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듣기,준비,읽기

[스크랩]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자가 되자 (수요예배 20130724)

주거시엔셩 2013. 8. 5. 22:38

성경말씀: 누가복음 15: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설교: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가 되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다 허비합니다. 모든 것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한 그의 처지는 돼지에게 먹이로 주는 쥐엄 열매까지 먹으려고 하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됩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모습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떠나 허랑방탕한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시면서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25절~28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 아들이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여기서 "풍류"라는 말은 "쉼프호니아"라는 말로 "심포니"의 어원입니다. 즉, 이 말은 지금 벌어지는 잔치는 시골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벌어진 단순한 동네잔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향악단과 화려한 무용수들이 동원된 커다란 잔치입니다.

그러면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 이 잔치의 이유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종을 부릅니다. 그리고 지금 집에서 벌어진 큰 잔치가 벌어진 이유를 묻습니다. 그 물음에 종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동생이 무사히 건강하게 다시 돌아와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의 말을 들은 큰 아들은 분노했습니다. 감정이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꾹꾹 눌러두었던 화들을 이 순간에 쏟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섭섭하고 억울해서 이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큰 아들을 본 아버지가 친히 나와 달랩니다. 그런 아버지께 이 아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토로합니다.

 

29~30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왜 큰 아들이 화가 났을까요? 집 나간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인가요? 단지 말썽꾸러기 동생만 위한다고요?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12절에 이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나옵니다. 즉, 이 말은 둘째 아들만 재산을 받은 것이 아니라, 큰 아들도 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25절을 보면,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는 표현을 보면, 이 큰 아들도 자신에게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질투와 분노가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를 위해, 하고 싶은 것도 참고, 아버지를 위해 애를 쓰고 일하였는데도 그 보이는 어떤 칭찬이나 어떤 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썽꾸러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준 재산도 다 없애버리고 몰골이 아주 우습게 돌아왔습니다. 그런 아들에게는 야단치고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할망정 동네잔치도 아닌 나라가 떠들썩할만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성실히 아버지가 준 땅을 아버지 곁에서 잘 가꾸고 잘 키워가고 있었단 말입니다. 동생처럼 마음대로 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아버지께 순종하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인내하며 아버지 곁에서 있었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탕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 화가 폭발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신앙생활하면서 이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갖을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우리가 웃으면서 그런 말을 종종 합니다. “처음 하나님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제일 잘 들어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생활도 하나님 말씀따라 살려고 하고, 믿음이 깊어지면, 세상에서 살기는 힘들어지고, 거룩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더디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실 때가 더 많아집니다. 그럴 때마다 힘들고 지치고 속상합니다. 솔직히 정말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 너무나 공평하지 않으신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려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얼마나 손해를 많이 봅니까? 그런 우리의 속사정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하나님께서는 방치해 두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큰 아들의 문제가 보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보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나 집 안에서 수고로이 애 쓰는 큰 아들이나 다 똑같이 사랑합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집 안에서 함께 살았던 큰 아들에게 더 사랑을 주고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함께 있었으므로 큰 아들은 그 동생과 같이 인생의 험한 순간을 겪지 않아도 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므로 둘째 아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하는 마음과 동생에 대한 질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이 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동생에 대해 갖았어야 했습니다. 왜입니까?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 당시 여기서 말하는 큰 아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비유가운데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미움을 받던 세리들과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신앙적으로 실족하거나 무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말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은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날마다 마을 앞에 나와 아들을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던 날 달려가 방탕했으나 돌아온 아들을 껴안아 주시고, 옷을 입히시고, 반지를 끼우시고, 신발을 신기고, 커다란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질투는 커녕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동생이 다시 가족의 품에 돌아온 것을 앞장서서 그 누구보다 기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초청에 맏아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마땅했겠습니까? “이에 맏아들이 돌이키고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니 모두가 즐거워하더라.” 이와 같이 오늘의 비유가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겟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늘의 비유를 그와 같이 끝맺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반대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맏아들은 더욱 노하여 나무를 들어 아버지를 때려 죽이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구원은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우리를 품어주시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겸손히 그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만약에 이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늘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며 늘 순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하나님과 늘 함께 거하는 자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세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롭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마음을 잘 알고 따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 받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열 방 교 회
글쓴이 : 열 방 교 회 원글보기
메모 :