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R. 솔로몬, 영적치유의 핵심, 나침반,
(김우생역),1983, 7판- 1996,
< 제 1 강 >
[Hand To Happiness], 미국 내에서 수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 번역 과정에서 1장을 7장으로 바꾸었음.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장소로서 뿐 아니라,
옛 자아가 못박히고 장사 지내졌다가 새 생명 안에서 살리심을 받아, 그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장소이다.
기복이 심한 생활을 넘어서서 좀 더 깊이 있는 생활, 풍성한 삶, 승리와 이김의 생활은
완전한 순복에 있다.
십자가의 진리는 고난의 비밀을 풀어주는 해방의 열쇠이다.
바꾸어진 생명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의 진리.
Ⅰ장 영적치유는 여떻게 역사하는가?
1. 프로이드의 문제점
프로이드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존재, 본성, 인간성격의 내면구조 및 대인관계 등을 설명.
하나님과 대적되는 사이비 체계. 인간행동에 대한 그의 탐구와 이해는 유용하다.
결코 치료가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유용.
2. 몸, 혼, 영의 상호관계(원형 도표)
하나님의 조직체계, 인간의 총체적 행동전체를 설명하는데 도움.
「혼」은 우리의 자아의식 혹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매개체, 우리의 심리적 구조.
- 혼은 생각(지성)과, 감정(정서), 의지(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구조의 일면.
- 영은 직관(直觀), 양심(良心), 그리고 영교(靈交)의 기능을 갖는다.
「몸」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세계나 환경과 관계를 맺는 수단.
영, 혼, 몸은 상호영향을 주는 관계이다.
1. 구 원 (Salvation)
정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들어오시면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을 첫출발하는 데 불과하다.
프란시스 쉐퍼- 중생은 중요하지만 최소한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minimize)
(구원의) 방법: 성경이 우리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사실(우리가 경건치 못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성경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사실(주 예수께서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시며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 가셨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된다. (롬10:9,10) 하나님께서는 그의 틀림이 없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를 구원해 주신다.
2. 확 신(Asssurance)
구원의 확신은 변화하는 감정이 아닌, 성경의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느낌, 믿음, 사실의 순서로 생각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나타내 보이신 사실을 따르고,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은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실에 대한 믿음의 인도를 받는 느낌이 되게 하는 순서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있다.
3. 구원의 보장(Security)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영원한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안전성.
(갈 5:4) 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상태-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생활은 율법에 얽매어 있다.
구원의 보장을 견고히 하지 아니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성숙하지 못한다.
프란시스 쉐퍼- 구원의 순간 1) 성자와 결합(in christ), 2) 성부와 결합(부자관계), 3) 성령과 결합(내주)
4. 하나님의 영접(Acceptance)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심도 역시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구원을 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므로(고전1:30),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믿고 의지해야 한다.
< 제 2 강 >
5. 전적인 의탁(Total Commitment)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적인 단계
전적인 의탁이란 용어의 정의는, 로마서 12:1이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원, 확신, 보장, 영접은 우리의 하는 바가 아니다.
전적인 의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 우리의 영적 예배이다. 의지(意志)의 행사이다.
이 세상 어떠한 것보다도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의지적으로 시인하는 것.
하나님께 전적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적으로 순복되어야 한다.
전적인 순복은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쓰임을 받는 데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리스도께 순복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 10년이나 20년이 걸려서는 안되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날 동시에 그리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첫 단계는 우리의 자아(self)를 처리함으로써 개인적 관계를 맺는 일이다.
롬 12:1에서 보듯이 우리는 산제사로서 우리의 삶을 드린다. 이 산제사는 구약시대에 제단 위에 놓여진 양의 희생 제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군가가 그 양을 제단 위에 올려 놓으면, 양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양이 제단 위에 묶여 있으므로 그 양은 제사장에게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다.
양이 제사장에게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좋지만, 제발 내 목만은 자르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제사장이 하려고 마음먹은 바가 바로 그것이다! 양은 전적으로 제사장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양은 유보조건을 내걸 수 없다. 이 예화는 우리의 신실하신 대제사장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자아의 종말을 가져오기 원할 때 우리의 순복이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자아의 종말이 올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Union with Jesus Christ)의 진리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생활 속에는 계시지만 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거하실 경우가 있다.
비극적이지만, 이것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살아가기에 너무 바빠서 생활의 수레바퀴가 매우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윈심력에 의해 생활의 한 모퉁이로 밀려나는 일이 많다. 주님을 위해서(for Lord) 너무 바쁘게 일하는 바람에 주님과 함께(with Lord) 보낼 시간이 없는 사람도 역시 이와 같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 허락하시는 시험과 역경으로 인해서 이 생활의 수레바퀴 속도는 늦추어질 수 있다.
때로는 생활의 수레바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급히 정지하도록 허락하실 때도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을 향해서 움직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하면 다른 것이 중심이 된다.
즉 우리 생활의 원동력이 될 정도로 중요한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이 생활의 중심에 온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한마디로 자아 또는 육신(肉身)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자아는 개인의 독특한 특질인 심리적 자아(心理的 自我) 즉 지, 정,의로 이루어진 혼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혼은 그 자체가 중립적이며, 태도와 행동 및 가치를 결정하는 혼은 누가 지배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아가 생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이 생활을 지배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지배하시고, 우리의 영은 우리의 혼을 지배하고, 우리의 혼은 우리의 몸을 지배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통제사령부에 계셔야 한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심지어 전담 사역자들까지도 그들의 자아가 주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허드슨 테일러의 예, --- 허드슨 테일러의 자아와 그의 모든 자원이 마침내 종말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기까지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이후에 10년 내지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단 이렇게 되자, 허든슨 테일러는 하나님을 통하여(throuth God) 사역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허드슨 테일러의 영적 비결』이란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인 허드슨 테일러가 많은 것을 이룩했었지만 그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내어 맡기기 전에는 허드슨 테일러의 자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위해 증거하거나 생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아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기를 원하신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훈을 결코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 교훈은 오직 고난, 시험 그리고 괴로움과 고통을 통해서 드디어 자아가 처리될 때에 얻어진다. 그리되면 자아는 더 이상 우리 생활의 중심이 아니다. 이런 과정이 끝나기까지는 자아가 생활을 지배하며, 그 결과, 우리는 생활에 있어 더욱 무력해진다.
자아가 중심이 되어 있는 개인이 부딪치는 필요와 장애들.
