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역자료2010-2011

[스크랩] 기독교 강요 요약

주거시엔셩 2015. 6. 16. 15:13

기독교 강요 요약

 

 

 

소망이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믿는 모든 것에 대한 기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믿는다.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미래의 적당한 때에 그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시리라고 기대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소망은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항상 우리를 위한 아버지로서 행동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신앙이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믿는다. 신앙이란 소망이 그 위에 서있는 초석이요 소망은 신앙을 양육하고 유지시켜준다.

진정한 기도란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느낌이요 이 느낌을 가지고 하나님을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 우리 자신의 자존심 및 모든 자만심과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의로운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엄청난 자비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주님께서는 그의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는 바로 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법이나 그 어떤 조건도 부과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 최종판(1559)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3.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에로 부르시며 이 사귐 속에 있게 하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보조자이다. 환언하면 1. 신론 2. 기독론 3. 성령론 4. 교회론 및 국가론이다. 그런데 교회론을 다루면서 끝에 국가론을 첨부한 이유는 국가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경험도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조차 단편적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은 자연계시에 의해서만은 「구원의 신 지식」이나 구원의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다. 그래서 칼빈은 제 6 장에서 성경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길잡이와 선생 노릇을 하기위해서 꼭 필요하다“라는 제목을 다루고 제 13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제 1 장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과 요구들 앞에서 혹은 복음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 특히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에서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  및 봉사활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낮은 신분에 대하여 결코 깨닫지 못한다.

제 2 장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성령으로 가능케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반의 하나님 지식은 단순히 주지주의 적이거나 이론적인데 머물지 않고 양심, 의지, 감정 등 전인적인 신뢰와 경외 그리고 전인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신앙의 하나님의 지식이다.

제 3 장  인간의 지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본능이다. 종교의 씨앗이다. 이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기 이전에 모든 인간이 지닌 종교성으로서 양심의 빛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양심의 자세를 가다듬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 종교성이야말로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 지식은 인간의 무지와 보도덕에 의하여 질식되고 있다. 이것은 타락의결과인 인간의 본성의 부패 때문이다. 이 하나님 지식은 결코 인간을 구원에로 인도할 수 없다.

제 4 장 경험에 의한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 속에 종교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러나 백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도 그 씨앗을 그의 마음 속에서 잘 배양하지 않으며 때를 따라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 뿐 아니라 어떤 이는 이 종교의 씨앗을 미신으로 표출시키고 또 다른 이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악의로 하나님을 저버린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경건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제 6 장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다만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만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되었으며 성경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참된 길잡이요 선생은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이 성경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참 모습과 아울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 혹은 말씀의 빛도 있다.  우리는 이 셩겅에 전하는 하늘의 가르침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결코 참된 경건을 조명받을 수 없으며 이 성경의 학생이 되지 않고는 올바르고 건전한 가르침을 결코 추호도 맛 볼 수 없을 것이다.

제 7 장 칼빈은 기록된 말씀과 설교 말씀이 성령의 사역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 성경 말씀의 진정한 증인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성과 교리 전승 보다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양심과 감정에 와닿는다. 성령을 통해서 전해지던 말씀이 기록된 후 다시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내용이 밝혀진다.

제 8 장 칼빈은 성경의 표현양식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아하고 장엄하며 명쾌하고 빛나는 것이라고 하나 경우에 따라서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스타일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문장보다 내용이라고 못박았다.

제 11장 칼빈은 출 20: 4을 근거로하여 모든 우상들을 금한다. 즉 나무, 돌, 금, 은 등 생명없는 혹은 썩어질 물질로 만든 우상은 물론 태양숭배, 별숭배, 동물숭배 등을 철저히 배격한다. 결국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나타나셨다. 이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결코 우상이 아니시다.

제 13 장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무슨 형상이나 우상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이요 영적인 본질로서 단순하고 나누어질 수 없으며 통일성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한 분 하나님은 세 위격을 지니셨다.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해석의 열쇠라고 해야 한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말씀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영은  말씀의 영으로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이 창조의 중보자요,계시와 구 속의 중보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창조의 세계를 지탱하신다.  
  인간과 우주 만물은 성자의 작품인 동시에 성령의 작품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구속 역사 및 섭리와 종말 사건에 있어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제 14 장 성경에 의하면 거짓 신들과 구별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은 이 창조주의 우주와 인간 창조를 통해서 나타났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사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우주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주님이시다. 천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마귀들은 믿는 자들을 공격하고, 불화를 가져다 주고, 피곤케 하고, 공포와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그러므로 믿는자들은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대적 악마가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우리를 삼키려할 때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대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고 하는 사실도 있으나 악마를 대적하여 싸워야 한다는 명령도 있다.

제 15 장 인간은 몸과 영혼 내지는 정신으로 구성된다. 대체로 영혼과 정신이 개별적으로 사용될 �에는 동일시뙤나, 양자가 함께 사용될 때는 정신이 영혼보다 우월한 기능을 갖는다.
한 인간안의 인격적 통일성, 한 인격 내에서의 두 본성의 교류를 칼빈은 보고 있다. 영혼은 몸이 아니고 몸은 영혼이 아니다. 그래서 영혼의 고유한 특성은 모에 적용될 수 없고, 몸의 고유한 특성은 영혼에 적용될 수 없 다. 그리고 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몸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마음의 특성이 몸으로 이월되고 몸의 특성은 영혼으로 이월된다.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은 주로 두가지 능력과 기능을 나타낸다. 곧 지성과의지이다. 그런데 지성은 영혼 혹은 정신의 지휘관 내지는 통치자요, 의지란 항상 저 지성의 지시와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 칼빈은 또한 주로 지성을 Mind로 의지를 heart로 표현한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은 주로 이 두가지 기능에 해당된다. 지성없는 의지는 맹목적이 되고, 의지없는 지성은 행함이 없다. 의지는 지성의 손을 잡고 길을 가야 한다.

제 16장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는 세계를 자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지탱시키시며 그의 섭리에 의하여 이 세계� 각 부분을 통치하신다.

제 18장 칼빈은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우주를 통치하시고 그의 작품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신다고 한다. 성부와성자는 처음부터 함꼐 일하신다. 고 할 때 이성부와 성자의 명령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찾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특수섭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계획 뜻, 노력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선택의 의지에 의하여 자기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들을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믿는 자들은 제 이차적 원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즉 어떤 사람을 통해서 큰 유익을 얻었을 때 이는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이 이 선행하는 원초적 원인임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찬양해야 한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약에 계시되었고 그 다음 신약에서 계시되었다.

제 1 장 원죄론 전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반항에 의하여 저주를 받았고, 원초적인 상태에서 떨어졌다. 인간의 소외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식된 인간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 인간의 모습이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회복을 표준으로 하는 인간의 비본래적인 모습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죄란 인간의 육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보다 고상한 부분인 지성, 양심 및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칼 빈 역시 이런 의미에서 노예의지론을 주장한다.

제 3 장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움직이며 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묶어버린 죄의 쇠사슬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향하여 지향할 수도 없고, 이 선을 성취하지도 못한다.

제 4 장  인간의 자유의지의 성취가 추호도 구원에 공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은혜의 선행에 의한 인간의지의 회심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제 6 장 이처럼 인간은 구원과 거룩한 삶에 관한 한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중보자 예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 맺어야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모든 예배는 유익이 없다. 심지어 구약성경까지도 중보자를 떠나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산앙이없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해석의 열쇠요 구약은 신약의 빛에서 풀이되어야 하고, 또한 신약은 구약의 빛에서 풀이되어야 한다.

