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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선교이전의 역사

주거시엔셩 2016. 12. 30. 10:20


            개신교 선교이전의 역사


 

 

(자료1)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나라는 중국입니다.
그런데 1807년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처음으로 중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25년의
노력 끝에 겨우 성경을 번역했고, 그가 죽기 전에 1명 전도했습니다.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65년 빠른 1819년에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30년 동안에 두 사람
세례 받았고, 몽골에서는 선교 40년간 한 사람도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어떻습니까?

 

 

 

(자료2)  

 


1884년 알렌이 조선에 첫 공식 선교사로 들어온 이후 17년만인 1901년에 감리교에서
한국인 목사가 나왔고(김창식, 김기범), 23년 만에 장로교회서 노회가 만들어지고,
27년 만에 장로교 총회가 만들어져서 해외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자료3)



알렌 다음으로 최초의 성직자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에 들어올 때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모리슨 선교사가 선교를 시작한지
25년 후에야 중국어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우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세계에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는 이런 엄청난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
다른 나라의 신앙과 부흥역사만 특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중국, 만주, 일본,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료4)


1.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중국)
조선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교 준비는 중국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아시아는 중국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조선에 들어오신 선교사님들 대부분은
중국, 만주, 인도 선교를 계획했다가 도중에 조선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소개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마스는 1840년 8월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부인과 함께 중국 선교를 떠납니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부인 캐럴라인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너무 상처를 받은 토마스는 중국 선교사직을 그만 두고 중국 산동성에서
세관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병인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에 온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선교를 하려다가도 박해가 있으면 안 할 것 같은데
토마스는 오히려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갈 기회를 찾던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의 소유주인 미국인 프레스톤을 만납니다.
결국 조선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토마스는 제네럴 셔먼호의 안내자겸
통역자로 동승하게 되고 그렇게 염원했던 조선을 향해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 수십 권을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셔먼호가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해서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배가 머문 곳에 조선의 문정관이 와서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셔먼호의 선장은 이 말을 무시하고 대포로 조선을 위협하면서,
그리고 병졸까지 납치해서 감금하면서 계속해서 항진을 강행합니다.
당시 평양은 공포로 가득했고, 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이 팽배해 졌습니다.


(자료5)


때마침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에 썰물 때가 되어
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 호는 강 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평양감사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_양반전, 허생전)의 명에 따라 상류에서 병졸들이
작은 배들에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인 신탄선을 떠내려 보내자
셔먼 호에 이르러 배가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 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물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님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떠나올 때 준비한 한문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는데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퇴교 박춘권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토마스 목사의 나이 겨우 27이었습니다.
그 시체는 토막 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 졌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죽음입니까?
그런데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살 된 소년이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서양인의 물건에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서
다시 그 책을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주게 됩니다.
그런데 박영식도 이 성경을 불태우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뜯어 벽지로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다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이후 13살이었던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서 박영식의 집을 구입한 후 주막을 시작합니다.


(자료6)


평양선교가 처음 시작된 것이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 지 27년 후인 1893인데 이때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주막에 머물다가 성경으로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최치량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최치량도 예수님을 믿고 1894년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거 박영식의 집이었던 최치량의 주막이 평야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됩니다.


(자료7)


널다리골 예배당이 바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고,
그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님이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됩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바로 30년 전에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 이었습니다.
지난 30년간 박춘권이 서양인을 죽이고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 부터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박춘권은 자신이 예수를 믿은 후 그가 간직하고 있던 성경책 1권을 그의 조카 이영태에게 주게 되고,
이영태 역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데 훗날 이영태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런 모든 역사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허무해 보이는 죽음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료8)



2) 만주에서의 상황(로스선교사, 의주청년, 서상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위해 만주에서 중요한 작업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바로 성경번역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존 로스 선교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중국으로 파송이 됩니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만주로 가고 만주에서 알렉산더 윌리암슨을 통해 6년 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시작으로 조선 선교에
마음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가 1874년 10월 9일에 간 곳이 ‘고려문’(자료9)입니다.