1.「열등감(劣等感)」
2.「불안감(不安感)」
3.「부적당감(不適當感)」
4.「죄책감」- 1) 사실적인 죄의식 2) 상상적인 죄책감
5. 「염려, 근심, 걱정, 의심 그리고 두려움」 근본원인은 그릇된 믿음에 있다.
다섯가지 증세들은, 아직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하거나 의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원형도표에서 5가지 항목을 모두 빙 둘러 그 결과로서 「욕구불만」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주목해보라.
자아가 왕성히 살아있을 때 욕구불만이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적개심」이란 결과가 튀어 나온다.
정신적으로 이상 현상들은 정신의 병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영적 문제-생활의 중심에 있는 자아-의 정신적 증세들이다.
증세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치료가 되지 못한다. 치료하려면 아마도 평생동안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갈등에서 유래하는 질환들- 발진, 관절염, 천식, 두드러기, 급성복통, 동계, 호흡장애, 전환히스테리.
정서적 갈등이 신체적 증세로 전환될 때 생길 수 있는 증세들이다.
한 의학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모든 병자의 60 ~ 80 %는 정서적,정신적 갈등에서 비롯된 심인성질환에 걸려 있다고 한다.
누구든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생활 가운데 가지고 있다면 정서적 갈등을 겪을 리 없다.
궁극적으로 이같은 신체적 혹은 심인성증세들은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 제 3 강 >
전적의탁의 정리
1.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려면
정서적, 정신적 갈등들이 진전되고 계속 악화하는 근본원인은 자아(self)가 아직도 생활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에서는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자아를 강화시킨다. -심리치료의 근본적인 문제점.
하나님께서 자아를 처리하시는 방법은 자아의 지배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자아를 점점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everything)이 되려면 자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이 되신다.
2. 그리스도께서 생활중심에 계시면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면 자아 즉 육신은 더 이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독특한 자아 즉 개인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바울은 바울)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에 있으면 즉 그리스도께서 생활을 주관하시면, 빌 2:5 의 말씀과 같이 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 즉 태도를 갖게 된다.
빌 4:13 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에 있으면 그가 온전히 자유롭게 생활을 주관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정서적인 필요까지 포함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있으면, 외부로부터 스트레스가 생길 때에도 중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해서 적개심으로써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사랑과 이해, 연민으로써 반응한다.
심적인 갈등을 일으켰던 원인들인 정신적, 정서적 증세들이 생활 속에서 사라지고 나면, 정신적 갈등에서 유래한 신체의 심인성 증세들도 사라진다. --- 필자의 상담경험으로는 긴장성 두통이나 신경성 위장장애 등 스트레스에 원인이 있는 여러 통증들이 즉시 치유되는 일을 수 없이 목도하였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생활습관이 되면 점진적이든 극적이든 간에 이런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
3. 그리스도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방법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존재 안에 있게 된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주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미래에 뿐 아니라 과거에까지 걸쳐있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새 생명은 아담으로 향하는 우리의 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로(그리고 그 이전 영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보리는 영원 속의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영원토록 - 미래에 영원토록 그리고 과거에 영원토록 -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관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뿐 아니라 장사지낸 바 되었을 때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사 하늘로 오르셨을 때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이것은 롬 6:4~6과 골 3:1~3의 말씀에서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 수준의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엡 2:5,6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바로 오른 편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엡 1:4 은 우리의 아득한 과거를 돌아보게끔 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러한 영속적인 관계는 미래에 있어서 뿐 아니라 과거에 있어서도 역시 사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이 되시는 진리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믿음을 구사하여 체험해야 한다.
지위상으로 이미 우리의 몫이 된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받을 때 이미 주어지는 축복이지만,
우리는 성경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충만함, 성령충만한 생활, 풍성한 삶, 혹은 변치 않는 생명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4. 먼저 우리의 자아와 모든 자원(資源)이 종말에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우리는 이제 이것을 사실로 여기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고 역사하시도록 주께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다.
5. 여김(reckoning).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실을 믿고 의지함은 선택의 행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해당된다고 일러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끔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던 구원체험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번 의지적 결단에 의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 들이는 의지의 행사에 반응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소생시켰듯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반응해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신다.(롬12:2)
이때에 감정이 사실(fact)과 일치하지 않는 수가 있는데, 그때는 의지(will)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상, 육신 그리고 사탄에 맞서기로 결심해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며”(롬 8:4),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요15:5) 생각과 감정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끔 선택하는 일인 것이다.
6. 동일시 인식의 체험
이 동일시 인식은 시간과 체험 속의 어느 한 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 과정이 너무도 점진적일 경우가 있으며 우리에게 그 시점을 알아챌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확실해서, 자아는 왕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리스도께서 지배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생활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간다.
7. 전적인 순복- 능동적인 삶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 가운데로 초대해서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의 생활을 사시도록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동적인 삶이 아니며, 그의 역사하심에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순복하는 능동적인 삶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애쓴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through us) 생활할 수 없다.
자아가 처리되기 전에는, 자아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심지어 그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일까지 계속할 것이며 그분을 위해 노력과 금전을 허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은 아니며,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자아를 얽어매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순복을 통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역사하시기 전까지는 우리의 사역을 번창케 하거나 풍성하게 축복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롬 8;29) 그분의 뜻이요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면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의 생명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침돌 없이 자유롭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려면,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생활의 중심이 되시도록 당신의 생활의 수레바퀴를 멈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조건적으로 순복할 때, 그 순간부터 생활과 영적 성숙과정을 관리할 책임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로 넘겨진다. 자아의 종말의 방법과 시간은 개개인의 삶에서 각기 다를 것이다.
< 제 4 강 >
2장 영적성숙의 진정한 의미
1.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체로서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몇년, 심지어 평생동안을 영적인 유아기나 사춘기의 상태로 보내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2. 도표 12의 수평선- 육에 속한 사람 즉 죄인된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은 출생시의 영적 상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1) 두 가지 다른 개념이 있다. 지위와 상태가 그것이다. 10세에서 시작된 수직의 점선은 도표 상단의 성숙 최대치까지 이르러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시」(순간적이며 영원한 시간)에 우리를 온전하고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롬 8:2)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롬 6:11) 여기신다.
우리의 위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고전 1:30),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엡 2:6) 앉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지위는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상태에 굴곡이 있을 수 있다.
2) 도표 12의 ①번 선- 시간이 흘러도 상태에 긍정적인 변화가 거의 없다. 이것은 충분한 영적 양식을 취하지 못하여 ‘영적 영양 실조’로 고통 받으며 생활하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벧전 2:2). 영적 탄생을 통해서 생명으로 옮기워졌으나,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롬 8:29) 성장 과정이 따르지 못했다.
