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역사
캄보디아 소개
헹 쌈린 정부의 핵심은 소련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맑스-레닌주의 당인 PRPK(The People's Revolution Party of Kampuchea)였다. 그러나 1989년에 PRPK가 아닌 캄푸치아 의회는 국가명을 캄보디아국가(The State of Cambodia)로 바꾸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중립과 비동맹에 바탕을 둔 외교정책을 선언하였다.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국기도 앙코르 사원을 도안화한 국기로 개정하였다.
1989년 7월 해외투자유치를 위하여 해외투자법을 채택하고, 해외투자의 종류를 계약기업협력, 합작투자, 전액 외국인 소유기업으로 구분했으며, 각료위원회가 모든 투자 신청을 검토하고 투자 관련 법규를 관리감독하도록 했다. 외국투자가들은 국유화 당하지 않을 것과 최초의 이윤이 발생한 이후 2년간 조세감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캄보디아로부터 보장 받았다. 1992년에 있었던 미국의 금수조치 해제 이후 해외자본이 많이 들어왔다.
1980년대말 캄푸치아 분쟁의 해결을 가시화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고, 1990년대에는 미소간 냉전의 완화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약화로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진 상황하에서 캄보디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과 소련간의 관계가 개선되어 미국의 캄푸치아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1990년에 미국은 유엔에서CGDK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캄푸치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트남과 직접 대화할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1991년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자, PRK와 세 연립세력으로 구성된 4개 정파정부안이 대두되었다. 1991년 6월 캄보디아 대표기구로 훈센파 인사 6인과 시하누크, 폴 폿트, 그리고 쏜 싼파 인사 각각 2인씩 총 12인으로 구성된 최고민족평의회(SNC Supreme National Committee)를 구성하고 의장에 시하누크, 부의장에 훈센을 선임하였다. 6월 24일에 위의 4개 정파가 태국의 팟타야에서 무기한 휴전과 외국군사원조 거부라는 원칙에 합의하고 각 정파간의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년 10월에는 4개 정파를 포함하여 19개국 대표가 파리평화협정에 극적으로 합의함으로서 13년간의 캄보디아 내전이 일단 끝났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각 계파 군대의 70퍼센트 무장해제
② 시아누크를 의장으로 한 최고민족평의회 활성화
③ 유엔평화유지군 파견
④ 유엔 캄보디아 잠정통치 기구(UNTAC) 감독 하에 자유선거 이행을 위한 제반조치 추진 등이다.
이 결정에 따라 1992년 6월 20일 국제기구 대표들이 도쿄에 모여 캄보디아 재건을 위한 각료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캄보디아 재건과 부흥에 관한 선언과 평화 이행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재건기금으로 8억8천만 달러를 조성하는데 합의하였다 캄보디아 재건국제위원회(10CRC: 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Reeonstruction of Cambodia) 의장국가에 선임된 일본은 5,000만 - 2억 달러의 지원금을 재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20개 정당이 참가한 1993년 5월의 선거예서 시하누크와 그의 아들 라나리드가 이끄는 캄보디아 자주 ·중림·평화·협력을 위한 민족연합전선(FUNCINPEC: United National Front for a Independent. Peacefut, and Cooperative Cambodia) 이 예상을 뒤엎고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 Cambodia People's Party)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이 선거에서 시하누크의 FUNCINPEC는 120개 의석중 58석(45.5퍼센트)을. 훈센의 KPRP를 개칭한 CPP는 51석(38.2퍼센트)을, 그리고 쏜 싼의 불교자유민주당(BLDP'Buddhisst Liberal Democratic Party)이 10석(10퍼센트)을 차지하였으며, 선거에 불참한 크메르루즈는 5퍼센트의 지지율을 얻었다.
총선 이후 12인의 헌법기초위원이 신헌법을 초안하는 동안 각 정파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렸으며. 그 결과 시하누크를 다시 국왕으로 추대하여 입헌군주제로 복귀하였다. 캄보디아는 왕정-공화정-사회주의를 거쳐 33년만에 다시 왕정국가로 회귀한 셈이며, 시하누크 자신도 국왕-국가주석-망명정부의 지도자-국왕의 위치를 전전하다가 71세의 나이에 새로운 지도자(입헌군주국의 왕)로 거듭 난 것이었다.
