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대통령 죽음내몬 이명박 물러나야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정치보복을 통탄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민 대충격
2009년 5월23일(토)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경남경찰청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 40분께 경호관 1명과 봉하마을 뒷산에 등산을 하던 중 부엉이 바위에서 아래로 투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으나 서거하였다.노 전 대통령은 당시 머리 부분을 크게 다쳐 오전 7시 5분께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옮겨진 뒤 상태가 좋지 않아 8시 13분경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병원 측에서는 도착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으며 심폐 소생술 등을 시행했지만 호전되지 않아 8시30분경 중단,결국 오전 9시 30분 서거하였다고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밝혔다.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봉하 마을 뒷산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기간중 방송뉴스 화면을 통해 알려진바와 같이 바위가 많은 돌산이어서 그리 높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도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할 위험성이 높은 지역이다. 경찰은 처음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관계자들은 불러 노 전 대통령이 실족한 것인지 자살을 기도한 것인지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며 노 전 대통령이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뛰어 내린 것인지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시신 부검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경찰이 투신자살보다는 발을 잘못디뎌 추락한 것에 무게를 두는 모양새보이고 방송과 일부 언론들도 국민적 충격과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정부측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모르지만 투신자살보다는 실족 추락사쪽으로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가족에게 남긴 유서 전문이 발견된데다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경호관이 투신당시 상황을 진술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검찰의 박연차게이트 수사와 관련 스스로 목숨을 던진 서거로 판명이 되었다. 입지전적 정치 풍운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한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빈농에서 태어나 형설지공끝에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주인공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획을 그으며 일세를 풍미한 정치풍운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고(故)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씨(李順禮)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英鉉)와 박연차게이트로 구속된 둘째형 건평씨(建平·구속), 그리고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씨(英玉)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되었을만큼 형제들이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진영 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넉넉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 어렵게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만기제대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權良淑)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建昊)와 딸 정연씨(靜姸)를 낳았다.당시 둘째형 건평씨의 도움으로 독학으로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한 그는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40여명의 합격자 가운데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세무공무원이던 형 건평씨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자 7개월만에 자진하여 판사직을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에 변론을 맡으면서 노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부림사건 변론이후 학생, 노동자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적극 변호에 나서면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개입하였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민주인권 투사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변호사활동을 눈여겨 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는 정치인 노무현의 존재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노 전 대통령은 청문회장에서 국민 가슴에 와닿는 핵심을 찌르는 정연한 논리와 송곳같은심문과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는등 뛰어난 활약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합당을 강행하자 정치적 야합이라며 결별을 선언하고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순수함과 신선함을 뜻하는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일약 정치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광재,안희정등 측근들과 지방자치연구소를 이끌며 원외에서 김원기 전 국회의장,유인태 전의원등 통추멤버들과 정치행보를 함께하며 권토중래를 꿈꾸던 노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당시 김대중 대선캠프에 합류하였고 김대중정권이 출범한후 종로 재보궐선거를 통해 원내에 복귀하였다가 2000년 총선에서 또다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워 지역구를 부산으로 옮겨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총선 실패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2000~2001년까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해양수산부장관 시절 진행되었던 대대적인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앞장서서 족벌언론을 강도높게 비판하는등 김대중정부의 세무조사 정당성을 옹호하는 결기를 보이기도 하였다.이러한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력과 영호남 지역감정해소,선거구도상 영남후보 유리라는 판단에 따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적극적 지원으로 마침내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후보를 꺾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 호남을 비롯한 전통적 민주화 세력의 전폭적 지지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의 단일화 성사를 통해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물리치고 당선됐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도 파란의 연속이었다.도덕성에 바탕한 김대중 정권과의 차별화,영남지역의 반호남,반김대중정서를 의식한 호남지역주의 타파를 중심으로 진행한 전국정당화를 위해 정치적 보금자리인 민주당해체를 주장하고 김대중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공격하였으며 끝내 민주당을 분당,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범민주진영이 두동강나기도 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대북송금특검으로 역사적 6.15남북 정상회담을 뇌물회담으로 규정,단죄하고 현대비자금 사건등 국민의정부와 호남인사들에 대한 지속적인 사정과 김영삼 안기부 도감청 사건을 국정원 도감청 사건으로 확대시켜 정몽헌 현대회장,박태영 전 전남지사와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하고 박지원,권노갑,한광옥,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등 거물 정치인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기된 범민주진영의 분열여파와 한나라당을 비롯,조중동등 보수언론을 위시한 보수세력의 정권타도 공세가 어우러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됨으로써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지속적인 부패사정에서 보듯 정권의 정체성을 도덕성에 두었음에도 재임기간 중에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 수감되었는가하면 퇴임후에도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되는 사건이 터져 곤욕을 겪었다. 특히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되고 노 전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된데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도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함으로써 부패가족,정치적 파산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이러한 상태에서 권여사와 자신의 검찰 재소환과 사법처리설이 끊이지 않자 자진서거라는 인생최후의 결단을 내린게 아닌가 한다.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몬 이명박정권과 정치검찰,보수세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진서거는 한국 정치사는 물론 대한민국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전직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은건 노무현 대통령이 두번째이지만 광주학살과 지금의 화폐가치로 치면 무려 1조원대의 불법 정치자금을 기업들로부터 받아 쓴 권력형 비리로 실형을 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생물학적 생명력이 다할때까지 악착같이 노후를 보내는 것과 비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진서거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정권의 성골 나팔부대로 보수세상 만들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보수언론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방송들은 이명박정권의 책임론을 차단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이 자신과 가족은 물론 측근들까지 사법처리되거나 수순을 밟는데 대한 심리적 압박감과 트레이드마크였던 도덕성 추락에 따른 자괴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자진서거를 택한게 아니냐는 식으로 바람을 잡는 저열한 언론공작마저 춤추고 있어 분노의 슬픔을 억누를길 없다.
