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

실패가 틔운 희망의 싹 / 김종철

주거시엔셩 2009. 5. 27. 22:06

 

실패가 틔운 희망의 싹 / 김종철
편집국에서
한겨레 김종철 기자
» 김종철 정치부문 편집장
한 지인은 며칠째 눈이 퉁퉁 부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들은 이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설치된 분향소에 다녀온 뒤에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 그가 따르고 좋아했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퍼한다. 그는 노사모 회원도, 정당의 당원도 아니다. 30년 가까이 중학생들을 묵묵히 가르치고 있는 평범한 선생님이다. 위로하려고 전화를 했다. “슬픔에 젖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열렬한 지지자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정말 아파요. 뭘 할 수가 없어요”라며 또 목이 멨다.

이런 이가 어디 그뿐이랴.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난 김해 봉하마을에서부터 서울의 아파트촌을 넘어 강원도 산간 마을까지, 비명에 스러진 서민 대통령을 향한 추모 물결이 넘친다. 각 분향소에 다녀간 추모객만 해도 벌써 박정희 전 대통령 때를 넘어섰다고 한다. 더구나 1979년 그때와 달리 지금은 국민의 자발성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서울역사박물관 등 공식 분향소보다 시민들이 설치한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가 더 붐비는 것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노무현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장면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때 칭찬이나 격려보다는 비판과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악의에 찬 반대세력의 공격뿐 아니라 실망한 지지세력의 삿대질도 계속됐다. 임기 초반을 제외하고는 내내 인기가 바닥이어서 스스로 ‘동네북 신세’라고 한탄했을 정도다. 퇴임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지자들이 봉하마을을 꾸준히 찾기는 했지만, 세상에 대고 말을 하거나 움직일 때마다 그는 몰매를 맞았다. 고백하자면, 나도 가담자 중의 하나였다. 또 이명박 정권의 충실한 수족으로 전락한 하이에나 검찰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더티 플레이 탓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까지도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생전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대통령을 왜 이다지도 그리워하는 걸까. 비교적 ‘젊은’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데 대한 충격과 ‘얼마나 힘들었으면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느냐’는 연민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도 깔려 있다. 또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성 행태와 그러고도 사과나 반성 없는 태도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현상’은 단순한 애도나 애석함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 정치인을 향한 존경과 연모의 모습까지 띠고 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그가 부엉이바위에 온몸을 부딪쳤을 때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휘감은 두터운 냉소와 방관의 껍질이 깨진 것인지 모른다.

물론 정치인 노무현 개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아니다. 지역주의의 벽을 깨려 하고,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 했던 한 이상주의자의 뜻을 좇겠다는 다짐이다. 추모객들은 이제 그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신들이 이어받아 완성해야 할 과제로 받아들인다. ‘노무현 현상’이 긍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인은 집에 머물 수 없었다. 그저께 저녁에는 조계사 분향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였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참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았던 정치인을 그곳에서 봤다”고 그는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두 달 전쯤 “정치하지 마라”는 글을 썼지만, 지인은 다시 정치에서 희망의 싹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