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J. Moltmann)의 기독론
윤 철 호
(장로회 신학대학)
I. 서 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에 몰트만의『희망의 신학』(런던 1965)이 미래지향적인 기독교 소망의 지평을 열어줌으로써 해방신학의 영성을 고무시키고 고취시켜주었다면, 그의 십자가의 신학은 해방신학의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적 사회 분석을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안에 근거시킴으로써 해방신학의 신학적 기초를 더욱 굳건히 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희망의 신학』(1965)에서는 십자가의 신학이 비중 있게 깊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의 신학은 그의 전 신학의 여정을 “안내하는 빛”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서면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신학의 다른 측면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 당시 판넨버그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희망을 정초하였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
님』(1972)에서 몰트만은 메츠(Metz)와 더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과 죽음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켜 상기시켜 주고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하여 희망의 신학이 더욱 구체화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조직신학 체계의 세번째 저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에서 그는 묵시문학적, 우주적, 종말론적 지평으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기독론의 절대성을 부인한다. 그는 기독론은 교회의 전통에 얽매어서는 안되고 언제나 새롭게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독론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불트만처럼 시대의 변화로 세계상과 종교적 표상들이 변화되기 때문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으로부터 기독론이 생성되고 또 파괴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교회의 기독론적인 초상들에 대한 항구적인 우상 파괴가 시작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 서문에서 자기가 추구하는 기독론을 “도상에 계신 그리스도,”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정적인 두 본성을 가진 인격이나 역사적 인격성 으로 파악 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의 역사 과정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나는...오히려 역사의 갈등 속에서 도상에 있으며 방향을 찾고 있는 인간을 위한 기독론을 원한다.
몰트만은 자신이 추구하는 기독론은 역사의 낯선 곳에 실존하며 삶을 찾는 순례자들의 기독론, “길의 기독론”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논고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독론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연 몰트만의 사상을 위에 소개한 그의 두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II. 몰트만의 기독론의 방법론과 주제
A. 기독교의 정체성과 관계성
오늘날 신학, 교회, 그리고 인간의 기독론적 실존은 과거보다 더 심각한 이중의 위기에 처하여 있다. 곧 관계성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이다. 신학과 교회가 현대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들 고유의 기독교적 동일성을 상실할 위기에 빠진다. 그 반면, 신학과 교회가 전통적 교리, 예배의식, 그리고 도덕적 표상 하에 자기의 동일성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그들은 더욱 현실과 무관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 이중의 위기는 동일성과 참여의 딜레마라고 표현될 수 있다.
신학과 교회를 혁신하기 위한 투쟁은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기독교의 관련성의 위기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관계성 안에 존재하는 길을 열망하고 추구하다 보면 정체성의 위기로 인하여 마비되어 버리기 쉽다. 몰트만의 핵심 개념은, 우리는 기독교의 관계성을 그 자체의 정체성 원리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체성 원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는 또한 오늘날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적인 삶과 세상에서의 해방운동에로 우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기독교 신학에서 조차 낡은 구식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모든 신학의 내적 규준(規準)이다. 기독교 신앙의 동일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것을 제거하고 나면 교회와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만일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와 관련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예수의 죽음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동일화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만일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소외는 소외되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취하여진 바 되었다. 만일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의 연대성 안으로 들어오셨다. 만일 버림받고 버려진 바 된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그분이 그들의 재난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이러한 관련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좋은 설교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실제적인 도움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단지 위안만을 주는가? 몰트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도 이러한 십자가 신학이 가난, 폭력, 인종차별, 오염, 그리고 절망의 “악순환” 안에서 해방적인 실천을 산출해 내는 생산력이 있다고 믿는다.
십자가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는 이 변증법적 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십자가의 파라독스에 나타난다. 이 때 예수의 길도 한층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 속에 있는 자기의 동일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뒤를 따르며 그분과 자기 자신을 타자 속에서, 이질적인 것 속에서 나타내어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는 그가 근거해 있는 그분에 대하여 합당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을 계시하여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도 합당할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사귐으로써만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증거할 수 있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B. 기독론의 묵시문학적 지평과 변증법적 접근방법
몰트만에게 있어서 기독론은 여전히 신학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철저한 유일신주의”이며 신정통주의는 사도 신조의 제2계명의 유일신사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한 리차드 니버를 공박하면서 몰트만은 단호하게 “기독교 신앙은 ‘철저한 유일신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고 예수,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다. 기독교의 “경감할 수 없는 핵심”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의 진술을 제거하면 기독교의 독특성을 사라져 버린다. 뒤집어 말한다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기독교 신앙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어떤 신학자들이 부정하려고 해도 기독론은 언제나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참 하나님인가? 그는 참 인간인가?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말했는가? 그의 친구와 적들은 그를 어떻게 말했는가?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는 과연 누구였으며 인류에 대하여 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해 왔다. 그리하여 예수는 한때 인간이 갈망하는 신적인 권위와 영광의 총괄 개념이 되기도 하였고, 새로운 도덕을 가르치는 인류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고, 또한 갈릴리 선동가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상이한 관념과 예수의 상을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인간의 요구와 기대로부터 출발되어진 상이한 방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묵시문학적 지평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 중심적으로 그리스도를 전망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위로부터의 기독론)과 19세기 자유주의 십자가의 인간학적 기독론 (예수론<Jesus logie>, 또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비판했다.
우주론적 지평은 ‘위에 계신’ 절대적 하나님, 영원불변하며 고통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아래로’ 내려와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고 즉 성육신 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태를 가진 참 하나님이라고 이해되었다. 예수의 존재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의미한다면,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허무하고 죽어야 할 존재들이 불변성과 불멸성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고대 이래로 고전적 전통적 기독론의 방법이며 독일 관념론에 계승되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어떠한 길도 하나님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수하였고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그 전제를 두었다.
그러나 존재하지만 영속할 수 없는 존재자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한 존재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보증 받고자 하는 우주론적 지평에는 그 자체 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제기된다고 몰트만은 파악한다.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허무한 인간 속에 있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만일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을 같이한다면 역사의 예수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 가도 문제로 남는다. 어떻게 한계 없는 신적 본성이 동시에 하나의 실제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대답을 못한다.
르네상스, 계몽주의, 기술 문명 이후, 인간의 주요 문제는 이제 그 자신의 인간성이 되었다. 그러기에 영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여부보다 그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떤 한에서 신적인가를 묻게 되었다. 반면 초대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에 대한 사고는 성육신 안에 가능하게 된 인간의 신격화와 언제나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예수는 신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인간”으로 이해된다.
우주론적 그리스도 이해에 반하여 근대 이후, 특히 19세기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초월된 신성의 나타남이 아니라 인간의 숨어 있는 본성 내지 인간성의 나타남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였다. 사람들은 자주 역사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이해로부터 예수의 신비에 접근해 가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론의 방법은 근대 유럽의 인간학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예수는 더 이상 신학적인 배경에서 “신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사람,” “참사람,” “신적인 사랑의 기적”이라고 정의되었다. 칸트는 예수를 “선의 원리가 인격화된 관념”내지 윤리적 모범(Vorbild)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예수를 구원받은 현존의 생산적 원형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의식을 강화하였다.
