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캄보디아의 정체성
캄보디아 [柬埔寨, Cambodia]
개요 :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고 일본 패전 후 1947년 5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53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정식명칭은 캄보디아왕국(The Kingdom of Cambodia)으로 1993년 입헌군주제로 복귀했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 평원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로,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남서쪽으로 시암만(灣:타이만)에 면한다. 국명은 프랑스어(語)인 'Cambodge'를 영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고대의 깜부자(Kambuja; 앙코르) 왕국에서 유래했다. 1975년에 폴포트(Pol Pot)가 이끈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 시절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이 이루어져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행정구역은 20개주(khaitt), 4개 크롱(krong)으로 되어 있다.
수도 : 프놈펜 (Phnom Penh)
언어 : 크메르어
기후 : 열대 몬순기후
종교 : 소승불교 95%
면적 : 18만 1040㎢
역사 : 1세기경 카운디냐(Kaundinya)라는 인도
인구 : 14,241,640 명(2008년 기준)
해안선 : 443㎞
종족구성 : 크메르족 (90%), 베트남인 (5%), 중국인 (1%)
독립일 : 1953년 11월 9일
국가원수 : 노로돔 시아모니(Norodom Sihamoni) 국왕(04. 10. 29 즉위)
국제전화 : +855
정체 : 입헌군주국
통화 : 리엘(Riel)
인터넷도메인 : .kh
홈페이지 : http://www.cambodia.gov.kh
평균수명 : 61.69 세(2008년 기준)
출산율 : 3.08 명(2008년 기준)
1인당GDP : 774 $(2009년 기준)
실업률 : 2.5 %(2000년 기준)
수출규모 : 40.71 억$(2007년 기준)
수입규모 : 54.13 억$(2007년 기준)
인구밀도 : 79 명/㎢(2008년 기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캄보디아 위치
2. 캄보디아 선교전략
(1) 캄보디아 선교와 한국 교회
우리나라는 10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세계에서 선교를 많이 하고 있는 나라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 동남아 쪽을 보아도 우리보다 50년에서 100년 앞서서 기독교를 받아 드렸던 나라들이 이제는 퇴보하여, 모슬렘이나 힌두교 혹은 불교가 성행하는 나라들이 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세계 선교를 감당케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우리와 싱가폴이 선교에 동참하고 있지만 싱가폴의 선교 실상은 너무나 미미한 상태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120여개 국가 약4000여명의 선교사가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선교 일을 일선에서 직접 뛰어서 하는 선교사님들의 노고도 있겠으나, 이 선교사님들이 일선에서 열심히 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뒷바라지 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물 속에 빠져 있는 어린 아이를 구하려고 밧줄에 몸을 매고 직접 들어가서 아이를 구한 사람이나, 뒤에서 내려 갈 수 있도록 그 밧줄을 붙잡아준 사람들이나 다 똑 같이 그 어린아이를 구한 것은 마찬 가지인 것이다. 선교사님들의 뒤에는 항상 한국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어떤 교회는 교회 재정의 65%를 선교에 투자하며 쓰고 있다고 한다. 먼저 내 교회, 내 교육관을 짓고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교, 그 다음에 우리라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를 하는 교회가 아직도 한국에 많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세계 여러 나라가 다 우리의 선교의 영역이요 현장이다. 그 중에서도 캄보디아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통하여 잘 알려진 나라이다. 그러나 실상 선교의 미개척지 중에 하나인 나라이다.
인구 1200만 정도에 1%로도 안되는 기독교 인구는 가히 그 나라 기독교의 실상을 알고도 남으리라 짐작된다. 그 나마 폴포트의 공산화 당시 90%나 되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물론 교역자들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 수에 비해 교역자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캄보디아에서 활동하고 계신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은 대략 60여명이 된다고 한다 (1999.11월 현재).