제 7 장 구약에 주어진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을 이 안에서의 소망을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키워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십계명은 모든 하나님의 요구를 대변한다. 양심법과 실정법 역시 결국 이 십게명에 내포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이 십곕명의 묘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부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대한 종교적 의무에 대한 것이요, 둘째 부분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제 8 장 칼빈은 십계명의 기능이 우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분의 자비와 거룩하심을 경외하면서 예배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요, 그 다음 인간이 얼마나 불의하며 의를 행하기에 얼마나 무능하고 불완전한가를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올바로 의식하고 자기의 무능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십계명의 명령 사항을 결코 아름답게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의 순결의 원형에 의하여 우리의 생을 숭응시켜 형성시켜야 할 의의 완성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모습을 이 율법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동화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삶의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의 완전함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은 율법의 성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룬 사람이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이미 율법 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으나 급기야는 오직 복음 안에서 명쾌하게 계시되셨다.
칼빈은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분명한 계시라고 하아였다. 구약에서 발견되는 바 하나님과 인간의화해를 약속하는 은혜로운 속죄들은 복음의 한 부분으로 신앙의대상이라고 한다. 칼빈은 이 복음 신앙을 공로주의와 율법 주의에서 오는 위협과 공포와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란 하나님꼐서 족장들에게 베푸셨던 그의자비와 그의 아버지다운 호의에 대한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의미의 복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선포라고 칼빈은 말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셨고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였다.

제 10 장 첫째로 육적인 번영과 행복은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바 유대인들 앞에 놓여있던 목표가 아니였다. 이들이 영생에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자되었다는 확신이, 신탁, 율법, 그리고 예언자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 저들이 주님과 맺은 언약과 사귐은 저들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저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구약의 하나님의 계약백성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지녔으며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알았다. 이들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연합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활 수 있었다.

제 11 장 구약은 영적인 축복을 지상적인 축복으로 표현한다. 두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의 진리는 형상들과 의식법에 의하여 전달되었으나 신약에서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등장하셨다. 세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다분히 율법적이고, 신약은 다분히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인간을 속박하며 신약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것이다.다섯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하나의 민족을 지향하며 신약은 모든 민족을 포함한다.

제 12 장 누가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할 수 있으며 화해시킬 수 있을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인간이어야 한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꼐 하심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절대 역설적 위격이 우리를 위한 구 속의 사업을 펼치셨다.

제 13 장 축복의 약속을 받은 자는 하늘의 씨앗도 아니요 환상적인 인간도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앗이다. 영원한 중보자를 약속받은 자는 다윗의 아들이요 그의 허리에서 나온 열매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라고 하는 말로 만족하시지 않고 종종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으니 그 뜻은 인간의 씨에서 탄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제 14 장 칼빈은 정통 기독론을 따라 신성과 인성의 교류를 말하는데 그의 공헌은 이 신비한 교류를 한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혼의 특질과 육체적 특질이 서로 교류하는 것에 유추하였다. 즉 영혼은 육체가 아니고 육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전인을 이룬다. 이 전인으로서의 한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혼의 특질과 육체의 특질은 서로 교류한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나뉘어질 수도 없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해도 안되며 이 둘은 서로 혼돈되어도 안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는 하나의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와 비슷하다.

제 15 장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목적을 알기 위하여 그리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3 중의 직책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예언자적 직책, 왕의 직책 및 제사장의 직책이다.

제 17장 칼빈은 인간의 소외와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의 저주를 받아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다. 하난미의 축복은커녕 사탄의 노예와 죄의 멍에 아래서 무시무시한 파멸 속에 떨어져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변호자로서 하나님과인간 사이에 개입하셨다. 즉 하나님과 의로운 심판 하에 모든 죄인이 위협받고 있는 모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홀로 감수하시어 하나님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든 죄악을 그의 피로써 씻어버리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화목제에의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잠잠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와 화해는 바로 이 사건에 근거한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만족되었으며 그의 저주는 제거되었고 죄의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해서 중생하고 영생의 소망을 갖는다고 말하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으로 죄가 제거되었고 그의 부활에 의하여 의가 다시 살아났고 회복되었다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빌라도는 하나의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사형수나 되는 것처럼 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아가셨다.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간의 아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해거 중생했으며 나아가서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제 3 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제 2 장 남녀가 결혼하여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 된다. 이 둘은 하나가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와 연합하신다. 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에 예속되고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인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 교회와 성례는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릿도와 연합했으나 장차 종말의 날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남아있다.

신앙이란 성령의 주요 일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신다. 신앙이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조명시키시고 우리의 의지를 선택과 결단,확고부동한 신뢰에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앙에서 신뢰가 나온다고 말하며, 여기에서 담대함이 생긴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신앙은 양심의 평화라고도 일컬어진다.

제 3 장 나는 신앙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회개는 신앙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확실하다.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고는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부터 올바른 삶에로 옮겨갈 수가 없으며 회개를 실천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수 없다.
칼빈은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우리의 옛정신을 벗어버리고 새 정신을 입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우리의 육 혹은 옛사람의 죽음과 성령의 소생케 하심에 있다.

제 5 장 고해성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를 위한 잘못된 메카니즘이다. 그가 죄를 지을 때 마다 1.신부 혹은 사제 앞에 나아가 죄를 통회하며 2. 죄를 항목화하여 낱낱이 신부 앞에 고백하고, 3. 죄책은 용서받으나 형벌은 면제받지 못하여 어떤 선행이나 여러 종류의 보상하는 고행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려야 하며 4. 끝으로 사제는 미사행위를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면제시켜 준다.
칼빈은 이 교리에 반대하였다. 죄의 용서는 인간인 신부가 아니라 복음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사죄받는다.

제 7 장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삶의 현장, 직업의 현장, 혹은 세상 한 복판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인 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생애를 불 태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확신 때문이다. 칼빈은 자기 부정이 먼저 일어나야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은 자기부정이다.

제 10 장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칼빈은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들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를 인용함으로써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하며 은혜와 신앙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초월적인 사랑과 공의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의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초월이면서도 내재이시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월의 영역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이 땅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제 11 장 이신칭의 : 이 말의 정의와 그 주제 칼빈은 이신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용납받은 자가 바로 칭의받은 사람이다. 행위의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신앙으로 포착하고 이 의로 옷입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여겨지지 않고 의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그의 호의로 우리를 의인처럼 용납하시는 용납이다. 그리고그것은 죄들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

제 13 장 이신칭의에 있어서 두 가지 유의할 사항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는 주님의 영광이 감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주님의 영광의 손상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평온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제 14 장 이신칭의의 시작과 그 지속적인 진전 결국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없이는 결코 성화는 있을 수 없다. 자연인은 나쁜 나무이다. 이들은 보기에 아름답고 맛좋은 열매를 맺으나 이것들이 결코 좋은 열매는 못된다. 여기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의 자연인이 하는 계획, 생각 및 일들은 모두 의를 위해서 쓸데없는 짓이요, 저주와 정죄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있다.

제 15장 우리들이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고 자만할 경우 우리는 은혜로 베풀어주신 의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성취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진실로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셨다.
우리 자신이 아직 어리석을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우리가 아직 더러울 때 그는 우리의 깨끗하심이요, 우리가 연약하여 사탄의 힘에 노출될 때 하늘과 땅의 권세를 부여받으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것이요.

제 17 장 율법의 요구가 무조건적 사죄를 선포하는 복음으로 대치되었을 때 이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게 하며 우리의 선행까지도 기뻐 받으신다.    따라서 나는 주님께서 그의 율법에 기록한 바 의와 거룩함을 성취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바가 믿는 자의 선행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제 18 장 상급을 받는 다는 것 때문에 행위에 의한 의가 가능할 수는 없다. 상급이라는 개념은 결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 19 장 칼빈은 기독교적 자유를 3 가지로 본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멍에를 벗은 자만이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유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자유.

제 20 장 기도 : 그것은 신앙을 훈련시키며 우리는 기도에 의하여 매일 매일 하나님꼐로부터 은혜를 받는다. 기도란 하나님의 계명 중에 하나로서 구원론적 근거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은혜와 신앙과 무관한 불신자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를 지탱하시는 그의 능력의 현존을 부르는 것이요, 죄에 눌린 우리를 은혜로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현존을 부른다.

칼빈은 4 가지의 기도의 법칙을 제시한다.
1) 우리의 지성 양심 의지 및 정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성향을 갖추어야 한다.
2) 곤궁을 절감하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겸허하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4) 확고부동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담대하고 확신있게 하나님 앞에 나간다. 이처럼 신앙과 소망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기도할  때 꼭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해야 한다.

제 21 장 영원 전의 선택 :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택정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택정하셨다.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확인된다. 유기된 자들의 멸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이다. 칼빈은 성도들의 견인에 관하여 말했다. 하나님은 그의 택정하신 성도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끝까지 참고 붙드신다.