몰트만은 이러한 인간학적 기독론 역시, 자체 안에 답변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 나사렛 예수가 윤리적 모범이요, 혹은 참된 인간 존재로서의 구원하는 원형이어야 하는가? 또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절대성의 요구는 어디에 존속하는가? 이 인간학적 지평은 예수의 구원자로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그를 하나의 윤리적 종교적 지도자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위에서 살펴본 두 견해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묵시문학적 지평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의 정신적 배경은 희랍철학의 우주론도 아니고 근대 철학의 인간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하는 묵시문학이다. 예수가 등장하여 활동할 즈음 유대인들은 묵시사상적인 기다림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의 주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불의한 자는 영원한 멸망에로 심판하시며, 의로운 자는 영원한 생명에로 축복하실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몰트만은 성서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인용하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는 메시야적인 질문의 지평은 구약 성경의 약속들을 통하여 열려진 역사의 미래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야적인 기다림이며 묵시문학적 지평이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희랍철학의 우주론적 배경이나 근대철학의 인간학적 배경에서가 아니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배경과 사고의 틀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몰트만은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시문학적인 지평에서 이해하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살펴 볼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비록 묵시문학적 지평 안에서 이기는 하지만 유대교적인 요한의 질문으로부터 이해되어지는 기독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기독론의 형성을 위해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전향의 타당성을 인증하기 위해 다음의 성서를 인용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중들에 대한 대답이다. 민중들에게는 예수가 엘리야, 혹은 예언자들 중의 한사람처럼 보였다. 민중들은 그들이 경험 상으로 알고 있었던 비슷한 개념들에 비추어 예수를 이해하였다. 두 번째는 제자 베드로의 답변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에게 조국을 돌려줄 메시야로 생각했다. 메시야 왕은 시온으로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율법과 정의를 가져올 것이며, 온 인류에게 자연과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파괴된 세상에 메시야 왕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고 모든 것들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몰트만은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구분을 지양하고 변증법적인 인식 과정을 제안한다. 이 변증법적 인식원리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는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하며 또한 예수를 철저히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식되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예수는 아들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인간성을 보아야 하며, 그의 인간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인식을 통하여 몰트만은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또는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사이의 긴장을 지양하고 있다.
C. 종말론적, 사회적 기독론의 주제
몰트만은 초대교회의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근대의 인간학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테마가 다 협소하다고 비판한다. 전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 안에 있는 기독론의 전역사(Vorgeschichte), 탄생과 죽음 사이의 예수의 선포와 활동, 그리고 영광 가운데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이 사라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우주의 통치자로 찬양되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고, 죽음과 함께 예수의 실존이 끝나버리게 된다.
여기서 몰트만은 종말론적 기독론을 추구한다. 그리스도는 장차 올 세계구원 즉, 모든 민족의 메시야적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고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모든 것을, 전체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온다. “종말론적”이란 말은 장차 올 세계구원, 곧 모든 민족들의 메시야적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고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오게 되는 세계구원을 가리킨다. “종말론적 역사”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 약속과 계약을 통하여 이 미래를 지향하며 이 미래의 지평 속에서 경험되고 작용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세계의 이 종말론적 역사의 기독론은 예수의 인격을 이 역사의 길과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지한다. 몰트만은 가난한 사람들의 예언자 예수의 메시야적 파송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아들 예수의 묵시사상적 수난을 다루고 그 다음에 예수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변용 시키는 부활을 다루려고 한다. 그는 특별히 우주의 화해에 관심을 기울이며, 마지막으로 심판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미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발견하며, 종말론적인 세계구원과 화해의 성취를 보고자 한다.
또한 몰트만은 사회적 기독론을 추구한다. 전통적 기독론이 하나님 아들로서의 예수의 하나님 인격을 고려하거나 사적 존재로서의 그의 역사적 인격성을 강조한 반면, 몰트만은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민중들, 여자들, 이스라엘과 함께 가졌던 그의 사귐을 관찰함으로써 예수의 사회적 인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버림받은 죄인들의 형제로서, 공동체의 머리로서, 우주의 지혜로서 죽었다. 그는 하나의 “집단인격”이요, “대표인격”이다.
III. 예수의 인격과 삶과 십자가의 죽음
이미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몰트만은 도상의 기독론, 종말론적인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기독론을 구상한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인격은 되어 감 속에 있는 인격이다. 이와 아울러, 몰트만은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의 분열을 지양하는 두 가지 지평을 말한다. 하나는 그의 종국을 그의 삶의 컨텍스트(역사적 이해의 관심)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부활신앙의 컨텍스트(종말론적 신앙의 관심)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첫째 지평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에서의 예수의 인격을 고찰하고, 둘째의 지평에서는 부활에서 본 종말론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A. 되어 감 속에 있는 메시야의 인격
기독론의 역사적 전제는 구약성서의 메시야 약속과 히브리 성서에 근거하고 있는 유대교적 희망이다. 메시아 희망은 한번도 승리자들과 지배자들의 희망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정복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희망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희망은 메시아적인 희망뿐이다. 메시아적인 인간은 인간적인 인간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 메시아 희망의 주체는 시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강림절의 빛 속에서 살고 이 세계와 함께 그의 오심을 위하여 자기를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과 행위를 통하여 그의 오심을 앞당겨 오는 것을 의미하며, 이미 메시야가 그의 날에 완성할 모든 사물의 구원을 “이미 지금” 온힘을 다하여 크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예수의 인격성은 그 자체로서 구성되어 있거나 영원 전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동적인 관계들과 상호작용 가운데에서 형성되며 그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개방된 정체성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아는 사람은 되어 감 속에 계신 그리스도,도상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론적 활동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식하며,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 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지상의 예수는 그의 메시야 되심을 계시하는 도상에 있었다. 이것을 몰트만은 예수의 “메시야 비밀”이라고 부른다. 부활한 주님은 그의 영광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 이 영광은 시작하였으나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 때에 그는 완성된 주권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 되시며 그의 “직접적인 신정”을 이룰 것이다.
지상의 그분 -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 부활하신 분 - 현존하시는 그분 - 장차 오실 그분,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의 종말론적 역사의 단계들이다. 되어 감 속에 계신 그리스도, 도상의 그리스도(christologia viae)는 있을 수 있지만 본향의 기독론(christologia patriae)은 있을 수 없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기독론을 통합시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인격, 메시야적으로 활동하는 인격,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공적 인격, 사귐의 복잡한 관계 속에 있는 인격, 삶의 역사의 되어 감(Werden) 속에 있는 인격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인다.
몰트만은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차원의 인격을 요약한다. 1)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종말론적인 인격 속에서 인지된다. 그 안에는 이스라엘의 메시야, 모든 민족들의 사람의 아들, 창조의 장차 올 지혜가 현존한다. 그는 인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 2)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신학적 인격 속에서 인지된다. 그는 자기가 아빠,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의 자녀이다. 3)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사회적 인격 안에서도 인지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제요 민중들의 동지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이며, 병든 사람들과 함께 고난 당하는 자이다.
B. 역사적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그리스도 역사는 예수 자신과 시작되지 않고 성령과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숨, 곧 영이 임할 때 예수는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등장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선포하고, 새 창조의 표징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나타낸다. 성령의 창조적 힘을 통하여 그는 이 병든 세계 속에 건강을, 노예화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온다. 성령의 현존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에게 자기를 “아빠”라는 이름과 함께 계시하며, 예수는 자기를 이 아버지의 “아들”로 드러내며,이 내적인 관계를 아버지와 자기의 기도의 관계로 현실화시킨다. 예수의 신학적 역사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을 고려할 때, 예수에게서 일어난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또한 예수가 “아빠” 곧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에 관한 그의 관계를 부르지 않고는 예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가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면 그는 분노하는 세계 심판자의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곧 아버지의 내적인 친근함을 선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협박과 금욕을 통하여 나타내지 않고 파괴되어진 인간에 대한 은혜의 표식들과 병든 삶에 대한 건강의 기적들을 통하여 나타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선포하고 활동하는 시간은 심판 이전의 위협하는 “마지막 시간”이 아니라 메시아의 해방하는 “시간의 완성(갈 4:4)”이다.