어떤 분은 태권도로, 어떤 분은 장애인 선교로, 고아 선교로, 혹은 교육 선교, 의료 선교로 나름대로 열심히 어려운 환경속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특히 금년도 7월 달에 내전이 발발하면서 한국의 관심 가운데 있던 나라가, 9월초에 베트남 에어라인 추락 사고로 선교사님 한 가정이 순교하심으로 한국 교회의 캄보디아에 대한 선교에 관심은 더 높아 지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미전도 미개척지 중에 하나인 나라 캄보디아에 관심을 기울여 기도와 물질적으로 적극적인 후원이 있어야 되리라 믿는다. 이제 한국 교회는 중국에서 아프리카로, 동남아에서 인도차이나 중에 캄보디아로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2) 캄보디아 선교의 현재적 문제점
1) 국가간 정치적 관계에 비친 문제
캄보디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나라 중에 하나이다. 주변나라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들과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을 해오면서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만, 또한 그 나라들의 정치적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유는 과거에 2원 집정 체계로 정부가 구성되어 있어 정치적인 안정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2원 체제는 교회에도 그 대로 파급이 되어 1총리 계열 교회와 목사, 그리고 2총리 계열 교회와 목사가 따로 따로 있어서 교회들도 정치적으로 매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98년 8월 선거를 통하여 훈센이 40% 정도의 의석을 차지하여 총리로 선출이 되었지만, 과반수가 되지 못한 지금의 정치 형태는 항상 불안의 불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는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가까운 나라이다. 그래서 프놈펜에는 김일성이 놓았다는 김일성 도로도 있다. 왜냐하면 시아누크가 망명시 북한의 김일성 궁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지금도 왕궁의 경호는 북한의 무술관들이 경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10월 달에 우리나라하고 정식 수교를 맺었다. 이제 북한은 경제난으로 캄보디아를 돕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 훈센측은 경제의 힘이 있는 우리나라에 눈을 돌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캄보디아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 한다. 그들은 또한 우리 한국 사람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미국사람들은 월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캄보디아 영토내에 들어와 본부를 설치하고 게릴라전을 펼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 영토내에도 비행기를 이용해 수많은 폭탄을 투하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캄보디아 사람들이 희생당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일본 사람들은 제2차 세계전쟁당시 3년여 동안의 지배로 그들을 착취했던 문제로 싫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가 없기 때문에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하는데 한층 더 좋은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적 안정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선교 역시 그 나라의 안정된 정치가 있어야 마음 놓고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캄보디아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2) 치안 혼란의 어려움
얼마전 훈센이 자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 동분 서주 하며 주변 나라들을 방문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캄보디아를 도와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투자도 많이 하라고 하였다. 그때 주변 나라들의 요구는 먼저 캄보디아에 치안을 확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훈센은 그들과 약속을 하고 치안을 잡겠다며, 공설 운동장에 많은 총기들을 모아놓고 부르도자로 미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치안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어린아이나 부녀들의 납치가 성행하고 있고, 돈200불-300불정도의 중고오토바이를 탈취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빼앗아 가는 곳이 이곳의 현실인 것이다. 지금도 선교를 하며 자녀들이 한시도 보이지 안으면 항상 염려를 하며 지내는 곳이 이곳의 현실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캄보디아는 개인이 총을 소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그들의 타겟이 되고 있다. 밤 6시가 넘으면 밖에 나갈 수 없다는 나라가 캄보디아다. 지금 훈센 총리가 강력하게 치안 확립을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꽤 많은 시간이 소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3) 경제와 보건의 어려움
캄보디아의 GNP가 지금 정확히 얼마 되는지는 알 수 없다. 1995년도의 경우 US 285 달러였다고 한다. 지금은 아마 300달러 정도 보고 있다. 그 만큼 빈국 중에 하나이다. 빈민촌에 가보면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 죽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부지기수이다. 태국을 비롯하여 인도차이나 반도가 에이즈에 시달리고 있다. 캄보디아 역시 어린아이들의 매춘이나, 의료 시설 등의 미비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으나 의약품의 부족으로 인하여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식수의 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빗물을 받아 먹고 생활하고 있다. 오염된 물로 인한 이질이나 장티푸스로 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력 시설의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 프놈펜에서도 하루에 수십번씩 전기가 나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지금 캄보디아는 경제 회생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적대 관계에 있는 베트남도 자기 나라보다 10년 앞섰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시아느쿠 대통령이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만약 불교도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자살 했을 것이다. 나라가 이 모양으로 치닫는 것을 볼 때 안타깝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신문 지상을 통해 보았다. 지금 캄보디아는 내전과 전쟁에 시달려온 나라를 일으키려고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저기에서 경제 회생의 몸부림이 보이고 있다.
