskrank)
는 ‘영혼의 병’이라는 뜻으로 바로 이런 상
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다른 질병에서 회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
한 영혼의 병에서 치유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
하다. 또한 약물 치료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영적인 양육, 내적인 양육 및 위로를 주는
다른 사람들의 안내도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으
로는 예수님께 의뢰해야 한다.
내가 13 살 때 바르트부르그(독일 중심부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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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 집에서 약 80킬로 정도 떨어진 곳)를 방문
하면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마르틴 루터가 독일
어 성경을 번역했던 연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벽에 커다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 설
명하시기를, 루터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을 때마다
잉크병을 세게 집어던져서 그를 위협하여 물리치곤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상당히 깊은 인상
을 받고,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 방
을 떠났었다. 곧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마
귀를 쫓아내는구나.’ 하고 말이다. 이제 나는 세상
에 있는 수많은 잉크병이 악에 직면했을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만약에 잉크
병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인간의 마음속
에서 벌어지는 죄와의 싸움은 단지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의지력을 발휘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치유할 수 있으며, 우리
에게 새 마음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보혈
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으며, 아무리 커다
란 고통을 겪고 있을지라도, 모든 심령이 그분 안에
서 위로와 치유를 발견하도록 하신다. “양심과 그
의 건강한 회복”(The Conscience and its Restoration
to Health)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 아버
89
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분 이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
다.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지만,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님 안에서 모든 짐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
는 헛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 되시는 분에게로 가
까이 나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우
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죄 용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예수님
은 자기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까지, 곧 자
기 몸, 영혼, 피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용서
를 베푸셨다.
그래서 우리의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가 잠잠케
되었으며, 또한 우리 양심도 더는 송사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조차도 잊혀지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새로운 형
제가 된 예수님께서 흘린 보혈이 그의 피보다 더 완
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사죄(赦
罪)를 선언하시며 해방을 주시는 새로운 대표자와
지도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
처럼 죽임을 당하신 이 형제(this Brother)는 자신
90
의 살인자들에게 대적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다가와
말씀하신다. 이는 죄 없는 분이지만 그분 자신도 그
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진정으
로 그들과 같이 되신 유일한 분이셨다. 그리고 만약
인자(the Son of Man)이신 그분께서 그들을 위한다
면,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할 것인가? 이제부터는
어떤 송사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
로막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치유를 받고 싶
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
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손을 들고 조용히 기
도하는 가운데 그분을 찾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분을 적극적으로 찾는다는 의미
에서 그분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
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만히 앉아 예수님께서 오
셔서 마술적인 만짐으로 치유하기를 기다리고만 있
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
로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 사역을 펼치면서 인간
에게 불어넣으신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은 우리가
그분께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 노력할 때에만, 또한 우리가 이처럼 의미 있는
91
관계로 나아가라는 명령을 완수할 때에만 우리 각
자에게 남아 있게 된다. 먼저 “‘네 마음을 다하
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
나님을 사랑하여라.’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
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마
22 :37,39).
어둠의 세력과 싸움 이후에 치유를 받기 위한 또
다른 필수적인 부분은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취하
는 자세이다. 가령, 우리가 요동치는 상상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는 우리의 전체적인 정서에 영향을 미
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에서
공격적인 사람이나 결단력 있고 박력 넘치는 사람
은 두려움이나 자기 방어에 급급하여 움츠러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 아버지가 위의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흔
히 양심은 우리를 송사하는 자가 되고, 그렇게 하
는 것이 정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스
스로 짐을 벗어 버리고 죄로부터 돌아서기만 하면
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사랑의 음성, 곧 예수님
의 음성에 의해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톨스토
이는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랑
에 접근하려 한다면 오히려 사랑을 망치고 말 것이
다.” 다시 말해, 의지적으로 치유를 원할 때, 우리
92
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분석하려는 태
도를 취하여 거기에서 싹트는 새로운 자유를 내던
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조그만 가슴이나 연약한 성품에 대해 끝
없이 염려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완전히 순결하고 선한 사람이 없다. 오직 그
분만이 진정으로 건강한 성품의 소유자이시다. 이
제 자기 동생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시
기한 가인이 받았던 유혹에서 단호히 등을 돌리자.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단순히 예수님께 속한 것으로
기쁨을 누리자.
마음속에서 죄를 이기고 첫 승리를 거둔 이후에
도 여전히 우리에게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히 깊은 믿음이 없
다는 증거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온전히 사
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
히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고전 13 :8-13 ).
