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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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갈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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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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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의 인식이 필요하다.
1. 히브리인의 역사관
1) 불교, 힌두교의 역사관(원형적 시간개념)--- 왕국이 망하기 전까지의 히브리 개념이었다.
계속적인 반복, 일반적이며 평범한 시간일 뿐이다.
2) 공산주의자의 역사관(ascending line)
3) 히브리인의 역사관--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을 살펴 보면, 그들은 시간을 직선적으로 생각했다. 시간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다고 믿었다. 직선적 시간 이해에서는 모든 것이 유일회적이며, 항상 특별하고, 새로운 것이며, 의미있고,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이런 시간 이해에 있어서 분명한 자세를 가지고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언급한 여호와의 날, 메시야의 날은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만드는 전환점이 될 특별한 날이었다. 멸망으로 가던 역사가 생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역사적인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어거스틴은 이런 설명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역사의 전환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역사에는 두 시대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요(B.C),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시대(A.D., An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이다.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죽음과 절망의 시대가 아니라, 생명의 역사 시대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놀랄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밝은 때: 길을 인도하는 한 별의 출현,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의 출동, 천국들의 찬송... 때가 차서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큰 희망이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서 이루어졌다.
준비된 세계
히브리인들의 역사관은 역사의 어떤 시점에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셨다고 보았다.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하나님의 투기장(Arena)로 보았다. 하나님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또한 하나님은 어떤 사건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개개인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 또한 특정한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서도 역사하셔서 계획과 약속의 성취를 위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며 그 누구든 이런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탈할 수가 없다.
개인의 역사를 모르고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이나 민족만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 모든 개개민족을 들어 쓰신다{(1) Events (2) All nations (3) Individuals.}.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 그대로를 원하시는 것이지 달리 되기를 바라시지 않으신다.
새 역사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곧, 역사의 밝은 면(효과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한 때)과, 어두운 면(새로운 각성과 자각운동이 요구된 때)들이 필요하다.
2. 유대인의 왕국개념
정치적 왕국, 메시아왕국.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갈4:4-5).
하나의 원칙은 “때가 오기 전에 내 놓은 아이디아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이용하신다.
하나님이 이용하신 역사적 사건들(그리스도가 오시도록 준비된 세계의 역사적 사건들)
①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정복(하나의 공통어)--- 알렉사더를 비롯한 영웅들의 등장은 역사의 초점을 바로 예수님께 맞추기 위한 준비였다. 알렉산더와 그 후예들에 의해서 무명의 민족 히브리인들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히브리인의 땅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허리 역할을 했다. 지정학적으로 히브리 땅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길목이 된 셈이었다.
②희랍문화와 그 언어(세계적 공통어-헬라어-Greek).--- 헬라에 의해서 정복된 땅들은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헬라의 소크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의 사상은 인간을 작은 우주로 이해했고, 인간 이성을 존중하는 삶이 곧 신의 아들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데스의 일화: 젊은 시절, 사공에게 배운 철학.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한다는 것은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헬라의 언어는 언어의 혼란 속에서 세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큰 매체역을 다 했다. 언어는 신앙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교나 불교가 중국어를 통해 전파되듯, 기독교도 언어를 통해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통용어를 알고 있었다(인도에도 복음이,-- 마도라스에 도마의 기념 사원이 있다).
그러나 헬라어는 아시아권(圈)의 통용어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음이 아시아에 전파되기 어려웠다. 그 원인은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③로마의 통일 정책(하나의 공동사회): 정복된 나라 제자리에 살도록 하나님께서 로마를 사용하신다.
Alexander 대왕의 사후
↓
로마의 등장→ 칼타고 사람들 정벌
톨레미아(애굽)
셀레우커스(시리아, 메소포다미아)
Palestine→ 유다 막카비우스 영도 아래 셀레우커스 대항(모반, 반란), 독립쟁취
→내분(권력 싸움)→로마의 폼페이장군 원조 청, B.C 63년 로마의 속국화→
→로마의 세계정복→분봉왕 제도.
④로마의 평화기: 신앙의 자유 인정, 기독교의 성장기.
⑤로마의 도로: 가이사 아구스도, 군사도로(2개 연대가 교차될 수 있는 2차선 도로였다), 이도로가 바로 복음의 세계전도의 통로가 되었다(사도의 도로).
⑥히브리인의 전통--- 메시아 예언→문서화→자손 전래
⑦히브리인의 이산--- 히브리인과 이방인의 작은 공동체는 복음 전수의 터전이 되었다.
바울의 전도 시대:
영적혼란--- 물직적 풍요는 정신적 황폐를 가져왔다. 우상숭배의 만연,-- 참신앙 갈망.
도덕적 퇴폐--- 집 어귀마다 항아리가 있어 먹은 음식을 토하도록 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승인도 이런 도덕적 타락을 보고 결단한 것이었다고.
“복음은 말로서의 설득으로가 아니라 생활로의 감동으로 전파되는 것이 더 크다.”
품위와 정의에 대한 갈망(빛의 징조 갈망).
이념은 동기를 필요로 하고, 동기는 어떤 이념을 필요로 한다. 곧, 역사에 앞서는 이념은 실패하고 동기 없는 이념은 실패한다. 다시 말해서 때가 차지 않고 나타난 이념은 실패한다. 그러므로 때가 차야 한다. 인간이 조급하게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히브리인들의 전통과 그들의 분산
히브리인의 전통은 로마의 중요 도시마다 알려져 있었다. 이들 흐터진 유대인들은 성전이 멀어진 까닭에 가는 곳 마다 회당을 세웠다(15가정에 하나씩). 남왕국 유대인들은 포로 후에 돌아올 수가 있었으나, 북왕조 이스라엘인들은 diaspora가 됨. 예배드리기 위해선 회당에 갔어야 했다.
사도들이 전도할 때 각처의 회당들은 크게 도움을 주었다. 거기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회의 탄생은 회당(Synagogue)에서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외적(外的) 준비였다.
주린 마음= 하나님의 내적 준비
<그리스도와 구약, 당시의 생각들>
1.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쓰시는 하나님의 투기장(Arenauses)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A Holy Commonwealth)란 의식이 있다. 하나님은 이 공동체에 복을 주시고 바리새인들은 인간들이 거룩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빚어지는 비극은 하나남께로 부터가 아니라 인간들을 보는 것에서 구원을 바라보게 되었다. 고난 받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가 거룩치 않은 탓으로 본다.
2. 다윗시대의 왕국개념(Kingdom Concept of David's Time)
"어느 때 다윗의 나라가 회복됩니까?“라고. 왕국이 강해지고 단합되면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 왕국(정치적 왕국)을 뜻한다.
3. 종말론적 생각(Apoclit).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리라고.
4. 각 당파(Sects)
5. 그 당시의 새로운 생각들(New ideas of Age)
세례, 부활, 천사, 악마, 개인 대 공동체, 주의 날과 심판의 날 등. 이런 것들은 고대 예언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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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과∙요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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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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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복음서를 읽으라.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라.
1과 예수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 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神性).
3과 예수는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시다(人性).
4과 예수는 곡해에 대한 대변자이시다.
5과 예수는 선생이시다(하나님의 본성을 재정의하신, 하나님께 대한 곡해를 고쳐주신).
하나님은 1)초대하시는 하나님(inviting God)
2)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Seeks out sinners)
6과 구세주 예수(예수는 구세주이시다)
7과 세상의 빛이신 예수(예수는 세상의 빛이시다)
8과 예수는 부활이시다.
본 과에서는 예수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에 관한 문제: 1)예수는 누구신가?(탄생의 문제)
2)예수는 왜 탄생하셨는가?(탄생의 이유)
예수에 관해서 아는 것과 예수를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남이 예수를 설명해 주는 것과 내가 예수를 알고 설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요9:24)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9: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9: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9: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대면(Confrontation-대면,직면,대결,대질)이란 개념:
히브리인의 사고로 복음서를 읽게 되면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비유, 기적, 설교, 역사적 사건들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대면을 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직면하게 하는 것’ 그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기전까지는 그를 믿게 되지 않는다.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는 큰 의미와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육박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되풀이하여 읽도록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게(대면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人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사로서, 부활의 주로서의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예수의 전체상을 보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성겨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대한 모든 사람에게 던져졌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는 실로 모든 시대의 무름이다.
필레스틴의 인구조사원은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름(요셉의 아들 예수), 출생지(유대 베들레헴), 출생일(안티파텔의 아들 헤롯 왕이 다스리던 기간), 아버지(요셉), 어머니(마리아), 형제(야고보,요셉,유다,시몬 등 4형제와,자매들), 국적(히브리인, 다윗 가문의 후손), 주소(갈릴리 나사렛), 직업(목수), 기타(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고발되어 디베리우스가 다스리던 때 로마 사람들의 손에 처형되었음)
그러나 좀더 깊은 뜻으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하는 물음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1)당신은 가장 고귀한 선생이다.
2)당신은 도덕가이다.
3)당신은 친구없는 사람들의 친구이다.
4)당신은 혁명가이다.
5)당신은 여러 가지 칭호로 불리운다.
6)당신은 기만자이다.
예수에 대하여 의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실은 예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를 아는 이는 그에게 대하여 때로는 의심을 품는다.
우리는 그를 누구라고 하는가?
선생?
도덕가?
혁명가?
친구없는 사람들의 친구?
기만자?
속죄받은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가장 놀라운 주장들:
예수와의 대면(Confrontation)의 첫째는,
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Jesus is the Son of God Authority)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요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1세기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선언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인격 속에 권위가 들어 있었다.
‘예수가 참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극히 교리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라 말씀하고 있다. 곧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선포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한다. 여기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참 사람이신 참 하나님이셨다. 이처럼 복음서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만 “이렇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복음서의 말씀은 ‘선포’이지 ‘설명’이 아니다.
God(is, was) in Christ.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친구없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친구’이기보다 ‘제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인(全人)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그가 친구이기를 바랐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모든 일은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사용법에 대하여>
언어와 문체의 차이 등에 의해서 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제 4복음서로 구분한다. 그러나 베델성경연구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서를 공부한다. 요한복음은 복음적인 요소가 있다. 공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어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보다 큰 시야를 가지고 빛, 길, 생명, 목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1세기의 교회는 불신 세계였고, 요한복음은 그런 불신세계를 향해서 침투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는 그가 어떤 분이신가?라고 하는 예수에 대한 논평이 많다. 이유는 예수를 잘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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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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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람이신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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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의 만남 둘째는 ‘예수는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시다(Jesus is the Son of Man)’라는 것이다. Jesus as True Man.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사람의 아들로서 표현하는 것은 그의 하나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인격이시나 둘로 표현하는 것이다(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한 인격이심).
노스틱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성은 부정한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몸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헬라사상은 이성만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성경은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되었다고 했다. “(시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것이다. 그 뒤 예수와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동떨어진 차이기 있게 되었다. 예수에게는 후광이 있으나 타락한 인간에게는 없다.
전적타락:---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타락에서의 완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신대로의 인간으로서의 회복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인간성의 회복).
<예수-둘째 아담-와 첫째 아담과의 비교>
같은 점: 1.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지음받았다(Made in fullness of God).