4) 선교사 자녀 교육 문제
선교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 고 묻는 설문에서 단연 으뜸 되는 문제가 자녀들의 교육 문제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이건 자녀 교육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특히 자녀들의 언어 습득 문제에 있어서도 심각한 것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는 인터네셔날 학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의 학비는 상상 할 수 없는 비용이기 때문에 겨우 생활비만 유지하는 선교사님들은 그곳에 보내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변변한 외국인을 위한 교육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 학원 정도의 개념인 교실 하나가 학교인 개념처럼 되어 있는 곳이 있기는 하나, 학교라고 하기엔 너무 미흡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자녀 교육은 시켜야겠고, 어찌됐든 자녀들도 함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3. 한국교회의 캄보디아 선교 전략
(1) 전문적 선교사와 비전문적 선교사를 통한 선교
선교는 선교에 전적으로 매달려하는 전문 선교사와 어떠한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직업을 통해 선교를 할 수 있다. 실예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을 통한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인도 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에 기업체를 세운 크리스쳔 기업가는 그곳에 일도하며 선교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선에 배치하여 선교를 하고 있다. 이들은 일을 통해 직접 그곳의 근로자와 부딪히며, 대화를 통해 서서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모슬렘 지역이나 공산권에서는 이 방법이 매우 잘 활용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너무 선교에 치우치면 회사의 일을 그르치고, 또 일에 치우치다보면 선교의 일에 게을러 진다는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에는 지금 전문인 선교사가 지금 약 30가정 정도 들어와서 사역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캄보디아 전체를 보았을 때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신변적인 위협으로 말미암아 수도인 프놈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의 단점 중에 하나인데, 이제 전국에 걸쳐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이 들어가 활동을 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캄보디아를 위한 젊은 전문 선교사님들이 더 헌신하고 들어와야 될 곳이라고 생각한다.
(2) 국내 교회 및 현지 교회와의 협력을 통한 선교
우리는 사회에서 공공 단체들이 어느 불쌍한 고아 단체나 양로원 등에 자매결연을 맺어 그 단체를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잇다. 이와 마찬 가지로 우리나라의 교회와 그곳 현지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선교를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선교에 여력이 있는 교회가 어려운 캄보디아 교회를 도와 물질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여러 가지를 도와서 선교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개척하는 사업에 현지 교회의 정보를 얻어 물질적인 지원을 함으로 사역을 할 수도 있고, 사역자를 배출하고 싶으면 현지 교회의 사람을 선출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하여 돕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3) 지역 사회 개발을 통한 선교
캄보디아는 지금 경제의 회생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러한 경제의 회생에는 사회 간접 산업이 발전 되어야 한다. 도로, 항만, 전력, 수도, 하수 등 모든 기간산업이 먼저 발달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부적인 차원에서 어떠한 기간산업을 돕기는 힘들다. 그러나 선교 차원에서 어떠한 지역의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선교에 동참 할 수는 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그곳에 필요한 학교를 세워 준다거나, 의료 시설이 낙후된 곳에 병원을 세우 준다거나 하는 것으로 그 한 지역들의 개발에 참여함으로서 우리는 선교 할 수 있는 것이다. 낙후된 곳이 캄보디아에는 너무나 많다. 초창기 우리나라에 오셨던 외국 선교사님들이 이러한 방법을 동원 했던 것을 감안 하면, 지역 사회의 개발을 통한 선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국내 입국자들을 위한 선교