요한의 말도 역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
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 :19). 이것이 우리의 조
그만 마음속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며, 한결같이 마
음속에 간직해야 할 내용이다. 곧 우리를 온전히 이
해하시는 가장 위대한 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말이다.
93
내 경험상, 치유로 나아가는 길은 기나긴 여정이
며, 시시때때로 우리 각자가 실망과 실패를 견뎌내
야 하는 길이다. 가끔씩 우리에게는 몹시도 두려워
하거나 가장 자신 있게 승리를 장담했던 죄악의 수
렁으로 다시금 빠져드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
러나 연속되는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
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빌 1 :6)는 말씀이 있
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맛볼 수밖
에 없었던 괴로운 고통과 고독은 너무나 끔찍하여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또한, 심지어 그때 그
분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
이다.”(눅 23 :46)라고 부르짖으셨다. 여기에서 우
리는 믿음의 면류관을 발견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가장 처절한 고통과 절망감 가운데에
서도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
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듯 주님은 자기 영혼을 아
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만약 사탄의 궤계와 공격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굴
하지 않는 신뢰를 유지하여,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
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전 존재를 절대적으로, 조금
94
도 남김없이 그분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
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죄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그분 앞에 죄를
내려놓는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정결함, 그
리고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95
16. 정화
(淨化, purification)
일단 우리가 참된 회개와 중생을 경험하면 깨끗
한 양심과 순전한 마음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며,
그로 인한 기쁨과 확신이 상당 기간 우리를 사로잡
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머
지않아 싸움은 재개(再開)되고, 비록 그런 싸움이
새로운 것이든 좀 덜 치열한 것이든 혹은 우리가 죄
악된 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
리는 점점 자신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확신을
잃는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수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참된 치유의 가능성과 그 결과인 순전한 마음
을 믿지 못하고 간단하게 포기해 버리는 모습에 별
로 놀라지 않게 된다.
청결함이란 실현가능한 목표인가, 아니면 단지
멋있는 이상일 뿐인가? 수년 동안 이와 같은 아주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놓고 씨름하면서, 나는
순전한 마음을 맨 첫째로 두라고 우리에게 요청하
시는 한 분에게로 언제나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
게 된다. 이 세상을 거닐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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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유혹과 맞서
싸우셨다면,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실수와 실패
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
은 여전히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요구하시면
서,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스웨덴의 작가인 셀마 라거뢰프(Selma Lagerlöf)
는 한 기사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십자
군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무덤에서 밝힌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이탈리아의 고향 마을까지 가져오겠
다고 맹세한 사람이었다. 비록 여행 중에 노상강도
가 출몰하고, 다른 온갖 불행과 위험한 일에도 불구
하고, 이 기사는 오직 한 가지에만 온 마음을 쏟았
다. 곧 이 조그만 불꽃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일념
이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발견하는 교훈
은 오직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는 헌신으로 말미암
아 이 기사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곧 무
지하게 나쁜 행실과 무정한 용병의 모습으로 고향
을 떠났던 이 기사는 새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
게 되었다.
이 기사처럼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는
다면, 우리도 역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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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
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누구
나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요일 3 :2-3). 그러
나 여러 마음을 품는 한, 우리는 또한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하나
님의 뜻을 받아들이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마음의 청결함이란 순전히 무기력한 육체의 소욕
을 이기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헌신을 말한다”(아
버지의 책 『내면 세계』(Inner land)에서 인용).
이와 같은 “절대적인 헌신”을 또 다른 불가능
한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해 버리기 전에, 사
도 바울이 정화(淨化, purification)에 대하여 무엇
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우리의 마음 가운
데 자기주장과 장애물이 항상 존재하며, 우리가 언
제든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악에 대
한 우리의 싸움을 가리켜 “궤변을 무찌르고, 하
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
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
는”(고후 1 0:5) 승리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승리는 쉽사리 얻어질 수 있는 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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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우리는 이 싸움이 인간의 타락 이래로 끊임없
이 계속되어 한껏 고조된 전쟁이라는 사실을 직시
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래로
이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멋
진 표현은 분명히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적인 초연함에 대하여”(On Inner Detachment)
라는 글에서 에크하르트는 우리 각자에
게 어떻게 순전한 마음이 실제 삶으로 실현될 수 있
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오신다면, 여러분
에게 있는 피조물의 인간적인 본성은 모두 제거되
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본성이 완전히 사라진 곳
에서만 하나님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을 짊어지고 있
는 한, 자신을 내려놓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여러
분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
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조물인 여러분 안에 존재
하는 아무리 작은 형상이라도 결국에는 하나님만큼
이나 커다란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것은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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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온전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한
형상이 여러분에게 들어오는 정도만큼 하나님은 거
기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이런 형상이 사라지는 정
도만큼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다.
