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1장. 예수님은 누구인가?
기독교를 설명할 때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과 행동때문에 그분의 가르침과 모범의 중요성이 인정됐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죽
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기독교 신앙을 알아야 한다.
^ 기독교 신앙의 중심 : 예수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셨다. 즉 계시하셨다.
골 1장 15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히 1장 3절,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한다.
요 14장 9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 예수님에 의해 계시하신다.
루터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알리길 원하시 않으신다. 또한 다른 방법으로도
알려지실 수 없다.'
성육신의 교리에 있어서도 설명이 되는데, '성육신 교리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과 공
간의 세계로 들어오셨다는 기독교의 특별한 사상이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통하는 창'이라는 독특한 믿음의 기초를 준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의 기초다.
예수님을 구주로 부른다.
초대 기독교의 상징인 물고기의 문자는 '익투스'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말
의 머리글자이다.
셋째, 예수님은 구속받은 삶의 모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근접해가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사랑의 본이다.
그분을 본 받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본 받는 자
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시며,
스스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셨고, 그러한 삶을 독려하신다.
^ 복음서와 예수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책이다.
헬라어 에반겔리온(evangelion)은 '좋은'이라는 뜻의 어근과 '소식' '메시지'라는 뜻의 어근이 합쳐
진 합성어다.
예수(히브리어로 Yeshua)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칭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Jesus the Christ)라고
쓰는 것이 더 나을 것.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번역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와 함께 존재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모세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알고 만났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서 더 완전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고 생각했다.
마태복음에서 특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중요성을 말한다.
누가복음은 비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중요성을 제시하는데 관심이 많다.
마가복음은 수제자 베드로의 자료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이 지닌 의미를 제시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14-37년) 때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년)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 예수님과 이스라엘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강조된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선지자들이 알려왔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
려 함이라'(마5:17)고 강조했다.
바울도 예수님을 '율법의 마침'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롬 10:4)
바울은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들을 강조하고 있다.
^ 예수님과 유대의 그룹(파)들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 제국으로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다른 민족들이 이주하면서 종교가 혼합
된 후에 (왕하 17장) 사마리아인이라고 표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구약 어디에도 사마리아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은 없다.
오히려 헬라시대에 뚜렷한 집단으로 등장한 것으로 요세푸스는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세겜과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했던 특정 종교단체로 보고 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기원은 마카비 혁명이 있었던 기원전 168년으로 올라간다.
유대 지방에 헬라시대가 시작된 기원전 333년(332년)부터였는데,
특히 기원전 167년에 셀루시드 왕조의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벽을 부수고,유대인을 학살했으며,유대 성전을 헬라의 신 제우스에게 바쳤다. 이러한 행태들은 마카비 혁명에 불을 지폈다.
기원전 164년에 혁명이 성공하고, 예배를 회복했으며, '하누카'라는 명절을 만든다.
이런 과정에서 유대율법과 토라의 역할과 관련해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사두개파는 다섯 권의 율법서에 나타난 것 같은 성문 율법의 우의성을 주장했다.
다른 어떤 가르침도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만의 전승도 율법과 견줄 수 없다.
구약의 예언서나 시가서 등 모세 오경을 제외한 성경도 동일한 권위에 두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표징을 설명하실 때(마 22:23~33) 출애굽기(3장 6절)를 예로 든
것도 그런 배경에 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발전과 응용적인 해석을 받아들였다.
구전율법으로 토라의 해석과 적용을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리새인(Pharisee)란 말은 파루쉬(Parush, 분리된)란 말에서 파생되었다.
엣세네파는 광야에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통해 오염된 유대인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되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속에 살면서 자신들을 도덕적 삶으로 분리시켰다.
죄인들, 창녀들, 세리들 같은 무리들을 부정하다고 여겼다.
예수님은 이들을 품어주셨다.
젤롯당은 로마를 몰아내는데 관심이 있던 정치적 유대인 그룹이었다.
^ 예수님의 탄생
마태와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마태는 요셉의 시각에서, 누가는 마리아의 시각에서 탄생이 보인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다윗왕과 연결되기에 그 지역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원전 8세기에 미가 선자자가 그렇게 예언하였다. (5장 2절)
누가는 예수님이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귀감으로 탁월한 귀감은 되었지만, 예수님 중심의 기독교 예배와 기도가 되어야 함에는 이견이 없다.
그래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대목은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요셉에 대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말은 없다.
단지 다윗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이 등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예수님은 요단강가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공생애를 시작했다.
첫 외침은 '회개하라'였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점령 하에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외진 곳에서 지내셨다.
그곳에서 개인적인 권력, 명예, 영광의 유혹을 이겨내신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으셨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핵심이 되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치유하는 사역을 계속하셨다.
여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따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여성들도 억압받는 대상으로 보셨기 때
문이다.
누가는 여성을 많이 등장시켜서 여성들의 지위를 대변하고 그들의 역할을 대변하고 있는 인상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 : 천국 비유
예수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였다.
'나라'로 번역한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권'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깝다.
산상수훈에서도 그렇고, 주기도문에서도 그렇다.
^ 십자가 죽음
십자가 죽음이 중요하다는 증언은 바울이 55년 초에 쓴 고린도전서에 나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구원자로 오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있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무슨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구원자란 말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에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을 뜻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유월절에 잡히셨기 때문에 더더욱 유월절 어린양으로서의 속죄의 역할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보여주셨다.
유다의 고발로 잡히신 예수님은 산헤드린을 거쳐서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감정까지 경험하신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
^ 부활
금요일 오후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해 두었던 무덤이 일요일 아침에 비어있었다.
이 내용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마 28:1, 막 16:1, 눅 24:1, 요 20:1)
사복음서 모두 빈 무덤을 발견한 사람은 여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세 번 나온다. (막 15:40절, 47절,16장 1절)
유대교에서는 여자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여자들의 증언으로 했을까?
또 하나, 유대인의 무덤 숭배 관습에 따라 그들은 무덤을 다시 찾는다.
다윗 무덤 등은 아직도 숭배의 대상인데, 예수님에 대한 무덤을 숭배하는 기록은 없다.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지금은 부활의 개념을 알기에 놀랄일이 아니겠으나,
그 당시에 부활이라는 것은 전례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바리새사람들은 부활을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마지막 때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역사의 한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런 개념은 당시 유대교 사상의 패턴에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단히 비 정통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실이기에 부활의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로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 그 어떤 일
이 아니라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습과 사상을 의심하게하는, 급진적인 일들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답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고, 자신들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했다는 것이다.
부활은 5백여 명이 확인한 숨길 수 없는 공적인 사건이었다.
어떠한 공격에도 끄떡없는 모두가 아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이 본래의 상태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본성을 담고 있는 씨앗이 심겨 자라면서 그 본성대로 성장하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5장 38절)
우리가 하나의 씨앗처럼 심겨지면서 우리는 부활할 때 우리의 본성대로 성장하며 살아나는 것이다.
그 상태는 하나님의 최초 창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놓은 우리를 악한 무리가 훼손시켰고,
그 훼손된 우리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어가시는 과정의 완성품이 부활의 완성체인 것이다.
^ 신약이 말하는 예수님
예수님을 가리키는 용어들에 대한 이해를 구해본다.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헬라어로 표현되고 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용어는 점차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시대로 회복시킬 해방자이며
구원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님으로서 예수님
주님은 두 종류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첫째, 존경의 표시로 주님이라고 불렸고,
두번째는 신적 존재나 최소한의 인간을 능가하는 분명한 존재를 일컬었다.