몰트만은 예수를 십자가에로 이끌었던 그의 삶과 활동의 빛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수의 죽음의 첫째 이유는 종교적 이유로서 예수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율법 이해 사이에 일어난 신학적 충돌 때문이다. 이 신학적 충돌은 다음 두 가지 관련 속에서 생겨났다.
첫째, 율법과의 관련하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을 향하여 종말론적으로 오셔서 율법의 명령에 대해 자유케 하며, 율법에 선행하는 사랑으로 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분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활동에 있어서 주권적으로 그 당시 율법 이해의 한계를 무시하였으며, 죄를 용서하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종말론적 권위를 역력히 보여주었다. 율법으로부터의 그의 자유는 바로 죄를 용서하여 주는 행위들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둘째,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이 지닌 희망의 양상들과의 관련 속에서도 예수의 출현과 행동을 하나의 새로움이었으며, 이 새로움은 반대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기대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단지 죄인의 심판자요 의로운 자의 구원자로 출현하는데 반하여, 예수의 구원은 바로 죄인들과 타락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처형은 율법과의 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없는 자들로 간주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율법과 신앙의 수호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모독자”로써 심판을 받았다.
또한 몰트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동자”로 인식하며 예수의 역사의 두 번째 신학적 차원을 한 종교적-정치적 세계 내에 있는 예수의 복음의 정치적 차원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몰트만의 “선동자”로서의 예수의 이해는 정치적 혁명가 이상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단지 예루살렘 내의 평안과 질서라고 하는 전략적 이유에서 로마인에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로마의 평화를 보장하여 주는 국가 신들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세계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종교적-정치적 질서를 의미하였다. 예수는 빌라도에 의하여 정치적 모방자요 열광자로 심판 받았다.
세 번째 차원으로 몰트만은 예수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로서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세번째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본래적이고 내적인 고통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 그가 당한 고통 중의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다.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미 예수의 삶의 컨텍스트 속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 사이에 또한 반대로 그의 아버지와 예수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C. 십자가의 변증법과 묵시 사상적 고난
몰트만에 따르면 예수의 정체성은 초대교회 이래로 그에게 적용되어진 많은 기독론적 명칭들 때문에 은폐되거나, 혼란되어 왔다. 우리는 예수의 개별적 인격성과 구체적인 역사를 상실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역사적 예수와 그의 십자가가 단지 우리가 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것들은 예수 자신과 그의 십자가에로의 길에 대하여 우리에게 별로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자신과 그의 유일한 인격과 역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고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몰트만은 마틴 켈러가 십자가의 중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한 것을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없으면 기독론도 없으며 기독론을 십자가에 의해 정당화시키는 것을 회피할 수 있는 아무것도 그 자체에는 없다.” 이러한 진술은 예수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흡수시키려는 경향과 십자가로부터 너무 신속하게 부활로 옮겨가는 경향을 차단한다. 케제만(Käsemann)의 조언을 따라서 몰트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로서 인식되어져야 하며, 우리는 사변적인 영광의 신학 즉, 십자가의 사실이 아무런 영속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영적주의 기독론의 구름 속으로 급상승해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복음의 스캔달은 위대한 설교가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복음의 거리낌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있다면 그러한 기적을 믿는 것이 스캔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캔달은 저주 받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분의 인격적 특성(character)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위한 진정한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님은 없다. 종교 현상학과 종교 역사학이 대학 신학부의 중요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그리고 조직신학이 처음으로 세계 종교들에 관한 새로운 신학(종교 신학)을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는 이때에, 그리고 교회가 다른 민족들의 “살아있는 신앙”과의 대화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때에, 몰트만은 바르트의 가혹한 심판을 새로이 한다. ‘옳으냐’, ‘그르냐’ 이것이 좋은 것이다. 왜 좋으냐 하면 대화를 추구하는 것들은 통상 십자가의 가혹하고 비참한 현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나약하고 낭만적인 개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 안에서 또한 세속적인 구원 체계와 폭넓은 세계 종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미신을 대향하는 제동장치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신에 대하여 무신론주의자이다. 국가 또는 시민종교의 신들, 신화의 신들, 형이상학의 신들(gods)등 - 이것들은 하나님(God)이 아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무신론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은 없으며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도 없고, 이 계시 외에 다른 계시도 없다. 이러한 몰트만의 입장은 결국 그가 충실한 바르트주의자로서 기록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몰트만은 십자가의 제의나 십자가의 신비를 비판한다. 십자가의 제의는 예수의 십자가를 교회의 제단에서 피흘리지 않고 반복하는 일을 통하여 종교적이고 비역사적으로 만들어, 결국 십자가의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탈색해 버린다. 십자가의 신비는 청빈과 금욕 그리고 순결한 생활을 통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가난하고 억눌린 평민들을 중심으로 카톨릭 교회의 승리자 예수보다는 무력한 예수, 불안한 예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예수를 강조하면서 그 예수와 신비적 합일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경건주의이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비판한 것처럼 ‘민중의 아편’이 아닐까? 이는 현재 당하는 역사속에서 고난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킴으로써 신앙을 너무 내면화하고 역사의 변혁력을 상실하게 한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에 있어서 십자가 신학은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을 가려내는 근본적인 시금석이다. 그러나 그는 농민전쟁 때 취한 그의 자세가 보여주듯이 십자가 신학을 종교 비판에만 국한시키고 사회 비판적 차원에까지 끌고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과제는 십자가의 신학을 세계 이해와 역사 이해에 까지 확장시키며 그 가운데 참으로 억눌리는 자와 억누르는 자를 함께 해방시키는 데 있다 하겠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린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파악한다는 것은 “하나님 개념에 있어서 혁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넘어서는 신론을 구축해야 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개념을 세상으로부터 위로 향하여 세웠으며, 후자는 세상으로 하여금 혼자 서게 하였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유신론의 신은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저 우주 위의 독재자, 도덕적 에너지의 인격화, 궁극적인 철학적 원리로 묘사된다. 이는 저 하늘 위의, 저 밖의 세계에 대하여 있는 불사/불멸/부동/무감동/전능의 한 초월적 인격을 의미한다. 유신론의 신은 고난당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그는 감정이 없는 신이다. 이런 하나님 이해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된다면 그 때의 신은 예수의 고난에 무감동하고 그저 쳐다보고 있는 신, 고통과는 아무 관계없는 신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이 예수로부터 시작된다면 유일신의 신은 버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은 신이해를 통해 표현되는 현상 유지의 이데올로기 역시 함께 버려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페터슨(E. Peterson)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천상 위의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 유일신론은 군주제 내지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유신론은 경험될 수 있는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볼 때 선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결론 짓지만 무신론은 똑같이 이 세상에서의 악과 고통을 볼 때 그같은 신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전쟁의 지옥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베트남, 살 희망을 끊어버리는 수시로 일어나는 일상의 경험들 - 이 모든 것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있다면 오히려 그는 악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호크하이머) 아니,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차라리 그를 없애버려야 하지 않을까?(까뮈-저항적 무신론)-라고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무신론도 유신론과 같이 이 세계에서 신성으로 가는 역추론의 논리를 이용한다. 그리고 유신론의 경우와 같이 신을 저 하늘 위의 무감동하고 고통당할 수 없는 독재자로 파악한다. 따라서 유신론이 십자가의 신학과 공존할 수 없다면 무신론이 제기하는 문제들 역시 십자가의 신학에 해당하지 않는다. 십자가 신학이 파악하는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 - 그의 피조물의 아픔에 한없는 연민으로 참여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 앞에서 무신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무신론은 십자가의 신학에 의해 비로소 극복될 수있다. 몰트만은 우리가 신론을 “예수의 죽음의 절규 소리가 미치는 거리 안에서” 전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양성론을 비판한다. 