3) ②번선은 흔히 볼 수 있는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 구원을 체험한 10대 이후부터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부모가 되어 자녀를 교회에 데리고 가는 책임을 갖게 될 때까지 성장을 계속한다. 자녀가 자라는 동안 교회 활동과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자녀가 출가할 때 즈음에 영적으로 소극적이 되고 영적 상태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수년간 영적 성장이 전혀 혹은 거의 없는 기간이 있다.--- 말년에 이르러 영적 생활을 분발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4) ③ 번과 ④ 번선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인 의탁을 하였거나 완전히 헌신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
③ 번선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관여해서 정규적인 활동으로 꽉 차 있는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밤낮을 가리지않고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평신도나 사역자들 가운데는 이런 유형이 많다.
패배, 재정비, 방황, 다시 봉사, 다소 상승, 끝내는 후퇴의 과정을 걷는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대부분의 성과가 진지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아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온 힘을 모아 다시 한번 당당하게 시도한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평신도는 교회를 떠나고 사역자는 사역을 그만두게 된다.
그의 자아(self)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때대로 축복하시고 사용하시지만, 그는 결코 영적 성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한다. 이 경우에는 많은 패배 속에서도 때에 따라 다소의 달콤한 승리가 있지만, 꾸준한 성장의 신앙생활이라기 보다는 실패로 얼룩진 생활인 것이다.
5) ④ 번선은 영적 성인으로 성숙하는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 그 역시 ③ 번의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그러나 봉사보다는 자신의 영적 성장,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할 것(doing)인가”보다는 “어떤 사람이 될 것(being)인가”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결과 ③ 번의 사람보다는 강건해 보이지 못하나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다. 그는 수년 동안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지만 그에게도 역시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다. 때때로 모든 것이 후퇴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닥쳐온다. 이런 것은 건강강의 문제나 혹은 정신적인 증세로 닥쳐 오기도 하며, 자녀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올 수도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자원(資源)을 고갈(枯渴)시키고 자아를 종말에 이르게 만든다. 완전히 연약해지기까지 그는 자아의 노력으로 계속 애쓰기 때문에, 영적상태는 느리나마 계속 상승한다. 의지할 곳 없어서 두 손 들고 주 앞에 나아오게 될 때에 비로소 그는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한다. 이것은 도표에서 40세 때의 수직선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나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동일시함 즉 풍성한 삶으로 들어서는 평균연령이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해야 비로소 그리스도와 동일시함(identification with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체로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원을 고갈시키기 위해 말씀 가운데서 빛을 비춰주시면서 역경과 고난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아는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한다는 진리가 깊고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때로는 구원 받을 때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을 체험하고 나면, 예수께서 각 개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즉 과거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이끌어 가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자아가 살짝 다시 끼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림에서 선이 정상에 이른 후에 하강하는 것이 이것을 나타낸다. 사탄의 주된 공격목표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사탄은 항상 우리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공격한다.
다시 자아가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처음 구원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방법이다.(롬 6:11) 이 방법은 단 한번으로 계속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을 매일 그리고 항상 십자가 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4. 눅 9:23에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자아/himself)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을 바울은 고전 4:11에서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표현하였다. 또 육신에 관한 한 십자가란 죽음과 넘기움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오직 그스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
구원받은 후에 계속적인 죄의 자백을 통하여 죄 용서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의 생활을 회복하려면 그때 그때 자아로 살았음을 자백하면서 예수를 위해 항상 죽음에 넘기워져야한다.
5. 승리는 자아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주 예수께서 생활을 지배할 때 영적 상태는 상승하며, 자아가 지배할 때 영적 상태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처음부터 자아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생활의 지배권이 몇 번이고 오가고 난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보다 지속적으로 그의 생활을 사시게끔 우리의 의지를 행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평생을 통해 배우는 체험이지만, 점차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도록 맡기는 것이 보다 초자연적으로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빌 1:6 에서 이것을 약속하셨다.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숙 자체라기보다는 영적으로 성인됨을 의미한다. -- 상승과 하강의 기복으로 엮어지는 성장의 고통을 겪으면서 영적인 성숙기에 도달한다. 상승과 하강의 기복은 영적 성숙에 따르는 성장의 고통인 것이다.
멈추지 말고 계속 성장하라! 당신의 생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이 당신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전부임을 시인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뜻하신 바대로 당신을 온전히 이루어 주시리라.
< 제 5 강 >
3장 삶이 광야 같을 때
1.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여러 단계들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다.(도표 1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생활(가나안)을 약속해 주신다.
광야는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포함해서 애굽에서 온 모든 히브리 성인들이 죽음에 묻혀버린 방황의 장소이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으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비교적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만이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승리의 생활에 다달을 수 있다.
홍해는 구원을 상징하며, 요단강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을 상징한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분명히 기적이듯이, 구원의 때에 인간의 심령이 변화되는 일은 은혜의 기적(miracle of grace)이다.
또한 요단강이 갈라진 것이 기적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광야의 방황에서 자유케 되어 주님 안에서 자유함과 승리의 생활을 누리게 되는 일은 계시의 기적(miracle of revelation)-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주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셔서 실체가 되게 하심-이다.
요단강을 건넘 즉 십자가를 체험함에 앞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 준비과정이 시작될 때,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의 목적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하며 낙망한다.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과정"(빌 3:10)을 인내하며 견뎌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려 든다.
2. 도표 13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한 항목씩 살펴 보면서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영적 여행을 출발해 보자!
1) 우리가 애굽에서 태어날 때 우리의 전 존재는 애굽에 있다. 이것이 각개인의 출발점이다. 그후 우리가 홍해를 건널 때 즉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애굽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건너편을 뒤돌아보면서 애굽에서 즐기던 부추와 마늘을 그리워하며 모세를 괴롭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행하던 것과 똑같은 행동과 생각을 계속한다. 그리스도보다 자아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일단 요단강을 건너면 혹은 십자가를 체험하면, 자아는 물러간다.
일단 이렇게 얻어진 터전은 계속적인 여김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성장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2) 애굽에서의 시간은 사탄이 아비되고 우리가 종이 되어 사탄의 굴레에 매어 있던 기간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자아의 굴레에 매어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노라". 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자아와 자아가 지배하는 생활이 두렵게 여겨졌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바울은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이다!