제4권 하나님께서 우리를그리스도와의사귐에로초대하시고 이 사귐에 머물게하시는 외적인 수단

말씀 설교 세례 성만찬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매개시키는 수단인 바,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에로 초대하며 이 사귐 안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런데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가장 끝 부분에 국가론을 다루는데 국가 역시 원칙상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시키는 기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1 장 참 교회 : 우리는 모든 믿는 자들의 어머니인 이 참 교회와 하나되어야 한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신앙고백과 삶의 모범을 요구한다. 즉 이것이 교회의 표지에 가산되고 있다. 우리는 신앙고백과 삶의 모범으로 우리와 더불어 동일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의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판단한다.

제 2 장 참 교회를 분별하는 표준은 즉 말씀을 순수하게 설교하며 세례와 성만찬을 주님이 제정하신 의도대로 베풀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 순종, 성화, 혹은 삶의 모범이 있어야 참 교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교역자들 및 이들의 선출과 직책 칼빈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을 가리켜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절, 하나님의 성전들, 주님의 전언자, 그리스도의 봉사자들 혹은 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설교하신다. 따라서 사람의 입술이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소인양 우리는 이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의 보물이 이 연약한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제 5 장 폭군적인 교황주의는 고대교회의 교직체제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제 6 장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의 지상권. 칼빈은 베드로의 수위권에대하여 반론한다.

제 8 장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 결정권 : 이 권한에 의하여 교회는 그동안 모든 교리의 순수성을 얼마나 타락시켰던가? 저들은 성경 이외에 전통(교리들, 교황의 칙령들)을 말한다. 사도들의 글 이외에 전해지는 구전도 말한다. 종교개혁 당시에 이들은 이 전통을 거의 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보았다. 즉 기록된 말씀인 신, 구약 성경만이 진리의 표준은 아니라고 이들은 본다.

제 9 장 칼빈은 종교회의들이 성경으로부터 떨어졌으며 심지어 니케아 회의와 칼케돈 회의 역시 논쟁과정에서 목사들이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어느 종교회의의 교리 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었으며 누가 무슨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신앙의 내용 중 중요한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결정한 니케아 회의(32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칼케돈 회의(451) 같은 종교회의의 교리 결정은 성경의 순수하고 진정한 해석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교리 문제 혹은 성경 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위의 회의등의 존재 이유와 존재 의미를 인정하였고, 아타나시우스 등 많은 고대 교회의 교부들의 역할을 칭찬하였다.

제 10 장 교황은 그를 지지하는 감독들과 더불어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가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뭇 영혼들이 야비한 폭정과 유린 하에 억눌리고 신음하고 있다.

제 11 장 칼빈은 교회의 권한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특징지우면서 국가가 지닌 칼의 권한과 구별한다. 그리고 교회의 치리는 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합법적인 회중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출교는 구형이니 투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칼빈은 카톨릭 교직자들의 경우 영적 권한의 한계를 넘어서 국가권력의 일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제 12 장 치리는 왜 필요하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한 가정이나 사회가 살아가는데도 치리(Discipline)가 반드시 필요한데 교회가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더욱 이 치리회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이 치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세가지 목적을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기 위함 둘째로 고전 5:6,11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 중 악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온 그리스도의 몸이 더럽혀지므로 이 치리가 필요하다. 셋째로 결국 최종의 목표는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다. 치리의 의도와 목적이 죄인을 회개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이것이 죄인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된다고 한다.

금식과 기도에 대해서 논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어거하기 위하여 금식해야 하는데, 이는 공적인 금식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적인 조건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 전체이든 이 금식은 기도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필요하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를 낮추어 참회하기 위하여 금식이 필요한데 이는 기독교인 개인으로서 교회나 국가의 차원에서까지 타당하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에 모두 금식하며 통회 자복해야 하기 �문이다.
제 13 장 서원 : 누구든지 무모하게 서원하면 비참한 자승자박에 말려든다. 서원에 있어서 오류를 피하려면 3 가지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1. 우리는 누구에게 서원을 해야 하나 2. 이 서원을 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다. 3.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는 서원을 하는가?

  1.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서 인정하는 서원 이외에 다른 서원을 감히 하나님께 올리는 방종스러운 일을 행하지 말자. 2. 우리는 우리의 능력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항상 염두에 두고 명심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서 혹은 그의 소명에 배치하여 서원을 일삼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그로 하여금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하다. 3. 서원하는 사람의 의도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도가 중요하다. 만약에 여러분이 술을 끊는 서원 그 행동 자체가 거룩한 것인양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적이다.

제 14 장 성례란 정부문서나 다른 공문에 찍힌 도장이라고 하면서 도장 그 자체보다 그 문서에 기록된 글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용인 즉 아브라함의 은혜의 언약을 신앙함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나서 받은 할례는 저 언약을 인치는 도장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를 언약들의 보증이어서 하나님의 복음 말씀의 신빙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보이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성례전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케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떡과 즙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능력에 알맞는 매체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제 15 장 세례는 물 자체가 깨끗케 하고, 중생시키며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피가 우리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었는데, “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고 성화시키는 메시지가 위리에게 와닿는다. 이 때에 세례는 이 메시지가  와닿았다는 것을 인치는 것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거룩한 만찬 :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란 무엇인가? 성만찬의 중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떡과 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듯 그리고 손으로 만져지듯 제시된다. 에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회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떡과즙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류 혹은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 영혼이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먹고 마심이라는 표현으로 이 관계를 나타내셨다. 마치 떡을 보는 것만으로는 몸에 유익이 없고 먹어야 유익이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깊은 영적 교류를 나누어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생에로의 생기를 얻게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만찬 교리에서 성화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제 18 장 교황주의 교회의 미사 :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것으로 만든다.

제 19 장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5 개의 성례(저들은 세례와 성만찬을 더해 7 성례전을 사용한다.) : 이것을 성례라 함은 성경적이 아니다.

제 20 장 국가와 정부 (교회와의 관계) 칼빈은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필요하듯이 국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국가는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각 개인이 재산 소유의 권리를 갖도록 하며, 인간 상호간에 사귐을 갖게 하고, 덕망과 근엄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지되게 한다. 즉 인간성의 확립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계명 중 둘째 돌판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첫째 돌판에 속하는 의미도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공직자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요 모든 국가의 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선행을 한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고, 악행을 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론
제 1장 성령의 일반적 사역

제 1절자연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
성령께서는 자연의 영역에서 유기적이며 지적이며 도덕적인 모든 생명에 생을 주시며 ㅁ든 변화속에서도 그것을 보존하시며 또는 그것을 이끄어 발전하게 하시고 자신의 운명의 길에서 걸어가게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일반적 사역은 자연과 인간생활의 기성질서에 속한다.다시 말하면 그것은 창조에 근거를 두고 피조물의 성장과 완성을 보증하는 것이다.성령의 일반적 사역 없이는 그의 특별 사역을 위한 진정한 영역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제 2절 보통은혜
성령의 일반적 사역의 열매 중에서 특히 고려할 만한 것은 보통은혜이다.
[1]보통은혜의 서술
보통은혜와 특별은헤의 구별은 하난님의 속성으로서의 은혜에는 적용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에 또는 이 사역이 자연과 인간 생활에서 나타나는 결과에만 적용된다.보통은혜를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a.이 사역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감화시켜 죄를 제재하시며 사회질서를 유지하시며 시민의 도덕을 증진시킨다.b.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축복이다.모든사람에게 구별없이 자기에게 선하게 보이시는 대로 그 축복들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파가 주장하는 만큼 영적 회개까지는 가져오게 하지 않는다.보통은혜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제거하기에 불충분하며 인간을 영적 갱신의 길로 인도하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보통은혜와 특별은혜와의 상이점 a전자는 사람의 마음속에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으나 후자는 가능하다.
b 전자는 이성적 도덕적 방법으로 역사하며 후자는 영적 창조적 방법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전성질을 갱신 또는 영적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다.c 전자는 반항적이며 항상 다소 저항을 받지만 후자는 불가항력적이어서 사람이 자발적으로 굴복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킨다.

