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역자료2010-2011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 1문

주거시엔셩 2011. 11. 20. 23:3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 1문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1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2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4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6 나를 보호하시며,7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8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9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10

 

1) 롬 14:8; 살전 5:9-10

2) 고전 6:19-20

3) 고전 3:23; 딛 2:14

4) 벧전 1:18-19; 요일 1:7; 2:2,12

5) 요 8:34-36; 히 2:14-15; 요일 3:8

6) 마 10:29-30; 눅 21:18

7) 요 6:39; 10:27-30; 살후 3:3; 벧전 1:5 8) 롬 8:28

9) 롬 8:16; 고후 1:22; 5:5; 엡 1:13-14

10) 겔 36:26-27; 롬 8:14; 고후 3:6,18; 요일 3:3

 

 

 

1문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에 따른 완전하고도 영원한 해결을 통하여 신자는 언제든 위로 가운데 속해 있다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다. 1문이 성경의 많은 주제 중에 신자에게 공급되는 위로를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를 바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1) 위로의 필요성에 대하여 절감하는 사람 (2) 위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3) 위로의 필요성과 위로의 방안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신자(信者)라고 하는 존재,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를 신앙함이라고 하는 지경(地境)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1)과 같이 위로의 필요성을 날마다 절감(切感)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더 깊이 체감(體感)하는 존재이다. 바울 사도와 같이 말이다.(로마서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고안물 또는 종교 따위의 도구들은 ‘인간의 복락을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인간의 모든 행위의 가치의 정점(頂點)에는 ‘인간의 만족’이 신(神)과 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스스로 위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여 인정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즐기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라고 조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이와 같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너희는 반드시 너희 중에 있는 그 문제를 해결받아야 하고, 위로를 구해야만 하는 존재이다.”라고 말씀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 받아야 할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그러므로 위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데 성경은 그 무지를 죄라고 한다.

 

참된 신자는 자신에게 완전한 위로가 없으면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날마다 더욱 깊이 절감한다. 참된 신자는 완전한 위로를 공급받기 전까지 날마다 그 비통함과 슬픔과 애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 한나처럼 말이다.(사무엘상1: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적절한 위로가 공급 되지 않음에도 비통과 슬픔과 애통이 없는 사람을 성경은 맹인이요, 귀머거리요, 어두움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 문제이다. ① 이 땅에 속한 세상적 차원에서의 문제와 ②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진짜 문제이다.

여기서 ①은 진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위로는 필요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①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 중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갖게 된 슬픔이나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아픔은 일시적인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위로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런 위로는 세상이 충분히 주고 받는 위로이다. 바울이 자신의 육신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굶주림과 헐벗음과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당하며 그러한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체득(體得)했다고 고백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은 무(無)요, 허상(虛想)이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공급 받아야만 하는 진짜 위로와 비교한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13세가 되던 해에 굶주리는 아이의 사진을 보고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그것은 스티브 잡스가 ‘위로’의 개념을 마음대로 규정하여, 자신의 차원으로 오해한 까닭이다. 스티브 잡스는 ‘육신의 굶주림’을 위로해야 할 시급한 문제라고 보았다. 하지만 성경은 굶주림과 같은 육신적인 문제에 대한 위로와는 정반대의 위로를 말씀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나 굶주리는 아이나 진리 앞에서는 동일하다.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똑같은 위로가 필요한 똑같이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오히려 굶주리는 아이가 부유한 스티브 잡스보다 더 나은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의, 세상적 차원의 위로만을 갈망했던 스티브 잡스는 정작 진짜 위로를 외면한채, 영원히 위로가 없는 곳으로 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진짜 위로”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을 위한 진술이며, 진정한 위로의 필요를 절감하는 존재에게만 한량없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 진짜 문제를 인식하면 신자는 닥치는 어떤 문제 중에서도 위로 가운데 있게 된다. 이 땅에 속한 세상적 차원에서의 문제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진짜 문제에나 신자는 형언 할 수 없는 위로와 확신 가운데 평안을 소유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다.(마7:6) 거룩한 것, 진주처럼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개와 돼지는 그 가치를 훼손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을 알아보는 자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을 아무리 보고 들을지라도 “진짜 위로의 필요성에 대한 절감”이 없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은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당신은 날마나 무엇 때문에 슬퍼하며 비통해 하고 있는가?

위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그리스도께 간구하였는가?

날마다 위로 가운데 있는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애통’이 있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이다. 반면에 ‘그 애통’이 없는 자들은 ‘복’이 없는 자이다. 당신은 ‘그 애통’이 있는 자인가? 없는 자인가? 앞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차분히 공부해가며 ‘진짜 위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2011. 10. 22, 학자의 혀

출처 : 좁은 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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