십자가의 고통에 기꺼이 순복하기만 하면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등불을 밝혀 그의 말씀과 우리의 심령에 비추어 주시지 않으면, 그 때까지 우리는 "죽기까지 복종하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우리의 자아가 이런 방법으로 처리되면, 우리는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예속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함이다.
3) 애굽에서의 생활은 죄로 특징지을 수 있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자아 즉 육신의 지배를 받는, 정욕의 기간이다.
‘주님을 위해’헌신적으로 일하고는 있지만, 아직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한 사역자의 경우에도,
자아가 지배하며 육신적일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성숙의 기간-영적 유아기 내지는 영적 사춘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승리와 능력의 생활은 하나님의 자녀 모두를 위해 예비된 은혜이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에 앞서 십자가에 못박힘이 있어야만 하는데, 단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기꺼이 이 십자가의 고난에 순종하려한다. 비록 우리 육신(자아)의 죽음은 구원 받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진 사실이지만, 불안한 기간을 겪고난 후에 비로소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4) 애굽에 있는 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는 죄에 대한 찔림을 주시는 일이다. 한편 주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의 역사는 훈계하며 가르쳐 주시는 일이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는 “징계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히 12:11에서“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였다. 성령의 훈계하시는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남을 체험하고 성령의 지배를 누리게 된다. 자아와 자아의 지배가 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5) 우리가 애굽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판자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다. 광야생활 동안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Savior)가 되신다.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신다. 전적인 의탁은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단이다
이 조건 없는 순복이 우리의 영적예배(롬 12:1)이며,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서 주 예수를 우리의 진정한 생명(Life)으로 알게 되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 1:12)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계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실체가 된다.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리스도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5,16).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to us) 나타내어지지만, 이제는 우리 속에(in us)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
고후 4:11, "---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자아가 제거되어야 한다.
바울은 갈 4:19에서 이것을 달리 표현하였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지 않으려는 자아가 처리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없다. 필요와 그 해결책이 모두 성령의 계시에 의해 생겨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높아지셔야 하고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우리가 낮아져서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될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everything) 즉 우리의 참된 생명이 되실 수 있다.
6) 세 시기에 일어나는 사탄의 역사. 애굽에 있을 때는 전적으로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
광야에 있는 동안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탄과 함께 공존한다. 사탄이 우리를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는데 아직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작업을 훌륭히 수행하기 때문에, 이때 사탄은 그저 뒤에 물러 앉아서 속삭인다. “자아야! 자, 힘을 내라구!”
가나안에서의 기간은 이와 전혀 다르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직접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주님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며 이미 패배한 원수이다. 가나안에서도 싸움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분은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오직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항상 승리가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전 2:14)
3. 도표13에서 광야생황의 아래쪽에 "내가 그리스도를 알려하여"라고 시작하는 빌립보서3장10절의 말씀이 있다. 그 다음 부분의 구절은 체험의 순서에 맞추어서 일부러 순서를 바꿔 놓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은 십자가를 체험할 때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탁하면, 십자가 앞으로 이끌려가는 지극히 중요한 과정이 시작된다. 우리의 생활 속에 이런 십자가의 역사가 있은 후에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다.
엡 1:19,20에 따르면, 우리가 “능력의 심히 큰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고후 4:7)을 절대적인 사실로 인정할 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순복할 때에만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 능력을 허비하거나 육신의 졍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오직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계명
-특히 그에 앞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려 든다.
우리가 충분히 새로운 생활을 이룩하여,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나누게 되려면,
일반적으로 상당한 시간과 성경공부가 요구된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면서 그와 십자가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기초를 다지려면 적어도 1년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사람을 요단강으로 인도하고 그가 십자가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갈 때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을 배우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는 스스로 요단강 물이 갈라지기 전에 믿음의 발걸음을 강물로 내 딛어야 한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죄인이며, 자아(육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아인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육신에는 신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세상과 육신, 사탄을 이기고 다시 살았다는, 성경적인 해결방법에 동의해야 한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며, 자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 제 6 강 >
4장 지식적으로 이해하면 그 후에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이 지식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해하지만, "어떻게 나의 생활 속에서 실재가 될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누구나 이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이나 무디 선생, 허드슨 테일러 같은 소수의 선택받은 성도들이나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돼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예비된 것이다 !
그것은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체험할 때 풍성한 삶이 그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지,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주님께 굴욕과 고난, 수치와 고독의 장소였다.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결코 우리가 그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건져주심을 갈망한다면, 첫째로는 주님께, 그리고 나서는 집중적인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기꺼이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 건지심의 첫 걸음이므로,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성장에 대하여 공부해야 한다.
먼저 구속의 방법을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위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계속한다. 이렇듯 공부하면서, 그러한 것으로 여길 때,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 체험 속에서 실체가 되게 하신다.
우리의 할 일은 단지 성경을 공부하며 그분을 바라보는 것 뿐이며 우리 안에서 주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실 분은 성령이시다.
1. 전적인 의탁 후의 문제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 odf Christ) 즉 전적인 의탁은 그리스도인 체험의 축도이다. 영적 성장의 진전과 그 결과인 정서적 증세로부터 건져주심은 전적인 순복에 달려있다. 전적인 순복 그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조건없는 순복- 친구, 가족, 직장, 장래성, 재산 등을 포함하는-을 의미한다. 즉 완전한 순복에는 현재 자기의 전 존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것, 나아가 미래에 그리될 어떤 존재까지 모두를 포기하고 드리는 것이 포함된다. 자아가 진정 죽었다면 진정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 것이다.
순복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자아를 십자가로 이끌어 가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명심해야 될 점은, 전적인 의탁은 의지의 행사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감정은 이에 저항할 것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의지를 행사하여 그것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의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의 방법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한다.(시37:5)
일반적으로, 상담의 시작과 그에 따른 순복 후에 피상담자의 상태는 실제로 더욱 나빠진다. 이것은 오히려 논리에 맞는데,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 되시기 위해서는 먼저 낮추심의 과정을 통해서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낮추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자신의 상태가 더욱 나빠졌는가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에 이르는 길은 내리막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난의 참 뜻을 이해할 때“고난에 참예함”(빌3:10)을 감사히 여길 수 있다.
전적으로 순복하면 십자가를 체험하기까지 걸릴 시간의 길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히12:11)에 대해 무감각하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더디어 질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격어보지 않으면 고난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다(고후 1:3,4). 우리의 고난은 미래에 주님으로부터 사용되기 위한 배움과 훈련의 기간이다. 우리는 명도공(名陶工)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의 형상을 따라 더욱 온전하게 빚으시는 빚으심의 단계가 꼭 필요한 것인가를 의심할 때가 너무도 많다.