요즈음 들어 우리나라에 동남아의 후진국들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실제로 외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의 힘든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미얀마의 한 사람은 우리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들은 적이 있다. 길거리 어디를 가도 외국인 근로자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들이 달라졌다. 선교사님들을 직접 보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을 그냥 일 만 시키고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교회마다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별도의 예배시간을 가진 다든가 혹은 그들을 위한 위안 잔치를 마련하여 찾아온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캄보디아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노동자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에서 보내 주지를 않고 있고, 그들이 한번 외국에 나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나라와 캄보디아 간에 국교가 수립이 되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인력들도 조만간 우리나라의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리라고 생각한다. 들어온 이들을 위한 전략을 마련하여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변화시켜 다시 본국에서 그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일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선교 전략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5) 현지 신학교 운영을 통한 선교 전략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도 처음에 평양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 신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사람들을 양성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바울이 순회전도를 하면서 그곳에 사람들을 세워 그곳을 치리하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이나 그의 서신서 등을 통해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신학 훈련을 시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금년 11월 달에 우리나라 감리교 교단에서 캄보디아에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시찰단을 파견했고, 조만간에 신학교가 세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러한 신학교를 통한 선교전략을 빼놓고는 생각 할 수 없다. 본인도 이 신학교 사역에 중점을 두어 현지인을 양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아주려고 계획하고 있다.
4. 캄보디아의 정치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다. 역사적으로 캄보디아는 국경을 침범하고 그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두 나라의 위협가운데 있었다. 앙코르 왕조때 크메르는 지금의 베트남과 태국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15세기 앙코르 왕조가 몰락할 때 베트남과 태국으로부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1945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캄보디아 왕국이 되었으나, 1970년에 정변이 일어나 크메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대까지 시하누크 왕은 국가의 수반이요 절대적 권력자였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왕위를 사퇴하고 국무총리가 되었다.
1975년에는 크메르 루지가 정권을 장악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79년 베트남이 국경 분쟁을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크메르 루지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크메르 루지에 반대하는 그룹으로 허수아비 정부를 세웠으며 그 이후 10여년간 국내는 3개의 파벌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이다가 1990년 UN에 의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1991년에는 UN에 의하여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93년 5월 23일에 우여곡절 끝에 20억달러에 이르는 유엔임시행정기구의 엄청난 행정비용과 2만 2천명에 달하는 평화유지군의 분투적인 노력 속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크메르 루즈파가 빠지고 시아누크 계열의 노로돔 나라니드가 이끄는 캄보디아 민족통일 전선 (FUNCINPEC), 프놈펜 정부의 훈센 수상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 (CPP), 손산의 불교 자유민주당(BLDP) 등 20여개의 군소정당이 참가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비례 대표제로 실시된 이 선거에 서 펜신팩이 약 46%, 캄보디아 인민당이 약39%, 불교자유민주당이 약3.8% 기타 군소 정당 중에서 몰리나카가 약0.4%를 차지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제헌 국회 의석수 120석에서 펜신팩이 58석, 인민당 51석, 불교자유민주당 10석, 그리고 몰나카당이 1석으로 각각 배분되기도 하였으나 선거에서 승리한 펜신팩의 정권인수와 정권장악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펜신팩 출범 당시 1만 2천여명에 달했던 병력이 난민틈에 끼어 해외이민과 이탈로 거의 반으로 줄어 훈센정권의 정규병력 10만여 명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으며 훈센 정권 또한 선거 결과를 순수히 승복하지 않고 선거 개표 부정을 이유로 일부 주에 대한 재선거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3년 9월 21일 제헌의회는 몇 차례 헌법 초안을 개정한 뒤 과도 정부 수반인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의 캄보디아왕국 (Kingdom of Cambodia)의 새 헌법안을 통과 시켰다.