이 양성론은 영원한 신성(Logos)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였다 하여 예수 안에서 구원자 하나님과 구원받을 자 인간을 같이 보았고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성은 죽을 수 없고 고통받을 수 없으며 무감동한 저 하늘 위의 신성이다. 십자가에서 죽어간 것은 인간 예수였고 신성은 고난과 무관하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고난과는 전혀 무관하게 된다. 이는 예수 안의 인격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신 이해와 구원 이해를 결정적으로 놓치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고난 당할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함께 당했다. 고난 당할 수없는 신은 무능한 신이다. 고난 당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이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양성론적인 신적인 사건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는 예수가 아빠 곧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과 예수의 특별한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신적 아버지에 대한 메시야적 아이의 이 상호관계로부터 무엇이 참으로 신적이며 무엇이 참으로 인간적인가를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자녀관계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 관계를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 때문에 그의 관계 속에 있는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고, 예수를 하나님 때문에 아버지의 자녀와 아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교회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유일신론처럼 될 수 밖에 없었는가? 몰트만에 따르면 이는 교회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다분히 상식적이고 철학적인 사고 방식에서 출발하여 이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성을 말한 다음에 세가지 인격이나 실체를 구분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 삼위성은 일체성에 흡수되어 일체성이 드러나는 세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출발 장소는 예수의 십자가여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삼위일체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 이다”라고 하였다.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것은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어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어보내어 거기에서 죽음을 고통당하게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줌을 통해 사실상 자기 자신도 “내어주고” 아들의 죽음을 고통 당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연결하면서 함께 고통 당하신다.
그럼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은 오늘날 “고난 당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물” 속에 함께 고통당하면서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저 하늘 위의 신성은 아니다. 그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의 세계로 내려오신다. 그는 그의 피조 세계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과 고난의 나그네길, 유랑의 길을 같이 떠나신다. 인간성이 억압되고 거짓이 진리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곳에서 그는 그의 사랑의 이름으로 저항하신다. 마침내 그의 종말적론인 구원의 힘으로 그는 이 세상을 ‘더이상 눈물도 슬픔도 없는 나라’로 만드신다.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십자가의 신학은 종말론의 빛 안에서 새롭게 이해된다.
만일 십자가가 기독론의 핵심이라면 삼위일체가 ‘신’(神)학의 기본적 구조를 제공한다. 참된 기독교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두 특징적 모습인 십자가의 예수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다른 신학자들에서는 단지 주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몰트만은 더욱 엄격하게 일관성 있는 방향을 가지고, 바르트의 삼위일체적인 신학 접근까지도 갱신하고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목할만하게도 나는 바르트가 실제로 여전히 너무 ‘신'학적(Theo-logically)으로 사고하여 그의 접근은 충분히 삼위일체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안에 있는 비판적인 한계를 본다.”
만일에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구별(아버지,아들,성령)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단순히 단일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러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언어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적 분화(分化)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한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죽는 이는 아들 나사렛 예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와 함께 고통당하신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발전시켰던 이와 같은 십자가의 신학을 전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묵시사상적 고난의 신학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수에게 제한되지 않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리행위 가운데서 이 시대의 묵시사상적 고난을 당한다. 묵시사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마지막을 가져오는 동시에 새 창조의 시작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의 고난은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당하는 묵시사상적 고난이다. 예수의 고난은 갈릴리 출신의 한 사적인 사람, 이스라엘의 메시야, 모든 백성들의 사람의 아들로서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머리와 지혜로서 종말론적 고난을 경험하였고 모든 사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온 세계의 종말론적 고난이 선취되며 대리하여 경험된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고난 이해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을 위한 전이해가 된다.
D. 해방의 차원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과 해방의 차원들을 심리적인 차원과 정치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그는 실존적 역사적 인간 해방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적인 차원의 구원과 화해를 전망하고 있다. 여기서는 해방의 심리적, 정치적인 차원만을 살펴보고, 자연적, 우주적인 차원의 해방은 다음 장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인간학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의 결과를 고찰할 때, 신학적 인간학의 독백 가운데서가 아니라 다른 인간상들과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인간 해방의 발자국을 찾고 그 자국을 증빙할 때 스스로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인간학적인 학문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특히 프로이드의 심리 분석이 중요하다.
심리요법과 신학 사이의 대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은 프로이드가 “종교의 풍자화”라고 비판했던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종교를 노이로제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이로제 가운데서 종교의 “이지러진 상”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미신 가운데 있는 병리학적 이중 과정의 파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프로이드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자신의 긍정적인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프로이드의 종교비판을 부정적인 것의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다. 프로이드의 종교 비판은 단지 더 나은 비판적인 자기이해를 돕는 보조 학문으로서만 기독교 신앙을 도와서는 안되고 그의 정신분석은 또한 해방케 하는 힘을 전개할 수 있는 심리학적인 가능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열정과 십자가에 달리신 자와의 형제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실제로 구체적인 권위와 속죄의 종교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데, 프로이드는 이 종교들의 외디푸스적인 구조를 적절히 분석하였다. 프로이드의 꿈의 동기는 소원에 있다고 하고, 억압된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성희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그 신화와 이상향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강하며 가장 긴급한 인류의 소원을 간수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정열 안에 있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기독교의 상징적 표현은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상징학은 종교 비판적인 우상파괴와 악순환으로부터 정신 치료적인 인간해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며 이와 동시에 우상 숭배에 대한 그자신의 예언자적 심판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 심리학적 해방의 부분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다. 몰트만에게 심리학은 프로이드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과 심리학의 비판적 대화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훨씬 넘어섰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상황 속에 있는 삶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학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해석학으로 보충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하다. 정치적 해석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뒤따름에 있어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십자가 신학의 길은 부적절한 기독교 정체성과 기독교 정체성 없는 사회적 관련성 사이를 간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그 정치적 차원을 숙고해 보면 이 영역은 언제나 이미 정치적 종교와 정치적 신학에 의해 항상 점령되어 있으며, 이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는 정치적 관심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한 편으로는 기독교 신학이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의 욕구와 요구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해방의 신학도 성립할 수 없다. 다른 한 편, 기독교적인 종교비판 없이는 사회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없다. 현실적 의미가 없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기독교적 정체성 없는 사회적 의미를 사회 비판적인 십자가 신학은 비판한다.