2.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다(100% Man as God intended.).
3.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Knew will of the Father).
다른점: 아담 예수
1. 불복종하여 하나님의 의도보다 1. 복종하심(인간이신 그가!).
작은 인간이 됨. 하나님을 비난. 비난치 않았다.
2. 죽었다(불복종- 곧 죄의 결과다) 2. 생명을 자져 왔다.
3. 기도가 없었다. 3. 그의 생애는 기도의 연속이었다.
*기도는 내 요구에 하나님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전적의존이요 범사에 대한 감사이며,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결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의 잠재력이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에덴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다시 가지고 오셨다. 혹 찬송가 등이 예수의 인간성을 약화시킨다면 비복음적인 것이다.
간디는 예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역사적 예수에는 흥미가 없다. 실재인물이 아니더라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내게 언제나 남아 있을 터이니까!”--- 그러나 간디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말은 인격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예수의 교훈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종교’이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이적과 복종>
이적을 행하심→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복음서는 말한다. 그래서 놀라운 사실인 것이다(이적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신 일이었다면 놀라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복종하심→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종하셨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자로서 복종하셨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되지 못했다. 인간의 아들로서 행하신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주목하라!
<그가 참 사람이셨다는 증거들>
요람과 애기--- 그는 한 여인에게서 나셨다.
손과 먼지--- 그는 참 피조물이었으며(시공에 사신 역사적 인물), 따라서 그의 본성에는 창조 초기부터 인간에게 있던 모든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빛(후광)---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가지고 계셨다.(타락한 인간과는 달랐다)
아래로 숙인 머리--- 그는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되고 또 그 자신의 뜻을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려는 의사를 보여주셨다.
왕관---그는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대로의 인간의 산 표본이셨다.
꽃 지팡이--- 그는 철저한 복종자로서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과 약속과 가능성을 소유하고 계셨다.
광선--- 참 사람으로서 그의 전생애는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마3:17).
인간의 성공이란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의 인간됨이다. 참된 인간됨이 인간으로서 성공한 것이다. 예수, 그는 원형적 인간(prototype)이셨다. 그래서 오고 오는 세대에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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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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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해에 대한 대변자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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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의 만남 셋째는
‘예수는 곡해에 대한 대변자이시다’(Jesus as spokes-men against distortion)라는 것이다.
1)율법에 대한 곡해
2)전통에 대한 곡해
3)성별에 대한 곡해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등장하신다. 곡해는 생명을 거역하고, 죽이고 있기 때문에 곡해에 대해서 대변하시고 반박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율법이나 전통, 성별 등에 대해서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곡해에 대해서 반대하신 것이다.
예언자들과 유사한 역할
예수님과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점이 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보물을 잘못 취급할 때 주님은 예언자들처럼 그의 동족을 심히 비난하셨다. 이처럼 주님은 구약과 연결된 사상을 가지신 분이시다. 다만 곡해에 대항하신 분이시지 구약을 반대하신 분이 아니시다. 말하자면 영적 환경의 정화자로서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율법의 본래적 정신의 보존자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심한 논쟁을 하셨고, 그들의 곡해에 대해서 폭풍같은 격노를 발하셨다. (위선자,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자, 회칠한 무덤, 뱀들, 독사의 새끼들아... 등등.) 만약 이런 혹독한 비난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의분을 느낄 줄 모르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예수라는 환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 대하여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으며 그가 어두움의 세력과 충돌하셨을 때 그저 유순하기만 하고 부드럽기만 한 분이셨다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으며, 진리에 대한 곡해를 엄격히 비난하셨다. 그는 죄를 무마하신 일이 없으시다(예, 요8:, 간음한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서마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학개, 스가랴서에 보면: 거룩한 왕국에 대한 예언이 있다. 성전재건 문제. 말라기, 요나: 히브리 인들은 선교적 민족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신앙에 의존하려했지 선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다니엘: 현세는 썩은 세대요 종말로 보았다. 에스라서: 거룩한 왕국개념은 절정에 달한다. 그는 유대주의의 시조라 볼 수 있다. 율법이 병을 치료해준다고 믿었다.
율법의 알맹이(내용)는 랍비들에 의해서 그들의 전통이나 전승으로 갇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율법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율법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율법보다 더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예)
①안식일 문제에 있어서도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아 도리어 안식일 법의 의의는 잃어버리게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이웃의 필요를 도와주고,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데 반해서 유대주의자들은 그것들을 금령으로만 해석했다. 율법의 중심보다 그 울타리를 중시하거나 같은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주님은 노하셨던 것이다.
②고르반: 부모가 자식에게 육신의 생계문제를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제사장에게 맡겨 놓은 다음, 제사장은 14일간 보관했다가 수수료를 받고 다시 돌려 준다. 자식은 그것을 도로 받은 다음에도 ‘고르반’되었다는 이유를 붙이고 부모부양의 책임을 면하려 했다. 주님은 이런 위선적 태도를 책망하신 것이다.
율법에서 그 정신을 빼버리면 그때는 자기가 율법을 어기고 있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율법의 내용은 잃어버리고 껍떼기만 가지고서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의인인양 하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의식(意識)은 저녁에서부터 시작한다(해질 때부터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심리학적 배경은 하나님을 밤에 더 신뢰한 듯하다. 밤에 대적자가 위협했기 때문에 밤에 더 기도했다.
어떤 곡해가 주님의 분노를 발하게 했는가?
1)공로의식에 대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장부책에 공로점수가 많이 적히리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물질을 많이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을 지키거나 헌물을 하는 것은 공로의식에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해야 한다.
율법 자체는 좋은 것이며 선한 것이다. 율법은 그 시초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 생겨난 것이다. 율법은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자에게 많은 좋은 것을 제공해 준다. 말하지면,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접촉, 양심, 충동적 행동에 대한 제지, 정의의 규정, 갈 길의 제시 등 좋은 것들이다.(구약 8과 참조)
이처럼 유대인들이 받은 바 가장 고귀한 은사인 율법은 이스라엘의 감시자로 그들의 생활의 좋은 면을 보호해 주었다. 또한 이 율법이 적절히 사용될 때 이스라엘 집에 많은 복을 가져다 주었다.
(잠3: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3: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시119: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시119: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시119:34)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119:35)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119:44)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시119:45)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시119:46)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시119:47)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시119:48)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행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율법은 목적을 위한 방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목적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였다.
사람들은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 내용은 파괴되었다. 그리고 율법주의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미 시내산에서 주신 원래의 조문에 랍비들이 고의로 첨가한 수 많은 규칙들이 사람들을 사로 잡고 있어 사람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있었다. 그결과,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에도 인격적 자유가 없었고, 그저 문자의 속박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행동할 때마다 율법에 어떻게 명령되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건전한 윤리생활은 무거운 짐에 눈려 번창할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내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에 흐르게 되었다. 매 순간마다 자신이 율법을 범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느끼는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생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여러 책망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 보자.
막2:27, 율법의 목적을 인간이 파괴함.
마12:9-14, 막3:3-6, 눅6:6-11, 율법을 생명 자체보다 더 중하게 만듬.
마23:24, 요5:9-10, 랍비들의 수많은 규칙들
막7:9-13, 율법의 원 정신을 왜곡시킨 자들의 위선적 태도
마5:20-48, 율법의 문자를 지키고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눅18:9-14,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손과 마음과 생화로는 욕을 돌리는 사람들
이런 자들도 책망을 받았다.
전통을 전통 배후에 있는 뜻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마15:1-3, 막7:5-8, 눅11:42), 사물을 창조주보다 섬기는 사람들(요2:13-16), 약속에 따르는 책임을 저버리고 약속만을 구하는 사람들(요8:39-40, 마8:11-12)
3)성별에 대한 이스라엘의 곡해(예수님의 비난을 받은 다른 곡해)에 대해서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엄격한 성별정책을 위반할 때 이스라엘은 가장 심한 괴로움을 받았다. 따로 세움을 입은 백성이 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 이후 모든 종교지도자에 의해 그 백성에게 강조되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회복기기에 율법 개혁을 시작한을 때 이방인과 결혼한 가정은 가족들과도 헤어져서 민족적인 성별을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그리스도의 생각은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오만한 배타주의자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런 예수님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마15:21-28, 막7:26).
말 아래 둔 등불과 맛 잃은 소금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하신 좋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 철저한 분리주의와 배타주의적인 생각에 직접적으로 겨누고 말씀하신 책망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과 같이 받은 바 좋은 것을 가지고도 도리어 그것을 저주거리가 되게 하였을 때 주님은 거기에 대해서 통렬(痛烈)하게 항거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곡해에 대한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승리의 길로 돌아오도록 지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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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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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신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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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직도 모르는 것 뿐이다.
(사40: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사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사40: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그리스도께서 숨은 것을 드러내시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2).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는 진실함과 권위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요3:31-35, 마7:28-29).
사람들은 하나님을 탐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그의 힘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그 자신을 나타내 주지 아니하시면 인간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고 그의 행동 자체이시다. 곧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그 소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와서 그를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숨을 것을 드러내시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케 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멸(輕蔑)하지 말라.
하나님은 물질이나 세상의 숲이나 돌 등, 온갖 피조물에 계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모두 즐기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와의 만남 네째는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시다’라는 것이다. 예수께 대하여 경건한 자들과 의미심장한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곡해하기 쉽다. 단순한 예수상을 보기 원해야 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선생으로서의 예수’이심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가?
1)예수님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아버지요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두 왕국(하늘과 땅)의 통치권자이시다. 인간은 두 왕국에서 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한다(주기도문:‘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참고:(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길잃은 양이 그의 품으로 돌아와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개개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세실 수 있고, 새 한 마리도 사랑하신다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은 전인류를 사랑하시나 그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교회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이를 사랑할 책임이 있다. 현실적으로 ‘버려진 아이들’보다는 믿는 그리스도인이 더 많은 데 그래도 버려진 아이는 여전히 많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부흥사가 되는 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쉽다. 왜냐하면, 부흥사는 한 번만 사랑하면 되지만 목회자는 계속 사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셨다.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성을 재정의(再定義)하셨다(Jesus-Teacher- redefines the nature of God). 곧 하나님께 대한 곡해를 고쳐주려고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막1:41, 막6:34), ‘주린 자를 먹이시는 분’(막6:39-44), ‘죄의 짐을 진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는 분’(막2:5), 불의한 자 앞에 분노하시는 분(마23:13-36, 막11:15-17)으로 말씀하셨다.
4)예수님은 인간의 본성과 목적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을 보고 인간의 본성과 목적이 무엇임을 생각하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있는 것이었다. 오늘의 설교자는 매우 좋은 환경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악한 환경(새 소리, 바람 소리, 사람들의 잡소리, 번잡한 왕래, 듣지 못할 정도의 혼잡 등)에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는 굉장한 군중들이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운집했다. 그에게는 다른 선생이 가지지 못한 권위가 있으셨기 때문이었다.
5)예수님은 풍부한 생은 하나님과 관련을 가져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단은 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라. 네 자신의 욕망을 먼저 생각하고 창조주의 것은 다음에 생각하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풍부한 생은 하나님과의 관련을 가짐으로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라.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 나라를 구하라.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좋은 편을 택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시간을 보내라. (눅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라.