헬라어로 '퀴리오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구약의 6,823번의 이름 중에서 6,156번이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오로지 하나님을 지칭할 때만 사용하였고,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로 부르기를 거부했었다.
그런 이름을 신약의 저자들은 주저 없이 사용하였다.
하나님과 동등됨이신 예수님을 표현한 것이다.
구주로서의 예수님
예수님은 구원자였다.
그분에게만 구원이 있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의 일을 하셨다.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이신데 그 일을 하신다. (이사야 45장 21-22절, 막 2:7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예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한 왕이 나실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장 3-4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의미를 육체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이단, 이타카다의 논리)것은
맞지 않다.
이 칭호의 의미는 근본적 관계에 대한 것이며, 특별한 신분에 대한 확인의 의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계시의 소유자이며, 구원의 대리자로서 갖는 특별한 역할에 대한 확인이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된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의 의미와, 사람들과 함께 고난 받으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
심판부분에서는, 다니엘이 말한 '인자'라 불리는 분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것을 본다고 했는데, 그것
과도 연결이 된다.
즉, 심판권이 있는 예수님의 권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불리신 예수님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라고 고백
한 부분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본 주님이라는 의미도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부분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2장. 성경이란 무엇인가?
^ 성경 : 기원과 용어
구약은 거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짧은 부분은 고대 근동의 국제어인 아람어로 되어 있다.
먼저 모세 오경이 있다. 5권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역사서는, 10권으로, 가나안에 들어간 후부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까지의 기록이다.
선지서는, 예언서라고도 하며, 16권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백성들에게 알렸던 사람들의 저작이다.
지혜서는, 욥기, 잠언, 전도서를 포함한 지혜를 다루는 책들이 또 있다.
외경은, 구약에 속하지 않지만 하나의 범주를 이루는 책으로 모두 일곱 권이다. 이를 제 2경전으로 불
리기도 한다.
신약은, 모두 헬라어(히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첫째, 하나님의 행위와 목적과 정체의 연속성이 있다.
둘째, 제도의 연속성이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중적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과 관련이 있고,
제사장적 측면에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과 관련이 있고, 부활하신 후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왕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신 선지자시며, 백성의 죄를 씻어내신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다
스릴 왕이신 것이다.
^ 성경 내용 (정경)
정경(canon)이란, kanon카논이라는 헬라어에서 왔다.
신약에서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말한다.
그 예로, 딤후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초기 기독교 저자들이 '신약'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둘 모두 동일한 권위를 부여했다.
367년 영향력있는 헬라의 기독교 저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중심으로 합의를 이루며 신약의
정경화를 이뤄갔다.
콘센서스 피델리움 (consensus fidelium, 충성스러운 자들의 합의)에 따라 진행했다.
정경성을 평가할 때 세가지를 고려했다.
첫째, 사도적 기원이나 연관성이다.
둘째, 전세계 기독교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셋째,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에서 어느 정도 공식적으로 읽혔는가?
정경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히브리서, 계시록,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등을 포함시킬
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5세기가 시작될 무렵 서방교회에서는 정경이 완성된 것이 분명하고, 종교개혁 때까지 제기되지 않았
다.
종교개혁 때 몇몇 저작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거론했으나, 대부분 논쟁은 구약으로 집중되었다.
외경에 대한 부분을 구분하면서 정리되었고 오늘날에 이른다.
^ 성경 번역
16세기, 마틴 루터와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들의 일상의 언어로 성경의
가르침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루터는 평신도에게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신도들의 성경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헬라어 원문의 신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어번역 성경은 17세기초에 나왔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50명이 넘는 학자들을 웨스트민스터와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모아 성경번역에
힘썼다.
1611년 드디어 영어성경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킹 제임스 성경으로 알려지며 고전이 되었다.
^ 성경 해석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알레고리적(우화, 풍자) 해석으로 보완한 것을 허용한다.
알레고리(allegory)란? "하나를 말하면서 말한 내용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기"로 설명한다. - 헤라클레
이투스 -
예를들어,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한 사건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정복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정황을 토대로 한 성경 해석을 강조했다.
서방교회에서는 삼중적 성경해석을 발전시켰다. 자연적 의미, 도덕적 의미, 합리적(신학적) 의미를 발
견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문자적 - 육적 -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알레고리적 - 신비적 - 영적 의미를 말한다.
구약을 순전히 역사적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존 칼빈은 구약과 신약은 표현 방법은 달라도 동일한 믿음을 증거한다고 했다.
그는 "신약은 구약속에 감춰져 있으며, 신약을 통해 구약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네 가지로 구분해보면,
문자적 : 본문을 액면 가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알레고리적 : 교리적 진술을 끌어내려고 특정 구절을 해석
비유적, 도덕적 :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위한 윤리적 지침을 얻기 위한 해석
영적 :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해석
사중해석 : 스콜라주의 신학교수들이 사용한 요소로, 루터가 의미있게 사용한 해석이다.
^ 신앙적 성경읽기 : 기독교 영성
성경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역사적 자료로 읽는 경우가 있고, 기독교 사상의 원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영양공급과 회복을 위한 근원으로 성경을 대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성을 위한 성경읽기가 중요하다.
영성이란?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와 관련이 있다.
루아흐는 대개 '영'으로 번역하지만, '호흡''바람'의 의미도 있다.
영은 생명과 활력을 주는 것에 관한다.
그래서 영성은 신앙생활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믿음을 고취하는 그 무엇, 믿음을 유지하고 성장시
키도록 돕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다.
영성은 신자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신자들로 하여금 깊이를 더하고 온전하게 하도록 촉구하는 그 무엇
과 관련이 있다.
영성이란 한 사람의 종교적 신앙이 실제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이 믿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확립과 유지에 대한 것과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결과
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읽기에 있어서 귀고는
읽기 : 하나님의 그 무엇과 마주치리라는 기대
묵상 : 마음을 본문의 의미와 이미지에 집중
기도 : 하나님에 대한 반응
관상 (contemplation) : 하나님의 임재가운데로...
성경읽기 없는 기도는 오류, 성경을 읽기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미 건조하다.
프로테스탄트 영성
종교개혁은 성경의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가장 핵심적인 종교개혁의 요구 중 하나가 성경에 쉽게 접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번역이 활발해졌다. 그들에게 영성의 중심은 성경이었다.
강해설교는 성경구절 뒤에 있는 원리를 청중이 처한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성경본문의 지평과 청중의
지평을 연결하는데 목적이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했던 설교는 강해설교의 모델이다.
성경구절 묵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영적 전통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확립되었다.
19세기 침례교 목사인 찰스 스펄전은 "메시지에 대해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러나 먼저 성경구절을 묵
상하고, 조용히 숙고하며, 그 구절이 우리 영혼 깊이 내려앉게 하라."
^ 성경의 주제와 이미지
빛과 어두움의 이미지에 대한 부분으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된다. (요 8:12)
어둠은 먼저 의심과 연결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의심을 폐기한다.
어둠은 죄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어둠은 상징한다.
신자들의 고통도 어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혼자이며 버림받았다고 느끼면서 혼란스러워하기
도 한다.
현대 세계의 모호함과 염려에 대한 것들은 길을 잃었다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단테의 신곡에서 이런 이미지는 인간의 죄 때문에 길을 잃는 존재가 되었다고 보았다.
3장. 구약성경 한눈에 펼쳐보기
구약은 유대교가 거룩하게 여기고 있는 성경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예수님의 도래를 위한 무대로 본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성경으로 불렀다.