[2]보통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아마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시지 않으시는 그 선하신 뜻이 곧 보통은혜의 축복들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축복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어느 면에서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간접적으로 결과한 이들 일반적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계획하기도 하였다.

[3]보통은혜의 방법
(a)하나님의 계시의 빛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자연계에서 사람을 비추어 주며 자연인의 양심을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b)정부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세력과 인간의 방탕을 억제하기 위하여 또는 선한 질서와 단정함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부를 제정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c)여론
자연계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 특히 특별계시의 빛으로 보강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d)하나님의 형벌과 상급
하나님은 현세에서도 인간의 죄악을 벌하시고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한 행위에는 상급을 주신다. 이같이 현세에 있는 도덕적 선은 무엇이든지 크게 격려를 받는 것이다.

[4]보통은혜의 효과
[a]형의 집행유예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죽음의 선고를 즉시 집행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유지 연장하여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보통은혜에 의하는 것이다.
[b]죄의 제재
죄는 그 부패의 요소가 그 파괴적 활동을 수행하는 데에 제재를 받는다.
[c]진리 도덕 종교의 의식
인간은 보통은혜에 의하여 진,선,미에 대한 의식을 다소 가지게 된다.진리와 외부적 도덕성 나아가서는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까지도 욕구를 나타내게되는 것이다.
[d]세속적 의
보통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능히 세속적 의 혹은 자연적 선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실행케한다.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한 것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물론 그것들은 참된 영적 성질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e]자연적 축복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자연적 축복은 보통은혜로 말미암는다.비록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부하게 받고있는 것이다.

[5]보통은혜의 성서적 증거
하나님께서 죄를 여러 방법으로 제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창 20:6,31:7;욥1:12;2:6등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가 선과 의를 행한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0:29,30;12:2 롬 2:14
마지막으로 어떤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과분한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 차별없이 내리신다고 표현하고 있다.시145:9,15,16;마5:44,45


제 2장 소명과 중생
제 1절 구원의 순서에 대한 일반적 관찰
우리의 출발점을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적 행위에 둔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의 창시자로 높이며 모든 구속적 행위의 기본적 원인으로 믿는 동시에 중생 후에도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충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회개와 성화와 같은 약간의 구속적 행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과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제 2절 소명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신 행위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그것은 성부께 돌려지며 성자에 돌려지며 성령에게 돌려진다.
이 소명은 외적이기도 하고 내적이기도 하다.하나님은 이 양자의 창시자이시다.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내적 소명은 피택자에게만 임한다. 이 내적 소명은 외적 소명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효과있게 한다.

[1]외적 소명
성서는 곳곳에서 외적 소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곧 대명령에서 마28:19절 부름은 받았으나 오지않은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귀절에서 마22:2-14 복음의 배척에 관련한 귀절에서 요 3:36마지막으로 불신의 무서운 죄를 말하는 귀절에서 요 5:40 요일 5:10각각 말하고 있다.
외적 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제시하며 속죄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라 정의할 수 있다.

[a]외적 소명의 요소
세 요소가 있다.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제시,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초청, 용서와 구원의 약속
[b]외적 소명의 특징
두 가지 특징이 있다.그것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그리고 성실한 소명이다.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죄인을 부르실 때 그는 선한 신앙으로 부르시며 또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성실하게 원하시는 것이다.
[c]외적 소명의 의의
하나님은 이 외적 소명에서 죄인에 대하여 가지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신다.이 소명은 역시 하나님께서 選民을 세계만국에서 모으시는 지정된 방법이기도 하다.

[2]외적 서명 혹은 효과적 소명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소명은 비록 우리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분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이다.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소명이 발생되고 내적 소명에서 그 효력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내적 소명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적으로 적용된 명령이다.이것은 능력있는 서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이것은 후회가 없으며 변화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소명이다. 이 소명을 받은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게 될 것이다.
(a)이 소명은 도덕적 說誘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창조적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설유적 방법으로 역사하신다.전도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설유하시는 것이다.
(b)그것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그 오성을 통하여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키는 것이다.
(c)이 소명은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성령꼐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소명이며고전 1:9 축복을 유업으로 받게하는 소명이며벧전 3:9  그리고 그것은 자유케하며 갈5:13화평을 가지게 하며 고전 7:15거룩하게 하며 살전4:7 소망을 갖게하며 엡4:4영생을 얻게하며 딤전6:12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는 소명 살전2:12인 것이다.

제 3절 중생
[1]중생의 어의
칼빈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 영역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했다.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은 신생과 회심에 있어서 인간갱신의 시초라고 하였다.중생이란 말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속에 심어주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중생의 본질
(a) 중생은 근본적 변화이다.
중생은 인간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 주어,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다. 곧 이지와 의지, 그리고 감정에 미친다.
(b) 중생은 즉각적 변화이다.
이것은 영혼안에서 점진적으로 준비되는 변화가 아니다. 생과 죽음 사이에 중간 계단이 없음과 같다. 이것은 성화와 같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c) 중생은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은밀한 것이며 또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직접 이를 지각할 수 없고 다만 나타난 결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3] 소명과 중생의 차서관계
말씀 전파에서 되는 외적소명은 새 생명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보다 먼저 있거나 혹은 그와 동시에 일어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창조적인 행위로 새 생명을 발생하여 영혼의 내적성향을 변화 시키신다. 중생에서 인간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효과적 소명은 영혼에 태어나 새 성향을 처음으로 거룩하게 운영하게 한다.
[4] 중생의 필요성
중생의 필요성은 역시 인간의 죄적 상태에서 생겨진다. 성결 혹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게게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양심의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즐김에 있어서 불가결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5] 중생의 기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중생에 있어서 말씀이 기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약1:18과 벧전1:23이 입증해 준다고 가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중생은 분명히 새 출생 혹은 새 생명의 첫 현현을 포함하고 있는 넓은 의 미의 중생인 것이다. 아마 베드로가 말하는 중생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욱 포괄적인 의미에서 중생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말씀의 방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6] 중생은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중생의 창조자이다. 이것은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일하시고 죄인의 협력은 조금도 필요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인간의 일이 하나님의 일보다. 앞선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감화에 반항할 수 있고, 굴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7] 세례의 중생
로마교회에 의하면, 중생은 영적갱신만이 아니라, 칭의 혹은 속죄도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은 세례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된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의 한 유력한 교파는 이 점에서 로마교회와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루터파 까지도 일종의 세례중생을 가르친다. 그러나 루터파의 일부는 이것을 단순히 수세인을 교회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교파는 중생의 축복이 상실될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 일치를 보고 있다.

제3장 회 심

제1절 회심의 성서적 용어
[1] 구약의 용어
구약은 회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두가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첫째 말 nicham 은 “후회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흔히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를 가리킨다. 그 둘째 말 shubh 는 “돌아오다.” 특히 떠났다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회심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신약의 용어
신약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metamoeo, metanoia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 변화는 전적으로 지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변화로도 생각되어야 한다. 둘째로 중요한 말인 epistrepho, epistrophe는 “방향을 돌리다.”혹은 “되돌아가다.”를 의미한다. 이말은 능력적 생명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회심의 최종적 행동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세째로 metameiomai라는 말은 신약에 다섯 번이나 나타났는데, “후에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말은 회개의 요소를 강조한다.