자기 사랑은 모든 악의 뿌리와 원인이다. 그것은
선하고 완전한 것은 모조리 낚아채 버린다. 그러므
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자기를 잊어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를 바라보는 한 하나
님을 보거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포기
하면, 다시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찾을 수 있게 된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참된 자기를 일깨워주시
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 안에
서 참된 자기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사소하고 부수적인 본성에 속한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청결하고 영원한 성품에
속한 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멸망 받
을 수밖에 없는 저속한 본성에 속한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참된 존재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받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자유 의지를 덧없는 허망한 데
로부터 지고선(至高善)의 존재인 하나님께로 향하
게 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은혜의 빛이 비취고 있다
는 틀림없는 증거이다.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
100
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마음의 학교에서 자기를 발
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오직 거기에서만 성령께
서 축복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신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완전하게 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세상
적인 행습을 미워하고 기꺼이 고난을 사랑함으로써
언제나 청결한 양심을 소유하려고 애쓴다. 그 결과
그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고 육체의 악
한 소욕은 사라지게 된다.
‘육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즉각적
으로 성적인 욕망이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과도
한 욕심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말에 담겨 있는 온전한 의미는 아니다. 분명히, 성적
인 부도덕함과 폭음 및 폭식도 ‘육에 속한 일’이
기는 하지만, 자기 의(義), 위선 및 자아에 속한 그
외의 모든 것, 곧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
도 마찬가지이다. 정화(淨化)란 육신의 일, 특히 영
적인 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교만은 가장 나쁜 형태
의 육신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교만은 마음에 하나
님을 위한 장소를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날마다 하
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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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
적인 연약함을 죄 짓기 위한 구실로 삼지 않는 한,
그런 연약함은 이제 더는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
에 놓인 장애물이 아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리스
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
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
후 12 :7-9)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정화란 하나님께 자기 삶을 온전
히 드리기 위한 우리의 준비 태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정화란 때때로 비틀거리고 쓰러질
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새로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
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결코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언제나 한 가지 푯대에만 초점을 맞춘
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
게 된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
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
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
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
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
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 :12 -14 ).
102
17. 십자가
(the cross)
악한 생각과 감정을 이기기 위한 싸움에 대하여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이야기 가운데, 나의 주요 관
심사는 독자들을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를 발견해야 한다. 온
세상을 다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죄에 대한 용서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십자
가뿐이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
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분
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이제 우리가 그분
을 위하여 기꺼이 죽지 않는다면, 그분은 헛되이 고
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주님은 빛과 생명 가운데 승리를
거두시면서 이 여정을 끝내셨지만, 그 길은 싸늘한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시작되어 놀라운 과정을 통과
해야만 하는 여정이었다. 여기에는 처절한 고통,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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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배반,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파멸과 십자가 상
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스로 그분을 따르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길을 자
원하는 마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악의 저주를 단번에 끊고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돌아가셨다. 악의 세력을 인정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위
하여 이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곧 어둠의 세력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
달을 때까지, 우리는 결코 십자가의 필요성을 온전
히 이해할 수 없다.
완전히 사랑으로만 충만한 하나님이라는 달콤
하고 부드러운 구세주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나 멋
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전체적인 그림
의 조그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제한된 생각
은 그분의 만지심을 통한 참된 능력으로부터 우리
를 단절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치
유하고 구원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또한 그분이 심판하시
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을 진정
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연민과 자비뿐만 아니라 경
책(警責)하심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경책은 우
104
리를 다듬는 동시에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감정에 맞춘 부드러
운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살라 정결케 하
고 인을 찍기 위해 타오르는 불이다. 그것은 자기희
생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
씀하셨다.
이 세상은 오직 희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정
복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린양이라는 수단을 통
해서만 사탄을 짓밟을 수 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희생 제물이다. 그분은 온전하신 분으로 악을 완전
히 이기셨다. 어린양의 희생적인 사랑 가운데, 예수
님은 십자가 위에서 용을 이기고, 사탄을 무력화시
키고, 그의 무기를 격파하였다. 그러므로 사탄이 십
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대적하여 어둠과 죽음을 무기로 세력을
떨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로 만
들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십자
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쐐기이다. 그만큼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승리
가 있다! 오직 십자가에만 정결함이 있다! 악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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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정복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모든 인간에 대
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원히 샘솟고 우리에게 평
화가 주어지는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 마음에 이러한 진리가 생생히 살아 있지 않
다면, 그 진리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아주 깊이 사로
잡고 우리의 전 존재에 가득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
것은 단지 아무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예
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에 연
합하는 정도만큼 자신을 내어주신다. 이것은 단순
한 철학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다. 그것은 생명이
다. 그 진리는 이를 경험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변
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변화이다.