언제부터 구약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언제부터 구약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 아마도 신약 정경화 작업이 진행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 구약의 형성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전 275-100년경에 번역된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셉투아젠트 - Septuagi
nt)은 히브리 원어 성경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밖의 유대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성경은 70명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문화와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익숙한 헬라 유대학자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 성경 번역의 원문은 현재 히브리어 표준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본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
t, 약 10세기 경 편집)과 다른 본문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독교에서 70인역을 널리사용하게 되었고, 신약에서도 인용되었다.
기독교에서 70인역이 널리사용되자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을 포기하고 히브리어 원어 본문으로 되돌
아 갔다.
AD90년 무렵 유대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을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다.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얌니아(Jamnia)의 랍비학파가 종교
사상의 중심이었다.
바로 여기서 정경에 포함할 책들이 결정되었다.
기준으로는 4가지를 사용했다.
첫째, 본문으로는 오경과 일치해야 했다.
둘째, 연대적으로 에스라 시대 이 전에 기록되어야 했다.
셋째, 언어학적으로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야 했다.
넷째, 지리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기록되어야 했다.
5-10세기에 형성된 맛소라 본문은 얌니아의 히브리 정경을 반영했다.
70인역에는 있지만 맛소라 본문에 없는 저작을 '숨겨진 책들'이라 불렸고, 외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
온다.
70인역은 두 가지 중요한 면에서 히브리어 표준 본문과 다르다.
70인역 즉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 몇 개의 본문이 있다. 이게 외경이다.
또한, 목차가 서로 다르다. 히브리어 정경은 24권으로 되어 있으며, 기독교 정경은 39권이다.
*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가 나눠지지 않았다. 열 두개의 소선지서를 한 개로 묶었다.
창세기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끝나는 것이 히브리성경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구약은 네 가지 형태다.
첫째, 유대교는 얌니아 회의에서 결정된 맛소라 본문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그 순서를 따른다.
둘째,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그 순서를 따른다.
셋째, 카톨릭은 70인역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제 2정경(외경)은 저작의 맨 뒤로 둔다.
넷째, 맛소라 본문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만 순서는 70인역을 따른다.
^ 구약의 구성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눈다.
율법서(5권)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
백성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시,
이스라엘의 소명과 정체성,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
구체적인 율법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창세기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고, 하나님 백성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직 한 신(하나님)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
다른 나라에서 신으로 불리는 해, 달 등 천체도 하나님의 창조물로 분류된다.
천체는 숭배대상이 아니며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창조는 창조의 절정이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달려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생기(ruach는 영, 바람, 호흡)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 있다. (창 2장 7절)
큰 주제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세상이 창조자를 배신한다.
죄의 본성과 기원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한 백성을 부르고, 그속의 대 드라마를 위한 무대를 세운다.
특히 아브라함을 주목하고 진행한다.
출애굽기
애굽에서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광야로 나가며, 모세가 율법과 십계명을
받고 이들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레위기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분시켜주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줄 문화적, 종교적 의식과 신앙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분시켜주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줄 문화적, 종교적 의식과 신앙
을 제시한다.
희생제사의 양식을 제시하고, 1년에 하루뿐인 속죄일과 관련된 의식이 특히 중요하다.
민수기
가나안까지 가기 위한 광야의 유랑생활을 알려준다.
신명기
율법의 복사본이라는 의미이며,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허락받기 전에 율법의 주요 주제를 다시 들
려 준다.
역사서(12권)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요단강을 건넌 후 예루살렘 북부에 거주하는 기브온 족속을 겨냥
두번째는 가나안 남부 지역의 왕들과 충돌,
세번째는 가나안 북부 지역의 도시국가들과 충돌했다.
그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사사기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사무엘의 등장까지 역사이며,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과 순종이 쇠퇴하는 모습
을 보여준다.
그리고 위협의 형태가 가나안의 밖에서부터 온다. 아모리, 미디안, 모압같은 위협은 요단강 동쪽의 족
속들이다.
전체 주제는, 이스라엘이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사'라는 단어는 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험에서 구하려고 세우신 카리스마적 지
도자"이다.
룻기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진행된 소중한 사랑이야기다.
사무엘서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되고, 다윗이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말이 가나안 지역의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한다.
남 유다는 시므온과 유다 지파만을 가리킨다.
사울이 죽을 때까지 북쪽 지파들과 남쪽 지파들을 갈라놓은 비이스라엘적 중간지대가 있었다.
이 중간지대에는 당시 여부스 족이 살던 예루살렘과 애굽의 지배를 받던 게셀이 포함된다.
여부스 지역의 예루살렘은 다윗이 정복하였고,
게셀 지역은 애굽 왕이 솔로몬에게 결혼 선물로 주고 마침내 통일이 완결되었다. (왕상 9장 16-17절)
열왕기서
왕정의 등장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이스라엘 왕국의 발전과 역사를 연속적으로 제공한다.
성전건축은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 단일체로 견고히 세운 위대한 업적의
최고봉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포로생활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돌아와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제도를 회복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회복과 갱신의 과정이 포함된다.
역대기
공동체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
역대기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증명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이 여전
히 유효함을 재확인하는데 관심이 있다.
즉, 다윗과 솔로몬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 지금도 그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에게 재확인시키고 있다.
역대기에서 성전은 이스라엘의 희망과 신앙의 핵심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원전 538년,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싸이러스 Cyrus)왕에게 멸망당하고, 고레스는 바벨
론의 유대인 포로들에게 자유를 준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하도록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을 중요한 주제로 등장시킨다.
에스더
페르시아 제국 말기에 유대 공동체의 몰살을 피한 역사적 사건을 보여준다.
시가서(5권)
구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지혜'다.
시가서 중 욥기, 잠언, 전도서는 지혜 문학이라는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
네 번째 책(시편)의 자연스러운 정황은 이스라엘 성전 예배다.
아가서는 사랑의 시로 시가서에 포함된다.
'지혜'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삶의 신비에 관한 심오한 이해를 가리킨다.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솔로몬의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욥기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주제다.
고난이 다 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편
기원전 3세기 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자료는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500년 대에 수집되었다.
잠언
솔로몬의 것으로 보이는 잠언이 주를 이룬다.
전도서
하나님 없는 삶의 무의미와 믿음이 없을 때 일어나는 절망과 냉소주의에 대한 설득력을 제공한다.
아가서
최고의 노래로 뛰어난 사랑 노래다.
선지서(예언서)(17권)
선지자는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을 대신해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고, 민족적, 개인적 회개를 역설하며 군사력과 정치적 힘에 의존하
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이사야
기원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다.
기원전 740년부터 기원전 701년까지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다.
포로로 끌려간 유다가 다시 돌아와 자유를 얻을 것을 예언하고 최종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해
준다.
예레미야
기원전 626년,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그는 기원전 586년 시드기야 즉 유다가 멸망할 때
까지 활동한다.
그 시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는 쇠퇴하는 앗수르를 돕기 위해 애굽 진출을 막는 전쟁에서 기원전 609년
에 죽는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결국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기원전 612년에 넘어간다.
기원전 605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복속시킨다. 기원전 598년부터 597년까지 다시 예루살
렘을 공격한다.
기원전 588년 다시 공격하고 2년 후 완전 장악하여 유다는 멸망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임명되고, 예레미야는 총독의 진영에 속했지만, 총독이 암살되고 예레미야는 애
굽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예레미아 애가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망한 사건을 다섯 편의 시로 노래한 것이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아가 쓴 것으로 알려진다.