순복과 관련하여 또 하나 명심할 점은 그것이 범위에 있어서는 전 생활 영역에 걸친 것이지만, 실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한조목 한조목씩 실행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뭉치 채로 헌신했지만,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뭉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처리하셔야 한다. 헌신한 후에도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이것 저것을 움켜 잡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그 손을 부드럽게 펴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완고하면 하나님께서는 좀 더 강력한 수단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이는 신실한 분이시다(살전5:24!). 우리는 십자가로 이끌려 오면서 길 가에 있는 모든 것을 부여잡고 있는 격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극하신 사랑 안에서 우리의 첫 순복을 기억하시며 계속적으로 우리 삶 가운데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시37:5). 이 사실을 아니까 얼마나 평안한가!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저항하고 순복을 저버리며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신실히 이루시리라(빌1:6).
2. 병적인 자기반성
많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거의 모든 신경증 환자들은 예외없이 자기 내부를 살피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기 내부를 살피면 살필수록 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시 139:23,24을 보면, 살피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아무리 자신의 내부를 탐색해 봤자 기껏해야 허접쓰레기더미를 발견할 뿐이며, 그는 여전히 그 모든 쓰레기의 근원인 자아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항상 죄를 미워하셔서 그 죄를 그리스도의 피 아래 두심으로 소멸하기를 원하신다. 자아-육신도 역시 그의 미워하시는 대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자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하실 일을 흉내내는 일이야 말로 불을 보듯 너무나 확실한 실패의 길이다.
3. 영적 현기증
"신경증이란 실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감정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감정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스스로 감정을 바꾸어 보려고 애쓴다면 헛된 자아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서 체험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감정을 변화시키신다. 물론 모든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틀림없는 계기(計器)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그에 반응하여 먼저,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임을 깨달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의지로써 그의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 감정적으로는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며 우리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을 통해 영광 받으시며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딤후 2:13). 우리가 꾸준하게 계속해서 의지로서 감정을 거부하고 우리의 틀림없는 계기(計器)를 신뢰하고자 하면, 감정은 점차 사실과 일치하기 시작한다. 이리하면 이제는 더 이상 신경증 혹은 노이로제 환자가 아니며, 감정은 사실에 대한 믿음과 일치한다.
4. 영적 수술
우리의 겪고 있는 고난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영적 수술의 필요성을 지적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벌 주실 목적으로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이전보다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훈계와 연단의 목적으로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영적 수술을 준비하실 때, 패배와 실패 그리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연약함에 이르게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우리가 수술대 위에서 하나님을 ‘돕기’위해 꿈틀거리는 꼴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돕고자 하는 일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자아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술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원해서 그분을 도우려드는 것이 보통이다. 몸을 수술할 때 의사가 메스를 사용하듯이, 영혼을 수술해서 문제의 근원인 자아를 제거하려면 십자가를 사용해야 한다.
거룩한 외과의사 되신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여 자아가 지배하기 이전의 생활방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아의 생명 대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특권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수술 후에는 언제나 회복기가 있다. 그러나 이 기간이 평온한 상승과정일 경우란 매우 드물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함에 따라 상승과 하강의 기복이 있는 경우가 정상적이다. 때로는 패배와 좌절로 인해서 옛생활로 되돌아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직 십자가의 수술로 돌아가는 일만이 필요하다(눅 9:23/고후 4:11)
5. 고난의 참다운 뜻
의미없는 고난이야 말로 최대의 고통이다. 신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정신적 고뇌는 잔인하리만치 참기 어렵다. 고난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절망과 패배와 좌절의 원인이 되며, 때로는 원망, 쓴뿌리, 증오심, 억압감 등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렌즈를 끼움으로써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 고난의 참다운 목적을 보게 되면,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고난을 바라볼 수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을 몇 년 동안 겪다가 이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빌 1:29)으로 인정할 때 , 그 고난이 진정으로 특권임을 깨닫는다.
6. 죽음의 일격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힘에 따라 고통은 점점 심해진다. 그러면 자아가 십자가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가 온 것임에 틀림없다.
자아가 종말에 가까워지면 많은 조짐이 보인다. 종말 바로 전에는 보통 몹시 불안한 기간이 있다. 육체적 죽음에서와 같이, 때로는 자아가 고통없이 돌연히 죽을 때도 있지만 생명이 육체를 떠날 때는 단말마의 고통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지금 자아가 십자가로 이끌려지고 있음을 깨닫더라도, 실제로 그는 길가의 모든 것을 부여잡고 버티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끌어당기셔야 할 실정이다.
우리가 이미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렸다 하더라도 제사가 끝마쳐질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안식에 대한 우리의 청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칠 때에도 혹독한 고통을 덜어주십사 하는 간청을 외면하셔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완전히 체험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실 수 없고 덜어주셔서도 안된다. 주 예수는 죽기까지 고통을 받으셨으며, 그러한 고통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부활의 생명을 누리셨다.
우리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이 있기에 앞서서, 반드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딤후 2:12에서, “우리가 먼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보장되어있다. 십자가를 피해서 돌아갈 수 없으며, 더욱이 고통없이 십자가를 체험하거나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을 수 없다. 또 십자가의 신학이 우리 인생에서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점에서 죄에 대한 대가는 확실한 것이지만, 그의 승리와 능력이 우리 것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곡식의 낱알의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풍성히 열매 맺으며 나타내려면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들어서야만 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눅 9;24)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의 자원들은 완전히 종말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는 중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어려운 시련을 헤쳐 나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에겐 깊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벌주시기를 즐긴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자아가 종말에 다다르게 됨에 따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음 속에서 들끓게 된다.
우리는 이런 고통과 굴욕을 두려워하여 이로부터 자신을 구해내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방법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두려워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진리에 도달해 있다. 그렇다. 죽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에는 우리 믿음이 너무 약해서 하나님조차도 우리의 삶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자살 감정은 전혀 이상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고 십자가에 머물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두셨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서 그리고 삶 가운데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면 더욱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믿음은 점차 약해진다. 때로는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인 힘까지 쇠약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를 완성하시기까지 우리의 자아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지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니라”(딤후 2:13)
7. 새로운 삶
십자가에 못박히는 체험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전진적이든 급격하였든간에, 자유함이 있는 변화된 생활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 생명이 실체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이 다시금 자신을 깨닫고 여러 상황에 반응하여 무엇을 할지를 알게 되는 때는 보통 6-7개월에서 일년의 기간이 걸린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지금 나 자신을 통 모르겟다"고 말한다. 비록 성장의 단계를 잃지는 않겠지만, 자아가 다시 생활을 지배하면 승리나 즐거움은 사라질 것이다.