가난의 악순환에 있어서 해방은 사회 정의를 의미하고, 권력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적 인권을 의미하고, 소외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인정가운데서의 동일성 의미하며, 생태학적 악순환에 있어서는 자연과의 평화를 의미하고, 무의미의 악순환에 있어서는 존재에의 용기와 신앙을 의미한다. 해방의 역사는 정지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진행 중에 있으며, 오직 참여적이며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형제 관계는 이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에 고통당하면서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 표준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그 능력은 탄식하며 자유케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완성은 모든 것을 자유케 하며 의미를 완성시키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IV.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
A. 역사와 그리스도의 부활
몰트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폭력과 죄로 얽힌 이 세계의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 부활하신 그분은 의 속에 있는 새 창조의 장차 올 세계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부활이 죽은 자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며 죽음의 폐기를 뜻하는 한, 부활은 죽음이라고 하는 역사의 힘을 파괴하며 그 자체 역사의 종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의 새 창조를 시작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선취로서의 종말론적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을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의 미리 나타남으로 파악할 때, 그의 나타남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를 의미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죽은 자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폭력과 죽음의 이 세계 한가운데에 시작하고 있다. 부활은 재활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은 죽음을 더이상 알지 못하며 언젠가는 죽을 이 삶의 연장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말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사멸하며 지나가 버리는 모든 존재들의 새 창조가 그것과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동을 나타낸다. 종말론적 상징의 틀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을 대리하여 세계 심판을 미리 앞당겨 왔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가 나타난다.
바르트는 부활을 모든 인간적 현실에 대칭하여 서 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종적인 범주 안에서 이해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판단이요 새로운 행위로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결단의 집행이며 선포로서 설명한다. 여기서는 신학적인 “일요일의 인과율”과 “평일의 인과율”이 공존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바르트의 사고가 탈역사적이며, 또한 그에게 있어서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화해를 초월적으로 확인시켜줄 뿐 아무런 새로운 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여기서는 재림과 새 창조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길이 무의미하다.
불트만은 바르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범주에서 보지 않고 신앙의 경험을 뜻하는 실존의 역사의 범주에서 본다. “부활”은 세계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닌 구원의 의미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생성을 나타내는 신화적 표현이다. 즉, 불트만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죽은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서 일어난 실존적 사건, 곧 그들의 신앙이 거기서 생성한 실존적인 역사적(geschichtliche) 사건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불트만의 견해가 부활신앙을 탈실사화(Enthistorisierung), 탈종말론화(Enteschatologisierung)한다고 비판한다.
판넨버그는 보편사 신학의 틀 안에서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나라의 선취의 종말론적 증명으로 본다. 예수의 부활 속에는 “역사의 종말”이 역사 한가운데 현존하고 있다. 예수의 나타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판단은 그들의 신앙의 반성적 판단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에 대한 실재적 판단이다. 그는 실제로 부활하였다. 몰트만은 이러한 판넨버그의 생각에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부활신앙을 실사적(historisch) 이성의 도움으로 역사파악의 장으로 옮기려 하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그리스도의 부활은 존재의 선취적 구조들의 실사적이며 상징적인 증명이 될 수 있고 아무런 새로운 것도 더이상 제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는 인간과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파괴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해방의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미래를 개방하며 역사를 열어주는 사건을 뜻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역사 한 가운데 있는 삶의 근거와 약속이다. 역사를 부활의 전망 속에서 본다는 것은 영 가운데에서 부활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현재적 능력들 속에서 인식된다. 부활은 역사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를, 성령 안에 그 역동성을, 모든 사물들의 생동적 새 창조 안에 그 미래를 가지고 있다. “부활”은 한 “사실”을 뜻하지 않고 “되어 감”, 곧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넘어감”을 뜻한다.
부활의 희망은 다른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을 삶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이다. 부활의 희망은 어떤 다른 세계를 지향하지 않고 이 세계의 구원을 지향한다. 몰트만은 바르트와 불트만과 판넨버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그들의 일면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바르트와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실”이며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전혀 다른 자”로서의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이다. (불트만과 함께) 부활신앙 자체는 삶의 힘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부활이다. 죄와 권력과 소유의 세계 속으로 실존이 타락한 것에 대한 “해방하는 심판”은 참된 삶을 위한 봉기의 시작이다. (판넨버그와 함께)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소급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부활은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삶의 선취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사를 종말의 역사로 규정하며 역사의 경험의 영역들을 새 창조의 기다림의 지평 속에 세운다.
몰트만은 트뢸치의 세 가지 역사적 공식들에 반대한다. 부활신앙은 역사적 개연성의 판단에 근거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덤으로부터 예수의 부활의 과정은 실사적으로 확정될 수 없고 오직 현재적인 “영의 힘과 증명”에 근거한다고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은 역사적 삶의 현상들 사이의 인과적인 상호작용의 한 과정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의 상호작용의 단절인 죽음이 새 창조의 영원한 삶으로 지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모든 역사적인 삶의 사멸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의 불멸하는 상호작용 속으로 지양되는 과정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historisch) 이해는 유비를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한 생동성 가운데에서 인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인식하는 가장 근원적인 인식의 형식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린 그분 안에서 인지하는 자는 세례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죽으며, 부활의 영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때에야 하나님과의 치유하는 유비들이 살리는 영 가운데에서 인지된다.
B. 자연과 그리스도의 부활
몰트만은 “역사”라는 파라다임이 현실 전체를 인식하기 위한 포괄적인 모델이 아니라고 본다. 역사와 자연, 정신과 육체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 인간의 정신이 그의 신체 속에 들어 있고 신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땅의 자연의 기본적인 조건들 속에 있고 이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부활신앙을 역사와 역사과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자연 속에 있는 역사의 생태학적 조건들을 통찰하려고 한다. 즉 역사적 기독론은 생태학적 기독론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그가 추구하는 우주적 기독론은 이런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제 몰트만은 “역사”라고 하는 파라다임 속에서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를, “자연”이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이며 생태학적 파라다임 속에서 살리는 신적 영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해한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대하여 역사적 은유들이 사용되지 않고 자연적 은유들이 사용된다. 여기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체성(Leiblichkeit)이 중요시된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이 변형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될 것을 바라본다.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우리는 “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롬 8:23).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럽게 된 몸의 원형이다. 신체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는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을 생명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 신체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는 그의 신체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이끌어 들인다. 자연적인 “육의 부활”이 없다면, 인격적인 “죽은 자들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변형의 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단절과 새로운 시작으로 보지 않고 “변화”, “변형”, “변용”, “넘어감”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창조의 종말론적 새 창조는 지금의 이 모든 창조를 전제한다. 마지막에 옛 것 대신에 새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옛것이 새롭게 창조된다(고전 15:39-42). 이러한 개념의 유비는 자연의 재생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새 창조는 피조물들의 죽음을 우주적으로 폐기함으로써 철저히 새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시작인 동시에 새롭고 영원한 창조 안에서 첫 창조의 사멸할 생명들이 변용 되는 일의 시작이다. 자연은 인간의 역사를 그 목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부활”에서 완성될 것이다. 골로새서에는 이러한 우주적 기독론의 비전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화해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평화의 길을 열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그를 통해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1:20). 그리스도는 인간의 화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들의 화해를 위해 죽었다. 우주적 기독론은 실존적 기독론과 역사적 기독론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자연이 인간의 평화의 역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치유될 수 있는 만유의 화해에 대한 기다림의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인간이 기다리는 “육의 부활”은 “부활의 영” 안에 현존하며 지금 이미 작용하고 있다. 부활의 영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자는 이 “악한 세계”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창조의 해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으며 이 창조를 위하여 생동하게 된다. “육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의 깊은 차안성”을 근거시키며 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 개인과 집단과 우주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땅에 계속 충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죽음이 분리와 고립의 세력으로서 이 삶 속에 작용하듯이 부활도 희망의 힘으로 이 삶 속에서 죽음의 세력들을 폐기한다. 그것은 신체와 영혼의 인격적 통일성을 위하여, 시간의 형태들 속에 있는 인격의 통일성을 위하여, 사귐 속에 있는 인격들의 통일성을 위하여, 연속되는 인간의 세대들의 통일성을 위하여, 그리고 땅의 자연과 인간 문화의 통일성을 위하여 작용한다.