말씀을 듣고 지키라.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께서 네게 투자하신 것에 대한 수익을 그에게 돌리라.--- 말25:14-30, 눅12:47-48).
생명을 가장한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라(마16:26, 막8:36-38, 마6:19-21, 눅8:14)
6)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적들의 정체를 보여 주셨다.
육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힘을 구하라(마26:41, 요6:63, 눅22:40).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눅22: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경고하셨다.
(막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눅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속된 생각과 태도를 버리라.
(마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7)예수님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따르는 성스러운 책임을 말씀하셨다.
동기에 대한 부단한 평가: 주님은 사람들이 나쁜 동기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혈통을 초월한 관심(마5:43-47, 눅14:12-14, 10:25-37).
인간의 약점에 대한 인내와 용서의 마음
(눅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을 하려고 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보다 앞세우려는 마음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종의 사명을 다하려는 마음
방방곡곡에 주님의 멧시지를 전하려는 마음
8)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과 능력과 축복을 선언하셨다.(Text참조)
9)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보물은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신다.(Text참조)
간디는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의 고귀한 가르침인 산상수훈이 내게 있는 한 그가 역사적 인물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간디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잘못되었다. 그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 하는 문제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만 그가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하는 문제만을 중요시 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구주이셨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나 교훈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 나의 교훈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됨됨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하는 것과 그의 됨됨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가르침의 독특성:
1) 초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셨다.
2)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곧 죄인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Abba 하나님이라 부르셨다. ‘Abba’ 란 only of their Father(친 아버지)란 뜻이다. 아바 아버지란 말은 친구의 아버지나 양부모에게는 쓰지 않는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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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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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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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ed(요구)
구원의 성립: 구원에는 ‘구원받아야 하겠다’는 ‘요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구원을 말해주어도 그것을 듣는 자가 구원의 욕구를 가지고 구원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벽에다 대고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자 만이 구세주 예수는 의미있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멧시지는 실패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멧시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다.
예수는 인간을 분리된 죄에서 구원하신다.
<예수의 구원>
분리 ①하나님이 떼어 놓으신 분리에서 구원.
②인간이 스스로 떠어져 나간 분리에서 구원.
죄 ①죄과와 죄책감에서 구원.
②악의 위험과 권세에서 구원.
죽음 ①영적 죽음에서 구원.
②현세적 죽음에서 구원.
③영원한 죽음에서 구원.
히브리인들의 도덕관:
도덕= 하나님께 대한 복종--- 히브리인들은 도덕이란 어떤 이상적 상태에서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복종하며 사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히브리인은 도덕적 인간이란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인간이라고 이해한다.
구원의 문제는 용서받음의 문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림에 있다.
용서에 대하여: 용서 받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는 용서 받았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다. 용서하는 것은 용서 받기보다 쉬운 것이다. 용서해 준다”는 말에는 무조건 그 말을 믿고 받아드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누구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큰 괴롬과 후회를 하고 있는데 그가 “용서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용서를 받는 길은 그의 말을 ‘믿는 것’ 뿐이다. 무조건 그 말을 믿고 받아드리는 데 용서받음의 길이 있는 것이다. 용서를 받아드림에는 위대한 ‘믿음’이라는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얼마나 용서를 받아 드리느냐 하는 것은 자유와 관계된다. 위대한 신앙이라는 근육을 통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일이다(말 속에 큰 능력이 있다). 크리스챤 공동체 안에서도 곳잘 이웃을 용서하지 않아 그를 죄인으로 남아 있다록 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용서했어도 그것을 믿지 않은 채 죄인으로 남아 있는 일이 허다하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죄인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되며, 그가 용서했어도 내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어서도 같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되 죄의 100%를 용서 하신다. 99%가 아니다. 100%이다.
주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한 용서를 주신다. 아무 조건도 없고, 아무 단서도 없이 용서하신다. 그러나 이 용서를 값싼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큰 값을 치루셨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엔 자동차에 기름이 필요하듯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를 나누어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용서하는 만큼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다는 것을 믿는 자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을 용서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는 구세주이시다(Savior).
히브리인의 죄의 개념: 히브리인의 죄의 개념은 도덕적, 윤리적 개념이 아니다.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뜻이다.
예)하나님께서는 이웃의 생명을 사랑하도록 하는 표적을 세우셨는데 그를 사랑치 않음은 표적을 빗나간 것이다. 이를 죄라고 규정한다.
죄= 하나님의 표적에서 빗나간 것.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사랑에 반대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죄는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이다. 성경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한다면 복음서를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전적 죄인이지 조금만 죄인이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것은 우리의 의를 하나님의 의에 대조하게 하셨다.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와 자기의 의를 대조하려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죄인에게 대조케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인임을 핑계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룰 수가 없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을 하셨다. 인간의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를 조화 시키지 않고는 생명을 소유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해답자이시다.
의미있는 것은 십자가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위에서 만인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
인간은 느끼던 아니 느끼던 느끼는 여부에 관계없이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죄책감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죽음의 문제:
히브리인들은 육적 죽음과 영적 주음을 같은 차원에서 본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하나님의 의에 반응을 보일 수 없고 이미 육적으로 죽은 것과 같다고 본다.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인간의 잠재력을 나타낼 수 없다고 본다. 생의 정화도 못한다고 본다. 본과의 주제는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자져다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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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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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비친 빛(세상의 빛이신 예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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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rontaion(만남)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말씀이 육신이 되어)
2. 참 사람이신 예수
3. 곡해에 대한 대변자 예수
4. 선생이신 예수
5. 구세주 예수
6. 어둠 속에 비친 빛(세상의 빛이신 예수)
7. 빈 무덤
여섯번째 만남: 어둠 속에 비친 빛(세상의 빛이신 예수)
Jesus is the light of the word.
“때가 차서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큰 희망이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과).
구속주가 어둠 가운데 오셨다(눅2:10-11). 악마의 승리는 끝났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악마는 그의 지배자를 만났으며 어둠은 사라졌다. 구약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빛이 왔으며 그 빛이 모든 곳에 비쳤다.
<빛의 개념>
1. 빛은 안전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빛은 지식과 무식과의 대결에 관계되고 있다. 즉 빛을 보았다는 말은 전에 없던 지식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빛은 곧 “안전”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흑암은 위험으로 인식되었다.
예)고대에는 현대식 호텔이 없었다. 동리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걸어야 한 동리를 찾는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암흑은 위험한 때로 인식되었다.
히브리인들의 관념은 빛은 생활 자체와 관계되었고 사고(思考)와 관계되지 않았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런 관검에서 예수를 세상의 빛이라 한 것이다. 곧 예수는 세상에 지식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안전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
예) 행9:1-, 다메섹 도상에서 본 밝은 빛의 참뜻이 중요하다.
2. 빛은 심판이다.
빛은 안전만이 아니라 아픔을 준다. 빛은 인간의 자기 의를 제거하며,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의 터전을 흔들고,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며, 추한 동기를 드러내 놓는다.
(마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에 죄된 인간은 하나님의 빛이 인간 세상에 들어온 일에 대하여 격분하여 빛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끌고 가 못박았다.
3. 빛은 승리이다.
갈보리의 슬픈 소식은 빈 무덤의 기쁜 소식으로 변하였다. 죄, 죽음, 악마의 막강한 힘도 빛을 말살할 수 없었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보좌였다.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생명과 빛을 발견하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 헤롯, 가야바, 빌라도, 네로,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등은 악이 선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고 자신들의 위험한 오산 때문에 썩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그 빛은 여전히 비치고 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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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과∙복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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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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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is the resurrection.
최후의 예수와의 만남은 부활을 통해서이다.
1. Event: 부활은 사건 자체이다. 이는 역사에 정박해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서에 씌어있는데 그것은 그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다시 삶의 과정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미가 있게 된다.
2. Process: 사건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면 과정은 신약의 공동체와 관련된다. 이런 뜻에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몰라도 믿는 자에게는 구원 받았느냐고 묻지 못했을 것이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나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죽음은 죽어가고 있고 부활의 생명은 커가고 있다.
구원은 오늘의 부활이다.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죽음의 과정을 극복한 생명의 과정이 구원이다(Salvation is the life process overcoming the death process.).
<예수의 부활은 독특하다>
구약이나 신약 가운데 죽은 데서 다시 산 예는 있다.
<구약>
사르밧 과부의 아들: (왕상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수넴여인의 아들: (왕하4:22-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신약>
직원의 딸: (마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백부장의 종: (눅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7: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유두고: (행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이들의 소생과 달리 독특하다.
<그 독특성>
1. 영원한 것이다. 다른 경우는 일시적.
2. 변화된 몸이다. 부활 전에는 닫힌 문을 통해 갑짜기 나타나는 일은 없었으나 부활 후에는 초자연적이었다. 부활한 몸은 새로운 몸이다.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3. 전적 새생명이다. 전의 생명이 좀 더 나아진 것이 아니라 전적 다른 생명이다. 생명 자체보다 생명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이란 도장을 찍으셨다.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고 묻지 말자. 다만 믿음으라.
시간의 시작---베들레헴에서----십자가의---죽으심---승천-----한 인간의----
시간의 끝
예수의 탄생 고난 죽음(영생과 영벌)
영원(시간 연월일시 소용무)
부활과 영생
위의 그림을 믿는다면, 죽음을 축제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주일은 언제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다. 슬퍼할 날은 아니다. 가장 큰 축제의 날이다. 육신의 죽음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다. 우리의 부활의 보증으로서의 부활이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 힘 앞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라!
예)남을 도와주는 일이 필요없다고 곡해한 유대인의 곡해를 고쳐주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필요했다.
성경을 잘못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비문(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 말라)
“여기에 완두 콩 껍데기가 누워 있다. 잔디 밑에 나무 밑에. 여기에 알맹이는 없고 그 껍데기만 있다. 알맹이는 나와서 하나님께로 가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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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사도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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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신 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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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를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역사 속에 선포되었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가 받아드렸던 복음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리(Separation)의 문제
왕국(Kingdom)의 개념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세계공동체(World Community)로 그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고대 역사를 사건의 보도로만 보았다. 그러나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건의 보도와 논평의 역할까지를 담당하게 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1세기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 24개의 긴 연설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이 있다.
1) 행2장의 오순절(성령의 강림과 그 권능)
2) 행15장의 예루살렘회의(하나님의 뜻을 세계에 나누는 일을 결정)---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이제는 전세계로 관련시키는 일을 결의했다.
사도행전은 신약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즉 다리와 같은 위치에 있다.
1)예수와 바울 사이에 있어서의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Jesus ↔ Paul) 사도행전이 없이는 바울을 이해 할 수 없다.
2)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Christ ↔ Christianity)
3)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Gospel of Jesus ↔ Gospel about Jesus)
미움받은 기독교, 그이유
기독교의 온상은 유대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세상을 증오하는 자리에 있었고, 세계는 유대인을 미워했으므로 유대에 온상을 두고 있는 기독교를 미워하는 입장에서 복음을 대하게 되었다. 유대인이 미움을 받게 된데는 까닭이 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창조를 받기는 하였으나 지옥의 땔감(기름)으로 지음받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계인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성령은 그의 능력을 통하여 전세계에 있는 믿는 자의 구속을 이루셨다. 성령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자들로 수 많은 이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초대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일치>
오늘의 교회는 stained glass와 같아서 하나의 교회, 한 교파를 보면 볼 품이 없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서서 봐야 교회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일치성은 교리,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쳔”이란 사실에 있다.