에스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큰 주제이었던 배교, 죄, 유수라는 큰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바벨론은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에게 승리한 후 유다를 포함한 전 지역을 쉽게 지배한
다.
에스겔은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과 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잡혀간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지에서 예루살렘 상황을 예언한다.
포도민들은 '그발강-관개수로'주변에 정착했다.
그의 예언 사역은 기원전 593년부터 573년에 이뤄진다.
다니엘
마지막 때에 관한 환상을 보여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
뒷 부분에서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강조한다.
호세아
북 이스라엘 왕국 출신으로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에 그들을 향해 예언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충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진다.
요엘
기록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중심 주제는 '주의 날'의 도래다.
'여호와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날을 고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고 본다.
아모스
남 유다왕국에서 태어난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그들의 왕국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
이방국가들과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다.
이스라엘이 주변 이방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책임이 더 크다고 한다.
이스라엘에 사회 정의가 사라진 것과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강하게 질타한다.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암시는 없다. 아마도 번영의 시대에 기록된 것 같다.
오바다
연대 추정이 어렵다.
요나
기원전 8세기 경 니느웨로 선교여행을 떠난 이야기다.
미가
남쪽 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두 왕국의 큰 도시들의 타락한 삶에 대한 강력한 영적 질책이다.
두 나라 백성들 모두 타락하였고, 제사장 선지자들은 제 역할을 못하였다.
이러한 부조리를 잡을 왕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한다.
나훔, 하박국
둘 다 남쪽 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다.
스바냐
유대 역사상 중요한 종교개혁의 시대 중 하나인 요시야 때 활동했다.
율법서의 재발견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갱신되었다.
스바냐는 이런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예언했다.
유다의 멸망에 대한 경고는 바알 숭배, 천체 숭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 등 몰렉 숭배를 다룬다.
스바냐는 이런 의식을 버리라고 촉구한다.
학개, 스가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던 시대에 기록되었다
.
학개는 기원전 520년 8월에 소명을 받고,
스가랴는 같은 해 10월이나 11월 경 소명을 받는다.
학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하나의 행위로 성전 재건이 필요하다는 데 초점을 둔다.
스가랴서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올 위대한 메시아 왕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
을 한다.
말라기
구약과 신약사이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포로기 이후에 돌아와서 활동하였다.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 구약의 주요 주제
창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데에 대한 확인, 하나님이 세상 만물의 근원
아브라함 부르심과 언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장하는 출발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을 기독교 신앙의 원형으로 본다.
언약이 등장하는데, 할례는 언약 백성의 외적 표시다. 그렇지만 약속이 선행한다.
그래서 언약을 중시하기에 이방인이 할례를 받을 필요 없는 것이다.
출애굽과 율법 수여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의 기원을 보여준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호와, 야웨 등으로 번역하는데, 본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네 글자 히브리어 표기를 번역한 것이며,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aton - '넷'과 '글자'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로 된 합성어)으로서 특별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사용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 입성
40년 광야에서의 정화기간을 통해 애굽의 흔적은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방 종교에 물들지 않고 여호와께만 예배를 드리는 과정을 만들어간다.
왕정 수립
왕정 수립
초기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때 왕정이 수립되었다.
1대 왕은 사울이었고, 다윗 시대로 이어졌다.
다윗의 계승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제사장
종교적 전통의 수호자로서 제사장이 등장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제의적 정결과 관련이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제도, 특히 속죄일 의식을 보존할 책임이 있었다.
부정(허물, 자연적인 몸의 기능에서 비롯)과 죄(윤리적 의미를 강하게)는 구분해야 한다.
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시적 기능을 한 것이다.
특히 속죄일 (레 16장 1-14절)에 대한 집행이 중요하다.
성전은, 제 1성전(천막), 제 2성전 (솔로몬), 제 3성전 (헤롯 - AD64년에 완공)
선지자
선지자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나비(nabi)는 대리자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전념하시며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했
다.
포로기
BC586년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
이는 이방 종교의 신앙과 그 관습에 빠진 유다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민족적 회개와 갱신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회복
BC539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다.
고레스 왕은 칙령을 선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을 명령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BC537년 9월이나 10월 경 각자의 고향에 정착하고, 포로기 이전의 예배를 회복하
는 과정을 밟는다.
BC536년 성전 재건 준비를 하고,
BC516년 3월 12일 성전을 봉헌한다.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은 여호와의 성실하심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
건으로 해석한다.
이때부터 돌아온 포로민들을 유대인들(Jews)이라고 불렀다.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포로기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4장. 신약성경 한 눈에 펼쳐보기
신약의 공통주제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의미이다.
^ 복음서
복음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는 뜻으로, 에반겔리온(evangelion)이라는 헬라어에서 왔다
.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가가 아니었고,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사에 충실하
는데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고 확신했다.
복음서 중에는 마가복음이 약 65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안다.
부처는 죽은 후 400년이 지나서 대장경이 완성되었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신 지 30년 정도 안에 다 기
록되었다.
기록되지 않은 시기에는 구전으로 전했다.
구전시대는 예수님이 죽은 후 최초의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사가 정확히 전달된 시대를 의미한다.
그런 구전시대를 의미하는 내용이 고린도 전서 11장 23-25절에 소개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마태복음
예수님의 제자 세리 마태가 지었다고 본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로 불린다.
가장 유대적인 복음서다.
마태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을 알려주는데 가장 관심이 많았다.
다윗 왕의 족보에 연계되어 탄생하셨고,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고,
구약의 큰 예언들이 성취된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알려주고 싶었다.
마가복음
베드로와도 동행하고, 바울과도 동행했던 마가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본다.
베드로가 네로의 핍박 시기에 죽자, 복음서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고,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했을 것으로 본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을 주목한다. (막 15장 39절) 아마도 로마의
독자들을 염두해두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박해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는 듯하다.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함께 연결해 볼 때 전편에 해당된다.
데오빌로(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보낸 글이며,
데오빌로는 로마에 사는 기독교에 호의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메시아를 강조하기 보다 비유대적인 독자들의 관심과 필요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으며,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두르러진 특징은 자기 선언에 대한 부분이다.
공관복음의 관계
상호 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다.
네가지 자료가 존재하는데,
1. 마가복음 : 마태와 누가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셈어적 어구를 많이 사용하였고, 오래된 문체를 사용했다.
마가복음의 90퍼센트가 마태복음에 나오고, 53퍼센트가 누가복음에 나온다.
2.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 : 200절 정도의 이 자료를 Q자료라고 한다.
3. 마태에만 있는 자료 : M자료
4. 누가에만 있는 자료 : L자료
사도행전
누가복음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초라하게 시작한 기독교가 단 기간에 영향력을 가지고 발전했는지를 설명하고,
로마제국에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보여준다.
12장까지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주변지역에, 또 팔레스타인 지역과 다른 지역으로 전해졌는지를 소개
하고,
13장부터는 바울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터키와 그리스지역에 대한 선교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로마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소개하는데, 64년 기독교 대박해나 화재사건 등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봐서
그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누가복음도 그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신서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기독교 교리와 실천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서신을 기록해서보냈다.
다른 종교집단이나 세속의 권세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바울서신
신약서신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신서에서의 교회는 건물의 교회가 아니라 회중이나 모임으로 본다.
바울서신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15-20년 사이에 대부분 기록된 것으로 본다.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머물던 57년 봄에 썼을 것으로 본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가 아닌 곳인 로마에 보낸 것이다.