V. 우주적 그리스도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기독론에서는 “역사적 사고”가 “형이상학적 사고”를 배제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은 역사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의 역사를 생태학적으로 자연의 틀 안에서 보는 새로운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받아 들이고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우주적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체성과 땅의 자연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우주적 기독론의 대두는 자연세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재난을 차츰 의식하면서 “역사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주적 기독론은 고대에서는 ‘세력들과 영들과 신들의 세계와의 관련에서 이해’되었지만, 오늘날은 인간에 의해 카오스로 돌변하였고, 오염되고 저주받은 ‘자연과의 관련에서 이해’된다.
이제 더이상 기독교는 인간 중심적, 또는 역사 중심적 종교가 아니라, 온 우주를 포괄하는 그리스도 중심성(Christozentrick)과 하나님 중심성(Theozentrick)의 종교이다. 성서적 기독교는 언제나 더 크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한 길이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장자다 -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장자다 -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의 장자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이다 - 예수는 백성들의 사람의 아들이다 - 예수는 화해된 우주의 머리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존 - 공동체로서 실존 - 우주로서의 실존.
기독론은 우주적 기독론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온 창조 안에 있는 적대관계를 극복하였고 창조의 모든 영역 안에 화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숨어 계신 방법으로 이미 지금 만유의 통치자이다. 영광 속에서 일어날 그의 재림은 역사적으로 이 세계시대의 종말로 표상되고 기다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 숨어 있는 만유의 통치자의 궁극적 나타남으로, 또 화해되었고 구원받았으며 새롭게 창조된 우주 안에서 숨어있는 자연주체(Natursubjekt)의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나타남으로 표상되고 기다려진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근거는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부활절 경험에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한 창조의 영화는 창조의 완성이요, 창조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주적 기독론을 위한 존재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며, 그의 부활이 지닌 우주적 차원들의 빛 속에서 그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적 의미를 가진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화해 뿐아니라, 세계의 화해를 인지하게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골1:20).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의 회복은 육의 부활이며,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과 같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칭호들은 로고스, 지혜, 세계의 생명이라는 우주적 기독론의 칭호로 보완되어야 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지닌 창조의 중재자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모든 것의 창조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2. 창조의 진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그리스도, 3. 창조의 모든 과정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먼저, 그리스도는 세가지 점에서 신적이며, 창조의 근거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그를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① 영과 말씀을 통한 창조: 모든 것이 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다양성과 역사성에는 하나의 초월적인 통일성이 선행되는 데, 이 통일성이 “지혜”, “영”,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운다. 창조자는 그의 창조적 말씀을 통하여 그의 피조물들을 구분하고 그의 모든 말들을 이끄는 그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결합시킨다. 즉 피조물의 통일성에 관하여 영과 말씀은 서로 보충하는데, 말씀은 그의 활동을 통하여 구분하고 정의하는 반면, 영은 그의 현존을 통하여 결합시키고 일치와 조화와 사귐을 창조한다.
② 창조의 확립: 창조의 중재자직이 지닌 둘째 관점은 창조의 확립과 보존이다. 우주의 보존은 계속적 창조로 파악될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대하여 인내하시고, 관용하심으로 피조물들이 그의 영광의 나라로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③ 창조의 쇄신: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를 지킴으로써 일어나는 창조의 확립일 뿐아니라 동시에 모든 것의 새 창조의 선취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의 보존과 발전 속에서 이미 창조의 완성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계속과 완성을 진화론의 표상을 가지고 해석한 이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진화의 그리스도”이다. 떼이야르는 “성육신”을 유일회적이고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으로 끝나지 않고, 온 우주의 신격화를 위한 출발로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간화의 과정 또한 인간발생의 정점에서 의식의 마지막 목적지와 중심점 곧 “우리가 예배하는 그리스도가 빛날 수 있는 이상적 장소” 오메가 포인트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진화론적 그리스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세계화되고 세계가 신격화되는 우주적 성찬식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떼이야르가 구원의 문제를 창조적인 면을 발견하기는 하였으나 진화의 이중적 측면 즉 도태, 희생을 간과함으로 구원과 통일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진화는 약자와 병든 자와 무능한 자에 대한 일종의 세계 심판의 생물학적 집행이다. 그러므로 떼이야르는 “만유의 화해”를 말할 수 없었다. 구원자 그리스도 없는 진화자 그리스도는 잔인하고 감정 없는 도태자 그리스도가 아닌가? 자연과 인류의 진화의 여러 가지 과정들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 가운데에 희생물로서 인식될 때에만 창조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라너는 자기초월로 인한 “참 인간”과 그의 자기전달로 인한 “참 하나님”을 하나님-인간에서 보며, 그 비밀을 성육신의 개념에서 발견한다. 몰트만은 샤르뎅과 마찬가지로 라너도 그리스도를 진화의 정점으로 보지만 양면성(완성과 희생)을 가진 이 발전의 구원자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라너에게는 그리스도의 성취된 인간존재가 그 중심에 서 있고 그의 파괴되어 버린 인간존재는 중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진화의 구원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서로 역행하는 두가지 일을 행하시는 분인데, 하나는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오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이다. 전자는 진화의 발전적 나아감이요, 후자는 진화에 역행하여 일어나는 구원활동으로서 진화에 의해 희생된 모든 것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전자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요, 후자는 미래에서 부터 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기독론은 “땅과 하늘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해되며 시간이 허무성의 매임에서 구원받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메시야 안에 모이게 되고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론은 창조의 종말론이 아니다.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으며 미래에 있을 모든 것의 새 창조가 종말론적인 것이다. 육과 모든 자연의 부활이 종말론적이다. 시간의 마지막에 모든 시간적 사물들에게 동시적으로 일어날 새 창조의 영원이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그 무엇도 잊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회복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온 우주의 화해는(골1:20) 권리를 상실하였고 상처받은 모든 피조물들의 칭의와, 오직 그것만이 생명과 창조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의 관철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인간 상호간의 화해, 인간 자신과의 화해는 자연과의 화해를 직접적으로 포괄할 수 밖에 없으며 이리하여 자연과의 정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VI.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항목으로 종말론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기독론의 결론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구성하고 있다. 파루시아는 예수의 길의 완성이다. 파루시아는 “도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노정이 목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즉 그분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종말론적 인격 속에서 완성되고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우주적으로 계시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파루시아로 완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속에 세상의 완전한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지 않은가? 그러나 몰트만은 (바르트처럼)구원을 십자가 사건에 국한시키는 것과 반대한다. 왜냐하면 부활과 종말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에만 관련을 맺게 되면 구원이 일면적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 역시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이 사건들을 통해 병들어 죽게 된 세계의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우주적 현현이며, 그의 부활의 우주적인 성취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죽음속에 있던 구원의 의미가 알려지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속으로 가득찬 그리스도 역사의 완성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때 비로소 “끝없는 왕국”이 시작되고 이 때에 “모든 눈물이 씻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될 것이고 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던 세계가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 미래는 세계 역사를 또 한번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마지막으로 한번 전환시킨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은 영광 가운데 오실 그분의 파루시아의 예기이다. 그리고 그의 파루시아는 그의 부활의 성취이다. 세상을 화해한 것은 모든 것의 새 창조를 위한 약속이고 새 창조는 세상의 화해의 성취이다.