마음속 깊이 예수님을 알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비록 희미한 수준
으로라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것은 그분께 기도 가운데 잠잠히 자
기를 포기하고,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십자가 앞에 죄를 내려놓는다는 의미이
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하
나님과의 화해와 깨끗한 양심과 순전한 마음을 허
락하신다. 내적인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셔서 새로
운 생명을 주시는 가운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차고 넘치게 되고,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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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나 자연히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십
자가에서 개인적인 정화의 체험은 필수적인 것이지
만, 여전히 거기에만 초점이 머물러 있다면 소용없
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광대하기 때
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주 조그만 싸움과 우리 자신
의 구원과 관련한 어떤 선입견에 머물러 있게 만들
어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그분
의 피조 세계의 광대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십자
가는 개인적인 차원보다 훨씬 더 광대한 의미를 가
지고 있다. 십자가에는 전 우주적인 중요성이 담겨
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 세상과 그를 초월한 세상
을 아우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경륜의 비밀이 있는데,
그중에서 최고의 비밀은 아마도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일 것이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골
1:19-20), 바울은 십자가의 신비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
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
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십자가 위에서, 땅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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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권세와 천사들
의 세계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해
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의 천
사들조차도 아마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
께서 최후의 대적인 죽음을 이기셨으며, 이를 통해
이 세상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영원토록
소유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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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나님 나라의 삶
(living for the kingdom)
궁극적으로, 아무리 강한 의지와 최선의 의도와
가장 강한 분투와 싸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 포도나무
가지가 살아 있는 줄기에 붙어 있을 때에만 많은 열
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포도나무
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단순히 그에게
붙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정말로 우리가 마음속에서 예수님 자신을 체험
하지 않고서는 구속의 우주적인 중요성, 곧 십자가
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
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이런 인
격적인 교제 가운데 붙어 있으면서도, 광대한 우주
의 지극히 작은 부분으로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
획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우리
는 스스로 주님을 매우 제한적인 그리스도로 축소
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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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순전히 우리 마음의 친구나 단지 하나
님과 영원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구세주로 인정
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다. 분명히 그분은 우리가 그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곧 아버지의 위대한
왕국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를 늘 괴롭히는 죄악을 이겨낸 다음, 이 조그만 싸
움에서의 승리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의
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나에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다면, 내 마음
이 아직도 청결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잘 먹고 잘
살면서도 내 이웃의 배고픔을 보고서 모른체한다
면, 삶 가운데 있는 죄를 진정으로 완전히 이긴 것
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이 세상
에서 불의를 당한 자들과 필요에 처한 자들의 고통
을 나누어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
른 모든 사람들, 그분의 사랑과 공의와 평강에 이르
는 길을 증거하는 사람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위해 그분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인격적인 중생의 체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승리를 거둘 때마다 죄와 어둠의 세력이 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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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속에서 결박을 당하고 결국 이것은 하나님 나라
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
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개인적인 깨우침을 얻는 차
원에서 머물고만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위대
한 사명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
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여기까지만
그들의 관심사를 나타낸다.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
이 받은 것과 같은 그러한 은혜를 끊임없이 재확인
하려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렇
게 말해야 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은 온전한 그
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명백하게 발견하
고, 내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한몫을 차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주
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
적인 축복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를 위해 싸우는 군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
다. 자 이제, 더욱 철저하게 주님의 기대를 따라 살
도록 하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기다리
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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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물
어본다. 나는 정말로 충분히 소망하고, 충분히 싸우
고, 충분히 사랑했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
이 우리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
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마 7:24 ). 우리
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을 드러내는 것
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가능해진다. 우리의 감
정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변덕스럽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소망만은 확고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리고 목말라하든지, 아니면 그
분을 회피하게 될 것이다. 그 차이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
나 능력 있는 삶인가! 뒤로 물러서지 말아라. 그렇
게 살아가려고 애써라. 그러한 삶을 추구하라. 그러
면 그 삶이 너무나 강력하여 여러분을 완전히 압도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
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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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워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
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분열과 죄, 모든 고통
과 어둠과 죽음이 정복되고, 오직 사랑만이 다스리
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