이신 칭의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서
헬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인구가 50만이 넘는 도시다.
자신이 3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에베소에서 55년 경 오순절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후서는 같은 해 말,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후서는 아가야 지역 (고린도, 아테네가 속해 있는 지역) 북쪽에 위치한 마게도냐에서 기록되었다.
고린도서는 이교도 환경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 예배에 대한 논
쟁, 영적 은사 역할, 부활의 내용 등 중요한 내용을 전서에서 담고 있다.
갈라디아서
53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룬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봐서 49년 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핵심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율법의 문자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강조한다.
에베소서
그 지역교회에 회람을 목적으로 기록한 서신으로 본다. (구체적 수신자가 없다)
서신의 여왕이라고 평가한다.
서신의 여왕이라고 평가한다.
로마에서 갇혀있을 때 써서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빌립보서
마게도냐의 중요한 도시로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유럽의 첫 도시로 유대인들이 적어 회당이 없었다.
61년경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
골로새서
골로새는 소아시아의 리쿠스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기록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후기 서신으로 본다.
직접 복음을 전하거나 방문한 적은 없다. 자신이 가르친 에바브라가 목회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신비로운 지식 강조, 금욕주의 강조, 예수님 격하, 천사 숭배 등의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
에 대한 반박을 기록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바울 서신 중 가장 먼저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51년 경)
전서는 대략 51년경으로 본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로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잠깐 머물렀다가 베뢰아로 갔다가 고린도로 가서 편지를 쓴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1절-14절)
후서는 6개월 정도 후에 기록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모데, 디도
구체적으로 개인에게 쓴 목회서신이다.
63년 가택에서 풀려난 후에 기록한 것이다.
빌레몬서
로마에서 연금당시에 기록하였다.
베드로서신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진 상태에서 박해에 직면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썼다.
바벨론에서 이 편지를 기록한다고 했다. (벧전 5장 13절)
요한서신
요한서신은 85년-90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기록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제임을 강조하고 있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랑을 강조하여 사랑의 서신으로 본다.
기타서신
히브리서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희생제사 제도를 완성하셨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신앙, 유대교의 옛 방식 및 사상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야고보서
공동서신으로 다양한 사람에게 읽히게 하였다.
저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유다서
널리 확산된 거짓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는 짧은 서신이다.
요한계시록
도미티안 황제(81-96)의 박해 시기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요한 계시록의 목적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악과 억압이 마침내 제거되고 새 예루살렘에는
고난과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용기를 주고 있다.
5장. 기독교 신앙의 배경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에 관해 본질적인 내용들을 살펴본다.
즉, 믿는다는게 무엇을 뜻하고, 신앙의 근원과 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몇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중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개념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기사에서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신뢰같은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동일한 신뢰를 갖는 것을 말한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
력에 대한 신뢰다.
마틴 루터가 이 개념을 많이 강조했다.
루터는 이 신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칼빈은 1536년에 출판되고, 1559년에 완성된 기독교 강요를 통해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식은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이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마주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존재 증명
하나님은 본질상 증명을 초월한 존재다.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게 아니
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탁월한 근거는 제시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모든 운동의 제일 원인을 하나님으로 본다.
우주를 존재하게 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우주론적 증명에서,
1. 우주의 모든 것은 다른 뭔가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한다.
2. 개별적인 것에서 참이면 우주 자체에서도 참이다.
3. 앞으로도 우주는 자신의 존재를 다른 뭔가에 의존할 것이다.
4. 우주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한다.
목적론적 증명은,
세계는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그 자연질서의 근원이 곧 하나님이라고 결론내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은 지적이며 신적인 설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연적 기초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하면 세상을 의미있게 하는 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 "우선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할건데?" 하고 믿으면 되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없더라"고 해도 손해볼 것 없잖아? 하는 말과 비슷하다.
파스칼은 이성과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이성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주장했다.
* 요한일서 5장 10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라고 되어 있다. - (내가
기록한 내용)
무신론도 하나의 신앙이다. 그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증명하기 쉽지 않다.
^ 기독교 신앙의 근원
성경
성경은 기독교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본문들로 이뤄진 책들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세 가지 의미는,
1.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나 선포를 말한다.
3.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삼중적 형태"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서
성경에 있는 이 말씀에 대한 증언을 거쳐
최종적으로 신앙 공동체의 설교에서 이뤄지는 말씀의 선포에 이르는 삼중적 운동이다.
전통/전승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관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 개념으로 가르침뿐만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며,
가르침과 삶의 해석을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배경으로 '신조'가 출현한다.
'신조'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공적이고 권위있는 진술이다.
이는 새로운 교리가 정당한 이유 없이 들어오는 것을 판단할 공적인 기준으로 전통과 전승을 이야기한
다.
신조
신조의 필요성은,
1.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데 그 신앙을 틀리게 말하는 것을 막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공적인 신앙의 진
술이 필요하다.
2. 세례 때 개인 신앙 고백이 필요했다.
세례 부분을 좀 더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서 새로운 구성원들은 사순절 기간에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술에 동의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확증했다.
3세기 초 전승에 따르면 당시 세례 때 질문은 3가지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죄사함을 믿는
가? 였다.
이 세가지 세례신조를 구술한 것으로 발전한 것이 지금의 사도신경이다. 역 8세기 경에 완성되었다.
사도신경보다 긴 것이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다.
거기에는 4세기 초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에서 나온 논란에 대응하기 위해 진술을 추가했다.
이성
기독교 신학에서 이성은 중요하다.
이성 자체로는 하나님의 신비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가 계시되면 이성은 그 신비를
숙고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1750년-1950년 사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가 발전했다.
최근, 이러한 이성의 강조에 반발하는 포스터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이성의 한계와 이성에 대한 지나친
최근, 이러한 이성의 강조에 반발하는 포스터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이성의 한계와 이성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한다.
^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담론이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부 중 한 명인 클레멘트는, 이교도 신화의 꾸며낸 이야기와 비교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리했다.
6장. 기독교 신앙의 핵심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기독교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그 사상이 자신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한
다는 뜻이다.
^ 하나님
하나님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의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마침내 계시된 하나님이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님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긍휼의 히브리어(rachmin)는 자궁이라는 뜻이다.
인격적인 하나님
용어를 인격적으로 사용하신다.
우리를 대하실 때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관계성을 가질 때도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사랑과 신뢰와 성실같은 성경의 핵심 주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틀을 세운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이시다.
유대인 작가 마틴 부버가 쓴 "나와 너"라는 책에서, 관계는 "나와 그것", "나와 너"로 대별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나와 너'의 관계로 만나는 것이며, '나와 그것'으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개념도 아니고 공식도 아니다.
전능자 하나님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지 않은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이 넷인 삼각형을 하나님은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적 행위에 제한을 두신다. (거짓말, 미움, 약속 어김 등은 하지 않으신다)
삼위일체
성경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이 가능한 성경구절은 마태 28장 19절과 고후 13장 13절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세례와 축도를 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와 능력을 완전히 표현하는데, 이 세 요소는 모두 포함해야 한다.
삼위일체를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신성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그 계시는 성령에 의해 해석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며, 이 구원은 성령을 통해 인간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다.
이것을 이끌어내는 힘은 성령이다.
^ 창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강조한다.
창조는 무형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연은 피조물이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창조를 통해 알 수 있다.
헬라인들은 선질료를 가지고 하나님이 질서를 부여한 건축가로 여겼다.