<구별이 없어진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구약의 예언을 멸시치 않고 이방인들이 이해할 정도로 구약의 예언을 이용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증거할 뿐이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확증할 뿐이다.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는 특정한 민족을 위한 한 종파가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주어야 할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my personal Savior)라고 고백하는 것과 ‘나의 주’(my Lord)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전자, ‘구세주’라 부를 때 그것은 그가 자기의 인간적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이 고백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있는 신앙상 초보적인 단계의 것이다. 신앙이 장성한 뒤에는 그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중심에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는 내 생을 전적으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전권자로 고백되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는 나에게 필요한 존재인 ‘구세주’라는 믿음에서 나는 주님의 ‘종’이라는 믿음으로 성장되어야 한다.
1. 제자들
우리가 명심할 일은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지으신 세계와 관계를 맺고 계시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수행하는 무대이다. 하나님은 창조 이래로 인간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잠잠하시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개입하셨고, 그의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일꾼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각양 일꾼을 쓰고 계신다.
만인사제직(萬人司祭職): 이는 만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 처럼, 농업, 교육, 공업, 예술 등 모든 일도 하나님의 일임을 믿는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헛되다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 가운데서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는 복음의 일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도행전은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기록이다.
2. 사도행전의 요약
사도행전은 세 가지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1)어떻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증거되었는가?
2)어떻게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가게 되었는가?
3)어떻게 복음이 세계 끝까지 전파될 수 있었는가?
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① 공동체가 힘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강림으로 된 일이었다.
흔히 성령을 가슴 부풀게 하고 뜨겁게 하는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 성령은 감성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을 온전히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초대교회는 악을 이기는 능력, 인생을 변화시키고 희망을 주는 멧시지, 서로의 요구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사명에 대한 명확한 이해(행4:12), 하나님의 진리를 담대히 선포할 ‘확고한 결심’(행4:18-20),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위로부터의 지혜와 능력(행6:9-10, 7:57-60)으로 충만케 되는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었다.
② 공동체가 증가하였다. 그것은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루에 3천명의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행2:37-41).
③ 공동체는 박해로 인해 온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신앙 공동체의 증가를 보고 이를 경계하고 시기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공동체는 세계 도처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이든 그곳은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이 머무는 자리이다. 어느 한 곳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곳은 없다. 그러므로 그곳을 두루 찾아가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대헌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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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히브리서,갈라디아서,로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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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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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에서는 (1)구원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에 대해서 (2)참된 회개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공부하게 된다.
초대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받기에는 부족하다는 이단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사상은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항상 존재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이라는 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이다. 기독교는 안팎으로부터 신앙을 위협하는 세력에 의해서 도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상의 역사적 사건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이 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개종자(改宗者,convert)들이었다. 하나는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출신 개종자들이었다. 그중 유대인 출신 크리스쳔들 중에는 ‘복음’에 유대교적 좋은 점을 첨가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은 대부분 이런 문제로 인해서 충돌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은사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유대교적 사상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들을 통해서 남다른 율법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과 함께 구약의 율법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요한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은 이방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들도 구원에 있어서 예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로 생각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엄청난 은혜를 입는다고 생각했을 때 염치가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 종교가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당시의 철학적인 주제들: 이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금욕주의가 생겨났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2)인간의 자부심: 인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치졸하고 사악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자부심 때문에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3)인간의 경험: 아무런 의도나 대가없이 용서받은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눅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눅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눅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유대인들은 이방인보다 더 잘 믿는 자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오래 믿는 것이 잘 믿는 것과 같이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복귀운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났다.
예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옛부터 내려오는 모든 그럴듯한 사상과 노력들을 재검토하자는 운동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났다.
1) 기독교로부터 온 것: 이는 혼합주의의 태동이다. 혼합주의 운동은 예수님의 대속의 업적에다가 기존의 도덕과 윤리, 인간의 이상적인 사상들을 총체적으로 다 합해서 인간 구원에 합류하게 하지는 운동이다.
▶탈현대주의(포스트 모던니즘)
▶종교다원주의
2) 유대교로부터 온 것: 이는 신인협동설과 같은 것이다. 신인협동설은 유대교의 영향에서 온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인간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신인협동설: 하나님 만이 아니라 인간도 자신의 구원에 한몫을 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런 사상에 대해서 정면으로 싸운 것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였다.
이에대한 적절한 변증을 히브리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찾아보면,
1)히브리서: 예수님은 족장, 예언자, 제사장, 율법, 할례 등보다도 더욱 귀하고 위대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유대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다 합쳐 놓은 것보다도 훨씬 위대하시다. 따라서 예수님만으로 인간 구원은 충분하다.
2)로마서: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여기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오직 믿음으로!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갈라디아서: 새 것과 헌 것을 혼합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반박한다.
구원은 예수만으로 충분하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둥이다. 이 외의 길은 다 마귀의 길이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복귀의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오래 믿었다는 유대인이건, 나중 믿었다는 이방인이건 사도들은 모든 자는 다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유대주의(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낡은 것과 새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와 기독교를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요청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Repent):
회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공통적으로 중요 문제였다. 회개는 180도의 전환이다.
외경 베드로행전에 회개에 대하여 정의했는데 회개는 곧 “왼손이 바른손되고, 바른손이 외손되고, 위가 아래되고, 아래가 위 되고,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변화가 있기 전에는 회개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복음은 생활이 전적으로 변화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조일석에는 안 된다. 그러나 사도들은 옛 생활과 새 생활을 혼합하려 하지 말도록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회개는 뉘우침이나 후회처럼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예) 친구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가령, ‘친구를 계속 때리고 나서는 미안하다’는 생각이나 말을 되풀이한다고 할 때 그것이 회개라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되면 필경 친구관계는 와해되고 말 것이다. 회개는 다시는 친구를 때리지 않고 그를 소중히 여기는 변화인 것이다.
복귀(Reversion)와 복음(Gospel)
복음을 유대교에 끌어들이면 복음이 전세계에 전파 되는 데 큰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어떤 신학자는 교리는 진리의 적이라고 했다. 교리를 살피지 않고 교리에 사로잡힐 때 그 교리는 나쁜 것이 된다.
마틴 루터는 “복음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참다운 무식”이라고 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져주시는(조건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은 그 뒤에 따르는 어떤 대가도 조건으로 하지 않고 그저 주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결코 믿음에 그 무엇을 첨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는데 있어서도 아이들 같지 않고 어른들은 큰 문제를 갖고 있다. 성인은 남에게 거저받는 것을 꺼려한다. 자부심 때문 그러하며 경험상 그러하다.
복음은 전세계에 똑 같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은 무식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무료다. 구원은 값없이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나 값싼 것은 아니다. 이 값은 예수님 자신으로 치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God's grace is free, but it is not cheap.
<참고>
성경에 관한 바울의 복음의 멧시지는 독특하다. 이런 의미에서 참으로 세상에 복음서를 준 것은 다른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울에 의한 것이다. 그는 유대교의 전통적 사고와 복음이 섞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예수를 “주”로 소개한다. 또 세상과 연결시킨다. 복음을 복사하기는 쉽다. 그러나 참으로 복음을 전달하려면 그 외형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바로 전해져야 한다.
복음의 참 뜻은 여러 종족에게 알 수 있도록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히브리적 Box에 집어 넣으려는 어떤 노력에도 완강히 반대했다.
바울은 “왕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이란 관념 안에서 한 말이고 “모든 사람”(히브리인만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도)이라는 개념도 바울이 준 것이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많은 학자는 말한다. 컴퓨터가 답한 것도 같은 결론이다. 히브리서의 단어(동사 명사 형용사 등을) 등을 컴퓨터에 넣었더니 바울의 것이 아니었다는 결과였다. King James Version 이외에는 바울의 저서로 보지 않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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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로마서,갈라디아서,히브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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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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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인간은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
목표: 1.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2. 의인(義認)은 오직 하나님이 의롭게 만드시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3.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동을 수락하는 길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디카이수네이’는 칭의, 의인, 성의(成義, 카톨릭에서)라고 번역된다.
본과는 칭의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구원론의 요체(要諦)가 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단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다. 어떤 고행이나 선행으로도 죄를 보상할 길은 없다. 칭의의 문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해 없이 신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칭의는 본래 유대교에서부터 출발된 것인데, 이는 신약에 이르러 기독교의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었다. 서구사회에는 ‘칭의’란 개념은 없다.
칭의 문제에 있어서 문제되는 요점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미쁘시고 진실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대조를 하나로 만들어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①우리의 죄를 숨기거나 ②‘나는 죄없다’고 사실을 부정하거나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칭의의 문제도 히브리적 방법으로 해야 한다. 곧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칭의란 말은 법정용어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로 밝혀진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다 (롬14:23).---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예컨데 죄인도 그렇고, 죄된 나라도 하나님 법정에서의 선고는 ‘유죄판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죄판결을 받을 그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변호인처럼 우리 옆에 오셔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는 정죄받아 마땅하나 나의 의를 이에게 옷입히고 싶다’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입히신다. 그리하여 다시 재판결이 내려진다. 마침내 죄인은 무죄로 판결을 받게 된다. 이것이 칭의의 도리이다.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은 죄를 죄로, 죄인을 죄인으로, 죄된 나라를 범죄하는 나라로 판결하신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여기서 무죄를 선언받으려면,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길 외에는 해결의 길이 없다. 그런데 죄된 인간으로 불가능한 이 변화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셨다. 이것이 칭의이다.
칭의는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돌이켰는가 하는 성경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과 전인류의 정나라한 모습을 말할 때 비로소 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인간과 자신을 연결시키신 하나님! 그로 인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온전히 인간(죄인)을 의인으로 받아드리신다. 하나님의 의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시려고 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은 전혀 다른 의로운 존재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 길 뿐이다. 이런 은혜는 인간을 겸손하게 한다. 은혜는 그 사람을 저하(低下)시키지 않고 겸손하게 하고, 그를 확대(擴大)시키지 않고 높혀 준다.
인간에게 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가 있을 뿐이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인간은 자기가 빠진 수렁에서 자신을 구할 능이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행위를 기뻐하신다. 무엇보다 좋은 믿음, 깨끗한 믿음을 가장 갈구(渴求)하라!
인간의 지혜로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헛된 노력이 있다.
1)율법적 행위와 도덕
2)이상주의와 고상한 생각
예) 힌두교의 기도 바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행동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 뿐이다. 한 번 의롭게 되었다면 감사 중에 다시는 자기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때문에 ...을 한다면 그는 자유인이요,
해야 하기 때문에 ...을 한다면 그는 노예이다.
바울이 자신은 히브리인이요 히브리식 사고를 가졌으나 그의 서신은 헬라인을 위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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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과∙히11: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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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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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신앙은 자신의 전 존재를 절대자에게 맡기는 행동이다.