결국 14장 140개 조항으로 된 신헌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자유민주주의, 다당제, 삼권분립, 민족과 종교적 평등, 영세중립, 비동맹, 내정불간섭, 자유시장경제, 18세 이상 국민의 참정권 부여, 성 차별 금지, 사형제 폐지이다.
신헌법에 정해져 있는 국왕은 '군림하되 정치권력을 갖지 않는 국가 통합의 상징'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수상과 각료에 대한 임명동의권, 국가비상사태시 수상과 국회의장의 동의하에 비상사태 선포권, 군통수권, 국가안전회의 의장직, 국가법조회의 의장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적 명성과 그를 견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조직이나 힘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하누크는 무소불위의 위치를 확보한 바와 다름이 없다.
신헌법 하에서 1차 내각에 한한 것이지만 향후 5년간은 2명의 공동수상제를 두고 있다. 제1 수상에 라나리드를 제2 수상에 훈센을 내정했으며, 내각의 각료직도 균등하게 분배되는 등 외형상으로 2중 권력구조를 형성하여 협조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라나리드의 FUNCINPEC는 하부조직의 취약성, 5,00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 보유 등 정국장악 능력이 부족한 반면 훈센의 CPP는 전 국토의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고 10만의 군대, 5만의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는 입장이다.
라나리드는 시하누크의 아들로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정치귀족 출신인데 비해 훈센은 농민 출신으로 크메르루즈 게릴라로 정치에 입문한후 베트남이 지원하는 공산정권에 참여하여 크메르루즈군을 타파하고 친베트남 정부하에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외형적으로 시하누크와 폴 폿트가 정치적으로 경합을 벌일 때 내면적으로 라나리드 와 훈센도 경합을 벌이며 정치적 입지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크메르루즈군을 축출해 낸 친베트남 세력과 시하누크 왕 계열의 친중국 세력으로 내전을 벌이다 유엔의 중재로 1993년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으며,
그 결과 양 세력은 권력을 공유하는 입장이 되었다. 1997년 6월 폴 폿트의 투항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력면에서 약세를 보이던 라나리드측이 르루즈를 영입하기 위해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훈센은 라나리드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마침, 1997년 7월초 제2수상인 훈센은 국왕 시하누크가 신병 치료차 중국의 베이징에 체류하고, 제1수상인 라나리드가 프랑스를 방문한 사이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하였다. 반(反)훈센 국회의원들은 방콕에서 FUNCINPEC, 크메르민족당(KNP) 그리고 불교자유민주 당(BLDP)의 반(反)훈센 인사들과 캄보디아 사태해결을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훈센 정부에 대하여 경제제재와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국제사회에서 훈센 정부의 고립을 촉구하였다. 미국, 독일, 호주 등은 즉각 원조를 중단하였다 예산의 1/2 가량을 해외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캄보디아 정부는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져 1994년이래 최대의 난민들(약 3만 5천명)이 태국으로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세안 국가는 1997년 7월에 예정하였던 캄보디아의 아세안 가입을 연기하였다.
훈센 정부는 "현재 상황은 정쟁도, 쿠데타도, 내전도 아니다. 라나리드가 크메르루즈 세력을 프놈펜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저지하는 것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라나리드 제1수상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무기밀반입 및 공산반군 크메르루즈와 결탁 등의 혐의로 기소하였다. 11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 훈센 제2 수상은 자신이 "캄보디아호의 유일한 선장이며……. 아무도 현정부를 해체할 수 없다" 며, 현재 라나리드를 지지하는 FUNCINPEC도 각료회의에 참석하고 있고 국왕이 축출되지도 않았으며, 의회도 업무를 계속하는 등 헌정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권력을 찬탈한 것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라나리드는 캄보디아 법정에서 1998년 3월에 3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훈센의 제의로 22일에 시하누크가 사면에 동의함으로서 1998년 7월 선거에 출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캄보디아에 대한 원조 중단과 아세안 가입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안보리는 캄보디아의 사태에 대하여 '51년에 체결된 캄보디아 내전종식을 위한 파리협정정신으로 돌아가 모두 모든 관련 정파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캄보디아 정부에 1998년 5월의 자유롭고 공정한 총선거가 실시되기 바란다'며 중립을 표하였다.
