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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주거시엔셩 2013. 11. 17. 20:15


 

3.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Why did Jesus Die?)

요한복음 3:16


지난 모임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야 했을까? 하는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유 중에 가장 가슴에 남아 있어야 할 (예) 양치기 목자가 양의 소리를 듣기 위해 양의 가죽을 쓰고 양 무리 속에 들어가서 생활함으로서 양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각자 지닌 신음의 소리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소개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 태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계십니다.” 사람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장 무섭고 두렵고, 절망적일 때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야기 하려면 꼭 전해야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비디오 상영’

방금 비디오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33년간 사시면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딱 한 가지 일을 꼽으라면 “죽기 위하여 오신 겁니다”. 어떻게 죽으시기 위해 섭니까? 보신대로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목에 걸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도 살인죄인이나 법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도구이지요. 일명 ‘교수대’라고 합니다. 얼마나 혐오스럽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더 끔찍하고 혐오스런 십자가 사형도구를 아무렇지 않게 멋있는 장식품으로 목에 달고 다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목걸이는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는 사형도구입니다. 얼마 전에 노랑머리 물을 들이고 존심머리스타일이라나요. 이상한 복장을 아이들이 걸어오는 목에 치렁치렁한 목걸이를 달고 행복한 듯이 걸어 오고있었다. 나도 참 이상하지요 그런 아이들을 보면 말을 붙이고 싶어서 “애들아 목에 달고 다니는 것이 뭐냐? 몰라서 물어 본 것이 아니라. 모양세가 하도 이상해서 물어 보았더니 아저씨 멋있 잔아요 마돈나라는 가수도 달고나왔는데요. 참도 이상하다 개목거리 보다 더 비참한 것 인데, 멋보다 더 잔인하고 더욱 무시무시한 것을 목에 달고 다닐까?

우리가 정직하게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십자가 하나만 봐도 “우리는 뭔가 잘못 이해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담긴 진실 하나도 이해 못하고 살면서 인생을 가장 진실하고 진지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담긴 진실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쓰여 있고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뭘 어떻게 했다고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죽었다고 봅시다. 그런데 교수형 당해서 죽은 사람은 선전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고 평강이 있고 이 사람을 믿으면 인생이 달라지고 이 사람을 믿으면 삶이 달라진다고 선전하고 다닌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럴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걸이처럼 달고 있는 교수형의 사형도구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편한 사형도구라고 합니다. 인권국가인 미국에서도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전기의자에 앉혀서 고압의 전류를 흘려서 죽이든지 독극물을 몸에 주사해서 죽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왕이나 정부가 군대 힘으로 나라를 정복하고 철권과 같은 정치, 강압적인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들을 노예로 삼고 다스리기 위해서도 가장 잔인하고 끔찍스러운 사형방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자의 인권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라는 사형도구를 만들었는데 너무나 잔인해서 로마시민이 아닌 노예나 다른 이방 사람들에게 행해졌던 방법입니다. 보셨겠지만 좌우 손에 커다란 못을 박습니다. 다리를 포개어 가지고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체중에 의해서 그 고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디마디가 부수어지는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가는 것이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집행자들은 사흘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비명의 소리, 잔인한 모습이 그 머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2천년 전 당시에도 그 집안 가족 가운데 이런 사형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혼인 발을 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 사형도구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도구가 되었고 평화와 질서의 상징으로 사랑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적십자 회비를 내시지요? 병원표시나 녹십자, 예배당 모습에 크고 작은 십자가가 매달려 있습니다. 사랑, 화해, 용서, 봉사. 희생 모두가 이런 기관들이 십자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전쟁의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적십자기와 그런 수용소에는 폭격과 총을 쏘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바로 알려면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교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 속에는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사건을 상세하기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동안 이 십자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서 사랑의 상징자, 평화의 상징자, 화해의 상징자, 용서의 상징자, 희망의 상징자로 역사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므로 역사가 바꿔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인 희망과 사랑의 상징인 도구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실력, 학력, 출세, 돈입니까?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요즈음 입시철이 되어서 수능 대비 시험을 치고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 투신자살하는 청소년이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실력, 성적이 비참하게 만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못한 학생들도 대학에 들어가서 세상을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정말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아이고~ 좋은 밥 먹여놓고 재미있는 노래 부르다가 골치 아픈 이야기 하시려고 합니까?”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 아픈 이야기라도 한번은 꼭 들으셔야 합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저는요. 죄 안 짓고 법 없어도 사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내가 죄 지었다면 교도소에 앉아있지 여기에는 뭐 하러 나왔겠어요. 내가 교회 싫어하는 이유가 교회만 가면 죄 죄 죄 그것이 싫어 안다녔는데 여기서 죄 이야기 합니까?” 그러실 줄 압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정말 죄 안 짓고 사셨습니까? 아무리 진실하게 살았더라도 “거짓말” 한번도 안 하셨습니까? 나쁜 생각을 한번도 안 해 보셨어요? “목사님, 한 두 번은 짓는데 속으로만 했는데요.” 제가 그냥 속된 말로 하겠습니다. “지린 것은 똥 아닙니까? 지린 것도 똥이지요.” 속으로 했던 겉으로 했던 모두가 죄는 죄입니다.

제가 어느날 급한 강의 때문에 과속과 신호위반을 하다가 교통순경에게 딱 걸렸습니다.  사정을 했다. 나중에는 나 목사인데 실수로 사정이 그러니 까 한번 만 봐달라고 사정을 했는 데 어떻게 �을까요?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듭디다. 봐줄 듯 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묻습디다. 목사님이라는데 어떻게할까?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듭는 것은 죄입디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가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부끄러움이 없었느냐 그 말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죄는 단 한번 지어도 죄인데 그런 죄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죄는 인생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첫째가 : 죄는 오염되어 갑니다.