플라톤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선 질료에 결함이 있었기에 악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물질이 악하다는 영지주의와도 맥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서 창조하였고,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창조론의 의미
창조는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틴 루터는 교리문답을 만들고 자신이 쓴 소요리 문답에서 창조의 의미를 정리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했다. 내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
중요한 의미를 보면,
중요한 의미를 보면,
1. 하나님과 피조물을 분명하게 분리해야 한다.
인간은 죄의 결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
칼빈의 사상에는,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세상과 타락한 세상 간의 변증법이 있다.
세상을 존중하고 중시하기도 하면서, 세상을 구속을 목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강조하지만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창조론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2.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은 세상의 청지기이며 주인은 아니라는 것과 연결된다.
3. 창조 세계는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그렇다.
그러나 악의 존재로 완벽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신다.
회복될 세상의 개념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인간
인간 실존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창조는 답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짧은 표현은, 인간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
잡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상기시켜 준다.
고대 군주들이 자신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 형상을 세우는 것과 같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에서 하나님의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말하
며 우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합리성간의 일종의 상응을 나타낸다.
인간의 지적 자원과 이성적이고 지적인 영혼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3.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잠재력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우리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고 죄를 지은 죄악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 시초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관계성을 부인한데서 기인한다.
인간의 본성 속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리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가져야 하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창세기의 두 사건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선악과 먹는 사건과 바벨탑 사건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권위와 힘을 나타내려고 하는 열망이 나타나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할 때가지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방식으로 다다르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파괴되고 오염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절망과 부패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계실 때 회복되는 것이다.
그 구원자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 예수님 : 이 책의 1장이 예수님에 대한 장이다.
그러나, 성육신에 대한 부분에서 핵심 내용만 정리한다.
인간은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구원을 아는 참된 지식도 모른다.
그래서 구원은 외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출발점이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그 과정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중보 교리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칼빈)
그 중보자가 되시려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셔야 한다.
그래서 성육신의 교리가 중요한 것이다.
^ 구원
대속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을 알아본다.
회복으로서의 대속이다.
죄의 값을 치르는 의미의 대속
사랑으로서의 대속
^ 은혜
하나님이 개인과 민족을 선택하시는 이유는 공로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 때문이다.
순전한 은혜와 주권적 선택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우리가 치유받고,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의 본성은 어차피 길을 잃은 상태에 있다고 어거스틴은 봤다.
죄 때문에 분명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고상한 영적 진리와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치유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당신에게서 행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것에서 행복을 구하고 있
습니다."라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 때문에 약해지고 힘을 잃었다고 보았다.
그 뒤틀린 자유의지를 회복시키는 그 치유책은 은혜를 통한 수술이다.
^ 교회
교회(에클레이사)의 의미는 크게 두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첫째는 지역적이며 가시적인 신자들의 모임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자 전체를 의미한다.
존 칼빈은 보이는 교회(공동체)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택함 받은 자들의 보이지 않는 집합체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교회다.
현재 개 교회의 불일치는 마지막 날에 해소될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교회는 성도와 죄인들이 뒤 섞인 곳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결국 선과 악의 분리는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이뤄진다.
세상에서 성도와 죄인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미숙하고 부적절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판단을 내리거나 분리를 강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죄로부터 분리되고 구별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사함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용어(카다드)가 도덕성, 신성함, 깨끗함 같은 용어와 동일시될 때가 많으나
본 의미는 '잘리다', '분리되다'와 같은 의미다.
^ 성례
'군인의 맹세'라는 새크라맨툼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하고 발전하는데 특히 중요하다고 이해되는 특정한 예배의 의식을 가리킨다.
교회 안에서 성례는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과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만 인정한다.
세례
아이도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하는 면에서 신약성경에 분명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어서 유아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할례의 예를 들어 영적 상응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골 2:11-12)
초대 교회에서는 유아세례는 지지한다.
반면 침례교에서는 반대한다.
개인이 은혜나 회개나 믿음의 상징을 보여줄 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도 그들이
강조하고 있다.
성찬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로 자신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 의식은 초기부터 시행되어 왔고,
존 칼빈은 떡과 포도주를 유효한 상징으로 보았다.
7장. 간추린 기독교 역사
^ 초대 교회사
사도시대부터 칼케톤 공의회(451년까지)
기독교 신앙이 이때 자리를 잡고 뚜렷이 형성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기독교가 유대교와 연속선상에 있다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다룬 것이며, 신약은 세계를 다룬 것으로 인식한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선상에서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있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의식과 관습을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9년에 열린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다.
많은 기독교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바울에 따르면 이 그룹을 주도하는 사람은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로 주장한다.
바울이 보기에 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이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립되었단 말인가?
기독교와 여성
바울은 초기 기독교에서 사회적, 인종적, 성적 장애물을 초월한다고 선언한다.
루디아나 브리스길라, 뵈뵈 등의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특히 갈라디아서 3장 28절,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강조한다.
이 시대에 갈라디아 교회에 관습과 전통을 강조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강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
는 대목이다.
복음이 유대교에서 무시당했던 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한 게 분명하다.
복음의 확장 : 바울
바울의 1차 전도여행(행 13:4~15:35), 46-48년, 44세의 나이로 회심한 지 14년 지난 뒤임.
바울, 바나바, 마가 세 사람은 소아시아의 남쪽 해안을 간다. 지중해 북동쪽 지역이다.
- 구브로 섬, 이고이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이다. (현재 터기 지역)
바울의 2차 전도여행(행 15:36~18:22),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결과를 가지고 간
다.
육로를 따라 갈라디아로 가서 디모데를 합류, 드로아에서 누가와 합류, 에게해를 건
너 마게도니아 지방 빌립보,
데살로니가 (천막 기술자로 일함), 아덴으로 내려감, 아덴 남쪽의 고린도(18개월)
바울의 3차 전도여행(행 18:23~21:17) 53년 어느 시점,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됨. 에베소 방문이 가장
중요함.
기독교는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세기가 끝날 무렵, 기독교는 동부 지중해 세계 전역에 뿌리를 내렸으며 로마에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
았다.
로마교회가 강해지면서, 로마의 교회지도자들과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지도자사이에 긴장이 일었다.
결국 (로마)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동방교회로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몇 도시가 핵심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1.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에 위치.
2. 안디옥 : 터기에 위치.
3. 북아프리카 서부 : 알제리 지역
기독교가 지중해 지역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시대를 '교부 시대'라 한다.
기독교 신앙이 완성된 100년 즈음부터 칼케톤 공의회 451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를 기독교 교리발전의 결정적 시기로 본다.
교부시대는 몇 가지 지속적인 이슈가 있었다.
첫째는 유대교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박해에 대한 대응과 생존의 문제였다.
311년 갈렐리우스 황제는 박해 중지를 명령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을 수록 더욱 결심을 굳혀
줄 뿐이었다.
312년 콘스탄틴은 10월 28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했다.
321년 콘스탄인은 주일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기독교 상징이 주화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 신학논쟁
1. 도나투스 논쟁 : 박해 때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어떤 타
협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2. 아리우스 논쟁 : 아리우스가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함에 따라 콘스탄틴은 소아
시아의 니케아에서 220명의 주교가 참석하는 공의회(325년)를 소집하여 논의하였고, 아리우스의 주
장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린다.
예수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것으로 하며, 예수님은 인간이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했다.
3. 펠라기우스 논쟁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에서 하는 역할에 대한 논쟁이다.
수도원 운동의 기원
교부시대 수도원 운동이 발전했다.