(자료9)


고려문은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고,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을 만나면 가지고 간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차가워서 뜻대로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로스는 우연히 자신이 머물던 여관에서
50대 남자 상인을 만나 그에게 현재 한국의 상황과 발음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로스 선교사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로스는 1차 고려문 방문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별 소득이 없어 보이는 여행입니다.
하지만 로스에게 성경을 받은 그 50대의 상인은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가 본인은 보지 않고
그것을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주어서 읽게 했는데 그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곤 얼마 후 그 아들과 친구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만나기 위해
만주까지 걸어서 찾아갑니다. 하지만 로스는 집에 가서 부모님과 다시 상의할 것을
제의하고,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 그 상인 아들의 친구가 먼저 와서
우정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때가 1879년입니다.


(자료10, 1-최초의 수세자, 2-백홍준, 3-이응찬, 5-김청송, 7-서상륜)


그리고 그 후에 성경은 받은 상인의 아들이 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홍준입니다.
백홍준은 로스를 도와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서 번역에 매우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서상륜과 함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에서 권서의 임무를 하면서 복음은 전한 전도자입니다.
이 백홍준은 1887년 언더우드가 세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고
그 후 전국으로 순회전도를 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876년 3월에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그러자 로스는 그해 4월에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어학 교사로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납니다.
로스 선교사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갈 수는 없더라도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면 한글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성경번역을 시작하는데 그의 한국어 교사인 이응찬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응찬은 당시 아편과 음주가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로스의 성경번역을 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응찬이 성경을 번역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자료11)


그리고 그 후 열심을 다해 로스의 성경번역을 돕는데
마침내 1882년에 비로서 최초의 한글 누가복음서가 번역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국 땅에서 콜레라에 걸려 1883년 9월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응찬이 번역한 누가복음이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통해 만주에 있던 한인촌에 퍼지게 되면서
1884년 말에 가서는 압록강 연안 한인촌 들에서 세례교인 100명,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매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가정이 수천 가정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또 한 명 소개해야 할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입니다.


(자료12)


서상륜은 백홍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백홍준은 서상륜에게도 복음을
전하지만 처음에 서상륜은 그것을 거절했다가 결국을 예수를 믿게 되는데,
바로 이 서상륜이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1883년 5월부터 평양에만 1천권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배포했고, 같은 해 서울에 4백권의 복음서를 반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개종자가 생겼고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 베풀어 주기를 요청까지
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먼저 목회자를 초청해서 세례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조선에서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이때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도 신약을 몇 번 읽고 예수를 믿게 되는데 그는 삼촌이 계시는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최소 1885년 초까지 최초 20여명의 세례 청원자를 내게 합니다.
그러면서 1883년 5월 16일에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최초의 소래교회(자료13)가 세워집니다.


(자료13)



조선 최초의 목회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황해도 소래마을에 갔을 때 굉장히 놀란 것이
선교사가 한번도 와 본적이 없는 이 곳에 58세대 중에 50대가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선교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자료14-이수정)


3) 일본에서의 상황
알렌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로스 선교사를 통해서 만주에서
성경번역을 하게 하셨는데 일본에서 역시 성경번역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인물이 이수정입니다.
이수정은 한국의 유학자로서 상당한 학문적 소양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체류할 동안 9개월 만에 일본어를 능숙하게 터득을 했고,
그가 한시를 한번 쓰면 일본 학자들이 서로 다투어 그것을 얻으려고
했을 정도입니다.(니지마조 생가의 병풍, 윤종주, 정지용, 교토 동지사대)
이런 이수정을 일본 정부는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선생으로 채용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자료15)


1882년에 조선에서 임오군란이라는 큰 사건이 터집니다. 임오군란이 뭡니까?
당시 조선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민씨 집안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대원군의 수구세력은 정치에서 많이 밀려나고
개화파가 많이 득세했습니다. 이러던 중 1881년에 개화파가 일본의 후원을 받아서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합니다. 그러데 문제는 이 별기군과 기존에 있던 구식 군대간에
차별이 심했습니다. 대원군이 정치 무대에 있을 때는 구식 군대에 대한 대우가 굉장히 좋았는데
지금은 벌써 13개월째 군료가 밀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 만에 1개월 치의 급료를 쌀로 받았는데 그 쌀을 보니까 모래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구식 군대가 들고 일어나서
민씨 세력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이 사건이 ‘임오군란’입니다.
이때 성난 민중이 궁궐까지 들어가서 왕후를 죽이려고 했는데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명성왕후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수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종황제가 이수정을 불러서 감사의 표시로 일본유학을 시켜주게 됩니다.