훈센은 라나리드를 축출해내고 제1 수상직에 실용주의 노선의 정치가인 웅 후온을 선출하였는데, 시하누크는 이 신정부를 승인했고, 중국은 물론 일본도 캄보디아 내 평화유지를 조건부로 훈센 정부를 승인하였다. 웅 후온 제1 수상은 캄보디아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은 후 1971년에 호주에 유학을 갔다가 크메르루즈 정권이 들어서자 귀국하지 않고 호주시민권까지 얻으며 호주에서 생활한 인물로, 1991년 FUNCINPEC 호주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신하고 1993년에 귀국하여 새 정부에서 통신, 교육, 외무장관을 역임한 CPP와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1998년 일본의 중재로 캄보디아평화정착안을 위한 기금 20억 달러를 조건으로 훈센 정부군과 라나리드 저항군 간의 휴전, 라나리드 재판과 사면, 그리고 7월 총선이 캄보디아에게 제의되었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사안은 라니리드가 참여한 평화롭고 자유로운 총선이었다.
유엔의 감시 하에서 우격다짐식으로 시행되었던 1993년 선거와 달리 최초의 자유선거가 캄보디아 내에서 1998년 7월 26일에 실시되었다. 등록된 유권자의 수는 540만명 정도였는데, CPP는 64석(전체투표자의 41.27퍼센트), FUNCINPEC는 43석(31.70퍼센트), 그리고 쌈랭씨당이 15석(14.27퍼센트)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CPP는 총 122석의 2/3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라나리드의 FUNCINPEC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수상에는 훈쎈. 하원의장에 라나리드, 상원의장에 CPP당의 당수인 치아 씸(체아 씸)이 결정되었다. 이외에도 CPP측이 국방상직과 재무상직을. FUNCINPEC측이 내무상직과 법무상직을 맡았다.
이 총선을 두고 야당들은 국제적 동정을 기대하며 총선이 협박과 사기에 의한 부정선거라고 항의하고 시위를 벌였으나 국제선거감시단의 "자유공정선거로 보기에 충분하다"라는 평가와 아세안국가들의 지지로, 시하누크 국왕이 라나리드에게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을 요구한 결과 연정결성에 동의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무력으로 집권한 훈센이 법적 정통성이 부여된 명실상부한 캄보디아 지도자가 되었으나, 연정구성을 전후하여 의견이 갈라진 FUNCINPEC내의 갈등(연립으로라도 권력을 분점하자는 실리파(온건파)와 CPP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연정구성 이후에도 강경파는 계속하여 권력분점방식에 반발하고 있다)과 CPP내에 잔존하는 반훈센 세력이 연정을 위협하고 있는 입장이라 "불안한 동거"라고 비유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세안은 캄보디아의 연정이 안정될 때까지 캄보디아의 아세안 가입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였다. (1999년 4월 30일 가입함) 아직도 세계의 최빈국인 캄보디아에 대하여 캄보디아자문그룹회의(CGMC)는 1999년2월 캄보디아가 빈민구제를 적극 실천하고 숲 관리를 개선하는 국가발전계획을 실천한다면 4억 5천만 달러의 지원을 제시하였으며, 일본도 군사조직의 무장해제와 부패척결, 불법벌목 중단 등 시급한 현안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개혁을 위해 한층 더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크메르루즈군은 1996년 이엥 싸리의 투항에 이어 1998년 4월 15일에 폴 폿트가 밀림의 오두막에서 쓸쓸히 임종을 거둔 후 정부군에 투항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소멸 직전의 상래에 이르고 있다. 1998년 12월에 크메르루즈 지도자 켐 누온은 정부군과 협상 끝에 전면투항 및 보유무기반납을 합의하였고, 5,000여명이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키우 쌈판과 누온 체아(급진적인 모택동주의자)도 타 목(도살자라는 별명의 잔악한 인물)과 결별하고 "평화와 안정, 민족적 화해와 캄보디아 발전을 강화하기 의해", 그리고 "캄보디아 헌법과 캄보디아 왕권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1998년 12월 26일 정부군에 투항하였다. 농경낙원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서 170만-200만명에 달하는 인명학살에 대해 "sorry, very sorry"라고 사과했다. 이어 1999년 1월에는 타목 휘하의 2,600명이 그리고 2월 8일에는 잔류 크메르루즈 600명이 투항하였으며 타목도 3월에 체포되어 전범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잇달은 크메르루즈 지도자와 병사의 투항은 크메르루즈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아울러 연정구성에 이어 훈센 청권의 기반을 더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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