몰트만이 기독교 종말론을 기독론으로 전향시켜서 파루시아를 그리스도의 역사의 완성으로 나타내 보인 것은 의미가 크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희망의 차원이 회복되며 기독교 종말론은 하나님의 영광의 종말론으로 바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종말론이 메시야 예수의 역사의 완성으로 인식되지 않고, 기독론에서 유리되어 버릴 때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을 통해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신적인 자비의 의를, 불의한 자들에게 신적인 용서의 법을 선포했던 예수,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조건 없는 원수사랑으로 원수관계를 극복함으로써 우주적 화해를 일으키고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예수가 최후의 심판 때는 보복 형벌적인 법을 따라 심판하는 두려운 세계 심판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에 따라 심판하시며 또한 그 의를 모든 이에게 부여하기 위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정의를 창조하는 의이다. 그분은 세우고 바로잡기 위해 심판하신다. 여기에서는 원수사랑을 통하여 악마저 선으로 바꾸어 놓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이요, 불의한 자들은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의롭게 하고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은 참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적 보복형벌의 최후심판적 종말론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목베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두려움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예측할 수 없고 거리끼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불붙는 희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기를 열망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면 몰트만은 새 창조의 종말론적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Zimzum)에 대한 유대교의 카발라적 도움을 받아 종말론적 새 창조를 설명하려 한다. Issak Lucia는 Zimzum이라는 표상을 발전시켰는데 이 표상의 의미는 창조에 앞서는 하나님의 자기제한(Selbstbeschrankung Gottes)이다. 전능하고 어디서나 현존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무소부재하심(Allgegenwart)을 거두어들임으로 그의 창조물에게 공간(platz)을 부여하시고, 그의 영원을 제한시킴으로 그의 창조물에게 시간(Zeit)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순간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제한을 폐기하는 순간이다. 하나님은 자기 제한을 폐기하고 영광스럽게 변화한 창조세계 속에서 모든 것 가운데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신다.
새 창조의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영원성을 몰트만은 고대 교회의 에온(Aon) 개념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설명하려고 한다. “에온”은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absolute Ewigkeit Gottes)이 아니고, 그의 영원한 존재에 연계되어 있는 피조물의 상대적 영원성(relative Ewigkeit)이다. 그 대표적 예로 하늘에 있는 천사를 들 수 있다. 천사는 유한한 피조물이지만 망아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하게 되고, 바로 이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존재이다. 그런데 시간과 에온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운동에 있다. 피조된 시간은 장차 새 창조의 에온적 시간의 원형운동으로 변화될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적 영원성의 현존속에서 피조된 시간은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새로운 창조의 상대적 영원성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신적인 삶의 원천에 끊임없이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게 된 피조적 생명, 즉 분여 받는 영원성(mitgeteilte Ewigkeit)이다.
몰트만은 그의 『희망의 신학』에서 미래와 희망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문제로 두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역사를 한번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마지막으로 한 번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하나님을 통한 모든 것의 새로움, 궁극적인 새로움(novum ultimum)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희망이 영광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로 전향될 때에 비로소 교회 공동체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마라나타”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고전 16:22; 계 22:20) 파루시아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실 것이다(빌 3:20-21).
그리고 파루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땅에 충실하게 만드는 소망이 된다. 그것은 비록 지금의 세계가 구원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지만 장차 이 세계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통하여 영광의 나라로 변용될 세계이기 때문이다. 파루시아 소망 속에서의 삶은 단순한 기다림이나 자기 보존 내지는 신앙을 지키는 차원에 머물 수 없다.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삶은 오시는 이를 “선취함”속에 있는 삶이고 “창조적인 기다림”속에 있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현재를 오시는 이의 빛속에 두게 하고 육체적인 삶을 부활의 능력 속에서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해서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참여해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동역하는 삶에 헌신”하게 된다.
VII. 결 론
지금까지 몰트만의 저서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중심으로 그의 기독론의 주요내용과 특징을 알아보았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였는데,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신론에 있어서 고대의 형이상학적 무감정의 공리(Apathieaxom)를 극복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추상적 유신론과 추상적 무신론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더이상 본질적 “하나님의 고난”에 대하여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고 직접 말할 수 있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은유 속에 실제적인 실체를 부여하려고 했지만, 결국 몰트만은 성부 수난설은 떨쳐 버린다. 그러나 몰트만은 자신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구절에 실제적인 의미를 주면서 - 말하자면 이 표현은 유일신론적인 표현방식이다.-동시에 이러한 그의 입장이 성부수난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는가? 그가 아들의 죽음 속에서의 “아버지의 무한한 슬픔”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부 수난설이 아닌가? 전통적인 정통주의 유신론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고통당할수 없다. 왜냐하면 헬라주의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신적인 궁극자는 불변하며 따라서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보다 더욱 격심할 수 있는 슬픔의 고통으로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성부 수난설적인 이단에 대한 고대 교회의 편견에 퍽이나 집착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강변하기보다는 좀더 분명히 이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다. 분명히 그의 삼위일체론적인 관계 속에서의 아들의 죽음과 성부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입장은 성부 수난설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제적인 고통이다. 왜 성부 수난설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왜 그가 성서 안에 나타난 더욱 결정적인 하나님에 관한 언어에 제한을 가하는 헬라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에 진지하게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왜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적인 십자가 신학을 주장한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서술되어지는 반면, 성령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이 아닌가?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안에 성령이 포함되어야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없다. 몰트만은 주장한다. “십자가에 대한 지식의 질료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적이다.” 십자가 사건은 성부와 성자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성령은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즉 신앙과 자유, 희망과 사랑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후에 창조론, 기독론, 교회론을 전개할 때 성령론을 보다 충분히 발전시키려고 하고 있다. 처음에 몰트만은 그의 신학을 약속의 역사와 종말론적인 미래로 부터 이끌고 왔으며(희망의 신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의 사회 정치적 관련성으로부터 전개하고 있으며(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나아가서 역사와 창조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신론이나, 철학사, 문화사, 종교사, 그리고 일반적인 삶과 교회적인 특수한 삶과의 관계 속에서의 성령론 교리를 다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적인 의미를 속죄론의 제목아래서 다루었다. 몰트만은 이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기독교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 안에서 십자가가 말하여지는 방식을 단순히 습관화시키는 전통적인 구원교리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고 말한다.따라서 그는 속죄교리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고전적 신학자들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적인 분석도 하지 않는다.