목표: 1. 믿음의 정의를 잘 설명해 주려한다.
2.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을 이해하게 한다.
3. 성숙한 믿음의 요소들을 이해하게 한다.
4.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식시킨다.
믿음은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오해된 말이기도 하다.
성경의 낱말들은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에 제 뜻을 달리하거나 곡해되어 본래의 생명력을 잃게 하기도 한다.
‘믿음’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낱말이다.
바울 서신에 명사(125번?), 동사 등으로 약 200번 나온다.
믿음(faith)= 신뢰(trust)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은 생명과 만나게 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구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모든 것을 예수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생기는 것 같지만, 실은 많은 과정을 거쳐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믿음은 나무가 자라가는 것과 같이 자라간다.
예) 나무에 연륜이 하나 있어도 나무는 나무이다. 풀은 아니다.
나무는 먼저 있던 연륜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해마다 더해가는 것이다.
<믿음의 네 가지 단계와 형태>
1. 경험된 믿음
그리스도는 한 idea가 아니다. 인격으로 그를 경험한다. 이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경험하게 된다.
예)어린아이가 이론으로가 아니라 부모가 안아 주고, 귀여워해 주고하는, 경험을 통해서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듯이... 신앙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갖게 된다.
이 경험은 직접적인 경험일 수도 있으나 간접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그의 ‘간증’을 통해서 내게 믿음이 생길 수 있다.
2. 공동체적 신앙(Community Faith)
2단계에서 1단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 속의 일부라는 의식, 다른 사람의 신앙과 관계되기 바라게 된다.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신앙을 갖기를 바라게 된다. 이를 공동체적 신앙의 단계라 한다.
예)어린아이는 처음엔 가정의 주의를 자기가 받기 원한다. 아이가 몹씨 울 때는 욕구충족의 요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라게 되면 다른 각도로 요구하게 될 뿐 아니라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시작한다.
3. 탐색하는 믿음(Serching Faith)
이 단계는 추구하는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감정의 문제 만이 아니라 머리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결단하고, 응답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탐색하고 거기에 응답하려 하게 된다. 상당히 성숙한 신앙의 단계이다.
<감정과 신앙>
감정은 신앙에 영향을 주지만 감정이 신앙은 아니다. 감정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처럼 감정을 통해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태양은 구름 위에 언제나 있듯이 인간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낀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신앙을 온전하게도 하고 없이하게도 한다. 감정에 치우치는 신앙은 위험한 것이다.
4. 소유되는 신앙(Owned Faith)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믿음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는 단계이다. 믿는 일에 생사를 내 놓을 수 있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만물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다. 신앙은 ‘하나님의 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에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앙은 1에서 4단계까지 모든 단계로 점점 심화되고 추가되는 것이지 먼저 단계를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전체적인 회심-(Total Conversion)”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단계가 있다. 하나의 연륜을 가졌어도 나무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어떤 단계에 있다해도 믿음은 믿음이다. 그러나 나무는 점점 재목으로 자라야 한다. 처음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후 단계에 가면 신앙이라는 근육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게까지 이른다.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은 이런 것이다.
1) 믿음은 이해를 넓힌다.
더 넓은 세계를 바로보게 한다. 보다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보다 가치있고, 영원한 것을 바라게 한다.
2) 믿음은 인생에 참된 보물을 유업으로 받게 한다.
3) 믿음은 거룩한 책임을 짊어지게 한다.
믿음의 사람은 그 삶의 자리를 하나님의 일터로 삼고 살게 한다.
4) 믿음은 생의 두려움과 좌절감을 극복하게 한다.
온전하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차버리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그를 다시 하나님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다.
예) 가룟 유다와 베드로--- 그 신앙이 서로 다르다.
유다는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가 거부한 것이다.
믿음은 암흑 가운데로 장님이 뛰어가는 것과 같이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빛 가운데서 우리의 생을 전체로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잘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해야지 하나님 내가 있으니까 당신은 행복하시지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5) 믿음은 기적을 행하고 매사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한다.
믿음은 산을 옮기든지 아니면 산을 뚫고 나간다. 어떤 종류의 산이든 신앙의 사람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들 앞서 이미 이 산들을 거쳐서 가셨기 때문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성숙한 믿음의 요소
1) 지식(Notitia)
믿되 무엇을 믿느냐 하는 믿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예수의 무엇을 믿는가?
2) 동의(Assensus)
믿음의 지식은 자신의 것으로 동의하게 되어야 한다. “아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동의는 믿음을 보다 역동적인 것이 되게 한다.
3) 신뢰(Fiducia)
알고 동의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적극적인 신앙의 단계인데 감격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율법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감격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신뢰 단계이다. 율법의 소극적인 순종은 고통이요 짐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적극적은 순종은 복이 되고 기쁨이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이다. 믿음은 주님을 더욱 의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풍성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기적 중에 기적이 있다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믿게 되어 믿음의 자식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한 가지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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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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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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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초대교회는 기독교 신앙이 적용되는 시험장으로 신앙적인 문제가 많았다.
목표: 1. 바울 사도는 문제 투성이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잘 파악하였고,
2. 신앙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주고 있다.
3. 문제는 필연적이나, 그것을 고쳐가느냐 그냥 두느냐에 따라서 성숙과 미숙이 갈린다.
데살로니가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지역으로, 마게도니아 지방의 주정부가 있는 도시이다. 바울은 이곳에 오기 전에 빌립보에서도 전도하였는데, 대단히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었다. ‘대낮에 한길에서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했고, 관리에게 끌려가서 폭행을 당했고, 감옥에도 몇일간 갇히게 되었다’. 귀신들린 사람을 제정신이 들도록 고쳐준 보상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치 않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약 3주 동안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다(행17:2). 따라서 데살로니가교회는 아직도 어리고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사도 바울의 염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1)짧은 체류기간--- 아직 어린 교회---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대부분이 이방인들--- 누가 주님에 관한 깊은 뜻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3)이미 시작된 박해---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4)성적 부도덕--- 종교적 매춘의 악영향.
데살로니가 전서에 제기된 문제들
1. 사도에 대한 불신
사도 바울이 정당한 사도직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도란 12제자들과 같이 역사적인 예수님을 모셨고, 예수님께 직접 배웠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뵌 체험을 말했다. 주님께 직접 사명을 받았으며, 또 자기는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전했다. 돈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교역자를 사도로 여기고 교회의 고용인이나 봉급을 위해 일하는 자로 여기지 말라.
2. 성적 부도덕
교회는 도덕적으로 가장 순결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한다. 이방 종교에는 종교적 매춘부들이 있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설득력을 상실한다.
3. 재림에 대한 오해
초기 신자들은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재림에 대한 문제들:
(1)과거적 재림사상: 이미 재림은 있었다(여호와의 증인).
(2)미래적 재림사상:재림은 더딜 것이다.---“(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곡해된 재림사상: 재림은 임박했다(태만, 무위도식).
(4)실현된 재림사상:---“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6:46) -예수님의 화육이 재림의 시작이라는 이해.
(5)부정적 재림사상: 재림은 없다는 극단적 부정론이다.
4. 교회의 내적 분열
교회 내의 유대인 지도자와 이방인 지도자 사이에 갈등의 문제이다.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생겨 바울은 존경심을 가지고 지도자 섬기기를 권면했다.
5. 죽은 자들은 재림시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믿음이 적어서 주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줄로 알았다. 죽음은 한 번 세상에 난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바울은 부활의 순서로는 죽은 자가 먼저라고 말한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 후서에 제기된 문제들
1. 박해 중에서도 굳게 서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적 위협 가운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가 필요했다.
2. 재림에 선행할 사건들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현세에 대한 교훈은 있으나 교리적 논쟁이 없는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후서에서는 묵시문학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곧,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는 무법한 자(문선명)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배교자들과 무법자들의 출현이다.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3. 규모있는 절제된 생활을 하라.
곡해된 재림 사상으로 난잡하거나 규모없는 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한 권면이다.---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살후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살후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제기된 세 가지의 작은 문제들>
1. 문제없는 생활: 이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
2. 죽음은 찌르는 가시를 잃었다는 것: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치 못하도록 하는 쏘는 가시를 잃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 사망은 그 권세를 잃었다.
3.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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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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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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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고린도 교회는 지상의 교회를 대변하는 교회임을 주목하자.
목표 1. 고린도 시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한다.
2.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윤리적 문제를 살펴본다.
3. 사도의 충고가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이해시킨다.
4문서설: 제1서 전5:-9:(고후6:14-7:1은 제 1서의 한 부분)
제2서 현재의 전서
제3서 후10:-13:(2:4의 내용)---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제4서 후1:-9:
고린도 교회는 그 배경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오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찾을 수 있고 이에 대한 사도의 훌륭한 권고를 들을 수 있다.
1. ‘고린도’라는 도시
고린도는 그리스 남단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주전146년 로마에 항거했다가 패하고 폐허가 되었다. 약100년 후 줄리어스 시저가 재건했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삼아 옛 영광을 되찾게 되었다. 바울 당시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에베소에 이어 로마 제국 가운데서 규모로나 중요성에 있어서 인정받는 도시였다. 여러 민족들의 이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문화적인 다양성을 가진 국제도시가 되었다. 사회적인 관습의 다양성과 종교적인 의식과 신앙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많은 혼란과 문제점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매우 저급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속담에는 ‘아들을 낳거든 고린도에 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시인은 말하기를 “고린도인처럼 산다”라는 말은 곧 ‘가장 타락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었다고 했다. 요컨데 극심한 우상숭배, 부도덕, 이교 숭배가 이 고대 희랍도시의 특징이었다.
2. 종교적인 상황
고린도는 다민족,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들이 믿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애굽과 그리스, 소아시아 전역에 살던 모든 이민자들의 신전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시스’, ‘세라피스’와 같은 것은 애굽의 신이었고, 유대교의 회당도 있었다. 이들 수많은 이방종교들은 시대정신을 타락하게 하는 데 한 몫을 하였다. 1세기 초엽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창녀 사제들이 있었서 예배자들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런 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바울은 처음에 유대인 회당을 빌려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중에는 배척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교인중 한 사람이었던 유스도의 가정에서 선교하였다. 바울은 약 18개월 가량 이곳에서 전도하였다.
3. 교회내의 제문제들
가. 교회내의 분파 문제(세속적 당파의 발생)
고린도 교회 안에 인간중심의 세속적 파벌 문제가 생겨났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오직 하나일 뿐, 어떤 이유로도 나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도, 성자도 성령도, 세례도 다 그 근거는 하나이다. 다만, 지체가 있을 뿐이다. 교회는 서로 신조의 다양성은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일치하는 협력정신을 가져야 한다.
나. 인간의 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
헬라문화의 특징은 철학이고, 철학의 주제는 인간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말 이외에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연히 기독교의 신앙은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다. 부도덕한 일들의 문제
근친상간의 문제의 대두 등, 부도덕한 문제가 교회 안에 있었다. 바울은 이런 공공연한 부도덕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나타내었고, 이런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징계할 것을 권하였다. 올바른 신앙은 언제나 도덕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법이다.
라. 믿음의 형제간의 소송 문제
신앙인들이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교회가 세상의 구경꺼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마. 결혼과 이혼 문제
기독교는 독신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에 배치되는 사상이다. 더욱이 이혼문제는 신중해야 한다.