(자료16)


이수정이 일본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일본의 농학자 ‘츠다센’입니다.
그것은 이수정이 농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개화파 인물인 안종수라는 친구가
츠다센을 꼭 만나보라고 했기 때문인데 츠다센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농업 지도자를 육성함으로써 일본 근대 농업의 창시자라라는 칭호를 받은
초기 일본 기독교의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츠다센과 교분을 쌓아가던 중 이수정은 츠다센으로부터 한문성경을 선물 받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수정이 하루는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꿈 속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옆구리에
한 보따리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수정이 그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은 “이 책들은 당신네 나라를 위한 무엇보다 가장 귀한 책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이수정이 그게 무슨 책이냐 라고 묻자 “성경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낙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처럼 성경은 이수정을 개종하도록 만든 도구이면서, 동시에 개종 후에는
그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기치 못하게 로스 선교사가
우연히 만난 50대 상인에게 준 한문 성경이 그의 아들 백홍준과 친구들을 변화시켰고,
또 전혀 다른 나라 일본에서 유학의 대학자인 이수정이 성경을 보고 회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를 위해 준비 작업을 튼튼히 하십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자 당시 미국 성서공회의 총무였던 루미스(자료17)는
이수정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 어떻겠냐 제안을 합니다.


(자료17)


그래서 이 때 이수정이 비로소 모든 민중이 쉽게 볼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선교본부에 미국인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는 이것을
‘한국의 마케노니아의 부름’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이수정의 이런 끈질긴 요청으로 인해
본래 조선 선교계획이 없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 언더우드를 급히 보내게 된 것입니다.
만주에서는 서상륜이 로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와서 세례를 주라고 요청하고,
지금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미국장로교본부에 선교사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료18)



그래서 이수정은 언더우드의 조선입국에 앞서 성경번역을 마치려고 했고
결국 그가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이 1885년 <신약전 마가복음서 언해>라는 제목으로
요코하마에서 인쇄가 됩니다. 그리고 그 해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를 만나
수개월간 열심히 조선어를 가리켜 주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그 성서를 들고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한국 교회가 100년 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미스테리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로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치밀하게 준비하신 것들이
열매로 맺어진 겁니다. 우리나라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미국에서의 상황
한편 미국에서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중요한 만남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해 두셨습니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간에 신미양요(1871년 5월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남)가 일어나고 1882년에 한미수호조약이 맺어집니다.
조선이 서양과 외교를 시작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
이 비밀조약은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때 일어났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31대 대통령 /11월 을사늑약)
그 후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를
전권공사로 임명한 후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 조선에 보냅니다.


(자료19)


그리고 푸트는 국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조선에서도 미국에 사절을 보내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겨우 27살밖에 되지 않은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임명한 후
평균 25살이 안된 청년들로 구성된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보냅니다.


(자료20)


사절단은 1883년 7월 16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이틀 후 사절단은 대륙횡단 철도를 이용해서
시카고, 뉴욕 등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여 미국 21대 대통령 ‘체스터 아더‘를 만납니다.
그 후 민영익, 서광범, 변 수 등은 유럽을 돌다가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고
나머지는 12월에 모두 귀국합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가는 도중에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기차 안에서 민영익이 훗날 감리교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존 가우처 박사를 만난 겁니다.

(자료21)


가우처는 볼티미어 여자 대학의 창설자입니다. 이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참 많은
대화를 나누고 민영익은 기독교에 대해서, 가우처는 조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민영익이 기독교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가 갑신정변 때 알렌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도 있지만, 이 가우처 박사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데 민영익은 그때 기독교를 발견한 것입니다.
가우처 역시 민영익과의 만남을 계기로 1883년 11월 6일자로 감리교 와일리 감독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선교헌금 2천불을 보냅니다.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 있던 맥클레이에게(자료22) 한국을 방문해서
선교 가능성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료22)


그래서 맥클레이가 가우처의 요청으로 1884년 6월부터 2주간 한국에 다녀왔고
고종으로부터 미국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허락 받습니다.


(자료23)


그래서 감리교에서 1884년 말에 교육사업을 위해 아펜젤러를 의료사업을 위해
스크랜튼과 스크랜튼의 어머니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이들은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제 드디어 개신교 선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한국 선교를 위해
얼마나 세밀하게 준비해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