갈 2:20을 암송하며 주장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매일 아침 끊임없이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내실 것을 믿을 수 있다. 여기에는 언제나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원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빌 1:6)
하루에도 몇번씩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시리라”고 묵상하는 것이 좋다. 단지 그날 하루 하루, 나아가 우리의 전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지배하셔서 스스로 영광받으신다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여야 한다. 의탁, 신뢰, 여김, 이 모든 것이 의지의 행사를 의미한다.
자아의 재도전과 역경의 공격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분별력을 얻으면서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는 처음 몇주간 동안은 일반적으로 상승 보다는 하락을 더 많이 경험한다.
안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실 것을 신뢰할 때(롬 8:28),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다는 흥분 때문에 새로운 탐험을 하는 기분으로 매일의 생활을 살게 될 것이다.
<제 7 강 >
5장 영적치유는 실제로 역사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상담방법에 대한 증명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할 일이다. 과연 목표가 성취되었는가? 어떤 사람의 생활이 변화되었는가? 영적치유의 목표는 단순히 행동이나 태도의 긍정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삶을 말한다. 그러한 변화는 일어날 수 있고 또한 확실히 일어나고 있다. 영적 치유는 심리치료와는 그 목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어렵다. 추정 성공률은 60-80%에 이른다. 거의 모든 경우에 상당히 호전되었다.
최초의 상담은 탐색을 위한 것이다. 이때 피상담자는 앞으로 완전한 생활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임을 배운다.
심리치료에서 보면 ‘성공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호전되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치유에서는 호전됨에 만족하지 않으며, 개개인이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들의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향상되어감에 따라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상담의 결과로 건짐을 받는다. 일단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아직 자아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할지라도 상당한 나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이 되기 전까지는 심리적인 증세로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은 영원한 나음을 얻을 수 없다.
심리적 증세라는 것은 자아의 작용이다. 따라서 자아가 다시 지배할 수 있게끔 여건이 허락하면 약하기는 하지만 증세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 생활의 중심이 되셨기 때문이다. 자아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그리스도께서 생활을 주관하시지만, 자아가 다시 지배하게 되면 우리가 이를 제어할 수 없다.
과연 견져주심을 체험한 이들이 이를 지속하고 있는가? 자아 중심적인 생활로 후퇴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이전에 비할 수 없는 크나 큰 심리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같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성경공부하도록 삶을 훈련시키기를 원치 않거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선택에 따라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의 자원들을 꾸준히 믿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는 분들이다. 성경공부는, 성령으로 자유케 되는 열쇠이며, 그 자유함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성경공부는 중요한 관건이다. 첫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피상담자들은 누구나 테일러-존슨 기질분석을 받는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한번 더 검사를 한다면, 통계적 중요성을 지닌 분명하고도 객관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6장 최고의 상담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뵈라.
영적치유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역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역에 쓰이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지만, 그러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살전 5:24에서 간략하고도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저가 또한 이루시리라.”
필자의 경우 준비가 부르심보다 앞서 있었다. 사역을 감당하기 이전에 고난과 괴로움으로 어려진 인생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고의 상담자되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영적치유의 시행과정에서 사용되질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본 상담자를 처리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유 에스 에이 에프(USAF)에서 매우 귀중한 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고난과 연단의 풀무 대학(University of Suffering & Affliction Furnace/사 48:10)을 의미하는 첫 머리 글자이다.
상담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through us) 하시기 원하는 일을 먼저 우리 안에서(in us)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그분께서 스스로 역사하시기 위해 필자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낮추셔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셔서, 필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감당할 수 있도록 허락하심으로“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맛볼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빌 3:10) 상담자를 다루시는 최고의 상담자로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사역을 시작케 만드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담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함이니라”(고후 5:11)가 되어야 한다.
참다운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서 그러하듯이 상담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치료자가 되시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능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는 것이라”고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스가랴 4:6) 영적치유에 있어서 상담자는 치료자가 아니라 영적인 안내자로서 섬긴다. 상담자는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로 인도하는 이런 특별한 사역에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체험한 만큼의 영적 깊이까지 밖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
이 사역을 하려면 자신이 치료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성령께서 피상담자의 생활 가운데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시도록 기꺼이 의탁하는 일이 요구된다. 상담자는 성령께서 상담자 안에서 그리고 상담자를 통해서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아가 항상 십자가에 넘기워져 있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와 상담자 자신이 행할 때를 분별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상담자는 자신을 순복하면서, 피상담자 각인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기름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개인의 마음 속의 갈등을 처리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를 맺고있는 사람들의 자아중심적 생활에 있는 것이다. 피상담자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는 문제가 괴로와서 찾아온다. 이런 대인관계의 문제들은 그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만드는 동기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서 체험하면, 대인관계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한다.
우리는 몸, 혼, 영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인간이 겪는 신체적, 심리적, 영적 문제들을 가능한 한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이 에프 아이의 상담자는 근원을 이해할 목적으로는 심리적 증세에 관해 토론하기를 거절하지 않으나, 심리치료를 사용하는 일은 절대로 거절한다. 심리적 증세가 어떤 성질의 것이든 간에 그것이 본질상 기질적인 것이 아닌 기능적인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이면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보통 첫번째 상담에서는 피상담자와 친교를 맺으며, 또한 상담자가 그의 현재 문제와 정서상태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것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대다수의 경우에는 첫 상담의 반으로도 충분하다. 이때에 상담자는 이 책에 설명된 바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책을 나눌 기회를 갖는다. 과정의 반은 상담이고 반은 가르침을 준다. 가르치는 순서는 각 개인에 대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각기 다르다. 상담자란 그때 그때의 독특한 형편에 따라 적절히 쓰이는, 성령 손에 들려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상담의 상황에서는, 겪고 있는 패배의식이나 혼란을 없애기 위해 피상담자 자신이 할 수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결코 당신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애쓰지 말라.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자살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당신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이같은 자아의 노력으로써 살거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아니다.