비록 문제가 된 액수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4~5천억원대의 불법 뇌물정치자금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안기부 비자금 천억원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1백억원도 안된 640만달러에 불과하고 이권과 관련된 대기업 돈이 아닌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맺어오던 후원 중소기업인이 대가없이 지원한 돈임에도 이명박 정권이 정치적 표적수사를 통해 검찰과 보수언론과 보수시민단체들을 앞세워 파렴치범으로 몰고 가족과 측근들이 곤욕을 겪자 회한과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서거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모든걸 떠안고 떠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진서거를 택하도록 내몬 주역은 이명박정권과 한나라당,보수언론과 보수 시민단체를 비롯한 범 보수진영 그리고 정치검찰이다.이명박 대통령은 부동산투기,세금탈루,위장전입,위장취업등 수많은 기본적 자질의혹,대선전 30억원 당비 천신일 대납의혹,이상득과 천신일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로비,747사기공약등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민생도탄등 총체적 국정파탄에 따른 국민적 비판을 4.29재보선 승리를 통해 전환시키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한상률 전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 세무조사를 지시,그결과를 결정적 시기에 검찰이 수사토록하여 노 전 대통령을 사지로 몰아 넣은 것이다.이러한 이명박 대통령의 표적수사를 열렬히 입과 박수로 응원한 정치 치어걸 한나라당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로 검찰수사의 근거를 제공한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세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진행한 임채진 검찰총장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중 임명한 사람들이다.이 두사람도 노 전대통령 자진서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청와대 지시로 세무조사와 부패수사를 진행하였다고는 하나 상식에 입각한 인간적 정리를 모르지 않는다면 지시를 받았을 당시 사퇴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는지 모르지만 이잡듯 뒤져 조사결과를 이대통령에게 직보했고 임채진 검찰은 수사기간중 수사내용을 수시로 언론에 흘리고 자필서명할때 손을 떨었으며 명품시계를 선물로 받았다는등 언론플레이로 보수언론의 여론몰이 공작을 도움으로써 노 전 대통령의 자존감을 짓밟아 결국 죽음을 결단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어 자진서거 간접교사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중동문등 보수언론과 보수시민단체들이다.이들 보수세력들은 수천억원대의 권력형 부패비리를 저지른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천억원 안기부 비자금의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은 커녕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워 옹호,두둔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들 부패정권에 비해 대가성없는 노무현 지원금에 대해서는 포괄적 뇌물로 규정한 검찰,청와대,한나라당과 연계,총대를 메고 온갖 수단방법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조작,오도하는등 노무현과 김대중 정권 죽이기에 광분하였다.김동길 같은이는 노 전 대통령이 자진서거로 끝장을 보도록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였고 하루라도 빨리 법적 요절을 내도록 검찰을 다그친 것으로도 모자랐던지 조갑제라는 사람은 서거를 자살로 바꾸어야 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등 보수세력의 반인간적인 흉악한 살인적 폭거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명박정권 퇴진 보수세력 단죄해야 국가와 민족이 산다
자신들 패거리들의 들보같은 반국가적 권력형 부패비리,국정실패에는 눈감으면서 국민,참여정부의 흠결은 티끌까지 끄집어내 난도질해 결국 노 전 대통령을 자진서거케 한 조중동문등 보수언론과 극우보수 세력들은 양극화,국민분열,반민주,민족갈등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환골탈태하든 아니면 이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용산 살인진압에 이어 전직 국가원수인 노 전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반인간적,반화합적,반민주적 무도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정권은 국정담당 세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만큼 당장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인간의 도리는 커녕 권세에 눈이 어두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감까지 짓밟은 세무,수사관련 책임자들도 하루빨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진저리나는 이들 말종적 보수패거리들이 판치는한 대한민국은 온전할수가 없다.
범민주진영의 분열과 관련 가슴에 응어리졌던 서운함을 이제 내던져 버리고 이땅의 민주화와 서민대중,그리고 민족화합을 위해 정치적 열정을 불사르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인간적 삶에 경의를 표함과 함께 죽음으로 모든걸 안고 떠나간 노무 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며 고이 영면하시길 빈다.아울러 노대통령이 재임간 서민복지,남북관계,정치발전에 기여한 큰 업적을 기리며 민주 역주행,경제파탄,남북관계 파국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극우보수집단에 결연히 맞설것을 노 전 대통령의 영전에 다짐해 본다.
원본 기사 보기:뉴민주.com |
'노무현대통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대통령 바탕화면2 (0) | 2009.06.05 |
---|---|
대통령님 안녕히 가십시요, '굿바이 노짱' (0) | 2009.05.28 |
노대통령과 초등생.... (0) | 2009.05.27 |
인륜을 저버린 정치검찰의 무한도전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0) | 2009.05.27 |
실패가 틔운 희망의 싹 / 김종철 (0) | 2009.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