한 신학자가 예수의 고통과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제한 할 때에, 우리는 그가 어떤 방법론적인 원리에 의해서 교회전통의 주된 흐름과의 비판적인 토의를 거쳐서 자신의 방식의 교회를 위한 정당성을 입증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의 이론을 신학의 역사안에 밀어 넣을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몰트만의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신약성서의 기독교의 정체성의 극과 현대에 있어서의 신학적 관계성의 극사이를 왕복한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이라고 하는 제 3의 대화의 파트너는 상대하지 않고 있다. 몰트만은 주석적, 조직신학적 차원에서 현대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수행한다. 그러나 속죄론에 관한 이레네우스,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안셀름, 아벨라르드 그리고 그 외의 신학자들과의 통시적인(通時的)대화는 부재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텍스트를 향하여 제기하는 질문을 형성하는 해석의 지평이 너무 협소해지며 우리 자신의 문화적 상황의 지평을 넓혀주는 전통의 힘이 폐기되어진다. 예를 들면 교의학적 전통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맹점 때문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어떤 질문들을 신약성서를 행하여 제기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의 대속적(vicarious) 의미와 같은 전통적인 속죄 교리에 있어서 중심적인 질문을 자신의 관심사를 삼지 않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대속적(代贖的, substitutionary)인 의미를 갖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는가? 대속적 개념은 낡아 빠진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이 개념은 신약성서 안에 있고 스탠달과 어리석음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에 대한 오늘날의 이론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전통과의 대화는 적어도 우리를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도록 몰고 갈 것이다. 전통에 있어서 중심적인 어떤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 눈의 비늘을 벗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만일에 아들(Son)의 고통과 죽음 안에의 아버지(Father)의 참여가 오늘날에 홀로 고통 당하여 잊혀진 채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궁극적인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면 근본적으로 대속 개념을 취급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어떤 이론이 옛날 그곳에서의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오늘 이곳에 어떤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어떻게 그의 죽음의 혜택이 모든 인간들에게 전달되어 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과 이해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통적 구원 교리들이 오늘날 우리들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의 몰트만의 가장 대담한 시도는 악의 문제 즉 신정론과 삼위일체의 관계를 다룸에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몰트만은 성서나 신학의 역사에 근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몰트만은 악을 하나님 자신이 걺어 지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악의 잠재성만 모든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의 현실성도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졌다.
오직 모든 재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절대적인 죽음, 가공할 파멸의 저주와 무에로의 전락,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어야만 (교회)공동체는 영원한 구원, 무한한 기쁨, 깨뜨릴 수 없는 선택과 신적인 삶의 하나님과 함께 있다.
오늘날의 공포스런 현실을 생각하면서 몰트만은 “아우스비츠 조차도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정론은 다소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범재신론(panentheism)적인 신관에 입각한 화이트헤드적인 악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베를린, 보스니아, 소말리아, 르완다, 이 모든 악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시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종말론적 우주적인 새 창조의 지평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가 과거로부터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침묵과 숨어계심, 그리고 이 세상의 과도하게 넘쳐나는 모든 악과 슬픔과 비극에 대한 충분한 해결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끝이 좋으면 전체가 좋은가? 역사와 자연의 이러한 총체적 비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 유지되는 자기제한(zimzum)으로 인한 파루시아의 지연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몰트만은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인간 해방의 주제에 관한 내용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는 경제, 사회, 정치적 차원의 해방을 더욱 확신 있게 다루고 있다. 루터는 십자가 비평을 교회에 적용시켰다. 오늘날에는 십자가 신학이 사회비평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에의 몰트만의 정치적 해석학에 대한 관심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연계점을 갖는다. 십자가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은 국적도 없고 계급도 없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자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정치적 해석학은 이 이론에 상응하는 실천을 산출할 것을 요구한다. 이 실천의 목적은 죽음의 악순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영역에는 가난이, 정치적 영역에는 폭력이, 문화적 영역에는 소외가, 생태적 영역에는 오염이, 개인적 영역에는 무의미성이 있다. 만일 십자가의 정치적 해석학이 이러한 부정성들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또한 실천적으로 적극적인 것을 내어놓기 위해 일해야 한다. 결과적인 양상은 분명하다. 즉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는 사회주의를, 정치적 영역에는 민주주의를, 사회적 영역에서는 해방을, 그리고 생태신학적 영역에서는 자연과의 평화를 추구한다.
몰트만이 다루지 않은 질문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곧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에로 가지 아니하고 동일한 목표를 위하여 동일한 실천적 결론들과 투쟁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예수에 대한 신앙도, 아무런 십자가의 신학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성문 밖의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는 기독교의 우회도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직접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는 것인가? 또는 몰트만이 많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의 관점에서 공유하고 있는 사회 철학에 세례를 준 것인가?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자들은 몰트만이 십자가로부터 밖으로(out) 이끌어 냈다고 주장하는 해방의 의미가 실제로는 그가 십자가 안으로(into) 끌고 들어간 의미가 아닌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몰트만은 오늘날 기독론의 주요 주제인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충분히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제 1장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에서 몰트만은 좀 더 다른 문제로부터 기독론으로 접근한다. “메시야”라는 단어가 암시해 주듯이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미래 희망은 메시야적인데, 이 희망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생성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메시야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메시야적 신앙을 종말론적인 틀 안에서 보고 있으며, 그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는 단계적인 종말론적 서술 형식을 띠고 있다. 즉 그의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는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이“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이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지내고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현실 참여의 성격을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가 구약의 묵시적 표상을 이어받아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구원을 일으키는 근거가 된다. 또, 이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구원이 생태학적 위기의 회복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가 된다.
이상과 같은 몰트만의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기독론은 “넘어감”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 넘어감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감은 전통들을 보다 넓은 지평 속에 세울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한 과거의 인식이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이 인식을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로 넘어갈 때, 몰트만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로 넘어갈 때,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형이상학적 사고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을 중재 화해시키고자 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그 지평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우주적 기독론은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의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몰트만의 “신앙의 그리스도론”이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케 해주고 있다면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은 특히 생태학적 위기와 관련하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서의 신관이 있다. 이 신관은 오늘날의 공포스런 현실을 생각하면서 “아우스비츠 조차도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러한 몰트만의 신관은 범재신론(panentheism)적인 화이트헤드의 신관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베를린, 보스니아, 소말리아, 르완다, 이 모든 악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다(all in all). 이러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의 종말론적 비전에 더욱 잘 나타난다.
시간의 마지막에 모든 시간적 사물들에게 동시적으로 일어날 새 창조의 영원이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그 무엇도 잊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회복한다.
이러한 몰트만의 종말론적 세계의 하나님 안에서의 완성은 비록 종말론의 과정 자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커다란 차이가 있으나, 귀결적 본성(Consequent Nature) 안에서 세계를 심판하는 화이트헤드의 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신은 세계가 신 자신의 삶의 직접성 속에 들어올 때, 세계를 구원한다. 신의 귀결적 본성은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심판이다. 또 그것은 시간적 세계 내의 단순한 잔해에 지나지 않는 것을 활용하는 지혜의 심판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에 따라 심판하시며 또한 그 의를 모든 이에게 부여하기 위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정의를 창조하는 의이다. 그분은 세우고 바로잡기 위해 심판하신다. 여기에서는 원수사랑을 통하여 악마저 선으로 바꾸어 놓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전능이요, 불의한 자들은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의롭게 하고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은 참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적 보복형벌의 최후심판적 종말론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목베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 이러한 몰트만의 사상은 결국 만인 구원론, 아니 만유 구원론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대하여 그는 마지막 심판이 “예수”의 심판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속에서만 이 심판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몰트만의 기독론은 결론적으로 삼위일체적 기독론이요, 메시야적 차원의 기독론이요, 우주적 종말론적 기독론이다. 그의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론이 간과해 버렸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역사를 되찾음으로써 전통적 기독론들이 위축시켜 버렸던 구원의 의미를 메시야적 구원, 곧 세계구원으로 회복시켰다. 또한 그의 우주적 기독론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우주적 화해를 보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새 창조의 시작을 보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서 창조의 완성과 우주적 구원을 인식한다. 이 우주적 종말에서 길 위에 서있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완성된다. 이와같이 몰트만은 기독론과 종말론 결합하였다. 또한 이러한 몰트만의 기독론은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구원론적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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