바. 기독자의 자유 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거론이다. 당시는 이교의 사원에서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이것을 사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우상의 제물이라 해서 먹지 않았고 먹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인정하나 그 자유가 불신자나 믿음의 형제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고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먹기를 꺼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형제의 양심이나 영적생명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롤핑 목사는 감리교인은 술을 먹지 않는 사람들로 예를 들었다. 요컨데 이런 문제는 사랑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기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치 않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상과 관계되는 음식물과 물질들이 얼마든지 있다. 풍어제를 드리고 출어를 해서 고기를 잡아다 시장에 내고, 운수회사에서는 고사를 지내고 버스를 운행한다. 고사를 지내고 아파트를 지어 분양한다. 은행도 고사를 지내고 금융업을 도모한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그들의 문제이지 믿는 자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고전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전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 시련에 대해서
성도의 삶에는 항상 마귀의 유혹과의 도전이 따른다. 그러나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만한 지혜와 힘을 주심을 기억하고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유혹을 이기기에 넉넉하다.
아. 성만찬의 남용
애찬과 만찬을 구별치 못하는 데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바울은 주의 만찬에 대한 남용을 경계한다.
자.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지체에 따라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다.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받은 은사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차. 사랑은 최고의 은사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감당되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최고의 덕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사랑의 15가지 기능과 특징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카. 몸의 부활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영만의 부활이 아니다. 몸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성경의 주장은 그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4. 고린도 후서
흔히 고린도 후서는 바울 사도의 자서전이라 할 만큼 바울 자신에 관한 솔직한 내용들이 기술되고 있다.
가. 하나님의 은혜는 족하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바울은 그가 경험한 모든 시련과 고통, 심지어 그가 일생동안 짊어지고 살던 질병까지도 그에게는 가장 적절하고 알맞는 은혜였다고 했다.
나. 거듭난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엄청난 혁명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부분적인 개조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다. 참된 구제의 동기와 태도
그리스도인의 봉사정신의 근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하나의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봉사나 구제의 정신은 철저하게 감사와 기쁨에서 출발돼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을 일깨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는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에게 주듯 하는 우월감을 가진 세속적인 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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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과∙에베소서,사도행전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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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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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며, 중요한 사명이 맡겨져 있다.
목표: 1. 기독교회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 본다.
2. 교회의 과제를 분명하게 설명, 이해시킨다.
3. 교회는 세상을 위한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한다.
기독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집단을 일컬어 교회라고 한다. 요사이에는 불교에서도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엑클레시아인데 엑크(밖으로)라는 전치사와 칼레오(부르다)라는 동사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곧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진다. 본래 이 말은 정치적인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뜻했었는데 교회가 이 말을 교회로 빈번히 쓰게 되자 이제는 아주 기독교 용어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 신앙고백을 가지고 함께 모인 사람들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사람들이다>
1.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과 사명을 위해서 세상에서 불러 내신 신앙의 사람들이다.
2. 교회는 하나님께 양육되는 사람들이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서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
3.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4. 교회는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5.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생명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의 목적을 위한 유기적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의 구성원은 그 지체들이다.
6. 교회는 두 개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세상 나라 시민의 사명을 다하는 신앙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과제는 무엇인가?>
교회는 한 가지 사명을 가진 공동체이다. 세상을 위하여 세상에서 부름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과제를 교회는 잘 감당해야 한다.
1. 교회에는 선교할 과제가 있다. 교회는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2. 교회에는 예배할 과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의식이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오시는 내용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가를 체험하게 된다.
3. 교회에는 봉사할 과제가 있다. 교회가 하는 봉사는 받은 것을 형제와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다.
4. 교회에는 교제할 과제가 있다. 성도의 교제는 모든 지체의 연합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교회를 바로 보는 시각>
교회를 보는 시각은 마치 ‘스테인드 그라스(색유리창)’를 보듯 교회를 보아야 한다. 가까이에서 한 조각만을 보아서는 그 전체의 그림을 알아 볼 수 없다. 사람마다 제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전후의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곤경에 빠질 것이다. 전해 준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못 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이 어떻게 전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idea와 feeling을 종합해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idea와 feeling과 message를 어떻게 한 꾸러미로 엮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찬송가와 기도문과 예배 규범과 교회색유리와 성경 등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1세기 교회는 보통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겨우 걷기 시작한 교회도 있었으나 역사상 큰 교회도 있었다. 예를 들면 구브로(Cyprus)섬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보다 1배 반이나 되는 2세기 교회가 있었다(탁아소, 예배소 등이). 초대교회가 반듯이 작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당시의 교회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힘있게 확장되어 갔다는 것을 역사가는 말한다. 또한 이 당시는 개인주의 시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관계 되었다. 또한 바울은 교회의 공동협동을 강조하고 있다. 개체교회를 인정하나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매 시대에 교회로써 할 수 있는 창조적 역할을 기대하신다. 교회는 우리시대에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것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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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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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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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초대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적절한 지침이 필요했다.
목표 1. 디모데 전후서는 한 개인을 위한 서신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2. 교회의 예배는 순수해야 하고 적 그리스도와 싸워야 한다.
3. 성직제도의 배경과 좋은 지도자 선출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목회서신: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 한다. 목회 사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권고하고 지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서신들에게서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귀중하기 때문이다.
젊은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스런 제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열정적일 뿐 아니라, 스승에 대해서도 헌신적인 조력자였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앞에 나섰고 충성스럽게 감당해 냈다. 아마도 디모데와 같은 일꾼이 바울에게 없었다고 하면 바울의 역할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모데는 데살로니가교회, 빌립보교회,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등을 위해 크게 조력했다.
1. 디모데 전서
여기에는 목회자에게 주는 일반적인 충고가 들어있다. 목회자는 완성된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보다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항상 자기 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신앙과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바울이 충고한 내용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재확인하는 것들이었다.
1) 순수한 기도와 예배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나타나는 오해>
(1)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일축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님은 이 세상을 위해 오셨다.
(2)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 정 반대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 물질적인 풍요, 평등한 세상 같은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하더라도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한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순수한 기도와 예배의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사람들의 요구나 감정을 해결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상 교회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위한 흔적을 오래도록 유지해 오고 왔다. 이런 전통(傳統)과 의식(儀式)을 교회는 지켜가야 한다.
2) 성직자의 선출은 신중해야 하고, 그들의 생활은 본이 될만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나실-히,나지르’인이라고 했다. ‘성별된, 구별된, 봉헌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았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아 부정(不淨)을 막았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구별된 사람인 그를 존경하고 협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고, 또한 그들은 생활에서 본을 보여야 했다.
*...을 말한다는 것과 ...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다.
빛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되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다. 빛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빛을 세상에 비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됨으로서만 세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지도자들의 요건은 지식과 지도력, 덕망과 인격을 갖추면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은 보다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직자는 건실한 가정, 자기를 절제하는 인격자, 가르칠 능력, 탐심이 없는 인격, 신중함과 유순함, 동정심을 가진 조력자여야 했다.
3) 거짓 가르침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초대교회 이후로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거짓된 가르침에 공격을 받아 왔다. 영지주의자 같은 고도의 지식인과 열광주의자 같은 적그리스도들이 출현하여 교회를 괴롭혔다. 만약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종된 사람들이 진리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 논쟁, 마르시온 같은 이단자는 구약성경을 무시하였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은 말에서 뿐 아니라, 그의 삶으로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참된 교육과 감화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위대한 분으로 각인(刻印)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과 생활이 일치하셨기 때문이다. 말과 행위가 다를 때, 문제가 생긴다.
4) 악령과 싸워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분명히 이 세상에 악령(惡靈)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주님은 이 악령이 주의 제자들 속에도 침투해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셨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라는 책망을 들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은혜가 넘치는 곳에 사단도 역사한다.
5) 성직자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세상의 지도자처럼 군림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꾼이 분명, 귀한 사람이고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권세자들처럼 군림하는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첩경이다.
2. 디모데 후서
디모데 후서는 전서의 내용들을 반복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그 중요성 때문에 되풀이 해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특별한 사명의 사람이다. 혈과육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진리를 분변하는 남다른 열정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직무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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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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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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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성도는 고난 가운데 살지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
목표 : 1. 믿음의 길은 고난의 길임을 인식시킨다.
2. 성도는 고난 중에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깨닫게 한다.
3. 고난은 그 자체로서는 부정적인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복이 되는 것을 알게 한다.
베드로 전서는 소망의 편지이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제사장직과 예언자직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 전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그 주제는 ‘고난이란 결코 요구(sought-찾다, 구한다)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요구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발견하는 것이다. 곧 “고난은 받으려고 찾아다닐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사는 데 있어서는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말이다.
1. 신앙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신앙생활은 초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어려운 일도 다 물러가고, 태평성대(太平聖代)가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앙한다는 이유로 세상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고, 따라서 고난의 길을 가게되는 경우가 더 많다. 죤 번연의 ‘천로역정’은 기독자들이 걸어가야 할 노정에 대해서 적절한 기술을 하고 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길을 가려고 하는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유는
1) 신앙의 길이 고난의 길인 것은 옛 사람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옛 생활의 굴레를 벗어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알 껍질을 깨트리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안정되고 뿌리 내린 삶의 자리를 벗어던진다는 것은 모험이요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이란,
(1)아담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있고 싶어하는 속성, 그래서 욕망의 노예처럼 살고자 하는 속성이 인간 속에 잠재해 있다.
(2)가인의 속성이 또한 옛 사람의 모습이다.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주관대로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서 드린 그의 예물을 받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자손심이 상했다는 이유에서 동생을 살해하고 말았다. 우리들에게 이런 옛 사람이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
(3)노아의 속성도 그렇다.그는 좋은 것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하게 되었고, 그 실수를 허물로 생각한 자식을 저주받게 만들었다.
(4)함과 같은 속성이 있어서 남의 수치를 숨겨주지 않고 세상에 퍼뜨린다.
(5)롯의 속성도 있어서 다른 사람은 생각지 않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
(6)에서의 속성, 사울의 속성, 다윗의 속성이 우리에게도 있다.
2) 신앙의 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종한다는 말은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다.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일이다. 신앙인에게도 같은 육정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일까? 그러나 매일 매일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3) 신앙의 길은 의의 고난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종류나 고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질병, 실패, 재해 등으로 인한 고난이 있다. 그러나 의를 위한 고난도 있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의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한다.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한 사람들이 맛보는 고난이다. 이것을 거룩한 고난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고난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난이다. 성도는 이런 고난에 참예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고통이 따른다.
4) 신앙의 길은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악마가 실재하고 역사하는 곳이다. 악마는 자기 모습을 천사로 가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악마는 우리를 염려해 주는 척 하지만 사실은 우리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시험이라는 것과 유혹이라는 말은 구별되어야 한다. 시험(시련)이란 보다 훌륭한 신앙을 위한 훈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혹은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술책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유혹하시지 않는다. 유혹은 마귀의 점유물이다. 성도는 이런 마귀적 도전에 극적으로 대결해야 한다.