이것이 공동체 생활을 명기하게 되기까지 발전했다.
^ 중세교회사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기독교는 이미 지중해 지역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9-10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로마가 멸망하면서 기독교는 큰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로마가 멸망하면서 기독교는 큰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슬람은 7세기에 아랍 민족 사이에서 강력한 종교운동이 되었고,
정복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서방교회가 1095년부터 1204년까지 수차례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
게 하였다.
동방기독교는,
'비잔틴'이라고 했고, 이는 콘스탄틴이 세운(330년)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에 이슬람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발전했었다.
이 도시는 지중해 동부의 유일한 중심지였다.
비잔틴이 멸망하면서 정교회 내의 지적, 정치적 리더십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10세기 비잔틴의 선교를 통해 회심한 러시아인들은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때 동방교회의 편에 섰었
다.
러시아 외에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이 영향을 받았다.
중세시대에 러시아에서 동방 정교회가 번성하였고, 모스크바 러시아의 형성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4, 15, 16세기에 이 지역에 250개가 넘는 수도원과 수녀원이 세워졌다.
서방기독교는,
5세기 말에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매우 불확실한 미래를 맞게 된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들어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황의 지원 하에 영국 선교에 참여한다.
영국의 회심으로 북유럽 여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한 전초기지가 세워졌다.
영국 선교사들이 독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는 형태로 갔다.
스콜라주의의 등장
중세시대 기독교 르네상스의 중요한 면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관심이 꽃을 피웠고,
1050~1350년에 기독교 사상은 지적인 면에서 견고해졌다.
파리에 신학교가 세워지고 신학적 철학적 연구의 중심지로 파리가 부각되었다.
파리대학은 주목할 만한 신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대학에서 연구했다. (이탈리아 사람이다.)
독일과 그 밖의 대학에서도 주요 대학이 설립되면서 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적 발전은 스콜라 주의의 등장이다.
1200-1500년대에 번성했으며 종교적 신앙을 이성적으로 증명하고 신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
을 강조한 중세 운동이었다.
수도회의 등장
파리에 주요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시토 수도회(1097년)가 유명했는데, 학문보다 노동을 강조했으며, 개인기도를 강조했다.
한 세기 후에 두 수도회가 탄생했다.
프란시스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였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기도와 청빈의 삶을 살기 위해 부자의 삶을 포
기했다.
회색 옷을 입고 다녀서 회색 수사들이라고 불렸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흰옷 위에 검은 망토를 걸쳤기에 검은 수사들이라고 불렸다.
스페인 신부 도미니크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다.
르네상스
프랑스어로 14,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학과 예술의 부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1454년 이슬람에 무너지면서 그 곳에 있던 많은 헬라어를 사용한
지성인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와 헬라어의 부흥은 필연적이었다.
연구차 내려왔거나, 외교사절의 일행으로 이탈리아에 왔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영향을 미
쳤다.
북 유럽의 인문주의 내에서도 교회의 전체적인 부흥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기존의 라틴어 번역들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동안 사용하던 라틴어 번역 가운데 최고였던 벌게이트 역 성경에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 벌게이트 역 성경은,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가 유능한 성경학자 제롬에게 라틴어 번역을 요청하
여 405년에 신구약 성경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 결과 교리개혁의 길이 열렸다.
인문주의가 중세 신학의 발전에 결정적 도움을 줬던 부분이다.
인문주의가 벌게이트 역의 오류를 밝혀내면서 스콜라 주의의 성경적 기초가 무너진 것 같았다.
이들은 신약의 원문인 헬라어 성경으로 직접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번역본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
다.
1516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최초의 헬라어 신약본을 내놓았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번역의 잘못된 부분을 밝혀낸 사람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번역의 잘못된 부분을 밝혀낸 사람이었다.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맞다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은 당황했고, 개혁자들은 환영했다.
중세 말 기독교는 대중화 되었고, 사람들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묻혀있는 로마와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한 산티아고 대성당(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는 야고보의 스페인식 발
음)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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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부터 학구적인 개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새롭게 관심을 가졌고, 기독교가 활력을 회복하기 위
해 개조와 갱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미술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 바티칸 시스틴 대성당 천정에
그린 그림같은 것들을 의뢰했다.
인문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경험과 연결하려는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복음을 개인의 경험 세계에 굳게 심을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존 콜릿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에라스무스가 쓴 "엔키리디온-그리스도인 군사를 위한 지침서"는 대단한 책으로 인정받았다.
이 시대에 문맹률이 감소하고, 반성직주의의 물결이 흘렀고, 교리적으로 다원주의가 확산되었다.
신학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개인의 의견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고,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부재하면서 중세 말기에 교회의 권위가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적지 않은 동기를 부여한다.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칭의교리였다.
즉, '한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가?'이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분을 부정한다고 보았다.
* 펠라기우스 논쟁 : 개인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위에 있는가? 인간이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
(4세기)
^ 종교개혁
16세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대다.
영국 성공회,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등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시대다.
이 시대에 프로테스탄티즘이 나타났다. 근대 기독교의 출현이 된 시대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 츠빙글리, 칼빈 같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춰 이 시대에 일어나 교회의 도덕적, 신
학적, 제도적 개혁과 관련된 서유럽의 운동을 가리킨다.
1525년까지 종교개혁의 중심은 루터와, 비텐베르그 대학이었다.
1520년대 초에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힘을 얻고,
중심은 제네바 (당시에 독립국가)와 칼빈으로 옮겨졌다.
독일과 스위스 등에 집중되던 것이 16세기 서유럽 대부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에는 학문적 운동으로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육을 개혁하는데 집중했다.
처음에는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면서 주목을 끌었다
.
루터가 1521년 유죄판결을 받고 숨어 지내다가 1522년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종교
개혁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루터는 대학무대를 넘어서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개혁운동의 선봉에 섰다.
루터는 독일을 벗어나지 못했고, 크게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루터의 칭의교리와 만인제사장 교리를 통해 여성을 포함해 평신도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수도원과 수녀원의 분리된 생활을 반발했다.
수녀원에서 수녀들을 탈출시켰고, 그 중 한 명과 결혼했다.
칼빈의 종교개혁
장로교 같은 개혁교회를 낳은 칼빈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연방의 발전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츠빙글리같은 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학문적이지 않았다.
교회에 직접 뛰어들었고, 제도적, 사회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츠빙글리가 1534년 죽고
제네바가 종교개혁의 발전소로 등장하고 칼빈이 1550년 주도적인 사람으로 등장하면서 완성되었다.
1520-1560년에 개혁교회 내에서 힘의 중심이 쮜리히 - 베른 - 제네바로 옮겨갔다.
칼빈주의(Calvinism - 칼비니즘)라는 용어는 개혁교회의 종교사상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지금은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세요소는 루터의 종교개혁, 개혁주의 또는 칼빈의 종교개혁, 재세례파의 종
교개혁이며,
이 중에서 개혁주의 종교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17세기 영국역사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고, 그 이후에도 중요한 청교도 운동은 개혁주의 기독교
의 구체적인 한 양식이다.
학문적으로 말하는 종교개혁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영국 성공회 포함)의 종교개혁을 말
하고 재세례파는 제외한다.
재세례파 : 급진 종교개혁
츠빙글리에서 유래하였고, 문자적으로 세례를 다시 주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츠빙글리가 1520년 초 쮜리히에서 종교개혁을 한 후 일어난 재세례파는 신앙을 직접 공개적으로 고백
한 사람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츠빙글리의 원칙에 자신은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급진 사상가들은 그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외부 권위 불신, 유아 세례 거부, 재산 고유, 평화와 무저항 강조 등이 주요 내용이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재세례파를 나중에 파괴집단을 보았다.