새 헌법의 주요 내용으로 국왕은 군 통수권과 각료 임면동의권, 국제 조약 비준권, 외교사절의 신용장 수리권등을 갖고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국가원수로 존재하고 캄보디아 왕국은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권을 강조하여 민족적. 종교적 평등을 보장하고 사형제도와 성차별을 금지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임시 조항을 두어 5년간의 신헌법1차 내각에 한해 2명의 공동총리를 규정하였다.
1993년10월 헌법에 따라 국왕에 노로돔 시아누크, 선거에서 승리한 캄보디아 민족 통일전선 FUNCINPEC의 당수이며 시아누크의 장남인 노로돔 라나리드가 제 1총리, 야당으로 전락한 전 정권의 수상인 훈센을 제2총리로 하는 캄보디아 왕국의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2원집정체제는 불안을 씨앗으로 안고 출발하여 급기야 1997년 7월에 제1총리와 2총리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라나리드가 망명을 가게되었고, 각국의 평화 중재로 다시 1998년 8월에 UN의 감시하에 다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이 결과 지금의 CPP가 승리를 거두어 그동안 문제가 계속 되었던 2원집정체제를 거두고 이제 1원 집정체제로서 훈센 총리가 정권을 장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2003년 총선을 실시하여 다시 훈센의 cpp가 승리하였고 삼랑시의 당이 약진을 하였으며 라나리드의 훈신펙은 많은 수의 의원을 잃게 되었다.
5. 캄보디아의 경제
캄보디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로, 그들은 주로 공무원, 어업, 농업, 소규모 무역상, 식당경영, 상점주인, 자동 판매기업 등에 종사한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활동에 종사하며 15%가 경제분야에서 봉사한다.
주 수입원은 잉여농산물 판매, 어업, 원목, 보석, 채광 및 판매, 소매사업 등을 통해서 얻어진다. 생산물로서는 고무,쌀,콩,담배,시멘트,제지,생선,옷감,바스켓,비단생산과 직조 등이며
무역상대국은 러시아 동구유럽, 싱가포르, 타일랜드, 홍콩, 일본, 베트남 등이다. 고무, 원목, 콩, 담배등은 수출하고 식량, 원유, 소비재, 원자재 등 수입한다. 현재 프놈펜에 4개의 전력발전소가 있고 그 외에 몇 개가 더 있다.
모든 연료와 대부분의 원료, 자본 재,소비재를 수입해야한다. 최근에 주 수출품이 고무에서 목재로 바뀌었다. 목재는 현재 캄보디아 수출액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 금과 담배의 적환이나 외국의 원조가 경제를 지지하는 주요 재원이 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통화 단위는 리엘(Riel)이며, 금액 다음에 R 을 붙인다. 1989년 중반 U$1에 대해 200R 정도이던 것이 지금은 약 4,000 R (2004년 1월1일 현재)을 하고 있다. 동전은 없고 모두가 지폐이며 50,100, 200, 500, 1,000, 2,000, 5,000, 10,000, 20,000, 50,000, 100,000짜리가 있다.
1인당 GNP는 U$285(1995년 기준)달러로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6. 캄보디아 농촌의 문제점
이 글은 이시영선교사님이 캄보디아 데일리에 연재했던 내용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캄보디아 선교를 위하여 모두가 공유하는 글입니다.
캄보디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인데 최근 자료에 의하면 GDP가 2000년 기준하여 257달러인데, 이는 세계은행이 정한 가난의 기준치보다 30%가 낮은 수치라고 한다. 또한 2003년의 통계에 의하면 2002년도 GDP가 278달러로서 캄보디아 전인구의 35.9%가 가난한데 농촌이 더 가난하다. 농촌인구의 47%가 가난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10%가 가난하다고 한다. 농촌의 인구가 전인구의 90%이므로 캄보디아 전인구의 절반정도가 가난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Media Business Net에 의하면 90%의 농민 중에 직접 농사에 종사하는 인원은 75%, 공장이나 회사의 근로자들이 15%라고 한다.