“(엡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2. 따라서 성도는 당하는 시련속에서 오히려 즐거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다면, 고난은 의미있는 것이 된다. 무엇으로 고통을 기쁨이 되게 할 수 있는가? 바울 사도의 말을 빌리면 시련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영원한 삶에 대해서 소망을 더욱 든든히 가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의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있다는 말씀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3. 고난 속에서도 소망의 말씀은 교회의 용기와 힘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으며 그 소망으로 인하여 성도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소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
(행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롬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고후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후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살후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딤전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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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과∙ 골로새, 야고보, 베드로후서, 요한1·2서, 유다서 | |
거짓 교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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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초대교회는 주변 세계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기초가 흔들렸었다.
목표: 1. 헬라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였다는 것과,
2. 영지주의의 사설을 분명히 알게 할 것이다.
3. 거짓 가르침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출현한다는 것을 일깨워 줄 것이다.
이 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영지주의의 주된 주장은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영존하지 않으며 영은 선한 것이며 영원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천사숭배를 했고, 좋은 천사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나, 악한 천사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오늘의 영지주의는 모르몬교와 같은 것이다.
모르몬교-Momonism
1830년 4월 6일 미국 뉴욕주 세네카 페이예트에서 조셉 스미드(Joseph Smith)에 의해 창설된 기독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신흥종교이다. 정식 종파명칭은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인데 또 다른 계파인 ‘복원예수그리스도의 교회’라고도 한다. 현재의 세계본부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있고 교인수는 360만명(1970년초 통계)에 이르고, 그 중 80%가 미국에 있고 나머지는 라틴아메리카(특히 멕시코), 카나다, 유럽(특히 영국), 오세아니아(특히 뉴질랜드)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미미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복음이 유일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타나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사물에 계시한 사물의 질에서도 때때로 인간의 이성으로써 이 복음을 계시받을 수 있도록 경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기에는 유일한 복음의 최종계시가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을 뜻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조셉 스미드에게 나타난다고 믿는다. 신구약성경외에 모르몬經을 경전으로 삼는다.
이 서신들은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많이 반영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인 문제들을 안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회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보낸 서신들이 이런 상황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초대교회에는 오늘날처럼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거짓된 교훈의 목적은 분명한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 초대교회는 헬라문화권이라고 하는 바탕에 처해 있었다.
복음이 헬라문화권에 전파되었을 때 적지 않은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고서 모든 생각을 전개한다. 하나님이나 영원에 대한 질문도 언제나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경험을 기초로 삼았다. 문제는 교회 안에 이런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신앙을 철학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심각한 불일치점이 생긴다. 철학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자연히 차원과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적 사상에 기초한 이상한 주의 주장을 하게 되었다.
2. 영지주의는 대표적인 거짓 교훈을 가르쳤다.
영지주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영적 지식에 따라야 한다’는 사상인데, 이원론을 토대로한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상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 낮과 밤 등이 그렇다. 그런데 영적인 지식을 갖기만 하면 대립되어 있는 문제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다 벗겨내어 마침내 ‘至高의 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영적이면서 신비한 지식은 천사가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도 그런 천사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육신을 입었었지만 세례를 받는 순간에 육적인 것은 외적인 탈에 불과하게 되었고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40일을 금식했으나 배고프지 않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시 부활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상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이방 세계는 애초부터 이원론의 사상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적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단 사상이었다.
빛과 어두움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은 빛의 주인이시면서 동시에 어두움을 주장하시는 이시기도 하다. 물론 빛은 밝게 사물을 인식케 하고 활동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그러나 어두움은 인간에게 쉼을 준다는 의미에서 또한 유익한 것이다. 육을 죄악시 하고 영이나 정신만을 선하게 여기는 것도 비성경적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것인 것처럼 육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리만치 만드신 것이다. 다만 타락한 육체가 악하게 된 것이지 본질적으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인 것이다.
3. 골로새서
이 서신은 옥중서신 중의 하나이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로 이 서신은 이 교회로부터 질문을 받고 쓴 것이다. 그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는 유대주의의 영향에서 오는 것과, 이방인의 토속신앙에서 오는 두 가지였다. 금욕주의와 천사의 중보를 주장하는 천사숭배와 같은 것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이 잘못하고 있는 점을 명확하게 지작하였다. 곧 복음을 율법 아래 속박하는 잘못과, 기독교인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천사나 어떤 다른 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앙으로 거짓교훈에 대항할 것을 권면하였다.
<참고성경>
(골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4. 유다서
유다서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였는데 영만을 중시하고 육신을 무시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육신이 하는 일은 아무 가치없는 일이고, 육으로 범죄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해석함으로써 방종에 빠지게 되었다. 도둑질은 육신인 손이 저지른 것이지 영적으로는 순결하고 아름다웠다는 괴변으로 인간을 타락케 했다.
5. 요한 1, 2서
이 서신도 역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제정신을 차리도록 가르친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면서도 인성은 부정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야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완전하신 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6. 베드로 후서
베드로 후서는 유다서와 비슷하여 이 둘을 ‘쌍둥이 서신’이라고 한다.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일축하는 영지주의적 거짓교사들이 있었다. 베드로는 이런 자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하고 육체적인 부정과 무법주의에서 경건한 기독교인의 삶을 가질 것을 권면했다.
7. 야고보서
흔히 야고보서를 신약의 ‘잠언’이라고 한다. 이는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규범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생활화된 신앙에 있다. 참된 신앙에는 열매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열마가 없는 것은 그 신앙이 참되지 않은 증거라는 것이다. 신앙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서신의 배경은 기독교가 이미 형식화되어가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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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과∙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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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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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신앙은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목표: 1. 옛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인생은 가장 비극적인 존재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노래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3. 성화(Sanctification)에는 필요한 성장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4. 성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성장목표이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하는 전진은
①하나님을 향한 전진(수직적 전진)과
②인간을 향한 전진(수평적 전진)이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와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할 때는 없다. 이 과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는 참으로 유익한 공과이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하나님과 인간을 위하는 방향으로 전진시키시고 성화시켜 나아가신다는 것을 확신케 하기 때문이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자신의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변화되지 않는 성품, 생활태도에 대해서 불안감과 회의를 느낀다. 때로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을 보면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신앙을 가지는 순간에 사람이 한 번에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고민이다. 생의 목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나 자신이나 나의 주변 환경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런 옛 생활상태에 그대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믿음이 성숙해지기까지는 필요한 과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1. 냉소자의 마지막 일기장
신앙없이 세상을 산 사람들이 그들 앞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질 때의 그 절망감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그때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 일기장에 남길 수 있는 말은 ‘오, 나는 어리석게 살아왔구나!’, ‘헛된 인생이었구나!’ 하는 절망적인 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일기장에 그런 글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바울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2. 이런 슬픈 얘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이런 슬픈 얘기는 우리가 벌써부터 듣던 얘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동안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게으르면 굶는 날이 온다’는 말을 골백번씩 들었으면서도 베짱이처럼 굶주리는 그 날을 맞고야 마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철없는 인생이다. 이들은 마침내 쭉정이밖에 없는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다.
3. 그러나 새로운 길이 있다.
눈을 들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좀더 높은 세계를, 좀 더 깊은 세계를 향해서 눈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자신에 대해서 가장 심각한 절망을 느끼는 순간이 이런 높고 깊은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치 시편 121편의 기자처럼 인생을 축하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121: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시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4.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는 천상병이란 시인이 읊은 ‘귀천’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신앙인은 그의 삶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 인생이란 우연한 여행도 아니고, 허무한 꿈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섭리해 놓으시고 항상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멋진 기회들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이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한 조각의 구름과 하챦은 미풍에 감격하고 찬미를 불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인생을 노래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영원한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의 사람들이다. 보다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굳게 믿는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복된 삶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한다.
5. 충만함은 점진적으로 온다.
모든 것은 성장의 원리를 따른다. 이것이 보편적인 생명의 원리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만은 보편적인 성장의 원리가 해당되지 않고 특별한 것이 적용되리라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병든 신앙을 가지게 된다. 신앙의 충만함도 점진적으로 오는 것이다. 한 두 번의 체험으로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익은 곡식은 점점 머리를 숙여 겸손해 지는 것이다. 그 겸손함이 오만보다 얼마나 귀하고 존경스럽게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6. 성화의 과정
우리는 때로 특별한 종교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입신을 한다든지, 방언을 하게 된다든지... 사실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도 어떤 한 순간의 계기가 있어서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할이 항상 그런 특별한 체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간의 삶은 특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평법하고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삶이 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언제나 특별한 경험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성화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성숙될 시간이 필요하다. 성화란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가는 전과정(全過程)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덮어놓고 열광적으로 믿는 뜨거운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을 냉철하고 차분하게 헤아리며 자신에게 허락된 삶을 성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가장 성실한 자세인 것이다.
1) 생명이 자라는 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이다. 자연도 인생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이다.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2) 성장은 탄생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세우지 않은 채,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태어남이 없이 자라날 수는 없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출발이 없이는 성화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태어나지도 않고 자랄 수는 없다는 원리인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 성화는 있을 수 없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나야 한다.
3) 갈망이 있어야 한다.
성숙한 신앙, 거룩한 삶을 바라는 간절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이런 갈망은 구체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상고하는 일과, 성도의 교제와, 기도생활을 통해서 추구될 수 있다.
다시 설명하면,
①규칙적인 예배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상의 행동이다. 하나님께 최대의 존경과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행위가 예배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르기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래서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오늘의 예배의식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오늘의 교회가 전통적이고도 역사적인 예배의식을 무시하는 경향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②하나님 말씀의 상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이 없이 신앙이 온전하게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성경을 바로 보고 읽으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멧시지를 발견하고,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로 한다.
③성도의 교제--- 성숙한 신앙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건전한 교제를 통해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다른 모범적인 성도들과의 건실한 교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건전한 신앙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시련을 극복했는가를 배움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사람의 간증은 내게 유익한 것이 된다. 그의 체험은 내게 있어서도 소중한 체험과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④기도생활--- 기도는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요 대화이다. 일방적인 푸념이나 독백이 아니다.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구할 바를 알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열광적으로 기도한다 하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무당처럼 이기적인 기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드리는 기도는 매우 성경적이어야 한다. 신앙의 도리에 합당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는 자신의 사정과 요구와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수락(受諾)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7. 아멘 또 아멘.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전적으로 아멘으로 동의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따위의 말은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주님의 뜻이라면 그리하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인으로 하여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하는 비결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가장 내게 유익하고 적절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아멘, 아멘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 곧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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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과∙ 요한계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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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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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묵시는 다른 모든 성경 중에 가장 난해산 것으로 조심스런 해석이 필요하다.
목표: 1. 묵시서의 해석 방법을 잘 설명한다.
2. 묵시서의 중요 용어들을 잘 이해시킨다.
3. 묵시서 역시 그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해석해야 함을 이해시킨다.
4. 묵시서가 하나의 드라마로 편집되어 있다고 하는 견해에 따라서 이해시킨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설명은 아마도 7,777 가지의 설명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 대한 설명을 가한다면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본서는 신비의 책이다.