갈 3:3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으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자유케 하리라”(요8:32)“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자녀들 하나 하나가 모두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돕기(help) 원하시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견져 주시기(deliver)를 갈망하고 계시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옥안에서의 도움이 아니라 옥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이다! 다윗은 시편 142:7에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라고 하였다. 당신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중에,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기했다면, 이제 당신은 시 50:14,15의 약속을 담대히 주장할 수 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자아와 자아로부터 퍼져 나오는 불행에서 당신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뜻은 당신을 기쁨에 넘치고 안락하게 만들기 위한 것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다음과 같은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당신은 또한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 이 비밀의 영광이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또 이렇게 표현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원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도록 도전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자아의 종말로 가는 길
내 죄를 씻으려/ 예수께로 나아올 때(요3:3)
주님 내 안에 오심으로/ 내 마음은 평안에 거하네(고후(5:17)
승리의 생활의/ 약속을 바라보며(고후2:14)/ 자유함을 얻으려고 몸부림칠 때
나의 믿음은 그만 지쳐 버렸네(롬7:24,25)
내 진 짐은/ 날로 더욱 무거워지고/ 내가 그 길에서 수고할 때
하나님은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았네(시142:4)
나는 괴로운 시험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수단을 찾아 헤멨네
그러나 아무 위로 찾지 못해/ 그에게 더욱 순복하였네(롬12:1)
나의 주님 내 부르짖음을 들으사(시142)/ 나의 길을 인도하셨네(시37:5)
위로 주시지 않고/ 내가 방황토록 두지 않으셨네
내 힘은 거의 사라졌고/ 점점 쇠하네
이제 내 힘은 아주 사라지고/그분이 네게 그분의 평안을 주시네(요14:27)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내 마음을 채우네(빌4:6,7)
나는 진정한 경외감으로 무릅꿇고/ 나의 영혼은 더 바랄 게 없네
당신의 고난은 나의 몫(빌1:29,30)/ 그의 고난에 참예할 때 나는 축복받네(빌3:10)
그리스도와 못박혔으니(갈2:20),
나는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았네(마11:28,29)
< 제 8 강 >
7장 오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간적 불행을 보았을 때, “외롭게 인생의 목적과 평안을 갈구하는 저들을 어찌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때때로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에게 바로 깊은 만족을 주는 생활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러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혼돈에서 질서를 이끌어 내기 위해 인간행동에 관한 이론들을 전개하고 있지만, 이는 무익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적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들의 대부분이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전적으로 시간낭비는 아닐 지라도 그 결과는 매우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적 장애는 증세이지 문제 자체는 아니다. 증세를 완화시키는 일이 다소 위로를 줄지는 몰라도 근본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세 대 차
요즈음에 소위 세대차 즉 ‘30대 이상의 장년층이 젊은 세대와 대화할 생각을 않는다’는 우스꽝스런 상상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 큰 기만이다. 대중의 신념과 달리, 세월의 흐름은 그 흐른 세월의 길고 짧음에 관계 없이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필요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본주의(젊은 세대)와 물질주의(기성세대)라는 두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본다면, 양자의 추구하는 바 목적간에는 뚜럿한 격차가 존재하며 그 간격을 메우기란 비록 불가능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공통요소인 영적유산을 저버린 대신에 치뤄야만 하는 불가피한 대가인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행복과 성취감이 부와 물질의 결과임을 긍정하는 어떠한 가치관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근거한 쾌락주의적인 인생 철학을 혐오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가치관 역시 물질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즉, 물질주의를 대체할 건설적인 방안이 없는 물질주의 반대론도 역시 물질주의인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이란 것이 그들의 비난대상인 바로 그 사회에서 파생된 하위문화이기 때문에 사실상 위선적이다.
물질주의적인 기성세대나, 반물질주의적 청년 하위문화의 그 어느쪽도 인간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 하나님의 마땅하신 지위를 묵시적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체계가 빠질 수 밖에 없는 공허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개인적 집단적 방법을 갖고 있다.
기성 세대는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잊으려 애쓴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술과 신경안정제를 사용하게 마련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마약의 노예로 전락한다. 필요한 자금을 기성세대에게서 얻어내기 위해서 온갖 불법적인 비행수단을 짜낸다. 이리하여 청년 하위문화는 그의 비난대상인 바로 그 체계(기성세대)에 다시 의존하게 되는 순환관계가 성립된다.
공허감 밖에 주지 못하는 물질주의 문화가 그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필요를 채어줄 능력이 없는 또다른 문화를 낳게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양자가 서로를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점점 많은 젊은이들이 내면의 진공상태를 매우기 위해 내세의 의미를 추구하고 다양한 이념들, 종교, 신비주의, 사교, 초자연주의에 도취되고 있다.
GFI에서는, 피상담자가 어떤 연령에 속하든지 간에, 혹은 그로 하여금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동일한 해결책이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메울 수 없는 세대차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위기
대중을 기만하는 또 하나의 그릇된 관념은 유독 젊은세대 만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다. --- 사실은 그들의 부모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 많은 경우에 부모들은 아이들의 인생이 망쳐진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약영향에 더욱 전전긍긍한다. 기성세대는 아직도 남에게서 빌려온 가치관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데, 그 가치관이란 기껏해야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딤후 3:5)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정체성의 위기는 두 세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재의 장년층이 그 부모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 그들은 간접적인 기독교신앙(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신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녀에게 물려주고 있는 영적인 진공상태는 이제 생활양식으로 굳어져서 왜 자녀들이 명백하게 거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양자 모두가 동일한 근본적인 문제, 다시 말해서 블안정한 가치관이나 상황에 기초를 두지 않는 불변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인 가운데 미리 마련해 두셨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을 실현하려고 노력해 본 체험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다는 진리는 어떤 교회, 단체, 교파와 동일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조직된 교회는 전통적으로 변화에 대한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거의 전 교파 내의 혼란들을 대충 훑어보기만 하여도 교회가 이런 불안정한 분위기의 희생물로 전락했음이 명백해진다. 교회가 제도적인 면에서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며 회원들로 하여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생활을 나타내보이도록 이끌지도 못한다.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좀체로 볼 수가 없다.