한번 짓는 죄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죄를 이어갑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책 가운데 “젊은 날의 노트”라는 정무심이라는 분이 쓴 책에서 잊지 못할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 거짓말하고 그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10배의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한 번의 조는 시간이 지나면 10배의 효력을 나타난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쓰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할께요. 이 앞에선 목사가 전과자라면 놀라시겠지요? “사실 저는 전과자입니다.” 왜 얼굴이 변하십니까? 전과자라니까요. 요사이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만 어떤 때는 한번에 두세 건씩 교통법규 딱지가 날아옵니다. 차 운전을 하다가 벌금 한번 물면 벌점이 올라가고 교통법규 범칙자라고 전과가 기록됩니다. 그래서 경찰청에 가서 저의 신원을 조회하면 말소된 기록까지 다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정말 죄가 없다고 말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죄가 있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합니다. 내가 못한다면 누군가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번째 : 죄는 이렇게 오염되고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내 삶에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운전 중 휴대폰을 경찰관 앞에서 들었다는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죄는 죽음입니다. 죄 짓는 자마다 그 죄 때문에 죽습니다. 교회 안 다니시는 분들도 들어서 아십니다. “선악과”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먹어도 안 죽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지 마귀의 말을 들어야할지 생각하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안 죽었어요’ 현실에서 볼 때 안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꽃이 뿌리에 붙어 있을 때는 살았지만 잘라서 화병이나 장식품에 꼽아 놓았을 때는 죽은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를 분리한 것입니다. 숨이 딱 넘어가서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과 분리된 것이 죽음입니다.

옛날 어렸을 때 동네에서 ‘죽은 사람 집에서 혼불이 나간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인간의 육신의 죽음이 무엇입니까? 호흡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아담은 딴소리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어디 숨었는지 모르실리 없었지요. 아담아 아담아 어디 있느냐? 그렇게 찾으시는 이유는 몰랐어요. 하나님과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죽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기 앉아 있는 분들 중에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능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인정을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서요, 인정하면 뭔가 불편할 것 같아서요, 또 나를 벌하시고 책망할 것 같아서요, 아니면 뭔가 큰 책임져야할 무거운 짐 때문입니까? 죄가 무슨 권세냐고요. 죄는 힘이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누르는 힘이 있습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저희 동네 저보다 3~5살 위에 있는 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선친이 전주연초 제조창에 근무하셨는데 저희 집에는 그때 잘 보이지 않는 필터가 달려있는 고급스런 담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형뻘 되는 동네 형들이 아버지 문갑에서 담배 몇 개피를 가져오라고 시켰어요. 얼마나 무섭고 떨렸는지 몰랐어요. 그걸 훔쳐다 갖다 주고 호기심에 한 대 피워봤어요. 저에게 호기심을 이용해서 담배 피우게 하고 그때부터 그 형들은 그 담배 맛이 좋으니까 자꾸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부모, 형에게 일러준다고 해서 그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하도 괴로워 형님께 이야기했더니 괜찮다고 하면서 이제는 형님이 협박하는 거예요. 물 떠오라면 물 떠다주고 밤중인데도 뭘 사오라면 사다주었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세 번째 : 죄가 무엇일까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일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운전 중 핸드폰을 사용하면 벌금 6만원에 벌점 15점을 받아야 합니다. 지도에 목회하신 친구 목사님 모친이 상을 당하여 무안 삼거리 검문소 앞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핸드폰 벨이 울려 무심코 핸드폰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상관이 없는 잘못 걸려진 전화였습니다. 검문하는 경찰관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경찰관은 당연히 면허증 제시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황당하여 경찰관에게 따졌습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전화인데 벌금을 내야 됩니까? 라고 실랑이를 하다 결국에 교통위반이라는 딱지를 떼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잘못 걸려진 전화라고 할지라도 운전 중 핸드폰을 드는 순간에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죠. 잘못이라고 아무리 변명하지만 우리는 죄에 속았을 뿐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변명하고 죄를 숨긴다고 죄의 현실은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죄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흥부와 놀부전을 읽어보셔서 잘 알고 계시겠죠? 흥부가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 부자 집 매 품을 벌어서 가난을 면한 것처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내 대신 몸을 십자가에 감당하시고 내 죄의 고통을 대신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목마름에 목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엘리 사박다니”-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의 더러운 죄 때문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고 더러워 의로우신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셨을 때 부르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내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시고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선언적 외침도 들어있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렇게 이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첫째로 용서받았습니다. 내 죄과가 그대로 있지만 세상 만물을 지배하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 값을 대신하여 가져갔으므로 칭의를 인정하셨습니다.

두 번째 몸값입니다. 종으로 팔려간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죄의 종으로 팔려갔으나 예수님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함과 죄에서 해방되는 복음 주셨습니다.

셋째로 죄의 씻음입니다. 우리는 죄 된 세상에 살면서 엉망진창이 된 더러움의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환해요.

네 번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깨어진 관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지는 하나님과 나, 나와 하나님을 이어줬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이 아니라 모든 원수를 친구로 옛 사람(아담이 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새 사람으로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69만 볼트 전기가 있어도 전깃줄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전기의 동력을 얻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다면 생명의 빛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싶어도 환경에 의하여 추해집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서 십자가를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을 수 있게 됩니다. 지워버릴 수 없는 내 죄의 문제를 지워 주셨습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시기만 하면 이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여러분의 사건이 됩니다.

 

출처 : 여기 있습니다.
글쓴이 : RU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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