가난과 관련하여 뚜렷하게 자료화된 것은 없지만 교육을 받지 못한 인구가 교육을 받은 인구에 비하여 농촌인구가 훨씬 많은 수치를 나타낸다. 남자의 경우 무교육자는 농촌인구의 77%이나 초등학교 졸업자는 64%, 중등학교 졸업자는 42%, 고등학교를 마친 사람은 불과 11%이다. 여자의 경우도 비슷한 수준이다. 그 외 무교육자 혹은 문맹자는 결혼도 일찍 하고, 출산율도 높으며, 아기들의 유아 사망률도 높으며, 영양상태는 불량하며, 빈혈률이나 각종 질병의 이환률도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 즉 무지 혹은 무교육=빈곤=질병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도시의 사람들 중 가장 큰 문제는 거리의 아이들이다. 이는 프놈펜이나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놈펜에서만 대략적으로 약 10,000-20,000명의 거리의 아이들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가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거나 농촌에서 살길을 찾아 도시로 흘러 들어온 아이들이다. 농촌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대부분이 도시로 몰려든다. 모두가 빈곤과 아울러 무 농토 농민과 관련이 있다.
농촌에서 아주 어려운 사람들은 무 농토 농민이다. 농촌에 살기는 하지만 남의 논에 소작을 해서 겨우 연명하는 부류이다. 이들의 일부는 토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움막이나 오두막과 같은 거처할 집도 없다. 이는 농촌뿐 아니라 캄보디아 사회 전반에서 가장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계층이다. 캄보디아에서는 근래에 무 농토 농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984년도에 무 농토 농민이 총 가구수의 3%정도이던 것이 1999년에는 12%(약 120만명)이며, 이중 여자가 가장인 가구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21%).
무 농토 농민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는 새로이 결혼하여 분가하는 것이 22%이며,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농토를 파는 경우가 21%, 그 외 자기들이 생산한 농산물로서는 가족의 식량을 댈 수가 없어서 식량을 마련한다거나 또는 부채를 갚기 위하여 농토를 파는 경우이다. 거의가 경제적인 이유이다. 무 농토 농민이 되면 한 두 해는 고향에서 버티지만 일거리를 찾아서 도시로 떠나게 된다. 2000년도에만 무 농토 농민의 약 22%가 그들의 정든 마을을 떠났다.
무 농토농민의 이주와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점은 도시 주변의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다. 이는 80년대와 다른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즉 96년과 98년의 인구조사결과를 비교해본 결과 90년대 후반에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2년 사이에 도시로 새로 이주한 인구가 배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96년도에 17%이던 것이 98년도에는 30%라는 수치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농촌에서의 무 농토 농민이 도시로 향하여 일자리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부산물이기도 하나 도시 주변의 인구집중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게 된다. 특히 프놈펜 주변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유동인구도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96년도에는 150,000명이 안되던 것이 98년도에는 300,000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98년도 이후에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이후에 더 많은 무 농토 농민이 도시로 향하여 빈민촌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도시로 향한 빈민들은 무주택 가구로 전환되어, 농촌에서의 무 농토 농민에 이어 도시에서의 무주택 가구가 캄보디아에서 가장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결국에는 무 농토 농민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이다. 1998년도 조사 자료에 의하면 가장 많은 무주택자는 프놈펜의 22.3%(프놈펜의 1백만 인구중 22만 명이 무주택자)이며, 그 다음이 캄퐁톰(11.7%)과 컨달(11.3%), 바탐방(8.3%), 캄퐁참(7.4%)주이다. 이들은 주로 길거리에서 혹은 사찰주변의 개방된 공간들과 시장주변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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