실상이 아닌 기독교의 풍자화를 보고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은 진실로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명력 있고 원할한 관계를 육성하는 터전이 되지 못하고 단순히 편리한 시설, 사회적 지위 혹은 복지계획 정도로 전락된 데는 그들의 부모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동일시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세대, 시대, 문화적 환경에 관계없이 변치않는 불변의 것이다. 다른 길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환경에 지배되지 않으며 전 생활영역에서 원활히 작용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침묵하는 다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개인적(인격적) 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 생활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역시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어야 당연한 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 그리스도인의 90%가 한번도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경험이 없다. 시대적이고 물질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된 풍조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적인 순종과 생활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뢰하는 일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치 료
향락에 광분하는 군중이나 광폭한 향락을 즐기는 군중의 어느 쪽에도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다. 그 결과, 생각과 정서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대용품을 견디지 못하는 진리의 순간 즉 깨달음의 날이 다가온다.
생각과 정서상의 증세를 정신병으로 그릇되게 진단하는 것이 보통이며,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하나님을 통하지 아니한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헛된 시도를 끝없이 되풀이 한다.
필자가 깨달았듯이, 전통적인 정신 치료법이나 심리치료를 반대하면서 영적인 변화를 보조치료 아닌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일은 인기를 얻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책의 최종결론이며 체험적 증거들이 이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심리치료가 프로이드의 무신론적인 정신분석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적 심리치료’를 만들어 내자고 주장한다. 이 두 단어 즉 ‘그리스도적’과 ‘심리치료’는 양립될 수 없으며 상호배제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심리치료에 의한) 외관상의 성공은 매우 속기 쉽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잘 조정된 상태를 영적 성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조정되지 못한 채로 봉사나 심지어는 사역에 활동적일 수가 있다. 심리치료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좀 더 효율적인 행동방식을 익힘으로써 더 적절한 방어기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그 치료란 것은 결국 “너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 너는 강건해져서 네 생활의 긴장을 스스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식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요 15:5에서“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아 즉 프로이드의 에고가 강해질수록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점점 줄어든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나는 애쓰고 실패하기를 거듭할 것이다. 심리치료의 목적은 개인을 강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시기 위해 우리가 연약함에 이르러야 한다(고후 12:9). 계속해서 바울은 고후 12:10에서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심리치료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목적을 가졌으며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심리치료의 근본원리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행동이 좀더 용납할 만한 것이 되면 그는 나아진 것이고, 점진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행동을 변화시키면 사람이 변화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원리는 이와 전혀 다른데, 그것은 먼저 사람이 변화되면 그의 행동이 변화된다는 원리이다. 이것은 구원의 체험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의 권능(the power of union with Christ)을 깨달을 때,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구원 때 체험한 변화보다 훨씬 크고 극적이다.
영적치유에서는 ‘정신병’과 같은 상태는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병이란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문제가 정신에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근본적으로 기질적인 것이 아닌 기능적인 것이다. 정신위생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 몇분들도 필자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 짜쯔박사는 그의 저서『정신병이란 신화』에서,“정신병이란 단어가 19세기에 있어서는 유용한 개념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에 와서 그것은 과학적으로 무가치하며 사회적으로 해롭기조차 하다.”
또 한가지 영적치유의 기본전제이면서 심리치료와 주된 차이점은, 우리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인간 임상의사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점이다. 문제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면에 있으나, 드러나는 것은 정신적이고 행동적인 증세를 통해서이다.
호버트 모우러는 저서『심리치료법의 위기와 종교』에서,“만일 지난 한 세기 동안 종교지도자들이 심히 혼란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참고하는 대신에 그들을 보살피고 구제하는 일에 더욱 깊이 관여했더라면, 프로이드학설은 생겨나지 않았을 테고 틸리히나 포스딕 같은 이들이 그를 합리화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증세는 정신적인 것이고 또 그 증세들을 분류함으로써 다소 의사소통상에 도움이 될지라도 정신이나 마음의 차원에서 치료하고자 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그런 치료란 단순히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근본적으로 문제의 근원이 영적인 것이므로 개인의 영적상태를 진단하는 일이 중요하다.
GFI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정신병으로 통하는 많은 증세들로부터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건져주셨다. 이들 가운데는 정신분열증, 강박관념, 변태적 성도착증, 전환 히스테리, 조울증, 반응 우울증, 반사회적 성격, 정신병적 반응, 알코올중독, 불안신경증, 극단의 공상 등 여러가지가 있다.
영적치유에 있어서 상담자는 치료자가 아니라 영적 안내자(spiritual guide)이다. 치료는 명의(名醫)이신 성령께서 이루신다. 이렇듯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서 치료하면, 영적 부적응에서 비롯된 심리적, 정신적 증세에서 해방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영적치유에서는, 이런 바울의 견해를 변증방법에 의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을 영예롭게 하시며 피상담자 각 사람의 삶 가운데 기적적인 구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다.
19년전 필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항공산업체의 봉급 많은 지위를 자원해서 버렸다. 그것은 바울에 있어서 그의 내세의 삶 뿐 아니라 또한 현세의 삶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이 상담사역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어떤 특정교파나 단체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상담자가 피상담자에게 하나님께서 피상담자의 필요를 채워주시리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려면, 상담자는 먼저 물질생활의 문제에서 조차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한다. 상담자가 자신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안내자로서 모범이 되고자 한다면,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의탁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죄를 용서한 후 옛성품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게’만듦으로써 우리가 문제들을 가진 채 견디며 살도록 돕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구세주께서 오신 뜻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를 화목케 하고 또한 그 생명으로써 우리를 자아(self)에서 건져내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요 10:10).
그리스도인들의 90% 이상이 풍성한 승리의 생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이들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인간적 치료없이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 가운데 생명을 나타내심으로써 뿌리깊은 심리적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만일 풍성한 생명을 체험했고 또한 그 생명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심리학자, 정신과의사들은 가치가 의심스러운 기술을 거부하고 성령의 치료하심을 좇아 자신의 치료를 중단할 것이다.
풍성한 생명과 염려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결론이며 따라서 영적치유의 결론이다. 특별히 빌 4:6,7에서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peace with God)을 누리겠지만, 비교적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을 누리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게 되기까지에는(렘 29:13), 때때로 우리의 사랑하시는 주권자께서 신실히 행하시는 고난의 훈련과정(시 119:71)이 필요하다. 이러한 풍성한 생명 즉 성령충만한 생활은 단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예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단지 자신의 구주와 주로 아는 상태를 넘어서서 또한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Life)으로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 책은 이러한 뜻에 바쳐졌다. 이 책은 신학분야의 전문가나 상담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분”(골 3:11)으로 알기 원하는 모든 갈구하는 영혼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 당신이 읽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당신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도록"(빌 4:19)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시기 바란다.
비록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생명이 되기 원하시는 예수께 온전히 순복할 때에 비로소 당신은 전혀 새로운 삶을 체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