제2절 성서의 회심관
[1] 국민적 회심
성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과 열왕시대의 그리고 니느웨등의 국민적 회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한다.
[2] 일반적 회심
성서는 또한 마음의 변화를 표시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한다. 이러한 회심은 잠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처럼 보인다.
[3] 진정한 회심
이 회심은 중생의 외부적 표현 혹은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일으켜지는 변화인 것이다. 이 회심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능동적인 면이요, 하나는 피동적인 면이다. 전자의 견지에서 볼 때, 회심이란 하나님께서 중생자로 하여금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 반복적 회심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새 생활의 활동력은 세속, 부주의 관계심등을 통하여 가리워지게 된다. 그렇게되면 다시 여러번이라도 부름 받고 다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제3절 회심의 요소
앞에서 이미 회심은 두 요소 곧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나타났다. 전자는 성화와 직접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절대적은 아니지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
[1] 회개의 요소
(a) 지적요소
과거의 생활이 죄와 오염과 절망을 안고 있는 죄의 생활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b) 감정적 요소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c)결의적 요소
이 요소는 죄에서 떠나는 내적전환, ?죄와 정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뜻한다.
<2> 로마 교회의 회개의 개념
로마 교히는 고해성사에서 회개의 관념을 전적으로 형식화하였다.
(a) 통 회
이것은 죄에 대한 진정힌 비애를 말한다. 이것은 생득적인 죄에 대해서가 아니고, 개인적인 과실에 대하여 슬퍼함을 말한다.
(b) 고 명
이것은 고해성사에서 신부에게 고배하는 회개이다. 회개자가 만족한 고백을 할 때, 심부는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회개자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용서한다고 말한다.
(c) 보 속
죄인의 행동의 회개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인내하거나 혹은 어렵고도 불유쾌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는 회개이다.

[3] 회개의 성서적 견해
회개의 성서적 견해는 로마는 캐톨릭의 그 외형적 회개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성서는 회개를 전적으로 내적행위, 다시 말하면 통화의 행위, 혹은 죄로 인한 비애로 간주한다. 성서는, 진정한 회개는 항상 참된 신앙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제4절 회심의 특성
[1] 회심은 칭의와 같이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라, 중생과 같이 도덕적이며 재차조적인 행위이다.
[2] 회심은 중생과 같이 잠재의식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된다.
[3] 그것은 원리상 옛 사람을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새 사람을 옷입음을 뜻하기도 한다.
[4] 만일 우리가 “회심”이란 말을 그 특수한 의미에서만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순간적인 개변을 가리키는 것이요, 성화와 같이 한 과정을 뜻하는 것이다니다.
제5절 회심의 창시자
하나님만이 회심의 창시자이시다. 성령의 조명적이며 결실적인 감화를 통하여서만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간접적인 사역도 있다.
그러나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역사하시고 인간은 전적으로 피동적이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능력은 항상 인간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역에서 오는 것이다.

제6절 회심의 필요성
성서는 중생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가장 절대적인 언사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회심에 대하여는 이같은 절대적인 표현은 발전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려서 죽은 아이들의 경우, 회심에 관하여는 말할 수 없고, 다만 중생에 관하여서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어른들의 경우에서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것일 것이다. 회심의 요소, 곧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신앙은 전생애에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제4장 신 앙
제1절 신앙의 성서적 용어
구약 성서에는 신앙 행위를 여러 면에서 표시하는 말이 특히 셋이 있으나, 사실상 신앙을 위한 용어는 없다.“믿는다,”를 뜻하는 가장 공통적인 말은 지적요소를 강조하는 말로, 다른 사람의 증명하는 것에 대하여 참된 것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신앙을 위한 매우 중요한 말을 하나 가지고 있다. 이말은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 이러한 신뢰를 근거해서 그의 증거를 쉽게 받아 들이는 것.미래를 위해서 그를 의뢰하는 것 등이다. “믿는다.”란 이 공통적인 용어는 여러가지 형태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떤 경우에서는 지식의 요소를, 또 다른 경우에서는 신뢰의 요소를 각각 강조하고 있다.

제2절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의 종류
[1] 역사적 신앙
역사적 신앙이란, 어떤 영적 목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서의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는 역사라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이나 진지하게 받지 않고 실제의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2] 이적의 신앙
이적의 신앙이란, 이적이 자기에 의하여 또는 자기를 위하여 일으켜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개인의 확신을 말한다. 이 신앙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도 이 신앙을 시행하는데 보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부정한다.
[3] 일시적 신앙
이 신앙은 양심의 어떤 자극이나 애정의 분발을 수반하고 있기는 하나 중생된 마음에 뿌리를 박지 못한 종교적 진리에 관한 확신이다. 이것이 일시적 신앙이라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영속적 신앙이 없어서 환난과 핍박의 날에 그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위선적 신앙이라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일신적 신앙은 감정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참된 구원적 신앙 참된 구원적 신앙이란 그 자리를 마음에 두고, 중생한 생활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신앙을 말한다. 이 시낭의 의식적인 활동은 점진적으로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서 신앙활동에 강력한 도움이 되어 준다.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제3절 신앙의 요소

[1] 지적 요소
구원적 신앙이란 단순히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디까지아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영적동제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들 진리는 죄인의 마음 속에서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감정적 요소(찬동)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앙의 이 요소를 구별짓지 않는다. 이것이 “찬동”이라 불리워지는 것은, 사실은 구원적 신앙의 지식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구원적 신앙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식의 특징은 그것이 그 대상에 대한 최대의 확신을 지닌다고 하는데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찬동”이라 부른다. 진리에 대하여 인격적인 관심에서 의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3] 결의적 요소(신뢰)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요소가 된다. 신앙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나, 또는 지식과 감정을 결합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지의 문제요, 영혼이 그 대상으로 나아가서 그것을 붇잡는 영혼의 행위인 것이다. 이 제3의 요소는 구세주요, 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제4절 구원적 신앙의 대상
[1] 일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일반적인 의미에서 구원적 신아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적 계시의 전체라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연택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바로 이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에 속한다고 말한다.
[2] 특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성서를 하나님의 말슴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필요하나,그렇다고 이 사실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직접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의 특수 해위라고 보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구원적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인 것이다.

제5절 로마 캐톨릭의 신앙관
로마 캐톨릭은 신앙을 단순히 진리에 대한 찬동으로 보고, 충분한 신앙 또는 구원하는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사실상 신앙에 있어서 지식의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고 안하고를 막론하고 진리에 대한 이 찬동은 그것이 선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ㅅ랑으로 역사하게 될 때에만 참된 구원적 신앙이 되는 것이다.

제6절 신앙과 확신
신앙에는 항상 구원의 확신이 수반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 난다. 로마 캐톨릭파와 17세기의 알미나안파는, 신자는 아주 희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더우기 그들은 이러한 확신은 대체로 요구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웨슬레주의 알미니안파, 혹은 매도디스트파는 회심이 곧 직접적인 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언제나 그가 은혜에서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이것은 메도디스트파가 일치하게 달성할 수 없었던 확신이었다. 정당한 견해에의하면, 참 신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신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비록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안전과 보증의 의식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은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써, 또는 성령의 열매가 입증해 주는 참된 신앙생활의 발전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것이다.

제5장 칭 의
제1절 “의롭게 하다”의 성서적 용어
구약성서에서 이 말들은 두 귀절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인간속에서 이루시는 도덕적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 관한 신적 선언을 정식으로 지적해 주는 말이다.
신약성서의 말도 꼭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서의 “의롭게 하다”라는 말은, 의롭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의를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매우 명백하다.

제2절 칭의의 본질과 특징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 정의 할 수 있다.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영원한 유산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권리를 갖도록 회복시켜 준다. 칭의는 그것이 신앙에 의하여 통용되는 것이지망,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칭의는 단 한번만 일어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으며, 또한 한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즉시로, 또는 영원히 완성된다.칭의와 성화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공력이지만, 칭의의  사역은 특히 성부에게 돌려지고, 성화의 사역은 성령에게 돌려진다.

제3절 칭의의 요소
[1] 소극적 요소
칭의의소극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 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서의 제60문에 대한 답변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 그리고 성서의 성도들이 자주 용?를 기원하여 실제로 사죄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될런지 모른다. 이에 대한 해석은, 신자의 죄가 그 자체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죄책을 구성하여 고백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2] 적극적 요소
(a)자녀로 되는 것
칭의에서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곧 신자를 자녀의 지위에 두시고 자녀의 모든 권리를 그에게 주시는 것이다. 양자로 디는 이같은 자녀의 자격은, 중생과 성화에서 오는 신자의 도덕적 자녀의 자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b) 영생에의 자격 
이 특권은 사실상 위에 포함되어 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것이다.