1. 묵시서의 해석 방법
묵시서를 해석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말세론적 해석 방법:
묵시서를 미래에 일어나게될 환상의 책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방법으로서 저자와 그 시대의 배경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방법이다. 이는 종말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초대기독교회의 기도문처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가 종말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사도신경과 같은 맥락에서 종말을 대망했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가진다.
2)역사적 해석 방법:
묵시서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말세론적 해석과 견해를 같이 하지만, 세상 끝날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로부터 재림 때까지 이 세상의 형편에 대해서도 말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묵시서의 한 페이지마다 그 시대의 비밀을 담고 있다고 본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을 이 시대의 사건들을 통해서 다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묵시서를 역사의 계산대(臺)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 방법은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였던 라셀과 같은 이단들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종말의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묵시서에서 종말의 시간표를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친다.
3)초역사적 해석 방법:
이는 말세론적 해석 방법이나 역사적 해서 방법에 반대하는 주장으로서 묵시서는 결코 역사의 끝날에 관한 기록만이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의 특정 부분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역사와는 무관한 무시간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묵시서를 통해서 일반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방법도 성경적인 충분한 의미가 있다.
4)과거적인 해석 방법:
앞에서 논한 모든 주장들을 보완하는 방법으로서, 묵시서는 세상 마지막에 대한 환상도 아니고, 무시간적인 일반원리를 이해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그 시대의 형편과 처지를 밝히는 것이라는 해석 방법이다. 역시 여기에도 성경적인 충분한 의미가 있다.
2. 요한 계시록의 중심 용어들
예수님에 대한 칭호= 어린양
장차 오실 자(재림주): 예수님을 장차 오실 자 곧 재림주라고 칭한다.
불세례: 심판의 방법을 말한다.
신랑: 어린 양 예수님을 말한다.
메시지: 하나님의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다.
천년왕국: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이 지상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하시는 세계를 말한다.
3. 요한 계시록 해석의 표본
존 윅 보우만(John Wick Bowman): The First Christian Drama(최초의 기독교 드라마)
참고 도서: 제임스 칼라스: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과 악마
▶일러두기
보우만은 ‘최초의 기독교 드라마’라는 저서에서 이르기를 계시록의 목적을 이해하는 열쇠가 그 책의 구조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는 계시록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쉽게 발각되지 않게 하는 드라마라고 하는 하나의 문학적형식 속에 하나님의 멧시지를 담은 것으로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보우만은 그의 저서에서 묵시문학의 특징인 상징성, 비관주의(悲觀主義), 익명성(匿名性), 서간형식을 종합해 볼 때, 그리고 박해시대에 신앙의 표현을 직설적(直說的)으로 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계시록은 드라마 형식을 빌려서 기록한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서두의 인사말(1:4-6)과 마감 부분의 축복문(22:21)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7막의 희곡 형식으로 기록된 드라마라 형식이라는 주장이다.
계시록은 서신과 드라마의 형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 서신 형식은 서두의 인사(1:4-6)과, 마감의 축복(22:21)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모두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우만은 계시록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7막의 희곡
1막: 자상 교회의 환상
2막: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환상
3막: 하나님 앞에 있는 천사의 환상
4막: 승리하는 교회의 환상
5막: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낸 일곱 천사의 환상
6장: 바벨론 타도의 환상
7장: 천년 교회의 환상
계시록의 기자는 이같은 드라마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성취될 것이라는 강한 신앙을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참고>
모든 헬라의 연극은 막으로 분류되는데 각막마다 중심되는 것이 있다. 이 중요한 요점은 무대 중앙부에서 공연되었다. 따라서 무대 중앙부에서 공연되는 것을 보변 주제를 알 수 있었다. 이 때 서술자는 무대 가에서 설명을 했고, 야외 극장에서 공연했다.
서술자는 무대의 막이 바뀔 때마다 설명했다. 무대에는 막(幕)이 없었고 막간 공연을 함으로써 그것으로 막의 역할을 하게 했다.
계시록의 드라마 형식과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
제목 (1:1-3)
서신 형식(1:4-6, 22:21)
계시록의 드라마
서두(1:7,8)
1막, 지상교회의 환상
교회 한 가운데 계신 인자(1:9-3:22) *무대 중앙
무대배경: 일곱 촛대(1:9-20)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2:1-3:22)
장면1. 정열(情熱)을 잃은 교회에 보내는 서신: 에베소 교회(2:1-7)
장면2. 박해받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 : 서머나 교회(2:8-11)
장면3. 견디어내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 : 버가모 교회(2:12-17)
장면4. 태협하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 : 두아디라 교회(2:18-28)
장면5. 죽은 교회에 보내는 서신 : 사데 교회(3:1-6)
장면6. 선교하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 : 빌라델비아 교회(3:7-13)
장면7. 오만한 교회에 보내는 서신 : 라오디게아 교회(3:14-22)
2막,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환상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4:1- 8:1) *무대 중앙
무대배경: 하나님의 보좌(4:1-8a) *피조물과 장로들의 합창(4:8b-11), 책과 어린양(5:1-7)
새 노래(5:8-14)
일곱 인을 떼다(6:1- 8:1)
장면1. 희 말을 탄자 : 정복(6:1,2)
장면2. 붉은 말을 탄자 : 내란(6:3,4)
장면3. 검은 말을 탄자 : 기근(6:5,6)
장면4. 청황색 말을 탄자 : 죽음(6:7,8)
장면5.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기도 : (6:9-11)
장면6. 종말론적 사건들 : (6:12-7:17)
1)우주적 대 환난 : (6:12-17)
2)순교자들을 인침 : (7:1-8)
3)하늘에 있는 순교자들 : (7:9-17)
장면7. 하늘의 침묵 : (8:1)
3막, 하나님 존전에 있는 일곱 천사의 환상 히브리인의 숫자의 의미:
7=완전,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는 뜻. 고난받는 기독교는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을 의미.
고난받는 교회(8:2-11:18) *무대 중앙
무대배경: 제단과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는 천사(8:2-6)
일곱 나팔의 울림(8:7-11:18)
장면1. 땅에 떨어지는 우박과 불 : (8:7)
장면2. 바다에 던지운 산 : (8:8,9)
장면3. 강과 샘에 떨어지는 큰 별 : (8:10,11)
장면4. 어두워진 천체들 : (8:12)
독수리가 세 가지 화를 알리다 : (8:13)
장면5. (첫째 화) 무저갱의 구멍 : 황충(9:1-12)
장면6. (둘째 화) 유브라데에서 네 천사를 놓아 줌 : (9:13-15)
이 만만의 마병대 : (9:16-21)
작은 책을 든 강한 천사 : (10:1-11)
‘이방인의 때’ 두 예언자들, 악한 도성(소돔, 애굽) : (11:1-14)
장면7. (세째 화) 하늘의 예배 : (11:15-18)
4막, 승리하는 교회의 환상
구원의 드라마(11:19, 14:20, 15:2-4) *무대 중앙
무대배경: 언약궤(11:19)
일곱 개의 야외극들(12:1-14:20, 15:2-4)
장면1. 여인과 용 : (12:1-18)
장면2. 바다에서 일어나는 짐승 : (13:1-10)
장면3. 육지에서 일어나는 짐승 : (13:11-18)
장면4. 144,000 순교자와 함께 있는 어린양 : (14:1-5)
장면5.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 : (14:6-13)
바벨론 멸망의 선언
장면6. 흰구름 위의 인자 : (14:14-20)
하나님의 분노의 포도주틀
장면7. 구원 받은 자가 부르는 어린양의 찬송 : (15:2-4)
제약(制約)된 권위에 대한 삽입구(揷入句)적인 예언 : (20:7-10)
5막, 하나님의 분노의 일곱 천사
괴로워하는 세상(15:1-5, 16:21) *무대 중앙
무대배경: ‘증거의 장막’이 있는 성소(15:1, 5-8, 16:1)
일곱 대접을 쏟음(16:2-21)
장면1. 땅에 내린 재앙 : 사람들의 헌데(16:2)
장면2. 바다에 내린 재앙 : 피(16:3)
장면3. 강들과 샘들에 내린 재앙 : 피(16:4-7)
장면4. 해에 내린 재앙 : 불태우는 해빛(16:8,9)
장면5. 짐승의 보좌에 내린 재앙 : 어두움(16:10,11)
장면6. 유브라데에 내린 재앙 : 강물이 마름(16:12-16)
아마겟돈에서 모임
장면7. 공기에 내린 재앙 : 황폐(16:17-21)
바벨론 파괴를 전함
6막, 바벨론 타도의 환상
심판의 드라마(17:1-20:3, 7-10) *무대 중앙
무대배경: 성소에서 나오는 일곱 재앙의 천사들 중의 하나(17:1,2)
일곱 재앙을 펼침(17:3- 20:3, 7-10)
장면1. 붉은 빛 짐승의 여인 : (17:3-5)
장면2. 여인과 함께 전쟁하는 짐승 : (17:6-18)
장면3. 최후의 우주적인 오라토리오 : (18:1- 19:10)
장면4. 흰말을 탄 하나님의 말씀 : (19:11-16)
장면5. 해에 서 있는 천사 : (19:12,18)
장면6. 아마겟돈의 싸움 : (19:19-21)
장면7. 무저갱에 던지운 사탄 : (20:1-3)
한정된 권한에 대한 삽입구적 예언(20:7-10)
7막, 천년교회의 환상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20:4-6, 20:11- 22:5) *무대 중앙
무대배경: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은 교회(20:4-6)
일곱겹으로 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20:11- 22:5)
장면1.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다 : (20:11)
장면2. 최후의 심판 : (20:12-15)
장면3. 새 하늘과 새 땅 : (21:1)
장면4. 새 예루살렘 : (21:2-8)
장면5.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며 척량하다: (21:9-21)
장면6. 도성을 빛나게 함 : (21:22-27)
하나님과 어린양의 찬란함
장면7. 도성이 생명의 근원이 됨 : (22:1-5)
강과 생명나무
최후적인 복음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가 오시리라는 최후적인 약속과 역사의 평원에 있는 이 극적인 복음의 실현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베델성경연구 시리즈 강의록 끝.
<참고>
도해(圖解)로 푼 천년왕국설: 여러 가지 천년왕국설을 간략하게 도해한 것이다.
1. <역사적 전천년설>
성도 부활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재림 휴거
↓ ↓혼인잔치 ↓흰보좌 심판
구약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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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 |
7년 대환난 |
천년왕국 |
신천 신지 |
↑아마겟돈전쟁 ↑곡과 마곡전쟁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 ↓ ↓ ↓흰보좌 심판
구약시대
|
신약시대 |
7년 대환난 |
천년왕국 |
신천 신지 |
3. <보수주의적 후천년설>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재림(성도의 부활)
↓ ↓
구약시대
|
신약시대 |
천년왕국 |
신천 신지 |
↑흰보좌 심판
4. <자유주의적 후천년설>
그리스도의 초림↓
구약시대
|
신약시대 |
하나님 나라 |
→ 하나님나라 건설시기 ← → 이 땅에 실현된 완전한
하나님 나라
5. <무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초림↓→ 천 년 왕 국 ←↓흰보좌 심판
구약시대
|
신약시대 |
7년 대환난 |
신천 신지 |
↑아마겟돈(곡과 마곡)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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