가톨릭 종교개혁
트렌트 공의회(1454년) 이후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맞설 방법을 모색
하려고 내부로부터의 자기 개혁을 시작하면서 일어난 개혁운동이다.
성직자의 행위, 교육, 선교활동, 수도회의 개혁, 새로운 수도회(예수회 같은)의 등장 같은 개혁이 이뤄
졌다.
프로테스탄트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16세기에 중세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 서유럽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형태
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1529년2월, 독일의 슈파이에르 국회가 투표를 통해 독일에서 루터교에 대
한 종지부를 찍자
4월에 6명의 독일 제후와 14개 도시가 국회의 이런 억압적 조치에 항의하면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소수의 권리를 외치면서 생겼다.
복음주의적(evangelical)이란 용어는 1529년 4월 이전, 베텐베르그와 그 밖의 지역(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일어난 개혁 그룹을 가리키는데 자주 사용된다. 이 용어도 중요하다.
프로테스탄트의 세명의 대표자는 마틴루터(1483-1546), 츠빙글리(1484-1531), 존 칼빈(1509-156
4)이다.
마틴 루터
독일, 법을 공부, 수도원에서 사제 훈련, 1511년부터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성경교수, 강의를 하면서 회
심.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회심으로 인간은 자기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확신
교회 내 개혁프로그램 가동, 1517년 비텐베르그성 교회 정문에 95개의 반박문 게재.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책 출판 등으로 영향을 미침.
츠빙글리
스위스, 교구 사역, 에라스무스 저작에 깊은 관심.
1519년 쮜리히에서 목회, 성당에서 개혁 프로그램 가동, 교회의 도덕적 개혁 주장, 성례 신학에 대한
비판
존 칼빈
제 2세대 종교개혁자. 파리에서 태어남.
스콜라 주의가 팽배한 파리 대학에서 공부. 20대 중반에 회심 경험.
1536년 신학의 기본 개념을 세우기 위해 기독교 강요 출판. (여섯 chapter장으로 구성)
제네바로 옮겨 활동하다 추방당함.
프랑스 대도시 스타라스부르그로 옮겨 목회활동하며 개혁을 실천.
제네바로 다시 돌아간 칼빈은 교회론을 정립하며 개혁을 실천.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특징
1. 교황의 권위를 거부
2. 성경의 우선권을 강조
3. 복음의 두 성례 즉 세례와 성례(성찬)만 인정 (가톨릭은 일곱 가지 성례)
4. 성찬에서 가톨릭은 평신도에게 떡만 주었지만 떡과 포도주를 다 줌.
5. 만인 제사장 (목회자는 역할만 다름)
6. 가톨릭의 연옥 교리 부정
7. 마리아 숭배 거부
칼빈 사후, 1560년 이후에 루터교와 칼빈 중심의 개혁주의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고,
이 두 진영을 대표하는 수식어가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루터교는 독일을 중심으로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스위스 등에서는 '기독교 강요'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권위를 인정한다.
청교도주의
청교도란 개혁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국교회(성공회)신자들을 비난하는데 사용되었던 용
어다.
캠브리지 대학은 청교도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적대감을 느끼고 국교회에서 분리되었으며, 처음에는 네덜란드에 자리를 잡았다고 다시 돌아
와 영국에 교회를 세웠다.
이런 부류의 교회가 당시에 약 300개 정도였다.
1606년 존 로빈슨을 목사로 하는 분리주의 교회가 적대감을 받자 네덜란드로 자지를 옮겼다가 여의치
않자 아메리카로 시선을 돌려
1620년 9월 6일, 102명의 교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다.
청교도주의는 영국에서 민주주의 세력과 동일시 되었다.
그들은 복잡한 영국의 정치환경을 벗어나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다.
메사추세츠 만이 청교도주의의 중심지가 된다.
미국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프로테스탄트 : 경건주의
건조한 합리주의와 메마른 정통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 기
초하는 마음의 종교를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감정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이 중에 영국에서 웨슬리(1703-1791)의 영향으로 감리교 운동이 진행되었고, 감리교단이 탄생했다.
경건주의자 웨슬리는 살아 있는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신이 회심할 때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하면서 신앙의 경험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무미건조한 이신론과 대조를 이뤘고, 작은 종교적 부흥을 이끌었다.
*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자였고, 휘트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반 종교적 색채를 띤 이유는 당시 경건주의에 견줄만한 기독교 운동이 프랑스에
는 없었다.
경건주의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부분과 연결되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아메리카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북미에 전한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미주로 온 사람들이었기에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헌신적
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뉴잉글랜드 메사추세츠 만에 있었고,
버지니아 지역에도 있었다.
기독교와 북미 원주민 문화간 유명한 만남은 버지니아 지역 인디언 추장 포와탄의 딸 포카혼타스와 관
련이 있다.
포카혼타스가 기독교로 개종과 존 스미스 선장의 관계에 전설이 많다.
포카혼타스와 존 롤프의 결론으로 정착민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평화가 있었고, 포카혼타스는 세
례를 받기도 한다.
그녀는 버지니아 회사의 일을 위해 영국으로 가지만 22세에 폐렴으로 죽는다. 거기서 첫 사랑 스미스
를 만나기도 한단다...찌잉...
아메리카는 이들에게 약속의 땅이었고, 대서양은 홍해였으며, 영국은 이집트였다. 이들에게 출애굽기
는 생생함 그 자체였다.
1620년 순례의 조상들은 플리머스를 떠나 항해에 오른다.
1627년부터 1640년 사이 약 4천 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 만에 정책했다.
그러나 18세기가 지나면서 그들은 명목상 교인으로 그 수준이 떨어졌고, 주일은 지키지만 결정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
신세계에서 기독교는 무력해갔고, 물질적으로 번영하면서 그들의 신앙은 무관심해졌다.
1734년,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통해 '대각성 운동'이, 특히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에서 일어났다
.
이 일을 정리한 책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충실한 이야기"다.
부흥이 계속되면서 영국에서 건너온 조지 휘트필드(칼빈주의)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휘트필드는 거리에서 설교하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예수회의 등장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했다. 직업군인출신으로 군대를 모델로 엄격한 신앙훈련의 필요
성을 확신했다.
1534년 파리에서 공식 출범 당시 로욜라와 6명의 멤버였다.
예수회는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 충성하는 영적인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들을 교황은 활용하였고,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에 나서는 것이 그들 활동의 주 목적이었다.
16세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중국, 인도, 브라질, 일본, 말레이 반도 등에서 다양한 선교활동
을 했다.
지적으로 탁월한 예수회를 만들기 위해 엄격한 연구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들은 신학적, 문화적 논쟁에서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종교전쟁
유럽 전역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수 많은 전쟁으로 결국 사람들은 전쟁에 이골이 났고,
종교는 국가 정책이 아닌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라는 계몽 주의의 주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프랑스에서는 칼빈주의를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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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합리주의도 등장한다. 계몽주의로 알려진 이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많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까지 하나님 없는 무신론을 강조했고, 교황권을 없애버
렸다.
다행히 나폴레옹 시대 이후부터 점차 복권은 이뤄졌지만 무신론의 영향은 컸다.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이다.
유물론은 세상이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철학적 주장이 아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질 생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필요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모든 게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종교를 포함한 모든 사상은 물질적 실체에 대한 반응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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