제4절 칭의의 영역
[1] 능동적 칭의
능동적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되어진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시어 죄인을 그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된 사실에 비추어서 이롭다고 선언 하신다.
[2] 피동적 칭의
피동적 칭의는 죄인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일어난다. 죄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칭의는 그 목적에 응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되는 무죄선방의 판결은 죄인에게 전달되어 믿음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제5절 칭의의 시간
[1]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구속의 계획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피택자에게 확실히 전가되었다고 하는데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서가 죄인의 칭의를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성서의 이미하는 바라고 하는데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단순히 이상적이었던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
피택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를 말하는 개혁파신학자들도 이것을 죄인의 칭의의 전체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총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그의 몸(교회)의 칭의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이어서 죄인의 개인적 칭의와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3]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
성서가 이 칭의에 관하여 말할 때에느 흔히 그것은 하나님의 칭의적 은혜의 주관적 적용과 통용을 말한다. 성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그것은 흔히 칭의의 기구 혹은 기구인으로 불리워 진다. 그것은 또한 자주 통용하는 기관이라 불리워 진다.

제6절 칭의의 근거
칭의의 근거에 관하여는 로마교회와 개혁자들 사이에 매우 중대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죄인은 중생에서 그 마음에 주인되는 자기 고유의 의를 기초로 하여 의롭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칭의의 참 근거는, 칭의에서 죄인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제7절 칭의교리에 대한 이의
[1] 성서는 죄인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나, 칭의는 일종의 법적 가치이기 때문에 은혜를 배제한다고 말한다.
[2] 어떤 사람은 칭의를 하나님의 아무 쓸모없는 행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죄인은 사실상 의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3] 이 교리는 자주 사람을 방종하게 만든다고 한다.

제6장 성 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영적 갱신의 관념을 넣어주며, 또한 인간에게 도덕적, 영적 특질을 부여한다는 관념을 전달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적인 관념은 아니다. 그 성서의 용어들은 마음 속에 일으켜진 영적 특질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위치와 관계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성화된 인간은 원리상 생활의 죄악적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다. 이러한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는 것이다.

제2절 거룩함과 성화의 성서적 개념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분리되신다고 하는 관념은 모든 불결에서, 특히 죄에서 분리된다고 하는 관념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거룩함의 관념은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 관계를 가지는 이물과 사물에도 적용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자만이 참으로 주앞에서 거룩한 것이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제3절 성화의 특징
[1] 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라나 이것은 인간이 그 과정에서 전혀 피동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2] 성화는 칭의와 같이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고 도덕적, 재창조적 행위이다.
[3] 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4] 성화의 과정은 그것이 영혼에 관한 한, 죽을 때 완성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 직후에 완성된다.
제4절 성화의 성질
[1]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사실상 그것은 영혼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생에서 심어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는 것이다.
[2] 그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a)성화의 소극적인 면은 죄에서부터 온 인간성의 불결과 부패가 점진적으로 제거된다고 하는 여기에 있다.
(b)성화의 적극적인 면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진되어 생활의 새로운 과정이 일으켜 진다고 하는 여기에 있다.
[3] 그것은 전인에게 영향을 준다.
성화는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 조직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특별히 죽음의 위기에서 완성되며, 또한 죽은 자의 부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성서의 교훈에 의하면, 성화는 오성, 의지, 감정 그리고 양심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4] 그것은 신자가 협력하는 사역이다.
인간이 성화의 사역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악귀와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는 반복적인 경고에서 알 수 있다.

제5절 현세에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서는 죄없는 생활에 이른 신자의 실예를 하나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비참한 죄에 빠져 허덕이는 실례로 언급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하는 요한 서신의 그진술은, 이같은 새 사람은 범죄하지 않든가, 혹은 신자는 죄에서 살지 않는다든가 어느 한쪽을 명백히 의미하는 말이다.
제6절 성서와 선한 일
[1] 선행의 성질
우리가 선행을 말할 때, 그것은 완전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원리상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요, 또는 영적 의미에서 선한 일을뜻한다. 이 선행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외부적 일치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대한 의식적 순종에서도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행의 가장 가까운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2] 선행의 공로적 특징
신자의 선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로적이 아니다. 곧 그것은 보?에대한 정당한 요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한 일에 상을 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의무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가 찬동할 수 있는 일에 상을 주시기로 은혜적으로 약속한 때문인 것이다.
[3] 선행의 필요성
선행은 구원을 공로있게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구원의 피요한 조건은 더욱 아니다  성서는 선한 일을 떠나서는  구원받을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써 성인신자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제7장 성도의 견인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와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라 하겠다.
제2절 견인교리에 대한 증거
이 선택의 교리란, 단순히 구원의 어떤 수단이나 혹은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의 목적에 대한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의 효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자는 어떠한 때에도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제3절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견인의 교리는 거짓 평안과 태만과 방종과 부도덕으로 이끌어 간다는 비난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난이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희가 우리에세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는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교  회  론
  제1편 교 회
제1장 교회의 성질
제1절 성서에 나타난 “교회”라는 말의 용법
구약에서 교회의 주요한 칭호는 “부르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교회”라는 말을 맨 처음으로 사용하셨다.
<1> 일반적으로 이 말은, 예배를 위하여 일정한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단체, 다시 말하면 지교회를 가리킨다.
<2> 어떤 귀절에서는 이 말은, 어떤 개인의 가정에서 모인 가정교회를 가리킨다. 사도시대의 부유층의 인사들은 흔히 자기집 방 하나를 집회의 장소로 제공한 듯 하다.
<3>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그들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혹은 장차 연합될 신자들의 전도체를 가리킨다.
성서에는 교회에 대한 비유적인 명칭들이 몇군데서 발견되다. 곧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집”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 혹은 “새 예르살렘” 또는 “진리의 기등과 터”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제2절 교회의 본질
로마 캐톨릭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질에 관해서 그의견의 차이를 현저히 보이고 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을 외부 또는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이 교직 계급제의 단체는 그 단일성, 성결, 보편성, 사도직과 같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직접 차지하였고, 한편 신자들의 일반적인 단체는 간접적으로만 그것들을 소유할 뿐이다.
캐톨릭파는 이론적으로 그들의 외부적 조직체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으로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제3절 교회의 여러가지 성격
<1>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교회는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는 한, 전투하는 교회이다. 다시 말해서 이 교회는 거룩한 전쟁에 부름받아 현실적으로 그 전투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이다. 거기서는 창검이 승리의 종려 나무로 바꾸어지고, 싸움의 함성은 승리의 노래로 변해지고, 십자가는 면류관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2>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유형적인면과 무형적인면을 다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무형적이라 불리워지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육안으로는 식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행위에서, 말씀과 성례에서, 또는 외형적인 조직과 정치에서 유형적으로 된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위에서, 말씀과 성례의 집행에서, 또는 교회정치의 일정한 형식에서 유형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거들이 교회에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오히려 신자들의 교통적 생활과 신앙고백에서 또는 세사에 대한 공동적인 반항에서, 유기체 다시 말하면 신자의 공동체로써 유형적인 것이다.
제4절 교회의 정의
교회를 정의할 때에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의 구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피택자의 단체, 혹은 신자들의 단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후자는 보다 일반적 개념으로 이것을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라 정의할 수 있다.
제5절 여러 시대의 교회
교회는 여인의 씨와 뱀의 씨가 반목을 시작하였던 그 순간부터 존재 하였다.
<1> 족장시대의 교회
족장시대의 교회는 경건한 가정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사실은 처음에는 집합적인 예배는 없었다. 홍수시대의 교회는 노아의 가정에서 보존되었다. 그리고 지정한 종교가 다시 사멸의 위기에 처해지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세계로부터 구별하여 자기의 특수한 백성이 되게하셨다.
<2> 모세시대의 교회
애굽을 나온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한 국가를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 독립적 조직을 얻지 못하고 오직 이스라엘의 국가생활 안에서 그 조직적 존재를 지탱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교회국가 였다.
<3> 신약시대의 교회
오순절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에서 떠나서 독립적 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확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교적 교회가 되어, 구원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6절 교회의 속성
<1>교회의 통일성
이것은 한 몸의 통일체, 곧 모든 신자를 회원으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사적 지체인 것이다. 이 통일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신앙고백과 행위에서, 공중예배에서, 또는 교회의 외부적 조직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 주고 있다.
<2> 교회의 영성
프로테스탄트는 이 성의 개념을 교회의 회원들에게 적용하였다.교회 회원을 객관적로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게 보고, 또 주관적으로는 원리에서 거룩하다고 본다. 그것은 그들이 새 생활을 소유하며, 완전한 성결을 가지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결은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에서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3> 교회의 보편성
프로테스탄트파는 무형교회만이 진정한 보편적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것만이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으 다 포함하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회원들을 전세계에 가지는 때문이며, 또한 그것만이 인생의 모든 방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7절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교회의 표지는 유형교회에만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여 준다. 개혁파 교회는 항상 세가지 표지를 말하였다.
<1> 말씀의 참된 전파
이것은 그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말씀의 전파가 완전하며 또한 절대적으로 순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상은 이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전파가 근본적으로 진실되어야 한다는 점과 또신앙과 행위에 지배적인 감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성서의 정당한 집행
사실상 이 성례는 말씀의 유형적 전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성례는 말씀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들과 그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3>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교리는 순수하게 유지하며, 성례를 거룩하게 보수하는데 매우 필요한 것이다. 권징을 등한히 하는 교회는 곧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거룩한 것을 남용하게 된다.
제2장 교회의 정치
제1절 교회정치에 관한 제설
<1> 퀘이커파와 다비파
이 파들은 교회의 모든 정치를 원리상 배척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교회의 모든 외면적인 형식, 혹은 조직은 마침내는 퇴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2> 에라스티안파의제도
이 파는 교회를 정부에 의해 제정된 법칙에서 그 존재와 형식을 받은 한 결사로 보았다. 교회의 교직자들은 그들의 위정자에게서 나오지 않는 한, 아무 권리와 능력도 없는 단순한 말씀의 전파자 혹은 교훈자일 뿐이다. 이 파는 교회의 독립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무시하였다.
<3> 감독파의 제도
이 파의 사림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정치를 직접적으로 또는 독림적으로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 위임하였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이 제도가 영국교회에서
감행하고 있다.
<4> 로마 캐톨릭파의 현제도
그들에 의하면,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사도 중 수제자였던 제드로의 후계자오 인정한다. 교황은 교회의 무오한 원수로 존경을 받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 교회의 교리, 예배, 정치를 결정하고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5> 회중파의 제도
이것른 독립파의 제도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제도에 의하면, 각 교회는 상호 독립한 완전한 교회이다. 이같은 교회의 정치권은 독점적으로 교회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대중정치의 이론이다.
<6> 국가교회의 제도
이 제도에 의하면, 교회는 국가와 꼭같은 자원적 결사라고 본다. 국가는 공예배를 개혁하며, 교리와 행위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며, 대회들을 소집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교회의 권리는 전적으로 무시하고 만다.
제2절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원리
<1> 그리스도은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그는 유기적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물어 생명적 또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그의 생명으로 채우시고, 성령으로 지배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생각하고자 하는 원수격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또는 권위의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왕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절대적 의미에서 율법이 되는 유일한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왕의 말씀이기 때문에 양심을 속박한다.
<3>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권세를 주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게 필요환 권세를 교회에 주셨다. 교회원들이 그들을 직원으로 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권세는 교회원들에 의하여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원적 권위에 참여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그 의무를 수행함에 필요한 추가적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다.
제3절 교회의 직원
<1> 비상직원
(a)사도
그들의 직권은 하나님에게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았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영감을 의식하였다. 그들은 이적을 행함으로 그드르이 멧세지를 확증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수고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표적으로써 풍부히 축복받은 것이었다.
(b)선지자
이들은 특별히 교회의 건덕을 말하도록 은사받은 인물들이었으며, 때로는 신사를 계시하며, 미래사를 예고하는 기구였다.
(c)전도자
그들은 가끔 사도들과 함께 다니면서 사도들을 도와 일하며 가르치고, 적원으로 임명되어 파견도 되거 권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2> 통상직원
(a)장로
직원의 칭호로서의 이 명치은 “감독”이라는 명칭 때문에 점차 빛을 잃게되어 폐기 되었다.  이 “장로”라는 명칭은 연륜을 강조하고 “감독”은 감시자로서의 그들의 사역면을 강조하였다.
(b)교사
이 일을 담당한 자들은 다른 직업을 버리고, 교회에서 생활지를 받은 것이었다. 생각켠대 소아시아 칠교회의 “사자”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c)집사
신약은 거듭 집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행6:1-6은 집사직의 인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의 말대로 하면, 여기 언급된 일곱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3> 직원의 소명과 상임
(a)통상직원의 소명
1)내적소명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 하나님의 나라을 위해서 해야할 특별한 일, 필요한 은사가 자기에게 적절하게 주어졌다고하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는 체험 드의 섭리적 지시들인 것이다.
2)외적소명
외적 소명,은 내적 소명을 견고케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소명자에게 준다.
(b)직원의 상임
1)임직식
이것은 당회 혹은 노회의 행위로써 후보자의 성직에 대한
소명을 공적으로 승인 확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안수
임직에는 반드시 안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도 시대에는 분명히 이 둘이 함께 병행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제4절 교회회의
<1> 각종 교회회의
이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대회등으로 되어있다. 어떤 교파는 노회와 대회위에 총회라고 부르는 회의를 두고 있다.
<2> 지교회의 정치
개혁파 교회에 있어서 지교회의 정치는 대의정체의 특징을 갖고 있다. 신자는 그들의 대표자로서 치리하는 장로를 택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목사와 함께 교회정치를 위하여 당회를 구성한다.
<3> 광대교의
(a)광대교의에 대한 성서적 근거
이 영적 통일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외부적 조직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몇 지교회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제15장은 분명히 광대교의의 성격을 말해주는 예루살렘 교회의 실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b)광대교의의 대표적 성격
회중의 직접 대표자들은 당회를 구성하고, 노회에 대표자로 참석하며, 또한 대회나 총회의 대표자가 된다.
(c)그 직권에 속하는 사건들
교회회의는 자연히 교회적 사건들, 곧 교리와 도덕, 교회정치와 권징 또는 그 외의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 통일과 질서를 보존하는데 관계된 사건들만을 다루어야 한다.
(d)이 회의의 권세와 권위
이러한 회의에서 결정된 것들은 충고적이라고 솔직히 선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권위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지 않도록 교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제3장 교호의 권세
제1절 교회권세의 원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는 창설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 그 필요한 권세와 권위를 주시기도 하셨다.
이 권세를 행사함에 있어서 교회는 마땅히 사도적 말씀에서 전달된 정당한 생활과 행위의 표준에 철저해야 한다. 회중 전체에게도 어떤 분량의 권게가 부여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직원들에게는 특별한 분량이 주어졌고, 이 직원들을 통하여 교회는 주로 그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다.
제2절 이 권세의 본질
<1> 영적 권세
이것을 영적 권세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때문이며, 영의 권세의 현현이기 때문이며, 또는 신자들에게만 독립적으로 관계를 가지며, 더욱이 도덕적 영적 방법으로서만 행사되는 때문이다.
<2> 사역적 권세
교회의 이 권세는 독립적이거나 주권적 권세가 아님을 성서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역적 권세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며, 따라서 교회위에 가지신 그의 주권에 종속하는 것이다.

제3절 여러 종류의 교회권세
<1> 교리권 혹은 교훈권
교회는 죄인의 회심과 신자의 건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그것을 해석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더우기 교회는 그 신앙을 형성하는 신경과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교회가 믿는 바를 정확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학연구를 통하여 진리를 발전시키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기도하다.
<2> 치리권
(a)질서유대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적절한 규례들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 권세는 역시 법을 적절하게 적요하기 위한 규례 곧 신조나 종교헌장과 같은 규칙들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것들은 교인의 자격을 인정하고, 직원의 자격을 규정하고, 공예배의 방식을 형성하며, 또한 권징의 규칙들을 규정짓는다.
(a)순결유대권
교회는 권징을 적절하게 시행함으로써 그 순결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권징의 목적은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교인을 용납하는 것과 서거하는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율법을 효과있게 수행하고자 하는데 있다. 둘째 목적은 교회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율법에 순종케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건덕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3> 봉사직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전도할 것을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사도들과 몇몇 초대교회 신자들만이 받은 그
특별 은사는 계시의 시대가 끝마쳐지자 중지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의 일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을 돌부는 자선의 봉사롤 국한되고 말았다.
더우기 신약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구제금을 주고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제2편 은혜의 수단
제1장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
제1절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성서는 교회에서 합법적인 교직자에 의해서만 집행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자들에 의하여 세계에 전달될 수 있으며, 또한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역사 되는 것이다.
제2절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성령은 말씀을 그 기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말씀의 저파는, 성령에 의해서 그 효력이 가해지짖 않는 한ㅇ, 충분한 결실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제2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의 두 부분
<1> 율법과 복음의 차이
복음에 있어서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에는 어떠한 요구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복음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율법의 권능
율법은 먼저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며, 그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에 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또한 인간을 그리스도에�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3> 복음의 권능
그것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화서 믿고 회개 할 것을 권고하며, 진실하게 믿고 회게하는 자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구원의 모든 축복들을 약속한다.
제2장 성례개관
제1절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음 성례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은혜의 수단으로서 완성적인 것이지만, 성례는 말씀없이 존재할 수도 없으며 완성적인 수도 없다.
제2절 “성례”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
“성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감각적 표호에 의하여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접인되고 적용되는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하나님에게 그들의 신앙과 순종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제3절 성례의 강성부분
<1>외형적이며, 유형적인 표호
성례는 각각 외면적 요소, 곧 세례에는 물을 성찬에는 떡과 포도즙을 사용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제공되고 적용되는 곳에서 우리는 성례의 전외면적 사물을 보게되는 것이다.
<2> 내면적 영적 은혜의 의미
이것은 성서에서 여러가지로 표시되었다. 곧 은혜의 언약, 믿음의 의, 사죄 신앙과 회심,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결합등으로 표시되었다.
<3> 표호와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의 결합
이것은 영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 들여지는 곳에 하나님의 은사가 이에 수반하는
것이다.
제4절 성례의 필요성
프로테스탄트는 성례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교훈이기 때문에 의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제5절 구약성례와 신약성례와의 비교
사실상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는 어떤 차이점도 있다. 구약의 성례에는 영적 의미 이외에 국가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앞을 바라보며, 장차 효과가 나타날 은혜의 인호였으나, 신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완성된 구속의 제사를 회고하는 것이다. 구약시대 전체로 보아, 구약의 성례들은 신약의 성례들이 하는 바와 같이 풍부한 영적 은혜의 양을 받는 자에게 전하지 못하였다.
제6절 성례의 수
구약시대에는 두개의 성례, 곧 할례와 유월절이 있었다. 할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건강법으로 행하여졌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죄의 서거를 상징하는 바 은혜언약의 성례가 되었다. 모세시대에 와서 유월절이 생겨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상징하고 예표한 것이었다.
제3장 기독교 세례
제1절 세례의 제도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곧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후 세례를 제정하셨다. 그는 그의 충만하신 중보적 권위로 세례를 제정하시고, 다음에 오는 모든 시대로 하여금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새 관계에 들어가는 표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제2절 세례의 바른 양식
<1> 세례의 예증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성서는 분명히 정화의 개념을 세례의 상징이 본질적인 것으로 표현였다. 이 정화의 관념은 구약의 모든 세결과 관계되어 있으며, 또한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와도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2> 침수는 세례의 유일하고도 바른 양식인가?
침수를 세례의 유일하며 바른 양식으로 생각하는 침례파에 대항하여 우리는 세례에서 정화의 근본적인 개념을 발견하는 한, 침구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어떤 특별한 양식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에게 모여든 대군중도, 오순절에 회심한 3천명도 침수에 의해서 세례받은 것은 아닌듯 하다.
제3절 세례의 합법적 시행자
프로테스탄트는 일반적으로 말씀과 성례의 집행은 동일집권에 속하기 때문에, 복음의 사역자만이 세례의 합법적인 시행자라고 주장한다. 더우기 그들은 세례는 신자들의 공중집회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상당히 공인된 목사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를 합법적이라고 하였다.
제4절 세례 받을 사람들
<1> 장년세례
예수님의 교훈은 장년의 경우 세례가 신앙고백 후에 있어야 한다는 그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 신앙이 고백된 때, 그 진실성을 의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교회는 그 표면적 가치에 의해서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사멸을 파고 들어서 이러한 고백의 진실성을 판결하는 것은 교회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고백자에게
있는 것이다.
<2> 영아세례
(a)영아세례의 성서적 근거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비록 그것이 민족적인 면을 내포하였다고 하나 기분적으로 그것은 영적 언약이었으며 할례는 영적 언약의 표요 인이었다.
어린 아이들도 구약의 은혜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할례를 표와 인으로 받았다.
신약에 와서 세례는 은혜언약에 들어가는 표요 인이 되었다. 할례는 폐지되었다. 이것은 영적 읨에서 죄의제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할례에 해당한다.
사도시대에도 어린 아이들이 가끔 그들의 부모와 함께 가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믿을만한 이유가 된다. 신약은 조금도 모순없이 가족들이 계속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신약에서 영아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솔직한 명령도, 영아 세례의 명백한 실례도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침례파가 주장하는 영아세례그지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b)영아세례의 근거
이질문에 대하여 두가지 답변을 제공하여 왔다. 첫째는 영아들의 가정적 중생을 근거로 해서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둘째로 중새의 약속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약속을 근거로 해서 영아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c)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영아세례
만일 영아들이 세례 받았을 때 중생되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마음에 내재하는 은혜의 시초가 어떤 신사적 방법으로
강화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세례의 역사가 그 순간에만 국한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제4장 성 찬
제1절 성찬의 제도
떡과 포도즙은 주님의 상하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이 요소들은 육신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 의도의 희생의 열매를 영적으로 통요하는 것이며 또한 주님의 재림시까지 주님의 그 구속사역을 끊임없이 기억함을 뜻하는 것이다.
제2절 성찬이 의미하고 날인하는 것들
<1> 성찬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예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영혼에 생명 능력, 기쁨을 줌으로써 영적 식사의 효과를 나타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유적 신체의 모체가 되는 신자들이 상호 결합을 상징한다.
<2> 성찬이 날인하는 것
그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스스로 당하신 사실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사랑을 그 참여자에게 인쳐준다. 그것은 언약의 모든 약속들과 또 복음이 제시하는 모든 풍부한 것들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확증을 �음으로 이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준다. 또 구원의 축복들이 현실적으로 자기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참여하는 자들에게 확증시킨다. 그것은 성례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들 편에서는 신앙고백의 확장이다.

제3절 성찬과 주의 임재의 문제
<1>로마 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육체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성체에 임재하신다고 생각한다. 사제가 이것이 내 몸이라는 식사를 말하는 순간, 떡과 포도즙은 즉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2>루터파의 견해
그들에 의하면 떡과 포도즙은 여전히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전인격, 곧 몸과 피는 그 요소들속에, 그 요소들 밑에, 그 요소들과 함께 임재한다는 것이다.
<3> 쯔윙글리파의 견해
쯔윙글리는 주의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체적 임재를 부정하면서도 참된 신자는 영적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의 성찬의 의의를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하여 행하신 것에 대한 기념에서 또는 참여자의 신앙고백의 행위에서 찾았다.
<4> 개혁파의 견해
칼빈은 양자의 중간적 의미를 표시 하였다. 그는 주의 성찬에 있어서 육체적 또는 장소적인 임재 대신에,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가르쳤다. 그는 쯔윙글리와 그 의견을 달리하여 성례의 보다 더 깊은 의의와 또는 신자가 성찬에서 기뻐하는 신유적 교통을 강조하였다.
제4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효과
주의 성찬은 신자를 위해서만 제정되었기 때문에 죄인의 마음속에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는 목적에는 봉사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강화하는 데만 이바지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의 은혜요, 영적 양육과 소새이 은혜요, 구원의 확신의
은혜인 것이다.
제5절 주의 성찬과 그 참여자
주의 성찬은 오직 신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과 주의 성찬의 영적 의의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참 신자라고해도 부도덕한 행위가 없을 때에만 성례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다.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글쓴이 : 띠띠빵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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